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담을 엮은 <테러시대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4)을 어디에다 두었는지 찾지 못해서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복사한 영어본도 눈에 띄지 않아 그마저도 대출했다. 이럴 땐 '소장도서'란 말이 아주 무색하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아마도 2005년쯤인가 훑어보았는데, 얼마전 <데리다-하버마스 읽기(The Derrida-Habermas Reader)>(2006)를 구입한 김에 다시 정독해볼 요량으로 찾았던 것이다.

사실 수전 손택의 <문학은 자유다>(이후, 2007)에 대한 페이퍼를 써두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가(얘기가 좀 길어질 듯해서다) 잠시 펼쳐든 게 <테러시대의 철학>인데, 펴자 마자 또 오역이 눈에 띄기에 교정해둔다. 문제의 대목은 서론의 '철학이 역사에 관해 말할 것이 있는가?'란 절에 나온다. 첫문장이다.

"철학이 보편적 원리들과 역사의 개별 사건들을 연구한 이래로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랑스럽게 선언하였다."(22쪽)

 

 

 

 

이건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내용이다(국역본에서 전후맥락을 더 옮겨놓았으면 싶지만 네댓 권이나 갖고 있는 <시학>이 한권도 눈에 띄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얼핏 그런가 보다 싶지만 '시조차도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명제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가 번역문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 원문을 전혀 엉뚱하게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원문은 이렇다.

"Aristotle famously declared that since philosophy studies universal principles and history, singular events, "even poetry is more philosophical than history.""(2쪽)

국역본은 'since'를 '-이래로'로 옮겼는데, 여기서는 '-이기 때문에'란 뜻이다. 그리고 'history'와 'singular events' 사이에는 동사 'studies'가 생략됐다. 다시 옮기면, "유명한 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은 보편적인 원리들을 탐구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사건들을 다루기 때문에 '시조차도 역사보다는 더 철학적'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철학과 역사의 대비는 보편성 대 개별성의 대비이다. 그렇다면 시가 역사보다 철학적이라는 말은 역사보다 더 보편적이라는 뜻이겠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시'라는 말로 염두에 두고 있는 장르는 '비극'이다(알다시피 <시학>은 내용상 '극작술'을 다룬 책이다). "비극은 인간 존재를 움직이는 일련의 감정들을 합리적이고 보편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유사한 길을 가고 있다."(22쪽)란 내용이 뒤이어 나오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뒤집어 말하면, 철학은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말할 것이 없다.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역사에 대한 철학의 무관심은 18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전통을 지배"했던 것이다(주목할 만한 예외는 비코 정도이다).

대담자이자 해제의 필자인 보라도리가 '철학이 역사에 관해 말할 것이 있는가?'란 문제를 제기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하에서이다. 과연 철학은 9.11에 대해서 뭔가 말할 수 있는가, 란 의혹이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서양철학적 전통에서는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필자는 그러한 의혹에 맞서서 철학이 9.11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더러 말해야만 하는 책임까지도 진다고 주장한다. 데리다와 하버마스, 당대 최고의 두 철학자를 대담의 자리에 부른 것은 그런 취지에서다.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렇게 시작된다, 시작되어야 한다...

08. 01.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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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08-01-05 03:11   좋아요 0 | URL
또 하나의 통찰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8-01-05 09:34   좋아요 0 | URL
통찰은 철학자들의 몫이죠...
 

저녁에 서가에서 생각없이 빼어든 책이 안광복의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웅진지식하우스, 2007)이다. 아마도 새해초라는 '시간의식'이 '처음 읽는'이란 제목에 눈길이 가도록 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대학에서 소크라테스 대화법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즐겁게 철학하기'를 실천하고 있다고.

 

 

 

 

내가 처음 읽은 철학사는 예전에 적은 대로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문예출판사)였는데, 그게 고3 겨울방학 때였으니 21년 전 이맘때이다. 아마도 대학의 논술시험을 앞두고 있었던 듯한데, 합격자 발표 이전인지 이후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그런 와중에 읽은 책이 <철학이야기>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었다(<중국철학 이야기>란 얇은 책도 있었다). 지금의 고3 혹은 예비 대학생이라면 어떤 책을 '처음 읽는 철학책'으로 고를 수 있을까 생각해보다가 지난 달인가 검토해보려고 했던 책이 바로 안광복의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와 남경태의 <철학>(들녘, 2007) 등이었다(김민철의 <철학, 땅으로 내려오다>(그린비, 2007)는 아직 구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검토는 나중의 일이더라도 잠깐 펼쳐든 김에 두 권에 대한 간략한 인상을 적는다. 빌미가 된 건 얼핏 발견한 오류들이다. 별로 좋은 습관은 아니지만 여하튼 어떤 책을 읽든지 간에 오탈자와 오류들에 눈길이 가는 게 거의 습관이 돼 버렸다. 이걸로 밥벌이를 하는 건 아니지만 일종의 '직업병'이다(직간접적으로 책을 만드는 일에 관여해온 탓이다).   

"철학은 정신의 체조"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에서 모두 38명의 철학자를 다루고 있다. 체조의 38개 동작쯤 될까? 예상할 수 있는 바이지만 개별 철학자들에 대한 소개는 너무 소략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나 같은 독자를 염두에 둔 책은 아니니 나의 투정은 군소리에 불과하겠지만. 저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책은 <고교독서평설>에 연재한 '인물철학사'를 묶은 것이다. 거기서 초점은 '철학'보다는 '인물'에 더 맞춰져 있어서 각 꼭지는 대부분 개별 철학자들의 삶에 대한 요약으로 채워져 있다. "철학 사상을 이해하고 싶다면 철학자들의 삶을 먼저 꼼꼼하게 살펴보자"(5쪽)는 게 저자의 기본 입장.

나는 책의 마지막 꼭지부터 잠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해는 역사적이다'란 장이 다루고 있는 철학자는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1900-2002)이다. 첫문단은 이렇다.

"가다머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변할 때면 언제나 '그건 내가 잘 모르는 것'이라는 말을 먼저 했단다. 그는 우호적이고 개방적이며 관대했을 뿐 아니라, 더 알고 싶어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여든 살이 넘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을 때도, 당시에는 피라미 대학 강사에 지나지 않았던 로티의 강의를 열심히 청강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436쪽)

여기에 무슨 오류가 있는가? 마지막 문장이다. 가다머가 여든 살이 넘었을 때면 1980년대인데, 그때 작년에 세상을 떠난 철학자 리처드 로티(1931-2007)가 고작 '피라미 대학 강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건 또 다른 로티가 있지 않는 한 잘못된 정보다. 이미 50년대 말에 대학강단에 선 로티는 1961년부터 1982년까지 프린스턴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이후엔 버지니아대학의 인문학 석좌교수, 그리고 스탠포드대학의 비교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피라미 강사'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다머의 말버릇처럼 "그건 내가 잘 모르는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모를까.

 

 

 

 

알다시피 가다머는 2002년에 백두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주저인 <진리와 방법>이 국내에서는 완역되고 있지 않은 게 유감스럽다. 올해엔 그의 책이나 연구서라도 더 출간되면 좋겠다(국내 필자의 연구서 한 권은 예정돼 있는 듯하지만). 가다머의 책이라면 그의 자서전은 어떨까?

"가다머는 자신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였던 <철학적 수업시대>에서 배움에는 끝이 없음을 강조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끊임없이 대화하고 반성하여 철학적 깨달음을 얻는 삶은 지적이면서도 유쾌하다. 그러나 이는 충고하기는 쉬워도 자신이 하기는 어려운 인생훈이다."(444쪽)

이 <철학적 수업시대>와 함께 소개되었으면 싶은 책은 가다머의 예술론이다. 영역본으로는 <미적인 것의 현실 관여성과 그밖의 에세이>란 제목.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기에 조만간 소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란 기대를 가져본다.

한편, 번역가와 저술가로 종횡무진 활동하고 있는 남경태의 <철학>은 <처음 읽는 서양철학사>와는 레벨이 좀 다르다. '사유의 예술'로서의 철학을 즐기자고 제안하는 저자는 역사를 '현실의 역사'와 '생각의 역사'로 크게 나누고 이 '생각의 역사'를 철학사로 규정한다. "서양 철학사를 다룬 이 책은 서양 문명사를 구성하는 절반의 역사, 즉 생각의 역사를 일관성의 측면에서 정리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 책 또한 '철학 전문가'를 위한 책은 아니라서 "철학자나 철학의 갈래"를 깊이 파고 들지는 않지만, "구슬을 꿰듯 철학사의 '재료'들을 꿰어 맞추었다는 데" 미덕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상당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하겠다(책의 부제가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참고문헌은 물론 단 한 개의 각주도 달고 있지 않으면서도 인명의 경우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1951)' '라캉(Jacques Marie Émile Lacan, 1901-1981)'하는 식으로 장황하게 표기해주는 데서도 드러난다. 물론 인명사전을 들추거나 잠깐만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이긴 하지만.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의 경우다. 저자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1991)'(478쪽)라고 적어놓은 것. 올해로 탄생 100년을 맞은 레비스트로스가 이미 17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 그대로 생사람 잡는 오류이다(그가 죽을 때도 되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물론 기원전 3000년경부터 훑어내려오는 저자의 통큰 철학사 서술의 유창함에 견주어보면 '옥에 티' 정도라고 해야겠지만.

 

 

 

 

레비스트로스 얘기가 나온 김에 올해는 그의 주저들도 마저 소개되었으면 싶다. 대저 <신화학>이야 계속 나올 예정이라고 쳐도 "비록 소쉬르에게 선구자의 명예는 양보했으나 그의 언어학적 사상을 이어받아 구조주의의 기틀을 확립한 사람은 레비스트로스다."(478쪽)라고 할 때 근거가 되는 책, 곧 <구조인류학> 정도는 완역돼 나왔으면 싶은 것이다.

두 권 분량의 이 책은 예전에 <구조인류학>(종로서적, 1987)이라고 절반 정도만 소개됐었다. 이 거장이 타계하기 전에 한국어로 다시 읽어볼 수 있을는지?..

07. 0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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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3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3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림 2008-01-03 18:25   좋아요 0 | URL
네이버 레비스트로스 쳐보니 1991년 사망으로 되어 있네요. 네이버는 두산백과사전을 인용했고. 아마도 백과사전 자체가 잘못된 모양입니다.
네이버 만능주의라는 마수의 손길이 여기까지 미친 걸까요? 안그래도 아는 교수님께 전해들었는데, 교수님이 학생의 답변이 틀렸다고 지적했더니 학생 왈 "이거 맞는데요. 이거 네이버에 있는 건데요?' 라고 항변해서 쓴웃음을 지었다는 씁쓸한 이야기가 있네요..

로쟈 2008-01-03 23:26   좋아요 0 | URL
못 믿을 사전이로군요. 레비스트로스가 또 있나 봅니다.^^;

caline 2008-01-04 01:22   좋아요 0 | URL
네이버만이 아니라 의외로 레비스트로스가 91년에 사망했다고 표기한 책이 제법 되는것 같같군요.....일례로 시공 로고스총서 레비스트로서도 그렇게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레이트 한길사에서 나온책에서는 현재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있다라고 만 표기되어 있었던걸로 기억하는데..전 오히려 후자가 잘못된 정보인줄 알았다는...^^;

로쟈 2008-01-04 01:27   좋아요 0 | URL
제가 더 신뢰하는 쪽은 위키피디아입니다. 어디에서 사망했다는 얘기는 없는데, '사망설'의 출처가 어딘지 모르겠네요...

caline 2008-01-04 01:33   좋아요 0 | URL
어쨋든 구조주의 빠돌이로서 레비스트로스 영감님이 살아게시다니 괜히 흐뭇하네요..(웃음) 덕분에 러셀경은 장수랭킹 3위로 밀려버렸지만...

로쟈 2008-01-04 16:19   좋아요 0 | URL
'구빠'신가요? 요즘은 '포구빠'들만 워낙에 많아서.^^

테렌티우스 2008-01-05 01:16   좋아요 0 | URL
프랑스판 위키페디아에 1908년 11월 28일 출생 백세 생일을 앞두고 있다고 나오는 걸 보면 아직 안 죽은 거 확실합니다. 프랑스 사람이니 만치 죽었다면 최소한 지성계에선 난리날테고 그렇다면 위키페디아 불어판에 반영이 안 되었을리가 없으니까요...

(잠시후) 르 몽드 사이트에도 죽었다는 기사가 없는 거 보면 레비-스트로스 안 죽은 건 백 프로 확실합니다...^^

근데...철학자들은 좀 오래사는 경향이 있죠? 저도 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될라나...^^(썰렁~)

로쟈 2008-01-05 01:56   좋아요 0 | URL
요절한 철학자들도 있지 않나요?^^

테렌티우스 2008-01-06 00:47   좋아요 0 | URL
^^
 

자투리 시간에 기분을 낸답시고 서가에 있는 책을 임의로 꺼내 읽는 수가 있다. 수전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은 그렇게 꺼내든 것이고 예전에 조금 읽은 '시인이 쓴 산문'을 마저 읽었다(예전의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867577 참조). 본래 원저의 첫장에 배치돼 있는 이 글은 러시아의 여성 시인 마리나 츠베타예바(1892-1941)의 산문집 서문격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하다.

시와 산문의 관계에 대한(보다 구체적으론 산문에 대한 시의 우위성에 대한) 일반론에 이어서 손택이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라 한다면 특이한 종류의 산문이 발전했다는 것이다."(199쪽) 이때의 산문은 "주로 1인칭의 문장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성급하고 격정적이고 전후문맥이 생략된, 종종 일관성이 없고 문법에 어긋나는 산문을 말한다. 이런 산문은 주로 시인들이 쓴 것이다. 혹은 시적 창작 기준을 가진 작가들이 쓴 것이다."(200쪽)

어떤 시인들에게 있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을 하는 것이고 전혀 다른 목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엘리엇과 오든, 파즈 등의 비평과 저널적인 문화론 등은 아무리 뛰어난 글들이라 하더라도 '시인의 산문'(시인이 쓴 산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손택을 말한다. 하지만 이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 만델슈탐(1891-1938)과 츠베타예바의 산문이라고 그녀는 본다. 그들의 글이야말로 전형적인 '시인의 산문'이라는 것이다(두 시인의 시집들만이 예전에 번역/소개된 바 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되었다. 두 사람은 모두 20세기 러시아시의 거장들이면서 또한 산문의 대가들이다. 스탈린시기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도 공통적이다). '시인의 산문'은 뭐가 특별한가?

"시인이 쓴 산문에는 특유의 열정과 농밀함, 시적 정신이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시인의 산문에서만 볼 수 있는 주제도 있다. 그것은 바로 시인으로서의 사명감이다." 때문에 "시인의 산문은 전형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서사 구조를 취한다. 하나는 회고록의 형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이다."

(1)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 "자신이 모델로 삼는 사람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그들과의 결정적 만남의 순간(실생활에서든 문학작품 속에서든)을 환기하는 과정을 통해 시인은 자신의 자아를 판단하는 기준을 마련"한다.

(2)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산문은 주로 시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서전에서 묘사하고 있는 자아는 바로 시인의 자아이며, 일상의 자아는 가차 없이 희생된다. 시인의 자아야말로 진정한 자아이며, 다른 자아는 시인의 자아를 담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시인의 자아가 죽으면 그 시인도 죽는다."

아직 그녀의 산문이 한권도 소개되지 않은 상태라 자세히 늘어놓기는 멋쩍은데 아무튼 1939년 망명에서 돌아온 그녀가 1941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정도는 명기해둔다. 손택은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이런 애수어린 어조는 단지 추방이라는 츠베타예바의 개인적인 비극 때문만은 아니다. 1939년 소련으로 돌아오기까지(그후 1941년 8월, 그녀는 영원한 내면적 추방이라 할 수 있는 자살을 한다)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지독한 궁핍과 고독 때문만도 아니었다. 시인은 산문을 통해 늘 자신의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애도한다. 추억이 스스로 말하게 하거나 아니면 흐느껴 우는 것이다."(202쪽)

그러니까 손택이 보기에 츠베타예바의 산문에 나타나는 비가(엘레지)적 정조는 그녀의 개인사와 무관하게 '시인의 산문'이 갖는 본질적인 속성이다. 다소 유감스러운 것은 이런 내용을 따라가는 데 부정확한 번역이 눈에 거슬린다는 점. 인용문에서 괄호안에 들어간 문장은 "where, now an internal exile, she committed suicide in August 1941"을 옮긴 것인데, 역자가 '자살'의 등가어로 읽은 '영원한 내면적 추방'은 츠베타예바에 대한 규정이다. 물론 'an internal exile'은 '영원한 내면적 추방'이 아니라 '내적 망명자'를 뜻한다(파스테르나크 또한 그런 '내적 망명자'였다). 다시 옮기면, "소련에서 이젠 '내적 망명자'가 된 그녀는 1941년 8월에 자살했다." 아래는 1939년의 츠베타예바.  

 

츠베타예바에게 "시인이 된다는 것은 고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츠베타예바는 '가장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산문에서는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정적으로 고양된 분위기를 창아볼 수 있다. 어떤 현대 작가도 그녀처럼 자신의 감정을 숭고에 가깝게 경험한 사람은 없다."(203쪽) 마지막 문장은 "no modern writer takes one as close to an experience of sublimity."를 옮긴 것인데, 어디에서 "그녀처럼 자신의 감정을 숭고에 가깝게 경험한 사람"이란 번역이 나오는 것인지 알기 어렵다. 따라서 마지막 인용에 대한 결정적인 오역은 이미 예비된 것이기도 하다.

"츠베타예바는 이렇게 지적한다. '누구도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지는 못한다. 하지만 같은 책에 발을 두 번 담근 사람은 있지 않은가?'"

풀어서 얘기하면,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지는 못하지만 책에는 발을 두 번 담근 사람이 있다? 이 '어이없는' 오역 때문에 여기저기 검색을 하느라 손품을 팔았다. 원문은 "As Tsvetaeva points out, 'No one has stepped twice into the same river. But did anyone ever step twice into the same book?'"이고, 원문에는 출처가 따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푸슈킨과 푸가초프'라는 유명한 글에 나오는 내용이다(시인이 어릴 때 푸슈킨의 <대위의 딸>을 읽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글이다. 푸슈킨은 대개의 러시아 시인들에게처럼 츠베타예바에게도 우상이었다). '푸슈킨과 푸가초프'는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나의 푸슈킨>에 수록돼 있다.  

Марина Цветаева Мой Пушкин 

오역한 문장의 문맥은 이렇다: "There are books so alive that you’re always afraid that while you weren’t reading, the book has gone and changed, has shifted like a river; while you went on living, it went on living too, and like a river moved on and moved away. No one has stepped twice into the same river. But did anyone ever step twice into the same book?"

츠베타예바의 경구로 자주 인용되기도 하는 단락인데 러시아어 원문도 참작하여 우리말로 옮겨보면, "모든 책은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책을 읽지 않는 동안 책이 마치 강물처럼 사라지거나 달라지지 않을까 혹은 흘러가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책 또한 살아가며,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간다.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은 책에 두 번 발을 담근 사람은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요는 책 또한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우리는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같은 책'이란 없어요...

07.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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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23 03:52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한 명쾌한 지적 잘 읽었습니다. 이래서 더욱 번역본 사기가 저어된다는...ㅠㅠ
츠베타예바의 산문집 영역본은 일전에 올려주신 "A Captive Spirit"이 괜찮은가요? 한 번 읽어보고 싶어서 여쭤봅니다.^^
(왜 아직까지 러시아어를 배우지 못했던가, 이럴 때 가끔씩 후회가 됩니다...)

로쟈 2007-12-23 11:01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없는 책이이서 'A Captive Spirit'은 아직 못 구했습니다. 영역본이야 제가 판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죠(대개 저보다는 러시아어를 월등히 잘하는 양반들이 번역을 하니까). 러시아어까지 하시면 음악은 어떻게?^^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의 머리말을 읽다가 흥미로운 '오역'이 있어서 적어둔다. '오역'이라기보다는 '실수'라고 해야 할 텐데, 벤야민의 에세이 제목인 '번역자의 과제'가 갖는 중의성에 빗대자면 '번역가의 과제'에 충실하다 빚어진 '번역자의 실패'라고 할 만하다. 어제 잠시 들춰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앨피, 2007)에 나오는 한 대목은 이렇다.  

 

 

 

 

"드 만에 따르면 '번역자는 그 정의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어떤 번역도 늘 원 텍스트에 부차적인 것이고, 번역이 원전과 마찬가지의 일을 수행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번역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하고 있다. 벤야민의 독일어 텍스트 제목은 '번역자의 과제Die Aufgabe des Ubersetzers'이다. 여기서 '과제Aufgabe'는 '과제'와 '포기하는 자'(프랑스 투어를 포기하는 사이클 선수는 '아우프가베aufgabe'라고 불린다)를 동시에 의미한다. 따라서 벤야민의 텍스트 제목은 '번역자의 실패'로 옮길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번역자는 원전을 옮기는 일에서 늘 실패한다. 그리고 번역 자체는 늘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번역자는 원전을 제공하는 시인이나 예술가와는 다르다."(117쪽)

원론적으로 말해서 "번역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다고 하니까 역자가 머리말에서 실패하는 일이 이상한 것은 아니겠다. 그것이 거꾸로 말해주는 것은 '번역자의 과제'를 현재 수행중이라는 것일 테니까(모든 번역자가 갖는 느낌이겠지만 번역은 마치 장거리 사이클링처럼 고단하고도 지리한 자기와의 싸움인지라 언제라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머리말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여러분들이나 나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한다.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시작이 이렇다. 데리다는 이 두번째 문장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je voudrais apprendre à vivre enfin)"에 대한 자세한 검토(내가 '뜯어읽기'라고 부르는 것)로부터 자신의 발언을 시작한다(이건 거의 그의 스타일이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 우리가 정말 알게 될까? 우리가 정말 사는 법을, 그 전에 먼저 '사는 법을 배우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될까? 그리고 왜 '마지막으로'인가?"(9쪽)

'사는 법을 배우기'라고 옮겨진 불어의 '이상한 표어'는 'apprendre à vivre'를 옮긴 것인데, 특이하게도 불어에서 이 문구는 사는 법을 가르치다와 배우다,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며칠 전에 '공부'에 대한 짤막한 원고를 썼는데, 불어의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할 뻔했다. 가르치기와 배우기의 변증법!). 이것은 역자도 각주2)에서 설명해놓은 것이다(영역본에서는 첫번째 각주로 나온다) "프랑스어에서 'apprendre'는 '-을 배우다'는 뜻과 함께 '-을 가르치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번역 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용문을 옮길 때 역자는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다른 번역서들에서도 중의적인 의미는 모두 병기해주던 역자가 왜 이 대목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란 시작을 우리말로는 동어반복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실상 원문 자체가 '동어반복'이긴 하다.

"Apprendre à vivre. Etrange mot d'ordre. Qui apprendrait? de qui? Apprendre à vivre, mais à qui?.." 하는 식으로 'Apprendre à vivre'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맥상 둘은 의미가 같지 않다. 첫번째 'Apprendre à vivre'는 뒤에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서)?(Qui apprendrait? de qui?)'가 따르므로 '사는 법을 배우기'라고 옮겨야겠지만, 두번째 'Apprendre à vivre'에 뒤따르는 'à qui?'는 나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라(de qui?)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을 가리키는 '누구에게?'이다. 즉, 이렇게 돼야 한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서? 사는 법을 가르치기, 그러나 누구에게? 우리가 정말 알게 될까? 우리가 정말 사는 법을, 그 전에 먼저 '사는 법을 배우기/가르치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될까? 그리고 왜 '마지막으로'인가?"

영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To learn to live: a strange watchword. Who would learn? From whom? To teach to live, but to whom?.."(역자는 왜 영역본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요점은 불어의 Apprendre à vivre란 관용어가 To learn to live와 To teach to live란 의미를 둘 다 가지며 우리말 번역에서도 불가불 그렇게 따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문맥에서 독립적인 Apprendre à vivre는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데리다가 애용하는 '결정불가능성'의 또 다른 사례이겠다). 이 점은 데리다가 곧바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맥락 바깥에서 그것 자체만 놓고 볼 때, 문장이 없는 이 표어는 거의 이해불가능한 문구를 이룬다. 더욱이 그 관용어는 어느 정도까지나 번역될 수 있을까?"

'문장이 없는 이 표어'는 'ce mot d'ordre sans phrase'를 옮긴 것인데, 사전을 찾아보니 'sans phrase'는 '쓸데없는 말은 빼고' '간단 명료하게'란 뜻도 갖고 있다(영역본은 'sans phrase'를 따로 옮기지 않았다). '이 표어 자체로는' 정도의 뜻이면 충분할 듯하다('Apprendre à vivre'는 하나의 문장이기 때문에 '문장이 없는 이 표어'란 번역은 어색하다. '앞뒤로 따라붙는 문장이 없는'이라고 풀어준다면 모를까). 즉, 문맥 바깥에서(out of context) 'Apprendre à vivre'란  이 문구(관용어)는 거의 이해불가능하다(의미를 확정지을 수 없다).

한 가지 더 역자의 실수라고 할 만한 것은 인용문 안의 ('문맥'이란 말을 보충하는) 삽입절을 누락한 것. 원문으로는 "mais un context, toujour, reste ouvert, donc faillible et insuffisant'이 번역에서 빠졌다. 영역으로는 "but a context , always remains open, thus fallible and insufficient"이고 우리말로는 "하지만 이 문맥이란 것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에 틀리기 쉽고 불충분하다" 쯤이다. 다시 말해서 문맥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의미의 불확정성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서로에게 배움/가르침을 주고 받으며(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가?) 아무리 험한 길이더라도,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07. 10. 13.

P.S. 집에 돌아와 예전 번역본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에서 같은 대목을 찾으니 이렇게 옮겨져 있다: "사는 법을 배움: 이상한 구호이다. 누가 그것을 배웠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누구에게 배운다는 말인가? 누가 그것을 알고 있었던가? 우리가 사는 법을 알고 무엇보다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나 하는가? 그리고 왜 '궁극적으로'인가?.."  사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이런 대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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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2007-10-13 18:3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을 따라' 데리다를 언제 한번 읽어보자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로쟈 2007-10-13 19:12   좋아요 0 | URL
기분이 좋아지셨다니까 저도 좋군요.^^

hemiola 2007-10-13 22:14   좋아요 0 | URL
아. 아프렁드흐 아 비브흐요.. ㅋ 예전에 뽀네뜨(Ponette) 란 영화를 보다가 apprendre a vivre 란 대사를 보고 한참을 되새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apprendre a vivre... apprendre a vivre... 그런데 막상 한국말로 옮기려니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불어로 중얼거리기만 했죠. apprendre a vivre.. apprendre a vivre... 외국어를 느끼는 맛이란 이런 거 같아요. 직역이나 의역이나 오역을 떠나서 입에 붙고 리듬이 되고 살이 되고 그것이 때로는 사상이 되기도 하고, 어쨌든 좋은 말입니다. ㅋ

로쟈 2007-10-13 22:58   좋아요 0 | URL
네, 어쨌든 좋은 말입니다...

람혼 2007-10-14 02:24   좋아요 0 | URL
저도 apprendre의 번역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는데, 이런, 로쟈님께 선수를 빼앗겼군요.^^; "가르치기와 배우기"라는 제목을 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도 갑자기 오랜만에 떠오릅니다.^^

로쟈 2007-10-14 08:11   좋아요 0 | URL
꼼꼼한 번역에서 의외로 실수와 누락을 발견하게 되어 겸사겸사 페이퍼를 썼습니다. 디음부터는 선수를 빼앗기지 마시길.^^

yoonta 2007-10-14 11:59   좋아요 0 | URL
"사는법을 배우기"와 "사는 법을 가르치기"와 같은 관용어가 프랑스어에서는 중의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네요. '산다는 것'이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기도 하고 배우면서도 동시에 가르치기도 한다는 일상적 삶의 지혜를 반영하는 것 같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하여튼 늘 느끼는 거지만 로쟈님의 "뜯어읽기"도 보통 단수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로쟈 2007-10-14 12:44   좋아요 0 | URL
영역본과 대조해서 읽다보면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했을 대목입니다. 다만, 굳이 지적들들 하지 않거나 다른 일들에 바쁠 따름이겠지요...

balmas 2007-10-14 17:52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오식과 어색한 표현들이 몇 군데 눈에 띄어서 공지를 할 생각이었는데, 로쟈님이 오역도 찾아주셨군요. 첫 대목부터 오역이 나와서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모르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다행입니다. 로쟈님께 감사드리고, 어서 공지를 해야겠군요.

로쟈 2007-10-14 18:0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예전판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 번역 덕분에 데리다를 읽는 이들이 늘어난 건 고무적인 일이죠.^^
 

지난주에 최근 출간된 이광래 교수의 <해제주의와 그 이후>(열린책들, 2007)에 대한 촌평을 적은 바 있는데(http://blog.aladin.co.kr/mramor/1573384), 다소 부정적인 선입견에도 불구하고 한때 "프랑스 철학의 대변인 같았고 전도사와도 같았던" 저자의 근황과 식견이 궁금하여 책을 구입했다. 니체와 데리다 관련 대목만 약간 훑어보다가 한 문장이 목구멍에 걸렸다. '데리다의 해체실험들'을 다룬 장에 나오는 한 문단의 일부이다:  

"파리 고등사범학교 시절 심리학과 정신 질환 등 무의식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던 푸코와는 달리 데리다는 주로 의식철학, 그것도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가 학위논문을 후설과 현상학적 미학에 관해 쓰려고 했던 것만 보아도 그러한 그의 관심사를 쉽게 알 수 있다. 사실상 최초로 그의 이름이 실려 출간된 책도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 전통과 도입L'Origine de la geometrie. Tradition et introduction>(1962)이라는 번역서였다. 이 책은 후설의 본문보다 데리다의 서론이 다섯 배 정도나 많았으므로 번역서라기보다는 데리다의 후설 연구서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국 그는 이 책으로 '카바이예 철학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후설이나 현상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이외에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119쪽)

'데리다의 기원'이라고도 부름직한, 후설의 <기하학의 기원>에 대한 데리다의 번역과 해제는 내가 오래전에 영역본으로 읽어보려고 시도했던 책이고 또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어본도 '비싸게' 구입한지라 나름대로 '관심도서'라고 할 수 있다. 한데, 이 책에 대한 저자의 소개는 눈을 의심하게 한다. 책 전체에 걸쳐서 저자와 도서명에 원어가 병기돼 있는 건, 다소 번거롭고 독서를 방해한다 하더라도 출처를 명확하게 밝히겠다는 학술적 고려의 소산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단, 그것이 정확한 정보일 경우이다.

저자는 엉뚱하게도 'L'Origine de la Geometrie. Traduction et introduction'이란 원서명에서('Traduction et introduction à l'origine de la géométrie d'Edmund Husserl '이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Traduction'(번역)이란 말을 'Tradition'(전통)이란 말로 오기했다(introduction은 왜 '도입'이 된 것인지?). 그리고는 '전통'이라고 옮겼다! 저자가 책을 읽지 않고(심지어 안 갖고 있을 듯하다) 2차문헌에만 기대어 적어놓은 것밖에 되지 않는다.  

데리다가 후설 사후에 출간된 비교적 짧은 텍스트를 처음 번역 소개하면서 우리식의 '해제'를 붙였는데, 그 분량이 상식을 좀 넘어선다. 언급된 대로 '다섯 배 정도'나 많기 때문이다(러시아어본을 기준으로 하면 데리다의 서론은 거의 200쪽 가까운 분량이고 후설의 텍스트는 36쪽 가량이다). 하지만 덕분에 데리다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우수한 인식론 저작에 주어지는 '장 카바이예상'까지 수상함으로써 전도유망한 철학자로서의 첫 발을 내딛게 된다. 어쨌든 이런 식의 내용이야 '전통과 도입'에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냥 접수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나의 독서경험상 이런 사소한 꼬투리들이 많은 걸 암시해주며 또 많은 의혹을 낳는다(그러니 '침식주의'라 부를 만하다). 해서 앞뒤로 몇 페이지를 둘러보는데 116쪽의 데리다 인용문에서는 음소(Phoneme)와 문자소(Grapheme)은 번역 없이, 'Phonene나 Graphene'이라고 오기했다. 오타라 하더라도 너무 눈에 띄는 오타이다. 112쪽에서는 데리다와 카트린 클레망의 인터뷰를 싣고 있는 잡지 <아르크(L'arc>)를 '아르크Arch'라고 오기했다.

Жак Деррида Диссеминация La Dissemination

조금 뒤로 가보니 168쪽의 미주에서 저자가 <파종>이라고 옮기고 있는(보통은 <산종>이라고 옮긴다) 데리다의 'La dissémination'(1972)이 'La deissémination'이라고 오기됐다(이 경우엔 탈자가 생긴 게 아니라 특이하게도 첨자가 생겼다). 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산종>은 올해 러시아어본이 출간됐다(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도 올해 러시아어본이 나왔다). 

거기에 본문에서 저자가 "편집증세가 심한 네오-프래그머티스트'로 폄하하고 있는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는 'Richard Rotty'로 오기됐다. 찾아보기에서까지 'Richard Rotty'라고 표기된 걸로 보아 저자는 Rorty가 아니라 Rotty를 읽은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자면 끝이 없겠다. 내가 다 읽어보지 않았기에 저자가 이런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책을 썼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나의 '취향'은 이미 책을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데리다에 대한 저자의 판단처럼.

"데리다는 왜 실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었을까? 그의 농담은 진담에 대한 진저리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진담을 구토한다. 그는 늘 진담들을 해체하려 한다. 철학은 너무 오랫동안 '진담하기'에 주눅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 주눅을 벗어던지려 했을까? 그는 철학의 진담들을 모두 단두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외친다. 해체란 단두(斷頭)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그가 믿기 때문이다."(110-111쪽)

침식주의 또한 진담에 대한 진저리인 것이다...

07. 0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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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09-21 17:41   좋아요 0 | URL
서양철학을 열심히 공부한 이들 중 일부는 서양의 전통에 대한 외상으로 인한 반작용으로 동양의--그리고 한민족 고유의--전통에 대한 집착으로 빠지곤 하는 모습을 봅니다. 영국으로 유학갔던, 서양의 전통과 학문에 대한 위압감으로 정신병까지 얻었던 것과 같은, 소세키의 고민이 그대로 백년후의 한국에서 반복되는 것같은 기시감이 듭니다. 일본어로 일본의 근대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시대가 지나--중역의 시대였던-- 한국어로 학문을 해야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야 시작되는 근자의 '번역론'에 대한 무성한--하지만 별무실한-- 논의처럼 말이죠.

이광래씨도 그런 고민을 꽤 했던 듯합니다.
그가 습합習合 운운하며 한국의 서양철학 수용사나 일본 학문에 대해 연구한 것 역시 잃어버린 전통에 대한 집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서양 철학에 대한 공부를 이렇게 강박적으로 부인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이교수의 공부가 잃어버린(만들어진) 전통에 대한 집착이나 도취가 아니라, 동서양의 이분법을 떠나 보다 급진적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동서양의 이분법에 잘못 빠지면, 김두규씨처럼 전통풍수 운운하는 삼천포로 빠지지요.

강원대와 약간 관련된 지인의 말에 의하면, 이광래교수는 불어보다는 일어에 능하다고 하더군요.초창기 저작들도 일본어 저작들에 많이 의존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일본의 근대학문과 그 수용으로서의 한국의 근대 학문에 대한 연구가 나온다면 한국 학계의 많은 미스테리들이 풀리지않을까하는 의문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로쟈 2007-09-21 17:47   좋아요 0 | URL
저로선 그런 집착이나 유혹에 별로 기대하지 않는 편이지만(가령 박동환 교수의 '3표 철학'을 '숭배'하는 후학들의 모습이 저로선 퇴행 이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라도 학문적인 정확성/엄격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봅니다. 대충대충이 '동양적'이라고 강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책의 266쪽에서는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를 '찰스 앤더슨 퍼스'라고 표기하고 'Charles Sander Peirce'라고 병기해놓았네요(탈자가 있습니다). 이런 책을 진지하게 읽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09-21 21:38   좋아요 0 | URL
저도 공부는 많이 해보지 않았지만 열매님의 의견에 많이 동감이 되네요. 동양/한국 철학에 대한 너무 과한 강박증을 느끼는 사람들이 상당수 되는 듯해요. 서양 철학에 대한 무분별한 추종이나 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동양철학에 대한 강박증에서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는 때가 왔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