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에 알라딘 공부방 2기 강의가 있었다. '인문학으로 마음의 가난을 벗어나는 법'이 주제였고, 나는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2009)에 들어 있는 '늙어가는 느릅나무들'이란 글과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열린책들, 2008) 끝부분에 나오는 한 대목을 자료로 이용했다(이제 보니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가져온 걸로 오기했다). 그 대목은 옮겨놓는다. 밑줄긋기에 더 적합해 보이지만 '로쟈의 한줄'로 분류해놓으면서. 물론 그 한 줄은 '노르웨이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를 염두에 둔 것이다.  

 

전쟁(2차대전)이 터지자 나는 평화나 위안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찮은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어려운 시절에 인간이 필요로 하는 자부심을 찾아야 하겠기에, 다시 크레타의 산으로 갔다. 언젠가 나는 일요일 예배가 끝난 다음 성당 입구의 계단에 앉아서 남자다운 용감성을 찾는 방법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얘기하는 늙은 노병을 보았다. 「가능하다면 두려움을 부릅뜬 눈으로 빤히 보아라.」 그가 말했다. 「그러면 두려움은 겁이 나서 도망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지팡이를 들고, 어깨에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갔다. 독일군이 노르웨이로 쳐들어가 정복하려고 싸우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대낮에 프실로리티 기슭을 건너가려니까 사나운 목소리가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어이, 여봐요, 잠깐 기다려요! 하나 물어봅시다!」
머리를 들어 보니 어떤 남자가 커다란 바위에서 뒤로 물러나 고꾸라지듯 내려왔다. 그는 바위에서 바위로 성큼성큼 내려왔고, 그의 발밑에는 돌멩이들이 굴러 요란한 소리가 나서 산 전체가 그와 함께 무너지는 듯싶었다. 그가 늙고 덩치가 큰 양치기라는 사실을 이제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렸다. 무얼 알고 싶어서 저렇게 극성일가? 나는 궁금했다.

그가 가까이 와서 바위 위에 섰다. 겉으로 드러난 가슴은 털이 나고 김이 피어올랐다.
「이봐요, 노르웨이는 어떻게 되어 갑니까?」 그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는 어느 나라가 곧 정복되리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노르웨이가 어떤 나라이고, 어디에 위치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지 전혀 몰랐다. 그가 분명히 알았던 사실이라고는 자유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좋아졌어요, 영감님, 좋아졌어요.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다행이구먼.」 성호를 그으면서 늙은 양치기가 큰소리로 말했다.
「담배 태우시겠어요?」 내가 물었다.
「제기랄! 내가 뭣하러 담배를 피워요?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노르웨이만 별일 없다면 그만이지!」
그 말을 하고 그는 지팡이를 휘두르며 양 떼를 찾아 기어올라갔다.

그리스의 공기는 정말로 신성하고, 자유는 틀림없이 여기서 탄생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세계의 어느 농부나 양치기도 자유를 위해 싸우는 미지의 머나먼 나라의 시련에 대해서 그토록 고민하고 실감나게 의식하지는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자유란 자기가 낳은 딸이나 마찬가지여서, 노르웨이의 투쟁은 그 그리스 양치기의 투쟁이기도 하다.

10. 05. 20. 

P.S. 크레타의 양치기 노인이 아직 살아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봐요, 한국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비록 한국이 어떤 나라이고, 어디에 위치했으며,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지 전혀 모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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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e02 2010-05-20 13:21   좋아요 0 | URL
엊저녁 인문학 공부방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인용했다는데, 왜 전혀 기억나지 않을까....늙어가는 뇌를 탓했더랬습니다...ㅎㅎ <영혼의 자서전>도 읽어봐야겠네요. 수줍은 소년같은 첫인상은 의외(!)였습니다.....글에서 느껴지던 악동같은 분위기가 강의 중반 이후 살아나더군요.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치유불가능한 호모사피엔자들의 연대를 위한, 지속적인 글쓰기를 기대합니다.

로쟈 2010-05-21 09:40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조르바와 카찬차키스를 혼동했어요.^^ 제가 '소년'과 '악동' 사이에서 진동했나 봅니다.^^;
 

엊그제 강의 때문에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다시 읽었다. 거의 20년만에 읽은 셈이니 어렴풋한 인상 정도만을 갖고 있었을 따름이고, 세부적인 내용은 처음 읽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교재로 사용한 건 <인간실격/사양>(문예출판사, 2009[2003])인데,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잘못이었어요."
마담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우는 아주 정직하고 영리하고, 술만 그리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 천사같이 착한 아이였어요."(오유리)

이것만 읽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주인공 이름 '요우'는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해보건대, '요조'라고 해야 맞다), <인간실격>(민음사, 2009[2004])도 같이 읽은 게 화근이었다. 이렇게 끝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김춘미)

일어에서는 그런 표현도 쓰는 모양인데, '하느님같이 착하다'란 게 말이 되는지 궁금했다. '천사같이 착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도 같지만, 나의 직관으론 한국어에서는 가능하지 않거나 어색한 말이다. 다자이의 간략한 전기를 포함하고 있는 소개서 <자화상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살림출판사, 2008)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빠요."
태연스레,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무척 얌전하고 아주 눈치 빠르고, 그냥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나님처럼 착한 아이였습니다."(유숙자) 

짐작에 일어 원문은 '하느님같이'('하나님같이')로 옮겨질 수 있고, '천사같이'라고 옮기는 건 의역이 아닐까 싶다. 다른 번역본들을 조금 더 뒤져봤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빴어요."
그리고 마담은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짱은 온순하고 재치 있는, 거기다가 술만 안 마신다면... 아니, 술을 마셔도 정말 훌륭한 좋은 사람이었지요."(을유문화사판)  

"그 사람의 아버님이 나빠요."
마암이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제가 알고 있는 요조는, 정말로 착하고, 경우가 바르고,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면, 아니, 마셨다 하더라도, 하느님같이 착한 사람이었어요."(웅진지식하우스판)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요짱은, 정말 순진하고, 또 남을 생각하고, 정말이지 술만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마셨어요,... 하느님같이 좋은 애였어요."(제이앤씨판) 

작품에서 '인간실격자'로 지목되는 주인공 오바 요조에 대한 마지막 인물평이기도 해서 음미해볼 만한 대목인데(요조는 다자이 자신의 자전적 분신이기도 해서 이 인물에 대한 평가가 중요하다), 나로선 '천사같은 아이'와 '하느님같은 아이'의 의미가 동일하게 여겨지질 않아서 어떤 해석이 타당한지 궁금하다. 다들 일어라면 자신 있는 분들의 번역일 테지만, 이 번역만 갖고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혹 일어를 아시는 분이라면 댓글로 도움을 주셔도 좋겠다. 참고로, 오늘 팩스로 받아본 영역본의 마지막 대목은 이렇다.    

"It's his father's fault," she said unemotionally. "The Yozo we knew was so easy-going and amusing. and if only he hadn't drunk - no, even though he did drink - he was a good boy, an angel." 

인용한 건 1958년에 나온 영역본인데,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의 영역본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걸로 보아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지만, 여하튼 영역본은 "그는 천사와 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정도로 옮겼다. 사소한 문제에 과민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문학 전공자들은 원래 이런 문제에 예민하기 마련이다... 

10. 04.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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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정원 2010-04-09 00:40   좋아요 0 | URL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저는 전공자도 아니고 일어도 잘 모릅니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몇 자 적어봅니다.

1. 오유리 선생님의 '요우'도 틀린 번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문에는 '요짱'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건 다들 아시다시피 요조의 애칭입니다. '요짱'이라고 번역하는 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요조'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고, '요'(요우)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므로 요조, 요(요우), 요짱 모두 가능한 번역이라고 봅니다.


2. '하느님' '하나님' '천사'로 번역된 단어는 한국어로는 주로 '신(神)'으로 많이 번역되는 ’神様(kamisama)'라는 단어입니다. 원문대로라면 'kamisama 같은 착한 아이였어요(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라고 번역되는데요. kamisama를 어떻게 번역해줄 것이냐가 여기서 문제가 되네요.

'하느님 같다' '신 같다'라는 말 자체에 이미 완전한 인격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이므로 '마치 하느님 같은 아이였어요'라고 '착한'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번역할 수도 있다고 생각되네요...^^;; 아니면 '마치 천사 같은 애였어요'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로쟈 2010-04-09 00: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위키에는 이렇게 설명해놓았네요.
Kami-sama (神様) is the Japanese word for "deity". The word is used to indicate any sort of god, beings of a higher place or belonging to a different sphere of existence, or the Christian-Judeo God.
문화적 차이 같은데, 저는 '하나님같이 착한 아이' 같은 비유는 한국어 어법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종이정원 2010-04-09 01:13   좋아요 0 | URL
하느님 같은 사람, 이라는 말은 어색하게 들리지 않고 천사 같은 사람, 천사 같은 아이, 라는 말도 그닥 어색하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하느님'과 '착하다'는 일종의 연어로서 사용하기 영 어색한 것 같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처음 일본어 성경을 봤을 때 꽤 충격적이었는데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대목이 '태초에 '신(神)-kamisama도 아니었습니다-'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되어 있었거든요.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신이 '팔백만'이나 된다고 하니 절대자를 그 팔백만 신과 동등한 '글자'로 나타내는 듯해서 매우 재밌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답니다.^^

로쟈 2010-04-09 09:07   좋아요 0 | URL
영어에서도 마찬가지 같아요. 'he was like an angel' 정도로밖에는 옮길 수 없을 듯하니까요

조선인 2010-04-09 08:37   좋아요 0 | URL
번역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일본엔 착한 여우신도 있고, 나쁜 여우신도 있잖아요. 카미사마는 그중에서도 착한 쪽... 우리나라로치면... 금도끼 은도끼에 나오는 산신령 느낌이랄까?

로쟈 2010-04-09 09:08   좋아요 0 | URL
'착한 산신령 같은 애였어요'라고 하면 말이 되네요.^^

비로그인 2010-04-09 14:43   좋아요 0 | URL
원문은 이렇네요.
「あのひとのお父さんが悪いのですよ」
 何気なさそうに、そう言った。
「私たちの知っている葉ちゃんは、とても素直で、よく気がきいて、あれでお酒さえ飲まなければ、いいえ、飲んでも、……神様みたいないい子でした」

본문을 안 읽어봐서 맥락에 따라 인물의 성격에 대한 해석이 다를 수 있겠지만, 이 부분만 보면 성격묘사는 제이앤씨판이 가장 무난해 보여요. 하느님이든 천사든 굉장히 착해 빠진 인물과 호응하는 것도 그렇고요.

그리고 역시 본문에 기독교적 편향이 나타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차라리 "부처님같이 좋은/부처님 같은 애/이였어요"라고 하면 좀더 와닿았을 지도 모르겠네요. 작가의 종교 소속과 무관하게 일본인이 쓰는 '신'이란 관념은 현대 한국인만큼 곧바로 기독교적인 뉘앙스를 연상시키지는 않는 것 같으니까요.

이상은 모두 개인적인 느낌일 뿐입니다.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일어도 잘 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4-09 16:3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일본인이 말하는 카미사마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하느님-하나님은 아닌 것 같습니다.다신교의 나라인 일본이니까요.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네, 이런 대목에선 문화적 차이가 확연합니다. 생사관에서도 그렇지만...

리린 2010-04-10 05:11   좋아요 0 | URL
제 일어 경험에 따르면, 神(kami)란 딱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신령스런 존재에 해당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라면 원시 무속 신앙에서의 '하늘'쯤 될까요. 보통 '하늘이 지켜본다' 라거나 '하늘이 노하셨다'같은 표현에서의 경외의 대상에 해당하는...
(게다가 일본에서는 이런 류의 신적 존재에 대한 표현이 상당히 많으니까요. 굳이 '인간에게 해가 되는 쪽'이라면 '怪'에 해당하는 '모노노케'나 '아야카시'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그 둘이 실제 일본에서 거의 항상 '惡'의 영역이냐 하면... 또 그렇지는 않지요. 파고들면 재밌어요. 번역하기는 난감하지만. ^^;)
원문의 뉘앙스를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번역문의 호불호가 갈리는 경향도 있으니 섣불리 단정은 못하겠습니다만, 저 문장만 놓고 봤을 때 제겐 '문예판, 민음판, 웅진판'을 서로 참조하면 좋을 듯 하네요.

저는 윗분들 댓글 보면서 오히려 '마치 하느님같은 아이'라는 표현이 원문의 뉘앙스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느꼈어요. '하느님같은 아이'라고 하면 어쩐지 범접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이라서, 너무 고귀하달까요.

저는 대략...저 원문의 의미가 이렇다고 생각합니다.(어느 정도 의역해서)
"그이 아버지가 나쁜거예요. - 아무렇지 않은 양, 그리 말했다. - 저희가 알고 있는 요우는, 무척 솔직하지, 똑부러지게 야무지지, 거기에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죠, 마신다고 해도, ...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이 좋은 애였답니다."

'카미사마같이 착한 애'였다는 건 실제로 그가 어떤 완벽함(도덕성 혹은 인격)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일부러 깍아내릴 필요가 없는 그라는 존재 자체로 있는 것이 허용된다는 류의 (상대적)절대성을 품고 있는 말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뉘앙스로 치자면 말이죠. (이런 얘기엔 늘 조심스러워져서;;) 일본의 '카미'란 108신이라는 말처럼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서 '절대성'보다는 '일상성'을 근저로 하고 있으니까요.(그렇기에 '카미'는 언제든 선과 악을 오갈 수 있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지요.)

마담에게 있어 요우짱은 똘똘하고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미지가 강한 거겠죠, 분명. 그러니 남들이 뭐라든 그에겐 늘 좋은 아이로 남는 걸테구요.

비로그인 2010-04-11 09:42   좋아요 0 | URL
끼어들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번역본에 대한 평가가 달라서 굳이 말씀을 붙이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의 의역이 그렇게까지 필요한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지만 위 번역본들보다는 성격해석에서 원 단어의 뉘앙스를 살리신 것 같아서 자연스럽네요.

다만 다른 분들을 위해 단어의 원 의미와 뉘앙스에 대해서 조금 보충하고 싶습니다.

素直는 양심에 따른 말과 행동을 한다는 일종의 윤리적 덕목을 내포할 수 있는 '정직'(일어에 '정직하다'란 단어도 따로 있고요)보다는 더 직접적인 성질을 가리키는 편이죠. 아이들의 성격을 가리키는 데도 잘 쓰이듯이. '솔직'(이것 역시 '솔직하다'란 단어가 따로 있긴 합니다)은 '정직'보다는 더 나아 보이지만 저는 솔직하다는 말에서 느껴지는 당돌함이나 당당함 따위의 느낌을 素直에서 결코 느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일어 단어는 '고분고분하다', '부드럽다' 등과 연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온순하다', '얌전하다'가 가까워 보이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 싶고 '순수하다'도 그에 직접 상응하는 일본어가 있는데 본문 캐릭터 묘사에 따라 가능하겠지만 단어만을 놓고 보면 조금 튀는 감이 없지 않네요(素直를 일본사람들이 자주 쓰듯이, 인간에게 순수하다는 말을 자주 하는 이들에겐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지만).

気がきいて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야무지다'도 충분히 어울리지만 '야무지다'는 뭔가 자기 앞가름을 잘하는 식의 근면함(일종의 덕목)을 떠올리게 하는데, 과연 주인공이 그런 성격일까 궁금해지기도 하거니와, 気が利く는 '눈썰미가 있다', '세심하다' 따위가 더 어울려 보입니다. 특히 '세심하다'의 의미일 때는 대개 자신의 일에 대해서라기보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에 그렇게 할 때 술어로 잘 쓰는 것 같습니다. 위 번역들 중 '영리하다'는 利口だ와 혼동한 게 아닌가 싶고 '눈치 빠르다'는 약삭빠르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보태어지고(인물이 그럴 수도 있지만 이 단어만으로는 그런 뉘앙스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마담의 언어생활이 홍상수적이면 몰라도), '재치있다'는 영어도 amusing으로 번역된 걸로 봐서는 본문의 캐릭터 묘사를 통해 조금 의역한 듯하고, '경우가 바르고' '남을 생각하고'는 (본문을 읽지 않고 단어에 대해서 느끼는)제 생각과 가장 가깝지만 조금 순화된 번역어인 듯 싶습니다.

아무튼 본문을 직접 읽고 주인공의 행적을 좇아봐야겠습니다. 아울러 마담의 너그러운 연민에 대해서도 공감을 해야겠고요. 그럼 인간을 더 사랑할 마음이 생길라나요? 로쟈님은 어떻든가요? ^^

로쟈 2010-04-11 23:27   좋아요 0 | URL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리린 2010-04-13 13:12   좋아요 0 | URL
제레카폴님의 뉘앙스에 대한 설명에 동의합니다.
저도 저 문장에서 그 두가지 용어가 맘에 걸렸거든요. 참, 저는 '하느님같이'라는 표현이 일본 내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려고 하다보니 의역이 과해졌습니다.
(그나저나 다시 읽어보니 기존 번역본 전부 나름 고심한 흔적이 보여 한 두가지로 꼽는 게 잘못된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단지 저는 '솔직하다'는 표현이 한국에서 당돌한 이미지로 굳혀진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 선택했는데...이 부분은 개인에 따라 조금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군요.

'気がきいて'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확실히 일본에서는 '타인에 대한 배려'에 좀 더 가까운 세심함과 꼼꼼함을 일컫는 말이지요. 저는 마담이 요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린아이를 대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아줌마들이 아이들의 꼼꼼함을 칭찬할 때 쓰는 말로 '야무지다'를 골라봤습니다. 하지만 사실...불충분한 표현이죠. ^^; 제레카폴님 의견대로 '세심하다'가 사전적 의미로 걸맞으니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좀 더 이해하기 쉽겠네요.

비로그인 2010-04-13 15:07   좋아요 0 | URL
리린님 댓글 위에 있는 제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어디까지나 본문을 안 읽고 주관적으로 느낀 판단이니까요, 아마 '솔직하다'를 비롯해 기존 번역본들의 술어가 자연스러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하다에 당돌함 따위를 연관시키는(항상은 아니지만) 건 개인적인 경험에서 오는 편견일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서재 주인께서 번역과 관련해서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말을 꺼내볼 수 있는 판을 가끔 열어주시는 바람에 제가 좀 오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해하시리라 믿습니다. ^^

픽션들 2010-04-10 07:54   좋아요 0 | URL
리린님의 번역 제일 마음에 듭니다^^
 

번역 교정작업을 하다가 잠시 산책나가는 기분으로 <들뢰즈의 니체>(철학과현실사, 2007)에 소개된 참고문헌에 대해 몇 자 적는다. 흔히 <니체와 철학>이 들뢰즈의 대표적인 니체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책을 한국어로 완독한 이는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니체>의 역자인 박찬국 교수가 '옮긴이의 글'에서 적어놓은 대로 <니체와 철학>은 "니체의 사상을 어느 정도 숙지하지 않고서는 읽어 나가기 쉽지 않다." 두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번역 또한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들뢰즈의 니체>(원제는 그냥 <니체>)는 들뢰즈가 쓴 니체 해설서로 "니체의 생애부터 짚어 나가면서 니체 사상의 핵심을 간략하면서도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역자의 기대에 따르면, "짤막한 책이지만 독자들은 들뢰즈가 보는 니체 사상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엔 이조차도 과도한 기대이고, 니체 책 몇 권 정도와는 씨름해본 경험이 있어야 이 '해설서'에서 뭔가 얻을 수 있지 않나 싶다. 가령 니체에 관한 몇몇 평전 정도는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프란스키의 평전 외에 다케다 세이지나 미시마 겐이치 같은 일본 연구자의 책들이 요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리보다 연륜이 깊은 일본의 니체 연구를 슬쩍 참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니체>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들뢰즈가 제시한 '독일어 참고문헌'이다. 1960년대 중반에 그가 니체에 대한 재평가를 주도했던 만큼 니체 연구사에 대한 안목이 드러나기 때문. 그래봐야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달랑 네 권의 책을 그는 '참고문헌'에 올려놓았다. 칼 뢰비트의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1935), 칼 야스퍼스의 <니체>(1936), 오이겐 핑크의 <니체의 철학>(1960),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니체>(1961)가 그 네 권의 책이다. 이 중 국내에 어떤 책이 소개돼 있을까?  

강의록을 묶은 하이데거의 <니체>는 네 권 분량이며(영어본은 두 권짜리로도 나와 있다), 국내에는 두 차례 그 일부가 번역됐다. 박찬국 교수가 옮긴 <니체와 니힐리즘>은 이 중 4권을 옮긴 것으로 나머지 세 권은 1권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 2권 '영원회귀' 3권 '지식과 형이상학으로서의 힘에의 의지'이다(1권이 이성과현실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니체론은 많이 회자되지만 정작 그 전모가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데, 하이데거 전집이 번역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후설의 제자이자 하이데거의 제자인 오이겐 핑크의 <니체의 철학>. 절판됐지만 국내에는 오래 전에 <니이체 철학>(형설출판사, 1984)으로 소개된 바 있다(책의 소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지난달에야 입수했다). 하지만 전공자들에게서도 잊혀진 책인지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책세상, 2006)에 수록된 '니체 관련 국내 출판 목록'에도 빠져 있다. 발터 니그의 <예언자적 사상가>(분도, 1973)가 첫번째 연구서로 올라와 있는데, 절판된 건 마찬가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너무 무관심한 처사로 보인다. <니이체 철학>을 옮긴 하기락 선생의 니체 연구서 <니체>(1959)와 <니이체론>(1971)이 더 의미가 있을 뿐더러 출간된 것도 그보다는 빠르다.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는 추천도서 목록에 핑크의 책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다.  

핑크 책은 절판되어 도서관이 아니면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학술 서적 읽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이나 문체에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추천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 책들이 니체의 저서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부조가 아닌 환조로서 니체의 상을 조각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조각된 얼굴이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핑크는 원래 하이데거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존재와 생성이 유희로서 파악될 때, 니체는 이미 형이상학에 붙들려 있지 않다.” 유희하는 어린아이를 형이상학자로 볼 수 있는가.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의 “니체는 최후의 형이상학자이자 형이상학의 완성자다”라는 평가와 상반된다. 핑크는 니체의 세계관이 그 스승의 우려대로 ‘세계와의 대결과 투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핑크가 그리는 위버멘쉬의 이미지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위버멘쉬의 얼굴은 온화한 놀이꾼이지, 폭력을 휘두르거나 기술을 남용하는 거인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유희 속에서 니체 사상을 이해하지 못할 때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대립과 긴장의 관계로 포착된다. 이때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의욕함으로써 무언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시켜 주는 개별화 원리이자, 사물을 유한하게 만들어 주는 원리가 된다.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 대립과 투쟁을 야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반면 영원회귀는 이 모든 개별적 형식들을 분쇄한다. 그것은 모든 유한한 것들 속에 들어 있는 무한성이고, 개별적 존재자들을 관통하는 세계이다. 니체는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사이의 긴장을 더 높은 원리인 디오니소스의 유희 속에서 해소한다. 인간이 그 자신의 개별성과 유한성을 극복하고, 자신을 세계를 향해 개방할 때, 비로소 그는 자신도 우주적인 유희를 공연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니체론으론 <니체 생애>(까치, 1984)와 <니체와 기독교>(철학과현실사, 2006)가 번역돼 있지만, 정작 더 중요한 <니체>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일반 정신병리학> 같은 주저도 번역되지 않은 형편인 만큼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겠다.  

 

뢰비트의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도 가벼운 분량이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대신에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같은 책을 통해서 대략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뢰비트의 책으론 <베버와 마르크스>(문예출판사), 오랜만에 재출간된 <지식과 신앙, 그리고 회의>(다산글방) 등이 더 번역돼 있는데, 절판된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도 다시 나오면 좋겠다. 

아무튼 들뢰즈의 <니체>나 <니체와 철학>을 읽기 위해서도 이런 정도의 책들은 '배경'으로 소개됨직하다. 과욕일까?.. 

09.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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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5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5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ror 2009-11-15 18:28   좋아요 0 | URL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있군요. 하이데거가 쓴 '니체'라는 책이 영어로만 2권으로 나온 게 아닙니다. 하이데거 생전에 독일어로 2권으로 '니체'라는 책이 출판되었고, 하이데거 사후 전집판으로 4권으로 나온 것이죠. 지금도 하이데거 생전에 나온 2권짜리 '니체'도 여전히 독일어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하이데거 전집에는 니체 대한 책이 몇권 더 있습니다.
그리고 들뢰즈의 '니체'를 읽기 위해서 다른 철학자들의 저서가 필요한 것은 아니죠. 니체의 이해를 위해서 다른 연구서들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지나치게 들뢰즈가 슨 '니체'라는 책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군요.

로쟈 2009-11-15 18:47   좋아요 0 | URL
책과 권(Volume)은 다른 개념입니다. 영어본으로는 2권짜리, 4권짜리 두 종류가 있습니다. 독어본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2권짜리라고 해봐야 합본 형태이므로. 의미있는 차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니체에 대한 재평가를 가져온 것이 하이데거의 니체론과 들뢰즈 등 프랑스 철학자들의 니체론이라는 건 사실일 뿐이고, 국내에서 들뢰즈의 니체론이 갖는 인지도를 빌미로 독어권의 주요 니체 연구서가 번역되길 기대한다는 바람을 적은 겁니다. 평가야 각자가 하는 것 아닐까요?..

mirror 2009-11-15 19:05   좋아요 0 | URL
2권짜리와 전집판의 목차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내용까지 전혀 차이가 없는 지는 제가 모르겠군요. 두 판을 대조한 분들이 말씀해주셔야 할 듯 합니다.
평가야 각자 해야겠죠. 저의 관점에서는 니체가 들뢰즈에 종속되는 듯한 한국의 상황이 부적절한 듯해서 한 말입니다.

로쟈 2009-11-16 20:53   좋아요 0 | URL
적어도 영어본으론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푸파이터 2009-11-15 19:04   좋아요 0 | URL
제가 지난 30년 생을 돌아봤을 때, 저에게 가장 깊은 충격과 변화를 주었던 책이 바로 '니체와 철학'입니다. 이 책을 읽었을 당시 저는 군대에 있었는데요. 쉽게 이책저책 고르면서 독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니체에 대한 입문서는 전혀 읽지 않은 채 바로 이 책으로 뛰어들었지요(들뢰즈 관련 서적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탈근대철학 입문서 정도 읽었습니다) 철학을 좋아해서 나름 열심히 찾아보지만 내공은 일천한 공대생이었는데, 그래도 이 책은 정말 열심히 팠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과 희열을 얻었고요.

제 솔직한 생각으로는 다소 힘들더라도 다른 입문서를 접하지 말고 바로 이 책으로 뛰어드는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니체에 대한 입문서를 먼저 접해보는게 독자들에게 심적 부담은 덜어주는 반면, 그만큼 '니체와 철학'의 정수에서 이르는 길을 막는 보이지 않은 장벽이 될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요. 입문서를 읽고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해버리는 순간, 니체(들뢰즈)는 그만큼 더 멀어져버릴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세상을 구성하는 무한소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내용이고, 결코 쉬운 길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거든요.

이상 로쟈님의 서재를 눈팅하는 허접한 한 독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로쟈 2009-11-16 20:53   좋아요 0 | URL
<니체와 철학>으로 니체 읽기를 시작하는 건 특출하지만 좀 예외적인 경우 같습니다. 보통의 독자들에게 기대하긴 어려울 듯싶어요. 이심전심의 세계가 아니라면요...

mirror 2009-11-15 20:27   좋아요 0 | URL
제가 친분이 있는 니체 전문가 한분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의 두 개의 한국어 번역본(하나는 영어에서 번역되었고, 하나는 당시 프랑스에서 재학중이던 유학생이 번역했죠.) 모두 신뢰하기가 힘들다는 거였습니다. (이 발언이 근거 없는 명예훼손이 된다면, 곧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니체와 철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자의 이해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 책 자체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다른 외국어 본으로 독서를 시도하시는 것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1-16 20:51   좋아요 0 | URL
저도 영어본과 러시아본을 대조해보지 않으면 한국어본을 읽기 어렵습니다. 비단 이 책에만 한정된 건 아니지만요...

sophie 2009-11-16 10:5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라는 말에 혹해서 한 번 읽고 나니 산책을 한 번 더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니체>라는 제목은 같지만 저자가 달라서 <들뢰즈의 니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냥 니체라고 해도 좋을 뻔 했습니다. 저자를 확인하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인용하신 고병권님이 번역하신 내용은 대명사 '그'를 줄이고 핑크나 하이데거로 대체하면 이해가 한결 쉬울 것 같은데요? 특히 둘째 문단에서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의 ".." '는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가 ".."라고 평가한 것과 상반된다'라고 하면 독자가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전염병인가요? 사실 데리다, 들뢰즈.. 이런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제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네요. 인용문 마지막에 디오니소스 적 유희는 공감이 갑니다. 두루뭉실 하지요?

로쟈 2009-11-16 20:50   좋아요 0 | URL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대립/긴장관계에 놓이며 그것의 해결(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혹은 니체)의 과제가 되는데(승계호 교수의 해석이 자세합니다), 이 대립이 영원회귀에 대한 해설들에서 너무 쉽게 처리되는 감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하이데거나 뢰비트의 책이 번역되면 좋겠어요...

펠릭스 2009-11-16 20:23   좋아요 0 | URL
채칙을 맞는 말을 보고 감싸 안은 니체, 자신을 극복해가는 초인은 '그리스인 조르바' 같습니다. 조금 위험도 하지만,,,

로쟈 2009-11-16 20:47   좋아요 0 | URL
키잔차키스가 니체에 심취하기도 해서요...
 

컨디션 저하로 기운을 못 차리고 있다가, 저녁을 먹고 책더미 속에서 내주에 해야 할일을 챙기는 데만 두어 시간을 보냈다. 책상을 보니 다음주에 강의할 플라토노프의 <구덩이>(민음사, 2007)와 함께 어제 구입한 움베르토 에코의 책 두 권이 놓여 있다. 일들의 바다로 입수하기 전에 잠시 여담을 늘어놓고 싶어진다.  

이번에 나온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운 책은 <일반 기호학 이론>이었지만 교보에 들렀을 때 제목만 보고 같이 손에 든 책은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이다. '애서가' 내지 '독서가'로 분류되는 이들에겐 당연히 어필할 만한 제목. 한데, 표지도 맘에 들길래 나는 내용도 보지 않고 계산대로 갔고, 버스에서 책을 펼치고 나서야 책이 예전에 나온 <미네르바 성냥갑>(2004)의 신판이란 걸 알았다('미네르바 성냥갑'은 잡지 이탈리아의 '레스프레소'에 연재된 에코의 칼럼란 제목이다). 두 권으로 나왔던 <미네르바 성냥갑>이 이번 컬렉션에선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과 <민주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해치는가>로 각각 옷을 갈아 입은 것. 다행히 나의 에코 컬렉션에는 포함되지 않은 책이어서 크게 억울할 일은 아니지만 예전 그대로의 타이틀이었다면 눈길이 덜 갔을 것이다.  

제목이 궁금해서 찾아봤지만 책에는 표제가 된 칼럼이 따로 들어 있지 않았고 짐작엔 맨앞에 실린 '책이 삶을 연장시키는 이유'에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잠시 훑어보고 내가 밑줄친 대목. 인류가 최초로 의미 있는 소리들을 내뱉기 시작하면서 종족과 가족들은 그들에게 사회적 기억을 전수해줄 노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다고 지적하면서 그 덕분에 "이제 스무 살 젊은이가 마치 5천 년을 산 사람처럼 되었다"고 에코는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다.   

"오늘날 책은 바로 우리의 노인이다. 우리는 미처 고려하지 않지만, 문맹인 사람(또는 문맹은 아니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우리가 더 풍요로운 이유는, 그 사람은 단지 자신의 삶만 살아가고 또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우리는 아주 많은 삶들을 살았다는 데 있다."(19쪽) 

책을 읽는 의의로 충분한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그럴 듯하다(아주 새롭진 않다!). 책에는 그보다 더 '유혹적인' 타이들이 그득하다. '자신의 하찮음을 과시하는 방법' 같은 제목을 보게 되면 자연스레 눈길이 가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고, <일반 기호학 이론>에 대해 몇 마디 하자면, 이건 예전에 <기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1985)이라고 나왔던 책의 새 번역본이다. 역자는 이 책에 대해서 "영어판 A Theory of Semiotics(Indiana University Press, 1976)는 우리나라에서 <기호학 이론>(이론과실천, 1985)으로 이미 번역되었다. 이 번역본에서 일부 문제점들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기호학이 거의 생소한 분야였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다."(522쪽)고 적었다(출판사를 오기했다). 사실 기호학의 수용 초창기였다곤 하지만 흠이 너무 많은 번역서라서 이해할 만하더라도 결코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아직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에코는 이 기호학 이론 입문서를 영어로 먼저 집필하고 나중에 이탈리아어로 번역했는데, 출간은 이탈리아본이 1년 더 빨랐다고 한다. 이번에 나온 <일반 기호학 이론>은 이 이탈리아어판을 참조하여 영어본을 옮긴 것이다. 에코는 그 전에 <구조의 부재>(1968)란 책을 먼저 쎴는데, 불어판이나 러시아어판은 이 책을 옮긴 것이다. 그것이 이번 마니아 컬렉션에서는 원제를 살려 <구조의 부재>라고 재출간됐다. 예전에 <기호와 현대예술>(1998)이라고 번역됐던 책.  

  

소설가이기 이전에 철학자이자 미학자이면서 저명한 기호학자인 에코의 전모를 담으려고 하는 이번 컬렉션에는 '기호학자 에코'를 상기하게 해주는 책이 여럿 포함돼 있는데, 대표적으론 <기호: 개념과 역사>, <기호학과 언어철학>, <칸트와 오리너구리> 등을 들 수 있다.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에코가 <일반 기호학 이론>의 속편으로 쓴 것이다.   

 

<기호>와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예전에 출간된 바 있으므로(나도 그 책들을 갖고 있어서 이번 '마니아 컬렉션'판은 구입이 망설여진다. 책은 더 폼나게 나왔지만) 새로울 게 없지만, <기호학과 언어철학>은 반가운 책. 이 또한 예전에 <기호학과 언어철학>(청하, 1990)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다. 역시나 읽기에 어려움이 많었던지라 새 번역본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밖에 기대를 모으는 '뉴페이스'는 일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호의 개념을 추적하면서 완벽한 진짜는 완벽한 가짜와 통한다고 말하는 <가짜전쟁>, 텍스트 비평, 철학 및 기호학에 관한 글을 모은 <예술과 광고>, 그리고 언어와 사고에 관한 기이한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나간다는 <언어와 광기> 등이다(아직 컬렉션에는 포함돼 있지 않은데, 내가 궁금한 에코의 책 중 하나는 제임스 조이스를 다룬 초기작 <조이스의 시학>(1965)이다). 아무려나 이 책들은 여유가 닿는 대로 구입해볼 생각이다. 출판계에서는 국내의 ‘에코 마니아’를 1500명 안팎으로 추산하고 있다고 하므로 나는 그 '1500명 가운데 1인'이라고 해야겠다. 뭐, 책으로 천년을 산다는데 어쩔 것인가!.. 

09.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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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대안 시리즈’에 이어서 우석훈의 '생태경제학 시리즈'가 출간되기 시작했다. 네 권의 시리즈 가운데, <생태요괴전>(개마고원, 2009)와 <생태 페다고지>(개마고원, 2009) 두 권이 우선 1차분으로 나왔는데,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레디앙, 2009)까지 포함하면 그래도 세 권이다. 언론의 아무런 조명도 없이 '조용히' 출간되긴 했지만, 이 정도면 '작전'을 방불케 한다. 조용히 내딛는 걸음이지만 당차면서도 확고해 보인다.     

배송도 그렇고 책은 연휴가 지나야 보게 될 수 있을 듯싶다. 하지만,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소개와 목차를 통해 대강의 취지와 내용은 어림해볼 수 있다. <생태요괴전>의 부제인 '넓게 생각하고 좁게 살기'의 풀이가 이렇다.

과시적 욕구로 가득 찬 본능, 혹은 마케팅에 의해 급조된 욕망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는 삶은 ‘넓게 살기’다. 큰 아파트, 큰 건물, 대형 승용차 같은 것들이 이런 본능 혹은 욕망이 지시하는 방향이다. ‘좁게 살기’는 이와 반대되는 삶의 상징적 표현이다. 예전에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망했다. 세상은 넓지 않다.  

본능이 지시하는 과시적 소비의 욕구를 이기고 좁게 살려면 생각을 아주 많이 해야 한다. 한마디로 ‘넓게 생각하기’가 가능해야 좁게 살 수 있다. 넓게 생각하기란 어떤 것인가? 각자의 삶의 영역에 따라 다를 것이다. ‘좁게 살기’도 해석의 여지가 많다. 적게 먹는다고 라면을 주식으로 먹거나 햄버거 위주의 식사를 하는 것은 ‘싸게 살기’이지, ‘좁게 살기’는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좁게 살기 위해서는 아주 넓은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에게 “왜 너는 생태적으로 살지 않니?”라고 야멸치게 쏘아붙이며 잘난 척하라고 좁게 살기를 권하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높은 빌딩, 큰 차, 열관리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해야 개발요괴의 전성기를 극복할 수 있고, 다가오는 ‘희소성의 시대’에도 한국 경제가 무너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독서와 문화, 경험이 ‘넓게 생각하기’의 도구들임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247-8쪽)  

이 대목을 읽고 서가에서 빼온 책은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문예출판사, 2002)와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이다. 싱어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를 언급하는 대목이 생각나서다. '독서와 문화, 경험'이 '넓게 생각하기'의 도구라고 할 때, 특히 이런 책들은 '도구 중의 도구'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결국 돈이 문제다'(85-88쪽)라는 절에서 싱어가 인용하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돈은 '분리의 보편적인 기제'이다. "그것은 사람의 성격과 힘을 다른 무엇인가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추한 남자라도 돈이 있으면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곁에 둘 수 있다. 마르크스의 생각에 돈은 우리를 진정한 인간성에서, 그리고 우리 이웃에게서 분리시킨다."(마르크스의 말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참조한 것이다.)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의 이러한 생각을 입증해주는 심리학 실험을 싱어가 소개하고 있다는 점. 개인적으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의 하나였는데, 실험 내용은 이렇다. 두 대조군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한쪽에는 과제를 주면서 돈에 대한 문구를 중간중간 들려주거나 옆에 돈더미를 올려놓거나 각종 화폐가 나타나는 스크린세이버를 볼 수 있게 한다(이들을 '머니그룹'이라고 불렀다). 물론 대조군 피험자들에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머니그룹이 다음과 같은 행동 특성을 보였다. 

-어려운 과제를 주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해주면, 도움을 청하기까지의 시간이 더 걸렸다. 
-각자 의견을 갖지고 다른 참여자와 이야기하게 자리를 옮겨보라고 하면, 의자 사이의 거리를 가장 멀리 떨어지게 놓고 앉았다.
-남들과 함께하는 오락보다 혼자서 하는 오락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을 도우려는 자세가 덜했다.
-실험 참가 수고비로 받은 돈의 일부를 기부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가장 적게 기부했다.
 

즉 두드러질 정도로 이기적인 행동양식을 보인 것인데, 이런 면은 다른 사람의 과제 수행을 돕는 일에 통제 집단이 평균 42분을 썼지만 머니그룹은 25분만 썼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사회에서 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가족과 친구에 대한 의존도가 줄고, 개인은 보다 자족적이 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돈은 개인주의를 북돋우는 한편 공동체 의식이 점점 희박해지도록 만들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인간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넓게 생각하기'의 한 측면은 '돈에 대해 덜 생각하기'이고, '좁게 살기'에 한 방식은 '돈에 덜 의존하며 살기'이다. 혹은 거꾸로 '돈 안되는 일을 열심히 하며 살기'이다(이런 서재질도 한 가지 예다). '돈이 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의 목록을 늘려가는 것, 그것이 반자본주의적 실천이다. 물론 그런 실천은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란 말을 인사로 주고받고, 부동산과 재테크가 가족의 최대 관심사인 사회에서는 조롱거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시대는, 우석훈의 표현을 빌면, '개발요괴들'의 시대였다. 그리고 현재의 경제 불황이 시사해주는 것처럼 그 시대는 끝났다, 혹은 끝나가고 있다.   

돈은 우리에게 안락과 편익을 제공해주지만, 더불어 확실한 건 우리가 또다른 지구를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인류의 행복도, 영혼의 구원도 역시나 돈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해서, 필요한 건 방향전환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을 이렇게 비트는 건 어떨까. "돈을 목적으로서만이 아니라 수단으로서도 대우하라." 아주 당연한 요구이지만, 물신주의와 성장신화가 권력을 잠식하고 우리의 의식을 세뇌하는 시대인지라 새삼스럽게 들린다.  

아, 돈은 한가위 보름달도 살 수 없다!..  

09.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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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0-03 22:13 
    우석훈의 생태경제학 시리즈 출간 시작 — via 로쟈
 
 
2009-10-03 0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03 0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hilocinema 2009-10-03 09:54   좋아요 0 | URL
우석훈님의 경제대안 시리즈를 주위분들에게 선물해가며 같이 읽었던 기억이 그리 멀지 않은데, 생태경제학 시리즈가 출간되었군요! 여러권 사서 주위분들과 나누어야 겠습니다. 왜냐하면 우석훈님의 책은 혼자 읽고 지식을 흡수하는 책이라기보단 여러 사람이 책을 읽고 삶이 변화하여 실천이 필요한 책이니까요!


로쟈 2009-10-03 10:28   좋아요 0 | URL
네, 많이들 읽으면 이런 책이 더 많이 나올 수 있겠죠. '녹색 성장'이란 말의 허울도 되새겨볼 수 있겠구요...

무해한모리군 2009-10-03 12:4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아니었으면 출간된줄 몰랐겠네요. 어서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한가위 잘 보내세요.
싱글은 게으르게 뒹굴뒹굴

로쟈 2009-10-03 22:09   좋아요 0 | URL
신간 소식이야 검색만 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거구요. 유의미한 책이 제 때 나와주어서 반가운 마음에 몇 자 적었습니다. 연휴 잘 보내시길.^^

indipia 2009-10-05 20:02   좋아요 0 | URL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생태와 교육을 주제로 우석훈님이 좋은 책을 쓰신것 같네요. 읽을책이 저만치 밀린터라 근신하고 있었는데,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인 생태와 교육이라니..얼렁 사야겠어요. 그나저나 댓글달기 잘안하는데, 실천대목에서..아차 싶어 댓글달아요 ^^

로쟈 2009-10-05 20:4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댓글은 가끔 달아주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