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일본인의 역사관

출간시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되는 책들이 있다. 오늘 관내 도서관에서 대출한 고사카 시로의 <근대라는 아포리아>(이학사, 2007)도 그런 책이다. 필요 때문에 일본 근대사와 근대문학에 관한 책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읽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동아시아의 근대에 관한 상당히 다양한 주제, 혹은 난제를 다루고 있어서 지난주부터 새삼 주목하게 됐다.  

경향신문(07. 11. 24) 동아시아 ‘근대성’ 해명에 도전하다 

고사카 시로의 ‘근대라는 아포리아’는 야심찬 책이다. 저자는 서구 근대의 보편성을 주장한 막스 베버의 테제를 문제 삼으며 논의를 시작한다. 베버의 테제는 근대화를 논의하는 이론적 출발점으로서 독보적인 위력을 발휘해왔다. 그 점에서 저자의 문제 제기는 야심찬 기획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막스 베버가 말한 서구적 합리성이… 그대로 보편성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그 의문에 근거하여 저자는 비유럽 사회, 특히 동양에도 독자적인 ‘합리성’(p.21)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문제 제기 자체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동아시아의 근대라는 주제는,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주물러 닳고 닳았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적절한 답안이 주어져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하는 저자의 생각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낡은 문제에 새로운 피를 흐르게 하는 것, 그것이 학자의 임무가 아닌가.

저자는 근대 일본 사상의 역사 속에서, 베버 테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음을 잘 안다. 그 다양한 시도들을 뛰어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도 말한다. 더 나아가 이런 논의를 진행할 경우, ‘자칫하면 서양인의 유럽 중심주의적 이해(오해)를 힐난하거나’, ‘민족주의가 얼굴을 내밀어 자아(민족) 의식으로 가득한 논의를 하게 될 위험성이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일본에서 그 위험성은 ‘일본의 독자성론’으로 나타난 바 있다. 최근에 유행 담론이 되어 버린 근대 비판론은 첫 번째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일본인으로서 저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새삼스럽게 근대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지독한 난제(아포리아)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저자는 ‘아시아인들의 고뇌를 망각한’ 일본적 오만함을 넘어서, 즉 일국적(一國的) 관점을 넘어서 그 난제를 검토해보겠노라고 한다.(p.22) 동아시아의 근대를 일국적 관점을 넘어 검토한다는 그 점이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이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대목이다.

한 국가로서 일본은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여전히 오만함의 늪에 빠져 있다. 이 책은 그 늪에 빠진 일본 근대화의 과정을 내부에서 점검하고 반성하며, 그 궤적을 다시 그리고자 한다. 이 책을 읽다보면, 동아시아의 근대, 특히 일본의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검토해야 할 수많은 이름과 논제들을 만날 수 있다. 근대 연구의 어려움은 도처에서 연구자를 가로막는다. 언어적 난관들, 엄청난 사료들, 극과 극을 달리는 시각들, 가치관의 대립이 얽히고 설키어 어려움은 가중된다. 전문화가 진행될 대로 진행된 학문 상황은 애초부터 근대에 대한 종합적 시각을 가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더구나 자기 영역 지키기를 학문적 미덕으로 여기는 작금의 풍토에서 저자의 고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동아시아 전체의 맥락 속에서 근대를 새롭게 파악하려는 ‘난제’가 한 사람의 연구자에 의해 속시원히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의 야심찬 시도가, 어설픈 순진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안다. 일본인으로서 저자는, 일본인의 도취적 자기 인식을 극복하여, 비틀거리며 나온 동아시아 근대의 상(이미지)을 그려보이고자 한다. 그것은 학문적 작업을 넘어서는 자기 고백을 포함한다. 그 고백은 진정한 소통을 소망하는 한 학자의 순수함의 표백이고, 초대의 손짓이다. 그 손짓에 우리는 화답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재 동아시아는 반성과 화해의 손짓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사적 전환기에 놓여 있다. 근대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해도, 그 인식과 반성의 계기는 단일하지 않다. 계기가 다르면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달라진다. 근대가 난제인 이유는, 그것이 탈-근대의 전망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가 단일하지 않은 것처럼, 근대를 넘어서는 그 길 역시 단순하지 않다. 중국이 동아시아라는 개념 자체에 무관심한 이유, 우리가 동아시아 연구에 소극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근대’는 학문만의 문제이거나, 순수한 인식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애초부터 순수한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때일수록,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시야의 확대, 관용과 대화가 요청된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저자의 용기, 동아시아의 소통과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역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이용주|동양학자)  

10. 01. 06.   

P.S. '근대라는 아포리아'가 무얼 뜻하는지 서평기사에서는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이에 대해선 공역자의 한 사람인 야규 마코토의 '후기'가 참조할 만하다. 두 문단만 옮겨놓는다. 인용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바 료타로의 작품에 대해서는 며칠 전에 포스팅한 '러일전쟁과 일본인의 역사관'을 참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일본 사람에게 있어서 메이지유신부터 러일전쟁까지의 시기는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면서 입헌군주제의 근대 국민국가로 탈바꿈하고 청나라, 러시아 같은 대국에 승전한 영광에 가득 찬 역사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메이지유신 전후부터 러일전쟁 사이에 활약한 인물들을 다룬 시바 료타로의 소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자기 역사에 긍지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같은 시기에 근대화에 실패한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일본인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오만함과, "서구 문명을 성공적으로 수용한 동양 국가 일본"과 "문명화에 실패한 아시아"라는 대립 구도에 입각한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와 맑스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근대주의)의 위력으로 기존의 사회형태나 고유의 가치관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일본에서는 "근대의 초극(극복)"론으로 연결되었고 독일에선 나치즘이 대두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근대의 극복"론은 결국 태평양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고, 나치즘은 히틀러와 나치스에 의한 유태인의 박해, 말살, 그리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 확보를 위한 유럽 정복 전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사를 감안할 때 현대의 근대 비판은 동시에 어설픈 반근대론을 넘어선 것이어야 한다.

 

P.S.2. 말하자면,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가 근대가 떠안겨주는 난제(아포리아)다. <근대성의 아포리아>는 함동주 교수의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창비, 2009), 그리고 스즈키 사다미의 <일본의 문화내셔널리즘>(소화, 2008)와 함께 책상맡에 놓아두고 있다. 피터 두으스의 <일본근대사>(지식산업사, 1983/2006), 김용덕 교수의 <일본근대사를 보는 눈>(지식산업사, 1991/2005)도 최근에 집으로 나른 책들이다. 일본 근대 관련서는 상당히 많기 때문에 얼마간 읽고 나야 '감'이 잡힐 듯하다. 이달말까지는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2005)을 정독하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로 넘어가는 게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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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10-02-07 00:18   좋아요 0 | URL
하,,, 재밌을줄 알고 눌러봤더니 이광래씨 번역.... ;;;

로쟈 2010-02-07 00:27   좋아요 0 | URL
실번역은 그래도 공역자들이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빵가게재습격 2010-02-07 10:32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근대'라는 제목으로 검색해보면 관련도서가 1800여권이,'근대성'으로 검색하면 120여권, '모더니즘'으로 검색하면 130여권이 나옵니다. 근대, 그 수많은 근대와 모더니즘. 합리적인 선을 어느정도 그을 수 있다고 해도 너무 머리 아픈 문제에요... 근대에 관한 책을 뒤적거리다가 '베버를 이해하기 위해 베버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근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버의 1/3은 되어야겠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씹었던 생각이 납니다.--;;; 입춘이 지나 슬쩍 들렀습니다. 건강하시죠?^^

로쟈 2010-02-08 13:37   좋아요 0 | URL
'원론적'으로 공부하려면 사실 견적도 안 나오지요.^^; 필요한 대목을 빨리 찾는 것도 요령 같습니다...

펠릭스 2010-02-07 07:33   좋아요 0 | URL
현대는 빤하고 근대는 이야기하기에 적당한 거리감이 있으며, 중세는 아리송하고 고대는 무덤같습니다. 근대 소설, 근대 정치 등, 현재의 문제는 근대에 뿌리를 두고 있는듯 합니다. 발견이니 발명이니 하는 말들로 근거들을 제시하더군요.

반딧불이 2010-02-07 11:29   좋아요 0 | URL
"이달말까지는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민음사, 2005)을 정독하고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들로 넘어가는 게 목표이다" 저는 로쟈님과는 거꾸로 가고 있는데 목표달성을 목마르게 기원합니다.

펠릭스 2010-02-07 18:55   좋아요 0 | URL
'일본 근대문학 개척자'라 칭하는 그의 소설 중에는 <그 후/나쓰메 소세키/민음사>외 최근에 번역된 <피안 지날 때까지/나쓰메 소세키/예옥>도 있습니다.

로쟈 2010-02-08 13:38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소세키 전작에 도전하는 건 아니고, 몇 작품에 대해서 강의를 해야 하기에 필요상 읽는 거예요.^^

게슴츠레 2010-02-07 13:46   좋아요 0 | URL
마침 근대의 초극을 주제로 새움에서 하는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는 와중에 포스트 반갑게 읽었습니다.^^ 다케우치 요시미의 전설적(?)이라는 논문 [근대의 초극]은 고진의 책에서 인용만 보다가 이번 기회에 직접 읽게 되었는데 저는 정말 신선하더군요. 아시아에 대한 반성없이 미국으로부터의 '전쟁피해'만을 주장하는 내셔널리즘과 '전쟁가해'를 강조하다보니 국민이 공유할 역사의 구성을 놓치게 되는 탈민족주의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로쟈 2010-02-08 13:38   좋아요 0 | URL
김윤식 교수의 김동리론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세 권이나 되긴 하지만...

노이에자이트 2010-02-07 15:40   좋아요 0 | URL
유신 당시 한국적 민족주의 운운하면서 나온 전통문화 발굴운동도 결국은 외국문화에 대한 통속적인 민족주의에 입각한 비판때문에 보수적인 방향으로 가고 말았지요.위에 나온 <태평양 전쟁의 사상>에 수록된 '근대의 초극'좌담회 내용은 우리나라에도 알게 모르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게슴츠레 2010-02-07 16:40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 님, 혹시 그 근대의 초극 좌담회의 한국에 대한 영향에 대해 참고할 만한 논문이나 저술이 없을까요? 현재 세미나를 진행 중인데 이런 제국의 지식인들들의 '발신'이 피식민지의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수신'되었을지 궁금해 지더군요. 아무쪼록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07 22:27   좋아요 0 | URL
<근대를 다시 읽는다>(역사비평사)에 실린 윤대석의 논문

좌담회 '근대의 초극'이 처음 번역된 <다시 읽는 역사문학- 현대문학의 연구 제5권>(평민사)에 실린 이경훈의 논문'친일문학의 한 시각'

김철의 저서나 논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실린 김철의 논문

최근 몇 년 동안 만주국과 친일문학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책들도 꽤 나오니 그것도 참고하십시오.

공부하다가 좋은 내용이 있으면 방문해서 알려주십시오.

비로그인 2010-02-07 15:58   좋아요 0 | URL
저는 강상중 <내셔널리즘>에서 '근대의 초극'론에 대한 언급을 처음 봤던 것 같은데, 곁다리 독서로 참고가 되셨으면 좋겠군요.

로쟈 2010-02-08 13:39   좋아요 0 | URL
네, 조금 훑어본 책인데, 참고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전공의 역사학자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2010)을 사들고 왔다. 두 가지를 깜박했는데, 하나는 저자가 작년 여름 이덕일 소장의 '십만양병설 및 송강행록 조작설'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여 한겨레 지면에서 잠시 '이덕일-오향녕 논쟁'을 촉발한 당사자라는 점을 잊고 있었고(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67319.html 참조), 또 하나는 그 논쟁을 언젠가 옮겨놓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책에는 그 논쟁을 이루는 두 편의 글이 7장의 보론으로 들어가 있다. 책으로는 한겨레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이덕일의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역사의아침, 2009)과 이번에 나온 <조선의 힘>이 짝이 될 수 있겠다.   

  

오항녕 박사는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일지사, 2009) 같은 학술서의 저자이기도 한데, <조선의 힘>은 <역사교육>에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대중서'이다. 비록 저자가 "어려운 것을 쉽게 전달할 방법은 없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다."라고 적어놓았음에도 나처럼 새로이 조선사 입문서를 찾던 독자에게는 유익한 길잡이가 될 듯싶다. <조선의 힘>에 대해서는 따로 서평기사가 아직 없기에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 대한 리뷰기사와 함께 오항녕 박사의 두번째 반론을 참고삼아 옮겨놓는다.  

위클리경향(09. 09. 10) [이주의 책]십만양병설은 조작됐다?

율곡 이이는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유성룡이 십만양병설을 반대했다는 것도 그러므로 성립할 수 없는 명제다. 십만양병설은 후대에 조작된 허구다.

역사학자 이덕일씨의 주장이다. 이씨는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십만양병설은 조선 시대 노론 문인들이 정파적 목적으로 날조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십만양병설의 원적지는 김장생의 <율곡행장>이다. 김장생은 구체적인 연대는 밝히지 않은 채 “경연에서 이이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고 썼다. 그의 제자인 송시열은 한 발 더 나갔다. 송시열은 <율곡연보>에서 ‘선조16년’(1583)이라고 연대를 특정했다. 십만양병설이 사후 창작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이이의 시호에서 발견된다. <율곡연보>를 보면 유성룡은 이이를 ‘이문성’이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이이가 ‘문성’이라는 시호를 받은 것은 죽은 뒤인 인조2년(1622)으로, 유성룡이 사망한 지 이미 17년이 지난 후다.

문제는 십만양병설이 허구라는 데 있지 않다. 진짜 문제는 “유성룡의 반대로 십만양병설이 무산된 것으로 서술돼 있다”는 점이다. 서인 출신 김장생과 송시열은 제 당파의 영수 이이가 주장한 십만양병설을 반대 당파인 남인 영수 유성룡이 반대했다고 서술했다. 저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발언을 있던 것처럼 가정해 반대 당파의 영수를 공격하는 것은 전형적인 정치공작”이라고 말한다.

2007년도 개정판에서 바뀌기는 했지만 ‘노론이 중상주의 실학 사상을 주도했다’는 2007년 이전 국사 교과서의 서술도 사실과 다르다.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중농주의 실학 사상을 주장한 이들은 당시 재야 세력인 남인들이었다. 게다가 중상주의 실학의 선구자라고 알려져 있는 유수원은 노론이 아니라 노론이 적대시했던 소론이다. 유수원은 노론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해 죽은 인물이다. 개정판 교과서라고 해서 이 문제가 완전히 수정된 건 아니다. 중상주의 실학을 “노론이 주장했다”는 말은 빠졌지만 중농주의 실학을 “남인이 주장했다”는 사실마저 삭제됐다.

왜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일까. 저자는 “이 모든 것은 아직까지 노론 정체성을 지닌 학자들의 사고로 국사 교과서가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주류 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은 일제 식민사관과 조선 후기 노론 사관으로, 이 두 사관은 ‘자기정체성 부인과 사대주의 극대화’라는 점에서 인식을 공유하고 인맥으로도 연결된다. 책은 이 두 사관이 역사 서술에 끼친 폐해를 앞에서 든 사례 이외에 ‘한사군 한반도설’,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등에서도 찾아내 조목조목 반박한다. 



독자의 구미를 잡아당기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책은 올해 초 ‘정조어찰첩’이 공개된 후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정조독살 사실 무근설’도 반박한다. 저자는 정조어찰첩을 근거로 정조가 독살됐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 또한 “소수 학벌 카르텔의 당파적 해석”이라고 본다.

독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십만양병설이나 정조어찰첩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여전히 논쟁 중인 사안이다. 지적인 편식을 경계하는 독자들은 뉴스 검색창에서 역사학자 오항녕, 유봉학 한신대 교수,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의 이름을 입력해보시길. 역사 해석의 다양성과 중층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정원식 기자)  

한겨레(09. 08. 06) ‘십만 양병설 허구론’ 오항녕씨 재반론 

저는 지난번, 이이의 십만양병론을 부정한 이덕일 소장의 주장이 판본과 전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었으며, 기축옥사에 대한 김장생의 기록이 서인에게 유리하게 날조되었다는 이덕일 소장의 주장 역시 연도의 착각에서 시작된 왜곡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그는 오류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장은 ‘이이의 십만양병론에 대한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면 간단’하다고 했는데, 저는 이미 서인과 남인이 함께 편찬한 <선조수정실록>, 이정구의 ‘시장’(諡狀), 이항복의 ‘신도비문’ 등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는 이 소장은 십만양병설을 부정할 ‘1차 사료적 근거’를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황해도 군적을 잘 정비한 것과 십만양병 주장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군사를 키우려면 현황부터 파악하는 건 상식입니다. 군적 정리와 십만양병론이 연결되지 않는다는 그의 해설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는 제가 ‘서지학자처럼 문정(文靖)이니 문성(文成)이니 하는 판본의 문제를 장황하게 서술해 논점을 흐렸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논거가 무너진 것을 모르나 봅니다. 이 소장은 또 ‘이이의 주장은 현 국방부 장관이 국세 징수는 20% 이상 삭감하되 군사비는 1000% 이상 올려 군사를 600만명으로 늘리자고 주장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이 비유에 나온 통계의 근거가 궁금하기만 합니다.

정철과 유성룡의 대화를 기록한 김장생의 ‘송강행록’이 조작이라고 이 소장은 주장했습니다. 선조 23년에 위관(委官)은 정철이었는데, 마치 유성룡인 것처럼 김장생이 기록하여 이발의 노모와 아들을 유성룡이 죽인 것처럼 덮어씌웠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선조 23년이 아닌 선조 24년의 일이었다고 바로잡아 그의 오류를 지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광해군 9년(1617) 생원 양몽거(楊夢擧)의 상소’와 ‘아계 이상국(이산해) 연보’를 근거로 선조 23년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들 기록에서부터 ‘선조 24년’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몽거의 상소는 광해군 9년이 아니라, 60년 뒤인 숙종 3년(1677)의 일이었습니다. 그 뒤 이 양몽거의 상소에 대해, 신묘년(선조 24년)을 경인년(선조 23년)으로 잘못 보았다는 다른 이들의 비판이 이어집니다. ‘아계 이상국 연보’도 광해군 때가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에 편찬된 것입니다. 이것이 ‘장황한 판본 조사’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들이 죽은 시기는 분명 선조 23년 5월이 아니라 유성룡과 이양원이 위관을 맡았던 선조 24년 5월입니다.

이덕일 소장은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논조를 바꿉니다. 아니지요. 기본 성격은 바로 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에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이 소장과 같은 방식으로 사료를 인용하면서 주장하는 ‘기본 성격’을 저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덕일 소장에게 편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편견의 기반은, 식민사관에서 시작되어 근대주의적 역사관, 즉 ‘자본주의맹아론-실학’ 구도에서 강화된 당쟁론입니다. 제가 ‘콩쥐-팥쥐’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한국지성사의 안타까운 일면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장은 비장하리만큼 자신과 ‘주류학계’를 구별하려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는 ‘주류학계’의 충실한 일원입니다.

제가 근대주의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근대사회의 이성과 자유, 민주주의는 긍정적 가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성은 독단적 신화가 되고, 자유는 일자리에서 밀려날 자유만 남고, 민주주의는 인민을 합법적으로 주권에서 배제하는 수단이 되어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장차 근대적 삶과 가치에 대해 성찰하든 대안을 찾든, 역사학자가 볼 때 조선시대는 참으로 풍부한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앞으로 여러 계기를 통해 조선시대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논의가 계속되었으면 합니다.(오항녕/역사학자·조선시대사) 

10. 02. 06. 

P.S. <조선의 힘>의 프롤로그를 읽었는데, 저자가 표나게 내세우는 것은 '근대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근대주의는 일제 식민사관의 토양이었다. 광복 이후에 한국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근대주의에 빠져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근대주의로 다시 근대주의(식민주의)를 극복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위의 식민주의와 근대주의를 합쳐 '범식민주의'라고 부른다.  

요컨대, 조선사를 이해하는 저자의 시각은 '범식민주의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관심은 그와 무관하게 저자가 '제도사' 연구자라는 데 있고,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시론서'로서 이 책이 조선사 "500년 시스템을 유지한 '힘'과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자 한다고 소개된 데 있다. 말하자면 조선이라는 국가체제를 500년간이나 유지한 힘이 '조선의 힘'이다. 문화사보다는 먼저 제도사에 대한 독서와 이해가 필요하다는 게 한국사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내가 세운 기준이고, 그래서 때마침 출간된 <조선의 힘>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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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의 힘과 대동법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11 11:16 
    오전에 늑장부린 원고를 써보내고 아직 세수도 안 한 상태이지만 잠시 휴식을 취한다. 취하는 김에 책상 맡에 있는 수십 권의 책 가운데 하나인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2010)에 대한 리뷰기사를 읽는다. 조금 있다가는 오늘 종업식을 한 아이에게 맛있는 점심을 사줘야 한다(아이는 잠시 친구들과 놀러나갔다). 일은 많고 머리는 복잡하지만 기분전환도 가끔은 필요하다.     
 
 
펠릭스 2010-02-07 20:28   좋아요 0 | URL
<조선의 힘>을 읽어보고 싶습니다. <일제 식민 사관>이라는 말에 단재 신채호에 대한 연구학자인 '신용하' 명예교수의 저서인 <신채호의 사회사상연구/신용하/나남출판>가 생각났습니다. 복학전에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민족사학자 신채호의 며느님의 열성으로 그분의 유골도(?) 극내로 이장되었을 것입니다.

로쟈 2010-02-08 13:32   좋아요 0 | URL
근대주의와 식민주의를 모두 도마에 올려놓는 것이 저자의 독특한 시각 같고, 생산적인 작업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어요...
 

이번주 역사서 가운데 눈길을 끄는 책은 나가미테 시게토시의 <독서국민의 탄생>(푸른역사, 2010). 관심분야의 책이라 바로 입수했는데(제목만으로도 책의 내용은 어림해볼 수 있다), 저자가 도서관 사서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구체적으론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 도서실'에 근무하는 걸로 돼 있고, 이미 <잡지와 독자의 근대>(1997)란 책으로 일본출판학회상을, <모던도시의 독서 공간>(2001)이란 책으로 일본도서관정보학회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독서국민의 탄생>(2004)까지 '3부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의 경우와 비교도 해봄직한, 그런 자극을 던져주는 책이다. 소개기사를 챙겨놓는다.   

국민일보(10. 01. 30) 100년전 일본엔 ‘책 읽는 국민’이 있었다… ‘독서국민의 탄생’ 

책에는 인류의 지혜와 각종 정보가 담겨 있다. 지식을 축적하고 전파하는 주요 수단이다. 따라서 책을 많이 읽을수록 그만큼 무형의 자산을 많이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국가적으로도 독서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독서는 다른 오락거리에 밀려나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08년 국민 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3명은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다.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대표적인 독서강국으로 꼽힌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 승객들이 무언가를 읽고 있는 모습은 일본에서는 익숙한 풍경이다. 초등학생의 연간 도서관 대출 건수가 1인 평균 30권이 넘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어려서부터 독서문화가 형성돼 있다. 이는 일본이 경제는 물론 문화에서도 세계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틀이 됐다. 일본의 독서문화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일본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독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것일까.

도쿄대학교 사료편찬소 도서실에서 근무하는 나가미네 시게토시가 쓴 ‘독서국민의 탄생’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독서국민’을 신문이나 잡지, 소설 등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습관을 가진 국민으로 정의한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근대 초기에 형성된 독서 문화에서 독서국민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당시 활자미디어의 전국 유통, 사람들의 이동성 증가, 다양한 독서 장치의 보급 등이 어우러지면서 독서문화는 광범위하게 형성됐다.

19세기 말 대량수송수단인 철도의 출현과 신문 판매업자나 서적·잡지 중개업자의 등장은 활자미디어의 전국 유통망을 구축했고, 이것이 독서의 대중화를 이끄는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철도망의 확대로 철도 여행자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차내 독자’라는 근대의 새로운 독자 유형과 여행 독서 시장이 생겨난 것도 특징이다. 일본의 철도 승객은 1880년대 수백만명에서 1907년 1억4300만명에 달할 정도로 급증했다. 독서는 철도 여행의 무료함을 해소하는 수단이어서 승객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됐다. 당시 차내에서 독서하는 모습은 문명국민의 상징이었다.

일본의 독서국민 탄생에는 정부의 역할도 컸다. 정부는 신문종람소와 도서관이라는 두 가지 장치를 통해 독서국민을 이끌었다. 신문종람소는 역 구내나 주변을 중심으로 여러 신문이나 잡지를 모아 무료나 혹은 싸게 열람할 수 있도록 한 독서시설로 1880∼90년대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설치된다. 또 호텔이나 여관, 기차 대합실, 열차 안 등 곳곳에 독서공간을 마련해 독서 환경을 조성했다.

도서관의 활성화는 독서국민 탄생의 기폭제였다. 일본 정부는 전 국민의 의식 함양을 위해 일찍부터 지방에 작은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 결과 일본의 도서관은 1912년에 540개나 됐고, 총장서도 275만권에 달했다. 도서관은 이후 비약적으로 늘어나 26년에는 4000개에 달했다.

1880년대 도서관 이용자들은 주로 도시의 중산층 지식인과 그들의 자제인 학생들이었으나 1900년대로 들어서면서 도시의 하층계급 뿐 아니라 지방 군 지역 주민들로까지 확대됐다. 도서관 이용자는 도서관에서의 독서체험을 통해 근대적인 독서 습관을 몸에 익힌 독자로 성장해 독서국민의 중핵을 형성하게 됐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912년 도서관 이용자는 전국적으로 연간 395만명에 달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독서국민을 형성하려면 읽고 쓰는 능력과 독서습관의 보급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서 습관을 획득한 사람들에게 읽어야 할 독서 재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을 독서국민 형성의 둘째 요건으로 꼽았다. 일본에서는 20세기로 넘어가는 그 즈음 이 두 가지 요건이 적절히 갖춰지면서 독서 습관이 몸에 밴 국민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독서는 국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독서가 개인은 물론 국가의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1세기 전 독서국민의 시대를 연 일본의 사례는 문화강국을 꿈꾸는 우리에게도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라동철 기자) 

10. 01. 30. 

P.S. 기사에도 일부 인용돼 있는데,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적은 내용을 조금 옮겨보면 이렇다(미리보기를 참고할 수 있다). 핵심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국민 의식의 형성에 '독서'가 담당한 역할의 중요성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전국 방방곡곡에 유통되는 신문이나 잡지, 서적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가 형성되지 않았을 경우 국민국가의 형성은 불가능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찍부터 지적되어 온 '식자율'의 문제, 즉 얼마나 많은 이들이 활자미디어를 읽을 수 있는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독서 습관'의 문제, 즉 활자미디어를 일상적으로 읽는 독서습관을 가진 독자층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 더욱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국민의 탄생'입니다. <독서국민의 탄생>에선는 이 문제를 활자미디어의 유통, 사람들의 이동성 증가, 독서 장치의 보급이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다뤘습니다.(5쪽) 

요점은 독서국민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국민국가 형성도 불가능하다는 것. 중앙집권국가의 기반은 활자미디어의 중앙 집중체제였다는 주장이다. 일찍이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주장한 내용이기도 한데(저자가 머리말에서 가장 먼저 거명하고 있는 것도 앤더슨이다), 저자는 이를 일본의 경우는 어떠했던가란 사례를 통해 실증해보인다.    

한편,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한국에서도 동일한 관점의 연구가 이뤄진다면"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각국의 사례를 비교해볼 수 있으리란 바람을 피력한다. 이미 천정환 교수의 <근대의 책읽기>(푸른역사, 2003)가 나와있다는 걸 알았다면 반가워했을 법하다. 비록 <근대의 책읽기>는 '독서국민의 탄생'이 아니라 '대중 독자의 탄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 <국민독자의 탄생>과 비교하자면, '독서 장치의 보급'이란 면도 자세히 다루어지진 않았다. 나가미네의 관점에서는 '무엇을' 읽었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어디에서' 읽었느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근대의 책읽기>와 더 닮은 책은 마에다 아이의 <일본 근대 독자의 성립>(이룸, 2003)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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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 2010-01-31 20:02   좋아요 0 | URL
예전 이승연씨 사건관련한 글을 잠깐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역사라는 것이 왜곡되는 순간이 언제일까요..해석가들의 눈이 어떤 사건을 분석하기는 이미 늦은 시간일까요..기계로 사람이 움직여지고 의사가 왜곡되고 사람의 입술이 이미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 말을 해석하고 사건을 해석하기는 이미 늦은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건가요..어떤 이의 일을 해석하고 진실을 규명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을 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후분석되고 사후진행되는 진실규명이 어떤 죽음을 막는다면 그래도 나은 일일까요..어떤 이들의 행위가 어떤 의도로 왜곡되는 과정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는 기술이 이제 문자나 책이 아니라 음성이 되어야 할 지경이고 그것보다 더하게 음성이전에 어떤 전파 기술이라면 ..역시나 역사는 없는 자에게는 가혹하네요. 기술을 쥔 권력의 입술을 막아설수 있을까요.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삽니다. 어떤 정부가 거짓을 감아 두고 목숨을 연명하려고 한다면 역사는 유죄를 선택하겠죠 그때가 언제가 되던...그들은 단죄되어야 하고 단죄될겁니다..
가장 빠른 선택이 최선의 선택이 된다..이것은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역사적 해석이겠죠..언젠가 하신 말씀이던가요??
오늘 장의차를 봤습니다. 서동시장 우수학원이란 간판 아래서요. 이말 언젠가 한것 같은데..그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들었습니다. 그 기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흐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배후를 밝히고 그들을 단죄해야 겠죠..
무고한 목숨이 갔습니다..
알고 계신가요??그들의 이름을??기억하셔야 할텐데요...

어떤 배우의 죽음을 목도했고 그것은 살해였습니다. 그들의 목숨과 연결된 아이들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총맞았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압니다. 가상의 총이라더군요.
가상의 죽음이 무엇인지도 압니다.
누군가 총맞았다는 말을 조심해서 들으셔야 할테입니다. 가짜 총을 가지고 사냥을 하는 정부가 있습니다..
노라는 정부의 수장이 갔습니다.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습니다...역사라는 이름이 어떤때에 누군가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의미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도 그런 반복이 진행된다면 반복이라는 이름을 우리는 증오하고만 있어야 할까요. 행위자라는 ...주체라는 이름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그것은가해자의 이름이라고 말한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곰곰 2010-01-31 20:04   좋아요 0 | URL
역사와 전쟁을 치르는 한정부가 있습니다. 그 정부의 이름이 누군가의 이름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이름 뒤에 어떤 누군가의 이름이 더 올려져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이..라는 이름을 쓰던 한 사내가 그의 운명을 다하여야 할 시간이 왔습니다...그는 역사의 이름으로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목숨을 쥔 자들은 자유롭습니다...역사가 그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이제 역사가 그들을 데려갈 시간입니다.

펠릭스 2010-01-31 22:40   좋아요 0 | URL
전통적으로 종이에 씌여진 글자를 읽는 독서에서 음성으로 읽은 녹음도서를 편안했습니다. 최근 애플의 아이팟용 전자도서도 종이로된 책을 읽은 느낌같습니다. 플레쉬리뷰로 책 미래보기 역시 글씨크기를 확대할 수 있어 읽기 좋았습니다. 독서 인구가 선진국보다 낮다고 탓하기 보다는 독서할 수 있는 환경을 다양하게 만들어가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2-01 14:58   좋아요 0 | URL
독서인구도 그렇고 독서열도 낮은 편이죠. 요즘은 대학생보다 직장인들이 책을 더 읽는다고도 하고요...

펠릭스 2010-02-07 05:51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의 청소년기의 강요된 독서습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목 때문에 눈에 띄는 과학서는 에롤 해리스의 <파멸의 묵시록>(산지니, 2010)이다. 과학서라고 했지만, 저자는 철학자이고 형이상학과 과학철학, 종교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저술을 남기고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파멸의 묵시록>은 그가 90세에 출간한 책으로 "방대한 연구결과를 대단히 간결하게 압축한 결정판"이라고 한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한번쯤 읽어보고픈 책이다. 원제는 '묵시록과 패러다임'이고 부제가 '과학과 일상적 사유'인데, 국역본 제목과 부제는 그걸 적당히 재분배했다. 한겨레의 간단한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자세한 건 출판사의 책소개를 참고할 수 있다.

 

한겨레(10. 01. 30) 인문학, 뉴턴 패러다임을 벗어라

환경과 생태계 파괴, 온난화, 핵전쟁 위협, 자원 고갈, 인구 폭발, 끝없는 분쟁과 양극화 등 인류 자체의 절멸을 걱정해야 할 파국적 상황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인류 대다수는 이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채 파국적 상황을 가속화하고 있다. 개인과 가족, 또는 민족, 국가의 무한 이기주의로 표출되는 사유와 생존 방식의 근본적 결함에서 비롯되는 이 위기의 근저에 뉴턴적 사고의 패러다임이 자리잡고 있다. 원자론과 개인주의, 분리주의, 환원주의를 낳은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 근대적 가치관은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에 의해 이미 근본적으로 무너졌는데도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자연과학 외의 영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양자역학 시대에 지구인들 대다수의 삶은 여전히 뉴턴적 17세기 자연과학 패러다임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이 어긋남이 위기로 표출되고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절연에서 비롯된 이른바 ‘두 문화’고민과도 상통하는 이 위기는, 그러나 뉴턴 패러다임을 폐기하지 않는 두 문화의 절충적 통섭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여전히 뉴턴적인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철학, 윤리학, 정치학, 경제학 등을 아인슈타인, 막스 플랑크, 하이젠베르크가 물리학에서 이룩한 패러다임 혁명으로 인도하라! 인간과 자연, 사회, 그리고 극미와 극대의 우주까지 상호의존적 내적 관계를 지닌 유기적 통합체라는 전체론(holism)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다. 인류가 지니게 된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자연스런 전환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한승동 선임기자)  

10. 01. 29.

P.S. 출판사 책소개의 한 대목은 이렇다. 저자가 화이트헤드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일러준다.  

세계관을 진단하는 측면에서 이 책은 화이트헤드의 <발상의 모험>(Adventures of Ideas)과 가장 유사하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화이트헤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연구가 활발한데, 일찍이 그는 “하나의 학문이 임시방편 가설의 메들리(a medley of ad hoc hypotheses)를 반복하지 않도록 만들려면 반드시 철학적 성찰을 수행해서 그 학문의 기초를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무의식적으로 가정하고 있는 근본전제부터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80여 년 전 화이트헤드는 17세기 및 20세기의 자연과학 성취를 형이상학적으로 성찰한 후, 뉴턴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라는 저서를 통해 제시한 바 있다.<파멸의 묵시록>은 이런 화이트헤드의 문제의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에롤 E. 해리스는 화이트헤드를 깊이 연구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의 책이 철학에 중점을 둔 책이라면, 이 책은 문명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오랜만에 화이트헤드의 책을 검색해보게 되는데, <발상의 모험>은 <관념의 모험>(한길사, 1996)이란 타이틀로 한길 그레이트북스 첫 권으로 나온 바 있다. <과정과 실재>(민음사, 1999)는 현재 절판중이고, <과학과 근대세계>(서광사, 2008)는 재작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개인적으론 모두 박스보관 도서라 '그림의 책'이다. <과정과 실재>는 원서도 구해놓았었지만 아직 폼도 못 잡아봤다. 절실히 읽고 싶을 때가 따로 오지 않을까 한다.  

  

과학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주에 출간된 나탈리 앤지어의 <원더풀 사이언스>(지호, 2010)도 언급해두고 싶다. 보관함에 들어 있는 책인데, 언제쯤 '원더풀'한 저자의 글솜씨를 감상할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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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1-29 20:23   좋아요 0 | URL
<관념의 모험>을 <발상의 모험>으로 번역한 그 '발상'이 더 신선하군요^^ 화이트헤드 책들은 원서와 번역본 모두 구비되어 있고 가까운 책장에 손 닿는 곳에 있어 적잖게 손 때를 묻혔건만 아직 정상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습니다. 그나저나 <과정과 실재>가 절판됐다니 안타깝군요. 훌륭한 번역자가 나와서 더 좋은 번역본을 내주면 좋겠지만 오영환 선생의 번역도 계속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1-30 10:15   좋아요 0 | URL
예전에 <과정과 실재> 독회 같은 것도 있었고(김용준, 김용옥 형제도 멤버였던), 그때 혼자 읽긴 힘든 책이란 '신화'도 만들어졌었죠.^^;

푸른바다 2010-01-30 17:13   좋아요 0 | URL
러셀이나 포퍼 같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근거 없는 '신화'는 아닌 듯 싶습니다^^ 러셀 자서전을 보면, 러셀이 화이트헤드와 대화하다가 사건으로서의 존재라는 아이디어를 얻어서 그의 책에 사용했는데, 화이트헤드가 유감을 표명하면서 절교로 이어졌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사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잘못 이해된 방식으로 사전에 알려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러셀에게 암시를 주었던 그 생각이 훗날 <과정과 실재>에 포괄적으로 기술된 것으로 보이는데, 화이트헤드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많은 부분을 공유했던 러셀도 이해하기 힘든 어떤 '사상적 단절'이 <과정과 실재>에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파멸의 목시록> 역자의 경력에 증산도와 관련된 부분이 있는게 저에게는 편견의 눈으로 책을 보게 하는 군요^^

빵가게재습격 2010-01-30 00:2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과학과 근대세계>를 보니 약간 유감스러워서 끄적입니다. 저도 얼마 전 서점에 갔다가 <과학과 근대세계> 개정판이 나온 걸 보고 좀 뒤적거려봤는데요. 양장본이 된 걸 제외하면 이전 판본(?)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더군요. -저는 1판 8쇄, 2005년도에 출간된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격이 무려 만삼천원이 더 올랐더군요. 물론 여러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좀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차라리 양장본을 포기하고 5000~8000원 정도의 인상폭이 어땠을까(너무 야박한가요?^^)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로쟈 2010-01-30 10:1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서점에서 보고 좀 심하단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중원문화사에서 재간되는 철학 책들도 가격을 보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펠릭스 2010-01-30 13:27   좋아요 0 | URL
좀 생뚝맞은 소릴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이 책을 사서 읽는다는 의미속에는 단순히 책을 통독한다는 의미보다는 어떤 경제원리가 적용되는 것같아요. 베스트셀러의 속성은 재미와 구입자의 경제적인 사정과 더불어 사회적 통념 등이 작용한 통계치라 생각됩니다(물론 그것이 나쁘다는것은 아닙니다). 제가 지불하려는 책값 수준이 만원 전후에 머룰러 있다는 것도 고정 관념의 일환(경제적 지불 능력)이겠고, 다른 사람이 2~3만원선의 책을 선택한 것도 또한 본인 선택 사항이라 생각하지만요.

로쟈 2010-02-01 15:02   좋아요 0 | URL
그만큼 독자층이 엷다는 반증이어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시라소니 2010-01-30 15:0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파멸의 묵시록>을 번역한 이현휘입니다. 우연히 이곳에 들렀는데, "푸른바다"님의 댓글이 눈에 띠어 몇자 적고자 합니다. 제가 잠시 증산도사상연구소에 순수 학자의 신분으로 근무한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곳을 그만 두고 다른 곳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알라딘의 역자 프로필 대신, <파멸의 묵시록> 역자 프로필 참고). 이 문제는 저에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파멸의 묵시록>이라는 책의 주제와 증산도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즉, 증산도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파멸의 묵시록>을 번역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곳에 와보니 화이트헤드에 관심있으신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 반갑습니다. 화이트헤드 철학이 동양의 다양한 사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은데, 특히 중국 학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심한데, 이런 태도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이 담겨있을 뿐, 학문적 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작 화이트헤드 자신은 서양철학 뿐만 아니라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리스나 화이트헤드에 주목한 까닭도 그 때문이었답니다. 앞으로 이곳의 논의가 아주 고급스런 수준에서 계속 활성화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로쟈 2010-02-01 15:04   좋아요 0 | URL
그제 서점에 들렀는데, 책이 없더군요.^^; 오프라인에서는 종로나 나가야 책을 구할 수 있으니...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 2010)이라는 다소 '구티'나는 제목의 책이 있다. 무슨 책인가 궁금했는데, 마침 저자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저자 박동천 교수는 서구 정치사상을 전공하고 퀜틴 스키너의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1>(한길사, 2004),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아카넷, 2006)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알고 보니 책으로는 '구면'이다. '사회적 자유주의'란 개념/입장이 눈길을 끈다.   



한겨레(10. 01. 28) "자유주의, 사회주의와 손잡을 여지 많아” 

2002년 노무현에게서 희망을 발견했던 유권자 가운데 300만~400만명은 5년 뒤 선거에서 이명박·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이 사실은 한국사회 부동층의 우경화를 드러내는 지표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문제는 그런 우경화가 왜 그토록 급속하게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정치학·사진)가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모티브북)에서 규명하려는 것도 바로 이 문제다. 노무현을 지지하던 그 많은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박 교수가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것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네 가지 프레임이다. ‘마녀사냥’ ‘권력숭배’ ‘선견지명’ ‘집단생존’이란 프레임이다. 이 프레임들이야말로 “우리 정치의식을 편협하고 폐쇄적이고 피상적으로 만드는 원인”이라는 게 박 교수의 진단인데, 이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이 마녀사냥 프레임이다. “가짜 문제를 하나 찾아낸 뒤 언어적 분풀이를 영속시키는 경향”이자 “보기 싫은 일이 있으면 원인이 뭔지, 무슨 탈이 실제로 생기는지,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 등을 따지기 전에 무작정 그 징후를 말로만 공격해대는 증상”이다. 지역주의가 전형적 사례다.

“지난 20여년 동안 우리 사회에선 ‘지역감정’ ‘지역구도’ ‘지역주의’ 등의 구호들이 대표적인 분풀이의 과녁 역할을 했습니다. 보수·진보를 망라해 지식인들이 20년 동안 지역감정을 열심히 비난해온 결과 이제는 거의 모든 국민이 지역감정을 말하지 않고는 한국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이런 경향들이 ‘가짜 문제’를 만들어 공론장에서는 지속적으로 그것을 공격하면서도 “사적 공간에서는 거기에 적응하는” 이중적 행위습성을 빚어낸다는 점이다. 교육 문제의 원인을 ‘대학서열화’로 돌리거나 사회위기의 근원으로 ‘신자유주의’를 지목하면서 정작 삶의 영역에서는 서열화된 대학 시스템이나 신자유주의 경쟁논리에 기민하게 적응하는 영악함이 그것이다. 이를 두고 박 교수는 “범사회적 정신분열증”이라 비판한다. 권력숭배나 선견지명(교조주의), 집단생존(민족주의)이란 나머지 프레임도 마찬가지다. 박 교수가 볼 때 이들 모두 “가짜 문제를 쫓아다니는 마녀사냥의 습성과 관계가 깊다”는 점에서, 진보진영이 결별해야 할 ‘보수적 편협성’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이런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난 새로운 제도적 지향점으로 박 교수는 두 가지를 제시한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다. 그런데 사회적 자유주의란 개념이 다소 생소하다. 박 교수는 “그 생경함이야말로 우리 사회 정치의식의 편협함과 폐쇄성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꼬집는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여러 갈래 중에는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넓”은데, 사회적 자유주의는 바로 “정치·사법의 자유주의”와 “소외계층의 복지”를 결합한 제도다. 그 사례를 박 교수는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과 20세기의 케인스 등에서 찾는다.

“‘곤들매기(작은 물고기 등을 먹고 사는 연어과 민물고기)의 자유는 붕어에겐 죽음’이란 말이 있어요. 자유주의자가 이 측면을 도외시한다면 파시스트에 가까운 것이고, 사회주의자로서 절차를 배척한다는 것은 사춘기적 열사숭배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박 교수는 ‘제도의 변화’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진 않는다. 중요한 건 ‘공론의 변화’다. 공론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도 제도를 바꿀 순 있지만, 이 경우 법률의 문구만 바뀔 뿐 사람들의 행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요청하는 것은 공론과 제도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적 사고인데, 문제는 지금의 진보진영에선 그런 유연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가시화한 ‘반신자유주의 연대론’과 ‘반이명박 연대론’의 대립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히 편을 가르기 위한 명칭이란 것 말고 구체적인 내용이 있는지 회의적입니다. ‘신자유주의 반대’는 ‘자본주의 반대’와 마찬가지로 뚜렷한 정책지향을 담을 수 있는 문구가 아닙니다. ‘이명박 반대’도 적극적 가치를 표명하지 못하는 소극적인 저항 구호인 것은 마찬가지지요. 결국엔 진영 간의 주도권 다툼이 아닌가요?”

박 교수는 이러한 담론상의 대립이 실상은 자기 진영의 주도권 확보를 노린 정치적 욕망의 표현임을 서로가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쌍방이 상황을 이처럼 세속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뭔가 엄숙한 의미를 불어넣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면” 타협의 가능성을 좁히고 결국엔 판을 깨는 것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뉴질랜드에 체류중인 박 교수와의 대화는 이메일을 통해 이뤄졌다. 600쪽에 가까운 방대한 저작의 집필에 매달렸던 이유를 묻자 “한국정치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난 정부 말기 나는 일본 같은 체제가 결국 아시아의 정치모델로 고착되지 않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집단생존에 매몰돼 공장 부품처럼 일하는 개인들로 지탱되는 사회, 도덕이나 역사에 관한 상상력은 제한되고 손재주 또는 생산력으로 그럭저럭 버티는 사회 말이죠. 이는 민중의 요구가 임계점 가까이 가면 보수파가 선심 쓰듯 수용해 장기집권을 이어가는 엘리트 순환체제입니다. 이런 흐름을 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이세영 기자) 

10. 01. 28.  

P.S. 본문과는 별도로 이번주에는 눈에 띄는 인문번역서들이 많다. 비로소 새 '시즌'에 접어든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하이데거의 니체 강연이 새로/다시 번역돼 나오는데, 일단 <니체1>(길, 2010)이 출간됐다. 역자는 하이데거 전공자이자 니체 전문가인 박찬국 교수다. 그리고 알랭 바디우의 예술론 <비미학>(이학사, 2010)도 '인덕후'들의 입질감이다. 사회심리학자 세르주 모스코비치의 <다수를 바꾸는 소수의 심리학>(뿌리와이파리, 2010)도 '왠지' 관심이 가는데, 간단한 책소개는 이렇다.  

‘사회영향이론’으로 사회심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석학 세르주 모스코비치의 대표 저작. 사회적 권위와 규범에 저항하는 적극적 소수가 사회의 변화와 진보를 이끈다. 동조와 복종의 심리학에서 이탈과 혁신의 심리학으로 살펴보는 저자는 다수 중심의 기존 사회심리학이 보인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고 소수가 사회적 변화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그밖에 국내서로는 이진경의 '역작' <역사의 공간>(휴머니스트, 2010)과 김영민의 <김영민의 공부론>(샘터사, 2010)이 관심도서다. 다른 자리에서 언급한 김진석의 <더러운 철학>(개마고원, 2010)과 함께 이번주 리뷰가 기다려지는 책들이다...  

P.S.2. 지젝의 책도 돌라르와의 공저 <오페라의 두번째 죽음>(민음사, 2010)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이왕이면 바디우와의 공저 <현재의 철학>(2009)도 소개되면 좋겠다. 랑시에르의 <미학 안의 불편함>(인간사랑, 2008)도 영역본이 <미학과 그 불만>이란 타이틀로 출간됐다. 책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디우의 <비미학>과 찍지어 읽어보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얼추 2월의 독서 스케줄이 다 채워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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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10-01-28 15:40   좋아요 0 | URL
좋은책들 정말 많이 등장했군여ㅋㅋ정보 감사합니다~

로쟈 2010-01-28 18:28   좋아요 0 | URL
네,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네요.^^;

바밤바 2010-01-30 03:15   좋아요 0 | URL
김진석 교수가 또 책을 내나 보네요. 정녕 기대 되네요.^^;;

로쟈 2010-01-30 10:07   좋아요 0 | URL
이번주 한겨레에 서평이 실렸습니다...

펠릭스 2010-02-01 14:19   좋아요 0 | URL
한국사회 부동층은 실용주의적인 성향 때문일까요? 저자가 말하는 '이중적 행위습성'인 '범사회적 정신분열증'은 지젝도 언급하고 있더군요. 사회적 모순의 해결을 위한 '공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토론 문화는 논증없는 주장이 많아 패거리화되는 성향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