지난주에 나온 내털리 데이비스의 <책략가의 여행: 여러 세계를 넘나든 한 16세기 무슬림의 삶 >(푸른역사, 2010)에 이어서 이번주에도 화제의 책은 16세기를 다루고 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 뤼시엥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문학과지성사, 1996)까지 '16세기 3종 세트'로 묶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아,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을 다룬 <치즈와 구더기>를 포함하여 미시사 책들이 몇 권 더 있긴 하다). <16세기 문화혁명>은 두툼한 분량의 무게감 그대로 '눈부신 역저'라 불릴 만한데(나는 내주에나 좀 읽어볼 참이다) 일단은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3. 06) 과학혁명 디딤돌 놓은 16세기 장인과 기능공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수년전 발언을 떠올려 본다. 당시 ‘천재경영론’으로 명명되면서 널리 회자됐던 발언에 깔린 지극히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사실 뿌리가 깊고 지배하는 영역도 넓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소수의 천재들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근대과학의 역사 역시 갈릴레이, 뉴턴, 케플러, 베이컨 등 걸출한 천재들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은 17세기 유럽에서 살았다. 그래서 17세기를 과학혁명의 세기라고 부른다. 전작 <과학의 탄생>(일본 제목은 ‘자력과 중력의 발견’)으로 찬사를 받았던 지은이는 후속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17세기 과학혁명 이전에 초점을 맞췄다. 17세기 천재들의 업적에 가려 조명을 받지 못했던 16세기의 장인·기능공 등 ‘민중’들이다.

 

거칠게 말해 중세과학과 근대과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머리와 몸으로 대비된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시대 학자들은 실험 등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를 머리로 탐구하는 것만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봤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상아탑에 갇힌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고전에 나오는 인체의 구조나 생명의 원리 등 이론만 외우고 읊조렸을 뿐이다. 실제 수술이나 조제를 하는 사람들은 천대받았다.

그러나 16세기 장인·기능공들은 ‘고귀한 언어’ 라틴어와 고전은 배운 적 없었지만 몸을 움직여 현장에서 체득한 지식을 축적하고 스스로 느낀 궁금증을 실험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틴어가 아닌 속어(고국언어)로 글을 썼다. 당시 유럽에서 융성한 목판 인쇄술은 미술, 건축, 의학, 군사학, 기계학, 천문학, 지리학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문화혁명’을 전파했고 후세가 이를 확인할 좁다란 통로를 남겼다.

물론 이들에게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실험을 통해 비교하고 검증하고 자신의 가설을 입증시켰지만 근대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받는 ‘이론화’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반면 17세기 학자들은 이들이 멈춘 곳에서 출발했다. 앞서 기능공들을 업신여기던 아카데미즘이 아카데미 바깥에서 이룩된 지식과 방법론을 재빨리 흡수해 이론화함으로써 과실을 따먹었다는 것이다. 

 

천재와 영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라 하더라도 받아줄 대지가 없었더라면 천재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지은이가 말하고자 한 것도 이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의 잊혀졌던 방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민중들의 르네상스’를 온전히 복원시켰다. 르네상스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유럽 문명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이 책은 ‘명저’의 대접을 받을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김재중기자)  

10. 03. 05.  

P.S. 최근 일본소설들이 다시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번주에는 인문교양서에도 '일본책'이 여럿이다. '일본류'라 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도서출판b, 2010)이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네번째 책으로 출간됐다(전체 일곱 권 가운데, 이제 두 권을 남겨놓고 있다. 나머지 한 권은 <근대문학의 종언>). 

    

지난 2007년 첫 권이 나온 이래 해마다 한권씩 나오고 있는 페이스인데, 짐작엔 올해는 한 권 정도 더 나올 듯싶다. 그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이 컬렉션 '전담역자' 조영일씨의 번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나온 민음사판의 역자 박유하씨가 이 '개정 정본판'의 번역을 다시 맡았고, 가라타니의 수정판을 "예전 번역을 일일이 대조하고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한일병합 100년을 맞는 해이라 그 의미가 더 도드라진다. 가라타니 컬렉터인 나로선 바로 손에 들 수밖에 없는 책.  

그리고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와 일본의 재독 '경계인' 다와다 요코가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경계에서 춤추다>(창비, 2010)도 눈에 띄는 책이다. 두 사람이 2007년에 잡지 <세카이(世界)>에 열가지 주제를 놓고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간단한 소개기사는 이렇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깊고 넓은 안목으로 디아스포라(이산·離散)를 천착한 글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저술가다. 다와다 요코는 1982년부터 독일에서 살며 일본어와 독일어로 다양한 글을 발표해 많은 상을 받은 소설가다. 그의 글이 한국에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둘은 ‘경계인’으로서 다중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력이 다른 만큼 사유와 글쓰기 방식도 다르다. 서경식 교수는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사고방식이나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방식이 세로방향이 되는 경향, 그것도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향해가서 구멍을 파는 경향이 있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로방향으로 열어간다. ‘모으기’에 응하는 ‘흩어놓기’라고나 할까.” 뿌리를 파고드는 서경식의 글이 깊은 가을 밤 비에 흠뻑 젖은 듯한 스산함을 일깨워준다면, 맺힌 것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다와다 요코의 글은 신록으로 내닫는 해사함이 있다. 집·이름·고향에 대한 ‘두 사람’의 상념이 빚어내는 차이의 무늬는 아름다우면서도 아프게 시리다.(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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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15 17:36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을 다루고 있다. 이미 일간지 리뷰들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책이지만, 초점을 조금 달리하여 한번 더 언급하게 됐다. 대단한 역작이어서 제쳐놓기가 어려웠다.    한겨레21(10. 03. 22)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2010-03-06 0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6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3-06 11:22   좋아요 0 | URL
아직 완독하지 못한 구판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신판을 구매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드네요^^ 강한 구매 충동을 느끼면서도, 언제 읽으려나 하는 현실론이 가로막는 군요^^

로쟈 2010-03-07 09:38   좋아요 0 | URL
새로 들어간 글들도 있어서 저자의 '확정본'이기도 해서 무시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귀가길에 서점에 들렀지만 구하지 못한 책의 하나는 막스 베버에 관한 비판적 입문서로 출간된 키어러 앨런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삼인, 2010)이다. (뒷담화들 덕분에) 입문서 가운데에서는 가장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이다. 올해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새 번역본이 나올 예정인데, 뒤르켐, 마르크스와 함께 고전사회학의 3대 창시자로 불리는 베버에 대해서 본격적인 재평가의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듯싶다.      

세계일보(10. 02. 27) ‘막스 베버’ 키드에게 보내는 편지 

먼저 상상을 해보자. 만일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는 사람이 큰 사고를 치거나 엄청난 위선자로 밝혀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은가.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하거나 외면하거나 침묵할 것이다. 물론 정치적, 혹은 종교적 추종자라면 그래도 맹목적으로 옹호할 수도 있다. 이번 주에 번역돼 나온 키어런 앨런 아일랜드 더블린대학 사회학과 교수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박인용 옮김, 삼인)을 보면 딱 그런 상황에 빠진다.

막스 베버가 누군가. 고전 사회학의 초석을 다진 거두로 역작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자본주의 발전에서 청교도주의가 행한 역할을 탁월하게 밝힌 학자, 사회학 방법론과 정치 카리스마에 대한 정교한 논의로 후대 사회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 현대사회의 관료제 문제에 대한 냉정한 분석으로 위상이 퇴락한 마르크스를 대신해 오늘날 더욱 각광을 받는 학자가 아닌가.

저자는 책의 부제로 ‘독일의 승리를 꿈꾼 극우 제국주의자’라고 달았다. 저자에 의하면 고매하고 점잖을 것만 같은 베버는 “이 전쟁은 지도의 변화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명예를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 전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독일이 필요로 한 것은 쉽사리 절망에 빠지기 쉬운 수사적 호언장담이 아니라 분명한 전략적 목표”라며 제1차 세계대전을 찬양하고 동양인과 흑인을 덜 떨어진 인종이라고 비웃었으며, 히틀러 못지않게 게르만의 영광을 꿈꾼 제국주의자였다는 것이다. 베버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문화가 없으며, 식민지배를 받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봤다.

이쯤 해도 입이 떡 벌어지고, 머리를 저을 것이다. 그럴 리가…, 하면서 말이다. 나아가 베버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독일제국과 게르만민족의 패권을 내세우는 민족주의자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심지어 준(準)군사 전략가로 중부와 동부 유럽을 독일의 패권 아래 두면서 영국과는 협정을 맺고 벨기에는 볼모로 활용하면서, 주된 적국인 러시아에 대항할 것을 주장했고 ▲패전의 기운이 역력한데도 끊임없는 전국적 게릴라전을 역설했으며 ▲관료제와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며, 우매한 대중은 오직 카리스마적 지도자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관료주의 문제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관주의적 전망을, 민족주의적 카리스마에 대한 호소로 돌파하려 한 대목에선, 나치 파시즘과 히틀러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의회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 제도에 불신을 드러내기도 한 베버는 또한 학문 연구의 궁극적 목표를 “독일의 정치교육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저자는 베버가 말하는 정치교육이란 “독일제국을 이끌어 나갈 사명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정치에 학문이 종속된다고 본 셈이다. 이는 분명 존경받을 학자의 태도는 아니다. 베버의 명성과 진실을 다시금 재고해야만 하는 이유다.(조정진 기자) 

10. 0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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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2-28 09:08   좋아요 0 | URL
<막스 베버 이사람을 보라>와 비교 독해가 필요할 것 같네요. 아울러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참고는 막스 베버 본인의 글들이겠지만. 이른바 3대 고전 사회학자 중 맑스를 제외하곤 뒤르켐, 베버 모두 체계적이고 권위있는 한국어 번역이 없는 지라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사람에겐 다양한 측면이 있어서 일면적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많은 한계가 따르는 것 같습니다. 결국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구체적인 이해는 독자의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겠지요...

로쟈 2010-02-28 12:50   좋아요 0 | URL
베버 전공자라면 다 알 만한 내용일 텐데, '베버리언'들은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람 2010-02-28 11:15   좋아요 0 | URL
재미있을 것 같네요. 하긴 보수인 그가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일 여지는 다분히 있었겠지요.
그것이 일정 선을 넘어서면 위험하지만.
그 시절 엘리트 백인의 시각에서 흑인과 동양인에 대한 편견도 일면 이해가 갑니다.
지금 이런 얘기하면 완전 또라이 얘기 듣겠지만, 하지만
아직도 백인들 뇌 속엔 이런 생각 많이 남아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시절 교수인선에서 보인 그의 행동
(대학은 좌우파교수가 모두 필요하다며 좌파교수를 지지한 면)은 참 좋게 보였는데...

한 사람의 여러 모습을 보는 것은 대상을 입체적으로 보는 기쁨을 주겠죠.
저도 구입하여 읽어 볼 생각입니다.

로쟈 2010-02-28 12:51   좋아요 0 | URL
네, 다양한 시각이 '입체감'을 부여해주죠...

노이에자이트 2010-02-28 21:09   좋아요 0 | URL
베버가 제국주의의 옹호자라는 사실은 이미 80년대에 번역된 소련에서 나온 세계철학사 전 10권(중원문화사 번역) 중 제 9권에 나와 있었습니다.이 책에선 아예 베버의 가치자유의 개념을 사회과학에서의 매춘이라고 해버렸더군요.

로쟈 2010-03-01 23:25   좋아요 0 | URL
재간된 세계철학사는 너무 비싸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10-03-02 16:58   좋아요 0 | URL
중원은 재간했다 하면 너무 비싸게 오르죠.내용은 똑같으면서...헌책방에서 산 게 다행이에요.헤겔이나 마르크스 철학(소비에트 철학 포함)좋은 걸 꽤 많이 번역한 출판사지요.

푸른바다 2010-03-01 00:22   좋아요 0 | URL
아마 베버에게 그러한 측면들이 분명히 강하게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는 분명 서구 중심주의자였고 서구의 장점과 그 기원을 밝히는 데 그의 학문적 이력을 바쳤던 사람입니다. 그의 방대한 종교사회학적 연구도 서구의 상대적인 우수성을 밝히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로쟈님이 말했던 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것이지요. 그를 제국주의자라거나 서구중심주의자라고 비판하는 건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막스 베버가 동양 사회에 대한 아마추어적인 지식을 가지고 구성한 내용을 아직도 제대로 논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는 서양중심주의에 대해 동양중심주의로 맞서자는 것도 아니요 서양 중심주의를 근본적으로 초극하는 내용이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는 아직 텅빈 기표일 뿐 아직 제대로 내용을 갖추고 있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근대 사회, 관료제, 리더십, 정치 학문 등등에 대한 통찰은 분명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단순히 제국주의자로 규정하는 건 그를 단순히 정신병자(베버의 사이콜로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요)로 규정하는 것 만큼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로쟈 2010-03-01 23:26   좋아요 0 | URL
네, 목욕물과 함께 다 갖다 버릴 건 아니고, 갖다 쓸 건 갖다 써야겠죠...

노이에자이트 2010-03-01 15:07   좋아요 0 | URL
푸른바다 님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습니다.근대를 어떻게 넘어야 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지요.넘어서려면 기존의 사회과학의 고전에 대한 소화가 필요하지만 이것도 어렵고요.

로쟈 2010-03-01 23:27   좋아요 0 | URL
원초적으로 가능한지, 얼마나 가능한지 의문이기도 하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3-02 16:59   좋아요 0 | URL
요즘은 우리나라도 근대성에 대한 탐구를 꽤 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어제는 '그 겨울의 끝'이라고 할 만한 날씨였다. 연체된 책들을 잔뜩 양손에 들고 가 도서관에 반납한 후에 다시 강의와 관련한 책들을 가득 담아 나르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는데, 돌아오는 좌석버스 안에서 잠시 에어컨이 틀어질 정도였다(만원 버스이긴 했다). 겨우내 마무리짓지 못한 일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지만 만시지탄이다. 남은 10개월을 위해 구두끈을 조일 따름(일에 관한 한 아마도 가장 바쁘고 중요한 해가 될 듯싶다). 주말엔 연체된 일들 외에도 나쓰메 소세키와 셰익스피어와 소비사회에 관한 강의준비를 해야 한다. 소비사회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윤리적 소비'에 관한 책 두 권의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전/현직 기자들이 쓴 <윤리적 소비>(메디치, 2010)와 농사꾼 철학자 천규석의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윤리에 대한 의견차가 눈길을 끈다.   

서울신문(10. 02. 27) 쇼핑몰은 중산층의 새로운 ‘성당’

대형마트들이 가격 경쟁을 벌인다. 이른바 마트 전쟁이다. 소비자라면 당연히 보다 싼 가격에 눈길이 가기 마련. 그런데 소비자에게 이로울 것 같은 마트 전쟁이 납품업체의 큰 피해를 부른다면? 축구공 한번 야무지다. 세계적인 브랜드치곤 싸다. 어린이들이 형편 없는 일당을 받고 하루종일 손이 부르트도록 바느질을 해서 만든 것이라면? 겨울철에 먹는 칠레산 포도. 맛도 나쁘지 않다. 한국까지 오는 동안 냉장 보관을 위해 수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했다면?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 내 피부에 딱 맞는 것 같다. 사람 눈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토끼를 상대로 실험을 했다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우리의 선택은 달라졌을까.  

우리는 배웠다. 가격과 품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소의 비용으로 가장 만족도가 큰 제품을 선택하라고. 그게 합리적인 소비다. 그런데 이제 합리적인 소비를 뛰어넘어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를 논하는 시대가 왔다. 생산에서부터 유통, 소비는 물론 이후 처리와 재생에 이르기까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지갑을 열라는 것이다.  

도대체 왜? 합리적인 소비는 동물과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환경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착한 소비는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드는 것처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소비는 단순하게 개개인의 착한 소비 생활에 그치는 게 아니라 기업에 윤리적인 변화와 행동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사회 참여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 아동 노동력을 쓰던 나이키도 전세계 소비자들의 압박에 무릎을 꿇고 노동자 연령을 18세 이상으로 제한하고 하청 업체에 대한 감독권을 강화하지 않았던가.  

전·현직 기자들이 함께 쓴 ‘윤리적 소비’(박지희·김유진 지음, 메디치 펴냄)는 새로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윤리적 소비에 대한 개념과 역사, 현재와 미래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공정 무역에서부터 공정 여행까지 우리 삶에 폭넓게 파고든 윤리적 소비를 접해볼 수 있다.

저자들은 세계적인 흐름에 견줘 국내 상황도 짚어보며 소비가 더이상 개인의 행복을 지키는 도구가 아니라 사회의 안녕을 지키는 도구로 바뀌어가고 있고, 더이상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들이 인용한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쇼핑에 도덕성이 개입되고 있다. 쇼핑몰은 중산층의 새로운 ‘성당’이다. 쇼핑객들의 새로운 종교는 윤리로 무장한 소비자 보호 운동으로 나타나고 있다.”(홍지민기자)   

시사IN(10. 02. 25) 공정무역 실체는 역겨운 장삿속

<녹색평론> 같은 매체를 통해서 천규석 선생의 글을 간간이 읽어온 터이지만, 눈썹에 힘을 주고 저서를 정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자의 강단 있는 언어와 추상같은 비판, 현실과 미래의 문명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책이다.

이 책에서 제기되는 불편한 진실 가운데 역시 논란이 되는 것은 공정무역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생산자에게 더 많은 이익을 주기 위해 소비자와의 국제적인 직거래를 통해 커피나 초콜릿 같은 기호식품을 소비하는 공정무역 운동이 우리 사회에도 퍽 낯익은 것이 되었다. 언뜻 생각해보면, 오로지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해 제3세계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다국적 기업의 커피나 설탕산업에 비해, 공정무역의 형태로 생산자의 소득을 더 많이 보전해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도 여러 형태의 시민단체나 생협을 중심으로 공정무역 상품이란 것이 출시되고, 윤리적 소비를 의식하는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있다.

그런데 천규석 선생은 그런 공정무역의 확산이 전혀 윤리적인 소비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공정무역이란 결과적으로 보면 히말라야 오지의 산악국가까지 (자급 대신) 세계시장에 예속시키는 데 일조하는데 그런 장삿속을 인도적 지원으로 위장하고 있기 때문에 더 역겹다는 것이다. 천규석 선생은 다른 제조업도 그러하지만, 커피나 사탕수수 같은 대규모 단작농업에 의존하는 기호식품 생산이 유럽의 식민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고, 그것이 결국 토착 지역의 자급 구조를 붕괴해 오늘과 같은 수탈적인 경제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일단 토착 지역의 자급자족구조를 복원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 동시에 국내의 시민단체나 생협이 공정무역에 앞장서기보다는 도농 간의 농산물 직거래라는 원래 취지를 상기함으로써, 농업의 자급구조를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의 도농 직거래가 원거리 거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생은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지역의 마을공동체 또는 농촌공동체와 노동조합들이 노·농연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최근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에서 시작한 노동자 생협이 그러한 모델에 해당될 것이다.  



자급자족은 ‘민중의 자치’ 가능케 하는 토대
선생은 최선의 윤리적 소비는 자급자족을 촉진하는 소비이며, 자급자족 구조의 내실화만이 생태적 지속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자급자족이 단지 먹을거리 문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자급자족은 민중의 자치를 가능케 하는 근원적 토대라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다. 거꾸로 오늘날의 세계분업적 무역체제나 그것을 뒷받침하는 국가라는 존재는 이 토대를 붕괴시킴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는 반인간적 체제라는 것이다.

천규석 선생이 책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다만 윤리적 소비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국가와 자본의 가공할 압력을 거슬러 민중이 스스로의 삶과 민주주의를 보존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이 책에는 거듭 제기된다. 혹자는 이 책에서 제기되는 주장들을 현실성 없는 ‘근본생태주의’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곰곰 읽어보면 백척간두에 선 문명의 임박한 파국에 대한 이유 있는 경고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이명원_문학 평론가)  

10. 02. 27.  

 

P.S.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에 관한 책들이 부쩍 늘어났는데, 이 또한 하나의 '트렌드'일까?    

도화선이 된 건 작년초 한겨레21의 기사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해본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카카오 농사를 짓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룬 '초콜릿은 천국의 맛이겠죠'란 표지기사였다(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24258.html). 공정무역이 어떤 것인가를 압축적으로 설명해주는 기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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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e 2010-02-27 01:32   좋아요 0 | URL
공정무역 좋아요, 라는 댓글을 달려고 생각했는데 두번째 기사를 보니 전혀 다른 견해가 새롭습니다.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그 두가지 모두 필요하지 않나 싶어요. 국내 문제도 많은데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는 뭐하러 돕나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사실 국내 농산물 직거래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보는데 제대로 된 채널을 마련하는게 급선문 같습니다. 얼마전 도서관에서 '처음 십 년'이라는 생태신문 창간호를 보았습니다. 거기서도 생협 얘기가 나왔는데 소비자가 쉽게 찾을 수 있는 매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창간호 특집 1면 기사는 성미산 마을극장 대표에 대한 인터뷰 기사였는데 읽으면서 아무래도 성미산 마을을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체 가이드도 있다고 하네요.

로쟈 2010-02-28 12:52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신문도 있군요.^^;

sophie 2010-03-01 01:39   좋아요 0 | URL
아.. 네.. 댓글이 좀 길었죠? ^^;;

노이에자이트 2010-02-27 21:09   좋아요 0 | URL
녹색평론에 실린 글이나 <유목주의~><소농버리고~>를 읽어봤는데 천규석 씨 글은 좋은 주장이구나 하다가도 너무 내치고 까는 글이라서 좀 읽기가...반대진영을 설득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막 찌르는 느낌...특히 명망있는 시민운동가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더라구요.물론 그것도 글쓰는 개성이라면 할말이 없겠습니다만...

로쟈 2010-02-28 12:52   좋아요 0 | URL
꼬장꼬장한 성격이신가 봅니다...

사량 2010-02-28 15:26   좋아요 0 | URL
천규덕 선생의 새 책에 대해선 몇 주 전 <한겨레>에 실린 서평도 한번 보세요. 더 자세하고 인터뷰까지 있어서 유용하답니다.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04523.html
 
후스-지셴린-정수일

작년에 세상을 떠난 중국의 석학 지셴린(계선림) 선생의 에세이집이 두 권 더 출간됐다. 며칠 전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인생>(멜론, 2010), <병상잡기>(뮤진트리,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우붕잡억>(미다스북스, 2004)이 품절상태라 현재 읽을 수 있는 건 <다 지나간다>(추수밭, 2009)까지 세  권이다. 노(老)석학의 담담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다. 관련서평을 찾아서 옮겨놓는다.   

시사IN(10. 02 18) 아흔여덟 어르신이 말하는 인생이란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전형적인 에세이집이다. 그러나 저자 지셴린(季羨林)은 결코 전형적이지 않다. 2009년 아흔여덟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중국인의 스승으로 널리 존경받았다. ‘나라의 큰 어르신’이라고나 할까. 독일에서 인도학과 고대 언어학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베이징 대학 교수, 중국과학원 철학사회과학부 위원, 베이징 대학 부총장 등을 지내면서 많은 연구 업적을 쌓았다.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인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사는가? 지셴린은 답한다.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는 인생에 대한 질문의 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와 가치는? 그의 대답은 확고하다. “인생에 정말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인간 사회가 앞으로 꾸준히 발전할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인생의 행운과 불행에 대해 물어보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행운과 불행은 서로 통한다. 행운이 찾아왔을 때는 불행이 올 것을 생각해 지나치게 기뻐하지 말라. 또 불행이 왔을 때는 행운이 찾아올 것을 생각해 지나치게 낙심하지 말라.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은 또한 장수의 비법이기도 하다.’ 문화대혁명 시기 지셴린은 오랜 기간 감금당한 상황에서 고대 산스크리트 서사시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이런 경험이 삶의 행·불행에 대한 달관과 평정심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사실 이 책에 실린 글의 내용 대부분은 평범하다면 평범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로도 보인다. 그러나 그 ‘아무나’가 다른 사람이 아닌 지셴린이기에 그 울림이 크고 깊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바른 삶의 태도로 장수한 어르신들은 그 연륜 자체가 요즘 말로 강한 ‘포스’를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 포스를 지닌 어르신을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고 보면, 평범한 이 책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을 바보로 여기는 진짜 바보는 요즘 들어 더욱 많아지고 있다. 스스로를 똑똑하다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도 바보가 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화목한 가정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니 세심하게 가꾸어야 한다. 가정이 화목해질 수 있는 방법은 정직과 인내뿐이다.” “다른 이의 존경을 받고 싶다면 당신에게 그럴 만한 자질이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그저 자기 나이만 믿고 유세를 부리면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의 글과 생각은 간단명료하고 솔직담백하다. 알싸한 고추냉이 맛이 아니라 담백한 나물 맛이다. 지셴린은 첫머리에 글의 주제, 소재, 때로는 일종의 결론까지 명료하게 제시하고 시작한다. “천하에 바보가 있을까? 있다.” “사람들은 모두 완벽한 인생을 추구한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뒤져보아도 100% 완벽한 인생이란 없다.” “두보는 그의 유명한 ‘곡강시’에서 ‘예로부터 일흔까지 사는 것은 드무노니’라고 읊었다.” 질문으로 시작하거나 확신에 찬 단정으로, 때로는 고전 인용으로 글의 방향을 확실하게 다잡고 시작하는 셈이다. 울림이 큰 글을 쓰는 데 효과적인 방안이라 하겠다.(표정훈_출판 평론가)  

10. 02. 21.   

P.S. 아흔 여덟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장수한 학자로 떠오르는 이는 일본 동양학의 태두로 불리는 모로하시 데쓰지(1883-1982)이다. <공자 노자 석가>란 책을 백세가 되던 해에 펴냈다는 석학이다. 원래 설 연휴 같은 때 펴보면 좋을 책들인데, 며칠 늦어지는 바람에 '뒷북'처럼 돼 버렸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석학 드미트리 리하초프에 대해서도 몇 자 적으려다가 다음 기회로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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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21 0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21 16:17   좋아요 0 | URL
로쟈 님.저 노학자 말마따나 나이를 내세워 유세 부리는 못난 어른만 아니라면 인생의 후배들에게 존경은 못받아도 최소한 욕은 안 얻어먹을 겁니다.그러기 위해서 저는 하루빨리 우리나라 학교에서 선후배 없이 친구처럼 지내는 관행이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2-24 22:52   좋아요 0 | URL
존대법이 있는 한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비로그인 2010-02-24 22:47   좋아요 0 | URL
노자님 마지막 문장에 동의 1표를 보냅니다.
그나저나 로쟈님 자서전(?)을 기다리는 광팬 1인이 책이 언제 나오냐고 묻더군요.

로쟈 2010-02-24 22:53   좋아요 0 | URL
편집자도 굉장히 궁금해해요.^^;
 

며칠 전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의 하나는 앤 노튼의 <정치, 문화, 인간을 움직이는 95개 테제>(앨피, 2010)이다. 일종의 '문화연구 해설집'이라고 소개되는데, 강의준비를 겸하여 읽어보려고 한다. 역자의 책소개 기사가 올라왔기에 먼저 챙겨놓는다.

서울신문(10. 02. 20) 정치는 문화이고, 문화는 곧 정치다  

‘정치, 문화, 인간을 움직이는 95개 테제’(앤 노튼 지음, 오문석 옮김, 앨피 펴냄)라니. 그런 게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의문부터 들 것이다. ‘테제’라는 말부터가 정치적인 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 책은, 실제로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정치학과 교수인 저자가 미국정치학회에 제출한 글에서 출발했다. 그렇다면 정치면 정치지, 왜 문화이고 인간이란 말까지 붙었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면 일단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정치는 곧 문화이고, 문화는 곧 정치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출판사에서 ‘인간’이란 인문학의 궁극적인 주제어를 첨가하긴 했지만, 원래 제목에도 정치(학)(politics)와 문화(culture)가 나란히 붙어 있다. 저자가 95개 테제 중 맨 처음에 제시한 것이 “문화는 매트릭스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매트릭스’는 어떠한 것도 고립된 채 존재하지 않는 의미와 관계의 ‘자궁’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문화를 어떤 상황의 가변적 요인, 즉 변수(變數)로 간주하는 것은 (의도적인) 무지의 산물이 된다.

왜 그러한가. 문화는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의 간격이며, 사람과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사이의 간격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이처럼 문화와 사람, 곧 우리 삶과 세계를 연결짓는 까닭은, 문화를 자꾸 우리 삶, 특히 정치와 구분지어 생각하려는 모종의 시도들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그 시도들은 자꾸 문화를 우리 삶과 정치와 분리하여 생각하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시도를 획책하는 특정 집단을 불러내어 그들의 의도를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들은 바로 미국의 학계,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주류 학자들이다. 저자는 오늘날 전 세계의 학문계를 선도하는 미국의 주류 학계에 팽배해 있는 ‘사이비’ 문화 연구 행태를 버리고, ‘문화 그 자체’로 문화 연구의 방향을 바로잡으라고 말한다. 미국 학계에 만연한 ‘과학적 연구’에 대한 광적인 ‘미신’이 참된 학문적 ‘신앙’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과학적 연구’가 학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면죄부처럼 남용되는 경향까지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정치, 문화, 인간을 움직이는 95개 테제’(원제 ‘95 Theses on Politics, Cultrue & Method’)가 되었다. 1517년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맞서 비텐베르크 성 정문에 못 박은 ‘95개조 항의문’처럼, 이 책은 문화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재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는 단순한 기호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나’란 존재와 그 주변을 촘촘히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자, 삶의 전제 조건이다. 지금 내가 쓰는 글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모두 2010년/대한민국/서울 혹은 강원도/사무실 혹은 집이라는 문화적 맥락에 위치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이 들 것이다.

‘대체 문화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 이 책의 95개 테제에 담겨 있다. 여기서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95개 주장들은 테제, 곧 실천을 전제로 한 ‘운동 강령’이라는 점이다.(오문석 조선대 국문과 교수·번역자) 

10. 0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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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0 22:30   좋아요 0 | URL
95개 테제들이 실천을 전제로 한 '운동강령'이라니... 정말 읽고 싶어지는 군요.

미래 작가를 지향하는 사람들로서는 더욱이...

비로그인 2010-02-20 22:29   좋아요 0 | URL
95개 테제중 이런 것들이 눈에 띄어서 이상스레 반가웠습니다.

82. 거짓말과 오류에도 의미가 있다.
86. 문화에는 다양한 시공간의 차원이 있다.
95. 이론은 특수자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