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온 책 가운데 화제작은 가장 두툼한 책이기도 한 박성관의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그린비, 2010)이었다. 하지만 당장엔 읽을 여유가 없어서 책을 구해놓고도 리뷰기사를 옮겨놓는 것마저 생략했었다. 인터뷰기사를 포함해서 리뷰기사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굳이 거들지 않아도 됐고.  

원래 같이 묶어서 다루려고 했던 책은 앤드류 니키포룩의 <대혼란: 유전자 스와핑과 바이러스 섹스>(알마, 2010)였다. '21세기를 위협하는 생물학적 유행병에 대한 보고서'이기에 최근의 구제역 파동과 관련해서라도 크게 다루어질 만한 책이었지만 아직까지 리뷰가 뜨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번 주말에나 다루어지는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아직 주목받지 못한 책 가운데 개인적인 관심도서가 몇권 더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시몬느 코르프소스의 <아버지들에 대한 찬사>(해피스토리, 2010)도 그중 하나다. 필리프 쥘리앵의 <노아의 외투>(한길사, 2000)와 견주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소개기사가 뜨지 않고 있고 알라딘의 책소개도 목차만 나와 있는 형편이다(저자에 대해서 '뒷조사'까지 해두었지만 바쁘기도 해서 포스팅은 미뤄두고 있다). 내달에 카뮈의 <최초의 인간>(열린책들, 2009)을 강의에서 다룰 기회가 있는데, '아버지'란 주제에 대해서는 그때쯤 포스팅을 할까 한다.  

생물학과 정신분석학을 거쳐서 시선을 경제학쪽으로 옮기면, 지난주 관심도서는 리처드 윌크와 리사 클리젯 공저의 <경제 인류학을 생각한다>(일조각, 2010)이다. 찾아보니 필립 커튼의 <경제인류학으로 본 세계무역의 역사>(모티브북, 2007)란 책도 이미 나와 있다. '경제인류학'은 물론 칼 폴라니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된 분야인데(폴라니의 책은 조마간 더 나오는 것으로 안다), 신간은 이 분야에 대한 계보도를 그려줄 것으로 기대된다. 크게 주목받지는 않은 책인데(학술적인 성격의 책이어서인가 보다) 그래도 거의 유일한 소개기사를 늦게나마 스크랩해둔다. 학술서라고 해서 제쳐놓지는 않으니까...  

 

서울신문(10. 04. 28) 경제학계 마이너리티 칼 폴라니 금융위기 이후 그의도덕경제 다시 깨어났다

미국 금융사 리먼 브러더스 파산과 함께 불어닥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때 뜻밖의 일은 또 하나 있었다. 금융자본주의의 폐해가 드러났음에도 사람들은 위기와 공황이 화두였던 칼 마르크스를 찾지 않았다. 대신 불려 나온 사람은 ‘시장경제 따위는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한 적도 없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망상’이라고 선언한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1886~1964)였다. 오래 전 절판된 폴라니의 책 ‘거대한 전환’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다.

●시장경제도 결국 잘살기 위한 도구
아마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는 상황을 끝내고 사회가 시장을 통제해야 한다는 폴라니의 주장이 마르크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마켓 프로세스 자체가 목적”이라는 하이예크식 자유시장 논리보다 시장경제도 결국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이라는 상식도 작용했다. 



이번에 출간된 ‘경제인류학을 생각한다’(리처드 윌크·리사 클리젯 지음, 일조각 펴냄)는 폴라니로 상징되는 경제인류학적 논의에 대한 입문서다. 냉정하게 말해 경제학계에서 경제인류학적 논의는 그다지 발언권이 없다. 기존 분과학문 체계에 잘 들어맞지 않는 데다 복잡한 수학 모델을 즐겨 쓰는 현대 경제학 흐름 속에서, 문화와 역사 운운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비쳐질 수 있어서다.

“경제인류학 연구를 수행하고 글을 쓰는 사람도 자신이 경제인류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저자의 언급이나, 척박한 토양 때문에 “이 책과 상호보완해서 읽을 수 있는 문헌이 지극히 적은 현실이 안타깝다.”는 번역자(홍성흡 전남대 교수)의 언급은 이런 현실을 반영한다.

대형마트보다 동네슈퍼의 생존이 더 중요
경제인류학의 핵심은 ‘시장경제가 현대 인간사회의 핵심이라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가령 폴라니는 경제활동을 교환(exchange)·호혜성(reciprocity)·재분배(redistribution)로 나눈 뒤, 시장경제는 교환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호혜성이나 재분배 같은 전근대적 경제활동을 ‘도덕경제’(Moral Economy)라 부르며 이미 끝난 것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런 도덕경제적 요소는 아직까지도 교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게 폴라니의 주장이다. 이는 경제학의 정교한 수학모델 대신 주변을 잠시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대기업들은 준조세라며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사회공헌활동을 벌인다.

대형마트의 경쟁력보다 동네 슈퍼마켓의 생존이 더 중요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온다. 폴라니식 표현에 따르면 시장경제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에 ‘묻어가는(embedded)’는 것이고, 시장경제가 제 분수를 잊고 점령군처럼 나대면서 ‘악마의 맷돌’이 인간과 사회를 갈아버린 것이다. 



고전경제학에서 문화경제학까지 두루 다뤄
무엇보다 책의 장점은 그간 경제에 대한 논의가 알기 쉽게 총망라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시경제학적 흐름에 대해서는 애덤 스미스로부터 고전경제학을 거쳐 최근 논의되는 제도경제학, 행동경제학, 실험경제학까지 두루 건드린다. 또 사회·정치경제학적 흐름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와 종속이론가들은 물론,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에밀 뒤르켕이나 구조기능주의자들까지 다뤘다.

문화경제학에서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 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민족지학자 프란츠 보애스, ‘증여론’으로 유명한 마르셀 모스, ‘두꺼운 서술’(thick description)을 언급한 클리퍼드 기어츠 등이 등장한다. 종착역인 결말에서는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까지 끌어들인다. 경제인류학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서구 사회과학 전반을 훑어볼 수 있다는 뜻이다.(조태성기자) 

10.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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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0-05-06 22:11   좋아요 0 | URL
제 무식함을 드러내는 물음일 수도 있는데 원제가 Economies & Cultures 니까 경제인류학보다는 경제문화학이라고 옮기는 게 더 알맞을 거 같은데요.

로쟈 2010-05-06 23:29   좋아요 0 | URL
'문화학'이란 말은 용례가 또 달라서요. 저자 서문 같은 봐야 좋을 듯해요. 한데, 책은 어지간한 서점엔 없더군요...

로쟈 2010-05-08 10:16   좋아요 0 | URL
아, 부제가 '경제인류학의 토대'입니다...
 

지난주에 배송받은 책 가운데 가장 두툼하고 무거운 것은 엘레나 코스튜코비치의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랜덤하우스, 2010)이다. 책이 배송된 건 추천평을 썼기 때문인데, 나한테까지 청탁이 온 건 이탈리아 음식이나 문화에 내가 무슨 조예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가 러시아인이어서다. 거기에 '이탈리아 문화와 풍속으로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라는 게 부제여서다.  

 

책은 초고 상태로 봤을 때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근사한 모양새로 나왔다. 표지도 영어본이나 이탈리아어본, 혹은 러시아어본보다도 더 나아 보인다. 


<영어본>


<이탈리아어본>  

 
<러시아어본>   

 
<장미의 이름>(러시아어판)

책의 서문은 움베르토 에코가 쓰고 있는데,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저자가 움베르토 에코의 러시아어 전담 번역자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판 움베르토 에코가 대부분 엘레나 코스튜코비치의 작품이란 얘기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 러시아어판으로 '러시아 올해의 번역상'까지 수상한 이후에 에코와는 막역한 관계가 된 듯하다(번역에 까다로운 에코를 만족시킨 셈이니 실력을 짐작해볼 수 있다).  

 

에코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 책의 주인공들에게 꼭 음식을 먹인다. 음식을 먹을 때, 독자도 함께 그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가면 다른 그 무엇보다 그곳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음식이다. 이탈리아 요리에 탁월한 안목을 갖춘 코스튜코비치는 그녀의 음식여행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가장 신비하고 오묘한 진짜 이탈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고 주저 없이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내가 적은 추천사는 이렇다.  

내게 이탈리아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나라다. 물론 축구의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테의 ≪신곡≫을 읽고 세리에A의 경기를 즐기는 것으로 이탈리아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탈리아는 그 무엇보다 “파스타와 피자의 나라” 아니던가? 이탈리아를 깊이 사랑하는 러시아 저자의 이 음식기행은 음식 코드가 이탈리아인의 삶의 핵심이자 영혼이라는 걸 알려준다. 이탈리아 지도를 펼쳐들고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는 저자의 성찬을 맛보고 나면, 아마 이탈리아 요리가 그저 단순한 음식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해봐야 피자와 스파게티, 파스타, 그리고 리조토 정도를 아는 처지이지만, 책은 음식만큼이나 음식 이야기를 즐기는 이탈리아 문화의 속살을 이모저모 알려준다. 이탈리아 요리 전문가인 박찬일씨는 이렇게 평했다. "일찍이 이탈리아의 복잡한 요리문화사를 이토록 감칠맛 나게 풀어낸 책은 없었다!" 하여, 이탈리아 음식 애호가라면 기꺼이 소장해둘 만하다.  

 

10.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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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나라는 아무리 파고들어도 배부르지 않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6 23:47 
    엘레나 코스튜코비치의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랜덤하우스, 2010)에 대한 소개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저녁 강의를 끝내고 돌아와 간단히 요식을 했는데, 문득 모스크바에서 시내에 나갈 적마다 자주 먹던 스바로 피자와 생맥주가 생각이 났다. 역시나 피자는 이탈리안 피자였는데...    연합뉴스(10. 05. 06) 풍성하고 맛깔스러운 이탈리아 문화탐방
 
 
로렌초의시종 2010-05-03 21:40   좋아요 0 | URL
그래서, 나오자마자 주문했습니다~^^ㅋㅋㅋ 작가, 추천자, 주제 모두가 맘에 들어서요~ 일부 주요 지역만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각 지역의 개성을 하나하나 짚어나간 것 같아서 기대중입니다.

로쟈 2010-05-03 21:57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통이시네요.^^

Joule 2010-05-03 21:55   좋아요 0 | URL
이럴 때 괜히 좀 뿌듯해요. 우리나라 책표지가 제일 이쁘네요.

로쟈 2010-05-03 21:56   좋아요 0 | URL
편집도 잘 돼 있습니다.^^

Kitty 2010-05-04 00:03   좋아요 0 | URL
우와 책도 예쁘고 먹는거라(!) 관심이 가네요.
얼른 장바구니에 담아갑니다!

로쟈 2010-05-04 09:21   좋아요 0 | URL
네, 식욕을 자극하는 책입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같은...

푸른바다 2010-05-04 09:23   좋아요 0 | URL
스파게티도 파스타의 일종^^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서양식 레스토랑은 아메리칸 패스트 푸드를 제외하곤 이탈리아 식당이 유일한 것 같네요. 이탈리아 식당에 몇번 가보기는 했는데 저도 잘 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러시아 인들과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생활해 본적이 있는데 뭐랄까, 아무튼 제가 일상적으로 상상하는 조합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돼지비게와 빵, 절인 대구 샌드위치, 구성물을 추측하기 어려운 스프들...^^ 전 그럭저럭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제일 아래 사진의 주인공이 저자인가요? 에코를 만나고 있는 중간 사진 속 인물과 머리 색을 비롯해서 무척 달라 보이는 군요. 들고 있는 책 제목이 러시아 알파벳 세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의미도 궁금하군요.^^

로쟈 2010-05-04 09:22   좋아요 0 | URL
같은 저자입니다. 나이차가 좀 나지만. 러시아어 제목은 <음식: 이탈리아인의 행복>입니다. 이탈리아식당 메뉴에도 '스파게티'와 '파스타'는 따로 배열돼 있어서요.^^

stella.K 2010-05-04 11:17   좋아요 0 | URL
와우, 저도 이탈리아 음식 좋아하는데...
근데 저자가 러시아 사람이라니 흥미롭군요.
더구나 박찬일 셰프가 감수를 했다는 것도 끌리구요.
뭐 추천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근데 문제는 책값이 너무 비싸다군요.ㅜ

로쟈 2010-05-05 10:48   좋아요 0 | URL
저는 더 비쌀 줄 알았어요.^^;

세실 2010-05-04 22:14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책 표지가 참 세련 되었어요. 님의 추천사가 읽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불러 일으킵니다.
근데 저 분위기 있는 여인이 작가? 멋져요.
서있는 폼이 예사롭지 않아요~ 무용하셨나???

로쟈 2010-05-05 10:49   좋아요 0 | URL
그런 정보까진 안 나오던데요.^^

Mephistopheles 2010-05-05 11:14   좋아요 0 | URL
다른 것도 아니고 "먹는" 이야기라면야....^^

로쟈 2010-05-05 19:04   좋아요 0 | URL
한국도 음식을 즐기는 문화인데, '음식 이야기'는 이탈리아에 못 미치는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맛집 문화'만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새로운 시대의 가치혁명을 위하여

어제 중앙게르마니아 강연이 끝나고 뜻밖에도 인디고 팀원들에게 이번에 나온 국제판 <인디고>(2010년 봄호)를 선물로 받았다. 안 그래도 어제 오전에 장바구니에 넣어둔 책이다. 지난번에 <가치를 다시 묻다>(궁리, 2010)도 나를 놀라게 한 책이었는데, 깔끔한 장정의 국제판은 한번 더 놀라게 한다. 다음 세대 인문학에 대한 걱정은 내 몫이 아닌 듯하다. 하긴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는 중학생도 있다고 하니 그저 놀라울 따름. 잡지 창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10. 04. 30) 부산 청소년들이 만드는 국제 인문학잡지 '인디고' 창간 

부산의 인디고서원은 국내 하나뿐인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서점이다. 수영구 남천동 학원가에 자리잡은 이 책방은 2004년 8월 문을 연 이래 놀라운 실험들을 해왔다. 참고서나 상업적 베스트셀러는 팔지 않는다. 서가는 온통 인문학 책 차지다. 더 좋은 세상과 참된 삶을 고민하고 실천하려는 청소년들에게 정신적 양분이 될 책들만 엄선해 꽂아놓았다.

그동안 해온 활동은 더 인상적이다. 저자를 초청해 대화를 나누는 '주제와 변주', 주말의 독서 토론 모임, 자유ㆍ저항ㆍ진실 등 인문학적 가치를 주제로 토론하는 '정세청세' 등은 중고생이 주축이다. 23호를 낸 격월간 인문 교양지 '인디고잉(INDIGO+ing)'도 인디고 아이들이 직접 만든다. 입시 지옥에서 점수의 노예로 사는 한국 청소년의 현실을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일이다.

인디고서원이 또 한 번 혁명적 발걸음을 내딛었다. 인디고 아이들이 전세계 지성들과 함께 만드는 국제판 인문학 잡지 '인디고(INDIGO)' 를 창간, 29일 1호를 선보인 것이다. 전세계로 보내는 영어판 계간지다.

잡지를 통해 인문학적 가치와 실천을 위한 국제적 담론을 펼치고 공유하려는 연대의 장에 편집위원장을 맡은 철학자 겸 평화운동가 브라이언 파머(스웨덴 웁살라대 교수)를 비롯해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등 6대륙에서 11명의 지성인과 실천가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이메일 교류와 인터뷰 등을 통해 인디고서원의 활동을 알고 적극 응원하게 된 이들은 창간호에 무보수로 글을 썼다. 한국의 고등학생과 대학생 등 청소년들의 글이 나란히 실렸다.

이 잡지 발행인은 인디고서원 대표 허아람(39)씨. 그는 부산 지역에서 올해로 21년째 청소년 독서 지도를 통해 인문학 운동을 하고 있다.

국제판 '인디고'의 한국인 편집진은 편집장 박용준(27)씨를 포함해 3명이다. 박씨는중학생 시절부터 허씨가 이끄는 모임에서 인문학 책을 읽으며 성장한 청년이다. 그는 "국제판 '인디고'는 전지구적 변화를 꿈꾸는 새로운 인문적 연대의 시작이자 공동선을 향해 나아가려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파머 교수는 국제판 '인디고' 창간호에 기고한 글에서 "병 속에 담긴 편지나 풍선에 달린 편지처럼 이 잡지가 전세계로 전달되어 대의와 희망을 향한 소통의 장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인디고 아이들이 세계의 지성들과 교류하게 된 데에는 파머 교수의 역할이 컸다. 세계 지식인 16명과 하버드 대학생들의 대화를 정리한 <오늘의 세계적 가치>가 2007년 1월 국내 번역 출간되자, 인디고 아이들이 거기 참여한 파머 교수에게 이메일을 보내 책 내용을 비판하며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지적해줘서 고맙다며 오라고 했다. 그해 4월 인디고 아이들은 스웨덴으로 가서 파머 교수를 만났다. 인디고의 대의와 활동에 감탄한 그는 노엄 촘스키 등 세계의 지성과 실천가들을 소개해줬다.

창간호 특집은 '가치를 다시 묻다'. 인디고서원이 8월에 여는 제2회 인디고 유스 북페어의 주제이기도 하다. 올바른 가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책을 중심에 놓고 토론과 강연, 공연 등으로 풀어가는 행사다. 외국에서 40여명의 지성들이 와서 인디고 아이들을 만날 예정이다. 



이 축제를 준비하기 위해 인디고 아이들과 청년들은 세계의 지성과 실천가들을 찾아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최근 나온 단행본 <가치를 다시 묻다>는 그들을 인터뷰하고 책을 읽으며 공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국제판 '인디고' 창간호는 당시 만났던 미국의 진보적 지성 하워드 진을 표지인물로 실었다. 그는 올해 1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인디고 팀과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인디고서원 허 대표는 " 국제판 '인디고' 창간은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놀라운 게릴라전이 아니라 인디고서원이 지난 6년 간 걸어온 길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했다. 그는 "자본의 세계화를 뛰어넘는 인간적 가치를 공유하며 전지구적 변화를 일으키는 공론의 장으로서 이런 잡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요즘같은 인터넷시대에 웹진으로 만들지 않고 굳이 종이책으로 내는 것은 더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한국 인구의 75%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반면, 아프리카에서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0.5%밖에 안 된다고 그는 부연했다. "쓰레기더미에서 먹을 것을 뒤지다가 발견한 잡지 한 권으로 인생이 바뀐 아프리카 소년의 이야기처럼, 우리 잡지가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삶의 변화를 이끄는 매체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오미환기자) 

10.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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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5-01 10:40   좋아요 0 | URL
시차적 관점을 읽는 중학생이라. 와 ^^. 정신이 번쩍 드네요.

로쟈 2010-05-01 10:50   좋아요 0 | URL
네, 지젝을 읽는 고등학생까지는 제가 아는데, 갈수록 청출어람입니다.^^

아포지 2010-05-01 12:51   좋아요 0 | URL
중학생에게 "너나 잘 하세요..."라고 한 마디 들은 것 같습니다.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로쟈 2010-05-02 16:56   좋아요 0 | URL
요샌 외국어를 잘하는 초등학생도 많고, 인문서를 읽는 중학생도 많다네요. 편차가 크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요...

미지 2010-05-01 18:55   좋아요 0 | URL
우리 중학교 때, 그러니까 70년대에 사르트르나 까뮈를 읽었거든요... 근데 요즘 너무 암울한 상황과 경쟁 논리에 몰리다 보니, 그때 우리 나이의 요즘 아이들이 그런 책을 당연히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하는 불구 상태에 제가 빠져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오네요. 참 반가운 소식입니다. 인디고 이끄시는 허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비판 정신과 함께 긍정적 실천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머리를 한 대 꽝 맞은 느낌입니다.

로쟈 2010-05-02 16:57   좋아요 0 | URL
네, 인디고 같은 성공사례가 더 많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새로 나온 책 가운데 '학출'이란 단어를 오랜만에 접하게 되어 낚아놓는다. 오하나 지음, <학출>(이매진, 2010). 학출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을 가리키던 은어다. 목차를 보니 내가 대학에 들어올 때쯤은 '지식인 비판과 학생 출신 노동자 운동의 위축'이란 제목으로 정리돼 있는데, 내 기억에도 그렇다. 나는 '학출 이후' 세대다. 물론 지금은 학출이란 말조차 생소한 시대가 됐지만. 내겐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와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 때문에 가끔씩 떠올리게 되는 단어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던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이매진, 2006)와 함께 노동운동사의 한 페이지로 기억됨직하다.

한국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학출’이라는 은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 80년대는 대학 졸업장이 미래를 보장하던 시대였지만, 수많은 대학생들은 그 안락함을 내팽개치고 은밀히 공장행을 택했다. 이 사람들이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 바로 ‘학출’이다. 그때 그 대학생들을 이끈 동력은 사회의 모순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큰 ‘양심의 가책’과 시대의식, 그리고 투철한 신념과 의지였다. 그런데 그 많던 학출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게 저자의 문제의식인 듯싶고, 책의 의의는 이렇게 정리된다. 러시아에서 19세기 후반 인텔리겐치아의 '브나로드운동'(과 그 실패)과 견주어볼 만하다('실패'라곤 하지만 학출 가운데는 현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가 된 이들도 있다).   

공장에 들어간 학출들은 신분을 숨기려고 ‘먹물’의 흔적을 없애는 데 집착한 나머지, 노조 결성 등 현장에서 하려고 한 계획들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채 한 명의 평범한 노동자가 되는 데 그치거나, 공장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금방 그만두거나 여기저기 떠도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가방끈 긴 ‘학삐리’들은 노동현장과 유리되어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학출들이 노동자의 위에 서려 하거나 노동운동 경험을 정계에 진출하는 경력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다. 학출이 노사 협상이나 파업을 이끄는 지도자로 나아가지 못한 채 단순히 실무자로서 자기 활동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 결과 현재 노동운동에서는, 학출이라는 말이 저평가되어 ‘진짜 노동자’에 대비되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학출들의 생성 요인에서 그 사람들이 가진 고민들과 사후 평가까지 입체적으로 분석한 뒤 노동운동의 반지성주의 경향도 지적하고 있는 <학출 ― 80년대, 공장으로 간 대학생들>은, 학출과 80년대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것이다.

요즘은 대학생이 아니라 기자들이 공장에 간다. 한겨레21의 '노동OTL' 기사를 묶어낸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2010)은 네 명의 기자가 시급 4천원 노동 현장을 한달씩 체험하고 쓴 '노동일기'이다. 작년에 나온 <일어나라! 인권OTL>(한겨레출판, 2009)의 속편격이다. 책에 추천의 글을 쓴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의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한겨레출판, 2008)와 같이 읽어봄직하다. 단행본에 덧붙여진 맺음말에는 이런 대목이 포함돼 있다.  

책 전체에서 소개되는 가슴 먹먹한 사연에, 가슴 답답한 현실에 “왜 이렇게 날 불편하게 하느냐” “그렇다면 도대체 대안이 뭐냐”라고 되묻는 독자들도 있다. 불편하고 막막하기는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취재 이후, 임인택 기자는 말수가 줄었다. 임지선 기자는 식당 아줌마를 더 이상 재촉하지 않는다. 전종휘 기자는 엄지손가락에 못이 박히는 산재를 입고 수염이 덥수룩해져 돌아왔고, 안수찬 기자는 아직도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고된 취재 끝에 얻은 작은 성과라면 이제 통계수치나 정책의 대상이 아닌 체온이 있는 ‘사람’으로 비정규직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적힌 노동은 숫자가 아니다. 복잡한 정책도 아니다. 강력한 구호는 더구나 아니다. 다만 글로 옮기는 것조차 불편한 현실이다. 가난한 노동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들의 부모와 자식은 왜 가난한 노동자인가. 그들은 왜 아무 말 없이 감정과 의견도 숨기고 닫힌 세계를 인내하는가. 노동의 문제를 구조와 제도로 치환하지 않고, 정책적 대안을 공연히 병렬하지도 않고, 오직 그들의 감정과 경험과 일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만 애를 썼다.

연재기사를 찾아 한창 읽고 있는 중이다... 

10. 0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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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4-29 12:57   좋아요 0 | URL
비슷한 범주의 책인,김원 선생님의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전희경 선생님의 <오빠는 필요없다>을 소장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두 권 다 읽으면서 불끈불끈하는 무엇이 있었습니다. 이 책도 그런 느낌을 줄 것 같네요. 한윤형이나 박가분 같은 친구들이 '활동가 시대의 종언'에 대한 의견을 넌지시 내놓은 걸 봤는데, 알라디너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은 주제를 던져줄 수 있는 책인 것 같아, 조용히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로쟈 2010-04-30 00:32   좋아요 0 | URL
<오빠는 필요없다>는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2010-04-29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30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4-29 19:00   좋아요 0 | URL
학출... 오랜만이네요.
활동가들이라고 모두 훌륭한 인생을 산 건 아니죠.
그 당시 치열하게 살았던 과거를 이용해 한나라당에서 열라 뛰는 아그들 보면... 학출의 쪽팔림이 전해집니다. 이재오, 김문수... 그리고 박종철이 죽어가면서 지켰던 이름의 개새끼...

로쟈 2010-04-30 00:3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여전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죠...

루체오페르 2010-04-30 00:36   좋아요 0 | URL
왜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는가...그렇다면 대안은 뭔가...
정말 대안은 뭘까요. 특별히 없는것 같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못한다고 이미 개인의 의지,노력 차원은 떠난것 같거든요. 그래도 살아야지 이거인것 같습니다.

ps ; 뜬금없지만 로쟈님은 혹시 속독법 같은것 배우신적 있으신가요? 읽어내시는 책,기사 합해 텍스트의 양이 어마어마한것 같은데 그걸 다 읽고 이해해서 출력하실려며 상당히 빨라야 할것 같거든요. 요즘 글 읽는 속도와 양에 대한 생각이 좀 들어서 궁금합니다.^^;

로쟈 2010-04-30 00:40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 때 조금 독학하다가 말았습니다. 속독'법'은 아니고, 피치못할 때 발췌독은 하지요. 그래도 허겁지겁 읽는 것보다는 느리게 읽는 걸 선호합니다. 그리고 서평기사를 읽는 건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학교에 나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아무도 없는 강사실에 앉아 있다. 무심코 즐찾의 알라딘을 클릭했더니 '정상화'돼 있다(아직 100%는 아닌 듯싶다). 오후부터인 것 같다. 내일 아침까지는 '휴무'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토요일 오후에도 '근무'하는 기분이다. 학교처럼 알라딘 마을도 아주 고적하다. 어제 대형서점에 잠깐 들렀을 때는 발견하지 못했다가("이번주엔 눈에 띄는 책이 없네"라고 중얼거렸다) 언론리뷰를 보고서야 챙긴 책 두 권에 대한 소개기사만 옮겨놓고 다시금 '오프라인'으로 넘어가야겠다. 드미트리 오를로프의 <예고된 붕괴>(궁리, 2010)와 에릭 윌슨의 <멜랑콜리 즐기기>(세종서적, 2010)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서울신문(10. 04. 24) 전쟁·경제위기·총·범죄… 붕괴, 미국도 소련처럼?

미국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긍정, 부정 어느 방향이든 한반도의 상황과 운명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들어선 뒤 변화와 개혁의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지만 미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학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글 뒤주에 머물지 않고 철저히 현실에 기반해 미국을 파헤치는 목소리까지 가세했다. 과연 ‘미국 없는 세상’, ‘포스트 미국의 시대’는 일부 진보주의자들의 급진적 전망일 뿐인가. 아니면 냉엄한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인가.

1991년 소련은 거짓말처럼 무너졌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패배의 충격, 각 민족국가의 독립 요구 등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미국과 함께 냉전시대의 한 축을 이뤘던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는 세계사적인 충격이었다. 오로지 소련만 쳐다보고 의지했던 범 소련권 국가들이 겪은 경제적 혼란, 대량 실업, 정치적 위기 등은 필연적 후과(後果)였다.

그렇다면 미국의 상황은? 만약에 미국이 소련처럼 붕괴한다면,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나올 때마다, 미국 이후 시대에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절박하게 미국에 매달리게 되곤 한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최근 두 차례의 이라크전쟁의 패배 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등 금융자본 전횡의 후폭풍 등은 심상치 않은 위기감을 보여준다. 



‘예고된 붕괴’(드미트리 오를로프 지음, 이희재 옮김, 궁리 펴냄)는 19세기 이후 최대 제국, 미국이 구 소련과 비슷한 양상으로 붕괴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학술적 측면의 접근이 아닌, 현장 중심의 근거들을 갖고 실증적 접근을 통해 이를 예견한다.

1962년 구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저자는 스스로 “전문가도, 학자도, 운동가도 아닌 목격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냉전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미국을 오가며 고에너지 물리학에서 인터넷 보안 등까지 다양한 분야의 엔지니어로 활동한, 드문 이력을 갖고 있다. 이는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를 직접 목격했음은 물론 미국 자본주의 현장을 구석구석 체험했음을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파산하기 전 소련과 현재의 미국은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소련이 외채에 시달렸던 만큼, 미국 역시 재정 적자와 달러 가치 하락에 시달리고 있다. 냉전 뒤에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감내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국방비 지출을 늘려 왔다. 이는 고스란히 지나친 석유 의존도로 이어졌다. 1980년대 중반, 석유 부족으로 경제 위기를 맞았던 소련과 비슷한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미국의 상황이 더욱 우울한 근거로 저자는 “세계 최고의 범죄율과 민간인에게 풀린 수억 자루의 총”을 든다.

책 뒷부분에서는 아예 붕괴를 기정사실화한 뒤 각자의 대처법을 제시한다. 3단계로 나뉜 일종의 ‘생존 가이드라인’이다.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공동체의 힘을 믿고 따르며(완화), 붕괴 이후 석기시대에 준한 세상에 맞춰 불편하게 살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며(적응),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것(기회)이다.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쉽게 읽히도록 풀어냈다.(박록삼기자)   

 

한국일보(10. 04. 24) 입만 열면 행복 행복… 우울이 창조의 원천인줄 모르시나요?

"유감스럽게도 우리 시대에 어디를 가나 보는 것은 가면을 쓴 모습이다. 행복한 얼굴이라는 분칠… 탈출을 감행한 날 욕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다. 다소 슬프고 음울한 표정이다. 당연하다. 행복 나라에서 탈출한 결과 자연스러움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 아름다움이 스민 우리의 얼굴임을 깨닫는다."(121쪽)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묻는 책은 많다.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릴게요, 친절한 안내서도 넘친다. 육탄전을 치르듯 행복을 갈구하지만 좀체 그것을 얻지 못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일 터. 이 '행복 쟁탈전'의 패잔병들은 스스로를 우울, 다른 말로 하면 멜랑콜리(melancholy)의 포로로 여기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이 책_원 제목이 'Against Happiness'다_은 이렇게 선언한다. "멜랑콜리야말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멘토다!" 



미국 웨이크포레스트대 교수인 저자는 문학과 심리학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영문학자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잘 짜인 행복 방정식에 맞춰 항상 방긋거리며 만족의 통념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기성품처럼 표준화된 이런 행복을 욕망하는 것은 진솔한 삶의 태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에 깃든 세상과 우주의 두 가지 상반된 요소_고통 혹은 체념이라는 극, 짜릿한 즐거움과 기쁨이라는 다른 극_에 한쪽 눈을 감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한다.

오히려 저자는 멜랑콜리가 삶의 필수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인류의 소중한 문화적 원천, 모든 창조와 발명을 가능케 한 귀중한 영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책을 쓴 배경을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우울증 따위는 대패로 밀어버리듯 하며, 그 결과 인류의 창조적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멜랑콜리마저도 멸종 위기에 놓이게 된" 현실이라고 밝힌다. 다소 격정적인 그의 토로를 그대로 옮겨보자.

"멜랑콜리라는 것은 우리 영혼의 떨림 혹은 흔들림에 다름아닌데, 그것이 완전히 멸종된다면 인간이 추구해온 장대한 소망이라는 탑은 어느 날 갑자기 휘청거리며 무너지지 않을까? 가슴을 쥐어뜯는 고통과 아름다움이 함께 교차하는 인간 삶의 교향곡은 어느 날 갑자기 멈춰버리지 않을까? … 이런 움직임은 지구온난화 같은 생태학적 위기, 핵무기 확산 같은 디스토피아적 상황 못지않게 위험하다."(12쪽)

 

저자는 행복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켜 인류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천재들의 사연을 논거로 동원한다. 예컨대 존 레넌. 그는 전쟁, 부모의 이혼, 어머니의 죽음을 차례로 겪으며 성장했다. 상심과 번민에 지친 영혼이었기에, 그의 음악은 깊은 울림을 지닐 수 있었다는 얘기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 낭만피 시인 존 키츠, 심리학자 카를 융 등도 공통적으로 '인공적인 행복'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독과 은둔을 택했다. 저자는 상실감과 슬픔의 정서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이 숨쉬는 삶의 무대라고 거듭해 말한다. 이 책은 그 무대, 곧 창조적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의 초대인 셈이다.(유상호기자)  

10. 04. 24.  

P.S. <예고된 붕괴>는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과 '옮긴이의 말'만 읽어보더라도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오를로프는 '석유 고갈 분야의 저명한 이론가'로 소개되는데, 그가 '미국 붕괴' 전망의 중요한 근거로 들고 있는 것도 석유 고갈 문제다. 원유의 급격한 고갈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지만 '세계 최대의 에너지 소비국'이면서 '세계 최대의 채무국'인 미국은 이에 대처하기 힘들 거라는 점. 세계 5위의 원유 수입국이면서(한국은 일본과 독일보다도 자원 낭비가 심한 나라라고 한다), '미국을 가장 닮은 나라'(강준만)라는 한국도 이러한 전망에서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석유 고갈 문제라고 하니까 석유정점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로 소개된 리처드 하인버그의 책도 참고해볼 만하다. <파티는 끝났다>(시공사, 2006)과 <미래에서 온 편지>(부키, 2010)가 번역돼 있다.   

한편, 멜랑콜리와 관련해서는 김동규의 <멜랑콜리 미학>(문학동네, 2010)도 신간이다. 저자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사랑하고 죽는다. 그렇다면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예술과 철학을 만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고. <글루미 선데이>에 대한 글도 말미에는 붙어 있는데, 글루미한 날에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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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hema 2010-04-24 15:06   좋아요 0 | URL
존 레논은 마약과 환각제 상습 복용자였고, 오컬트에 깊이 빠졌었고,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했었던 비정상적인 인간이었지요.

로쟈 2010-04-24 21:14   좋아요 0 | URL
그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분보단 '정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mediocris 2010-04-25 00:07   좋아요 0 | URL
어떤 자의 입 방정 때문에 자살한 사람의 죽음에 대고 자살세를 거론하여 비아냥거렸지만 정작 그 어떤 자의 자살에는 침묵한 미학자에게 많은 책을 읽은 아까운 자긍심을 봉헌하는 영혼보다는 서울을 봉헌한다는 자의 영혼이 그나마 때가 덜 묻지 않았을까? 세습 왕조의 봉헌 의식은 외면한 채 줄기차게 한쪽만 비판하는 균형 감각으로 많은 책을 읽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anathema 2010-04-25 00:38   좋아요 0 | URL
아니죠. 둘 다 비정상이라고 해야죠. 거기서 거기인 인간들.

Joule 2010-04-25 14:03   좋아요 0 | URL
명박아에게 존 레논 같다고 하면 그닥 기분 나빠할 것 같지 않은데, 존 레논에게 명박아 같다고 하면 기분 나빠 할 것 같은데요.

픽션들 2010-04-25 18:11   좋아요 0 | URL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말에, 한 인간으로서 일말의 자괴감이 일지 않나요?
행복찾기의 '게임'에서 길을 잃고 개인의 순수노동을 권력에 헌납하며 살아가는 것이 덜 때묻은 것일까요?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를 단지 마약이나 과도한 자기애 등과 같은 것으로 추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많은 위대한 영화감독들도 비정상의 범주에 쑤셔넣어야 하니까요. 거기다가 베르베르나 보통 같은 작가들도 비정상의 범주에 당연히 들어갈 겁니다.

로쟈 2010-04-26 20:12   좋아요 0 | URL
존 레논과 함께 천국을 상상해볼 순 있지만 MB와는 도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