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리뷰로 분류했던 글을 페이퍼로 옮겨놓는다. <문학과사회>(2006년 가을호)에 지젝의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에 대한 서평으로 게재되었던 것이다. 분량 제한 때문에 '들뢰즈와 헤겔'에 관한 내용만 간추렸는데, 사실 책은 한편으로 에이젠슈테인의 <이반 대제>론으로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최근에 에이젠슈테인론을 대학원 수업시간에 읽다가 <신체 없는 기관>을 다시금 떠올리게 됐다). 하지만, 그걸 다 음미하기도 전에 지젝은 서너 권의 책을 더 써낼 것이다!..



우리 영화 <왕의 남자>의 끝장면에서 광대 장생은 줄 위에 앉아 연산군을 희롱하며 재담을 늘어놓는다. “아, 이놈이 기생들 요분질이 시시해지니까 이번에는 사내놈하고 붙어먹는 짓도 서슴지 않는데, 그 비역질이 보통 비역질과 달라서 밥이 나오고 비단옷이 나오고 벼슬까지 나오는 비역질이더라!” 그런데, 이 비역질이 비단 절대권력자만의 것이 아니라 철학자의 것이기도 하다면 어쩔텐가? 철학사가 바로 그러한 비역질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이 ‘비역질의 철학’이 ‘순진무구의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주특기였다면?

들뢰즈 자신이 한 대담에서 밝혀놓은 터라 특별한 비밀도 아닌 이 사실을 “들뢰즈를 다루는 라캉주의적 책”(p.10)의 저자가 놓칠 리 없다. 지젝이 인용하는바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사를 일조의 비역, 혹은 같은 얘기지만, 무염시태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었지. 나는 어떤 작가의 등에 달라붙어서 그의 애를 만들어낸다고 상상했지... 하지만 그 아이가 괴물 같다는 사실 역시 필수적인 것이었지.”(p.98) 




 

 

 

 

 

 

그리고 이러한 ‘비역질의 철학적 실천’을 지젝은 <신체 없는 기관>에서 들뢰즈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요컨대 우리가 들뢰즈 자신 뒤에 달라붙는 행위를 감행하고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이라는 실천에 관여하는 것이 왜 안되겠는가? 이 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거기에 있다.”(pp.101-2)  

사실 ‘기관 없는 신체’라는 들뢰즈의 상용구를 ‘신체 없는 기관’으로 뒤집은 표제 자체가 들뢰즈의 뒤에 달라붙으려는 지젝의 전략을 암시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화(dialogue)가 아닌 조우(encounter)'라고 서문에서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할 때 그 ‘조우’의 장면으로 우리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는 것은 ‘뒤에 달라붙는’ 장면이다. 즉, 지젝을 따라읽으며 우리가 이 ‘소책자'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들뢰즈의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이다(지젝은 자신의 책을 'booklet'이라고 지칭했는데, 번역본의 분량은 본문 400쪽이지만 원서는 213쪽이다). 들뢰즈 자신은 보지 못하는 ‘또 다른 들뢰즈’ 말이다. 

 

그렇다면, 왜 들뢰즈인가? 그건 지젝 자신이 짚어주고 있는 바대로, 최근 10년간 그가 “현대 철학의 중심적 준거점”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참고로, 지젝이 보는 현대철학의 3항 구도는 '들뢰즈-데리다-라캉'이며, 이것은 '스피노자-칸트-헤겔'이라는 근대철학적 구도의 반복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언제부턴가 ‘저항하는 다중’ ‘유목적 주체성’ ‘반-오이디푸스’ 같은 들뢰즈식 개념들이 마치 ‘공통 통화’처럼, 진보와 저항의 이론적 근거처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는 이렇듯 ‘유행하는 들뢰즈 이미지’, 곧 반-헤겔적, 반-정신분석적 들뢰즈의 이면에서 훨씬 더 급진적이고 파괴적인 들뢰즈를 읽어낼 수 있다(이때의 들뢰즈는 헤겔적/라캉적 들뢰즈이다!). 다시 말해서, 지젝이 도입하는 것은 ‘들뢰즈 대 들뢰즈’, ‘들뢰즈에 대립하는 들뢰즈’의 구도이고 그 긴장이다.


지젝에 따르면, 들뢰즈의 최고의 책 <의미의 논리>와 최악의 책 <안티-오이디푸스> 사이에는, 곧 “의미-사건의 비물질적 생성의 불모성과 관련된 들뢰즈”와 “존재의 물화된 질서에 맞서 생성의 생산적 다수성을 찬미한 들뢰즈” 사이에는 양립불가능한,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이 놓여 있다(지젝은 들뢰즈가 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청산하고 쓴 <시네마>를 통해서 <의미의 논리>에서의 들뢰즈, 본래의 들뢰즈로 회귀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아예 들뢰즈가 자신의 이전의 입장이 처한 곤궁으로부터 쉬운 도피처를 가타리에게서 찾은 것이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한다(철학사에서 그러한 도피/회피의 사례는 드물지 않다면서).

‘잠재적인 것’(잠재태)과 ‘현행적인 것’(현실태) 사이의 대립을 ‘생산'과 '재현'의 대립, ‘생성’과 ‘존재’의 대립과 동일시함으로써 들뢰즈는 유물론으로부터 관념론으로 퇴행한다. 그럴 경우 “생산의 고유한 현장은 잠재적 공간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잠재적 공간에서 구성된 현실로의 바로 그 이행”이고 “생산은 근본적으로 잠재성들의 열린 공간에 대한 제한이며, 잠재적 다수성에 대한 규정이자 부정”(p.49)이라는 ‘의미의 논리’의 결과를 간과하게 된다.

  

사실 “들뢰즈의 위대한 반헤겔적 모티브는 절대적 긍정성, 즉 부정성에 대한 그의 철저한 배격”(p.108)에 놓여 있다. 그때 스피노자주의자로서 들뢰즈가 상정하는 헤겔은 ‘순진무구한’ 헤겔이다. 즉 “헤겔은 존재의 순수 긍정성에 부정성을 도입하며 또한 헤겔은 분화를 긍정적 일자의 종속적/지양가능한 계기로 환원하기 위해 부정성을 도입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지젝의 반격은 “헤겔이 궁극적으로 부정성에 대해 행하는 것은 전례 없는 부정성 그 자체에 대한 ‘긍정화’가 아닌가?”(p.108)란 반문이다

헤겔에 대한 들뢰즈의 단순화는 “칸트에 맞선 혹은 칸트를 넘어선 헤겔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간과하게 만든다. 들뢰즈는 자신이 증오해 마지 않는 헤겔을 그답지 않게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읽는다(마치 헤겔의 뒤에 달라붙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듯이). 그래서, “헤겔은 칸트로부터, 자기투명하고 완전히 현행화된 존재의 논리적 구조를 표명하는 절대적 형이상학으로 회귀한 자”(p.118)란 이미지만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젝이 보기에 헤겔의 통찰이야말로 들뢰즈적인 것이다.“하지만 헤겔이 칸트에게 여하한 긍정적인 내용도 덧붙이지 않는다면, [칸트적 체계의] 간극을 채우지 않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헤겔의 ‘절대지’는 ‘모든 것을 아는’ 터무니 없는 입장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경로가 어떻게 이미 진리 그 자체인지에 대한 통찰, 절대자가 어떻게 정확히 -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자면 - 자기 현행화의 영원한 과정의 잠재성인지에 대한 통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pp.118-9)

 

들뢰즈에 대한 지젝의 이러한 독해, 혹은 달라붙기가 산출해내는 것은 헤겔=들뢰즈=라캉의 ‘기이한 등가계열’이다(지젝은 들뢰즈=라캉의 테마에 대해서도 ‘오이디푸스-되기’ ‘환상’ ‘남근’ 등의 모티브를 통해서 입증한다). 이것이 어쩌면 “참을 수 없는 괴물”(p.103)이어서 들뢰즈는 헤겔을 자기 특유의 비역질, 혹은 ‘자유간접화법’에 의해 전유될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로 고양시켜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지젝이 하고 있는 일은 들뢰즈가 꺼려 했던 바로 그 일이다.   


“들뢰즈는 헤겔이다”라는 일종의 무한판단, 바로 그것이 ‘들뢰즈에 대한 헤겔적 비역질’, 보통의 비역질과는 다른 ‘비상한 비역질’을 통해서 우리시대의 광대-철학자 지젝이 얻어내는 결과이다. 그리고 책의 2부에서는 그 결과의 ‘결과들’을 과학, 예술(영화), 정치라는 세 가지 주요 영역들에서 차출해낸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흔히 말해지는 ‘들뢰즈적 정치’의 곤궁과 불능을 드러내는 대목들인데, 지젝이 단언적으로 미리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혁명적 전복에 관한 그 어떤 가능한 관념이라도 ‘반-오이디푸스적 반란’이라는 문제틀과 총제적으로 단절해야 한다.”(p.199)

지젝이 이 책을 헌정하고 있는 조운 콥젝은 “이제부터 들뢰즈에 대한 모든 독해는 이 중요한(필수적이기까지 한) 책을 통해 우회해야만 할 것이다”라고 예언한다. 스피노자에 대한 들뢰즈의 무조건적 존경을 빗대어 지젝은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p.72)라고 반문하는데, 그 반문을 조금 비틀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지젝을 읽지 않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06. 08. 05./ 07 06.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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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6-04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다시보는 글이네요..^^ 당시 자세히 읽어보지 않아서 대충 넘어갔는데..지금 다시 읽어보니 흥미로운 구절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헤겔의 ‘절대지’는 ‘모든 것을 아는’ 터무니 없는 입장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경로가 어떻게 이미 진리 그 자체인지에 대한 통찰, 절대자가 어떻게 정확히 - 들뢰즈의 용어로 말하자면 - 자기 현행화의 영원한 과정의 잠재성인지에 대한 통찰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와 같은 말을 지젝이 하였다는 것은 지젝의 말처럼 들뢰즈가 헤겔적으로 독해될수있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거꾸로 헤겔이 들뢰즈적으로 혹은 칸트, 스피노자적으로 독해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될 것 같네요. 물론 들뢰즈가 헤겔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비판하였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젝만이 했던 비판이 아니라 여러 헤겔전문가들도 마찬가지의 비판을 하곤 했죠. 그렇다면 헤겔의 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을 다시 되돌아 보아야 하는데, 그부분에서 지젝은 들뢰즈와 헤겔의 "등가성"만 이야기하고 "차별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네요. 적어도 위 페이퍼에서는 말이죠. 그렇다면 지젝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헤겔을 들뢰즈적으로 혹은 스피노자적으로 독해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인데..이부분에서 물음표를 남겨둘수밖에 없네요. 특히 헤겔이 행했던 칸트와 스피노자에 대한 비판을 되돌아보면 말이죠. 그리고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헤겔은 칸트와 스피노자를 들뢰즈가 헤겔에게 했던 것처럼 단순화하여 결과적으로 자신의 철학이 칸트적 스피노자적 논리를 따름에도불구하고 그들과의 유사성 보다는 차별성을 부각시키려 했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해도 될것 같은데 말이죠. 그렇다면 위에서처럼 "헤겔=들뢰즈=라캉"이 성립하는 것 만큼 "스피노자=칸트=헤겔"등식도 성립한다는 것을 지젝은 보여주어야 될것 같은데...

로쟈 2007-06-0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하나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하시는 것 아닌가요?^^ 여기서 생략된 많은 이야기들은 지젝에게서 직접 들어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지젝 비판도 그 정도의 풍만함을 보여주었으면 싶어요...
 

올해 들어 국외서적으로는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How to Read Lacan)>(2007)이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499546&paperId=1032991). 노튼(Norton)출판사에서 나오는 'How To Read' 시리즈의 한권인데, 두어 차례 페이퍼에서 다루면서 조만간 국역본이 나올 거라는 소식도 전한 바 있다. 바로 그 책이 이번에 출간됐다.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떼로. '떼'라는 것은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을 포함하여 같은 시리즈의 책 10권이 한꺼번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전격적'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겠다.

나는 어제 아침에 8권의 책을 주문해서 오후에 받았다. 일단 집에 들고 온 책은 내가 원서도 갖고 있는 <라캉>과 <데리다> 두 권인데, 원서 <데리다>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아서 일단은 <라캉>의 서문만을 읽어보았다(사실 <라캉>의 원서도 한참만에 찾았다. 한동안 잊고 있었더니 책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우리 뇌를 씻어내자'가 지젝이 붙인 그 서문의 제목이다. 아니 국역본의 경우엔 그렇다. 원서에는 따로 제목이 붙어 있지 않고 다만 'Let's try to practice a little brain-washing on ourselves'가 에피그라프(제사)로 달려 있을 따름이다.

 

 

 

 

서문에서 지젝이 먼저 짚고 있는 것은 지난 200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출판 100주년 기념과 동시에 하편에서 대두되고 있는 새로운 조류(new wave), 곧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망선고'이다. 국내에 출간된 책으로는 아마도 스티븐 존슨의 <굿바이 프로이트>(웅진지식하우스, 2006)가 이러한 조류를 대표하는 책이겠다(비록 원제 'Mind Wide Open: Your Brain and the Neuroscience of Everyday Life'는 국역본의 제목만큼 선정적이지 않지만 말이다). 최근에 다수 출간되고 있는 뇌과학 서적들도 이러한 조류에 한몫하는 것이고.

지젝이 인용하고 있는 뒤프레슨의 책명이 <프로이트 죽이기: 20세기 문화와 정신분석의 죽음>(2004)인 것은 시사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상-마르크스와 몇몇을 제외하고 - 인간 사유의 근본원리에 대해 프로이트만큼 오류를 범한 사람도 없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등장한 책이 <공산주의의 블랙리스트>(2000)를 이어서 출간된 <정신분석학의 블랙리스트>(2005)이다(역자는 '블랙북(Black Book)을 '블랙리스트'로 옮겼다. 미주의 책제목에 'noire'라고 오타가 났다). 두 권 모두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인데, "공교롭게도 이런 부정적인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사이의 심오한 연대가 만천하에 알려진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사망선고, 혹은 장례사(funeral oratory)에 이의를 제기한다. 사실 한 세기 전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을 근대 유럽사에 끼워넣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세 가지 모욕'이란 생각을 발전시켰다. 다니엘 부어스틴이라면 '부정적 발견'이라고 불렀음직한 이 세 가지 모욕이란 (1)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에게서 우주의 중심이란 위치를 박탈한 것, (2)다윈이 진화론을 통해서 역시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특권적 지위를 박탈한 것, (3)프로이트가 무의식 지배적인 역할을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자아(ego)가 우리의 집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 것 등이다.

그런데, 지젝이 보기에 정신분석학의 1세기가 지난 오늘날 (뇌과학을 통해서)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자기상에 보다 급진적인(파괴적인) 모욕이 출현하고 있다. 즉, "우리의 정신은 데이터 처리과정의 연산기계에 불과하며, 자유와 자율에 대한 감각도 기계 사용자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의 뇌과학과 비교한다면 정신분석학은 전복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최근의 모욕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주의적 전통처럼 보인다."(7쪽)

요컨대, 현황은 이렇다: "(1)과학지식의 차원에서, 인간정신에 대한 인지심리학자들의 신경생물학적 모델은 프로이트의 모델을 대체하고 있다. (2)정신의학적 임상치료의 차원에서, 정신분석적 치료는 약물치료와 행동치료에 밀려 자신의 기반을 급격히 상실하고 있다. (3)사회적 환경의 차원에서, 개인의 성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적 규범의 이미지는 오늘날 압도적인 쾌락주의적 경향과 비교하여 더이상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사망선고와 추모는 성급하고 성마른 것이라 진단하다. 오히려 그의 목표는 "오늘날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시대가 도래한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프로이트를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론 "라캉을 통해 프로이트를 읽음으로써, 즉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복귀'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

원문은 "[M]y aim is to demonstrate that it is only today that time of psychoanalysis has come. Seen through the eyes of Lacan, through what Lacan called htis 'returen to Freud', Freud's key insights finally emerge in their true dimension."이다. 여기서 강조한 대목은 국역본에서 누락됐다. 그렇다고 대세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약간씩의 누락은 뒤에서도 곧잘 나온다.  라캉의 프로이트 독해, 곧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통해서, 프로이트의 핵심적인 통찰이 갖는 진정한 차원이 마침내 나타나게 된다는 얘기이다.

 

 

 

 

라캉에게서 '프로이트로의 복귀'가 뜻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언어학적 재독해/재구성이다(때문에 "라캉의 핵심 개념 중 대부분이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놀라운 것은 이성적 자아가 그보다 훨씬 큰 영역의 맹목적이고 불합리한 본능의 영역에 종속되어 있음을 주장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무의식 자체가 오직 자신의 문법과 논리에 복종하고 있는지를 입증했기 때문이다."

라캉의 해석/재독해에 따르면, "무의식은 자아가 정복해야 할 야생적인 충동의 저장소가 아니라, 외상적인 진실이 말을 하는 장소다.(...)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내가 동화시켜야 할 심오한 진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할 참을 수 없는 진실이다. " 

 

 

 

 

그렇다면, 라캉과 다른 정신분석학파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라캉에게 정신분석학은 심리적 장애를 다루는 이론이나 기법이 아니라, 개인들을 인간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영역과 대면시키는 이론이자 실천이다.(...) 라캉에게 정신분석 치료의 목적은 환자의 복리나 성공적인 사회생활 내지 개인적인 자기 성취가 아니라, 환자로 하여금 그/그녀의 욕망의 기본 좌표와 곤경을 대면하도록 하는 것이다."

"라캉의 '프로이트의 복귀'는 임상분석에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기도 했다. 라캉은 일생 동안 끊임없는 논쟁과 분열과 추문까지 일으켰다. 그는 1963년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파문당했으며, 그의 논쟁적인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자에게서 페미니스트에 이르는 진보적 사상가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한데, 여기서 신경을 건드리는 건 '1953년'이 '1963년'으로 오기된 것. 국역본엔 '라캉의 생애'를 참조하라고 돼 있는데, 191쪽을 참조하면 라캉은 1953년에 국제정신분석협회의 산하기관인 파리정신분석협회 대표직을 사임하고 프랑스정신분석협회에 가입하며 이 때문에 파리정신분석협회로부터 제명(파문) 당한다. 참고로 라캉은 "그해 7월에 주디스를 낳게 될 마클레스(Sylvia Makls)와 결혼했다." '마클레스(makles)'에서 'e'가 빠졌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해 가을 라캉의 '전설적인' 세미나가 시작된다는 점.

그런 라캉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라캉은 탐욕스러운 독자이자 해석자였다. 그에게 정신분석은 구술(환자의 말), 혹은 기술(記述) 텍스트를 독해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라캉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독법을 실천하여 라캉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이다." '라캉으로 다른 텍스트를 읽는 것'이야말로 지젝의 주특기 아닌가(나는 개인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보보크>에 대한 독해를 먼저 읽어보게 될 듯하다)!

"라캉은 최고의 임상학자였으며, 그의 임상적 관심은 그의 실천과 저작 전체에 스며 있다."(Lacan was first of all a clinician, and clinical concerns permeate everything he wrote and did.) 'first of all'은 '최고의'란 뜻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정도이다. 라캉은 무엇보다도 임상학자(임상의)였다는 것. 한데, 그의 임상적 관심이라는 게 두루 망라하는, 편재(遍在)하는 것이었기에 지젝은 '임상'만을 따로 다루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임상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생략하고, 임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이는 임상적 효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의 임상적 위치에 대한 진정한 검증 방법이다."(Precisely because the clinical is everywhere, one can short-circuit the process and concentrate instead on its effects, on the way it colours everything that appears non-clinical - this is true test of its central place.)

마지막 절에서 'its central place'를 '라캉의 임상적 위치'라고 옮긴 건 부정확해 보인다. '(라캉에게서) 임상이 갖는 중심적 위치'란 뜻 아닌가? 다시 옮기면, "모든 것이 임상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으며 대신에 그 결과(효과)들에, 임상적인 것이 임상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이는 방식에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임상의 중심적 위치에 대한 진정한 검증방법이다."

여기까지가 라캉에 대한 설명이라면 이 서문의 마지막 문단은 <라캉을 읽는 방법(How To Read Lacan)>의 전략에 대한 설명이다. 지젝은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맥락을 통해 라캉을 설명하는 대신에(...) 라캉을 이용하여 우리의 사회적 리비도적 곤경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 책은 중립적인 판정을 내리는 대신 당파적인 독해에 참여"한다. 왜냐하면 모든 진실/진리는 당파적이라는 게 또한 라캉 이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엘리엇(T. S. Eliot)은 <문화의 정의에 대한 노트>에서 모든 선택은 청교도 종파주의와 무신론 사이의 선택일 뿐이라고, 종교를 생동감 있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주류 체제에 대한 종파주의적 분열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라캉은 그의 종파주의적 분리를 통해, 즉 쇠멸해가는 국제정신분석협회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프로이트의 가르침을 생동적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가 라캉에 대해 해야 할일 역시 이와 같다."

역자는 'sectarianism'을 '청교도 종파주의'라고 옮겼는데, 그냥 '분파주의' 정도라고 봐야겠다('종파주의'란 역어도 자주는 쓰이는 건 아니다). 그걸 굳이 한정해서 '청교도 종파주의'라고 옮긴다면 뒤에 나오는 '종교(religion)'도 '기독교'라고 옮겨야 짝이 맞는다. 여하튼 라캉을 읽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마지막 제스쳐는 '정통적인' 라캉주의적 견해로부터의 분파주의적 이탈이다, 라고 지젝은 말하는 듯하다. 이것은 하나의 내기이다.

마지막에 붙은 미주는 이 책의 소스에 관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은 라캉의 몇몇 기본 개념에 초점을 맞춘 입문서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주제들은 지난 10여년간 내가 했던 작업의 중심 개념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정 정도 이미 출판된 내 저서의 '해체 조립(canibalization)'이 될 수밖에 없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내 책에서 빌려온 구절들을 새롭게 각색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185쪽)

'변명을 하자면'은 'to compensate(보상/보완하기 위해서)'를 옮긴 것이다. 책의 이러한 해체-구성적(카니발적) 성격은 역자 후기에서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지젝 자신이 고백하듯이 이 책은 지젝의 이전 저서들에서 '빌려온 구절을 해체 조립하여 새롭게 각색'한 '지젝의 책'이다."(198쪽) 이 구절을 옮겨적은 것은 예전에 역자가 제기한 지젝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034520&paperId=989000 참조). '변명을 하자면'은 역자에게 더 어울릴 만한 문구이다. 그는 이렇게 적었었다.

나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을 애독하는 사람들은 신간이라고 펼쳐 보면 이전 책에서 이미 본 듯한 구절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기시감’이 아니다. 때로는 거의 한 챕터 전체, 때로는 한 단락 그대로, 때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채 자기-표절을 하고 있다.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역시 새로 쓴 부분보다는 이전 책에서 오려 붙인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혁명이…>는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 전체가 그렇다.(...) 엄밀히 말해서 ‘지젝’의 책은 없다. (...) 그는 헤겔이 생산한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생산한 유물론을, 프로이트가 생산하고 라캉이 재생산한 정신분석학을 멋지게 재가공해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유용한 물건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쇼호스트와 같다... 

 

 

 

 

그러니까 역자의 핵심적인 주장은 '지젝은 없다' 내지는 '지젝의 책은 없다'였다. 하여 그의 주장대로 이렇듯 자기 표절로 충만한 '쇼호스트'의 책을,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을 굳이 우리말로 옮기느라 애쓴 역자의 '계산법'이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쇼호스트의 쇼호스트?). 궁금하지는 않지만 기이하다는 생각은 든다. '지젝으로의 복귀'인가, 아니면 자학에의 열정(혹은 향락)인가? 여하튼 나로선 '라캉 정신분석학의 실천적 곤경'(201쪽)을 염려하기에 앞서서 역자가 대면해야 했던 것이 '번역의 곤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은 역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인지도...

07. 05.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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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7-05-19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드 씨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워요. 아, 그런데 지젝을 읽으려면 무슨 책을 먼저 읽으면 좋은지 추천 좀 해주세요. 오역이나 필요 이상의 난해한 번역으로 지젝에게 제가 지레 질리지 않을 수 있는 책으로요. 으음ㅡ. 사실 제가 지젝의 책을 선뜻 고르지 못하는 데에는 로쟈님의 책임이 정말 크거든요. 그러니 골라 주셔야 해요. ㅡㅡ'

(그런데 이 질문을 언젠가도 한 번 드렸던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지.)

로쟈 2007-05-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어차피 라캉도 비켜갈 수 없으니까 이 책부터 읽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번역은 부분적인 착오들에도 불구하고 거침없기 때문에 가독성은 좋습니다...

Joule 2007-05-20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땡쓰투ㅡ했어요. 흐음.

(제가 요즘 마침 라캉을 읽고 있거든요. 음, 그럼 프로이드와 라캉과 지젝과의 포썸이 되는건가요. 아침 저녁으로는 프로이드를 읽고 있으니 말이에요. 이거 괜찮다.)

자꾸때리다 2007-05-20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통한 라캉의 이해라.... 그렇다면 지젝의 다른 책 <삐딱하게 보기>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로쟈 2007-05-2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아침 저녁으로 재미보고 계시는 거네요.^^ 결과를 기대해봐도 되는 거죠?..
Mravinsky님/ 영화만 다루어지는 건 아니고 다양한 텍스트를 라캉과 대면시키는 것이고, 지젝에 따르면 라캉 이해는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딱히 <삐딱하게 보기>하고만 연관되는 건 아니구요...

수유 2007-05-2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5권의 책을 교보에서 사왔답니다. 셰익스피어를 안들고 온것이 조금 걸리네요. 철학책들을 왜 사냐는 동생들의 핀잔을 들으면서 말이지요...
모처럼 좀 한가한 휴일 오전의 책방이었습니다.

이매지 2007-05-2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새 간단하게 <라캉읽기>를 읽고 있는데 얇은 책인데도 영 진도가 안나가네요. 글 자체가 어렵게 써진 건 아닌데 말이죠. 쩝.

yoonta 2007-05-2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본을 보니 각 장의 제목을 원본과 다르게 표기했더군요. 가령 2장의 제목은 The Interpassive Subject 인데 번역본은 "진짜와 가짜" 이런 식...그렇게 하는게 각장의 내용이 더 잘들어올거라 판단해서 그런거 같은데 저로서는 원본에 충실하는게 더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1장 초반부에 나온 다나오이(Danaoi)가 무엇인지 원본에는 주에서 소상하게 설명이 되어있는데..왜 번역본에서는 홀랑 빼먹었는지도 이해하기 힘들고..한국의 독자들이 그리스고전에 영어권 독자들보다 더 정통하다고 생각해서 였을까요? -_-

로쟈 2007-05-2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유님/ '철학책'이라기보다는 그냥 '교양서'이죠.^^
이매지님/ 제가 읽기엔 숀 호머보다는 지젝이 훨씬 읽기 편합니다(더 재미가 있어서요)...
yoonta님/ 번역자 판단인지 편집부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좀 불만스런 대목들이 눈에 띄네요...

들국화 2009-10-24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사실 한 세기 전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을 근대 유럽사에 끼워넣기 위해서 인간에 대한 '세 가지 모욕'이란 생각을 발전시켰다. 다니엘 부어스틴이라면 '부정적 발견'이라고 불렀음직한 이 세 가지 모욕이란(이하생략)" (로쟈님 글)

"한 세기 전 근대 유럽의 역사 속에 무의식의 발견을 끼워넣기 위해 프로이트는 그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라고 부른 세 가지 연속적인 인간 모욕의 관념을 발전 시켰다."(HOW TO READ 라캉 7쪽의 관련 부분)

'세 가지 인간 모욕의 관념 = 나르시시즘적 질병'이 아니지 않나요? 오히려 인간의 "나르시시즘적 질병"을 폭로하는 것이 "세 가지 인간 모욕의 관념"이 아닌가요? 로자님은 "다니엘 부어스틴이라면 '부정적 발견'이라고 불렀음직한 이 세 가지 모욕"이라고 쓰신 것도 이것를 인지하셨기 때문일까요?

2.그리고 제가 지금 2009년에 나온 초판 4쇄본을 읽고 있는데, 로자님이 지적하신 것 중 수정된 부분은

"라캉은 최고의 임상학자였으며" -> "무엇보다 라캉은 임상학자였으며"
1963년 -> 1953년, noire -> noir, Makls -> Makles

이군요. "청교도 종파주의"라든가, "라캉의 임상적 위치"같은 건 안 고쳤네요.
(전 로자님 해석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함)

3.
로자님 번역비평보면서 외국어 정말 열심히 배워야겠단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합니다 ^ ^



대각선씨 2011-02-14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안녕하세요? 우연히 라캉의 생애를 검토해보다가, 라캉이 IPA에서 제명된 시기가 1963년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How to read lacan 원서에는 1953년으로 되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오기된(오기가 맞다면) 번역본이 오히려 맞고, 원서가 틀린 것 같습니다. 이것은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와 lacan.com에 소개된 라캉의 생애를 참조했습니다. 국역본에서 (오기된?) 날짜가 다시 원서의 (오기된!) 날짜로 수정됐다는 위의 댓글을 읽고 이 글을 남깁니다.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시간이 되신다면,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영국의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미끼'는 슬라보예 지젝이 던져놓은 것이다. 마침 <맨스필드 파크>의 새 번역본도 출간되었기에 지젝이 그리고 있는 '오스틴 맵'에 대해서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읽을 대목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의 115-7쪽이다(인용문의 몇몇 표기와 용어는 수정했다).

 

 

 

 

그가 붙인 절제목은 'Hegel with Austen'인데, 언젠가도 적었지만 국역본은 그걸 '오스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옮기면서,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Austen, not Austin."이라는 첫문장을 "오스(Austen)이 아니라 오스(Austin)임에 주의하자."라고 부주의하게 오역해놓았다('Austen'은 여성작가이고 'Austin'은 남성 철학자이다. 그래서 '오스틴과 함께 헤겔을'이라고 할 때의 오스틴이 '철학자 존 오스틴'이 아니라 '작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걸 지젝이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조가 무색하게 됐지만). 'Austen'이란 이름을 나는 국역본과는 달리 관행대로 '오스틴'이라고 읽겠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에서 헤겔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는 아마도 제인 오스틴일 것이다." 이만하면 그럴 듯한 '미끼' 아닌가?

 

 

 

 

지젝 왈 "<오만과 편견>은 <정신현상학>에, <맨스필드 파크>는 <논리학>에, <엠마>는 <백과사전>에 필적한다." 여기서 <논리학>은 <대논리학>을 가리키는 것으로 임석진 역, <대논리학1-3>(지학사, 1983)이 출간됐었지만 현재는 절판됐다(연구서들만 덩그러니 몇 권 나와 있는데, 그다지 보기좋은 풍경은 아니다). <백과사전>은 <철학강요>(을유문화사, 1976/1998)로 번역된 책인데 아직 시중에 돌아다닌다. 두 책의 서론만을 옮긴 책이 <논리학 서론-철학백과 서론>(책세상, 2002)이다.  

먼저 지젝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서 <오만과 편견>에 대한 해제를 잠시 읽어둔다(지젝은 <오만과 편견>만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서지문 교수(고려대 영문학)의 작품해설이다(원 기사의 편집자가 남자 주인공 '다아씨(Darcy)'를 '다아 씨'라고 표기해놓은 것도 코미디라 할 만하다. 인용문에선 수정했다. 국역본 지젝에서 이 커플은 '달시-엘리자벳'으로 표기되고 있다).

“당신의 청혼 방법이 나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신다면 오햅니다. 그저 좀 더 신사적인 태도로 청혼했더라면 거절하면서 느꼈을 나의 미안함을 면제해 주었을 뿐이지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가난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대지주인 다아씨의 청혼을 보기 좋게 거절하며 하는 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양가의 규수들은 결혼을 하지 않으면 오빠나 남동생의 집에 군식구로 얹혀살거나 남의 집에서 지독한 저임금에 무수한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가정교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기댈 남자 형제도 없고 기대할 유산도 전혀 없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은 그러니까 조건 좋은 신랑감을 구하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그러나 예리한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이고 생기발랄한 엘리자베스는 그런 세속적 압력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그 사회의 비굴하고 잘난 체하는 속물적인 군상들을 취미삼아 관찰하는 엘리자베스가 오만하고 비사교적인 대지주 다아씨에게 반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아씨도 처음에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시선을 끌 만한 미모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그녀의 지적인 예리함과 재기에 어쩔 수 없이 끌리게 된다. 그리해서 그녀의 주책망나니 어머니, 책임감이 부족한 아버지 등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누르고 내키지 않는 청혼을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자기 같은 ‘일등 신랑감’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다아씨는 호된 질책과 함께 여지없이 ‘퇴짜’를 맞는다.

처음엔 어리둥절하고 곧이어 분개하지만 다아씨는 좋은 ‘조건’만으로는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기성찰을 시작한다. 엘리자베스 역시 자기가 다아씨에게 가졌던 반감이 많은 부분 편견에서 왔음을 깨닫고, 자신의 판단력 과신을 깊이 반성하며 다아 씨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게 된다. 다아씨와 엘리자베스가 자신들의 달라진 모습을 서로에게 보일 수 있는 몇 건의 사건이 있은 후 두 번째 청혼에서 다아씨는 성공한다. 이 과정을 제인 오스틴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이 책은 한번 손에 들면 내려놓을 수 없다.

 

 

 

 

오스틴의 소설들은 너무너무 재미있고, 모든 인물이 그의 자격에 꼭 합당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만 오스틴의 진수는 그의 엄격한 도덕관,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문명사회의 유지, 발전과 가치 있고 품위 있는 삶에 대한 비전에 있다. 영국 남부 농경사회의 조그만 읍을 무대로 조용한 일상사와 함께 전개되는 이 소설은 오로지 당돌하면서 재기발랄한 여주인공과 카리스마 넘치는 남주인공, 그리고 군더더기 한마디 없고 허술한 구절도 전혀 없는 완벽한 구성으로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오스틴은 이성과 분별력과 절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영국의 전통적 사회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으나 그것은 상류층이 경직되고 배타적이지 않고 겸허함과 열린 마음을 지님으로써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은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서 성장하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찾고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동아일보, 05. 08. 19)

다시 지젝: "따라서 <오만과 편견>에서 오인으로부터 유래하는 진리의 변증법에 관한 완벽한 시례를 발견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엘리자벳과 달시는 각자 상이한 사회적 계급에(남자는 부유한 귀족 가문에, 여자는 빈곤한 중산층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오만 때문에 그의 사랑은 엘리자벳에게 가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엘리자벳에게 청혼을 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그녀가 속한 세상에 대한 경멸을 솔직히 고백하고 그의 프로포즈를 전례 없는 영광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하지만 엘리자벳은 그녀의 편견 때문에 그를 거만하고 허영심에 가득 차서 우쭐대는 인물로 바라본다. 그의 오만한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그녀는 그를 거절하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실패, 이 상호적인 오인은 의사소통의 이중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각각의 주체는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메시지를 전도된 형태로 되돌려 받는다. 엘리자벳은 달시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재치로 가득 찬 숙녀로 비춰지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로부터 '당신은 단지 그릇된 기교들로 가득 찬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한편 달시는 그녀에게 자신이 자긍심 있는 신사로 보이길 원했다. 그런 그는 그녀로부터 '당신의 자긍심은 경멸스러운 거만함에 불과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결렬된 후 그들은 각자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들의 결혼으로 끝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그냥 줄거리라고 해야겠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면 엘리자벳이 받은 메시지에서 '그릇된 기교들'은 'false finesse'의 번역이고 'finess'는 '연애의 기교' 혹은 술책을 가리킨다. 그리고, '가난하고 무식한 피조물(a poor empty-minded creature)'은 너무 적나라한 직역인데, '가련한데다 머리는 텅빈 아가씨' 정도가 아닐까 싶다. 여하튼 이러한 줄거리를 가진 오스틴의 소설이 헤겔과는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이 이야기가 지닌 이론적인 흥미는 첫번째 만남의 실패, 타인의 실재적인 특성에 대한 이중적인 오인이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으로서 작용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진리에 곧바로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그들이 서로의 실제 성격을 알았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곧장 결혼으로 끝맺을 수 있었을 텐데.' 미래의 연인들의 첫 만남이 성공하게 된다는, 즉 엘리자벳이 달시의 첫 구애를 받아들인다는 희극적인 전제를 세워보자.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에 빠지는 대신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연인이 될 것이다. 오만하고 부유한 남자와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로서 말이다." '최종 결론의 실정적인 조건(a positive condition of the final outcome)'은 '최종결과의 긍정적인 조건'으로 읽는 게 더 낫겠다.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되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오인을 통한 고통스런 우회로를 피해가길 원한다면 우리는 진리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오인을 '통해서만' 타인의 본성에 도달하고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 그것을 통해서만 달시는 그릇된 오만으로부터 벗어나고, 엘리자벳은 자신의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대문자(Truth)로 강조돼 있고, '통해서만'은 'working-through'의 번역이다.

"이 두 계기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 속에서 자신의 편견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고, 달시는 엘리자벳의 허영 속에서 자신의 그릇된 오만의 전도된 이미지와 마주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달시의 오만은 엘리자벳과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순한 실증적인 상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녀의 편견의 시점으로부터만 나타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벳은 달시의 오만스런 시점 속에서만 잘난 체하고 무식한 처녀가 될 뿐이다."

'이 두 계기들(These two movements)'는 '이 두 운동'의 착오이다. 어쨌든 이 두 운동은 상호 교차적이다. 달시의 오만과 엘리자벳의 편견은 서로의 시점에서 봐줄 때만 나타나는 무엇이다. 즉, 달시가 오만하기에 엘리자벳이 편견을 가진 여자로 보이는 것이고, 엘리자벳이 편견을 갖고 있기에 달시가 오만하게 보이는 것이다. "헤겔의 용어로 말하자면, 타인의 결점이라고 인식된 것 속에서 각자는 (그것을 모른 채) 자신의 주체적인 위치의 허위성을 인식한다. 타인의 결점은 단지 우리 자신의 관점의 왜곡을 객관화한 것이니까 말이다." 고로 타인의 결점이 없다면 우리 자신의 허위성(왜곡) 또한 인지할 수 없게 되는 것(고로 진리는 오인으로부터 온다!). 이런 게 변증법 아닌가?..

07. 05.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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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5-14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요것 재밌습니다. 헤겔과 오스틴이라...요즘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를 영문판과 비교해서 읽고있는데 어찌 영 진도가 안나가는군요..허접한 나의 영어실력때문에..ㅜ.ㅜ

로쟈 2007-05-14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살을 부리시는 게 재밌습니다.^^ 독어가 더 편하신 건가요?..

yoonta 2007-05-15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어라고 별수있겠습니까..그래도 영어가 쪼금 낫습니다.-_- 요즘 헤겔 정신현상학도 한번 독해해보려고 워밍업중인데요.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정신현상학에서의 변증법적 과정은 특정 인식의 한계성(엘리자벳)을 특정대상(달시)의 대상화과정을 통해서 드러내고 또 그럼으로써 보다 상승된 인식으로 '지양'(엘리자벳과 달시의 결혼 혹은 양자의 오인의 해소)되는 방식으로 즉 변증법적으로 서술되어 있더군요. 이런 주체의 한계 내지는 공백을 드러내는 헤겔 철학의 변증법적 특성때문에 지젝이 헤겔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지젝은 그렇다면 정신현상학에서의 결론인 헤겔의 절대지 혹은 절대정신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요? 맑스는 헤겔철학의 이러한 결론때문에 그것은 "거꾸로 서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젝도 맑스처럼 이런 관점으로서만 헤겔철학을 승인하는 것인가요?

로쟈 2007-05-15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고난도의 질문이십니다.^^; 지젝의 책 어딘가를 참조하면 자세히 나올 거 같은데, 제가 아는 지젝은 헤겔을 에누리 없이 승인하고 수용합니다. 단, 기존의 독해와는 다른 방식으로. 맑스의 헤겔 독해도 불충분하다고 보는 걸로 저는 이해합니다(저도 공부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같은 경우 제3부를 참조하시면 시사점을 얻으실 수 있을 거 같구요, 물론 <그들은 자기가...>가 보다 주된 '교재'가 될 거 같습니다...
 

막간에 지젝의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에 대한 리뷰를 하나 옮겨온다. 본격적인 리뷰가 드물던 차에 반가운 글이면서 동시에 책에 대한 독해를 다시금 부추기는 글이다. 5월에는 나도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컬쳐뉴스(07. 04. 24)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기

현대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이름이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을 뒤이어 정신분석학의 힘을 가장 야심차게 (재)확장해놓은 슬라보예 지젝(1949~  )이 바로 그 이름이다(*지젝을 경유하지 않고 사유하는 일이 가능은 하겠지만 재미는 없을 듯하다). 따라서 그의 이력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젝을 읽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선입견이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넘어가야 된다. 그의 글은 이해하기 쉽다는 선입견이 바로 그것이다(*물론 지젝은 쉽다. 헤겔 혹은 라캉과 비교해보라! 다만 그가 혹은 우리가 기대한 만큼 '대중적'이지 않을 따름이다).

아마도 이 선입견은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라는 강단 철학자들의 비아냥거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젝이 자신의 논의를 설명하기 위해 대중문화의 예(특히 할리우드 영화, 심지어는 <타이타닉> 같은 블록버스트까지!)를 많이 들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다른 현대사상가들에 ‘비해’, 즉 ‘상대적으로’ 그러한 뿐이다.

이 점은 “칸트, 헤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부제가 달린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를 읽을 때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이 책에서도 지젝은 <토탈 리콜>, <엔젤 하트>, <블레이드 러너>, <더티 해리> 같은 할리우드 영화 얘기를 곳곳에서 하지만, 그보다 백배는 더 많은 지면을 칸트와 헤겔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한정된 지면에 이 책의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고,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중심으로 몇 마디 하고자 한다.

6장의 핵심 테마는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끈은 언제나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를 함축한다”이다. 이 테마는 이 책의 부제에도 포함된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압축해 놓고 있으며,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모든 비판이론의 궁극적 테마와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지젝은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 즉 “이데올로기는 거짓 의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이론은 철저히 ‘재현적’이라고 비판한다. 즉, 통상적인 이데올로기론은 어떤 사회적 내용(가령 현실의 지배구조)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본다는 것이다. 일단 이렇게 이데올로기가 정의되면, 우리가 기존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지 않고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된다(한때 우리는 이 과정을 ‘의식화’로, 그 결과물을 ‘대항-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젝에 따르면 “어떤 정치적 견지는 그 객관적 내용과 관련해서 아주 정확한(‘참된’) 것이면서도 철저하게 이데올로기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역도 참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재현의 문제틀로서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이해할 수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도 없다. “어떤 주어진 공동체를 묶는 요소는 상징적 동일화(곧 이데올로기)의 지점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지젝의 말은 이를 뜻한다.

그렇다면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지젝은 ‘체화된 향유’로서의 ‘어떤 사물’이 바로 그런 요소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원리를 의식의 차원에서 무의식의 차원으로 끌고 내려가 설명하는데, 이때 그가 기대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아니, 오히려 지젝 식으로 해석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라고 해야 정확할 듯하다).

라캉에 따르면 ‘향유’(juissance/enjoyment)란 쾌락(plaisir/pleasure)이 아니다. 향유와 쾌락을 동의어로 쓰곤 했던 프로이트와 달리(가령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 라캉은 욕구(besoin/need)와 요구(demande/demand)를 구분하며 각각의 개념에 쾌락과 향유를 대입한다. 가령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기의 경우 배고픔이라는 생체적 욕구가 충족되면 더 이상 ‘식욕의 빨기’(succion)가 아니라 ‘쾌감의 빨기’(suçotement)를 한다. 이렇듯 욕구가 충족된 이후에도 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향유는 쾌락의 초과, 위반, 잉여이다. 또한 과도한 쾌락은 불쾌(고통)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쾌락 이상을 추구하는 향유는 도착적이기도 하다.

쾌감의 빨기는 아기가 어머니와 일체감을 느끼곤 하는 행위이기도 한데 이 행위는 곧 중단된다. 즉 젓 떼기를 하는 것이다. 아기는 잃어버린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쾌감의 빨기’를 반복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고, 이제 어머니의 젖꼭지는 “기다려 보지만 항상 결핍된 것”, 즉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대상이 된다. 라캉은 이를 ‘대상 a’(objet petit a/object little-a)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바의 ‘사물’(La Chose/the Thing)이다.

따라서 “어떤 사물을 향한, 체화된 향유를 향한 공유된 관계”가 어떤 주어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한데 연결한다는 지젝의 말은 “잃어버린 대상을 찾으려고 하는 반복의 고통 속에서 느끼는 쾌락”(즉 향유)이 공동체의 결속을 유지시켜 준다는 말인데, 그에 따라 지젝에게서는 이데올로기의 위상 자체도 변한다. 즉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어떤 사회적 내용을 왜곡하여 잘못 재현한” 담론구성체가 아니라 우리가 왜 그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서도 ‘사물’(대상 a)을 얻지 못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 답변이다. 그래서 지젝의 이데올로기는 환상(fantasy)의 구성물에 가깝다.

지젝은 프로이트와 라캉을 경유한 이런 정신분석학의 설명틀을 확장해 정신분석학을 정치학으로 탈바꿈시킨다. 가령 한 사회는 그만의 ‘대상 a’(사물)를 갖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일수도, 민족일수도, 계급일수도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고 자부하는 나라들, 요컨대 영국이나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보통선거권이 인정받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와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족이나 계급의 경계가 생각보다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주 잊고 있다. 즉 민주주의, 민족, 계급은 아직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소유한 적이 없는 ‘대상 a’(사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난 20세기 동안 결코 완벽히 소유한 적 없는 민주주의, 민족, 계급의 이름으로 대규모 전쟁(내전이든 국제전이든)을 해오지 않았는가? 지젝이 “향유의 도둑질”의 역설, 즉 우리의 사물이 타자에게 접근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간주(왜냐하면 우리의 사물은 타자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와 타자를 구분해 주는 것이므로)되는 동시에, 타자에 의해 위협당하는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우리도 갖고 있지 않은 사물을 타자가 위협한다)는 역설을 통해 비판하고자 하는 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염두에 둔다면, 의식화나 대항-이데올로기의 창출을 통해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대상 a’(사물)라는 것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혹은 절대 충족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거나, 향유가 충족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상상적인 환상(판타지)을 찢어발기거나. 파시즘의 반유대주의에 맞서 건국의 아버지 모세가 이집트인임을, 즉 유대인의 기원이 잡종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던 프로이트의 시도(「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전자의 경우라면, 지젝의 작업이 바로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것은 “예외된 한 사람”(homme moins un)이 되는 것일 게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거세 신화를 설명한 「토템과 터부」를 다시 읽으면서, 거세 위협에 복종한 아들들로 구성된 집단이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논리적으로 복종하지 않은 아들이 ‘적어도 한 사람’(au moins un)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라캉은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해 “이 적어도 한 사람”을 “예외된 한 사람”(오모엥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오모엥젱들이 연대할 때 기존의 지배질서는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 오모엥젱들을 묶어줄 요소는 과연 무엇일까? 지젝은 아직 이 질문에 답을 해주진 않고 있으나 여하튼 계속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지젝의 최근 작업은 혁명가들을 다시 읽는 ‘혁명’ 시리즈,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가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오늘날, 동시대의 이론이 저지르고 있는 오류와 대결하며 기발한 해결책을 제안한다”고 예고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이다). 우리가 아직 지젝과 지저거리며 함께 머물러 있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이재원_그린비 편집장)

07. 04. 26.

P.S.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올해 나올 예정인 책이며 국역본도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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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4-26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지젝 책 완독한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밖에 없지만, 구입해 놓은 책은 거진 10권이 다 되는 것 같습니다 -_-;;;; 이 글을 보니 다시 들춰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yoonta 2007-04-26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주요 논점을 비교적 잘 정리해주는 글인 듯 하네요. 이재원이라는 분 글 가끔 이곳 로쟈님 서재에서 보게 되는데 리뷰를 군더더기없이 잘 써주시는 듯 합니다..^^ 위 글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젝의 이야기가 가진 단점이랄지 한계도 좀 지적해주었으면 하는 점이 있긴 하네요.

로쟈 2007-04-2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돈보다 모자라는 게 시간이죠.^^;
yoonta님/ '단점'은 직접 지적해주시면 저도 경청하겠습니다. 최근에 지젝에 대한 비평/비판과 지젝의 답변을 담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책은 몇 주 전에 구해놓았는데 읽을 시간이 정말 없네요.--;

yoonta 2007-04-26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것을 할수있다면 진작 했겠죠..^^; 아직은 그의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기에도 벅찹니다. 제가 기억하는 지젝에 대한 비판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그는 실재계를 단지 '부재하는 효과'로서만 정의한다. 그 결과 심지어 '신'이란 개념조차 실재계의 예로 사용되는데, 이렇게 되면 상징계와 실재계의 구분조차 모호해지는 난점이 있으며, 결코 라캉적인 실재계라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이진경, 철학의 외부 42p) 정도 입니다. 아시다시피 지젝의 실재계 논의는 자크 알랭 밀레의 실재계 해석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진경이 주장하는 지젝의 실재계는 어쩌면 라캉의 실재계라기보다는 자그 알랭 밀레의 실재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로쟈 2007-04-26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얘기 같은데요. 이진경의 라캉 비판과 마찬가지로 일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미나 이후의 라캉이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후의 지젝에 대해서 참조하기 이전의 것이 아닐까 싶네요...

에바 2007-04-27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몇 주 전에 구해놓으셨다는 책은 어떤 건가요?

로쟈 2007-04-27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을 가로지르기(Traversing the fantasy : critical responses to Slavoj Žižek)(2005)란 책입니다...


에바 2007-04-2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거기다 이미지까지...검색해보니 학교 도서관에도 있는 걸로 나오네요. 내일 한번 구경이나 해 봐야겠습니다.^^
 

충무로영상센터(오! 재미동)에서 4월 특별상영전의 프로그램으로 다큐영화 <데리다>(2002)를 상영한다. <지젝!>에 이어서 어쩌다 또 영화를 소개하는 일을 맡았는데, 자막 번역을 조금전에야 끝마쳤다(약간의 우여곡절 때문에 늦어졌다). 교정을 볼 시간도 충분하지 않을 듯싶다(다만 지젝보다는 훨씬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나는 지난 2003년인가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한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기억이 있다. 자막이 입혀져 있던 그 영화를 재미동에서 구하지 못하여 나한테까지 일이 떨어진 것인데 나대로 오독한 대목이 없지 않을 듯하다. 영화에 관한 자료는 나중에 올려둘 테지만, 상영에 관해 질문하셨던 분이 계셨던지라 뒤늦게(?) 재미동의 공지사항을 옮겨놓는다.   

4월 특별상영전
-영화와 철학 <데리다>-

<지젝!>에 이은 '영화와 철학'
두 번째 영화는 20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자크 데리다에 대한 다큐멘터리 <데리다> 입니다. 2004년 별세 전까지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왕성한 활동을 펼쳤던 그는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글쓰기와 차이>와 같은 저서를 통해 형이상학자로 동시대 그 어떤 철학자들보다 많은 영광을 누려왔습니다. 난해한 데리다 철학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지방 역할을 할 이 영화는 데리다 철학에 대한 영화적인 버전으로 읽힐만 합니다.

<지젝!>에 이어 로쟈님께서 영화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강연을 30분간 진행해주실 예정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람 부탁드립니다.

4월 14일 (토요일) 저녁 6시 강연 후 상영
4월 15일 (일요일) 저녁 6시 상영

07. 04. 14.

P.S. 맛보기 화면은 http://www.youtube.com/watch?v=8xyYGFhPDHo 참조('디컨스트럭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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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데리다 이후의 데리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08 02:05 
    엊그제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의 현대철학 강의에서 데리다를 다루면서 다큐영화 <데리다>(2002)에 관해 조금 자세히 얘기했는데('입문'용으로 가장 좋을 듯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의 자막 작업을 하고 간단한 소개강의도 한 바 있다. 찾아보니 2007년 봄이었다. 그때 영화 내용을 간추린 자료를 이번 강의에서도 사용했는데, 다시 둘러보니 서재에는 옮겨놓지 않았다. 혹 이 영화를 보신 분이나 보
 
 
마늘빵 2007-04-1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로쟈님 강연하시는군요! ^^

로쟈 2007-04-14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분 동안 영화내용에 대해서나 간략하게 설명하는 정도입니다...

2007-04-14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4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자막 상태를 확인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자막을 입힌 상태로는 아직 보지 못해서요.^^; 사실 DVD 서플먼트에는 영어자막을 화면에 입힌 버전도 있더군요. 그게 더 이해하기 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자꾸때리다 2007-04-14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좋은 감상이었습니다.~~(담 주부터 중간고사 기간인데도 불구하고...갔습니다.ㅡㅡ;;) 근데 [in french]라는 자막 때문에 영어 자막이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던게 좀 아쉽더군요.ㅎㅎㅎㅎ

(근데 로쟈님 얼굴이 꼭 정치인 누구 닮은 것 같았습니다.ㄲㄲㄲ 절대 비방성 글 아닙니다.헤헤헤헤)

로쟈 2007-04-14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감상문이 올라오네요.^^ 역시나 문제는 발생하는군요(저는 저녁 시간이 애매해서 집으로 바로 돌아왔습니다). 자막에서 'in french'를 지울 수 있는지 한번더 확인해볼 걸 그랬네요(뭔가를 대신 채워넣어야 하는 것처럼 뜨길래 놔두었더니.--;). 네댓 분 정도의 얼굴만 기억나는데, 거기에 Mravinsky님도 포함돼 있는지 궁금하군요. 정치인이라... 흠.

에바 2007-04-14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후 늦게 강연/상영 소식을 접하고 바로 달려가서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강연도 잘 들었습니다. 역시 실물이 더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로쟈 2007-04-14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들 인사라도 나눴으면 '애프터'라도 가졌을 텐데 아쉽네요.^^;

Joule 2007-04-15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에 손을 얹고 미리 알았으면 갔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제 술을 마셔서 오늘 비몽사몽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죠. 내일은 다른 공부 때문에 역시 못 볼테니 역시 어제 술이 문제였는데. 그런데 충무로 역의 재미동에서 뜻밖에 흥미로운 행사가 많이 있네요. 로쟈님의 강의라면 무척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2007-04-15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4-15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oule님/ '무척'은 아니었으므로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님/ 저도 다시 한번 보지 않은 상태여서(--;) 오타가 있을 거라곤 짐작했습니다. 자막은 책하고 좀 달라서 '정확성'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구요(물론 긴가민가한 대목들은 임의로 처리했지만. 몇 번 더하면 노하우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강연자료는 조만간 올려놓을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