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종로의 대형서점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은 조정환의 <공통도시>(갈무리, 2010))다. 신간소개로 출간소식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책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가쓰라 아키오의 <파리코뮌>(고려대출판부, 2007)이란 책을 발견한 덕분이다. <공통도시>와 같이 읽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 하지만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고 <파리코뮌>의 구입은 나중으로 미뤘다. <파리코뮌>이 코뮌 100주년을 기념하여 집필된 책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자면 <공통도시>도 광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다. '기념'이란 과거를 재소환하는 일이기도 하다. 저자는 '광주민중항쟁과 제헌권력'이란 문제의식으로 이를 감행한다. 인터뷰기사가 저자의 문제의식을 가늠하는 데 도움을 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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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10. 05. 08) "광주항쟁 30주년은 신자유주의와 싸운 30년”
“광주 사람들은 지금도 ‘호헌파’가 만들어온 ‘폭도’라는 이미지의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다중지성의 정원’ 대표인 정치철학자 조정환은 <공통도시 : 광주민중항쟁과 제헌권력>(이하 공통도시)을 쓴 이유를 묻자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과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조정환은 당시 전두환으로 대표되는 호헌파들이 항쟁하는 민중을 ‘난동을 부리는 폭도들’ 즉, 아감벤 식으로 말하면 사회로부터 추방된 ‘벌거벗은 인간’의 이미지로 조작했다고 강조한다.
조정환이 보기에 군사정권과 극우세력이 조작한 이미지만 광주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호헌파 비판에서 더 나아간다. 즉 80년 당시 김대중·김영삼에서 이후 노무현을 잇는 개헌파가 남긴 유산과 ‘호헌철폐’ ‘김대중 석방’ 같은 몇몇 협소한 이해를 문제삼는 것이다. 바로 <공통도시>의 핵심 논점이며 이전 광주항쟁에 관한 책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조정환은 “개헌파들의 담론은 독재와 민주주의, 군부집권과 민간집권을 대립시키며 진압 과잉성을 문제삼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면서 “그들은 광주를 절차적 민주주의의 침해가 빚은 특수한 사건으로 이미지화했다”고 말한다. 조정환에게 항쟁이후 제도화되고 성역화된 광주는 돌멩이처럼 굳어지고 박제화된 것에 다름아니다. 그는 이어 “개헌파의 담론은 항쟁의 주체들을 희생자로 만들었다”고까지 지적한다. “97년 광주학살 책임자들에게 내려진 철저하지 못한 처벌은 광주 민중을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희생자로 자리매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부터 5월 운동이 그 힘을 잃기 시작했고, 김대중의 집권은 5월 운동을 종료하는 분기점이 됐다”는 것이다.
“항쟁 과정에서도 개헌적 입장이 있었죠. 지식인·학생이 주축이던 시민수습위원회와 학생수습위원회는 무기회수와 반납으로 시민군의 무장을 해제해 계엄군의 관용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의 포위·공격 속에 인간적 존엄을 걸고 싸우는 민중들을 설득할 수 없었죠.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민주시민투쟁위원회에 길을 비켜주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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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5월21일 최초로 편성된 120명의 시민군 대부분은 공장·건설 노동자, 목공, 구두닦이, 웨이터, 일용품팔이 노동자였다. “당시 광주의 다중들은 국가에 대한 의무를 거부하며 자신들을 권력주체, 즉 ‘제헌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분석한다.
조정환의 문제 의식은 신자유주의 문제로 확장된다. “박정희 정권 때 석유 위기에 맞물려 중화학 공업화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산·창원 지역에 집중되었던 중화학 공장들에서 정리해고에 맞서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 항쟁은 사북·고한에서의 광산노동자 투쟁, 그리고 광주민중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정환은 이 지점에서 당시 항쟁주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광주 민중들은 표면 의식에서는 권위주의 정부, 유신헌법, 계엄군에 대항해 싸웠지만 몸과 정동(情動)으로는 이미 신자유주의화에 맞서 싸우는 전위투사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민중을 넘는 새로운 주체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의해 강요된 신자유주의 축적 구조가 한국에서 시작된 것이 광주항쟁 진압이었다”(조지 카치아피카스)는 분석처럼 5·18을 전후해 미국 자본이 본격적으로 들어온다.
신자유주의의 침투는 향후 30년간 지속되고, 개헌파 집권 이후 본격화된다. 그는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는 돌출이 아니다”라며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 실험되고, 김영삼 정부에서 추진되고,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본격화된 정책의 연속이자 결론”이라고 말한다. “결국 광주항쟁은 개헌파에 의해 대의되어 신자유주의 이행에 필요한 민주 에너지로 편입된 것이죠. 김대중·노무현도 신자유주의의 부속품이었습니다.”
‘폭도’ 이미지는 여전히 재현된다. 그는 “정권과 극우언론은 쌍용자동차 옥쇄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을 좌익폭도로 기호화하면서, 광주시민군의 좌익폭도 이미지와 겹쳐놓았다”고 말했다. ‘포위된 광주’는 ‘포위된 쌍용자동차’ ‘포위된 용산’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게 조정환의 시각이다.
신자유주의 이행 과정에서 광주는 ‘해방도시’에서 ‘개발의 꿈속에서 빠르게 부패해가는 혁신도시’로 뒤바뀌었다. 책 제목이기도 한 ‘공통도시’는 혁신도시로부터의 탈주다. “80년 5월22~27일 사이 나타났던 광주시민의 자치공동체의 ‘공동체적 항쟁’을 통해 표현된 권력, 즉 제헌권력의 공간이 공통도시입니다.” 그는 “당시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준비하고 있던 자본의 사회에서 배제되고 짓밟혀온 이들이 공포를 딛고 일어나 인간적 존엄을 만회·천명할 기회를 본 것”이라며 “당시 광주의 투쟁은 직업, 신분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난 자유로운 전인(全人)들이 사회가 강요하는 정체성·경계를 넘어서면서 공통됨을 구축하는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조정환은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코뮤니즘의 힘과 가능성을 ‘제헌권력’과 ‘공통도시’에서 끄집어내려 한다.
2010년 현재 광주항쟁 30주년은 곧 신자유주의 30년이라는 게 조정환의 기본 시각이다. 또한 그에 대한 대항운동 30년의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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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에게 광주항쟁은 인생의 큰 분기점이기도 했다. 그는 광주항쟁 발발 즈음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경주 불국사에 있었다. “수학여행을 왔는데 교장 선생이 갑자기 인솔 교사를 소집해 서울로 돌아가자고 해 부랴부랴 올라왔던 기억이 난다”며 “이후 광주항쟁을 알게 됐는데, 내 삶을 바꾸는 큰 분기점이 됐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 그는 최근 광주의 한 강연에서 받은 인상을 들려줬다. “지금 진행되는 신자유주의는 분명 아닌데,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어 의기소침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 “ ‘우리가 해봐야 소용없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광주항쟁도, 87항쟁도 이뤄낸 게 없어’ 같은 패배주의가 만연해 있어요. 30년의 현재적 귀결점만 보면 개헌파가 호헌파를 대체하고 승리한 셈이지만, 이 정도라도 이뤄낸 지점이 있다는 걸 의식하면서 패배주의를 경계하고 개헌파의 승리를 넘어서는 게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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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헌권력
사법이론에서 제헌권력은 정치권력의 변화나 행사와 관련된 근본 규칙을 설립하는 권력을 뜻한다. 제헌권력은 주어진 국가의 새로운 헌법을 창출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조정환은 <공통도시>에서 기존 질서에 대항하면서 새로운 제도를 창안할 수 있는 다중의 능력을 제헌권력이라 규정해 쓰고 있다. 또 낡은 질서를 뒤집어 엎고 새로운 법적 규약과 새로운 삶의 형식을 부과하는 권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제헌권력이 만든 헌법에서 나온 권력이 제정권력이다. 제정권력은 헌법을 개정할 수 있지만, 제정할 수는 없다. 제헌권력은 기존 권력이 온존할 때는 제정권력을 규정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10.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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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겨레 고명섭 기자의 리뷰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19793.html 참조. 참고로, 저자는 작년에 펴낸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2009)와 준비중인 책 <세계화의 갈림길>과 함께 3부작을 기획하고 있다고.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 세 권의 책을 우리가 어떤 시대, 어떻게 구조화된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성찰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함께 논의하기 위한 일상적이고 전 사회적인 집단토론에 바치고 싶다."(19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