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한줄'을 오랜만에 적어둔다. 아니 정확하게는 '로쟈의 한 단어'라고 해야겠다. 최근 번역돼 나온 <독일 비애극의 원천>(새물결, 2008)의 첫 페이지를 들춰보다가 발견한 '한 단어'이다. '인식비판적 서설'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벤야민 선집 6권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외>(길, 2008)에도 '인식비판적 서론'이라고 포함돼 있다. 각주에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최성만/김유동 옮김으로 2008년 중반에 한길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라고 돼 있다. 출간은 좀 미뤄지는 듯한데, 이 '서론'은 최성만 교수가 맡은 부분이고 한길사의 양해를 얻어 수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벤야민이 이 서설/서론에서 제사(에피그라프)로 끌어오고 있는 것은 괴테의 '색채론 역사의 자료'('색채론의 역사에 관한 자료')이다('자료'이니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국역본 <색채론>에는 빠져 있을 듯하다). 두 번역본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일단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건 한 단어이다. 두 번역을 차례로 옮겨본다.

"지식에는 속이 없고, 반성에는 겉이 없어서 지식에서든 반성에서든 전체는 엮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서 어떻게든 일종의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학문을 필히 예술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체성을 보편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것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예술이 언제나 전적으로 개개의 예술작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듯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학문도 역시 매번 전적으로 각기 개별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바에서 입증되어야 한다."(새물결, 11쪽)

"전체라는 것은 지식에서든 성찰에서든 조립될 수 없는데, 그것은 지식에서는 내부가, 성찰에서는 외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학문에서 모종의 전체성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 학문을 예술로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우리는 그 학문을 어떤 일반적인 것, 과도하게 넘쳐나는 것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고, 예술이 각각의 개별 예술작품에서 재현되듯이 학문 역시 각각의 개별 대상에서 그때그때 온전히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길, 145쪽)

말하자면, 이 대목은 벤야민 번역이 아니라 괴테 번역이고, 비교해서 읽어보다가 발견하게 된 건, 의아하게 생각한 건 강조한 두 단어의 차이다. 다른 부분들에서의 차이야 번역 문체상의 차이로 넘어갈 수 있지만 똑같은 단어를 '전체성'과 '학문'으로 다르게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제3자 대조를 위해서 영역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Neither in knowledge nor in reflection can anything whole be put together, since in the former the internal is missing and in the latter the external; and so we must necessarily think of science as art if we expect to drive any kind of wholeness from it. Nor should we look for this in the general, the excessive, but, since art is always wholly represented in every individual work of art, so science ought to reveal itself completely in every individual object treated.(Verso판, 27쪽)

문제의 단어는 this(이것을)로 번역돼 있다. 짐작대로 지시대명사다(그건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의 두 역자는 이 '이것'을 서로 다르게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맥상 무엇이어야 할까? 괴테가 이 대목에서 '기대하는' 것이 '전체성'이므로 '찾으려는' 것 역시 '전체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대목의 번역은 어느 한쪽이 수정되어야 한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의역/직역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과제'를 실행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08. 11. 07.

P.S. 참고로, 차봉희 편역,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에도 '인식비평 서론'이 번역돼 있는데, 같은 대목이 이렇게 옮겨져 있다. "지식은 성찰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것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전자에서는 내적인 것이, 후자에서는 외적인 것이 빠져 있으므로, 어떤 유형으로든지간에 우리가 학문에서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학문을 필연적으로 예술로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은 일반적인 것이나 전체적인 것 안에서 추구될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술이 늘 개개 예술 작품 속에서 구현되듯이, 학문도 역시 모든 개개의 분야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180쪽) 여기서도 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을 번역어로 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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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1-07 13:22   좋아요 0 | URL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Da im Wissen sowohl als in der Reflexion kein Ganzes zusammengebracht werden kann, weil jenem das Innre, dieser das Äußere fehlt, so müssen wir uns die Wissenschaft notwendig als Kunst denken, wenn wir von ihr irgend eine Art von Ganzheit erwarten. Und zwar haben wir diese nicht im Allgemeinen, im Überschwänglichen zu suchen, sondern, wie die unst sich immer ganz in jedem einzelnen Kunstwerk darstellt, so sollte die Wissenschaft sich als jedesmal ganz in jedem einzelnen Behandelten erweisen.

문제 삼으신 곳은 독일어에서도 역시 지시대명사 "diese"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인데요, 예를 들어 이 부분이 첫 문장에서처럼 "jenem(Wissen)"과 "dieser(Reflexion)"로ㅡ두 명사의 위치와 성이ㅡ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문맥이었다면 그것이 "전체성(Ganzheit)"을 가리키는 것인지 "학문(Wissenschaft)"를 가리키는 것인지 좀 더 확연히 드러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두 단어 모두 여성 명사라 "diese"가 지시하는 것을 명사의 성으로 따져보려는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는군요.^^;

다만 1) 문법적인 관점에서 "diese"가 그 이전 문장 안에서 가장 나중에 등장했던 단어를 받는 것이라는 원칙을 상기해본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말은 "전체성(Ganzheit)" 또는 "모종의 전체성(eine Art von Ganzheit)"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2) 내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학문 역시 예술의 방식을 따라 일반적인 것(das Allgemeine)과 과도한 것(das Überschwängliche) 안에서가 아니라 개별적인(einzelnen) 것 안에서 전체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역시나 "diese"는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두 번째 번역에서 "학문"으로 옮겨진 목적어를 '전체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학문' 정도로 이해한다면 내용적인 면에서 크게 어그러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축자적인 면을 고려하는 적확한 번역을 생각할 때는 두 번째 번역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1-07 23:26   좋아요 0 | URL
네, 짐작대로군요. 러시아어에서도 '전체성'과 '학문'이 모두 여성명사입니다.^^;

2009-03-03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랑구 2009-03-10 01:35   좋아요 0 | URL
로자님, 아직 책을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 권 부쳐드리고 싶습니다.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학문과 전체성 얘기의 힌트에 감사하는 마음에서요.
그리고 지난 번 글은 꼭 '비밀 댓글'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체크하는 난이 있기에 어리버리 체크하는 바람에..

최근에 제가 학생들과 스터디하면서 아감벤(남겨진 시간), 바디우(사도 바울), 랑시에르(미학안의..), 지젝(죽은 신..)의 글들을 죽 읽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벤야민이 간섭되고 있는 글들이고요. 그들이 서로 비슷한 측면을 공유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들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에게도 와 닿아야하는데, 그 점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서양 사상가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에 바쁜 우리, 그런 우리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로쟈님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좀 해보시길 권합니다.

아 참, 기술복제도 최근에 로쟈님 지적을 숙고하면서 좀 손질을 봤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감사^^ 그 때 제가 반응을 했었죠. 여하튼...

로쟈 2009-03-10 06:20   좋아요 0 | URL
아, 책은 바로 구입했습니다.^^ 내달에나 읽어볼 듯합니다. 여러 철학자들의 벤야민 커넥션에 대해선 좋은 글을 써주시기를!^^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마티, 2008)을 읽다가 이탈리아의 사상가 잠바티스타 비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사이드와 비코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019521 참조). 그래서 그의 <새로운 학문>(1744)을 비롯한 몇몇 관련서를 독서목록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관련자료를 잠시 검색해보다가 기사 하나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역사학자 조한욱 교수가 쓴 비코 학회 참관기이다.  

한겨레(05. 11. 25) 여기는 나폴리 역사학 주춧돌 앞에 서다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는 서양 역사학의 기틀을 세운 이탈리아 학자다. 서구는 물론 중국·일본의 학계에서는 그를 인문학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 삼는다. 그의 사상이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의식에 두루 영감을 줬다고 평가한다. 반면 한국에서 그 이름은 너무도 낯설다. 비코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한국 인문학의 바탕이 넓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가 글을 보내왔다. 지난 10일부터 사흘간(현지시각) 나폴리에서 ‘잠바티스타 비코: 중국,일본,한국’을 주제로 열린 국제 학술대회 참관기다. 그의 글이 비코에 대한 국내 학계의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마르코 폴로 탄생 750주년을 기념해 이탈리아 곳곳에서 방대한 학술대회가 열렸다. 마르코 폴로는 동서 교류의 문을 연 사람이니, 동서 문화의 융합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전체 학술대회의 초점이 맞춰졌다. 이탈리아의 동양학자와 이탈리아를 연구하는 동양의 학자들이 모일 기회가 마련된 것이다. 나폴리에서는 그들이 자랑하는 철학자 비코에 초점을 맞췄고, 나는 여기에 초청받았다.

비코가 누구이기에 이탈리아의 거국적인 행사에 그에 대한 국제 학술대회가 포함되었을까? 비코는 보통 시대를 앞서 태어난 천재로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수학적 지식만이 진리의 근거라고 여기던 시대에 그는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인간 사회와 인간의 역사가 연구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설파했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의 존립 근거를 확인해준 것이다. 그는 인간 사회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그 시대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찾았다. 원시시대에는 신화와 민담과 같은 것이 사람들의 언어였기 때문에, 한때는 무시당했던 그런 자료가 그 시대에 대한 이해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입구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코에게서는 ‘언어적 전환’, ‘담론 분석’, ‘상징적 해석’ 등등 현금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주류를 이루는 방법론의 선례를 찾을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 헤이든 화이트, 게오르그 가다머, 에드워드 사이드와 같은 인물들이 비코를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데카르트 과학적 방법론과 대적
열성가들의 간헐적이고 고립적인 노력으로 간간히 빛을 보던 비코는 1968년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심포지엄이 뉴욕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어떤 한 사상가를 기념하는 학술 대회로서는 최대 규모였던 이 심포지엄의 논문집은 1970년과 1973년 사이에 거의 90개에 달하는 학술 잡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후 미국과 나폴리의 비코 학회 주관으로 비코에 대한 학술대회가 거의 매년 열려 국제적인 학문 교류의 가교 노릇을 하고 있으며, 이번 학술대회는 올해가 갖는 의미를 고려하여 특히 이탈리아 정부의 지원 아래 거국적으로 열린 것이었다.

11월10일 오후부터 본격적인 발표와 토론이 시작됐다. 첫번째 주제는 ‘비코의 동양’이었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은 장롱시 홍콩 성시대학 교수의 발표였다. 비교문학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장롱시는 비코가 동서의 교차 이해에 한 축이 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비코의 원리야말로 다른 문화에 대한 미적인 감수성을 계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동서 문화의 융합에 초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논지였다.

11월11일 오전에 두번째 주제인 ‘동양의 비코 연구’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우에무라 타다오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는 비코의 <이탈리아인 태고의 지혜>를 번역한 노학자로서, 자신이 어떻게 하여 소렐과 크로체를 통해 비코를 알게 되고 마침내 후설의 안내로 비코를 새롭게 ‘발견’하게 됐는지 감명 깊은 여정을 술회했다. 마리오 사바티니 베네치아대학 교수의 ‘주광키안과 비코’가 이어졌다. 주광키안은 <새로운 학문>을 중국어로 번역한 사람이다. 사바티니 교수는 본디 미학 교수였던 주광키안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며, 니체와 크로체와 마르크스를 거쳐 마침내 비코의 <새로운 학문>에서 학문과 예술에 합당한 전망을 찾게 된 과정을 상술했다.

다음으로 나의 발표가 있었다. 한국에서 비코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역사학자들에 의해 이뤄져왔다고 밝히며 이종흡 경남대 교수의 책 <마술, 과학, 인문학>과 나의 학위 논문 <미슐레의 비코를 위하여>의 내용을 소개했고, 앞으로 비코 연구가 발전하기 위해 관심 있는 학자들의 연대가 필요하고, 원전으로부터 옮긴 비코 저서의 충실한 번역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후에 세번째 주제인 ‘비코의 테마에 따른 동양과 서양’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주로 언어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서 상형문자를 사용하는 중국어가 상징적으로 갖는 의미에 초점이 맞춰졌다. 가장 뛰어난 것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모라비아 대학교 정화열 교수의 ‘비코와 중국어원학 재검토’였다. 사정상 불참하여 다른 사람이 대독한 논문에서 그는 중국어를 분석하며 그것이 인간의 몸과 관련된 기호임을 증명했다. 몸과 관련된 언어란 모든 인류에게 공통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있는 언어다. 이러한 ‘문자 이전의 언어’를 통해 인류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비코야말로 자신의 시대를 훨씬 뛰어넘은 사상가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정 교수의 역량을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 영감의 원천
마지막 날, 장소는 나폴리 동양대학교로 옮겨 속개됐다. 전날 오후의 주제가 오늘은 역사, 인류학, 종교의 분야로 이어졌다. 이 학술대회 전체를 조직했던 다비드 아르만도 이탈리아 학술원 연구원이 동양과 서양의 봉건제도의 차이에 대해 발표한 뒤, ‘비코 시대 유럽 문화에 비쳐진 동양인의 성격’, ‘비코와 보쉬에에게서 보이는 유교’, ‘잠바티스타 비코와 노리나가 모토오리’와 같이 흥미로운 주제에 대한 발표가 이탈리아 학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발표 뒤 곧바로 비코를 동양어로 번역하는 문제에 대한 원탁토론이 벌어졌다. 비코를 직접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한 학자들이 체험담을 이야기했고, 나는 앞으로 비코를 원전으로부터 번역할 때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 말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학자들은 번역에 개재된 일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관중석과 질의응답이 있은 뒤 학술대회는 막을 내렸다.

학술대회는 낮에만 열린 것이 아니었다. 밤마다 만찬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많은 외국의 학자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이탈리아 철학을 전공하는 프랑스 학자인 피에르 지라르는 나의 발표에서 미슐레가 나오는 바람에 놀랐다고 말하며, 내가 인용했던 프랑스의 비코 학자 알렝 퐁스가 자신의 친구라고 한다. 가오이 베이징 대학교수와 나눈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모더니즘을 산업화와 동일시했다. 그 정의가 너무 협소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미적 모더니즘과 같은 것은 사소하다”고 말함으로써 산업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중국의 절박함 또는 부박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보였다. 어쨌든 한국과 중국의 프랑스사 전문가들이 함께 만날 기회를 마련해보자는 취지에는 공감했다. 키마에 도시야키 오사카대 교수와도 친해져, 내년 3월 오사카대에서 열리는 학술대회에 초청하겠다고 꼭 참석하여 달란다.

가장 친밀감을 느낀 인물은 가장 말이 통하지 않았던 우에무라였다. 작년에 뇌에 문제가 있어 거의 사경에 이르렀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그는 건강 때문에 부인이 동반했다. 부인은 젠더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우에무라는 내가 번역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한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 학문적 문제에 있어 나는 그와 공감하는 점이 많았고, 그의 삶의 태도에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한·중·일 학자 번역문제 공감
학술대회 틈틈이 크로체와 비코의 생가를 찾았다. 지금은 인문학 연구소로 쓰이는 크로체의 방대한 저택과 달리 비코의 집은 시장 속 좁은 길에 있었다. 50여 년 전 로버트 카포니리는 비코의 역사 이론을 다룬 저서에서 비코가 자라난 나폴리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폴리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분주한 삶이 좁고 꾸불꾸불한 길을 따라 들끓듯 소란스럽게 펼쳐진다. 낡은 성문 앞에서 행상인들은 팔 물건을 소리치고, 등뼈가 부러질 정도로 짐을 실은 당나귀들은 그에 못지않게 많은 짐을 진 사람들과 갈 길을 다툰다. 탑의 그늘에는 불쌍한 중생이 앉아 신과 행인에게 탄원과 구걸의 목청을 높인다.” 지금도 그 풍경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단지 당나귀 대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 나폴리에서 비코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비코는 자신에게 내려진 가혹한 운명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 신이 인류를 위하여 <새로운 학문>을 쓰도록 만들어준 기회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비코는 좁고 붐비는 시장 길에서도 방문객들에게 조금의 불편도 끼치지 않도록 관대하게 배려하는 나폴리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도시로 세계의 학자들을 불러 모은 나폴리 학자들의 애정 속에 살아 있었다.(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

08. 06. 15.

 

 

 

 

P.S. 비코 관련서는 몇 권 되지 않는다. 중역본 <새로운 학문>(동문선, 1997) 외에, 비코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한 박홍규 교수의 <처음으로 돌아가라>(필맥, 2005), 그리고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종흡 교수의 <마술 과학 인문학>(지영사, 1999), 그리고 이사야 벌린의 <비코와 헤르더>(민음사, 1997) 등이 내가 떠올려볼 수 있는 책들이다. 참고로, ‘비코의 동양’이라는 발표를 했다는 장롱시 홍콩 성시대학 교수는 내가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는 책 <도와 로고스>(강, 1997)의 저자인 듯싶다.

기사에 따라 비코 사상의 의의를 압축하면 "데카르트의 영향 아래 수학적 지식만이 진리의 근거라고 여기던 시대에 그는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이 알 수 있다”는 명제를 내세움으로써 인간 사회와 인간의 역사가 연구의 합당한 대상이라고 설파했다.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의 존립 근거를 확인해준 것이다." 정도가 되겠다. 사이드가 <저항의 인문학>에서 짚어주고 있는 요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코가 <새로운 학문>을 쓴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데카르트 학파의 명제, 즉 명백하고 분명한 관념들이 있을 수 있고, 이 관념들을 역사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속해 있는 실제 정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명제를 논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코에 따르면 이러한 종류의 생각은 개개인의 인문학자와 역사가 서로 관련되어 있는 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31쪽)

때문에 "인문주의적 지식과 실천으로부터 중립적이고 수학적인 학문을 도출하는 일은 무익"하다. 여기서 '데카르트 vs 비코'라는 구도는 '수학 vs 역사학', '철학 vs 문헌학'으로 변주될 수도 있겠다(지젝이라면 '관념론 vs 유물론'이라고 불렀겠다). 아무튼 현재의 '인문학의 위기'와도 관련하여 '데카르트적 학문'과는 다른 '비코적 학문'에 대해서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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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6-15 19:54   좋아요 0 | URL
오명가명 얼핏 이름만 듣던 학자였는데, 데카르트와 대립구도를 이루는 사상가였군요.
좋은 정보 얻어 갑니다: )
매일 들르며 흔적을 남길때마다 포스트와 상관없는 질문을 남기게 되어서 송구스럽지만. 사실은 오늘도 호기심을 참지 못해 들렀습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4970479X
헤겔 역사철학강의가 '새로이'(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번역된 모양인데 출판사에 대해 (특히 인문서적의 경우) 개인적으로 그리 신뢰가 가지 않아서요, 학계나 인문 출판계에서 이 번역에 어떤 평이 있는지, 혹 자문을 구할까 해서 글을 남겨요.
후후. 매력적인 책인데.. 혹시라도 번역(오역)으로 인해 허우적 거리고 싶지는 않아서요.

로쟈 2008-06-15 20:06   좋아요 0 | URL
제가 아는 한 별다른 서평은 나와 있지 않구요, 사실 전공자들은 번역서를 인용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오역서들에 대한 지적도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 삼성출판사에 나온 <역사철학강의>와 같이 읽으시면 좀 낫지 않을까 싶고, 영역본 등의 다른 번역본을 더 참조하시는 게 안전할 거 같습니다...

열매 2008-06-18 02:12   좋아요 0 | URL
책값이 싼 맛에--세로줄 2권짜리 삼성판이 읽기 불편하기도 해서--사서 비교해 읽어보았는데 가독성이 훨씬 좋습니다. 권기철씨의 <헤겔과 독일관념론>도 수월하게 참고할 수 있을 듯 싶습니다. 동서문화사 '세계사상'시리즈는 회복출판물들이라는데, 예전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적이 있었던 마치 서양백과사전처럼 두 단락으로 나누어 빽빽했던 전집인 것 같습니다. 재번역은 아닌듯하고 원로교수님들을 번역물을 다듬은 듯 합니다. 중역본도 있는데 <수상록>완역본 등 몇몇은 구입할 만 한듯 합니다.

로쟈 2008-06-18 21:3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몇 권 구입했습니다. 새 번역은 아니지만 저렴해서요.^^

redology 2008-06-18 20:19   좋아요 0 | URL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간에 나온 "주광키안"은 주광잠(朱光潛)을 말합니다. 현대중국어 표기인 주광첸(Zhu Guangqian)을 주광키안으로 읽은 것 같습니다..그의 국내 번역은 <시론>(동문선)이 있습니다.

로쟈 2008-06-18 21:36   좋아요 0 | URL
별로 중요하진 않더라도 아주 요긴한 정보인데요. 감사.^^

노이에자이트 2008-06-18 23:26   좋아요 0 | URL
데카르트와 비코의 대비는 서양사학사에선 널리 퍼진 등식 같습니다.콜링우드의 역사학의 이념에도 나오고요.트뢸치는 말년에 데카르트의 자연주의는 극단으로 가면 인간의 황폐화를,비코의 역사주의는 상대주의 특유의 허무주의를 가져오니 중용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구요.독일에선 비코를 낭만주의쪽에서 받아들였고 그래서 독일 낭만주의와 역사주의는 겹치는 게 많죠.그 대표가 헤르더죠.비코가 민족의 전승문화 쪽에 대한 방법론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많아서 영불에 비해 뒤떨어진 독일 지식인들이 자국의 옛 전승을 연구할 때 영감을 많이 받았을 겁니다.
헤르더가 리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사야 벌린이 헤르더에 관심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그쪽이 러시아 령이라서 슬라브에 대한 관심이 헤르더에겐 많았죠.

로쟈 2008-06-19 00:03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도 <전쟁과 평화>에서 헤르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맞습니다, 벌린도 리가 출신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6-19 00:59   좋아요 0 | URL
헤르더는 민족고유의 문화를 강조하긴 했지만 국수주의는 배격한 열린 사나이였죠.그래서 러시아 쪽에서도 호감을 가진 모양이군요.
비코는 헤르더가 독일에 소개했으니 미슐레가 프랑스에 소개한 것보다 더 앞서죠.미슐레는 헤르더의 VOLK개념을 수용했다고 합니다.우리나라의 민중개념과 비슷한 것 같아요.윌슨의 <핀란드역으로>에서 제일 처음 나오는 인물이 미슐레죠.

로쟈 2008-06-19 23:17   좋아요 0 | URL
'VOLK'는 영어로는 그냥 'people'로 번역되는 듯한데, 우리말로는 좀 애매한 거 같습니다. 철학쪽으로 오면 여러 번역어가 혼용되고 있어서요...
 

한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페이퍼 거리들을 묵혀두었더니 어떤 것부터 다루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밀린 일들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서재일'도 나름 일인지라 자꾸 신경을 쓰게 되는데, 여건이 되는 대로 하나둘씩 올려놓도록 한다(인문학과 정치철학에 관련된 몇 가지 아이템을 페이퍼로 적어놓으려고 하지만 조만간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 중 하나는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에 대한 것이다. 이 하이데거론의 원제는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지만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제목을 바꿔단 보람도 없이 거의 묻혀버린 책이다.

  

 

 

 

책을 손에 든 건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부르디외의 몇몇 책들, 가령 <실천이성>(동문선, 2005), <사회학의 문제들>(동문선, 2004), <파스칼적 명상>(동문선, 2001)을 들추게 되면서 덩달아 눈길이 갔기 때문인데(모두 영역본과 같이 읽는다), 최근에는 이 책에 대한 '촌평'을 비판하는 글도 접한 터라 예전에 무얼 어떻게 읽고 촌평을 단 것인지 확인해보려는 뜻도 있다. '하이데거와 함께 철학을!'(http://blog.aladin.co.kr/mramor/1039607)이란 페이퍼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 그리고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비판서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도 (원제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비판으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이 페이퍼 자체는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이 출간된 걸 계기로 그의 책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본 것이었고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와 마찬가지로 책에 대한 정보와 간단한 인상 정도를 나열하고 있다. 그런 '인상'이나 '판단'의 근거를 자세하게 밝혀놓지 않은 점이 불만스럽다는 의견도 가능은 하겠지만 전공자들도 하지 않는 유형의 '책소개'를 내가 이런 자리에서 떠안아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spec님의 비판은 이렇다(강조는 내가 해놓았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매혹적"이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차근차근 따라가도 팍팍하거나 멀미나지 않는다" 등등, 느낌들이 이어지지만 이런 느낌을 주게 한 이유, 즉 느낌을 뒷받침하는 알맹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 심히 유감입니다. '의견'도 아닌, 그야말로 '인상'인 셈이지요. 더구나 이런 식의 느낌 전달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가령, 부르디외의 <나는 철학자다>에 대한 촌평은 이런 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군요. 이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다행히 제가 이 책만은 불어판과 번역서를 다 읽어보았기 때문에, 과연 불어판을 조금이라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인지 정당하게 여쭐 수 있을 것 같군요. 일단 번역서만 보자면, 제가 보기엔 반대로 가독성이 상당히 높았고 더구나 지금까지 나온 부르디외 번역 중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이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팍팍하다'라고 '느낄' 수 있겠죠. 그러나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 '정신에 대하여'를 쓴 데리다와 더불어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고.

그러므로 로쟈님이 말씀하신 '팍팍함'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팍팍함'은 어떤 책을 평가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게 단지 번역에 해당되는 평가라면, 이 평가는 전혀 정당하지 않습니다. 확신컨데, 이 번역은 오히려 '유려합니다'! (다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라는 좋은 제목 놔두고, "나는 철학자다"라는 이상한 한글 제목을 단 것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이는 출판부수를 늘리려는 출판사의 농간일 것 같은데, 대중성이라는 미명하에 결국 좋은 책을 사장시키는 작태라 생각됩니다).

먼저, 책소개를 하면서 별다른 근거 없이 주관적인 느낌, 인상들만을 나열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다는 것. <철학입문>의 경우 ""하이데거가 1928~29년 겨울 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의록"으로서 지난 1996년 하이데거의 전집 제27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입문' 아닌가?"라고 나는 적었다.

거기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는 판단의 근거(?)로 내가 제시한 건 첫째,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라는 것, 즉 그의 모든 책이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기에 <철학 입문>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과 둘째, 게다가 '철학 입문서'라는 것, 그렇기에 하이데거 입문서도 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 이 두 가지이다. 이런 근거가 '알맹이'가 아니어서 유감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것인지? 기껏해야 하이데거의 책이 나왔다는 정보와 함께 읽어볼 만하겠다는 기대를 표시한 게 왜 위험하며 폭력적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자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놓는다'는 어떤가? 

라캉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책의 1장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한길사, 2001)에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풀어서 얘기하면 (1)지젝의 하이데거론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읽을 수 있다. (2)거기서 지젝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를 통해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3)이는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정도가 되겠다. 내가 덧붙여 설명하지 않은 것은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일 텐데, <존재와 시간>이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면서 철학사의 한 걸작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염두에 둔 것이다(보통은 완벽한 작품을 걸작이라고 일컫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젝이 말하는 건 '<존재와 시간>의 곤궁'이기에 그러한 상식을 뒤흔든다고 적은 것이고. 물론 더 자세하게 적을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다. 하지만 이만큼만 적으면 과연 위험하고도 폭력적인 촌평이 되는 것인지?

이제 부르디외로 돌아와서,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나는 적었다. 물론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왜 팍팍한지를 적었으면 좋았겠다(이건 나중에 역자도 시간이 좀 지나서 내게 요구했던 사항이었지만 따로 시간을 내질 못했다. 그땐 책도 못 찾았었고). '팍팍하다'는 표현은 '진도가 더디 나간다' 혹은 '읽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적었던 듯한데, spec님의 의견으로는 이 번역서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못된다. 왜냐하면 번역본은 부르디외 번역서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유려한 번역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번역본은 어떻게 하여 이 '팍팍한' 책을 유려하게 옮긴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라고 spec님은 적었다. 요컨대,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은 무진장 팍팍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데리다의 <정신에 대하여>와 함께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는 것. 여기엔 '팍팍하다'는 평가가, 즉 읽기 힘들다는 느낌이 책 자체의 가치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spec님이 읽기에 부르디외의 불어본 하이데거론은 국역본보다 훨씬 더 팍팍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다, 라는 것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팍팍하다'는 평 자체는 번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폄하가 아니다. 좋은 책이지만 읽기는 힘들다는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직접 대조해보지 않았기에 나로선 불어본에 비해서 더 팍팍하다거나 덜 팍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단지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적었다. 이 또한 위험하며 폭력적일까? 불어본이 어떤 편제로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역본은 매 페이지마다 각주가 달려 있어서(어떤 경우엔 페이지의 3/4이 각주로 돼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학술논문'이란 인상을 '팍팍' 준다. 거기에 부르디외가 독어로 인용한 단어들은 모두 우리말 번역 옆에 독어가 병기돼 있고, 불어와 한자어의 병기도 빈번하게 나온다. 어떤 텍스트가 잘 읽히느냐 마느냐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런 체제의 텍스트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읽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나보다 뛰어난 독해력을 갖고 계신 것. 어떤 이에게 수월하게 읽힌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수월하게 읽히는 건 아니다. 초반부의 한 대목만 다시 읽어본다.    

"장의 효과, 철학적 소우주의 특수한 강제가 철학적 담론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절대적 자율성이라는 가상에 객관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 가상은 철학 - 즉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 - 의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이나, 슈펭글러나 융거 같은 문필가들의 저작과 비교하는 일을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 흔히들 하이데거를 이 자들과 매우 가까이 놓고 언급하려 들곤 했겠지만, 이것은 오직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이라는 식의 추론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에서이다."(12쪽, 강조는 원문)

보통은 이런 대목을 만나면 내용이 머릿속에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영어본도 같이 참조한다(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지만 아쉽게도 나는 구입해두지 않았다). 이 대목은 이렇게 영역돼 있다: "Paradoxically, the 'field' effect, that is the effect operated on the production of philosophical discourse by the specific constraints of the philosophical microcosm, is just what gives an objective basis to the illusion of absolute autonomy. This effect can be invoked to prohibit or reject a priori any comparison of the work of Heidegger, a conservative revolutionary in philosophy (that is, in the relatively autonomous field of philosophy), with the works of economists like Sombart and Spann or political essayists like Spengler or Junger, who would appear to be temptingly similar to Heidegger, if this were not precisely the kind of case where it is impossible to argue in terms of 'other things being equal'."(강조는 나의 것)  

'장(champ, field)'이란 건 부르디외 고유의 용어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 영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철학 또한 하나의 '장'이다. 때문에 장의 효과, 장으로서의 효과를 갖는다. 그 효과란 철학은 외부(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는 환상, 곧 '절대적 자율성'이란 환상에 객관적 토대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나대로 옮기면, "'장'의 효과, 즉 철학이란 소우주의 특수한 제약들이 철학 담론의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철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이라는 환상에 객관적인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어지는 문장의 주어를 국역본은 '이 가상'으로 봤는데, 영역본에 따르면 '이 효과(this effect)'이다(의미상 큰 차이가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두번째 문장을 옮기면, "이 효과는 철학, 곧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에서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들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들과 비교하거나, 다른 조건들이 같다는 조건하에 슈펭글러나 윙어(융거)와 같은 정치 에세이스트들이 하이데거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걸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게끔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는 철학자의 저작을 경제학자나 에세이스트의 저작과 동급에 놓고 비교하는 걸 금지하거나 거부하는데, 그럴 경우에 철학이란 장이 갖는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건 '환상'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하이데거 읽기의 방법론을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한다(부르디외 사회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된다. 그것은 우선 텍스트를 그것이 생산된 가장 일반적인 상황으로 곧바로 환원해버리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철학적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 또 이 주장과 상관적으로 모든 외적인 참조를 거부하려는 방식 역시 거부한다."(12-13쪽)

"Any adequate analysis must accommodate a dual refusal, rejecting not only any claim of the philosophical text to absolute autonomy, with its concomitant rejection of all external reference, but also any direct reduction of the text to the most general conditions of its production." 

영역본으로 미루어 보아 원문은 한 문장으로 돼 있을 텐데, 역자는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 그건 독자의 가독성은 어느 정도는 고려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덜 팍팍하게 읽힌다. 그런 고려를 조금 더 밀고나가면 이렇게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영역본의 중역인 만큼 다소간의 편차는 있을 것이다).

"모든 적합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를 잘 조화시켜야만 한다. 즉 철학 텍스트를 그 생산의 일반적인 조건들로 막바로 환원시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철학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그 외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부르디외가 제안하는 독해 방법은 이렇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호성에 따라 규정되는 글, 말하자면 두 정신적 공간에 대응하는 두 사회적 공간에 준거하여 규정되는 글에 대해서는, 철학적 독해와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적 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13쪽, 강조 원문)

이러한 '이중적 독해'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치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이데거 철학을 비난하는 비방자든, 나치참여와 하이데거 철학을 분리시키는 찬양자든 다음과 같은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 말이다."(14-15쪽, 강조 원문)

여기에 부르디외 하이데거론의 요체가 정리돼 있다. 나치와의 연루를 이유로 그를 거부하는 하이데거 반대자들이나 그의 나치 동조와 철학을 분리키시는 하이데거 옹호자들이 모두 놓치고 있는 점을 자신이 이 책에서 입증해 보이겠다는 것. 그것은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불과할 수도 있었다'? 영역은 이렇다: "Heidegger's philosophy might be only a sublimated philosophical version, imposed by the forms of censorship specific to the field of philosophical production, of the political or ethical principles which determined the philosopher's support for Nazism."

부르디외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1)하이데거의 정치적 혹은 윤리적 원칙은 그를 나치즘에 대한 지지로 이끌었다. 즉, 그의 나치 연루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2)하지만 그러한 입장을 철학 담론으로 전개할 수는 없었다. 철학 장의 검열 때문에(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작업'과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부르디외가 직접 프로이트의 용어를 쓰고 있기도 하고). (3)이러한 곤궁의 타개책으로 하이데거는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원칙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정치적 존재론'으로 재해명된다. 그것이 부르디외가 의도하는 바이다. 다 따라 읽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도는 '상식'으로 챙겨둘 만하다...

08. 04. 20.








P.S. 하이데거와 나치즘에 대한 상세한 분석/해명은 박찬국 교수의 연구서를 더불어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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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21 09:14   좋아요 0 | URL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최대한 읽겠다는 읽고 싶다는 읽어야 한다는 욕구나 희망 부담감 따위 전혀 없이 가끔은 심장이 가렵도록 읽고 싶은 책들을 봅니다.이를테면 에밀 시오랑처럼 말입니다. 몇 권의 책을 함께 주문했는데 이번에도 모두 흡족하진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겐 로쟈님의 페이퍼 이상이 아닌 책들도 많습니다. 저는 가끔 로쟈님의 페이퍼를 옮겨적으며 봅니다. 치매 예방에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뀐 그림이 썩 좋네요. 그런데 사진이 아니라 그림인가요? 언제나 그림이 아주 잠깐 비치고 페이퍼로 덮여서 볼 수 없는데 바탕그림을 보는 방법은 없나요? 몹시 헝클어진 새둥우리 같은 남자의 뒷통수를 좀 오래 보고 싶어서요.ㅎㅎ

로쟈 2008-04-21 10:10   좋아요 0 | URL
독일 풍경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국내에 화집도 나와있고요.^^ 수즈달 풍경사진이 가을 것이어서 교체한 것인데, 사이즈들이 다들 안 맞아서 결국 이 그림으로 가게 됐습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마음산책, 2006)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의 소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2003)이 근간될 예정이다. 러시아어 고유명사의 교정 일 때문에 원고를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가령 '올리가 몰리소브나'를 '올가 모리소브나'로 고치는 일이 그 '교정'이다), 부록으로 실린 대담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서 미리 옮겨놓는다.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대담자인 이케자와 나츠키는 <이라크의 작은 다리를 건너서>(달궁, 2003)의 저자다.   

■ 사회주의는 인간을 상품화하지 않는다

이케자와 ‘사회주의’라는 말은 이제 시들해진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역시 저는 젊었을 때 사회주의를 믿었고 이상주의의 깃발로서 사회주의는 분명이 있었어요. 이 책에서는 그것을 단점도 포함해서 자세히 쓰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알제리에서 온 아이가 자신의 나라가 해방되어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되어 돌아가잖아요. 식민지로부터의 탈피라든가, ‘자유’와 ‘해방’이라는 말이 이렇게 빛을 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네하라 최근 이라크의 전쟁 상황이 좋지 않고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일이 많아진 미국의 백악관에서 그 옛날, 프랑스에서 상영금지가 되었던 <알제리 전투>가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그 <알제리 전투> 영화를 보면 언제나 알제리의 알렉스를 떠올립니다. 영화 마지막에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획득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때 프라하의 학교에서 기뻐했던 일이 떠올라요. 베네수엘라의 게릴라의 아들은 부모님과 귀국한 뒤 바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소리 내어 울었어요. 소련이라는 나라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미국의 일원적 지배가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존재가 있음으로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 운동체가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이 이상한 짓을 하면 소련이 뭐라고 하고, 소련이 이상한 짓을 하면 미국이 뭐라고 하는 냉전시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주 좋은 면도 있던 것 같습니다.

이케자와 적어도 자본주의적인,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는 것을 체크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구조라는 것은 기능하고 있던 거죠. 점점 무너졌지만요.

요네하라 그리고 예를 들면, 발레같은 예술이 서방으로 가면 상품이 되어버리죠. 상품이 되어 교태를 부리며 망가져 가요. 소련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리고 재능에 대한 오해와 질투가 거의 없었어요. 세계 최고의 첼로 연주가라는 로스트로포비치의 통역을 한 적이 수차례 있는데, 그가 망명한지 16년이 되었을 때, 죽어도 좋으니까 러시아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는 콘서트가 끝난 뒤 보드카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우는 겁니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은 재능이 있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좋아하고 지지해줬는데, 서방으로 온 순간, 엄청난 방해와 질투가 있고, 자신은 이러한 세상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재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것이죠.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들어가서 자신은 별로 연습하지 않는데도 아주 잘 켜고,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거라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지만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기에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인 거죠.

이케자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나요?

요네하라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프라하의 학창시절을 떠올렸는데, 노래나 그림이 뛰어난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들이 당신들 일인 양 호들갑스럽게 기뻐하고 학생들도 그 아이와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공기로 숨을 쉬는 것만으로 아주 행복해지거든요.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아주 기뻐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 느낌이 일본으로 돌아온 순간 없어졌어요. 종이에 써진 시험지로 모두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잖아요. 객관식이나 ○×로, 누가 대답을 해도 똑같은 답이 되요. 자신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각을 갖지 않도록, 절대 갖지 않도록 일본의 교육은 만들어져 있어요. 기계도 채점할 수 있는 시험을 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개개인이 모두 다르니까 그것을 발견해주는 것은 선생님과 반 학생들의 역할이죠.

이케자와 하긴 그것이 이 나라의 답답한 점이죠. 경쟁사회가 지닌, 사람이 자로 측정된다는 전제의 답답함. 모두 숫자로 바뀌어 버리죠….

요네하라 사람을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 점이 사회주의의 좋은 점 같습니다.

갑자기 왜 이 대목이 생각이 났나 짚어보니 아침에 읽은 서경식 교수의 칼럼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눈'에 연재된 '인간의 ‘기계화’에 저항하기 위하여'(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1276.html)에서 필자는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 2007)의 서문을 한번 더 떠올리고 있는데, 아래의 대목이다.

“… ‘기계화’ ‘야만화’의 추진력은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경쟁원리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원리가 관철되는 사회에서는 학력이 살아남기와 사회적 상승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경향에 작금의 신자유주의적인 조류가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모든 업적을 수치화하고 단기간에 평가하며, 그것으로 불합격 낙인이 찍힌 사람은 무자비하게 낙오당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원칙이다. 이것은 일본 사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아마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의 독자에게 읽히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을 ‘기계화’하고 ‘야만화’하는 추세에 대한 저항을 꾀하는 것이므로. … 한국 국민은 어떨까?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시민혁명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일본과는 다르다고 나의 한국 지인들은 말한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과연 안심해도 괜찮을까?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한 인간의 ‘기계화’ ‘야만화’로 발밑의 대지가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요네하라 여사의 발언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기계도 채점할 수 있는 시험을 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알다시피 지난달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전국단위 일제고사가 치러졌는데, 그 또한 기계로 채점하는 시험이었을 것이다. 이미 OMR 카드 등을 이용한 시험에 익숙해져 있어서 나부터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일이다! 편의상으로나 여러 가지 사정상 그게 불가피하다 치더라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상실한다는 것은 얼마나 '교양 없는' 일인가. 아이의 시험성적에 일희일비하는 대다수 학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무엇이 진짜 교육인가에 대해서...

08. 04. 13.

P.S. 책은 <올가의 반어법>(마음산책, 2008)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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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3 22:20   좋아요 0 | URL
서경식 씨가 얼마 전 한국은 이제 민주화 경력이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며 개탄하던데...참..착잡하더군요.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대단한 책'은 정말 대단하던데요.역시 동유럽이나 구 소련 권에 대한 책들에 대한 좋은 정보가 많아서 좋더라구요.로스트로포비치의 회고는 경청할 만하네요.대체로 망명한 공산권 예술가나 지식인... 하면 뭔가 공산권을 비난할 건수가 없나 하고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데...로자 님이 요네하라 여사의 책의 교정을 보게 되었군요.그런데 이 분은 좀 일찍 저 세상에 가셨더군요.아직 한참 일할 나이인데...

로쟈 2008-04-13 22:27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좀 애석한 일입니다...

사량 2008-04-15 12:59   좋아요 0 | URL
'집값'과 '자녀의 학벌'에 미쳐 있는 이 나라 "대다수 학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볼"지 의심스럽습니다. -_-;

로쟈 2008-04-15 21:42   좋아요 0 | URL
자녀들을 정말 사랑한다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죠...
 

몇 권의 책을 살펴보려고 대형서점에 갔다가 손에 든 책은 리처드 레인의 <장 보드리야르>(앨피, 2008)이다. 덕분에 상기하게 된 거지만 어제가 작년에 세상을 떠난 보드리야르(1929-2007)의 기일이었다. 또 그 덕분에 떠올리게 된 건 작년 이맘때 급하게 청탁을 받아서 쓴 추모기사다(http://blog.aladin.co.kr/mramor/1082396). 몇몇 적임자가 거절하는 바람에 나한테까지 연락이 왔었고 또 어지간한 청탁은 거절하지 않는 편이어서(대신에 기한은 잘 못 지킨다) 나대로 또 '작문'을 했던 것. 레인의 책은 그때 참고하기 위해 교보에서 구입했었다. 국역본을 손에 든 건 그런 인연에서다(지난번에 나온 <리오타르>도 나는 바로 완독했다).

 

 

 

 

그런데, 이 페이퍼는 보드리야르를 위한 것이 아니다(레인의 책을 찾게 되면 몇 마디 적을 수는 있겠다). 요즘 나오는 인문 번역서들의 편집에 대한 몇 가지 불만을 적기 위한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도 전철에서 읽어나가다가 몇 번 눈살을 찌푸리게 됐는데, 번역이 아니라 편집상의 오류 때문이다. 맨먼저 이 책에서도 아직 생존해 있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레비스트로스(1908-1991)'라고 표기됐다(38쪽). 이전에도 한번 지적한 바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1807030), 멀쩡히 살아있는 대학자를 '죽은 자'로 취급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원서에는 생몰연대 따위가 들어가 있을 리 없다(는 아니고 표기돼 있다고 한다). 고유명사의 원어병기나 인물의 생몰연대는 보통 편집자가 '서비스' 차원에서 첨가해주는 것으로 안다. 그러니 문제는 '서비스의 질'이다.

레비스트로스만 하더라도 한 백과사전에 잘못 기재돼 있다는 설이 있는데 조금 전에 확인해보니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던 '네이버'에서도 '레비스트로스(1908- )'라고 수정돼 있다. 하지만 최근에 내가 읽은 책들은 모두 이 책과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보리스 와이즈먼의 만화책 <레비스트로스>(김영사, 2008)의 첫문장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1908-1991)는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이다."(7쪽)이고,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서도 "이런 분석의 대가는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1908-1991)다."(30쪽)로 돼 있다. 너무 친절한 편집자들이 이왕 나서는 김에 약간의 손품만 더 팔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오류들이다.

 

 

 

 

일단 선입견을 갖게 되니까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나오는 '포래치'를 '포래치'라고 하거나 '바로레아'를 '바로레아'로 표기해놓은 것도, 설혹 역자가 그런 고집을 부렸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포트래치'나 '바카로레아'로 표기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바타이유의 <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에서 '소모'로 옮겨진 'expenditure'도 단순히 '지출'로만 옮기는 건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지 못한다.  

관련문헌을 소개하고 있는 '보드리야르의 모든 것'에서도 편집자는 굳이 안 해도 될 실수를 범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저작 국역본이 있는 경우 병기해주는 '서비스'를 하는 과정에서, 저명한 연구자인 마이크 게인이 "의심할 바 없이 장 보드리야르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고 평한 <상징적 교환과 죽음>의 국역본이 <불가능한 교환>(울력, 2001)이라고 엉뚱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이 책의 원저명은 국역본 표지에 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보드리야르를 다룬 최상의 비평적 해설"이라고 소개되고 있는 페파니스의 책 'Heterology and the Postmodern: Bataille, Baudrillard, and Lyotard'에 대해서는 국역본을 병기해주고 있지 않다. <이질성의 철학 그리고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리오타르>(시각과언어, 2000)로 소개돼 있다는 걸 잊은 것이다.  

물론 실수나 착오는 누구나 범하는 것이다. 중요한 건 줄여나가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조금 더 꼼꼼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홀대 받기를 원하는 독자는 없는 법이니까...

08.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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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03-08 18:55   좋아요 0 | URL
본문 검색을 통해 원서를 찾아보니, 원서에도 생몰연대가 나와 있긴 합니다. 모스(1872-1950), 라캉(1901-1981), 바르트(1915-1980) 식으로요. 원서엔 '레비스트로스(1908-)'라고 잘 적혀 있네요. 어쨌든 "원서에는 생몰연대 따위가 들어가 있을 리 없다"는 말씀은 사실과 다릅니다. 요즘 워낙 뒤숭숭해서 한 마디에도 조심하셔야 할 듯합니다. ㅜㅜ

로쟈 2008-03-08 18: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책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그렇더라도 편집자가 쓸데없는 개입을 한 것이죠. 2000년에 나온 책에도 생존해 있던 양반을 1991년에 죽은 걸로 처리해놓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