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러시아문화 페스티벌이 개최된다고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가 전하는 소식이다. '올 가을 러시아 예술이 몰려온다'란 제하에 오미환 기자가 정리해주고 있는 내용을 옮겨온다. 대신에 기사는 축제 홈페이지를 참조하여 몇 가지 보충하면서 재구성했다.

 한국일보(06. 07. 27) 올 가을 러시아 예술이 몰려온다

-러시아 문화의 오늘을 소개하는 대규모 페스티벌이 올 가을 서울과 성남에서 열린다. 한국과 러시아 수교 기념일(9월 30일)을 앞두고 9월 15일부터 열흘 간 ‘한-러 교류축제’라는 이름으로 음악, 무용, 오페라, 연극 공연과 미술 전시회가 이어진다.

-러시아는 광대한 영토 만큼이나 문화의 폭과 깊이가 대단한 나라다.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 거인들로 우뚝한 문학 뿐 아니라 발레, 오페라, 음악, 미술,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찬란한 전통을 지닌 예술 강국이다.

-이번 축제는 러시아의 과거가 아닌 현재에 초점을 맞춰 1980년대 말 개혁 개방 이후 지금까지, 즉 오늘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화를 집중 소개한다. 성남아트센터를 중심으로 열리는 총 6개의 공연 중 모스크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올가 포나의 첼랴빈스크 현대무용단만 빼고 다 한국이 첫 방문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올해 탄생 100주년인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나 또한 가장 기대를 갖게 되는 작품이다). 한국 초연인 이 작품은 대담한 음악과 에로티시즘 때문에 스탈린 시절 10년간 공연이 금지됐다. 줄거리는 부자와 결혼했지만 권태와 억압에 짓눌린 한 여인의 일탈이 불륜과 살인을 거쳐 자살로 끝난다는 내용이다. 공연예술 분야에서 러시아 최고 영예인 황금마스크 상을 11번이나 받은 헬리콘 오페라단이 가져와서 선보인다.

 

 

 

 

(*)이 오페라의 원작이 이전에 소개한 바대로 얼마전에 번역된 레스코프의 소설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소담, 2006)이다. 헬리콘 오페라단?(러시아어로는 '겔리콘') "러시아 국내외에서 60 여 편이 넘는 오페라를 연출하며 ‘러시아 국민 예술가' 칭호를 수여받은 드미트리 버트만 . 그가 러시아의 젊고 재능있는 배우들과 음악가들을 모아 창단한 오페라단이 헬리콘 오페라단"이란다. "1990 년 4 월 10 일 에 창단한 이 헬리콘 오페라단은 7 명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350 명이라는 대규모로 성장한 무서운 오페라단이다 . 한 해 200 회 이상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며 각각 다른 분야에서 11 개의 황금 마스크상을 수상하였고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까지 인기와 호평을 동시에 누리며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홈피는 http://www.helikon.ru/)  

(*)이번 공연의 의의: "쇼스타코비치의 대표적인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 는 인간 내면의 본성을 발가벗긴다는 점에서 기존의 고전 오페라와는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으며 다양한 음악적 표현기법이 생동감을 불어넣어 오페라의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해 주는 작품이다.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의 대미 가 될 이번 공연은 한국 초연 이자 러시아 오페라단이 노래하는 러시아 오페라 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무대가 될 것이다." 참고로 오페라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제1막 - 남편 지노비는 집을 비우고

제1장 지노비의 젊은 부인 카테리나는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이도 없고, 남편은 지루하고, 날로 쌓여가는 집안일은 카테리나를 미치게 한다. 시아버지 보리스는 결혼한 지 5 년이 지났음에도 자식 하나 낳지 못한다며 카테리나를 못마땅해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지노비가 집을 잠시 떠나있게 되고 보리스는 카테리나에게 정절 맹세를 강요한다. 카테리나는 일꾼 세르게이에게 일탈적 매력을 느끼는데...

제2장 요리사 악시냐는 새로 들어온 하인 세르게이에 대한 소문을 카테리나에게 전한다. 전주인과의 불륜으로 쫓겨나 이리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세르게이는 집안 하인들과 작당하여 악시냐를 겁탈하려 하는데 이 장면을 카테리나가 목격한다. 이를 말리려던 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크게 다투는데 강하게 자신을 누르는 그에게 카테리나는 일탈적 매력을 느낀다.

제3장 세르게이는 책을 빌리러 왔다는 핑계를 둘러대며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고 몸이 한참 달아있던 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돌이킬 수 없는 뜨거운 밤을 보낸다.

제2막 - 불륜을 들킨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는 보리스를 독살한다

제4장 며느리에게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던 보리스는 카테리나의 방 주위를 서성이다 그녀의 방에서 나오는 세르게이를 목격하고는 분노를 터트린다. 보리스는 세르게이를 그 자리에서 붙잡아 채찍으로 마구 두들겨 패고는 창고에 가두어 버린다. 허기를 느낀 보리스는 카테리나에게 음식을 좀 가져오라며 시키는데 앙심을 품은 그녀는 쥐약을 탄 버섯요리를 가져다 먹인다. 시아버지를 독살한 카테리나는 바로 창고로 달려가 세르게이를 풀어준다. 집으로 돌아온 지노비 역시 그들에게 살해당하는데...

제5장 장례식을 가식으로 치른 카테리나는 마음 놓고 세르게이와 한 침대를 쓰며 지내지만 보리스의 혼이 그녀를 가만두질 않는다. 집으로 돌아온 지노비는 아내의 부정한 행각 앞에 카테리나를 책망하며 몰아세운다. 나름 화가 난 그녀는 세르게이와 합세하여 지노비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포도주 창고에 숨겨 버린다.

제3막 - 많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는 결혼식을 올린다

제6장 남편이 실종된 것으로 소문을 낸 카테리나는 마음을 짓누르는 죄의식에도 불구하고 세르게이와의 결혼식을 거행한다. 결혼식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한 소작농이 정신없는 틈을 타 포도주를 훔쳐 마시려고 창고에 몰래 들어간다. 창고에서 지노비의 시체를 발견한 그는 기겁하여 경찰서로 달려간다. 결혼식장에서 체포당한 카테리나와 세르게이.

제7장 신고를 받은 경찰은 바로 결혼식장으로 달려오지만 초대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구에서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제8장 한편 포도주 창고 자물쇠가 부서져 있는 것을 발견한 카테리나는 집안의 돈을 챙겨 달아나려고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는 살인죄로 실형 선고를 받는다.

제4막 - 수용소로 끌려가는 중 세르게이는 여자 죄수 소네트카에게 추파를 던지는데

제9장 카테리나와 세르게이는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 가고 있다. 카테리나는 보초를 매수하여 세르게이를 어렵게 만나지만 그는 이미 카테리나에게 싫증이 날만큼 나있다. 세르게이는 새로 알게 된 소네트카의 환심을 사려고 카테리나를 꾀어 그녀의 양말을 빼앗아 낸다. 소네트카가 춥다며 따뜻한 양말 한 켤레를 구해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랑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카테리나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저주를 느끼며 소네트카를 급류 속으로 떠밀고 스스로도 몸을 던진다. 두 여인의 익사를 뒤로 하고 죄수들은 수용소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유럽에서 100만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린 여성 2인조 팝 그룹 타투(t.A.T.u), ‘러시아의 비틀스’로 불리는 러시아 최초의 록 밴드 ‘더 플라워즈’(The Flowers)의 첫 내한도 예정돼 있다.

 

 

 

-2000년에 결성된 타투는 2003년 발표한 음반 ‘All The Things She Said’ 로 영국에서 4주 연속 싱글 차트 1위,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3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켰고, 우리나라에서도 플래티넘의 판매고를 올렸다(*타투의 음반은 이미 국내에도 여러 장 나와 있으므로 더 이상의 소개는 불필요하겠다(http://www.youtube.com/watch?v=C37TVelsPiQ). 사실 노래보다는 동성애 코드와 섹스어필로 유명해진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1969년 결성된‘더 플라워즈’는 진부한 구 소련의 팝을 깨부순 혁명가들. 서구사상과 히피를 추종한다는 이유로 강제 해산되기도 했던 이 팀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고, 러시아 밴드로는 처음으로 세계 순회공연을 했다(*홈피는 http://www.flowersrock.ru).

-이번 축제에서 이들은 한국인 3세로 러시아 록의 영웅인 빅토르 최 추모공연을 한다(*과문한 탓에, '더 플라워즈'(러시아어로는 '츠베뜨이')의 노래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러시아의 비틀즈? 하긴 꽃이 있으면 벌레도 끼는 법이지. 아무튼 '빅토르 최' 추모공연이라니까 구미가 당긴다. 성남아트센터가 어디에 있는 건가?)

-금호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는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 미술을 소개한다. 이밖에 그림자극과 피아노 라이브 연주를 결합해 환상적 무대를 연출하는 러시아 극단 뗀의 ‘그림자 극장’(*Ten'이 러시아어로 그림자란 뜻이다), 올가 포나의 첼랴빈스크 현대무용단의 최신작 공연, 모스크바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팝스콘서트 등이 준비돼 있다(축제 홈페이지는 http://www.russianfestival.co.kr)

 

 06. 07. 27.

P.S. 중앙일보의 이장직 음악전문기자가 쓴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6. 08. 04) '스탈린 열 받게' 한 바로 그 오페라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75)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오페라 대표작 '므첸스크 (마을)의 맥베스 부인'이 세계 각지에서 대거 상연된다. 9월 30일~10월 17일 일곱 차례 무대에 올리는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프로덕션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2006~2007년 시즌에 토론토 캐나디언 오페라(8회), 제네바 그랑 테아트르(6회), 모스크바 볼쇼이 오페라(3회), 라트비아 국립 오페라(3회), 비스바덴 오페라(1회)가 '맥베스 부인'에 도전한다.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키로프 오페라단이 20일 런던 프롬스 축제, 내년 2월 4일 워싱턴 케네디센터에서 콘서트 형식으로도 상연한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마침내 국내 초연된다. 내달부터 열리는 '2006 한러교류축제'(중앙일보.SBS프로덕션 공동주최)의 일환으로 내한하는 모스크바 헬리콘 오페라단의 무대다.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맥베스 부인'을 번안한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이 원작. 억압과 굴종의 굴레에서 해방을 갈구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1934년 1월 22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초연 당시 2년간 180회나 상연될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2년 후인 36년 1월 소문을 듣고 궁금해 하던 스탈린이 당 간부들을 거느리고 직접 객석에 나타났다. 이틀 후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가 '음악이 아닌 혼란'이라는 제목의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 '불온한 좌파가 만들어낸 불협화음'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남편을 살해하는 장면이 암살의 공포에 떨고 있던 스탈린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스탈린은 자신의 모습이 등장인물 중 경찰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러시아 작곡계에는 검열의 회오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 유명한'상연 금지'조치는 러시아 음악사에서 가장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남아있다.

-스탈린이 사망한 지 10년 후인 1963년 1월 8일 모스크바 스타니슬라브스키 극장에서 상연된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는 이 작품의 수정판이다. 음색의 급격한 대조, 불협화음,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을 상당히 순화시킨 것이다. 침실에서 벌어지는 여주인공의 유혹 장면의 리얼리티도 훨씬 반감됐다. 소련 당국의 상연 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자기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의 팔 다리를 잘라내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만큼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는 얘기다.

-헬리콘 오페라단은 볼쇼이 오페라나 마린스키 극장 같은 유명 단체는 아니지만 러시아 최고 권위의 황금가면상을 11회나 수상한 실력파 오페라단이다. 연출가 드비트리 버트만이 젊은 예술가들을 모아 1990년에 창단했다. 단원 7명으로 출범했지만 지금은 350명 규모로 급성장했다. 무엇보다도 헬리콘 오페라단의 장점은 기존 레퍼토리의 현대적 재해석이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을 누비면서 러시아 오페라의 진수를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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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G8 서방 선진국 정상회담이 열리고 있다. 이전엔 'G7+1'이라고 표기했던 듯한데, G8이라고 하는 걸 러시아도 당당히 '선진국'  대우를 받는 모양이다. 하긴, 경제적으로야 아직 거기에 못 미치지만 외교적, 군사적으로야 못 끼여들 건 아니겠다. 오마이뉴스(06. 07. 15)에서 관련기사를 옮겨온다. 필자는 정인고 기자이고, 타이틀은 '푸틴, 피터 대제의 꿈에 도전하나'이다. '표트르 대제'를 '피터 대제'라고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필자는 러시아통은 아니고 영어권 보도을 종합해서 기사를 작성한 듯하다.

피터 대제의 야망이 반영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 G8 정상회담의 공식로고(왼쪽)와 피터 대제의 청동기마상

-1703년 피터 대제는 핀란드만과 네바강의 어귀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영어 ST. PETERSBURG), 즉 '성베드로의 도시(상트 - 성, 페테르 - 베드로, 부르크 -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이 도시는 1712년에 완공된다. '성베드로의 도시'란 뜻도 가지지만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의 도시'란 뜻도 포함하고 있다). 서구 유럽 지향적 전제 군주의 결정에 따라 러시아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고, '서구를 향한 창', '북방의 베니스'는 이렇게 해서 탄생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천국의 열쇠를 쥔 사도 베드로처럼 발트해로 나가는 열쇠이자 서구로 향하는 길목의 열쇠를 지니고, 러시아의 황실 문장인 '쌍두 독수리'처럼 동과 서를 바라보며 세계의 중심을 이곳에 건설하겠다는 피터 대제의 야망과 의지가 반영된 도시이다. 이제 피터 대제의 장엄한 모습은 G8의 로고 모델이 되어, 3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대작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현대판 짜르 푸틴에 의해 그 꿈이 실현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서방 선진 8개국 회담의 올해 의장국인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간) 열리는 이번 G8회담을 통해 러시아의 재건을 다짐하고 있다. 이번 G8회담의 공식 의제는 에너지 안보, 전염병 예방, 교육 세 가지다. 여기서 푸틴의 야심은 에너지 분야에 있다. 이미 올 1월 우크라이나와의 가스분쟁을 통해 전세계에 러시아의 야욕을 보여줬다. 냉전 시절 러시아가 핵무기 보유국으로 미국과 함께 세계를 지배했던 강국이었다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과거 소련시절 초강대국의 면모와 위상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President of the Russian Federation Vladimir Putin

-한편 임기를 1년 남긴 푸틴은 이번 G8회담을 통해 자신의 인기와 권력을 더욱 견고히 하여, 순조로운 권력이양 또는 3선 전략을 추진하고자 한다. 러시아 대통령은 헌법상 연임만 가능하나, 헌법을 개정하거나 벨라루시와의 통합을 통한 신 헌법에 의해 장기집권의 길을 실현시킬 수 있다.

인권 들먹이는 서방국들, 뒤로는 자원협력 손 내밀어

▲ G8 정상회담이 열리는 콘스탄틴 궁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인공위성,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러시아의 자원'이라고 말했듯이, 러시아는 석유와 가스를 포함한 풍부한 자원과 최근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인한 경제적 성장으로 자원 부국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러시아의 인권과 민주주의 퇴보를 들먹이고 G8회담 보이코트까지 거론하며 러시아를 압박했던 서방국들도 러시아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는 실정이다.

-푸틴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러시아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푸틴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권위주의를 강화하며 러시아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서방 정치인들의 발언에, "민주주의는 감자가 아니다, 감자가 자라지 않는 곳에 감자를 심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며 러시아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회담을 통해 서방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듯하다. "러시아는 주권국가이니 러시아의 내부 일에 간섭하지 말고 러시아를 존경하라, 그렇지 않으면 협력(에너지)과 상호이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과거 소련시절의 대중 선동술을 이용해 G8의 의장국, 개최국의 모습을 러시아인들에게 보여주고 대국으로서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에너지 무기화 정책의 선봉장인 국영 에너지기업 '가즈프롬'은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으며, 부시와의 단판 승부를 통해 마지막 남은 WTO 가입 동의안을 매듭지어 러시아를 글로벌 경제대열에 합류시키고자 한다.

-제2선에서는 체젠문제, 인권문제, 민주주의 퇴보, 언론의 자유를 거론하며 러시아를 비난하지만, 제1선에서는 에너지 협력과 공동 경협 프로젝트 및 투자 제안을 하는 서방국가들의 딜레마를 푸틴은 너무나 적절하게 잘 이용하고 있다. KGB출신 답게 심리전과 전략의 대가이다. 300년전 피터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했던 야망을 푸틴은 자신의 고향인 이곳에서 G8 정상회담을 통해 실현시키려 하고 있다.

▲ G8회담에 맞춰 새롭게 단장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06. 07. 16.

P.S. 한편에서는 G8 회담 반대시위도 있었던 모양이다. "양키 고우 홈!"이란 피켓도 보인다.

P.S.2. 동아일보의 칼럼 하나도 참고삼아 옮겨온다. 타이틀은 '푸티니즘'이고, 필자는 김순덕 논설위원이다.

동아일보(06. 07. 15) 어제 국제유가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장 기뻐하는 사람 중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있을 게 틀림없다. 석유생산량 세계 2위인 러시아의 대통령답게 국민의 지지도가 유가와 동반상승해 70%를 넘겼다. 오늘부터 러시아에서 열리는 G8(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의 참가자 가운데 이만한 인기를 누리는 지도자는 없다. 비결은 ‘강한 나라, 강한 리더’로 요약된다.

러시아 경제는 2000년 푸틴 대통령 취임 이래 연평균 6% 성장했다. 임금이 매년 10%씩 올라가니 국민은 대통령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유가상승 덕이 크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이룩한 ‘정치적 안정’이 없었다면 고도성장과 국민적 자부심의 회복이 지금만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 G8 정상회의에서 북한 미사일이니, 에너지 안보니 아무리 큰 의제를 외친대도 러시아인들의 귀엔 안 들릴 것 같다. 그들의 주제는 하나다. ‘다시 보라, 세계무대로 돌아온 위대한 러시아를!’

푸틴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의 증손녀 니나 흐루셰바는 ‘푸티니즘(Putinism)’이라고 했다. 스탈린 숭배, 공산주의, KGB 정신에 약간의 시장주의를 합친 변종 이데올로기다. 1991년 소련 붕괴 뒤 러시아인들은 극심한 혼돈과 빈곤을 체험하며 민주주의에 실망했다. 당당했던 소련과 러시아제국, 스탈린과 황제가 그리워졌다. 자유가 좀 없었지만 그건 일부 개인의 문제였다. 그때 일거에 혼란을 정리하고 국민을 사로잡은 영웅이 푸틴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자유민지주의와 더 멀어진 나라가 됐다. 경제는 물론이고 의회와 사법부, 언론까지 몽땅 크렘린 손아귀에 잡혀 있다. 부패와 비효율이 엄청나다. 오일머니만 믿고 산업경쟁력을 키우지 않는 대가도 언젠가 치를 것이다. 아무튼 푸틴이라는 ‘괴물’을 어찌 대해야 할지 G7 정상들은 고민스러울지 모른다.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는 무겁게 말하고 있다. “적으로 여기면 잘못이다. ‘표트르 대제(大帝)’ 같은 러시아 파워가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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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 7월 15일은 1904년 7월 15일 세상을 떠난 러시아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서거 102주기를 맞는 날이다. 2년전, 그러니까 2004년 7월 15일 서거 100주기를 맞이하여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던 글을 정리해서 옮겨놓는다(페이퍼의 원래 제목은 '안톤 체호프, 혹은 등신스러움의 예찬'이었다). 이미지도 몇 개 같이 띄우고. 주말까지는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7월 15일)이 러시아의 작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서거(逝去) 100주기를 맞는 날이다. 이미 지난 통신문에서 언급한바 있지만, 그가 독일의 한 휴양도시(뉴스에서 보니까 이 휴양도시 바덴바일러에는 체홉박물관이 생겼으며, 그가 묵었던 숙소도 인테리어는 달라졌지만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한 날짜는 러시아의 구력(舊曆)으로 7월 2일이고, 신력(新曆)으로는 7월 15일이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달리 요즘에는 신력을 쓰기 때문에 오늘이 ‘공식적인’ 사망일인 셈이다(*아래는 바덴바일러의 체호프박물관. 앞에서 적은 대로 2004년 7월 15일 개관했다).  

그는 (구력으로) 1904년 6월 3일 의사의 권유에 따라 요양차 독일의 바덴바일러로 아내 크니페르와 함께 떠났었고, 건강이 약간 호전되는 듯하자 이탈리아 여행(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얄타로 돌아오려고 했다)까지 계획했었다. 하지만 7월 2일 새벽 1시에 그의 병세(‘폐결핵’으로 기억된다)가 갑자기 악화되어 호흡이 곤란해지기 시작했고, 급하게 달려온 의사는 심장 쇼크라고 진단한다. 장뇌(樟腦)까지 동원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는 점차 혼수상태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그는 얼음주머니로 가슴을 마사지하려는 아내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텅 빈 심장에는 얼음을 놓지 않는다오.” 의사가 새로운 산소통을 가져오도록 했지만, 체홉은 만류한다. “그들이 오기 전에 나는 죽을 겁니다.” 그는 새벽 3시에 숨을 거둔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하게 평정을 지켰다고 한다. 샴페인을 마시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하고(*아래는 바덴바일러에 세워진 체호프의 동상).



해서, 예의상 다른 할 일들을 잠시 제쳐놓고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한다. 물론 충분한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지만(이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최소한 ‘입막음’ 정도는 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잘 준비된 글을 쓰고 싶지만, 그건 한 ‘세월’을 필요로 할 듯하다(우리의 인생은 고작 몇 사람의 작가를 읽고 이해하기에도 너무 짧다!).

오늘 저녁 러시아의 채널 ‘쿨투라(=문화)’에서는 기념일을 맞아 <체호프를 찾아서>란 특집프로그램과 함께 그의 원작을 영화화한 <다락방이 있는 집>(1960)을 방송한다. 이미 읽은 단편인데, 내용은 영화를 좀 봐야지만 기억에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내 경우에 체홉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런 식이다. 즉, 강하게 각인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볍게 지나가버린다.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는 달리, 체홉은 우리의 삶에 좀처럼 간섭하고자 하지 않는 작가이다. 그는 배우였던 아내 크니페르의 삶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녁 약속이 있어서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쿨투라’에서는 어제 이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1937- )의 <바냐 아저씨>(1970)를 방영했고, 내일은 세번째 시리즈로 니키타 미할코프(1945- )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1977)을 방영한다. 다행스러운 건 이 두 편의 영화 모두 한국에도 출시돼 있다는 점인데(생각하면 이례적이다), 한번 비디오가게들을 뒤져 보시길. 모두 볼 만한 영화들이다. <바나 아저씨>는 한국에서 처음 봤을 때 좀 평범하다 싶었는데, 어제 다시 보니까 수작이다. 일단 캐스팅 면에서, 최근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레프 도진의 연극 <바냐 아저씨>보다 ‘사실적’이다...

저녁을 먹고 ‘꿀뚜라’에서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을 보았다. 3일 동안 특집으로 편성된 체홉 작품 3편을 영화로 보았는데, 어제 본 <다락방이 있는 집>이 평범한 영화라면, 그제 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바냐 아저씨>는 수작이고, 오늘 본 니키타 미할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은 걸작이다. <다락방이 있는 집>은 조금 늦게 보는 바람에 감독이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전형적인 ‘소비에트 문예영화’이며 작품의 줄거리는 그대로 옮기고 있지만 평면적이고 아무런 영감도 주지 않는다. 이런 영화들을 보노라면 미할코프-콘찰로프스키 형제의 영화가 얼마나 뛰어난가를 새삼 알게 된다.

<바냐 아저씨>의 경우 캐스팅 면에서 보다 ‘사실적’이란 얘기를 서두에서 했는데, 의사인 아스트로프 역으론 수염이 덥수룩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가 나온다. 9시간짜리 대작 <전쟁과 평화>(1967)의 감독 말이다(국내에서도 상영되었던 극장판은 3시간짜리 축약판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혹 본다르추크란 이름을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1960-70년대 소비에트 영화의 한 ‘권력’이었던 본다르추크를 타르코프스키는 혐오스러운 인물로 몇 차례 언급한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망명감독 타르코프스키와는 달리(타르코프스키는 ‘소비에트 감독’이 아니라 ‘러시아 감독’이다) 소비에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의 한 명이자 배우였다. <전쟁과 평화>에서도 중요한 배역으로 나오며(*사진의 피에르 베주호프 역이다) 역시 자신이 감독한 푸슈킨 원작의 영화 <보리스 고두노프>에서는 주역인 ‘고두노프’로 출연한다. 더불어 나는 보지 못했지만, 체홉의 중편 <스텝>을 영화로 찍었다고 한다.

이 본다르추크의 ‘아스트로프’는 도진의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샤프하고 빈틈없어 보이는 ‘아스트로프’와는 달리 ‘바냐 아저씨’와 함께 피로한 나날의 일과에 찌든 중년의 사내로 등장하며 내가 보기엔 그것이 체홉의 원작에 더 충실하다(원작에서 바냐 아저씨는 47세이며 친구인 아스트로프도 비슷한 나이이다). 머리가 벗겨진 ‘세레브랴코프’도 도진 연극에서의 ‘김무생 같은’ ‘세레브랴코프’보다는 내가 상상하는 ‘세레브랴코프’와 더 잘 맞는다. 유모나 바냐의 모친도 연극에서보다는 더 적절한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내가 연극보다는 영화를 더 선호하는 탓일 수도 있다). 콘찰로프스키는 원작을 충실히 따라가면서도 특별히 인물에 대한 클로즈업과 배경공간에 대한 딥-포커스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화면에 깊이와 긴장을 부여하고 있다. 이 정도 수준으로 영화를 뽑아내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동생 미할코프는 한술 더 뜬다. 내 기억에 그의 세 번째 작품쯤 되는데, 30대의 감독 미할코프는 이미 거장다운 솜씨로 체홉의 미완성 희곡을 완벽하게 영화의 언어로 옮겨놓고 있다(이미 이전에 언급한바 있지만, 레프 도진이 연출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는 것은 역시 이 미완성 희곡을 무대에 올린 <제목 없는 희곡> 덕분이었다. 이 작품의 연출기가 그의 환갑을 기념해서 책으로 나왔다는 얘기도 이미 했는데, 곧 서점에서 구해볼 생각이다). 더불어 본다르추크와 함께 아마도 러시아에서 가장 대표적인 배우 겸 감독일 미할코프는 이 영화에서도 조연이긴 하지만 제 몫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기도 하다(그가 맡은 역도 의사이다. 사진의 가운데 남자. 왼쪽의 여인은 소피야, 오른쪽은 플라토노프의 아내 사샤).

국내에 출시돼 있는 그의 영화는 이 영화를 포함해서 <오블로모프의 생애>(1979)(<오브로모프의 생애>로 돼 있다), <위선의 태양>, <러브 오브 시베리아>(원제는 <시베리아의 이발사>) 등인데, 그의 가장 뛰어난 연기는 주연으로 출연한 <위선의 태양>에서 볼 수 있다(이 영화에는 그의 딸 나디야가 함께 출연하며, 그가 황제 알렉산드르 3세로 등장하는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는 큰딸 안나도 나디야와 함께 출연한다). 소비에트의 영화 권력이었던 본다르추크와 마찬가지로 미할코프 또한 포스트-소비에트의 한 영화권력으로서 모스크바영화제의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본다르추크와는 다르게 내가 일부에서는 국수수의자라고 비난하기도 하는 미할코프를 신뢰하는 이유는 순전히 그가 영화를 잘 만들기 때문인데, 더구나 그게 ‘체호프적인’ 영화일 경우에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어주는 수밖에 없다.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혹은 멜로드라마나 코미디라도, 장르영화의 경우에는 인간성이 모자라거나 더러운 감독도 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 없이 체홉의 작품을 영화로 잘 만든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그것이 나의 편견이라면 편견이다). 왜 그런가? 체홉 작품의 중심은 ‘잘난 놈들’의 이념이나 행동이 아니라 ‘못난 놈들’의 무능력과 불가피한 회한이기 때문이다. 단편소설과 중편소설까지는 썼지만 그가 장편소설은 쓰지 못한/않은 이유가 나는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는 장편을 지탱할 만한 이념이나 행동을 인물에게 부여할 수 없었다. 그가 쓴 것은 고작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드라마들이었다.

한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그의 희곡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하나같이 ‘등신들’인바, 등신들을 데리고는 장편소설을 꾸려나갈 수가 없다. 그들은 모험에 나설 만한 용기도, 여자들을 꼬실 만한 재간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고 사색가나 사상가들도 아니다. 그러니 무슨 ‘소설’이 되겠는가? 참고로, 그의 작품들에 자기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인물들의 총 2,355명이다. 이건 내가 조사한 게 아니라 어제 나온 <니자비씨마야>의 신간 서평에서 읽은 것이다. 체호프에 관한 최신간의 제목은 <안톤 체호프의 모든 주인공 – 모든 러시아>(2004, 256쪽)인데, 저자는 마리나 트카첸코이고 책은 일종의 등장인물사전이다(요컨대 A에서 Z까지). 그리고 이 인물들의 숫자가 말해주는바, 책의 부제대로 ‘모든 러시아’ 혹은 ‘러시아 전체’를 카바하고 있다.

더불어 체홉의 작품을 영화/연극에서 연기한 유명한 배우들의 이름들까지도 망라하고 있다니까 러시아 ‘백과사전’으로도 손색이 없겠다(물론 서평자는 몇 사람이 빠졌다는 지적을 하고 있지만). 저자인 트카첸코는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도 완전한 등장인물 목록(=사전)을 만들 계획이라고 하는데, 그녀도 좀 오래 살아야겠다(책 구경을 하려면 나도 오래 살아야겠고). 하여간에 2,355명이 등장하는바, 그 대부분이 ‘등신들’이며 그러한 인간들의 무능력(나약함)과 회한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라면, 인간에 대한 연민을 평균치 이상 갖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는바, 우리가 그런 사람을 믿어서 손해 볼 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미학교수인 처남(세레브랴코프)을 숭배하면서 25년간을 그 뒷바라지 하느라 ‘도스토예프스키’(=잘난 소설가)도 ‘쇼펜하우어’(=잘난 철학자)도 되지 못한 우리의 ‘바냐 아저씨’의 경우가 웅변적을 말해주듯이, 체홉의 인물들은 “될 수도 있었던” 혹은 “할 수도 있었던” 삶의 중요한, 결정적인 모멘트들을 두 눈 다 뜨고 놓쳐버린 가련한 ‘등신들’이다(3막에서 분노가 폭발한 바냐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있는 세레브랴코프에게 총을 쏘지만 그마저도 빗나간다). 그걸 확인한 이상,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면 본때라도 날 테지만(<갈매기>에서 권총 자살하는 트레플료프처럼), 이 ‘등신들’은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무런 희망 없이 담담한 회한만을 가슴에 안은 채 예전의 삶으로, 일로 되돌아간다. 정말 등신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말이다. 누가 그들의 ‘등신스러움’을 비웃을 수 있을까? ‘도스토예프스키’와 ‘쇼펜하우어’가 아니라면, ‘영악한 놈들’뿐이다. 내 생각에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제법 잘난 소설가와 철학자들은 그다지 많을 거 같지 않으므로 대부분은 ‘영악한 놈들’일 확률이 높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당신이 체홉의 문학이 다소 싱거우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다면(혹은 아직도 별로 읽은 게 없다면), 당신은 자기 생각에 아주 ‘똑똑한 사람’이며(적어도 ‘똑똑한 체하는 사람’이며), 나의 분류에 따르면 아주 ‘영악한 놈’이다.

이런 일에는 굳이 발뺌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세상의 한편엔 등신들이 있고, 다른 한편엔 그들을 등쳐먹고 사는 영악한 놈들이 있는 것이니까(가령, 자치단체 의원이라고 뽑아놓으면 해마다 남들 휴가철에 ‘의원외교’ 하러 ‘해외연수’ 가는 놈들 말이다. 혹은 외제차 타고 다니는 ‘일부’ 주지/목사님들 말이다. 또 짜집기한 리포트로 학점 잘 받았다고 좋아하는 ‘일부’ 대학생들이나, 표절한 논문으로 연구비 타먹는 ‘일부’ 교수님들 말이다). 이런 ‘영악한 놈들’이 권력의 맛을 좀 알면 ‘사악한 놈들’이 되는 건 시간 문제이다.

해서 나는 교육적인 목적에서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도 젊은 세대들에게 체호프를 보다 많이 읽히고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하여 자신의 ‘등신스러움’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거나 한탄할 게 아니라 ‘등신스러움’의 그 유구한 보편성(!)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등신들끼리의 ‘연대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합창하는 정신으로). 물론 세상은 등신들이 바꿔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건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혹은 ‘체르니셰프스키’)나 ‘쇼펜하우어’(혹은 ‘헤겔’)의 몫일 것이다(그런 결정적인 순간에 ‘도스토예프스키’와 ‘쇼펜하우어’를 주워섬기는 우리의 ‘바냐’는 얼마나 눈물겹도록 등신스러운 것인지!). 하지만 적어도 ‘영악한 놈들’한테 당하고만 살지 않기 위해서는 등신들의 확실한 주제파악이 필요하다. 자신이 등신인 줄 모르거나 8등신만 좋아하는 등신이 상(上)등신이므로.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에 등장하는 ‘등신’의 이름은 ‘플라토노프’이다(사진). 그래서 체호프가 쓴 최초의 희곡이자 미완성 희곡(전집에는 ‘아비 없는 자식’으로 들어가 있다)인 이 작품은 <플라토노프>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35세이지만 이미 머리가 반 이상 벗겨진, 시골학교의 교사이다. 한편 소피야는 오래 전, 정확히는 7년 전에 헤어진 옛 애인 플라토노프와 우연한 자리에서 재회하는데, ‘젊은 이상가’였던 그가 고작 ‘교사’라는 사실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게다가 그에게는 소박하지만 촌스러운 아내 사샤가 붙어 있다. 반면에 플라토노프는 지적이면서도 강인한 여인 소피야가 어째서 한심하면서 유치한 ‘마마보이’ 귀족과 결혼했는지 의아해하며 그녀를 비난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엔 7년간 잊혀졌던 사랑이 다시 불붙는다. 이제 어찌해보기에는 너무 뒤늦은 사랑이…

미할코프는 러시아식 별장(=다차)의 파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의 이런저런 얘기와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미묘하게 변화해가는 두 사람의 심리를 섬세하게 주시하면서, 때론 한 템포 늦춰 관조하면서 따라간다. 아마도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이라면,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떠들어대는 초반부가 얼른 눈에 익지 않을 것이다(나도 그랬으니까). 해서, 이 영화의 진면목, 곧 체호프의 진면목은 두 번, 세 번 보아야 알 수 있다(나는 대여섯 번 본 것 같다). 체호프의 단조로운 듯한 단편들도 두 번, 세 번 곱씹어 읽어야만 제맛을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해서, 그 ‘제맛’을 좀 느끼게 되면, 이 한심한 인물들의 ‘회한의 드라마’에 웃음이 터지고 눈물이 나오게 된다. “우리가 원했던 삶은 이게 아니었어!”(“하지만, 난 벌써 서른 다섯 살이야!”)



영화의 절정에서 회한과 절망이 폭발한 플라토노프는 울부짖으면서 주연장을 뛰쳐나가고 곧장 바닷가의 절벽으로 내달려간다. 그리고 그 뒤를 아내인 사샤가 “미셴까! 미셴카!”(플라토노프의 이름인 ‘미하일’의 애칭)를 울부짖듯이 다급하게 부르며 쫓아간다. 그 다음 장면은 혹 이 영화를 직접 구해볼 사람들을 위해서 말하지 않겠다. 다만, ‘아, 미할코프!’(혹은 ‘아, 체호프!’)에 값한다는 것만은 장담할 수 있다. 얼마나 눈물겨우면서 웃기는 장면인 것인지!..  

04. 07. 15./ 06. 07. 14.

 

 

 



P.S.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이란 제목에서 ‘피아노’는 영어로 ‘mechanical piano’이다. 이걸 ‘기계피아노’라고 하는지 ‘자동피아노’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초반에 이 피아노가 등장하는데, 하인이 연주하는 척하지만 연주곡이 입력돼 있는 자동 피아노이어서 사람이 건반을 치지 않아도 저절로 연주곡이 흘러나온다(이걸 보고 사샤가 놀라서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진다). 이 자동피아노가 상징하는 바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건 ‘손 한번 못 대본 삶’이다. 즉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버린 삶, 등신 같은 삶이다. 내가 결석한 삶이며,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가는 세상이다. 혹 이런 자동피아노가 매혹적이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등신이 아니라 ‘영악한 놈’일 확률이 높다. 더불어 ‘인간-등신들’보다는 ‘기계-인간들’의 미래를 더 선호할 가능성도.

‘기계-인간들’의 구호가 체르니셰프스키와 레닌의 구호, “무엇을 할 것인가?”(=슈또 젤라찌?)라면, ‘인간-등신들’의 구호는 “어떻게 할 것인가?”(=까끄 젤라찌?)이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떻게, 어떻게 할 것인가?”(=까끄, 까끄 젤라찌?)이다. 여기서 ‘어떻게’의 반복은 중요하면서도 필수적인데, 그것은 ‘어떻게’의 수단성과 방법론을 무력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젤라찌’라는 ‘하다(do)’ 동사는 별 의미가 없게 되며, 남는 건 “어떻게, 어떻게”(까끄, 까끄)이다. 이건 데리다가 조이스론에서 분석하고 있는 “예스, 예스(yes, yes)”의 체홉 버전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지경인데, 어쨌든 이 “까끄, 까끄(kak, kak)”의 우리말 번역이 “어떻게, 어떻게”이며, 이걸 한 단어로 바꾸면 ‘어쩌자고’이다.

이 ‘어쩌자고’는 “이런 세상에, 어쩌자고, 세상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고 시인 이성복이 노래/탄식할 때의 그 ‘어쩌자고’이다. 그의 시구에서 ‘어쩌자고’ 대신에 반복되는 것은 ‘세상에’인데, 뒤집어서 말하면, “까끄, 까끄”의 또 다른 우리말 번역은 “세상에나, 세상에나”이며, 그것은 흔히 등신들을 일컫는바 “인간아, 인간아”로 번역되어도 무방하겠다. 이 ‘어쩌자고’의 문학, ‘세상에나, 세상에나’의 문학, ‘인간아, 인간아’의 문학으로서의 ‘까끄, 까끄’ 혹은 러시아문학의 한 갈래로서의 ‘까끄, 까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더 자세히 말하도록 하겠다(나는 이런 ‘등신짓’을 할 게 아니라 당분간 번역을 해야 한다).

한편, 미할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이 국내에 처음 출시된 것은 1991년도이다. 내가 특별히 비상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니고, 정성일의 영화평에 그렇게 나와 있다. 그는 1992년 1월에 <91년 비디오 베스트 10>을 꼽으면서 그 중의 한편으로 이 영화를 지목했다. 그대로 옮기면 “소련의 해체 뉴스가 91년도 뉴스 베스트 10에 낀다면 다음의 소련영화는 비디오 10편에 선정되어야 할 것이다. 니키타 미하르코프의 <피아노를 위한 미완성 희곡>(우진시네마)은 소련영화가 모두 프로파간다라는 이쪽의 선전이 거짓말임을 보여준다. 안톤 체호프의 원작을 화면으로 옮긴 이 영화는 섬세하며 서정적이고 부드럽다. 이러한 문화유산이 있는 한 소련은 해체될지언정 쉽사리 잊혀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미하르코프’보다는 ‘미할코프’가 좀더 정확한 표기이며, “섬세하며 서정적이고 부드럽다”란 평에는 나도 동의한다(하지만, 후반부는 격정적이다). 

P.S.2. <시베리아의 이발사>(1998) 이후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니키타 미할코프가 두 편의 신작을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그 중 한편은 <위선의 태양>의 속편으로 전편의 배우들이 대부분 다시 캐스팅되었다. 미남 배우 올렉 멘쉬코프(아래 사진)와 미할코프의 딸 나제즈다(나디야; 나쟈, 위의 사진)도 다시 선보인다는 얘기. 내년쯤 개봉할 예정인 듯한데 제법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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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7-17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이 아니라 <중간이층이 있는 집> 아닌가요? 주인공이 언니와 동생 두 여인과 회으주의적 남자주인공 나오는 그런 스토리 아닙니까? 이문열의 젊은날의 초상에도 이 책 이야기가 나오는데...

로쟈 2006-07-17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자매와 풍경화가가 나오는 이야기 맞습니다. <다락방이 있는 집>이란 번역만 봤는데, <중간이층이 있는 집>이라고도 번역돼 있군요. 중간이층이라기보다는 우리식 개념으론 '옥탑방'에 가깝습니다. 2층 위에 방 하나 더 얹어놓은 것입니다...

사마천 2006-07-1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열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번안해가지고 문학회에서 자기가 지은 것처럼 발표했다가 망신을 당합니다. 당신만 외국어 아느냐고... ^^
당시는 불온서적이라 국내에 번역이 안되었다고 하더군요.
내용은 꽤 서정적인데 체홉까지 불온화하던 박정희 시대란 놀랍죠...

로쟈 2006-07-19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핏 기억이 나는데, 이 작품이었나요?^^
 

러시아의 루블화가 7월 1일부터 완전 태환화를 실시한다고 한다.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며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잘 모르겠지만, 루블화의 위상을 강화/격상시키는 것이라 한다. 관련기사 두 개를 옮겨온다.

한국일보(06. 07. 01) "러 호황 타고 루블화 위상 높이기"(온라인 기사의 제목은 "러시아 루블화 7월 1일부터 완전 태환?") 

-러시아의 자신감은 어디까지 뻗어갈 것인가. 옛 소련 붕괴 후 최고의 경제 활황세를 누리고 있는 러시아가 7월 1일부터 루블화에 대한 모든 통제를 없애며 완전 태환화를 실시한다. 러시아 국민들은 루블화를 자유롭게 들여오거나 나갈 수 있으며 외국인 투자자는 루블화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 성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가 1998년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 당시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던 루블화를 미국 달러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 화폐 자리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본격 시동을 걸었다고 보고 있다.

-러시아가 어깨에 힘을 주는 이유는 배럴 당 70달러까지 치솟은 기름값 때문. 러시아는 연간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오일 달러에 힘입어 경제가 고속 성장하면서 루블화 수요가 크게 늘었다. 러시아 외환보유액은 1998년 150억달러에서 올해 2,300억달러로 1,500%나 뛰어 올랐다(*러시아 국영 '가즈프롬'에 관해서는 이전에 다룬 바 있다). 사회간접자본 구축과 국민 복지 증진을 위한 안정화기금도 700억달러나 쌓였다.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듯 러시아 하원(두마)은 24일 기업, 상점, 식당에서 외국 통화로 가격을 표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 시켰고 장관 등 공무원이 상품, 서비스 가격을 언급할 때도 달러화나 유로화로 바꿔 발표하지 못하도록 했다. 달러화, 유로화에 의지하지 않고 루블화만 가지고도 충분히 경제를 꾸려갈 수 있다는 뜻이다. 파이낸셜 타임즈(FT)는 러시아의 이번 결정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30일 분석했다.

-러시아 정부는 2007년 1월부터 시작한다는 원래 계획보다 6개월이나 앞당겨 태환화 실시를 결정했다. 2주 후 상트 페테르부르크서 G8(서방선진 7개국+러시아) 정상회담이 열리고 러시아 정부가 파리클럽에 빚진 220억달러를 갚기로 합의한 지 불과 며칠이 지난 시점이다.

-FT는 “모라토리엄(대외 채무 지불유예) 선언 8주년을 맞은 러시아 정부가 G8 회담을 앞두고 루블화 이미지를 개선하는 동시에 재정 파탄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자랑하기 위한 조치”라고 전했다. 아울러 “외교 분야에서 미국의 독주를 막겠다는 블라드미르(*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의지를 경제 분야 까지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러시아는 핵 문제로 시끄럽게 하고 있는 이란에 대해 미국이 강력히 제재하려 하지만 이를 반대하고 있다. 또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총선을 통해 집권하자마자 미국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마스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직접 초대하는 등 곳곳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부딪히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성장했다”며 “과거의 선입견으로 바라봤던 사람들은 지금 러시아를 두려워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루블화가 태환화 함에 따라 경제가 과열, 물가가 오르고 수출 가격이 상승해 기업들이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박상준 기자)(*아래는 루블화 지폐의 견본 이미지. 루블의 최고액권은 1000루블짜리이며 원화로는 대략 4만원 정도이다.)

세계일보(06. 07. 01) 러시아 "루블화 위상 되살리자"

-국제유가 상승으로 오일 머니를 축적한 러시아가 1일 루블화의 완전 태환(통화 자유교환)을 위해 외환시장 규제를 철폐한다. 1998년 외환위기 때 400억달러(약 38조원) 규모의 디폴트(채무 불이행)를 선언한 지 8년 만이다. 러시아 국민들은 1일부터 루블화를 자유롭게 반입·반출할 수 있고, 외국 투자자들도 루블화 은행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기업이 벌어들인 외화의 25%를 중앙은행에 예치토록 한 규제도 사라진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루블화 태환 일정이 예정보다 6개월 앞당겨진 것은 계산된 정치적, 상징적 조치라고 30일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날 국제 채권국 모임인 파리클럽과 8월21일까지 213억달러의 부채를 조기 상환키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부채 213억달러와 조기 상환에 따른 할증금 10억달러 등 총 223억달러를 지불하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조기 상환으로 이자비용 부담이 감소, 총 77억달러의 경제적 이득을 보게 됐다고 강조했다.

-UBS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알 브리치는 “러시아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국제사회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일련의 조치”라고 분석했다. 외환시장 규제 철폐 역시 몰락했던 루블화의 위상을 회복시키는 동시에 달러화 독주를 견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신문은 분석했다.

-러시아가 루블화 태환에 나선 것은 25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과 700억달러의 석유안정화기금으로 대변되는 탄탄한 경제상황 덕분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루블화의 완전 태환은 경제구조 개혁과 기업환경 개선 등을 통해 러시아가 투자할 만한 시장으로 인정받을 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루블화의 태환화가 순조로우면 러시아 경제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유입 자금이 급증하면 경기 과열이나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 외환시장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AP은 러시아 중앙은행이 하루 환율 변동 폭을 규제하기 때문에 루블화 환율에 큰 충격은 없을 것으로 분석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에 따르면 29일 현재 달러·루블화 환율은 1달러에 27.0611루블이다.(조현일 기자)
 
 
06. 07. 01.
 
P.S. 지난 한주 러시아 관련 기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이라크에서 살해당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복수를 푸틴이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TV보도용 멘트는 이렇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특수부대에 러시아 외교관 살해범들을 추적 분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러시아 대통령궁인 트램린 공보실은 성명을 발표하고 대통령이 특수부대에 모든 필요한 조치를 다해 이라크 주재 외교관들을 살해한 범죄자들을 찾아내 분쇄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습니다. 크렘린은 특수부대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과거 러시아 비밀경찰 KGB의 후신인 해외정보국이 작전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Photo from www.photobucket.com
 
그런데 거기에 이어진 해외토픽: "한편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가하기 위해 크렘린을 나서던 푸틴 대통령은 놀러온 어린이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한 어린이의 셔츠를 걷어올리고 배에다 깜짝 뽀뽀를 해 카메라 세례를 받기도 했습니다." 외신을 참조하여 조금 보충하면 푸틴은 4-5세쯤 된 이 아이에게 이름을 묻고, '니키타'라고 대답하자 사진처럼 뽀뽀를 했다. 아이나 주변 사람들이 다소 당황해 한 것은 불문가지이다.
 
테러리스트에 대한 '분쇄'를 지시하는 대통령과 어린아이의 배에 입맞추는 대통령, 이것이 푸틴의 두 가지 얼굴, 더 나아가 러시아의 두 가지 얼굴이다(푸틴의 대중적 지지의 일부는 그의 이러한 엉뚱한 돌출행동에 힙입고 있다). 대중적 친근감에 있어서 부시 또한 푸틴 못지 않지만, 차이라면 푸틴은 연출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지극히 '러시아스런' 권력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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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저널인 '자율평론' 제16호(06. 04. 19)에서 하승우씨의 '아나키즘과 맑스주의: 오해와 차이'를 옮겨온다(필자는 폴 애브리치의 <아나키스트의 초상>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으며, <희망의 사회윤리 똘레랑스>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맑스 새롭게 읽기'라는 기획하에 진행된 강연원고로 보이는데(맑스의 '정치문제에 대한 무관심' 읽기이다), 아나키즘과 관련하여 러시아 인민주의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에 이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듯해서이다(오늘날 가장 유명한 아나키스트 지식인으로는 노엄 촘스키와 머레이 북친 등을 들 수 있겠다). 이 참에 나도 한번 읽어보고. 참고로, 인용문 전체에 대해서 따로 (-)표시를 하지 않았다. 나의 군말에 대해서만 (*)를 표시했다. 모든 강조와 이미지는 나의 것이다.  

1. 들어가며
오늘 같이 얘기할 텍스트는 아마도 이번 강좌 중에서 가장 짧은 글이자 가장 분명한 입장을 가진 글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짧고 분명한 글이기에 우리는 이 글의 맥락을 짚어야 그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이 글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아나키즘을 분명하게 소개하고 난 뒤에 비판하지 않고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구성하면서 그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분명 아나키즘과 맑스주의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고 특히 정치적인 입장에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런 차이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아나키즘에 대한 우리의 오해부터 먼저 해소시킬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2. 하나의 아나키즘? n개의 아나키즘!
아나키즘은 하나의 단일한 이론적 내용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인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골드만, 베르크만의 사상은 조금씩 그 결을 달리 했습니다. 더구나 아나키스트들은 이론적인 노력보다 실천적인 투쟁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하나의 이론적인 흐름을 구성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대충 4가지 정도의 유파로 아나키스트들을 분류할 수 있을 듯합니다.

 

 

 



①아나키스트-꼬뮨니스트: 국가만이 아니라 사적인 소유권을, 조직을 거부하고 꼬뮨을 통한 대안사회 건설에 역점을 둠(대표적인 사상가로 표트르 크로포트킨)

②아나코-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을 통한 집산주의 사회건설을 목표로 삼음(대표적인 사상가로 미하일 바쿠닌)

③아나키스트-개인주의자: 꼬뮨과 노동조합 모두를 의심하며 자율적인 개인의 직접행동을 주장(대표적인 사상가로 막스 슈티르너)

④ 소박한(just plain) 아나키스트: 자신에게 어떤 접두사나 접미사를 붙이길 거부했던 아나키스트(대다수의 익명의 아나키스트들)

맑스가 “정치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판하고 있는 프루동은 ‘역설의 사상가’(a man of paradox)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고, “나는 체계적인 이론을 만들지 않겠다”, “나는 분파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체계적인 이론보다 신문을 만들고 정세를 비판하는 언론인, 평론가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평론을 쓰면서 비아냥과 역설을 적절히 구사했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의 말만 가지고 프루동을 읽을 경우 오해의 소지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엥겔스가 “권위에 관하여”에서 비판했던 바쿠닌 역시 마찬가지의 인물입니다. 바쿠닌은 “어떤 이론이나 이미 만들어진 체계, 이미 씌어진 책이 세계를 구하지 못한다. 나는 어떠한 체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참된 탐구자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사회의 가장 소외된 계급들에서 혁명의 잠재력을 보았고 이론보다 본능적인 면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찾았습니다. 가장 민주적인 방식의 혁명을 주장하면서도 자기 스스로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던 바쿠닌 역시 역설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러시아의 인민주의 전통
아나키즘의 토대를 마련한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모두 러시아의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귀족이었으나 인간답게 살아가지 못했던 농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해방을 위해 삶을 바친 혁명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그 모범이 되었던 러시아의 인민주의 전통이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짜르의 전제정치는 많은 반란을 자극했고, 스텐카 라친(*'라진'이다)과 에멜리안 푸카체프(*'푸가초프'이다. 영어식 표기는 'Pugachev'인데, 모음 'e'는 여기서 'yo'로 소리난다)의 반란이 대표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푸가초프에 대한 최초의 역사서를 쓴 사람은 시인 푸슈킨이었다). 이런 농민반란은 현실에 대한 저항과 증오를 자극했고, 나로드니끼라 불리던 인민주의자들은 러시아 민중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을 바탕으로 짜르에 대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귀족층을 중심으로 했던 인민주의자들의 활동은 테러를 비롯 짜르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수용하는 과격한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사상과도 연관되는데, 이들은 러시아 인민이 로마법적인 재산관념, 즉 사유재산의 절대성에 대한 관념을 가지지 않았고 평화로운 농민공동체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국가는 적이었고 모든 권력은 악이고 죄라는 생각이 인민주의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러시아 특유의 기독교 전통도 이런 경향을 강화시켰습니다. 두호보르 종파처럼 “신의 자식들에게는 짜르나 통치권력, 그밖의 어떤 인간의 법률도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종파도 있었습니다(*이 두호보르 종파가 탄압을 받게 되자 캐나다로의 이주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쓴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이다. 실상 작가 톨스토이의 사상 자체가 아나키즘과 친연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레오(*Leo는 Lev의 영어식 표기이다) 톨스토이처럼 기독교에 바탕을 두고 인민주의를 실현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소박한 영혼을 지닌 러시아 인민이야말로 역사의 핵심적인 동력이라고 봤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인민에 대한 이런 신뢰를 이어받았고 대중이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고 봤습니다(*이때의 '인민'은 물론 '농민'이다. 아나키스트들과는 달리 맑스-레닌은 농민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 인민주의의 전통은 러시아 급진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들은 인민에게 깊은 신뢰를 품었다는 점에서 동일했지만 그 신뢰를 드러내는 방식, 즉 혁명을 추구하는 방식은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톨스토이처럼 평화적인 방식을 추구했던 사람도 있고 트가체프처럼 짜르의 암살과 폭력만이 러시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1881년 3월에는 인민주의자들이 실제로 짜르 알렉산드르 2세(*사진)를 암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테러를 혁명의 방법으로 선택했던 이런 급진주의자들에는 인민주의자, 맑스주의자, 아나키스트, 허무주의자(니힐리스트)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전통에는 네차예프라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인물과의 관계 때문에 바쿠닌은 <인터내셔널>로부터 제명을 당하게 됩니다(흥미롭게도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에 따르면 레닌은 이 인물이야말로 조직을 가장 잘 이해했다고 칭송했다는군요).


 

 

 

 

4. 아나키즘과 맑스주의
사실 아나키즘과 맑스주의의 차이점은 목표보다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아나키즘을 어떤 하나의 이념으로 분명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에 여기서는 가장 일반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살피려 합니다).

첫째, 아나키스트들은 맑스주의가 강조하는 전위조직이나 계급독재를 거부합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대중이 스스로 ‘직접행동’(direct action)할 때에만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자연히 아나키스트들은 “노동해방은 노동자의 힘으로”, “농민해방은 농민의 힘으로”라는 구호를 외쳤지요. 서로간의 연대는 가능하고 필요하지만 실천적으로 운동을 이끌어갈 사람들은 반드시 그 당사자들이어야 하고 그 현실에서 생활하고 살아가는 일반 대중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특정한 계급이 전체 운동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거나 의사결정과정이 중앙으로 집중된 조직을 반대하는 것으로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단순히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정치혁명이 아니라 삶의 영역 전반에서 벌어지는 생활의 혁명, 즉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둘째, 아나키스트들은 역사가 특정한 발전법칙(역사적 유물론 또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따라 실현된다는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새로운 사회의 구체적인 청사진이 미리 마련될 수 없다고 봤고 새로운 사회가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집단적인 활력을 통해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관점은 아나키스트들이 과학적인 합리성과 의식보다 대중의 본능과 연대에 희망을 걸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바쿠닌은 대중이 지닌 반란의 본능과 파괴적인 충동에 희망을 걸었고, 크로포트킨은 서로 돕고 보살피는 본능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새로운 아나키즘 사회는 냉철한 이성이나 지성보다 창조적인 파괴를 지향하고 서로 보살피는 본능에 바탕을 뒀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탁월한 지성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의 중요성을 감소시켰습니다(*때문에 지식인-아나키스트는 지식인-맑시스트와는 사뭇 다른 '애매한' 포지션을 갖는다).

셋째, 러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아나키즘 이론은 노동계급보다 농민을 중심으로 혁명 이후의 사회를 구상했습니다(프루동 역시 프랑스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죠). 물론 아나키스트들도 산업혁명이나 과학기술로 인한 생산양식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고 그런 변화를 긍정적으로 봤지만 대규모 공장체제를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잘 감지하지 못했고 농민공동체가 가진 본능적인 측면에 주목했습니다(*그런 맥락에서 아나키즘은 러시아의 전통사상 내지는 자생적 사상이며, 러시아 맑스주의는 (수입된) 서구의 사상이다. 오늘날 이것은 '농민의 사상' 대 '노동자의 사상'으로 대별될 수 있다). 또한 한 사회를 중앙화된 권력으로 통합하지 않고 각자가 자신의 삶을 결정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사회전체적인 이론틀이나 이론적인 청사진을 개발하지 않았습니다(*아래 그림은 프루동과 바쿠닌).

4. 맑스는 왜?
“정치 문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맑스는 프루동과 프루동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판합니다. 정당을 구성하지도 않고 파업을 반대하는 입장은 맑스의 말처럼 “어리석거나 천진난만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맥락을 조금 더 세밀히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 맑스는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를 “통찰력이 뛰어난 책”이라며 그 가치를 인정하기도 했고, 그 뒤 <신성가족>에서도 프루동이 “위대한 과학적 진보이자 정치경제학을 혁명화하여 비로소 참된 정치경제학을 가능케 한 진보”를 이루었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844년에는 파리에서 프루동과 만남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하던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에 프루동의 동참을 요청했는데, 프루동은 그 취지에 동의했지만 “우리가 운동에서 앞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편협성을 드러내는 지도자가 되지는 맙시다. 새로운 종교의 사도인 척 하지 맙시다”라고 주장했고 “문제제기를 결코 소모적인 것으로 여기지 맙시다”라고 전제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프루동은 혁명적인 행동을 개시하자는 주장에도 반대했습니다.

프루동은 “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성 바르돌로뮤의 밤[대학살]을 거행해서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보다 소유를 천천히 불태우는 쪽을 좋아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이후 프루동과 맑스의 관계는 깨지고 <철학의 빈곤>으로 맑스는 프루동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게 되었죠.

프루동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정당합니다. 프루동은 선거참여를 비판했고 노동조합이 파업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건 그 당시 프랑스에서 사회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던 프루동이 왜 그런 주장을 했을까, 라는 점이죠.

사실 프루동이 정치참여를 비판한 것은 이론적인 입장이 아니라 현실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프루동은 1848년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보통선거권을 도입하자, 보통선거권이 가지는 약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보통선거권은 반(反)혁명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르 레프레젱탕 뒤 페플>이라는 자신의 신문에서 프루동은 “공화국은 모든 의지가 자유롭고 국민이 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통치형태이다. 그러나 그 이상을 실현하려면 모든 사적인 이해관계들이 사회를 거스르지 않고 사회를 위해 움직이는 게 필수적인데, 그것은 보통선거권으로 가능하지 않다. 보통선거권은 공화국의 이기주의이다. 이 체제가 오래 유지될수록 경제혁명은 계속 이루어지지 않고 그럴수록 우리는 왕정과 독재, 야만주의로 퇴보할 것이다. 선거권이 더 늘어나고 합리화되고 자유로워지는 한 이 모든 건 더 분명해진다”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도 프루동은 1848년 선거에 출마했고 의원으로 당선됩니다. 그러나 프루동은 1848년 6월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카베냑의 군대가, 노동자들의 군대가 자신의 형제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난 뒤 의회에서 다른 의원들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프루동은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제를 정치적인 수단에, 더구나 선거라는 수단에 맡기는 것이 환상일 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이건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원하는 문제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쓰레기 더미에 버려졌다. 우리는 부르주아지를 구원해야만 한다. 하층 부르주아지를 배고픔으로부터, 중간층 부르주아지를 파멸로부터, 상층 부르주아지를 그 악마같은 이기주의로부터 구원해야만 한다. 6월 23일 프롤레타리아트의 문제는 오늘날 부르주아지의 문제와 동일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참 역설적인 문체이죠. 언론인으로서 프루동은 이런 식의 표현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결국 이런 활동으로 프루동은 의원직을 제명당하고 감옥에 갇혔으며 선거를 통해 예견했던 루이 보나파르트와의 긴 싸움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 뒤 프루동은 “정치에 몰두하는 건 똥물에 손을 씻는 짓”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루이 보나파르트가 자신의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보통선거권을 이용했을 때, 프루동은 선거와 정당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수단일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투표거부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프루동은 정부의 책략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인민이 정부당국과 인민의 본질적인 갈등을 가장 잘 부각시킬 수 있다고 선언하며 투표거부주의자들(abstentionists)과 함께 했습니다.

이 운동은 적어도 두 가짐 점, 즉 정치행태에서 지배적인 요소이던 편의주의(expediency)를 거부하고(필자주: 어떤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근본적인 원인을 건드리지 않고 그 순간만을 적당히 넘기려 하는 주의. 근대정치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투표를 보편적인 정치적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민주주의의 신화를 거부하는 운동으로, 특히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즘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프루동은 계급갈등을 가급적 회피하려고 했습니다. 프루동은 부르주아지에게 그들이 과거에 혁명적인 세력의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부르주아와 노동자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부르주아와 노동자 모두를 해방시킬 혁명을,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꿀 혁명을 촉진시키려 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한 프루동의 부정적인 생각은 노동조합을 부정해서가 아니라 조합이기주의를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루동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조합이 독단으로 여겨지기에 잠재적으로 자유에 해롭지만,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조합은 유용하다고 봤습니다. “노동자들의 조합은…그들이 달성한 결과가 얼마나 성공적인가가 아니라 사회공화국을 옹호하고 세우는 그들의 조용한 추세에 따라서 판단되어져야 한다.…노동자들의 노동의 중요성은 조합의 사소한 이해관계가 아니라 지난번 혁명이 건드리지 않고 남겨둔 자본가와 고리대금업자, 정부의 지배를 부정하는 데 있다. 그런 뒤에 정치적인 거짓말을 극복했을 때…노동자 집단들은 자신들의 타고난 상속물인 대부분의 산업을 접수해야 한다.”

또한 프루동은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능력을 가져야 한다고 봤습니다. 맑스가 인용하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능력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프루동은 “정치적 능력을 가지는 것은 자신을 집단의 일원으로 의식하게 하고, 이 의식의 결과로 이념을 확정하며, 그 이념의 실현을 추구하게 만든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을 결합한다면 누구라도 가능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프루동은 프랑스 노동계급이 실제로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기 시작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프루동은 노동계급의 이념을 상호의존의 이념으로 봤습니다. 프루동에게는 상호의존이라는 이념만이 (농민을 포함하는)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지와 분리시켰고 노동계급에게 진보적인 성격을 부여했습니다. 왜냐하면 상호관계가 발달하면서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사회의 경제생활에 정의를 도입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반反상호주의적 정신이 실행을 막아왔던 평등주의 기반 위에 사회를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상호주의는 인민의 참된 주권을 보장할 연방주의로 표현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연방 공화국에서 권력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일련의 대표들이 인민의 일반의지를 실행하는 조절위원회들에 결합하는 ‘자연스런 집단들’에 의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프루동은 자유의 건전한 성장에 해롭다고 여겼던 내전의 폭력 없이도 전체 공동체가 해방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사회의 분할구조를 인식하고 사실상의 계급투쟁이 존재한다는 점을 깨달았지만, 프루동은 이 투쟁의 유동성에서 상호주의의 균형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프루동은 계급투쟁을 공식화해서 영원한 분할을 만들지 모를 어떠한 방법도 피하려고 노력했다. 파업에 대한 비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족으로 얘기하자면 프루동의 인민은행 계획에 대한 비판은 주로 화폐와 소유를 잘못 이해했다는 점으로 얘기됩니다. 그런데 그런 비판은 프루동이 추구했던 것을 오해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프루동이 폐지하고자 한 것은 소유 자체가 아니라 소유의 축적이었습니다. 노동거래소를 통한 노동권의 유통은 단지 화폐를 노동권으로 교체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권이 축적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5. 엥겔스는 왜?
엥겔스는 “권위에 관하여”에서 바쿠닌을 겨냥해 비판을 가합니다. 그런데 바쿠닌은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쿠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모든 권위를 부정한다고? 그건 나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장화에 관한 한 나는 장화 만드는 사람의 의견을 구한다. 집, 운하, 철도에 대해선 건축가나 엔지니어와 협의한다.…그러나 장화 만드는 사람이든 건축가든 내게 자신의 권위를 강요하는 것을 나는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게, 그리고 온당한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말을 듣는다.…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도 절대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런 믿음은 나의 이성, 나의 자유, 그리고 내 과업의 성공에 치명적일 것이다. 그런 믿음은 나를 즉각 어리석은 노예,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의지와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왜 엥겔스는 바쿠닌을 비판했을까요? “권위에 관하여”가 씌어진 1872년과 1873년 사이의 시기는 <인터내셔널>을 놓고 맑스, 엥겔스와 바쿠닌간의 싸움이 격렬하게 벌어지다 결국 1872년 9월 헤이그 대회 때 바쿠닌이 <인터내셔널>에서 제명된 시기입니다.

 

 

 

 

맑스주의자들은 바쿠닌이 <인터내셔널> 내부에 분파를 만들고 조직을 장악하려 한 악당이라고 주장합니다. 소련공산당 맑스-레닌주의 연구소가 펴낸 <맑스 전기>는 바쿠닌이 “무력하고 억압받는 인민 대중들과 농부들 및 쁘띠부르조아들의 회의”를 대변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쿠닌이 <인터내셔널> 내에 분파를 만들고 테러와 관련된 비밀조직을 운영했기 때문에 제명을 당했다고 주장합니다(필자주: 그리고 바쿠닌이 비밀조직을 만들었다는 점은 러시아 짜르의 오크라나라는 비밀경찰제도를 생각할 때 어쩔 수 없는 일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유럽의 혁명가들과 달리 러시아의 혁명가들은 망명 이후에도 끊임없는 체포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레닌도 마찬가지였죠 *오크라나? '오흐라나okhrana'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전혀 다른 해석을 합니다. 아나키스트 작가인 조지 우드콕은 맑스와 바쿠닌의 대립을 개인적인 대립이 아니라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자와 반권위주의적 자유인의 대립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우드콕은 <인터내셔널>의 다수를 차지했던 조합주의자와 상호주의자들이 바쿠닌을 지지한 반면 맑스의 총무위원회(general council)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인터내셔널>을 지배했다고 비판합니다. 둘 중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는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만 이 글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아나키스트의 분류에 따르면, 개인주의자나 소박한 아나키스트들은 분명 정치적인 권위를 절대적으로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아나코-생디칼리스트나 아나코-꼬뮨니스트들은 정치적인 권위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의 권위에 대한 생각은 우크라이나에서 농민꼬뮨을 건설하려 했던 마흐노(N. Makhno, 1889-1934)의 연설에서 잘 드러납니다.

마흐노는 마을에서 백군과 지주들을 몰아낸 뒤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을 도우러 왔습니다. 우리는 지주들과 그들의 마름들을 따랐지만,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정의와 평등의 이름으로 여러분끼리 땅을 분배하십시오. 그리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동등한 관계에서 일하십시오.”

 

 

 

 

그리고 1936년 스페인 시민전쟁 때 국제의용군으로 자원했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얘기는 권위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생각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의용군 체제의 핵심은 장교와 사병간의 사회적 평등이었다. 장군에서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 받았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고, 똑같은 옷을 입었고, 완전한 평등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생활하였다.…물론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명령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동지가 동지에게 하는 것임을 인식했다.…실제로는 그런 방법이 장기적으로 ‘효과’가 있다.…나는 명령을 따르게 하거나, 위험한 일의 자원자를 얻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혁명적’ 규율은 정치적 의식에 달려 있다. 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아나키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분열은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1995)에서도 잘 표사된다.)



아나키즘은 이를 위해 먼저 거대화된 권력을 잘게 나눠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권력은 크게 뭉칠수록 통제에서 벗어나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개인을 소외시키기 때문입니다. 반세계화운동과 아나키즘을 연관짓는 숀 쉬한(Sean M. Sheehan)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나키즘은 스스로 없애려고 하는 권위주의의 씨앗을 내포한 관료제를 낳지 않으면서 자율적으로 조정되는 의사결정 구조를 개발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흔히 반세계화 운동으로 불리는 흐름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인 친지역화(pro-localization)는 탈중앙화한 공동체들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공동체들은 엘리트나 관료집단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크로포트킨은 스위스의 <쥐라연합>을 통해 이런 구상을 밝혔습니다. “우리는 사회란 마땅히 이래야 한다는 이론으로부터 이상적인 공화국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현존하는 사회악을 인식시키고 토론과 집회를 통해 지금보다 나은 사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사고하도록 유도했다. 국제대회에서 제기된 문제를 모든 노동조합의 연구주제로 추천했다. 그러면 한 해 동안 유럽의 모든 지부에서 직업과 지방의 특성에 맞게 토론되었다. 지부의 결론은 지역대회에 제출되었고 그것은 좀더 정리된 형태로 다음 국제대회에 제출되었다. 우리가 이상으로 삼는 사회구조는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철저히 아래로부터 수렴되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는 엥겔스의 비판, “권위의 원리를 절대적으로 나쁜 원리인 것처럼 말하고 자치의 원리를 절대적으로 좋은 원리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권위와 자치는 서로 다른 사회 발전 양상에 따라 그 범위가 서로 다른 상대적인 것들이다.”라는 비판이 조금 어긋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6. 오해를 넘어서 차이로
아나키스트들과 맑스주의자들은 분명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로 묶었던 것은 사회주의였고, 적기와 흑기가 함께 휘날렸던 적은 아주 많았습니다. 사실 아나키스트들의 가장 큰 적대자는 맑스주의 자체라기보다 그 지류인 볼셰비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다중네트워크에 모인 분들도 볼셰비키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레닌을 제거한 맑스주의? 지젝식의 비유를 빌자면, '니코틴 없는 담배'나 '카페인 없는 커피'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면 이제 과제는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 그 차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점입니다. 계속 낯선 이방인으로 배제할 것인지 아니면 조금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는, 때로는 그 상대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벗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이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맑스주의나 아나키즘 자체가 지금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가 배울 것은 누가 더 올바른가라는 점보다는 새로운 대안사회를 만들어나갈 단초를 찾아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들의 고민을 허투루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의 고민은 아직 가지 않은 길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06. 0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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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3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23 08: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6-06-23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율평론에서 퍼오셨군요..^^ 요즘은 국내자율주의그룹내에서 아나키즘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모르겠군요..제가 전에 이런 글을 그곳 게시판에 올린적이 있었죠.



저는 자율주의를 아나키즘의 부분집합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율주의에서 주장하는 국가와 전위당의 비판..그리고 자율적 민중 혹은"다중"에 의한 자유로운 네트워크들 간의 연합을 통한 새로운 사회건설 등의 비젼은 기본적으로 아나키즘의 그것과 괘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프루동..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으로 이어지는 아나키즘의 전통에서는 맑스의 사상과 전략은 주요한 비판의 대상이 돼어온 반면, 자율주의는 맑스를 사상의 구심점으로 삼는다는 데에 아나키즘과 자율주의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심각한 모순이 있다고 봅니다..저처럼 맑스의 주장들 예컨대 혁명에 있어서의 당의 역할과 혁명 이후의 이행기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던 사실들 그리고 그것이 바쿠닌과 같은 무정부주의그룹에 의해..제1인터네셔널내부에서 처음부터 비판받아왔다는 사실에서 아나키즘과 맑시즘과의 주요한 차이점이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자율주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시즘을 그들 사상의 주요한 부분으로 보는 이유를 이해하기 힙듭니다..국가와 당에 대한 비판..그리고 다중의 자율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했던 조류는 맑시즘의 전통이 아닌 아나키즘의 전통에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네그리와 하트가 그의 사상을 많은 부분 빚지고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도..맑시즘보다는 오히려 아나키즘에 가깝다고 보고..푸코 역시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네그리가 "요강"을 분석하여..맑시즘 내에서 자율적인 노동자의 힘의 필요성을 읽어내기는 했지만..과연 그것이 맑시즘의 주요한 주장이었을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다양한 요소가 분절적으로 존재했던 맑스의 정치경제학비판준비작업의 한 과정에서 "자본론"에 쓰여지기에는 이질적이었던 요소들을 미출판물이었던 자본론의 준비작업으로서의 "요강"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기술했던 흔적을 네그리가 적극적으로 해석해 것이었을 뿐이라고 봅니다. 과정은 어떠했는지 몰라도 결론에 있어서 맑스는 당에 의한 권력장악과 국가의 "점진적" 파괴를 주장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율주의가 굳이 자신을 아나키즘이라고 부르지 않고..다른 무엇으로 불리어지기를 원하는 것은..아나키즘에 대한 전통적 맑시즘 레닌이즘 내의 편향된 시각을 자율주의 내에서도 가지고 있기때문이라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억측일까요?



이처럼 아나키즘과 맑시즘은 정치를 바라보는 부분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광의의 사회개혁프로그램에서는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사실은 사회주의적 변혁의 프로젝트를 먼저 제시한 사람들도 맑스혹은 맑시스트가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이죠. 생시몽이나 푸리에등과 같은...때문에 자율주의내부에서 맑시즘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다는..그 이론적인 높은 완성도 때문인것 같긴 한데..맑시즘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사실 충분히 가능하죠. 윗 글에서도 지적했다시피 아나키즘이 이론적 작업에 그다지 천착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실천과정에서는 부차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그건 그렇고 로쟈님도 아나키즘에 관심이 있으신가봐요? 이런글도 인용하시고?

로쟈 2006-06-2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온 이유는 서두에 밝힌 대로입니다. 러시아 아나키즘의 지분을 좀 '광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잠깐 언급했지만, 지식분자들의 맑시즘에 대한 선호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맑스-레닌주의만큼 혁명의 '전위'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즘도 드물며, 그때의 '전위' 역할을 무지렁이 농사꾼들이 하기는 어렵죠. 농민들이야 <자본론>을 읽을 필요도 여유도 능력도 안되고요...

yoonta 2006-06-23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지렁이 농사꾼이 없이는 혁명도 불가능하죠..^^ (급진적) 혁명에는 책만 들여다보는 전위만 필요한게 아니라 현장에서 총칼들고 피흘리는 행동대원?들도 필요하기 때문이죠..러시아내의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혁명과정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이루어냈죠. 마흐노같은 사람이 없었으면 레닌은 반혁명에 의해 쫓겨났을지도 모른다는..근데 그들은 혁명후 볼키에 의해 반혁명주의자로 역으로 몰려 다 숙청당하고 말죠..-_- 역사의 비극이라는..그런 꼴 당하지 말라고 맑스주의자들이 공부좀 하라고 그렇게 구박했던 것일까요? -_-

로쟈 2006-06-2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도 중요하지만 공부 문제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강유원의 <공산당 선언 강의>와 파이프스의 <공산주의>를 거푸 읽어봤는데, 전자에는 후자의 교훈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아 당혹스럽더군요(<선언>을 잘 '읽는' 게 공부일까요?).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와는 전혀 무관한(따라서 그에 대해서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다른 사회주의'를 말하거나 꿈꾸는 이들을 저는 다시 보게 됩니다. '다른 세상', '새로운 인간'을 위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총칼들고 피흘리는 혁명대원들')에 대해 무관심한 '공부'는 당혹스러우면서도 섬뜩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대화상대로는 유익하나 신뢰할 만한 족속들은 아니죠...

yoonta 2006-06-23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뢰할 만한 족속들이 아니라는 코멘트에 공감..^^ 지 잘난 맛에 사는 인간들은 원래 자기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맑스와 바쿠닌등과의 대립에도 그런 경향들이 있었던 것 같고요. 따라서 아나키스트들이

"새로운 아나키즘 사회는 냉철한 이성이나 지성보다 창조적인 파괴를 지향하고 서로 보살피는 본능에 바탕을 뒀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탁월한 지성과 능력을 갖춘 엘리트의 중요성을 감소시켰습니다(*때문에 지식인-아나키스트는 지식인-맑시스트와는 사뭇 다른 '애매한' 포지션을 갖는다)."

이부분에서처럼 아나키스트들이 이론보다는 인간들의 본능과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본점은 그들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 로쟈님도 그런 말을 하셨던것 같군요..이론이나 지식보다는 감정이다라는..그것에 호소하지 못하는 것이 좌파의 문제점이다라는 취지의 댓글 말이죠....

burningham 2007-04-08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페이퍼네요 담아갑니다..

그루 2008-01-3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동을 검색하다 여기까지 왔네요^^
멀리서지만, 로쟈님의 글 늘 잘 보고 있답니다.
페이퍼를 담아가려고 댓글은 처음 남겨보네요..^^
감사히 데려갑니다..^^

그루 2008-01-30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글 자체를 담아가는 건 원래 알라딘에서 안 되는 것인가요?
출처와 댓글만 담아갈 수 있게 되어 있네요.. 이궁,
스크랩은 어찌 하는 것인지..아무리 봐도 메뉴가 안 나오네요^^;
헤매고 있습니당.. ^^;;

로쟈 2008-02-03 12:12   좋아요 0 | URL
제목 왼쪽의 별표시가 있습니다. 그걸 찜하시면 될 겁니다. 지금은 찾으셨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