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북리뷰를 챙겨놓으려다가 그만둔 책은 레베카 크누스의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알마, 2010)이다. '책 학살'을 다룬 또 다른 책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아서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이 책에 대한 소개기사만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03. 20) 책, 이데올로기의 칼을 맞다

2008년 7월 한국 사회는 ‘국방부 불온서적’ 문제로 잠시 떠들썩했다. 당시 이상희 국방부 장관은 세계적 석학 노엄 촘스키의 저서를 비롯, 23종의 책을 불온서적으로 정하고 “군부대 내에 무단 반입된 불온서적을 적극 수거하라.”고 지시했다. 불온서적이 “장병의 정신전력에 저해요소가 된다.”는 이유였다.  
 
●나치, 도서관 책도 대량학살
이 사건은 불온서적들이 오히려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희극적인 결말로 끝이 났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진 책에 대한 탄압이라는 점에서 결코 웃어넘길 일만은 아니다. 신간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알마 펴냄)를 펴낸 레베카 크누스 하와이대학 문헌정보학과 교수가 봤다면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된 21세기 책학살”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크누스 교수는 책에 대한 탄압이 “한 집단의 역사적 연속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말살하는 행위”라고 본다. 그말대로라면 국방부 불온서적 사건은 “반정부·반미, 반자본주의, 북한찬양 정서 등을 가진 집단의 정체성을 국가적으로 말살”하려는 섬뜩한 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국방부 불온서적 사건은 크누스 교수가 ‘… 책을 학살하다’에서 보여주는 20세기 역사 속 책 학살에 견주면 ‘귀엽게 봐줄 만한 해프닝’이다. “책을 파괴해 정체성을 말살하자.”는 야만적인 기획은 똑같지만, 크누스 교수가 소개하는 책학살은 그 규모가 훨씬 크고 결과 역시 더 비참하다. 오죽하면 집단학살(genocide), 문화학살(ethnocide)과 비슷한 맥락으로 ‘책학살(libiricide)’이라는 조어를 썼겠는가. 거기다 크누스 교수가 소개하는 책학살들은 대부분 집단학살이나 문화학살이 함께 자행된 것들이라 서글픈 느낌을 더한다.

대표적인 예가 나치의 책학살. 집단학살이란 대범죄를 저지른 독일 나치는 책학살 분야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1930년대 정권을 잡은 나치는 독일 내 도서관에서 없애야 할 책의 ‘블랙리스트’와 갖춰야 할 책의 ‘화이트리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체검열을 통해 전체 도서의 76%를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 또 전쟁 중에는 영국 내 50여개 도서관을 폭격해 2000만권의 책을 없앴고, 폴란드에서는 학교와 공공도서관 장서 90%가량을 파괴했다.

●독재보다 잔인한 이데올로기 
이유는 간단했다. 적국의 경제 생산을 마비시키기 위해 공장을 폭격하듯, 문화 생산을 중지시키기 위해 책을 파괴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치는 끔찍한 인종말살의 전초전 또는 후환을 말끔히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파괴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는 주로 종교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거나 독재자의 힘의 표현에 그쳤다면, 20세기 책학살은 이데올로기의 옷을 입고 합법성과 사회적 승인으로 치장하고 있어 더 잔인하다고 크누스 교수는 봤다. 책은 나치와 함께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발칸반도에서, 이라크가 아랍지역에서, 중국 문화혁명기 홍위병들이 국내와 티베트에서 저지른 잔인한 책학살들을 다룬다. 역사학, 정치학, 심리학, 윤리학, 통신학, 문헌정보학, 국제관계학 등 다양한 분야들을 교차 비교해 자료를 해석했다.(강병철기자) 

10. 03. 22.  

P.S. 지난주에 마땅한 소개기사가 없어서 따로 언급하지 못한 책으론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의 기교>(역락, 2010)와 매튜 키이란의 <예술과 그 가치>(북코리아, 2010)도 있다. 그 자신 소설가이기도 한 문학이론가 로지의 책은 소설의 서두에서 결말까지를 50개 장으로 나누어, 각 주제별로 대가들의 솜씨를 소개하고 분석한다. 직접 소설을 쓰는 작가나 작가지망생들에겐 요긴한 매뉴얼이고, 일반독자들에게도 소설에 대한 안목을 키워줄 수 있는 흥미로운 교본이다. 프랜신 프로즈의 <소설, 어떻게 쓸 것인가>(민음사, 2009)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예술과 그 가치(Revealing Art)>는 미학이론서다. "저자 매튜 키이란은 예술이 어떻게 우리를 감동시키는지, 또 어떻게 역겹게 하는지, 예술적 판단은 단지 취향의 문제일 뿐인지, 그리고 만약 예술이 비도덕적이거나 외설적이라면 검열되어야 하는지 등을 분명하게 질문한다."는 소개대로, 미학 혹은 예술철학의 기본적인 질문들을 다룬다. 개인적으론 영미 예술철학계의 최근 동향이 궁금해서 구매한 책이다. 그러자면 후속작인 듯싶은 <예술과 그 인식(Knowing Art)>도 읽어봐야 하겠지만.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10-03-23 16:44   좋아요 0 | URL
나치는 음악 분야에도 학살까진 아니더라도 상당한 제한을 가했죠...유대인을 포함한, 국민성을 일깨울 수 있는 음악가들을 선정해서 금지 list를 발표하고 활동을 막았었답니다. 어떻게 보면 문화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했던 거겠죠^^ 언론, 정치인 뿐 아니라 문학, 음악, 모든 예술에까지 단속을 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로쟈 2010-03-28 09:46   좋아요 0 | URL
네, 보이지 않는 단도리는 요즘도 작동하는 듯해요...
 

이번주에는 눈길을 끄는 교양 교양과학서도 여럿 눈에 띈다. 그중에서 한권만 골라야 한다면, 영국의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의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승산, 2010). 대칭성과 방정식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수학책인데, 오래전에 나온 <자연의 수학적 본성>(동아출판사, 1996)을 떠올리게 한다(<자연의 수학적 본성>은 <자연의 패턴>(사이언스북스, 2005)로 재출간됐다). 고등학교 때 이런 책을 접했더라면 수학에 좀더 친근함을 느꼈을는지도 모르겠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3. 20) 나비도 방정식도 ‘대칭’이라 아름답다

팔랑거리는 나비가 아름답다면, 그 두 날개가 대칭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수식으로 채워진 방정식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등호’(‘=’·‘이퀄’)를 가운데에 두고 등가의 두 값이 팽팽히 긴장한 채 대칭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얼굴도, 인간의 몸도, 그 가운데를 위아래로 죽 내리긋는 선분을 상상할 때 좌우 대칭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완벽한 대칭이라는 견해도 있다. ‘대칭’(對稱·symmetry)은 ‘자기 닮음’이다. 이를 확장하면 ‘반복적 자기 닮음’이다. 인간은 대칭을 이룬 건물을 아름답다 느끼며, 자기 자신을 닮은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대칭은 아름답다’는 명제가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가 쓴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2007년)는 수학자들의 방정식 정복 과정을 톺아봄으로써 오늘날 물리학과 우주론을 구성하는 개념들 중 하나로 떠오른 ‘대칭’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글솜씨로 펼쳐놓는다. 자연의 패턴을 비롯한 대칭성 연구로 이름난 학자인 지은이는 수학에서 왜 아름다움은 반드시 참인지, 수학적 공식의 아름다움은 왜 자연과 우주의 아름다움에 곧장 맞닿아 있는지를 드러내 보인다.

방정식만 해도 시쳇말로 ‘해골이 복잡’해지는데, 알면 알수록 더 복잡한 ‘대칭’이론까지 알아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지은이의 말을 따르면 대칭이란 자연 혹은 우주, 곧 물리적 세계를 보는 심오한 방식인바, 그 길로 가는 초입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방정식이다.

먼 옛날 3000여년 전에 유프라테스 강가 바빌로니아 문명의 수학자들이 2차방정식을 푼 이래, 인류는 끈질기게 방정식을 발견하고 풀어왔다. 고대 그리스 기하학을 집대성한 유클리드의 가장 큰 업적은 수학적 증명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데 있다. 또한 유클리드는 증명이란 반드시, 이미 참으로 간주된 어떤 명제들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명제들은 증명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증명의 시작점은 증명되지 못한다는 ‘역설’이다. 중세 유럽의 암흑기엔 페르시아의 시인 우마르 하이얌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바탕으로 3차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했으며, 르네상스 수학자들은 3차와 4차방정식을 (증명은 못했지만) 풀어낸다.

인류의 방정식 정복의 여정은 그러나 5차방정식에서 멈추었다. 5차방정식은 250년 가까이 풀리지 않았다. 이 문제는 프랑스 대혁명기 급진 혁명사상가이자 결투를 벌이다 21살에 숨진 천재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1811~32)에 의해 비로소 ‘해결’됐다.

갈루아 이전에도 일부 5차방정식의 근(해)이 존재함은 알아냈는데, 문제는 ‘그 방정식의 근을 수학공식, 곧 대수(代數)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였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1828년 열일곱 살이던 갈루아는 어떤 5차방정식은 풀리는 데 반해 다른 5차방정식은 풀리지 않는다면 그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 ‘방정식이 지니는 대칭’에서 비롯됨을 발견했다. 요컨대 일반적인 5차방정식은 그것이 부적당한 종류의 대칭을 가졌기 때문에 근호(=루트)로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6차, 7차 등등 5차 이상의 방정식에서 다 적용된다. 이 해답이 수학과 물리학의 진로를 바꾸어놓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5차방정식을 풀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여 갈루아가 발견한 ‘대칭’으로부터 수학의 대확장이 시작된다.

갈루아에게서 시작되어 이후 더 촘촘해진 ‘대칭’이란 무엇인가. 대칭은 그 대상의 구조를 보존하는 변환이자 치환이며, 사물을 재배열하는 방식이다. 5차방정식은 풀 수 없다는 갈루아의 발견은 바로 ‘군’론(group theory)으로 나아간다. ‘군’은 대칭을 나타내는 언어다. 주어진 대상의 대칭들을 모두 뭉뚱그려 ‘군’이라 부른다. 대칭이란 아이디어는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의 창을 열었으니, 갈루아의 ‘군’론은 19세기 후반 들어 수학자 마리우스 솝후스 리가 생각해낸 연속적인 무한군, 곧 ‘리군’(Lie group)으로 발전한다. 이 ‘리군’이 현대 물리학의 화두인 시간, 공간, 물질의 심층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따라서 지은이는 ‘대칭’이 자연과 우주, 그 물리적 세계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만물 이론’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 곧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은 이론적으로 서로 충돌하는데, 이 두 체계를 넘어 시공간에 대한 새 이론을 세우는 데 ‘군’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두 이론을 통합하려 했던 아인슈타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역사학도 출신 물리학자 에드워드 위튼(59)은 리군의 대칭 개념을 발전시킨 초대칭 개념(=양자장론)을 통해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통일하는 과정은 그저 난해한 수학적 과제를 푸는 문제일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허미경 기자) 

10. 03. 19.  

P.S.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와 경합을 벌인 책은 후쿠오카 신이치의 <동적평형>(은행나무, 2010)이다. 저자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은행나무, 2008) 이후에 연이어 소개되고 있는 일본의 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다. 안드레스 에드워즈의 <지속가능성 혁명>(시스테마, 2010)과 함께 나중에 실물을 확인해봐야겠다. 일단은 소개기사를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0. 03. 20) 당신이 먹은 음식이 당신 몸의 분자가 된다

쇤하이머란 과학자가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동물의 소화과정을 보기 위해 단백질에 포함된 중질소에 표시를 한 뒤 쥐에게 먹였다. 중성자가 8개인 중질소는 양성자 7개, 중성자 7개로 된 일반 질소에 비해 미량으로 존재하지만 무거워서 질량분석계로 측정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쇤하이머는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돼 우리 몸을 움직이는 연료가 될 것이고, 중질소는 대부분 배설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험 결과는 의외였다. 배설된 투여량은 27%에 불과했고, 나머지 질소는 모두 몸속에 흡수됐던 것이다. 실험 결과는 우리 몸이 꾸준히 분해, 합성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새 손톱이 헌 손톱을 밀어내듯이 끊임없는 분자의 교환작용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 몸을 이루는 분자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먹는 음식이 바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작가 후쿠오카는 이런 의미에서 ‘생명이란 동적인 평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환경은 항상 우리 몸속을 관통하고 있고, 우리 몸도 환경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이 책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동적 평형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재를 예로 들어 쉽게 풀어준다. 이를테면 똑같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더라도 조금씩 나눠먹을 때보다 한 번에 많이 먹을 때 체중이 늘어나는 원인, 먹는 콜라겐이 피부 탄력에 효과를 줄 수 없는 이유,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흐르게 느껴지는가에 대한 과학적 견해, MSG가 들어간 음식을 왜 맛있다고 느끼는가에 대한 분석을 중학생 정도의 과학상식만 있으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한다. 눈여겨볼 것은 첨단 분야의 과학자인 작가가 심장은 펌프이고, 신체는 그 부속이라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생명관에 반대하는 것이다. 줄기세포를 배양해 우리 몸의 기관을 따로 만들어 불치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작가는 비판적이다. 생명을 기계론적으로 조작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바다 2010-03-20 10:26   좋아요 0 | URL
5차 방정식의 일반해가 불가함을 최초로 증명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아벨로 알고 있었는데 갈루아만 언급된 것은 좀 이상하군요. 책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지, 아니면 기자가 갈루아만 뽑아 낸건지 궁금하군요. 아벨이나 갈루아 모두 위대한 수학자이지만 5차방정식은 아벨, 군론은 갈루아 이런 연상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10-03-21 10:27   좋아요 0 | URL
둘다 관련된 것 같아요...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관심도서는 정치학과 교양과학서쪽이다. 두 개의 페이퍼로 갈무리할 작정인데, 일단 정치분야의 책으로 먼저 꼽을 수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 고진 입문서로도 제 격일 듯싶은 책의 리뷰기사를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0. 03. 20) 그대, 왜 침묵하는가? “데모크라시의 길은 직접민주주의 뿐”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9)이 국내에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근대문학이 정치·사회·윤리적 역할을 떠맡았지만 이제 근대문학의 그런 역할은 끝났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2000년대 한국 문학계에 큰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여기저기 그를 인용한 글들이 자주 보이기에 그가 쓴 책을 처음 집어들었던 게 10년 전쯤이었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이었는데 한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일본에서 신좌익운동이 붕괴한 7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은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마르크스 해석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 에세이 형식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나의 지적수준으로선 요령부득이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이 책을 잡고 끙끙대다가 던져버린 뒤로 나에게 가라타니는 요령부득인 상태로 계속 남아 있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대담집을 번역한 <정치를 말하다>는 나처럼 ‘가라타니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거나 처음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꼭 알맞은 책이다.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대학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사상적 궤적을 대화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가 60년대 일본을 격렬하게 달궜던 ‘안보투쟁’을 어떻게 바라봤고, 왜 경제학을 공부하다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어떻게 문학평론가가 됐다가 결국 문학을 포기했는지, 단체를 만들고 사회참여를 하다가 왜 단체를 해산해 버렸는지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썼던 책들에 대한 요약과 부연이 담겨 있어 해당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논지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생산과정이 아니라 유통과정이라는 분석, 국가를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로 다루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등 그의 독특한 시각들 말이다.

제목에도 나와 있듯 가라타니가 이번 책에서 던진 주요 메시지는 정치와 민주주의, 평화다. 가라타니는 90년대에 만개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외적으로는 제국주의, 내적으로는 전제주의로 귀결됐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일본사회에서 노조가 파괴되고 대학이 민영화되면서 중간세력이 없어졌고 전제사회가 됐다고 말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하지만 이는 곧 개인에게 가능한 것은 대표자를 뽑는 것뿐이다. 
 
가라타니는 전제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적 행위를 찾는 것이라면서 ‘데모’, 다른 말로 하자면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대의제란 대표자를 뽑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데모크라시가 아닙니다. 데모크라시는 의회가 아니라 의회 바깥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데모 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비평지 ‘비평공간’을 창간했다가 닫아버리고 새로운 ‘혁명운동’으로 생각하며 ‘생산·소비협동조합운동(NAM)’을 조직했다가 일거에 해산해 버린 이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아직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보다 그만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그랬다는 것이다. 가라타니에 천착해 한국 기성문학계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는 역자 조영일은 이에 대해 “실패가 아니라 엘리트의 자기우상화에 대한 강력한 거부였던 셈”이라며 “가라타니는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을 그 자신에게도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김재중기자)  

10. 03. 19. 

P.S.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과 견주어 볼 만한 책은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론이다. 두툼한 교재용 책 <민주주의의 모델들>(후마니타스,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민주주의 모델>(인간사랑, 1989)이라고 출간됐던 책의 개정판 새번역이다). 간단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세계일보(10. 03. 20)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 '민주주의의 모델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처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자칭하는 정권의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사상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정치학부 교수가 쓴 ‘민주주의의 모델들’은 그간 역사적으로 등장했고 실험되었던 다양한 민주주의의 이념들과 구체적 실천의 내용들을 유형화·모델화함으로써, 각 모델들이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제도화되고 관성화된 민주주의의 의미에 파열을 내고, 우리가 잊고 있거나 새롭게 추가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마침, 오늘의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민주적 선출, 여야 간의 정권 교체, 진보 정당의 의회 진출 등 민주주의의 형식적 조건 내지 절차는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도달해 있다. 하지만 치열한 다툼과 희생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현실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 있다. 나아가, 이상적 모델로서의 민주주의와 현실의 작동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으로 혼란을 겪고도 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역사상 존재해 왔고, 이론적으로도 일정한 체계를 갖춘 여러 모델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열 가지 모델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그 필요에 적절히 부응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보다 앞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던 사회들에서 전개되었던 깊은 사색의 결과물들을 통해 과도기적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조정진기자)  

P.S.2. 약간 학술적인 책으론 러셀 달튼의 <시민정치론>(아르케, 2010)도 신간이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서구 대의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의 정치참여 행태를 경험적 자료를 사용하여 분석해낸 비교연구서"로 "한국의 민주화 이후의 시대를 사는 '정치적으로 세련된'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행태를 비교ㆍ평가하고 성찰하기 위해 읽어야 할 시민정치 교과서이며, 아울러 정치학도와 선거전문가, 정당관계자에게는 필독서"리고 소개된다. 부제는 '선진산업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정당'. 작년에 나온 키이스 포크의 <시티즌십: 시민정치론 강의>(아르케, 2009)와 짝이 될 만하다. '시민정치'가 새로운 화두인가? 두 책의 원서는 아래와 같다.  


댓글(0) 먼댓글(2)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3-20 13:16 
    [책]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 — via 로쟈
  2. 가라타니 고진 다시 읽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2 19:47 
    격주간 기획회의(269호)에 실은 전문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을 다루고 있다.   기획회의(10. 04. 05) 가라타니 고진 다시 읽기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을 소개하는 문구이다. <정치를 말하다>는 이 걸출한 비평가이자 사상가의 궤적을 한 눈에 일별하도록 해주는 대담집이다. 대담이라는 형식의 성격상 ‘대
포퓰리즘의 근거와 자유주의의 가장자리

지방선거를 앞둔 때문인지 정치 관련서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홍보용 책자도 있지만 정치이론서나 비평서도 드물지 않다.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안병길 박사의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동녘, 2010)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책의 부제인데, 대략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으로도 읽힌다.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 있어서 메모해두려고 하는데, 일단은 소개기사를 하나 스크랩해놓는다.   

파이낸셜뉴스(10. 03. 11) 자유·권리 지키려면 ‘귀차니즘’을 버려라 

자유는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소중한 선물이자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한 가치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자유가 박탈됐을 때 인간은 목숨을 걸고 항거해왔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이러한 희생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귀한 자유민주주의를 오늘날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온전한 모습으로 지켜나가고 있는 걸까.

미시간 주립대 및 서울대학교 국제지역원 교수를 지낸 안병길 박사는 최근 저술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을 통해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경종을 울리며 자유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우파는 좌파를 빨갱이, 좌빨, 친북이라고 매도하고 좌파는 우파를 수구, 꼴통으로 몰아세우며 자신이 속한 정파만이 정의롭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에 불과하다.

교육에 있어서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원리나 개념보다는 공동체주의에 기본을 둬 애국심과 준법정신을 강조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마치 사회불안 요인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권위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고 저자는 우려한다. ‘착하게 살아라’는 식으로 절대적 도덕 가치를 기준으로 교육하는데 그것보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제대로 가르쳐서 왜 그렇게 살아야 자신에게 더 이로운지 깨우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의 인간 바탕은 그냥 백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백지 안에 무엇을 채워 넣든 그것은 각 개인의 자유로 일단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신공격, 심한 욕설 등의 행위가 나쁘다는 것은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것이지 사람이 궁극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상대방에 대해 선악의 잣대를 갖다 대 상대방을 악으로 보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발상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타인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이 틀렸다 나쁘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방종이지 결코 자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섬에서 혼자 살고 있다면 ‘자유=방종’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방종은 상대방의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내가 한 행동이나 말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상대방 역시 나에게 똑같이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구성원 각자는 게임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이것이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하는 자율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상대방의 방종에 대해 저항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이것을 자신의 자유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권위주의자들에 의해 자신의 권리가 침해를 받고 있을 때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체로 권위주의자는 자신들이 어떤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보다 강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힘을 모아야 한다.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귀차니즘’을 버리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방종에 대해 용기를 내 맞서야 한다. 그냥 귀찮아서 봐준다는 식으로 방종을 내버려 두면 ‘엉터리 자유’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을 억압하게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최종옥 북코스모스대표) 

10. 03. 19.  

P.S. 책은 자유주의에 대한 원론적인, 상식적인 옹호론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사회가 그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이기에 저자가 '귀차니즘'을 물리치고 저술에까지 나선 것이겠다. 덧붙여,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라고 한 건 저자가 추천한 윌리엄 라이커의 <자유주의 대 집체주의>(1982), <정치적 조작술>(1986) 두 권이다. 라이커는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가 아니라 은사라 한다). 'populism'을 '집체주의'라고 옮긴 건 특이한 선택으로 보이는데, 선례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집체주의'는 '집단주의'와 동의어로 보통 'collectivism'의 번역어로 쓰기 때문이다. 그 <자유주의 대 집체주의>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는, 집체주의를 경계하면서 자유주의를 잘 운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라이커 교수가 설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일까? '돌고 도는 세상'이라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필자는 '자유민주주의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로 표현하고 싶다. 상대적으로 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만병통치약 같은 정치제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 엉터리가 좋아하는 이념이 집체주의라는 것이다.(193-4쪽) 

 

그런 맥락에서 저자는 포퓰리즘뿐만 아니라, 루소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모든 유형의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그래서 박세일 교수 등의 <공동체 자유주의>(나남, 2008) 주장에 대해서도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자 신념이다. 일종의 자유지상주의인데, 영국의 또 다른 정치철학자 퀜틴 스키너의 자유론과는 대비되는 것이어서 비교해 봄직하다(물론 더 큰 차이는 '진리의 정치'를 주장하는 '레닌주의'와의 차이다).   

  

이번주 신간 가운데는 지식인들의 비판에 맞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과 자본주의>(부글북스, 2010), 국가와 시민이 빈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다룬 <빈곤에서 권력으로>(이매진, 2010) 등이 관심을 끄는 책들이다. 주말 북리뷰들이 뜨면 책의 정체가 조금 분명해지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조부 2010-03-20 01:43   좋아요 0 | URL
이 책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요?

근데 안병길씨가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동하는줄은 몰랐네요~

로쟈 2010-03-20 09:18   좋아요 0 | URL
주로 이준구 교수의 홈피에서 활동하는 분이라네요.

안병길 2010-04-10 15:36   좋아요 0 | URL
안병길입니다. 제 책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

라이커 교수님은 제 은사님이지만, 지도교수는 아닙니다.
국제정치학자 Bruce Bueno de Mesquita 교수님이 박사논문 지도를 하셨습니다.

Populism을 집체주의로 번역한 것은 라이커 교수님의 저서에서 설명한
Populism의 적당한 표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쟈 2010-04-11 23:26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넘겨짚었나 보네요.^^; 수정했습니다. '집체주의'는 혼동의 여지가 있는 듯해서요. 아시다시피 요즘은 그냥 포퓰리즘이라고 많이 쓰네요...
 

국내 학자들의 책 두 권에 대한 리뷰기사를 챙겨놓는다. 경제학자 이정우 교수의 <불평등의 경제학>(후마니타스, 2010)과 사회학자 홍두승 교수의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한국사회의 계층을 말한다>(동아시아,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한국사회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진단서로 읽을 수 있겠다.   

   

한겨레21(10. 03. 12) 왜 불평등한가

소득 불평등과 관련해 ‘오쿤의 새는 물통’이라는 가상 실험이 있다. “지금 부자가 빈자에게 1원을 이전한다고 가정하자. 이 과정에서 중간에 새나가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은 빈자 손에 들어가는 건 χ뿐이고, ‘1-χ’는 도중에 잃어버린다고 가정하자. 이때 사람들의 가치관에 따라 어떤 사람은 χ가 조금만 남더라도 이런 이전은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평등보다는 효율에 관심이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도중에 새나가는 물이 아까워서 이런 이전 자체를 반대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오쿤은 ‘나는 구멍 난 물통 실험에서 60% 누출을 보일 때까지만 (이러한 형태의) 소득재분배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쿤은 자신의 가치관을 분명히 60%라는 숫자로 밝히고 있는데, 독자 여러분은 이런 실험에서 어느 선까지 물이 새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지표는 있으나 왜 그런지는 없는 언론
오쿤의 새는 물통이 보여주듯, 이정우의 <불평등의 경제학>(후마니타스 펴냄)은 소득분배 ‘이론’을 다루고 있지만, 단순히 이론을 설명하는 교과서를 완전히 넘어서고 있다. 몇 가지 소득분배 모델과 간단한 수식, 그리고 몇 개의 그래프가 등장하고 있으나 복잡하게 증명을 시도하거나 경제모델 방정식을 도출하는 추상적인 ‘경제과학’을 다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뿌리인 <소득분배론>(1991)이 출판된 지 20년이 다 되었다.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세계화, 정보화, 구조 변동과 더불어 소득 양극화, 빈곤, 노동시장 유연화, 비정규직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불평등 심화, 양극화, 고용 불안정, 성장-분배 문제 등 우리가 살아가는 데 이만큼 중요한 문제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바로 당신, 그리고 당신 이외의 모든 사람의 월급·소득·일자리·불평등에 대해 말하는 다소 수준 높은 교양경제학 강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언론매체 등을 통해 소득분배 악화에 대한 수많은 지표를 대하고 있다. 그러나 지표만 제시될 뿐 왜 그런지에 대한 설명은 빠져 있기 일쑤다. 불평등 심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가진 소수의 전문가에 대한 수요 급증에서 오는 정보 격차에 주목하는 ‘기술 중시 가설’, 소위 국경 없는 경제·국제 경쟁의 심화로 인해 전통적인 굴뚝산업이 쇠퇴하고 자본이 해외로 이동함으로써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는 ‘세계화 가설’, 노동조합의 세력 약화와 낮은 최저임금으로 인해 저임금 노동자들을 지킬 힘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제도 가설’ 등 백가쟁명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책은 소득분배 전공학도들에게 유용할 뿐 아니라 교양서로 읽을 수 있도록 흥미롭고 풍부한 현실 사례를 군데군데 배치하고 있다. 이를 테면 △한국 100대 부자들의 자녀가 혼인 등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자료 △한국 10대 재벌가 혼맥 이야기 △1924년 전북 고창군의 빈민생활조사 자료 및 일제시대 도시 빈민 조사자료 △달동네·산동네의 기원 △점심 도시락을 못 싸온 1963년 대구 명덕초등학교 이윤복군의 일기 등을 인용·소개하고 있다.

다루는 주제와 필치도 한껏 대중적이다. “한국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부의 불평등은 토지에서 온다. 부동산 투기는 불신을 먹고 살고, 신뢰 속에서는 마치 햇볕 아래 드라큘라처럼 힘을 잃는다. 경기가 나쁘다고 눈앞의 단기 성과에 집착해서 부동산 투기를 경기 부양의 불쏘시개로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약이다.” 각 장 서두에는 양념처럼 짧은 경구를 붙여놨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조지 오웰, <동물농장>) “만일 당신이 당신의 재산을 계산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진짜 부자는 아닙니다.”(폴 게티) 빈곤을 다룬 제10장에서는 천상병 시인의 ‘나의 가난은’이란 시 전문을 싣고 있다.

“성장과 분배는 동행한다”
“한국 경제에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두 가지 극단적이고 편향된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 시장 맹신주의와 성장 만능주의다.” 양극화 시대에,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논쟁의 시대에, 그리고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시대에 깊이 있게 일독할 만한 책이다. 이정우 교수는 결코 ‘좌파 분배론자’가 아니다. 이 책 전편을 관통해 그가 주창하고 있는 건 “성장과 분배는 동행한다, 분배를 통한 성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인식이다.(조계완 기자) 

  

시사IN(10. 03. 11) 패자부활전이 필요한 대한민국

이 책은 풍부한 통계 자료와 사실 자료를 바탕으로 계층과 관련 있는 우리 사회의 다양한 현실을 차분하게 조망한다. 227쪽의 짧은 분량 안에서 그 조망의 범위는 매우 넓다. 양극화, 중산층, 자영업주와 임금 근로자, 동네 슈퍼, 교육 불평등, 강남, 상류사회, 빈곤, 주거, 농어촌 문제, 사회적 소수자와 주변인 등.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 대부분을 망라한 셈인데, 이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계층 문제와 상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부분은 양극화 문제.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소득불평등도는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상위 소득계층과 하위 소득계층 간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것.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계층 양극화’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양극화란 중간이 공동화되고 소수를 제외한 다수가 하위 계층으로 전락하는 구도인데, 적어도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구도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물론 그럴 위험성은 있다 해도). 소득계층은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매우 가변적이다. 양극화나 중산층 개념 자체가 모호한 셈이다.

그럼에도 중산층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안정의 기초로 인식되기 때문이며, 저자는 중산층의 폭을 넓히고 튼튼하게 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계층 간 격차 해소를 최우선으로 내세우기보다, 취약 계층의 삶의 질 향상이나 빈곤 퇴치에 무게를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어느 정도 못사는가’라는 상대적 잣대가 아니라 ‘내가 어느 정도 생활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느냐’라는 절대적 기준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경제적 세습 고리’ 약화시켜야
교육 불평등 문제에 대해 저자는 현재의 입시 제도가 ‘있는 집’ 자녀에게 결과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대학 신입생의 가정 배경이나 출신 고교에서 잘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업적적 지위인 교육적 성취가 귀속적 지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예컨대 2000~2009년까지 가장 많은 서울대 합격자를 낸 10개 고교 중 일반계 고교는 단 1개 (그것도 서울 강남에 위치한)에 불과했다.

저자는 어떤 제도, 어떤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더라도 추첨식으로 뽑지 않는 한 교육 기회의 계층별 차별성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적에만 의존하지 않고 학생들의 잠재적 소질과 능력을 찾아내 선발해도, 그것이 곧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기회를 주는 방식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부 및 민간기업의 채용방식을 다양화하는 등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완화하는 것, 시장경제질서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제적 세습 고리를 약화시키는 것을 근본 처방으로 제시한다.

저자는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가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 회복할 기회를 주는 것, 요컨대 단판 승부가 아닌 패자부활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의 미덕은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관점 차이를 일단 접어두고 일종의 중도 입장에서 문제와 현실을 ‘설명한다’는 데 있다. 이 책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좀 더 깊이 생산적으로 논의하기 위한 신뢰할 수 있는 발제(發題)다.(표정훈_출판평론가) 

10. 03. 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