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

일간지 리뷰기사를 보다가 모르고 지나갈 뻔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톨스토이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소설로 옮긴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궁리, 2004)의 저자 제이 파리니의 또 다른 전기소설이 출간된 것인데, 이번엔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솔출판사, 2010). 벤야민의 전기는 몇 권 출간돼 있지만 '전기소설'이라고 하니까 또 감이 다르다. 벤야민의 독자라면 놓치기 아까운 책이다.   

  

한국일보(10. 06. 12) '20세기 지성' 벤야민, 그 최후의 발자취  

국경 수비대의 감시를 피해 피난 일행이 벼랑길에서 몸을 숨기는 상황, 한 중년 남성이 가방을 뒤진다. 무슨 소리라도 날까 일행이 초초하게 바라보는 사이, 그가 꺼내 든 것은 괴테의 시집이었다. 숨막히는 상황에서 바위에 기대어 시집을 읽는 그 남자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이다.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이 그리고 있는 벤야민의 마지막 모습 중 하나이다. 20세기 최고의 독창적 지성으로 꼽히지만, 막상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해 생활고에 시달렸던 유대계 독일 사상가 벤야민. 나치의 파리 점령을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었던 그는 스페인 국경마을에 도착한 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비극적 삶의 정점이었다.

이 책은 그 마지막 몇 달간의 여정을 뒤쫓아가며 벤야민의 삶을 돌아보는 전기소설이다. 소설 형식이지만 벤야민의 글과 주변 사람들의 편지, 회고록, 인터뷰 등의 사실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어 전기에 가깝다. 저자 제이 파리니는 톨스토이 전기소설인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작가이자 미국 미들베리대 교수.  



저자는 벤야민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눈 유대교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숄렘, 벤야민의 피레네 산맥 월경을 도운 리사 피트코 등 여러 주변 인물을 화자로 등장시켜 다양한 시점에서 벤야민의 삶을 복원한다. 친구의 눈에는 돈이나 여자 문제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생활인, 급진적 혁명가인 아샤 라시스에게는 "겉으로만 혁명에 투신하는" 회의적인 부르주아로 비쳤던 벤야민은, 여관 주인이 보기에는 "늙고 지치고 고독한" 손님으로 묘사된다.

벤야민의 인간적 면모가 여과 없이 드러나지만, 책에 흐르는 전반적 기류는 이 뛰어난 사상가에 대한 애잔한 추도다. "아무도 그의 진가를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유럽은 최고의 지성이자 유럽 정신의 계승자이며 다정한 성격을 지닌 대가를 한 사람 잃었다."(12쪽)

저자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은, 자살을 생각하던 벤야민이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어온 소년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장면이다. "이 세상은 항상 폐허야. 하지만 우리에겐 작은 기회가 있어. 만약 우리가 아주, 아주 열심히 노력한다면, 우리는 선을 상상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파손된 것을 복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낼 수 있어. 조금씩, 조금씩"(356쪽)이라는 벤야민의 말이 읽는 이를 뭉클하게 한다.(송용창기자) 

10. 06. 12.  

P.S. 작가들의 '마지막 날들'을 다룬 소설들이 종종 출간되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조제 렌지니의 <카뮈의 마지막 날들>(뮤진트리, 2010)이다. '원조'로 기억되는 책은 베르나르 앙리-레비의 <보들레르의 마지막 나날들>(책세상, 1997). 소설은 아니지만 '마지막 날들'의 양식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대하여>(마티, 2008)도 같이 곁들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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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2 13:05   좋아요 0 | URL
이 다섯 권의 책으로 여름을 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겠는데요.
안 그래도 올여름 더위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데 나름 '서늘한' 여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로쟈 2010-06-13 21:04   좋아요 0 | URL
네, 일주일의 양식은 될 거 같습니다.^^
 

오전에 안과에 가면서 손에 들었던 책은 이택광의 <영단어 인문학 산책>(난장이, 2010)이다. TV를 잘 보지 않아서 EBS의 '이택광의 어휘로 본 영미문화'란 프로그램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책은 방송내용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  

  

영어에 관한 '수다'라면 단연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선생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거기에 덧붙이자면 소설가이자 언론인 고종석의 '영어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저자 또한 서문에서 한 차례 언급한다.  

"우리는 영어책을 '독해'하려고 덤비지만,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의 말처럼, 영어책은 해석하지 말고 읽어야한다. 그러면 처음에 힘들지만 나중에 영어책도 한국어책처럼 술술 읽을 수 있다." 

물론 번역은 또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덧붙이고는 있지만, 젊은 학생들은 시도해 봄직하다. 그렇게 '독해'에서 해방된 영어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주는가? 

"영어를 실용적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인문학적 능력으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세계에서 출간되는 인쇄물의 절반 이상이 영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만큼 많은 지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무서운 건 강조한 대목이다. 무섭기도 하지만 그만큼 엄연한 현실. 이러한 현실에 비하면 '회화'는 비교적 사소한 문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지식을 아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접목해서 독특한 지식으로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 급선무이다. 피겨스케이팅을 한국이 발명하진 않았지만, 김연아는 그 피겨스케이팅으로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다.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 인문학의 법칙이라면, 영어도 한국이라는 영토에 터 잡아 깃들 인문학의 보편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연아(=특수한 것)가 피켜스케이팅을 매개로 보편적인 것(=세계적인 선수)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 인문학(=특수한 것)도 보편적인 것(=세계적인 인문학)으로 나가는 데 영어를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읽힌다. 하지만 그때의 인문학은 '영어로 하는 한국 인문학' 혹은 '영어로 논문 쓰는 인문학'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란 의문을 갖게 된다. '한국이라는 영토'가 단서일까? 한국에서 한국인이 생산하되 '영어로 하는' 세계 수준의 인문학? 김연아의 경우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서 수사적 차원에서 도입한 사례일 테지만, 아무래도 '세계적인 인문학'과는 그림이 잘 맞지 않는 듯싶다. 영어를 피겨스케이팅에 견주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저자가 염두에 두었을 법한 또 다른 '산책자'는 빌 브라이슨이다. <발칙한 영어산책>(살림, 2009)을 덕분에 책장에서 빼왔다. 케이트 폭스의 <영국인 발견>(학고재, 2010)도 비슷한 두께를 자랑하는데, 영단어에 대한 이해와 영국과 미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상호작용하는 거라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 봄직하다. '미국인 발견'은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학>(21세기북스, 009)로 대체하고. 더 좋은 책을 아시는 분을 알려주시길...  

10. 06.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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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6-10 01:31   좋아요 0 | URL
제 경우 한글로 된 책도 머리 싸매고 읽어야 독해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더구나 영어나 한문은... 머리 뽀개집니다...
전 좀 재능은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술술 읽기는 언어적 재능이 있거나 영미권에서 생활할 기회가 있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방식이겠죠.. 재능 없고 기회 없는 이들은 그냥 우울해지죠... 그러다 영어 공부!라는 것에 빠지게 되는 거겠죠... 자본의 소유 유무가 계급갈등을 낳는다면, 재능의 소유 유무도 또다른 계급갈등을 낳겠죠 아마...

얼그레이효과 2010-06-10 01:53   좋아요 0 | URL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 인문학의 법칙이라면, 영어도 한국이라는 영토에 터 잡아 깃들 인문학의 보편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예전에 경향신문 칼럼이었나, 김우창 선생님이 하신 말씀과 유사한 시선이네요.^^

미지 2010-06-10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현재 지구상에서 영어는 제국의 언어이고 서양수학은 제국의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보편성은 이미 강제되어 있다는 것이죠...

알케 2010-06-10 11:32   좋아요 0 | URL
요즘 이택광교수 책많이 내는군요. 스펙트럼이 넓은 연구자라는 생각.
 

이번주에 나온 중량감 있는 책 두 권은 중국공산당의 전 총서기 자오쯔양의 비밀 회고록 <국가의 죄수>(에버리치홀딩스, 2010)와 역사학자 강만길 교수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이다. 욕심은 굴뚝 같지만 당분간은 읽을 시간을 못 낼 것 같다. 일단은 리뷰기사를 챙겨놓고 '길게' 봐야겠다...  

 

한겨레(10. 05. 29) 노정치가의 ‘천안문’ 회억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탱크 앞을 가로막는 동영상, 그리고 청년들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연설하는 자오쯔양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빛바랜 사진 한장. 1989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 있었던 ‘그 사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미지다. 그 사건은 중국 한쪽에선 여전히 천안문(톈안먼) 폭동으로 또 한쪽에선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라고 불린다. 



지난해 홍콩과 미국 등에서 출간된 자오쯔양의 회고록은 순식간에 매진이 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중국군의 탱크와 총칼이 광장을 휩쓴 1989년 6월4일 이후 2005년 숨질 때까지 가택에서 연금생활을 했던 노 정치가는 2000년 무렵 30개의 테이프에 몰래 육성을 녹음해 미국으로 반출했고, 자신의 비서 바오퉁의 아들 바오푸 등이 이를 글로 옮겼다.

자오쯔양의 회고에 따르면 89년 ‘혼란’의 전환점은 4월26일 <인민일보>에 게재된 사설이다. ‘반드시 기치를 선명하게 하고 동란에 반대해야 한다’는 제목의 이 사설은 4월15일 후야오방 서거를 계기로 추도식에 모여 부패 해결 등을 요구하던 학생과 시민들을 순식간에 반동분자와 체제전복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렸고, 인민들의 분노를 들쑤셨다. 자오쯔양은 북한 방문에서 돌아온 뒤 이 사설을 수정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하지만 몇 번이나 그의 개별 면담 요청을 거부하던 덩샤오핑은 5월17일 상임위원들을 소집해 계엄선포를 결정해 버린다. 3 대 2로 계엄이 결정됐다던 당시 회의가 사실은 어떤 투표도 없었다는 것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상황이 회고록엔 낱낱이 증언돼 있다.

리펑 등으로부터 학생 시위 확산의 책임자로 몰렸던 그는 19일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시위를 벌이고 있던 학생들을 찾아간다. “내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너무 늦게…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아무 상관없어요. 여러분 같은 젊은이들이 큰일이지…여러분들의 요구는 언젠가 받아들여질 겁니다.” 이 연설은 그의 마지막 공개 연설이었다. 반역과 영웅, 극단적으로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정작 자오쯔양은 자신이 공산당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당을 진정으로 위하는 시각이 달랐던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한 듯하다.

1989년 이후 죽의 장막 뒤에 다시 숨었던 중국은 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개혁개방의 속도에 불을 붙여 이제 미국과 함께 G2로 등장했다. 그사이 빈부 및 도농 격차는 끊임없이 벌어졌고, 관료와 상류층의 부패는 극심해졌다. 자오쯔양은 80년대의 회고에서 자신이 덩의 경제노선에 전적으로 찬성했지만 ‘속도’를 강조하는 그의 방향에 우려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21년 전 자오쯔양이 주장했던 대로 경제개방의 속도조절과 정치개혁이 이뤄졌다면 지금의 중국이 달라졌을까. 누구도 단언할 순 없다. 89년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외세의 개입 등에 대해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어찌됐든 간에 군대를 동원해 학생을 진압한 당 총서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그의 울림은 여전히 크다. 광주민주화운동 30년을 맞은 우리에겐 더욱. 그 어느것도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할 순 없다.(김영희 기자)  

   

한겨레(10. 05. 29) 근현대사 거목이 몸으로 쓴 ‘당대사’ 

강만길(77) 교수의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을 읽고 한홍구 교수가 한 얘기가 인상적이다. 하나는 우리나라에서는 정작 역사학자들이 자서전을 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군국소년’ 세대인 강 교수가 이 땅의 대다수 군국소년들과는 판이한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가의 시간>은 역사학자로서 자서전을 썼다는 사실 그 자체와 군국소년 세대이면서 그것을 거부한 삶의 궤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주목의 대상이 될 만한 것이다.

강 교수 얘기에 따르더라도 “국내 역사학자가 남긴 것(자서전)은 어느 특정 시기만을 다룬 것 외에는 없지 않나 생각”될 정도다. 왜 한국 역사학자들은 자서전을 쓰지 않는 걸까? 다른 이유들도 있겠지만, 이는 군국소년 세대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자서전 목차에 올라온 강 교수 삶의 궤적을 약간만 훑어보면 짐작이 간다. 1933년에 태어난 그는 1940년에 마산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해 창씨개명과 우리말 금지 수난 속에 소년기를 보내다가 ‘국민학교’ 6학년 때 나라가 해방을 맞았다. 그러곤 바로 사생결단의 신탁통치 찬반 탁류에 휩쓸렸다. 중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이 터지고 학도의용군이 됐다. 대학에서 4·19혁명과 5·16쿠데타를 겪었고 고려대 전임교원이 된 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시작됐다. 더불어 중앙정보부 남산분실 지하 취조실에서 그 자신의 수난도 시작됐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 두 차례나 해직당했다. 서대문 교도소까지 갔다. 자서전을 쓰겠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어렵고 위험한 세대였다.

한 교수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그 (군국)소년들이 어려서 입은 마음속의 일본 군복을 벗지 못한 채, 반공청년이 되어 병영국가를 만들고, 이제는 군국노인이 되어 전쟁불사를 외치는 그런 나라”다. 광기에 가까운 그 기이한 행태는 최근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번 유감없이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강 교수는 군국소년 대다수가 간 그 길을 왜 거부했나? 그리고 어떻게 철저한 평화주의자, 남북 대등통일론자, 민주주의자가 됐을까? 바로 그런 얘기를 매우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는 게 <역사가의 시간>이다. ‘분단시대’라는 말을 재창조했고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통일고문에다 남북 역사학자 교류를 이끌었으며 잡지 <민족21> 발행인을 지낸 그에게 ‘역사학계의 이단아’ ‘좌파 민족주의자’라 손가락질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그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중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순수 실증주의’에 파묻혀 당대 민족의 현실을 외면한 한국 역사학계야말로 이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울러 그가 좌파인 것이 아니라 실은 그를 좌파라 한 사람들이 터무니없이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게 문제라는 사실도 여실히 드러날 것이다.

강 교수가 “한 사람의 역사학도 및 역사선생이 평생을 통해 겪은 민족분단시대로서의 우리 현대사 경험담” 정도라고 한 자서전 형식의 이 책은 그런 중대한 사실들을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전혀 딱딱하지 않게 부드럽고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격식을 갖춘 시대사류보다 오히려 더 심층적으로” 풀어가는 대단한 장점을 갖고 있다. 이는 그가 끊임없이 강조해온, 우리 역사학계에는 결핍된 대중성과 현재성을 획득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학부 졸업논문으로 조선시대 상업기관인 시전(市廛), 석사논문으로 조선시대 수공업자들인 장인(匠人), 박사논문으로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에 대해 쓰는 등 자본주의 맹아론에 그가 주목한 것은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조선사의 정체후진성론과 타율성론을 논박하려는 그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제시대 토지조사사업과 빈민생활사 등 사회경제사 연구에 몰두한 것도 마찬가지. 그는 실증주의를 신봉하면서 탈식민 민족해방이라는, 가장 절박했던 당대사적 현실과제를 외면했던 주류 조선역사학계를 비판한다. 식민사학에 대항했던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 중 민족주의사학의 일부는 광복 뒤 남쪽에선 반공주의와 결합하면서, 일제시대 실증주의가 결과적으로 식민사학과 식민통치에 기여했듯이 군사독재정권 추수라는 기회주의로 전락한다. 강 교수는 6·25전쟁과 4·19, 5·16을 거치면서 그런 모순을 감지했고 박정희의 유신체제 이후 바로 그 자신이 수난을 당하면서 다수 대중이 겪어내야 했던 자기 시대의 고통스런 현실과 그 근원이라고 할 분단문제·통일문제에 무관심하고 무기력한 역사학에 회의를 품었다. 그가 연구분야를 점점 현대사와 민족통일문제 쪽으로 옮기고 현실문제에 대해 발언하며 ‘논객’으로서의 활동을 강화해간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강 교수는 박정희 시대 평가는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에 대한 평가도 골고루 포함된 “종합적·역사적” 평가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볼 때 그 시대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오히려 퇴보했고, 생산성만이 아니라 분배정의까지 고려한 경제적 민주주의도 바닥이었다. 경제성장도 박정희 체제만이 아니라 다른 사회에서도 진행됐던 일반적 전후복구 과정의 하나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며 또한 희생당한 노동자·농민의 역할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정치·경제력을 특정 세력이 독점한 상태하의 사회적 민주주의, 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은 문화적 민주주의 모두 낙제점이었다. 게다가 그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평가기준인 평화통일 진척도 또한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이런 종합적 잣대를 들이댈 경우 박정희 시대 평가는 과도하고 또 잘못된 것이다. 그는 역사학 연구자는 모름지기 “현실적 상황에만 얽매이고 싶지 않은 미래지향주의자, 어떤 이념적 조건에도 구애되지 않으려는 철저한 평화주의자, 분단된 민족의 다른 한쪽을 세상 사람 모두가 적으로 간주해도 홀로나마 기어이 동족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평화통일론자”가 돼야 한다며 그런 사람을 좌경 또는 좌파 민족주의자라 부른다면 자신은 주저없이 그런 평가를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이 책 내용을 한층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게 지은이와 개인적 인연을 맺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인데, 한때 유명한 민주투사였다가 뉴라이트의 핵심이 된 사람, 말년이 씁쓸했던 천관우씨, <사슬이 풀린 뒤>란 책을 남기고 월북한, 좌도 우도 아니었던 오기영, 교토제국대 교수였던 비날론을 만든 화학자 이승기와 이태규의 대조적인 삶, 일본인 학자들과 20여 차례 방북하면서 만난 북쪽 인사들과의 기연과 인물평이 흥미롭다.(한승동 선임기자) 

10. 0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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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5-29 22:30   좋아요 0 | URL
투표독려 동영상 주소입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zvIZQj-7rGw&feature=player_embedded

로쟈님의 서재를 찾으신 알라디너 여러분, 주변 분들께 투표 독려해 주세요^^!

로쟈 2010-05-30 20:05   좋아요 0 | URL
자기 주권은 자기가 챙겨야지요. 그나마 최소한으로 졸아들고 있는 형편에...

2010-05-31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1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1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한겨레21의 서평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내가 쓸 차례였지만 내가 쓴 건 아니다. 여러 사정으로 나는 내주에나 쓰게 될 듯하다). 뤽 폴리에의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에코리브르, 2010)에 대한 것이다. 부제는 '자본주의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나'인데, 태평양에 이 작은 섬나라를 가장 부유한 나라로 만들었던 것도 자본주의였으니 약 주고 병 준 셈이다. 우리의 운명뿐 아니라 지구의 운명도 그와 크게 다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겨레21(10. 05. 28) 자본주의에 무너진 새똥 섬 

뤽 폴리에의 <나우루공화국의 비극>(안수연 옮김·에코리브르 펴냄)의 부제는 ‘자본주의 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어떻게 파괴했나’다. 의미심장한 제목처럼 내용은 자본주의 물결이 한 나라를 ‘파괴’하고 ‘비극’으로 몰아넣는 과정을 세세하게 묘사한다.

인산염으로 순식간에 부자가 된 나우루
태평양에는 작은 섬이 많다. 이 가운데 삐죽 솟은 한 산호초 섬 위에 북반구와 남반구를 오가는 철새들이 똥을 누고 가기 시작했다. 똥이 쌓여 땅덩어리를 이뤘다. 그 땅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나우루공화국이다.  

나우루공화국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비행기로 7시간 거리의 작은 섬이다. 얼마나 작으냐 하면 21㎢, 연안을 따라 둥그렇게 이어진 도로를 일주하는 데 30분이면 족하다. 현재 인구는 9천 명 남짓.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 나라는 한때 ‘석유 재벌’ 국가에 맞먹는 수준의 부자였다. 1970년대 나우루의 1인당 국내총생산은 2만달러에 육박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기조차 끊겼다 들어왔다 하는, 가난하고 가난한 나라다. 부와 극빈 사이를 오간 시간은 고작 30여 년에 불과했다.

산호초와 새똥과 바닷물, 오랜 세월의 화학적 결합으로 나우루를 덮고 있는 땅은 화학비료의 중요한 원료인 인산염으로 변했다. 서구 열강들이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처음 발견했다. 그들은 나우루를 ‘관리’해준다는 명목으로 인산염을 마구 캐갔다. 그러나 나우루가 이에 대한 권리로 받는 돈은 수익금의 2% 정도에 불과했다. 지배받는 세월 동안 나우루는 자본의 힘을 알게 됐다.

1968년 독립한 나우루는 4천 명의 주민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이 됐다. 인산염 산업은 국유화됐다. 정부는 국민과 공평하게 수익을 나눠가졌다. 부자가 된 국민은 일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받은 돈으로 최고급 자동차를 사서 짧은 해안도로를 할 일 없이 빙빙 돌았다. 자동차가 고장나면 고치지 않고 도로에 그냥 버려두고 새 차를 샀다. 농사도 짓지 않았다. 가까운 나라에서 들여온 인스턴트 식품, 신선한 고기와 과일로 식탁을 채웠다. 나우루인들은 뚱뚱해졌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이 섬에서 살찐 몸은 매력으로 꼽혔기 때문이다.   

인산염은 한정된 자원이었다. 1990년대가 되면서 나우루 국토의 80%가 파헤쳐졌고 1997년에는 광산 활동이 최소한도로 줄었다. 나우루는 부채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나우루는 인산염이 빠져나간 텅 빈 땅이 됐다. 후유증처럼 대부분의 주민은 비만과 당뇨에 시달리고 있다. 나우루인들은 손에 들어온 부를 방치한 것처럼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부도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돈은 날아가버렸어요”라고 말할 뿐이다. 이런 낙천성 때문에 그들의 비극이 더 애잔하다. 세상이 그들을 그대로 뒀다면, 물고기를 잡아 먹고 섬에서 난 열매를 따 먹으며 적어도 건강한 몸으로 생을 지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우루의 현재, 지구의 미래  
지은이는 나우루를 “부와 재앙이 동일한 기세로 쌓이는 세계의 교차로”였다고 말한다. 학자들은 나우루공화국의 몰락을 두고 지구의 몰락을 예견한다.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인산염을 30년 만에 소진한 이들의 역사는 지구가 수억 년 세월 만들어놓은 석유를 200여 년 만에 다 써가는 인류의 미래를 말한다고. ‘돈’이 되는 곳이면 네 땅 내 땅 가리지 않고 파헤치고 뒤집어엎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우리는 나우루를 통해 먼저 보았다. 그런데 작고 연약한 섬나라의 비극을 타산지석 삼아 자본주의의 폐해를 논하는 이런 시선도 어쩌면 나우루인에게 잔인한 건지 모르겠다.(신소윤 기자) 

10. 05. 28.    

P.S. 책의 뒷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생태학적 재앙, 경제적 파산, 과도한 소비, 각종 만성질환, 자본주의 문명의 병폐를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보여준 나우루의 이야기는 바로 현재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문명의 병폐를 압축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토건공화국의 미래도 어쩌면 나우루공화국의 비극만큼이나 '교훈적인' 타산지석이 될는지도 모른다. 4대강 공사로 파헤쳐진 국토의 모습이 나우루공화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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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hun 2010-05-28 14:26   좋아요 0 | URL
직업은 토목기사지만 이런 사진 이런글 볼때마다 자괴감이 드네요. 도무지 이놈들은 목위가 허전해서 머리란걸 달고 있는건 아닌지...
생명과 생태를 고민하는 토목은 아직도 몇십년 뒤의 일일까요..에효

로쟈 2010-05-29 18:53   좋아요 0 | URL
몇십 년 뒤에 남아있을 '생태'가 있을지...--;
 

폴 드 만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놓았던 김에 <독서의 알레고리>(문학과지성사, 2010)에 대한 리뷰기사도 옮겨놓는다. 드 만식 읽기 혹은 드 만식 해체론이 어떤 것인지 잘 정리해주고 있다.  

한겨레(10. 05. 22) “책은 언제나 의도와 다르게 이해된다” 

폴 드 만(1919~1983·사진)은 덴마크에서 태어나 벨기에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예일대에서 학문적 전성기를 보낸 문학이론가이다. 그는 이른바 ‘예일학파’의 우두머리였다. 그의 이력을 요약하면, 프랑스에서 출현한 ‘해체주의 사상’을 영어로 번역해 미국에 퍼뜨렸다는 한 줄의 문장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는 번역자이고 전파자였는데, 뛰어난 전파자들이 그러하듯 원본을 재해석해 새로운 사유를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드 만의 목소리는 특히 문학이론, 문학비평에서 크게 울렸고, 그 울림이 퍼져 사상 일반에까지 미쳤다. 



드 만은 평생 65편이라는 적지 않은 에세이와 평문을 썼지만, 생전에 펴낸 책은 두 권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의 알레고리>는 그중에서 두 번째로 낸 책이다. 이 책의 출간 연도는 1979년이지만, 실린 글들은 대부분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에 썼다. 해체주의의 대명사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인데, 드 만은 데리다를 1966년 처음 만난 뒤 해체주의 사상 활동의 동지가 됐다. <독서의 알레고리>에 묶인 글들은 이 해체주의가 드 만의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과정은 그대로 해체주의가 영어권에 번져 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드 만은 이 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의 대부분은 ‘해체’가 불화의 씨가 되기 이전에 쓰였다”고 밝힌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 해체주의는 ‘이론 전쟁’으로 불린 격한 논란의 한가운데로 진입한 상태였다. 그 전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든 것이 이 책인 셈인데, 드 만은 그 머리말에서 해체주의가 그동안 오해받아 왔음을 강조한다. 한쪽에서는 해체주의가 아무런 현실적 불온성도 없는 대학 강단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체주의가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지적 테러리즘이라고 비난한다. 드 만은 둘 다 틀렸다고 말한다. ‘해체’는 단순한 지적 유희도 아니고 허무주의적인 지적 테러도 아니다.

그렇다면 드 만이 생각하는 ‘해체’는 무엇인가. <독서의 알레고리>는 해체에 관한 드 만의 생각을 드 만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은 릴케·프루스트·니체, 그리고 특히 루소의 저작들에 대한 분석이다. 그 저작들을 읽어 추출해낸 결정체가 제목으로 쓰인 ‘독서의 알레고리’다. 여기서 ‘독서’(reading)란 말 그대로 ‘책을 읽는 행위’를 말하는바, 책 속의 기호(글자)를 매개로 삼아 저자가 말하는 것을 실제 사태와 연결시키는 작업이다. 쉽게 말해, 책을 읽고 사태를 이해하는 것이 독서다. ‘독서의 알레고리’는 그 독서가 곧 ‘알레고리’(allegory)라는 말인데, 여기서 알레고리는 ‘(어떤 것으로써) 다른 것을 말하다’라는 어원적 의미로 새겨야 한다. 비둘기로 평화를 나타내고, 왕관으로 권력을 암시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그렇다면 알레고리는 일종의 은유(메타포)라고 할 수 있는데, 은유가 보통 단어나 문장 같은 작은 단위에서 구사되는 표현 기교라면, 알레고리는 통상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총체적인 은유 구실을 한다.

여기서 요점은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라는 알레고리의 그 본질에 있다. 우리의 통념으로 보면, 독서란 저자가 말하는 것을 독자가 그대로 읽어내는 행위다. 그러나 실제의 독서는 저자가 말하려는 것을 언제나 다르게 이해한다는 것이 드 만의 논점이다. 기표와 기의의 일치, 단어나 문장이나 책 전체가 가리키는 것과 그 가리킴의 대상 사이의 일치, 요컨대 책이 말하려는 것과 독자가 이해한 것의 일치가 독서의 이상적 상태일 터인데, 이런 완결된 독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 만의 발상이다. 독서는 언제나 기표와 기의 사이의 차이를 내장하고 있다. 글이 의도하는 바와 실제로 이해되는 바 사이에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독서는 번번이 오독·오해·오인을 포함한다는 것, 저자가 진짜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는 것, 이것이 드 만의 주장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독서 곧 읽기가 책을 넘어 삶 일반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이다. 삶 자체가 읽기의 과정이다. 우리 삶은 끊임없이 읽고 해석해야 할 것들의 연속체다. 사람들의 눈빛, 표정, 몸짓을 읽어야 하고, 책을 읽듯 사람의 말을 읽고 속뜻을 이해해야 한다. 문제는 이런 읽기가 언제나 완결된 읽기에 도달할 수 없고 궁극적 읽기에 성공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인식이란 언제나 굴절과 착란과 오해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투명한 인식,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정 위에 세워진 근대 학문은 그 토대를, 근거를 잃어버리게 된다. 객관적인 총체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근대적 믿음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드 만의 ‘완결된 독서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가 말 그대로 해체적임을 실감할 수 있다. <독서의 알레고리> 이후의 작업은 드 만 사후에 <이론에 대한 저항> <미학적 이데올로기> 같은 책으로 묶여 나왔는데, 거기에서 그의 해체 사상은 정치적·사회적 이념으로 확장된다.(고명섭기자) 

10. 05. 22.  

P.S. '독서의 알레고리'가 비단 고급 텍스트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매직'으로 쓰인 간단한 글씨도 '필자'(혹은 '조작자')가 진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의도를 '배반'하는 것이 '독서의 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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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ocris 2010-05-22 13:21   좋아요 0 | URL
"'매직'으로 쓰인 간단한 글씨도 '필자'(혹은 '조작자')가 진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의도를 '배반'하는 것이 '독서의 윤리'다."에 접붙인 만화 꼬라지라니?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한심한 쓰레기 글이다. 내가 말한 적이 있다. 그런 식으로 수만의 책을 읽는다는 게 도대체 무슨의미냐고? 그런데, 댁이 어리석다고 보는 국민의 독서 윤리는 댁과는 전혀 다른 배반도 가능함을 잊지 마시길...

로쟈 2010-05-22 13:39   좋아요 0 | URL
'쓰레기'라서 쓰레기 댓글이 올라오나 보군요. '어리석은 국민'이 꽤나 고마우신가요? 아시겠지만, 권력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mediocris 2010-05-22 14:01   좋아요 0 | URL
나는 어리석다고 보지 읺지만 댁은 어리석다고 보는 쪽인가? 권력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일반론과 천안함과 현정권이 무슨 연관이 있나요? '권력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명제를 너무 다의적으로 사용하셨고, 게다가 권력이라는 매개념을 부당하게 주연시키고 있습니다. 화가 나시더라도 웬만하면 쓰레기 만평은 접붙이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로쟈 2010-05-22 14:09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가 다수결이라고 하지만 소위 '다수'가 항상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죠. 그게 다수의 두 얼굴 아닌가요? '쓰레기 만평'이라고 하셨는데, 무성의하면서도 노골적인 북풍 몰이라는 '쓰레기 전략'이 없다면 쓰레기 만평도 없겠지요...

mediocris 2010-05-22 13:33   좋아요 0 | URL
댁이 읽지 않은, 아니 읽고 싶지 않을 책의 내용 중에 이런 장면이 있지. 위대한 수령께서 고압 송전선을 주체적으로 지하매설하라는 지시를 하셔서 고압선을 플라스틱 파이프에 넣어 지하 매설을 했지. 그래서 북한의 누전율이 거의 70% 이상이지. 금강산 가보셨나? 고압선 전주 꼬라지 보셨어? 그게 천안함 폭파 어뢰에 매직으로 쓰인, 댁이 남조선을 비꼬고 싶어하는 ‘1번’과 아주 연관이 깊은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시나? 그 잘난 송전선으로 남한의 고급 전기를 보내겠다던 대통령 되겠다는 어느 놈하고 댁과 다른 것 같지?

로쟈 2010-05-22 13:49   좋아요 0 | URL
국방부 주장대로 이번 사건에서 북한이 '대단한' 군사력을 보여준 것이라면 '감탄'이라도 하겠습니다(저는 나름대로 북한을 얕잡아보는 쪽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건 너무도 무성의한 '증거들'이네요('1번'도 녹 위에 쓴 거라는 의혹은 아시겠지요?). 송전선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나라의 잠수정이 작전 중인 한미 해군을 농락하다니요...

mediocris 2010-05-22 14:06   좋아요 0 | URL
누군가의 말대로 댁은 '권력의 어리석음'과 '권력의 전지전능'을 동치시키고 있군요. 책을 많이 읽으시니까 나폴레옹의 러시아 전선에서의 패퇴가 프랑스군의 군복 단추 때문이라는 내용도 아시겠군요. 역사적 계기란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무성의'하게 보이거나 '의혹'이 있다고 증거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게다가 '열 사람이 한 도둑 못잡는다'는 속담도 있어요. 자중하시기 바랍니다.

로쟈 2010-05-22 14:02   좋아요 0 | URL
참고로, '천안함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어느 분이 제기한 의혹을 옮겨놓는다.
1. 절단면도 보안상 비공개라고 하더니 선거기간되니깐 공개~
2. 선체의 스크레치 자국이 선거기간이 되니 지워진다.
3. 침몰 원인도 모르고 두 달 넘게 질질 끌더니 선거기간 며칠 남겨놓고 갑자기 북한 어뢰 공격이라고 발표
4. 선거 4 일 남겨놓고 대통령이 3개 방송 생방송으로 북한 공격이라고 대국민 간담회 발표
5. 없던 어뢰가 선거 기간 되니까 갑자기 발견된다. 그것도 어부가 건졌단다.
6. 어선 어부에게 어디서 건졌냐고 물어보니 우물쭈물하다 해군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7. 천안함을 충격파만으로 두동강낸 가공할만한 어뢰가 멀쩡하게 건져졌다.
8. 어뢰는 마치 몇십년은 된 것처럼 부식되어있는데 매직으로 쓴 한글은 마치 방금 쓴 것 같다.
9. 아예 건지는 김에 조중동이 말했던 어뢰 조종 잠수부 시체도 건저내지?
10.잠수함에서 발사된 어뢰가 주무기였다고 발표했으면 조중동이 주장한 인간조종어뢰설도 유언비어아녀? 이 놈들도 유언비어 날조로 족쳐봐야지 안나?
11. 잘 녹화되던 TOD가 폭발당시에만 안찍혀있다는 건 뭐 다 아는 사실..
그 사병 지금쯤 영창 가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그에 대한 이야긴 없네?
12. 버블제트 어뢰가 터져서 충격파만으로 배를 두 동강 냈는데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뇌진탕은 커녕 피한방울 안흘리고... 사망자들은 전부 익사로 인한 사망. 무슨 물기둥이 레이저냐?
13. 어뢰 폭발로 100m의 엄청난 물기둥이 솟아올랐는데 갑판위의 사람들은 물방울이 얼굴만 살포시 적셨다.
14. 갑판 위에 있던 여러명의 군인들은 100m 짜리 거대한 물기둥을 못보고 야간에 몇 Km 떨어진 곳에서 한 엄청난 시력을 가진 군인 단 한명만 물기둥을 목격했다네?
15. 한미연합 훈련으로 이지스함까지 있었다는데 잠수함과 어뢰는 탐지도 안되고 천안함만 격추시키고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리고 천안함에 대잠수함, 어뢰 탐지능력이 있는데 전혀 탐지도 되지 않았다는 것...

mediocris 2010-05-22 14:08   좋아요 0 | URL
서프라이즈가 인터넷 여론장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아신다면 서프라이즈 대표나 부르킹스연구소 연구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을 텐데 안타깝군요.

로쟈 2010-05-22 14:10   좋아요 0 | URL
안타깝게도 인터넷 여론장에서 더 바닥을 기고 있는 건 국방부 주장입니다...

mediocris 2010-05-22 14:14   좋아요 0 | URL
그렇게 생각하세요? 답이 없군요. 댓글 이만 접겠습니다.

qualia 2010-05-22 15:42   좋아요 0 | URL
mediocris 님, 걍, 가마니나 짜고 앉아 계시면 “중간”쯤은 갈 수 있을 텐데요. 아쉽네요. 그럼, mediocris 님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 어뢰 공격 때문이라는 남한 군부의 일방 발표를 철석같이 믿으신다는 겁니까? 증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참, 내원, 무뇌아 인증도 그런 무뇌아 돌빡 인증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합리적 · 논리적 반박이 궁해지니까, 꼬랑지 내리고 내빼는 건 정말 비겁해 보입니다. 자기 소신이 철석 같다고 믿는다면, 논리정연하게 반박하셔야지요. “명제”니 “매개념”이니 “주연”이니, 한 논리 하시는 분이 내빼긴요.

[주인장 님께 실례인 줄 압니다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어서요. 질 낮은 댓글 죄송합니다.]

mediocris 2010-05-29 19:43   좋아요 0 | URL
"가마니나 짜고 앉아 계시면 중간쯤은 갈 수 있을 텐데요. mediocris 님은 천안함 침몰이 북한 어뢰 공격 때문이라는 남한 군부의 일방 발표를 철석같이 믿으신다는 겁니까? 무뇌아 인증도 그런 무뇌아 돌빡 인증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합리적, 논리적 반박이 궁해지니까 꼬랑지 내리고 내빼는 건 정말 비겁해 보입니다." 오랫만에 들어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로쟈스키들의 댓글이 달렸다. 가마니는 아니로되 어릴 때 새끼는 꼬아봤지만, 정작 이 친구의 속셈은 나를 수구꼴통 노인네로 만들고 싶은 건데 전형적인 ‘우물에 독타기’다.

천안함 사건에 관한 한 뒤레퓌스 재판의 프랑스 우익 군부를 연상케 하는 로쟈스키들의 인식은 ‘증거’나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그들의 굳센(?) 믿음과 만나면 어떤 합리적 논쟁도 교점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물러났더니 “명제니 매개념이니 주연이니, 한 논리 하시는 분이 내빼긴요.”라고 나무란다. 전투함의 중심 부분 20m가 아예 날라가버렸는데도 굳세게 좌초설을 믿는 이들에게는 차라리 “꼬랑지 내리고 내빼는 무뇌아”가 되는 게 낫지, 뭣하러 없는 TOD 영상 만드는 따위의 헛심 빼겠는가?

nanasi 2010-05-22 16:03   좋아요 0 | URL
댓글은 본문의 주내용과 별 상관없이 먼 산으로 가는군요.
mediocris님이 저 만평에 동의하든 동의하지않든 시의적절한 예제같습니다만.

2010-05-23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5-23 16:07   좋아요 0 | URL
미꾸라지 한마리가 기어들어와서 분탕질을 쳐놨군요.
폴드만 책의 서평글에 "1번"을 연계시킨 로쟈님의 센스에는 무릎을 치지 않을수 없네요..^^

펠릭스 2010-05-23 17:22   좋아요 0 | URL
영화(소설)을 보는(읽는) 재미는 극적 반전이나 인물의 갈등구조를 보(읽)는 재미입니다. 모두가 당신이 옮다는 찬사보다는 의도적인(?) 미꾸라지일지 모르지만 헤집고 돌아가는 이단아도 필요합니다. 막아내는듯(?)한 주인장도 애쓰기는 마찮가지입니다. 좀 더 자신의 의문이나 주장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면밀함(공감대)과 지구력 그리고 예절이 필요합니다. 로쟈님과 mediocris님 감사합니다.

오감독 2010-05-27 02:24   좋아요 0 | URL
누가 로쟈님 서재에서 열폭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해서 들어왔는데, 이미 정리분위기군요..^^ 좋은 글 항상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국방부의 주장을 이처럼 '열렬히' 옹호해 주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대타자는 '항상 이미' 죽어 있다"는 지젝의 명제가 떠오릅니다. 대타자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주체는 죄의식을 떠맡고 희생의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대타자의 동일성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요, 아이구 맙소사.. 이 양반들아 지킬 게 따로 있지... 싶네요. 쩝!

mediocris 2010-05-29 20:32   좋아요 0 | URL
대타자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주체는 죄의식을 떠맡고 희생의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대타자의 동일성을 지킨다? 지젝을 제대로 이해하던 말던 개의하지 않기로 하고, 어쨌든, 하여간, 좌우간, 자신들은 선군정치의 타자가 아니라는 로쟈스키들의 뱃보는 알아줘야 한다.

오감독 2010-06-03 21:55   좋아요 0 | URL
껄껄껄 "배포" 하나는 크다는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선군정치니 타자니 무슨 말인지 복잡해서 찾아봤더니, 뭐 별말 아니고 빨갱이라고 욕하는 거였군요. 맙소사 요즘 같은 세상에 ^^.. 님의 "뱃보"도 알아줄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