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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아. 정말 예쁜 책.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나는 자연의 기이한 형태를 바라보는 버릇이 있었다. 관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언어에 몰두했다. 아예 나무가 되어 버린 긴 나무뿌리, 돌 틈에 솟아난 색색의 줄기, 물 위에 떠다니는 기름얼룩, 유리잔에 간 금 - 그런 모든 것들이 이따금 마치 마법처럼 내 마음을 깊이 뒤흔들었다. 물과 불, 연기, 구름, 먼지 그리고 특히 눈감으면 보이는 선회하는 빛의 무리...
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 ' 에서 온갖 즐거움을 다 느낄 수 있다. 최근에 읽었던 황야의 이리에서 정신병 치료를 받고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헤세의 노년. 겨울 다섯달 동안 정원 없이 지내며 겨울꿈에 멍하니 잠겨 있다가 어느새 다가온 봄에 부랴부랴 씨앗을 주문하는 등 분주해지는 헤세.
남이섬의 헤세 그림전시를 본 적이 있다. 처음 본 헤세의 수채화들. 엽서 크기의 조그마한 수채화들. 그리고 꽃, 나비, 풀, 나무 등과 함께 있는 그의 소박한 시들은 뭉클할 지경이였다.
이 책에는 헤세의 정원 가꾸기에 대한 단상들. 그리고 헤세의 시. 그리고 헤세의 수채화들( 물론 컬러다) . 일러스트들. 흑백의 사진들이 있다.
석양의 흰 장미
서글프게 너는 잎새 위에/ 얼굴을 묻고, 죽음에 몸을 맡긴 채/ 유령 같은 빛을 호흡한다. /창백한 꿈을 허공에 띄워 보낸다.
그러나 노랫소리처럼 간절히/마지막 남은 희미한 빛 속에/그래도 저녁나절은/너의 사랑스런 향기가 방에 머문다.
네 어린 영혼은 불안스레/무명의 것을 구하려 애쓴다. /그러곤 미소지으며 죽어간다./내 가슴에서, 너, 누이 같은 장미여.
이렇게 그는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를 쓰고, 글을 쓰고, 정원을 가꾸며 아름다운 노년을 보냈나보다. 젊은 시절, 중년시절의 외부로부터의 그리고 더 견디기 힘든 내면의 고통을 견뎌내고 너덜해진 몸을 자연에 묻고 그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처럼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자만의 진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나보다.
' 대부분의 인간은 절망 속에 살아간다' 고 소로우는 말한다. 그 절망이란 어쩌면 그 말만큼 무거운건 아닐지도 모른다. 행복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절망에 빠진 자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게 절망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자리를 옮기고 내 자리는 조금 더 좁아졌지만, 창가이다. 시내 한 복판에 주변에는 높은 건물들 밖에 없고, 나도 그 중 한 건물에 자리 잡고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뒤로 햇빛이 들어오고, 전에 앉았던 창턱에 파일들을 잔뜩 올려놓았던 전 사람과는 달리 나는 초록색의 친구들을 올려 놓을 예정이다. 그리고 가끔 답답해지면 고개를 돌려 초록 친구들과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조각하늘을 보며 내 정원을 가지게 될 그 날을 그려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