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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평점 :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람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마르께스의 책이라는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눈에 콩깍지를 끼고 소설을 읽기 시작했으니,
마르께스의 자전적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는 이 아흔살 할아버지의 사랑에 미소가 어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중편이라기엔 짧고 단편이라기엔 긴 이 책은 마르께스가 이십여년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이고, 2004년 드디어 마지막 소설 이후 10년만에 처음으로 나온 책이다. 이 책이 나온 2004년은 그가 소설을 발표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르께스의 해' 이지 않았을까? 소설은 공식 출판되기 전부터 전세계 언론의 초점이 되어 수 많은 화제를 모았다.
아흔살 할아버지( 이름도 안 나온다) 는 글쟁이이다.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이나 자질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런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다만 내가 평생 동안 읽어온 수많은 것들로부터 세상에 빛이 될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라는 이유로 매주 일요일 신문에 칼럼을 쓴다. 그리스 고전과 로마시대 고전 읽기를 좋아한다. 클래식을 듣는 것도 역시 매일 하는 일 중에 하나다.
이 할아버지가 아흔살 생일날 뭔가 자신에게 근사한 선물을 하고 싶은 맘이 들었다. 그래서 아주 오래간만에 비밀의 집 여주인인 로사 카바르카스에게 전화를 건다. 오십세까지 514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했고 그 이후로는 헤아린적 없으나 '어떤 여자와 잠을 자든 돈을 주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다만 충직한 하녀 다미아니나와 수년간 지속되었던 관계가 유일하게 특이한 경우이다. 로사 카바르카스와 밤 열시의 약속을 정하고 마침내 생일날 밤의 환한 보름달 빛 속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제 막 열네살이 된 미성년의 아이는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단추공장에서 일하는 그 아이는 친구가 처음 성관계를 하다가 피를 과하게 흘려 죽은 이후 처녀성을 잃는데 대한 공포심이 있었고, 그 공포심을 다스리기 위해 준 약과 그날의 공장에서의 피로로 등을 돌리고 곤히 잔다.
아흔이 되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경이' 를 맛보게 되는 아흔살 할아버지.
아흔살 생일날 50여년동안 써왔던 칼럼의 끝에 '사직의 말' 을 쓰지만, 그 말은 지워지고, 거절하지도 못하고 계속 칼럼을 어영부영 쓰게 되고, 고양이라는 동물은 싫지만, 선물로 받은 나이든 고양이를 상대방이 섭섭해할까봐 데려다 키우는 할아버지. 소녀의 벗은 등만 보며 잠을 자고, 그녀가 잠이 깨지 않을 정도로 시를 읊어주고, 쓰다듬고, 키스해준다.
오해와 달콤한 고통을 겪고 나서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과 미래를 기껍게 맞이한다.
'태양은 공원의 편도나무 사이로 떠올랐고, 강이 마른 탓에 일주일이나 늦게 도착한 하천 우편선이 포효하면서 항구로 들어왔다.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받았던 것이다'
나는 이 할아버지를 보면서, 이 할아버지의 직장 동료들과 하녀, 이 할아버지의 고양이, 그리고 이 할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를 보면서 밝고 따뜻한 날의 비누방울들을 떠올렸다. 공기중을 반짝반짝 영롱한 빛을 내며 천천히 떠돌다가 숨어버리는 비누방울들.
다행이다. 그가 일흔일곱에 아흔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이토록 밝고 행복하고 외롭지 않게 쓸 수 있어서.
항상 '나는 고독한 인간이다' 라고 말해왔던 그는 '경이로운 사랑' 을 찾은 것일까? 혹은 오랜동안 함께 해 왔던 고독이란 놈과 타협하기라도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