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과 사도 바울'(http://blog.aladin.co.kr/mramor/1010259)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내친 김에 지젝의 바울론에 대해서 정리해두고자 한다. 그래봐야 두 개의 문단, 각각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과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문단을 읽어보려는 것뿐이다(두 책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다). 대신에 국역본의 부정확한 대목들을 교정해두도록 한다. '그리스도에서 레닌까지'란 제목은 <믿음에 대하여>의 서문에서 따온 것이다.

 

 

 

 

먼저, <믿음에 대하여>의 8-9쪽. 조금 이전에 7쪽에서 밝히고 있는 이 책의 전제. "이 책의 기본 전제는 비록 그 전제가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자유-민주주의적 지배권을 포기하고 믿을 만한 급진적 지위를 주창하려 한다면 그것이 담고 있는 유물론적 해석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The basic premise of this book is that, cruel as this position may sound, if one is to break the liberal-democratic hegemony and resuscitate an authentic radical position, one has to endorse its materialist version. IS there such a version?"(이후에 원문 대조는 생략하거나 부분적으로만 하도록 한다.)

번역문은 포기할 만한 내용인데, 누락된 마지막 문장을 포함하여 다시 옮기면, "이 책의 기본전제는, 비록 이 입장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헤게모니를 분쇄하고 진정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부활시키고자 한다면 그 유물론적 버전을 승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버전이 과연 존재하는가?" 정도이다.

진정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이란 "정치를 일련의 실용주의적 개입이 아니라 (대문자)진리의 정치(politics of Truth)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오늘날 이러한 입장은 '전체주의적'이란 이유로 기각된다. "오늘날 이러한 장애로부터 탈출하여 진실의 정치를 표방하는 입장은 레닌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시 옮기면, "이러한 교착상태에서의 탈출, 곧 진리의 정치에 대한 재단언은 레닌으로의 회귀라는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 

레닌으로의 회귀는 <혁명이 다가온다>의 핵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한데, <믿음에 대하여> 또한 동일한 반문에 답하면서 주장을 전개한다. "왜 단순히 마르크스가 아닌 레닌인가? '제대로 된 복귀라면 원래 진영으로으 복귀여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마르크스로의 복귀'는 이미 학술권에서 별다른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를 고려하고 있는가? 한편으로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마르크스, 메시아적 약속의 마르크스, 다른 한편으로 현대 세계화의 역동성을 예견하고 월스트리트 거리에서조차 회자되는 마르크스이다."

역시나 마지막 문장에 누락된 단어들이 있다. 이를 포함해서 다시 옮기면: "왜 그냥 마르크스가 아니고 레닌인가? 오늘날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이미 학계에서 나름대로 유행이다. 이 너나없는 회귀들에서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를 갖게 되었나? 한쪽에는 문화연구의 마르크스,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마르크스, 메시아적 약속의 마르크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늘날 세계화의 동학을 예견한 마르크스, 월스트리트에서조차 그러한 인물로 환기되는 마르크스가 있다."

"이들 마르크스들이 지닌 공통점은 정치 본령의 거부이며, 레닌에 의거하게 되면 이 두 가지 함정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원문은 "What both these Marxes have in common is the denial of politics proper; the reference to Lenin enables us to avoid these two pitfalls." 다시 옮기면, "이 두 가지 계열의 마르크스들이 갖는 공통점은 정치다운 정치에 대한 거부이다. 레닌으로의 회귀는 이 두 함정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후의 지적들은 <혁명이 다가온다>의 주장들을 예견하게 해준다.

먼저, 지젝은 레닌의 개입이 갖는 두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그 하나는 레닌의 외부성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인 전치이다. 차례대로 살펴본다.

(1) "첫째로 마르크스와 관련해 볼 때 레닌의 외부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니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친정집단'에 속하지 않았고, 마르크스나 엥겔스를 전혀 만난 적이 없다. 더욱이 그는 '유럽문명'의 동부 경계지역 출신이었다. 오로지 이 같은 외부적 위치에서만이 그 이론의 본래적 충동을 살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친정집단'은 'inner circle'의 번역이다. '동부 경계지역'이란 물론 러시아를 가리키는데, 러시아 내에서도 레닌은 타타르 출신이라고 해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반복하자면, 이러한 외부성, 외부적 위치에서만 이론의 충격을 되살려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바울에 관한 대목이다. "바로 이와 동일하게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를 정식화했던 바울 역시 예수의 친정집단 소속이 아니었으며, 라캉이 프로이트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이론 전통을 수평자로 사용하여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완수한 것도 마찬가지 논리이다." '수평자'는 'leverage'의 번역이며 '지렛대'라 옮기는 게 낫겠다. 요컨대, 성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너서클(측근)이 아니었고 라캉 또한 전혀 다른 이론적 전통을 지렛대로 삼아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달성했다는 것. 

라캉에 대한 부연설명: "프로이트는 이것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가 학식을 통한 입회에 기초를 둔 자신의 폐쇄된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부 출신의 비유대인인 융에 신뢰를 준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초라한 것이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융의 이론 자체가 입회에 기초한 학식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융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한 사람은 라캉이었다." '이것의 필요성'이란 '외부성'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그러한 외부성을 끌어오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일부러 융을 수제자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로 '배신'당한다. 프로이트의 적통을 잇는 것은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당하는 프랑스인 이단자 라캉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라캉의 역할은 동일시되며,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의 관계에서 레닌의 역할로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사도 바울과 라캉이 원래의 가르침을 다른 맥락으로 재수록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신의 승리로 재해석하고, 라캉은 소쉬르를 반사경삼아 프로이트를 읽는다). 레닌은 마르크스 이론의 원래적 맥락을 상이한 역사 시기에 적용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원이론을 대체하거나 탈색시켰으며, 그런 다음 효과적으로 그것을 보편화하였다." '재수록하다(reinscribe)'는 '재기입하다'로 옮기는 게 낫겠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십자가에 못박힘'을 가리키고 '자신의 승리(his triumph)'는 '그의 승리(영광)'가 아닌가 한다.

마지막 문장은 원문과 대조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Lenin violently displaces Marx, tears his theory out of its original context, planting it in another historical moment, and thus effectively universalize it." 번역문에서 '탈색시키다'란 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원랙의 맥락을 상이한 역사 시기에 적용'한다는 것도 문맥에 맞지 않는다. 다시 옮기면, "레닌은 마르크스를 폭력적으로 전치시키고, 그의 이론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다른 역사적 순간에 이식시킴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으로 보편화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바울, 프로이트-라캉, 마르크스-레닌이라는 쌍이다. 이때 '우편'에 놓이는 바울-라캉-레닌은 모두 '외부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데, 참고로 이 '외부성'은 <혁명이 다가온다>의 2장에서 '당의 외부성'과 '정신분석가의 외부성'으로 변주된다(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한다).  

(2) "'원래의 이론'이 잠재적인 정치적 개입능력실현하게 되는 것은 이같은 급격한 변개를 통해서이다." 원문은 "[I]t isonly through such a violent displacement that the 'original' theory can be put to work, fulfilling its potential of political intervention." '급격한 변개'는 'violent displacement'를 옮긴 것이고 앞에서 내가 '폭력적인 전치'라고 옮긴 것이다. 다시 옮기면, "이론이 갖고 있는 정치적 개입 역량을 실현시키면서 '원래의' 이론이 작동되게 하는 것은 오직 바로 이러한 폭력적인 전치를 통해서이다." 

"레닌의 독특한 의견이 처음으로 명백히 소개된 저술이 <무엇을 할 것인가>(1902)라는 점은 의미있다. 이 저술은 필요한 타협을 통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실용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모든 가능한 타협을 무시하고 명료한 급진적 관점 - 우리의 개입이 해당 상황을 변개시킬 수 있는 방식에서만 개입이 가능한 - 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 레닌의 무조건적 상황 개입의지를 보여준다." '변개시키다'는 'change'의 번역이고, '해당 상황(the coordinates of the situation)'은 '상황의 좌표들' 혹은 '현실의 좌표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모든 가능한 타협'은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들'을 뜻한다.

그러니까 레닌의 관점은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인 개입을 통해서 현실의 좌표들을 변화시키고 이론을 관철시킨다는 것이겠다. "이 점은 인민의 구체적 필요와 요구를 고려하는 전문지식과, 자유로운 사고력으로 무장한 채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논쟁 이면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할 필요를 강조한 오늘날의 제3의 '포스트 정치' 방식과 관련지어볼 때 현격히 대비된다."

 

 

 

 

'제3의 포스트정치(Third Way 'postpolitics')'는 "'제3의 길'식의 탈정치"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번역문은 이런저런 오역으로 도배돼 있는데 다시 옮기면, "여기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제3의 길의 탈정치(학)이다. 이 탈정치는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구분을 뒤로 제쳐놓고 구체적인 인민들의 필요와 요구를 고려하는 전문지식과 자유로운 토의로 무장하고서 새로운 이슈들과 직면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구도는 '레닌주의냐, 제3의 길이냐'가 되겠다.

"이처럼 레닌의 정치는 제3방식의 실용주의적 기회주의뿐 아니라, 라캉이 상실된 것에 대한 자기애라 부른 바 있는 중도좌파적 태도에도 진정한 반격이 된다. 진정한 레닌주의자와 정치적 보수주의자간의 공통점은 이들이 자유주의적 좌파의 '무책임성'을 거부하다는 사실이다. 확고한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레닌주의자는 행동을 취하고 아무리 못마땅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치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과정에 뒤따르는 모든 책임을 떠맡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3의 길'을 '제3방식' 등으로 옮긴다는 것은 상식 이하다. 여하튼 여기서 레닌주의와 대비되는 것은 이 제3의 길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좌파'도 해당한다(지젝은 기든스 등의 '제3의 길' 혹은 '탈정치'에 대해서 한번도 동감을 표한 적이 없다). 번역문의 '중도좌파'는 'marginalist Leftist'를 옮긴 것인데, 상용되는 표현 같지는 않다. '자유주의적 좌파'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이 대목은 지금의 국내정세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무책임성'을 '무능력'이라고 바꿔넣으면 더더욱 말이다(신자유주의적 좌파?).

이런 '무책임성'이란 무얼 가리키는가? "결속과 자유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옹호하지만, 구체적인 그리고 때로는 '잔인한' 정치적 조치라는 실제적 모습을 띠고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는 이를 회피하는" 태도이다('결속'이 아니라 '연대'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니까 손에 물/피 안 묻히고 말빨로 해결하려는 좌파가 자유주의적 좌파이다. 자유주의적 좌파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진정한 혁명을 원하였지만,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실제적 대가는 피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며 자신의 손을 더럽히려고 하지 않았다. 이처럼 허상적인 급진 좌파의 입장(인민에게 진정한 민주정을 제공하기 원하지만 반혁명과 싸울 비밀경찰도 없고 자신들의 학술적 특권도 전혀 위협받지 않는)과는 대조적으로 레닌주의자는 보수주의자처럼 자신의 선택에 따른 모든 결과를 떠안는다는 면에서, 즉 권력을 차지하고 그것을 행사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인식한다는 면에서 신뢰할 만하다."

 

 

 

 

'신뢰할 만하다'는 'authentic'의 번역이다. '진짜다'란 의미이다. 즉, 인민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지만 비밀경찰과 같은 물리력/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은 정부나 말로만 급진적인 강단좌파 같은 유사-좌파가 아니라 진짜-좌파라는 얘기이다. 지젝은 여기서 레닌주의자(a Leninist)를 오히려 보수주의자(a Conservative)와 동급으로 비교하고 있는데 이 둘의 공통적인 핵심은 자기의지의 무조건적인 관철그에 대한 책임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면에서,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레닌주의자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박정희와 정주영이다(박정희는 브레주네프와 마찬가지로 소프트-버전의 스탈린 아닌가?).   

어쩌다 보니 서문의 마지막 단락에까지 도달했다(젠장, 한 문단만 읽는다더니?). "레닌으로의 복귀는 한 사고가 이미 특정 집단조직 안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아직 일정제도(확립된 교회, IPA, 스탈린파 정당국가)로는 안착되지 못한 독특한 순간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좋았던 옛 황금시대'를 향수적으로 재현하는 것도 실용적 기회추구 입장에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조정하는 것도 아니며, 현 세계의 조건하에서 범세계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자의 세계질서를 전방위적으로 저지하며 나아가 진실의 입장을 대변하고 억압된 진실의 관점에서 현 세계 상황에 개입하기 위한 정치 프로젝트를 주입하려는 레닌적 몸짓의 반복을 의미한다."

이미 지적한 대로 '진실'이라 옮겨진 것은 모두 '진리'로 교정되어야 한다. 더불어, '사고(a thought)'가 아니라 '사상'이다. '레닌으로의 회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는 대목인데, 강조점은 어떤 '유일무이한 순간(unique moment)'을 포착하는 것. 이 순간은 이행의 모멘트이기도 하다. 이 모멘트의 포착으로서의 '레닌으로의 회귀'는 다르게 말하면 레닌적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이다. 레닌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자유주의 세계질서의 전일성을 침식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을 시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기획은 억압된 진리의 관점에서 현재의 전지구적 상황에 개입하면서 스스로가 진리의 대변자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단언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관련하여 행했던 일, 즉 범세계적 다중문화 정책을 오늘날의 제국과 관련하여 수행해야 한다." '정책(polity)'은 '정체'(정치체제)의 오역이다. 다시 옮기면,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에 대해 행한 일을 우리는 오늘날의 '제국', 이 전지구적 다문화적 정치체제에 대하여 행해야 한다." 그것이 이 서문의 타이틀 'From Christ to Lenin... and Back', 곧 '그리스도에서 레닌으로, 그리고 다시 레닌에서 그리스도로'가 뜻하는 바이다. 

06. 12. 01.  

P.S. 서두에서 <혁명이 다가온다>의 한 문단을 읽겠다고 한 건 분량상 다른 자리에서 행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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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을 얼마전에 신간으로 소개한 바 있는데, 저널리뷰로서는 가장 '본격적인' 기사가 눈에 띄어옮겨놓는다. 나는 서론에 해당하는 '왜 라캉인가?'를 지난주에 읽었는데, 바쁜 일들도 있었지만 마저 읽지 않은 것은 복사해놓은 원서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구석에 쌓여있는 복사물과 책더미 어딘가에 있을 텐데 꼭 찾으려고 하면 쉽게 눈에 안 띈다.

 

 

 

 

 

내가 계획한 '라캉 읽기'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와에 오질비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동문선, 2002)과  맬컴 보위의 <라캉>(시공사, 1999), 박찬부의 <라캉: 재현과 그 불만>(문학과지성사, 2006) 등을 같이 읽는 것이다. 모두 이전에 완독하지 않았거나 이번에 새로 나온 책들이다. 거기에 러시아에서 나온 빅토르 마진의 <라캉 입문>(2004)을 겹쳐 읽으려는 것이 곧 시작될 겨울의 초입에 잡은 간단한 '라캉 읽기'이다. 혹 동행하시려는 분은 아래의 기사를 읽는 걸로 워밍업을 하시고 뛸 만하다 싶으면  몇 권의 책을 주문해 보시길(물론 읽는/뛰는 건 각자가 하시는 거다).

북데일리(06. 11. 28) 라캉이 해석하면 애드가 앨런 포우도 달라!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1901-1981). 그는 언어를 이용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했다.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사상은 문학, 영화학, 여성학을 넘어 법률학, 국제관계까지 적용되고 있다.

라캉이 너무 어렵게 느껴져 다가서지 못했던 독자라면 숀 호머의 <라캉읽기>(은행나무. 2006)의 일독을 권한다. “그렇게 어렵다던 라캉이 이렇게 재미있었나?”라는 반문이 든다면 이 책의 묘미를 제대로 느낀 것이 맞다. 책은 완곡한 문투로 라캉을 프로이트와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완곡한 문투'라고 했는데, 교과서적인 문투이기도 해서 읽기에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저자 숀 호머는 이 책을 쓴 두 가지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첫째는 라캉의 정신분석에 충실하면서 초보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라캉 입문서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입문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숀 호머가 철학자나 사상가가 아닌 ‘문화이론가’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라캉의 개념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이 지난 수년 간 라캉에 대한 글을 너무나 많이 써왔기 때문에 그들과는 차별적인 개론서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이 책을 썼다. 그만큼 <라캉읽기>는 여타의 라캉입문서와 다르다. 라캉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임상적 지침이 아닌 인문과학 분야의 학생들이 라캉을 처음 대면할 때 필요한 개론서에 가깝다.

책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거울단계 등 현대정신분석까지 이어지는 주요 개념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 부분의 결론에서는 이 개념들이 어떻게 문학, 영화, 사회이론에 적용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제시된다. 듀팽에 관한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에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가 라캉의 이론에 의해 복개되는 과정은 문학과 정신분석학이 만나는 그야말로 ‘새로운’ 텍스트다. 간단히 그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라캉을 어렵게만 느꼈던 독자라면 포우의 소설과 라캉이 어떤 접점을 찾아 나가는지 흥미롭게 들여다 볼 만 한 대목이다(*이 주제에 관한 글들을 집약해놓은 책은 J.P. 멀러 등이 편집한 <도둑맞은 포우(The Purloined Poe)>(1998)이다).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는 한 장관이 여왕의 편지를 훔치고 처음에 편지를 찾아 수색 한 경찰들은 실패하지만 후에 듀팽은 성공적으로 편지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포우의 반전은 편지가 사실은 숨겨진 적조차 없었으며, 늘 완전히 드러난 상태로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저자 숀 호머는 이를 라캉 식으로 재해석한다. ‘라캉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두 장면으로 나뉠 수 있다.

첫 장면에서는 왕과 장관이 자리한 상태에서 편지가 여왕에게 전달되고 여왕은 개봉되지 않은 편지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탁자 위에 놓아둔다. 장관은 즉시 그것이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성질의 편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탁자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드는데 여왕은 그 중요성을 왕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편지의 반환을 요구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경찰은 비밀리에 편지를 찾아 수색하지만 실패한다. 그들은 장관이 편지를 숨겼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반면 장관 역시 편지를 벽로 선반에 달려있는 편지꽂이에 드러나도록 놓아두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첫 번째 장면의 반복을 보게 된다. 이번에는 장관이 편지를 갖고 있고 경찰이 바로 코앞에 있는 편지를 보지 못하는 위치를 점유한다. 듀팽은 공개적으로 벽로 선반 아래에 달려 있는 위장된 편지의 가치를 알아본다.

라캉의 독해는 두 가지 중심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는 라캉이 볼 때 이야기의 진정한 주체의 역할을 하는 ‘편지의 익명성’ 이며, 두 번째는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들의 양상이다. 라캉에 의하면 이야기 안의 다양한 주체 위치들은 세 가지 특정 형태의 ‘시선’ 또는 ‘응시’에 의해 정의된다. 첫 번째 시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시선인데 다시 말하면 첫 번 째 장면에서 왕의 위치고, 두 번째 장면에서는 경찰이 점유하는 위치다. 포우의 복선과 반전이 새롭게 해석되는 과정을 통해 라캉의 개념에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문화이론가가 쓴 라캉입문서가 갖는 또 다른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이후’에서는 현대의 텍스트와 영화분석, 정치, 사회이론에서 라캉이 차용되어 온 다양한 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라캉의 그래프, ‘수학소들’ 그의 ‘네 가지 담론’은 문학과 문화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차용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루지 않았다. 저자 숀 호머는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란 말입니다! 지젝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2001)에서 지젝의 이론적 모순을 비판한 바 있으며 그리스 시티칼리지 미디어학부 학과장을 맡고 있다.(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06. 11. 28.

 

 

 

 

P.S. 마지막 문단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젝 비판 문건은 책이 아니라 논문이며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언젠가 옮겨놓은 바 있다. 이 리뷰기사에서 정리하고 있는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라캉의 세미나는 호머의 책 88-94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중요한 세미나이긴 하지만 이에 대해 다룬다고 해서 "문화이론가가 쓴 라캉입문서가 갖는 또 다른 차별점"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기자는 아마도 책을 절반 정도 읽고 리뷰를 쓴 듯하다). 

이 세미나는 저자 자신이 '라캉에 대한 개론서들' 가운데 제일 먼저 꼽고 있는 벤베뉴토/케네디의 'The Works of Jacques Lacan'(1986)에서 보다 자세하게 이미 분석/정리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입문서들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된다). 이 책은 이전에 라캉 입문서들을 나열하면서 소개한 적이 있는데, 국내에는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하나의학사, 1999)으로 번역돼 있는 책이다. 숀 호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독자가 이전에 라캉에 대한 어떤 책도 읽은 적이 없다면 이 책은 다른 입문서들보다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254쪽)

숀 호머가 두번째로 추천하고 있는 책은 딜런 에반스가 편집한 <라깡 정신분석 사전>(인간사랑, 1998)이다. "이 사전은 라캉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필독서이다."(가급적 원서도 구해서 같이 읽는 게 좋겠다.) 그리고 세번째 책은 브루스 핑크의 <라캉적 주체(The Lacanian Subject)>(1995). 이 책의 한 장이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에 번역돼 있는데, 완역본은 아마도 내년쯤에 나오는 듯하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대니 노버스가 편집한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개념들(Key Concepts of Lacanian Psychoanalysis)>(1998)인데, 기억에는 <라깡정신분석의 핵심용어>(하나의학사, 2003)가 그 번역서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A Compendium of Lacanian terms'이란 책의 번역이다.  노버스의 책으론 <라깡과 프로이트의 임상정신분석>(하나의학사, 2002)이 소개돼 있다.

 

 

 

 

 

그리고 저자가 끝으로 추천하고 있는 책은 루디네스코의 전기이다. 이미 많이 언급된 책이라 중언부언이 될 듯한데, "오백 페이지라는 분량 때문에(*물론 국역본의 분량은 더 된다) 조금은 기가 질리지만 읽기에 수월하며, 라캉의 출판물들의 역사에 대한 풍성한 정보와 다양한 정신분석학회들의 정보를 싣고 있는 포괄적인 부록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교조적 라캉주의자들은 이 책을 싫어한다."

한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루디네스코가 편집한 <정신분석대사전>(백의, 2005)도 번역돼 있다. 천오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이야말로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지만. 그리고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이 과장이 심하다는 비판은 다리안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에서도 읽을 수 있다(저자는 '교조적 라캉주의자'인가?). 만화책이기도 하지만 리더의 책은 올해 3판이 새로 출간되었을 정도로 입문서로서는 가장 대중적이다. 해서, 생초보 독자라면 숀 호머보다도 먼저 집어들 만하다...

그리고 2007년에 내가 제일 처음 집어들 책은 근간예정인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2007년의 라인업으로 예정돼 있는 지젝의 책들과 그 연구서만 하더라도 현재 예닐곱 권이 된다. 젠장, 지젝만 읽기에도 일년은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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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6-11-29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깡 공부 1주년을 기념하며 션 호머의 책을 번역하며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이 번역되었다길래 얼른 사서 비교해보니 역시 제 번역보다는 좋더군요^^;
그런데 위의 데니 노부스 편집의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개념들(Key Concepts of Lacanian Psychoanalysis)>(1998)의 번역은, 김종주가 번역한 <라깡정신분석의 핵심용어>(하나의학사, 2003)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확인해 볼 길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제가 대학도서관에서 본 김종주 번역의 책은 호주의 정신분석학계 쪽에서 만든 정신분석용어집이었습니다.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기 딸과 같이 번역을 했다고 쓸데없이 주절거려 놓은 것이 기억납니다.
도서관에 이 책의 원서는 없고 번역본만 있어서 번역상태는 확인해보진 못했습니다.
고로 사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나면 한번 확인해보시길...

로쟈 2006-11-29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긴가민가하긴 합니다(제에게 책이 있는지도 긴가민가). 제목이 'Key'고 시작했던 듯한 기억이 있어서 그렇게 적었는데, 확인해보니까 A Compendium of Lacanian terms을 옮긴 책이네요. 지적해주셔서 감사.^^

수유 2006-11-2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호머의 책을 앞부분 이제 읽고 있는데요, 소개된 책들은 오질비와 박찬부 교수외에는 다 있는것 같고 저도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학생들 독서퀴즈대회때 포의 도둑맞은 편지가 대상 서적이 되었었지요. 우리 아이들 수준에 라캉까지야 설명이 못미치구요..저도 잘 모르지만서두..^^
아무튼 책들은 늘 있습니다요^^ 고요히

기인 2006-11-29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편이꽂이'라는 오타 발견했습니다. ^^ 말실수처럼 자판실수도 무언가를 지시하는 걸까요? ㅎㅎ
제가 읽은 라깡 관련 책들 중에는 브루스 핑크, <라깡과 정신의학>이 제일 그나마 쉬웠습니다.~ 시공사 총서류 같은 것은 안 읽어봐서 ^^;

기인 2006-11-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라깡에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과연?;;; )

로쟈 2006-11-2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는 제가 낸 게 아니라 김기자의 것인데요, 암튼 수정했습니다...

Ritournelle 2006-11-2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행이 끝난 다음에 제목이 확~ 바껴 버렸네요. ㅋ. 담아갈께요.

깽돌이 2006-11-3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 읽기' 오늘 샀는데 쉽게 쓴거 같습니다.전 그보다 책이 싸고,크기도 아담하고....들고다니기 편하고 좋네요.내용보다 이런 문고판스러운 책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로쟈 2006-12-01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가격도 문고판스러우면 더욱 좋겠죠.^^
 

거창한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몇 문단을 읽었던 '패리스 힐튼과 카트린 밀레'란 페이퍼의 자투리이다. 거기서 내가 인용한 마지막 문단은 "거의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경에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고 썼다. 아마 이 모토는 오늘날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진 것을 신호로 '빅 브러더' 현실 드라마 같은 현상에서 파악되는, 주관성을 가진 지위이 급격한 이동을 지적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하다."(106쪽)였다. 이 자투리는 그 마지막 문장에 붙은 각주5)에 관한 것이다. 이 각주가 거창하게 요악하자면, '디지털화와 형이상학의 정점'에 대한 것이다. 먼저 그 내용을 옮겨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급격한 단절 대신 오늘날의 디지털화는 정확히 형이상학 전통의 최고 지점을 형성하다. 아도르노는 어디에선가 위대한 철학은 신의 존재에 관한 존재론적 증명(즉 사유에서 존재로 직접 이동하려는 시도, 파르메니데스가 사유와 존재가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처음으로 정식화했다)의 변형이라고 언급했다(심지어 마르크스조차 이 선상에 있다. 그의 '계급의식'에 대한 생각은, 루카치가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모범적으로 전개한 것처럼 정확하게 사회적 존재에 직접 개입하는 사고에 대한 게 아닌가?). 그리고 결론적으로 사이버공간에서의 디지털 이데올로기란, '비트에서 그것으로(from the bit to it)' 넘어가려는, 즉 디지털한 형식적 구조 질서에서 존재의 두려움을 형성하려는 점에서 이 발전의 마지막 단계가 아닐까."(106쪽)

먼저, 첫문장은 부정확하다. 영어본과 대조해볼 때, '이러한 급격한 단절 대신'이 아니라 '이러한 급격한 단절에도 불구하고'라고 옮겨져야 한다('Despite this radical rupture...'). 다시 옮기면,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단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디지털화는 정확히 형이상학적 전통의 정점(the culminating point)을 지시한다." 어떤 전통 말인가? '사유와 존재를 동일시하려는 전통'이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철학은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의 변주이다. 즉, '사유에서 존재로' 직접 이행해가려는 시도이다(신에 대한 사유 -> 신의 존재 입증).

 

 

 

 

그리고 이것은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에 의해서 최초로 정식화되었다(가령, "Thinking and the thought that it is are the same; for you will not find thought apart from what is, in relation to which it is uttered." "For thought and being are the same." 등과 같은 파르메니데스의 언명들.) 그리고, 마르크스-루카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에게서 '계급의식'이란 '사회적 존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사유'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론: "Consequently, is not cyberspace digital ideology  - in its attempt to pass 'from the bit to the It', to generate the very density of being from the digital formal-structural order - the last stage of this development?" 번역문의 마지막 문장에 대응하는 영어본의 문장인데, '비트에서 그것으로'가 'from the bit to the It'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러한) 발전'이 가리키는 것은 서구 형이상학의 발전사이다. 그러니까 소위 '디지털 이데올로기'가 서구 형이상학의 마지막 발전단계가 아닌가?, 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그 '디지털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형이상학이 '사유에서 존재로' 이행해가려고 했던 것처럼 디지털화는 '비트에서 존재로' 넘어가려고 한다('being Digital'에서 'digital Being'으로?). 즉, 디지털적인 형식적-구조적 질서로부터 '존재의 두터움'(=존재감)을 창출해내고자 한다. 이에 대한 가장 탁월한 사례 중의 하나는 <매트릭스>의 원조격인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가 아닐까?..

06.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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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화의 궁극은 디지털임이 간파되지 않을 정도의 아날로그화..
저의 생각입니다. 로쟈님.

로쟈 2006-11-20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동일성' 테제 정도가 되겠네요...
 

 

 

 

 

가장 쉬운 라캉 입문서가 번역돼 나왔다.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가 그것이다. 개인적으론 원서를 이미 작년에 구해서 몇 페이지을 읽어보았다. 물론 그 정도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이 포함된 시리즈 자체의 성격이 그렇다. 그 시리즈란 루틀리지에서 나오는 'Critical Thinkers'를 말하는데, 인문서 출간 동향에 까막눈이 아닌 독자라면 도서출판 앨피에서 나오는 이 시리즈의 책들을 기억할 것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시작한 시리즈 말이다. 한데, <라캉 읽기>는 뭐냐고? 그게 아마도 앨피에서 시리즈의 판권을 다 확보하지는 못한 탓으로 보이는데, 클레어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과 같은 사정이 아닐까 싶다.

저자인 숀 호머는 이미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 2002)이l란 입문서가 소개된 바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지젝의 맑스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이전에 페이퍼로 올린 적이 있다), 현재는 자리를 옮긴 것으로 돼 있지만 영국 셰필드 대학의 정신치료연구센터의 교수로 재직한 바 있고, 내가 알기에 역자인 김서영씨는 호머 교수의 지도하에 라캉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러니까 역자로서는 최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쉬운 라캉 입문서'에 대한 기대를 가져봄 직하지 않을까?

소개에 따르면, 책은 "우리 시대에 영향력을 미치는 한 사상가의 핵심적 이론과 논리를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쓴 이상적 개론서. 지난 30년간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라캉의 중심개념들을 그 개념의 배경과 맥락을 따라 쉽게 기술했다. 지은이는 임상분석가가 아닌 문화이론가의 시각에서 그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형태인 정체성의 정치학에 의해 수없이 비판받아온 라캉의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와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라캉의 업적과 사상이 현재의 주체성에 관한 논쟁에 일조할 수 있는지 독자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책 전반에 걸쳐 자크 알랭 밀레와 브루스 핑크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라캉주의자들의 다른 문헌들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 그토록 어렵다는 '라캉 읽기',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보자. 읽다 보면 <라캉으로 쇠라 읽기>(애플트리태일즈, 2006) 같은 책도 더이상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누가 자크 라캉을 미워하는가?..

06.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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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15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퍼갑니다. 읽고 읽고 또 읽어도, 한번 놓으면 왠지 다시 다가서기 애매한 그 이름. ^^;

로쟈 2006-11-15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이 공익의 교양은 다 책임지시는군요.^^

조선인 2006-11-1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아무리 쉬운 책이라고 해도 너무 어려워요. =3=3=3

로쟈 2006-11-1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라캉 입문서'들과 비교하셔야 합니다.^^

자꾸때리다 2006-11-1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하신 분 약력을 보니 생물교육 전공하신 후에 영국에서 정신분석 공부하셨네요.
저렇게 비 인문학 계열 전공하고서 바로 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을 수가 있나요?
저도 의대 나온 후에 정신 분석을 공부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해외에서 박사과정은 수료하고 싶거든요. (그 다음에 한국에서 공중보건의 하면서 공부한 후에 다시 외국에서 1년 정도 가서 학위 받고 국내 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로쟈 2006-11-1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답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정신분석이 라캉 정신분석이신지요? 영미식 정신의학과는 계보가 다른지라...

수유 2006-11-1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라캉으로 쇠라읽기>가 있네요^^
앗 그러고보니 책방에서 본 책이네요..^^

깽돌이 2006-11-1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가 만든) 국제정신분석학회에는 자아심리학,자기심리학,대상관계이론파 이렇게 세 파벌(?)이 동거하는 것 같습니다(미국은 자아심리학,영국은 대상관계학파,남미는 클라인 학파가 발달했다고 합니다).이 계보에서 융과 라캉이 벗어나는데 라캉 임상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영미분석철학, 대륙철학 식으로 분류되는것 같지는 않은 듯 해서.한국 라캉학회사이트 구경했었는데 거기 의사샘들이 라캉식으로 임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모 분은 오역의 쓰나미로 유명하고...그냥 연구스터디모임인 것 같네요.

2006-11-16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6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라캉 입문서에 따르면, 주류 정신분석학이 1만명, 라캉식 정신분석학(프랑스, 스페인, 남미 등)이 1만명 정도의 추종자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더군요...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대목을 옮겨놓고 주석을 달도록 한다. 5장 '레닌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했는가'에 들어있는 대목인데, 오늘날 공과 사의 경계가 소멸돼 가고 기이하게 전도되는 현상을 문제삼고 있다. 사실 지젝의 모든 구절들이 이러한 '뜯어읽기'의 대상이 됨 직하하다. 그럴 만한 여유를 독자로서 갖고 있지 못할 따름이다. 뜯어읽기의 대상은 국역본 104-6쪽, 영어본 207-8쪽이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독어본을 옮긴 국역본과 영어본은 같은 제하의 장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에 인용하는 대목도 국역본에는 없는 문단이 영어본에 더 들어가 있다(반면에 영어본에 없는 내용이 국역본에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인용문의 문단은 국역본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을 가장 가까운 사람보다 완전한 이방인에게 더 쉽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이버공간의 채팅방과 정신분석 치료 같은 현상이 명맥히 이러한 패러독스에 속한다. 우리가 완전히 지인의 범위 바깥에 있는 이방인과 이야기하는 사실이, 우리의 고백이 우리가 말려든 열정의 '뒤얽힘'을 더 이상 휘저어놓지 않으리라 보장한다. 즉 이방인은 우리와 이웃한 타인이 아니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거대한 타자 그 자체'이며, 우리의 비밀을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 따위를 주변 사람들보다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역설적이지만 더 잘 털어놓는다. 사이버공간의 상의 채팅방이나 정신분석 치료가 기대는 것도 이러한 패러독스이다. 즉, 우리는 전혀 모르는 상대방에게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사적인 고백들로 채워진 개인 블로그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할 내용들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인터넷공간에서는 마음껏 늘어놓는다. 왜? 그렇게 하면 일이 괜히 복잡하게 꼬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비밀들을 담는 중립적인 그릇(수용체)으로서의 '대타자 자체(the big Other)'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유된 유아론'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우리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성하는 사랑과 증오에 관한 비밀을 고백하기 위해 이방인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가 보장된 거리를 배경으로 할 때만 관계 자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은 예외적인 지위에 머물고 있는(완전한 이방인과, 다음날 각자의 길을 갈 것이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 그대로 열정적인 섹스로 밤을 보내는 것 같은) 이러한 것들이 점차 새로운 기준으로 되어 가고 있다."

'공유된 유아론'은 영어로 'shared solipsism'이다. 자기만의 내밀성을 낯선이들과 나눠갖는 경향성 정도를 뜻하겠다.  그게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해가고 있다는 것. 즉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고백하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걸 넘어서서 아예 그러한 거리가 전제되어야 친밀한 관계(열정적인 섹스)를 맺는 것이 가능한 경지가 도래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원나잇스탠드'가 성관계의 '모델'이 되어간다? 국역본에는 빠져 있지만, 영어본에서 지젝이 덧붙인 내용은 파트리스 셰로의 영화 <정사(Intimacy)>(2001)이다. 무려 35분간의 정사 장면이 들어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영화이다(내용은 서로에 대해 묻지 않은 채 일주일에 단 하루, 수요일마다 만나 섹스를 나누는 남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같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밀한 인생의 세밀한 부분이, 사람들이 사적으로 속삭이는 외설적인 비밀이 아니라, 모두가 책이나 웹사이트에서 접근 가능한 공적인 등장인물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점이다. 이를 약간 향수어린 보수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스캔들이 더이상 없다는 사실에 바로 스캔들이 있다."

우리의 경우 최근에 컴백설이 나돌고 있는 O양 비디오 사건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등장인물'의 영어 표현은 'persona'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스캔들은 더이상 아무런 스캔들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 흔히 '섹스 비디오 파문'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유사 사건들은 가히 전세계적으로 분포돼 있다. 얼마전 관련기사를 참조하면 이렇다.

스포츠서울(06. 10. 23) 섹스비디오, 국내외 피해 사례는?

섹스 비디오 피해 사례는 국내·외를 통틀어 수 십여건에 달한다. 유명 스타 외의 연예인까지 포함한다면 그 사례는 더욱 많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O양', 'B양', 'L양' 사건. 1999년에 유포된 'O양' 비디오는 유명 여자 탤런트와 한 일반인의 성관계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첫 섹스 비디오라는 희귀성 때문에 당시 이 비디오 테이프는 서울 종로3가 세운상가 일대에서 개당 100만 원에 밀매되기도 했다. 섹스 비디오가 무더기로 뿌려진 이후 피해 연예인은 연예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불과 1년 뒤. 가수 B양의 섹스 비디오가 대량 유통됐다. '제2의 O양 비디오'로 불린 B양 섹스 비디오는 가수 B양과 전 매니저 김모씨의 성관계 모습이 담겨있다. 특히 B양 동영상의 풀버전이 개인사이트에 게재되면서 섹스비디오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인기 절정의 가수였던 B양은 이 사건으로 방송일을 접어야했고 비디오 파문 이후 6년만에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했다. O양, B양 섹스비디오와 달리 탤런트 L양 비디오는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이 비디오는 L양과 닮은 일본 여성의 목욕탕 몰래카메라 컷을 마치 L양인 것 처럼 조작, 유포됐다. 따라서 O양, B양 비디오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며 L양은 실체도 없는 비디오 때문에 심각한 명예 훼손을 당했다.

해외의 피해 사례도 부지기수. 그 가운데 패리스 힐튼과 콜린 파렐의 섹스비디오가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다. 힐튼은 옛 연인 닉 카터, 모델 제이슨 쇼와 찍은 섹스 테이프가 유출돼 곤욕을 치렀다. 이 비디오에는 힐튼의 적극적인 애정행각이 모두 포함돼 있다. 특히 힐튼의 첫 섹스 비디오 '파리에서의 하룻밤(One Night in Paris)'은 DVD판으로 출시되고 있다. 수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힐튼은 급기야 섹스 비디오를 몰래 빼돌리다가 발각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파렐은 옛 연인 니콜 나래인과의 섹스 비디오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파렐의 전 애인 나래인이 지난해 7월 파렐과 함께 찍은 섹스테이프를 유포하려고 한 것. 파렐의 고소로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나래인은 법원의 '공개 및 판매금지' 요청을 무시한 채 비디오를 유포했다. 결국 파렐의 섹스비디오는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파렐은 섹스 비디오로 마음 고생이 심하다고 밝혔다.

섹스비디오는 피해자에게 정신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오점(汚點)을 남긴다. 특히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라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질 한다는 망상에 빠지거나, 사람을 피해다니는 대인 기피증으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 때문이라도 톱스타 K군의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는 피해는 없어야 하겠다.(*지젝이 아래에서 들고 있는 사례도 이러한 것들이다.)

"이는 처음에는 모델과 유명 영화인에게서 시작됐다. 클라우디아 시퍼가 두 남자의 성기를 동시에 열렬히 입으로 애무하는 (조작된) 비디오 클립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만약 인터넷상에서 미미 맥퍼슨(더 유명한 호주 모델 엘 맥퍼슨의 여동생. 사진)에 관한 자료를 본다면, 사람들은 그녀의 뛰어난 친환경적 활동(고래 관찰 회사 운영), 비즈니스 우먼으로서의 그녀에 대한 인터뷰 사이트에 이르고, 그녀의 '점잖은' 사진들이 있는 사이트에 덧붙여, 자위하거나 연인과 성교하는 도둑맞은 비디오를 얻게 된다."

"그리고 카트린 미유의 최근 책은 어떠한가? 여기에서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 비평가는 차갑고 비감정적인 스타일로 창피함이나 죄책감도 없이, 그리고 결론적으로 격정적 일탈의 감정도 없이 자신의 화려한 성생활의 세밀한 부분을, 그녀가 큰 난교파티에 주기적으로 참가하고 거기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익명의 페니스들과 한번에 통하고 즐긴 것까지를 묘사한다."

 

 

 

 

국역본에서 '카트린 미유(Catherine Millet)'라고 표기된 이는 '카트린 밀레'를 가리킨다. 지젝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카트린 M의 성생활>(열린책들, 2001)이다(그녀의 미술관련서들도 국내에 번역돼 있다). 알라딘의 소개를 잠시 옮기면, "자신이 경험한 무수한 성경험을 거리낌없이 풀어놓은 논픽션이다. 놀라운 점은, 성에 대한 서술이 너무나 덤덤하다는 것이다. 섹스 상대의 숫자나, 섹스를 행한 장소, 가지각색의 섹스 스타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섹스와 오르가슴에 대해서 탈탈 털어 이야기하는데도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다. 그저 '나의 섹스'를 치밀하게 그려낼 뿐이다. 그러기에는 문체에 힘입은 바 크다. 허풍이라곤 조금도 없는 비쩍 마른 서술, '주정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 성행위 묘사, 자기의 몸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하는 눈. 공개적으로 섹스 경험을 털어놓았다는 점은 그 다음에 놀랄 일이다. 일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성애 장면을 그려낸 솜씨에 경탄하게 된다..." 

아무튼 성에 개방적인 프랑스에서도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유명인사의 성생활 고백서이다. 카트린 밀레 이후에 그렇다면 어떤 스캔들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지젝이 예감하는 미래는 이런 모습이다.

"여기에 더이상 선험적인 경계는 없다.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에 몇몇 정치가들이 (처음에는 제한적으로) 그 혹은 그녀의 성적 교제에 대한 하드코어 비디오를,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의 매력 혹은 (상적)능력을 확신시키기 위해 유통할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거의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경에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고 썼다. 아마 이 모토는 오늘날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진 것을 신호로 '빅브러더' 현실 드라마 같은 현상에서 파악되는, 주관성을 가진 지위의 급격한 이동을 지적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이상은 안되겠지, 라고 가정해볼 수 있는 '선험적인 경계'는 더이상 없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정치인들이 (처음에는 신중하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섹스비디오를 유권자들에게 유포시킬 가능성까지도 점쳐볼 수 있다. 이미 1912년에 버지니아 울프는 인간의 본성이 변화했다고 적었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러한 기술이 보다 더 적합해보이는 것은 공과 사의 구별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이다...

06. 11. 14-17.

P.S. 서둘러 끝내느라고 마지막 인용문단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먼저 '빅 브러더'는 물론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인물(독재자)인데, 같은 이름의 리얼 TV시리즈가 있다고. 올해 '시즌 7'까지 나왔고 내년에는 '시즌 8'로 들어간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할 수 있다(참가신청자들 가운데 시청자와 제작자들이 뽑은 배역들이 합숙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 같은 걸 하는 모양이다. 그런 게임의 과정이 TV채널을 통해서 전부 공개되는 방식). 그리고 '주체성을 가진 지위의 급격한 이동'은 영어로는 'the radical shift in the status of subjectivity'인데, 직역하면 '주체성의 지위에 있어서의 급격한 이동'쯤이고 의역하면 '주체성이 갖는 지위의 급격한 전도' 정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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