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제럴드 단편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3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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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에서 손님을 끄는 노력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라는 것이 고작 이 정도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악을 부추기고 낭비를 조장하는 취향이 꼭 어린애들 장난 같았다. 갑자기 그는 '방탕'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 무엇인가 유(有)를 무(無)로 만들어버리는 것 말이다. 늦은 밤 시각에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옮겨 다닌다는 것은 하나같이 아주 힘이 드는 일이며, 따라서 동작이 점점 느려지는 특권에 대해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17쪽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지금 그 눈물은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는 입이며 눈이며 움직이고 있는 손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멀리 사라졌으며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것이다. 문들은 굳게 닫혀 있었고, 해가 졌으며, 모든 시간을 견뎌내는 강철의 잿빛 아름다움 말고는 이제 아름다움은 업었다. 심지어 그가 참을 수 있었던 슬픔조차 그의 겨울꿈이 활짝 날개를 펼치던 환상의 나라, 청춘의 나라, 풍요로운 삶의 나라 뒤쪽으로 멀리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오래전에," 그는 말했다. "오래전에 나에게는 무엇인가가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 이제 그건 사라져버렸어. 없어져 버렸단 말이지. 그런데도 나는 울 수가 없구나. 그것에 대해 마음 쓸 수도 없어. 이제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지."-89쪽

도널드는 비행기를 갈아타는 시간 동안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인생의 후반부란 여러 가지를 잃어가는 기나긴 과정인 탓에 이번의 경험도 어쩌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101쪽

삼십 대 초반에 이블린의 미모가 아직 망설이듯 머물러 있었다면, 얼마 뒤에는 갑자기 결심한 것처럼 완전히 그녀에게서 떠나가 버렸다. 얼굴에 희미하게 잡혀 있던 주름이 갑자기 깊어지고 급속하게 다리와 엉덩이 그리고 팔에 살이 붙었다.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의 버릇은 이제는 하나의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책을 읽고 있거나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거나 또는 잠을 자고 잇을 때에는 습관적으로 그런 표정이 나타났다. 그녀의 나이가 이제 마흔여섯이 되었던 것이다.

재산이 불어나기보다는 줄어드는 가정이 그러하듯이 그녀와 해럴드도 막연한 적의를 품게 되었다. 마음이 평온할 때 두 사람은 마치 부서진 헌 의자를 바라볼 때처럼 체념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남편이 아프면 이블린은 조금 걱정했고 되도록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을 했으며, 실망한 남편과 살아야 한다는 피곤하고 침울한 속에서 명랑해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177쪽

이블린은 한 번 더 하품을 했다. 인생이라는 것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야. 아아, 젊은 시절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179쪽

그래 갈 테면 가라, 그는 생각했다. 4월은 흘러갔다. 이제 4월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213쪽

"자네 주위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 말하자면 악(惡)의 분위기라고나 할까."
"걱정과 가난과 잠 못 이룬 밤의 분위기라네." 고든이 조금 도전적인 태도로 대꾸했다-297쪽

사랑이란 부서지기 쉬운 거야.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면 부서진 파편은 다시 보관할 수 있지. 입술에서 맴돌았던 말,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말, 새로운 사랑의 말, 배워 얻은 달콤한 말은 다음 애인을 위해 소중하게 보관해 둬야 해-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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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 단편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3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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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생일 선물받은 피츠제럴드 단편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하지만, 기대가 크면, 그 기대가 만족될지라도, 열광은 적다.
열광이 적다고 좋지 않다는건 아니다.

먹고 살기 위해 줄기차게 단편을 써냈던 그는 정작 피츠제럴드, 하면 떠오르는 '위대한 개츠비'나 '밤은 부드러워' 같은 장편에서는 흥행에 실패했고, 돈벌이를 위해 끊임없이 써낸 단편이 160여편에 달한다, 그런 그는  ' 늙은 창녀는 이제 남자를 한 번 상대하고 무려 4,000달러를 받는다' 고 자위 섞인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피츠제랄드의 단편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전형성은 단편들을 읽는 내내 이름만 바뀌는 어여쁘고 매혹적인 여자들과, 야심만만한 남주인공들,
첫페이지에서 마지막페이지까지 계속 상류사회 부자인 사람, 혹은 부자 였다가 인생의 실패를 겪은 사람, 혹은 가난했으나 부자인 사람.

그들 모두는 놓고 싶지 않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지난 한부분을 끊임없이 리플레이 한다.
막상, 꼭 같은 상황, 사람이 나타났을때 환상은 깨지고, 아름다웠다고 믿었던 지난과거의희망( 이상한 말이다. 지난 과거를 미화하며 보물처럼 간직하고 살아가는 원동력)은 너무나 쉽게 바스라지고, 돌이킬 수 없음에 어느 한 부분이 뻥 뚫린다.

아홉개의 단편들 중 어느 것 하나 빼 놓을 것 없이 만족스럽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마지막 작품 '오월제' 그리고 원서로 읽었던 '부잣집 아이' 의 여운이 길고,  '컷글라스 그릇' 은 거칠지만, 맘에 와닿는 작품. '동경의 대상' 으로만 여겨지는 여자 주인공이 이 작품에서는 깨어지고 바스라질지언정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표지에 있는 호퍼의 그림과 잘 어울리는 단편들이다. 적당히 씁쓸한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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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6-03-24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왜 좋다는 얘기를 이따위로밖에 못하는 걸까.

하루(春) 2006-03-24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떻게 말하든 진심은 통하게 돼있어요.

이네파벨 2006-03-24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
 
일요일의 석간
시게마쯔 키요시 지음, 김훈아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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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큼한 표지의 상큼한 제목의 저자 이름마저 상큼하도다.
열두개의 단편들도 가볍고, 통통 튀며, 그 와중에 대단한건 아니지만 뭔가 찌릿찌릿.

근래 들어 읽은 책중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재미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는건 그만큼 이 단편집이 평범하단 얘기일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한 관찰력이 무척이나 뛰어난 작가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통해 짧고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발단,전개,절정, 결말이 한회에 끝나줘야 하는 착한 가족드라마.
그렇다고 신파라던가, 오버스럽다던가 그런걸 생각하면 안되고, 잔잔하지만, 찌릿한거. 코끝 찡해지는거. 그런 기분

단편에 들어가기 전 첫머리에 작가는 말한다. ' 조간 사회면과 경제면에는 오늘도 불황가 명퇴란 글자가 산재해 있다. 중잔년들의 자살 기사가 없었던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지만, 신문사가 일요일 정도는 하고 일부러 싣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적인 세상관을 가진 작가가 좋은면들을 보려고 노력하며 쓴 글들은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미래 신문' 마냥 즐겁다.

열두개의 단편에서 여러가지 시도하는데, '카네이션' 에서는 어머니날 저녁에 같은 지하철, 같은 칸에 타게 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라던가, '오우토키의 연인'에서 다자이 오사무에 홀딱 빠져버린 주인공 이야기라던가( 그 재미있는 이야기에, 난 결국 미루던 '인간실격'을 읽었고, 다자이 오사무의 단편집을 세권이나 더 사버렸다구) 아빠와 아들의 이야기 ' 여름캠프' , 열아홉을 회상하는 서른일곱의 이야기 'september 1981' 가 있다. 그리고 가족을 버리고 딴 여자와 도망간 아빠의 암선고를 받은 두 자매 이야기 '쓸쓸하밍 쌓여' 는 섬세하고, 여운이 긴 작품이다. '철봉 하느님' 과 '초밥 주세요' 와 같은 씩씩한 단편들도 있고, '산타클로스 부탁해요' 같은 낭만적인 단편도 있다. '고토를 기다리며'는 빠지지 않는다. 이지메 이야기. '감귤계 아빠'와 '졸업홈런'은 각각 나쁜 딸년, 무정한 아빠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치유 가능하고, 회복 가능하다는 점에서 일요일 석간이다.


오늘 뉴스에  삼십대 미혼모가 넉달된 아들을 젖병과 쥬스만 넣어 놓고 4년간 방문잠근채 방치했다는 기사가 떴다. 책을 읽으며, 그래, 아직도 희망은 있어라고 밝은 마음이 되었다가도, 애써 외면해도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고야마는 현실은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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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春) 2006-03-23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지가 도발적이네요. 멋있어요. 시원하고...

하이드 2006-03-2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빵!---- 후..하는 이미지에요.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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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리뷰를 하려고 사진찍은 이 책
어젯밤 꿈에도 나왔다.
하이쿠, 우키요에, 에도 시절을 모르신다면,

하이쿠 : 5.7.5 의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일본의 짧은 정형시로 함축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우키요에 : 에1765년 이후 에도시대 막내릴때까지 인기 끌었던 다색판화

에도 시대: 일본 역사상 유례 없는 평화. 안정된 가치 속에 예술발전.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추종 세력과의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둠.이때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태평성대.

이 핑크표지가 꿈에 나왔는데
표지의 펄감있는 여인의 표지를 벗기면
빠딱빠딱한 연핑크의 클로즈업 여인네 표지가 나온다.

이 책은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에 관한 책

* 사족- 지난번에 나왔던 '우키요에의 美' 는 글이 너무 많아 좀 지겨웠으나, 이 책은 같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 그림책!)

떠나보실까요?

9 하이쿠란 무엇인가
17 에도시대의 미술

에서 나처럼 너무 지식 없는 사람을 위해 그나마 자세히 스무장 정도에 걸쳐 간단히 에도시대와 우키요에, 하이쿠에, 에도시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주고 있다. 최소한의 지식. 이라고나 할까.

어느 장을 펼쳐도, 본문은 말할것도 없고, 설명들어가는 부분에도 꽃이 잔뜩 피어있다.
개인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었던 '에도 시대의 미술' 설명이었다.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의 사계로 구성된것도 참 맘에 든다.

꽃그늘 아래선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_ 잇사

먹고 누워서 소가 된들 어떠리, 복사꽃 피었네
- 부손-

한 페이지에는 하이쿠가 다음페이지는 여러장에 걸쳐서 우키요에가 나온다. 기가막히게 잘 맞는 우키요에들 보고 있으면, 나도 하이쿠가 절로... 까지는 아니라도, 무튼 잘 맞는다!

일본어 원문과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도 음수율을 느낄 수 있도록 음을 한글로 달아 놓았다.
구우데 네테 우시니 나라바야 모모노 하나
5.7.5

흰 팔꿈치 괴고 선승이 조는구나, 초저녁 봄날 _부손

* 봄입니다. 열심히 좁시다.

여름 소낙비에 홀로 밖을 바라보는 여인이로구나 _기카쿠

화려한 다색판화들 사이에 간간히 끼어있는 담담하고 여백있는 그림들은 눈길을 잡는다. 아주 그냥 꽈악.

서늘하여라, 종을 떠나는 기나긴 여운_ 부손

종을 떠나는 기나긴 여운이 서늘하단다. 캬-
'여름'편에 나온 그림들이 맘에 들었다. 예쁘고 신기한 종류들의 파란색들. 물 속에서 노니는 물고기 그림이 유난히 많은 계절.
이 그림 특히 맘에 든다.

나도 옆에 가서 무심히 배난간에 기대어 물끄러미 있고프다.

도둑이 남겨두고 갔구나, 창에 걸린 달 _료칸

아래에는 피천득님의 '꽃씨와 도둑' 이란 시도 있다.

그림은 한페이지안에 갇혀있지 않는다.

나팔꽃이여, 그 중 한 송이 깊디 깊은 심연의 빛깔 _ 부손

위의 하이쿠에 이어지는 다음장의 '강아지와 나팔꽃'

겨울...

둘이서 보았던 눈, 올해도 그렇게 내리었을까 _ 바쇼

뒤에는 작가들 소개와 참고문헌이 나와있다.
역시나 도움된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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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브라운 2006-03-2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벌써 사셨군요 ^^

해적오리 2006-03-22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질렀어요.
포토리뷰 보니 더 기다려지네요.

하루(春) 2006-03-2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정말 예쁘다... 황홀해요.

Mephistopheles 2006-03-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끊었다...라는 페이퍼가 언제 날짜였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3=3=3
그래도 책은 이쁘네요..^^

하이드 2006-03-22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끊었다고 한 후 안 샀당께요~ 확인해보삼~
이거 3월초에 나온 책이라구요.
하루님, 책이 참 예뻐요. 판형도 크고, 안의 우키요에들과 하이쿠가 정말 절묘합니다.

히피드림~ 2006-03-3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잖아도 어떤 책인지 궁금했었는데, 꼼꼼하고 친절한 포토리뷰네요. 이 책 보관함 들어갑니다~~
 
내 말 좀 들어봐
줄리안 반즈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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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앤짐 (1961)


글루미 선데이(1999)

그가 있고, 그녀가 있다. 그리고 그가 있다. 그리고 당신이 있다.

스튜어트와 올리버는 확연히 다른 성격의 오랜 친구다.
질리언은 스튜어트의 연인이고, 아내가 된다.

여기, 스튜어트, 올리버, 질리언이 있다.
어떻게 괄호를 묶을지는 읽기전에는 당신맘이다. (스튜어트+질리언) 부부와 올리버.
혹은 (스튜어트+올리버) 친구와 질리언, 혹은 (질리언+올리버)불륜과 스튜어트, 조금 더 나아가면
(스튜어트+올리버)연인과 (스튜어트+질리언)부부... 아, 그리고 있지말아야 할 것은 이 책을 읽는 당.신.

내가 아는 가장 수다스러운 영국남자는 이때까지 알랭 드 보통이었다. 그런 나의 생각을 가차없이 깬 뺀질뺀질한 줄리언 반스라는 느끼한 남정네가 있었으니.


책에는 이것보다 훨씬훨씬 느끼한 사진이 있다.
줄리언 반스의 시리즈가 열린책들에서 예쁘게 옷입고 새로 나오기 시작한게 벌써 작년 여름이고, 책꽂이 구석에 '10과 2분의 1장으로 쓴 세계역사' 라는 책이 기억도 안나는 예전부터 먼지 뒤집어 쓰고 있었고, 난 사실, 아주 얼마전까지 이 사람 여자인줄 알았고, 워낙에 많이들 알고, 많이들 읽은 작가에 대해 새삼스럽게 열광하는것이 뒷북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덧붙여서, 나는 아직 열광할까 말까 맘이 갈팡질팡하고 있긴 하지만서도. ( 여기까지의 횡설수설을 한숨에 읽어내렸다면, 이 책을 읽어도 좋다.라고 할 정도로 심하게 수다스러운 책임을 다시 한번 강조)

스토리는 신파다.
뭐, 여자 하나에 남자 둘. 그리고 그 남자 둘이 오랜 친구라는데, 안 봐도 비디오. 아니겠어.

근데, 그 뻔한 스토리에 이 책은 뭐가 다른데? 묻는다면,
목차를 보라.
1장 그의, 그 또는 그녀의, 그들의
2장 1파운드만 빌려 줘
3장 그해 여름, 난 찬란했다
6장 치매를 예방하라
7장 그런데 웃기는 일이 있다.
9장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17장 영국 사람들, 다 미쳤지.

어수선한 목차를 책을 다 읽고 있는 지금, 그 어수선한 수다들이 새삼 머릿속에 어지럽게 떠돈다.
음. 그래. 목차 제목 잘 지었네.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줄리언 반스가 풀어가는 방식은 '수다' 다.
그리고, 그 '수다' 에 독자를 끌어들인다. 연극무대에서 배우들이 관객에게 말걸듯, 등장인물들은 책을 읽는 나에게 끊임없이 말건다. 오죽 제목도 '내 말좀 들어봐' 겠는가 ( 원제는 talking it over) 난 극히 평범한 사람이야. 난 말할 게 없어. 그런데 요새는 어딜 봐도 자기 삶을 고백하며 자기가 옳다고 고집하는 사람들뿐이야. ...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걸까? 어째서 <날 좀 봐. 내 말 좀 들어 봐>하고 외치는 걸까? 왜 사람들은 가만히 못 있지? 어째서 모든 것을 말하고 싶어서 안달일까?(19pg)

스튜어트와 올리버가 친한 친구라는 이야기는 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시각으로(연애만큼 주관적인 것이 있을까?!) 스튜어트는 여자인 내가 보기에 건실한 은행원.이고, 정확하며, 풍채가 있고, 여자를 무조건 배려해주는 자상한 남자다. 스튜어트는 올리버가 보기에 구두쇠이고 지루하며 농담도 못하고(알아듣지도 못하고) 썰렁한, 자신이 구제해주지 않으면 쑥맥인 재미없는 은행원이다. 스튜어트 : '세상 사람 중 반은 자신감이 있는 것 같지만, 나머지 반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나는 이쪽 반에서 저쪽 반으로 건너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자신감이 있으려면 먼저 자신만만해야 한다. 그건 악순환이다.'(35pg)

올리버는 잘생겼고, 매력적이고, 입을 다물줄 모르는 콩깍지 씌웠을때는 그 현란한 비유,농담,불어,독어,이탈리아어에 홀딱 반할 수도 있는 영어가르치는 백수.다.콩깍지 벗겨지면, 스튜어트에 빌붙는 백수. 배신자. 나쁜놈. 한심한놈. (다시 말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올리버 :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하지 <않을>생각이다. 기억은 하나의 의지 행위이고, 망각 역시 그렇다. 나는 내 생애의 초창기 18년을 기억에서 거의 다 지워 버리고, 그것을 퓌레 같은 유아식으로 만들어 버렸다. .. 과거를 너무 잘 기억하고 있으면 당신은 그 때문에  현재를 탓하게 된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과거 때문이야,... 그런 사고방식을 고쳐주겠다. 그것은 십중팔구 당신 탓이다. 거기에 대해 나에게 자세한 설명까지 요구하지는 마라' (28pg)

질리언? 나쁘지만, 이해안가는거 아니지만, 어쨌든 나쁘다. 현실적인것 하나는 맘에 든다.

아, 이 책은 그래서 무슨 내용이냐면. 연애이야기다. 연애이야기. 그것도 몹시 징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스튜어트가 되었다가, 올리버가 되었다가, 질리언이 되었다가, 그들 모두가 아닌 '나' 가 되었다가. 공감하고, 타박하고, 한심해하고, 공감하고... 공감하는 글이 나오면 책 모서리를 접곤 한다.
이 책, 보통의 책 못지 않게 접힌 모서리들로 너덜너덜해져버렸다.

연애소설 그만 읽고, 연애나 하시지? 하면 노코멘트.

'사람들은 화가 나고 슬픈 것은, 슬프고 슬픈 상태가 호전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만약 당신이 슬프고 슬프면 사람들은 당신에게 친절하다. 그러나 만약 화나고 슬픈 상태라면 당신은 그저 트래펄가 광장 한복판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소리지르고 싶어한다. 그건 내 잘못이 아냐. 그들이 나한테 저지른 일을 보라고.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나? 이건 너무하잖아. 화나고 슬픈 사람들은 사실상 아무것도 해결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미친 사람들이다. '(319pg)

*책의 후유증으로, 멈추고 싶지 않은 수다가 계속 사족을 달게 한다: 대부분 멋지지만, 그 중에서도10장이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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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03-2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싫어, 미스 하이드씨! 당신 말 듣고 사재기한 책이 몇권인데! 아니지, 이젠 디비디에 음반까지 넣어야지!! 아암~! 당신 말 듣고 있다가는 한 재산 날아가지..아암~ ㅠ.ㅠ
(나중에 리스트 만들면 엄청 날 꺼예요. '하이드님 페이퍼에 뻑 가서(^^;;) 지른 물건' 리스트 같은거. ;;;)

하이드 2006-03-22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읽을 책들이 엄청 기대되는 작가입니다. 워낙에 평들도 좋았지만 ^^

마늘빵 2006-03-22 0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인가요?

mong 2006-03-22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이라는 소설도 읽어보세요 ^^

보르헤스 2006-03-22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에게 보통을 대신할 작가가 쥴리안 반즈인가요? 아님 존 버거 인가요? 그게 젤 궁금하네요 ^^

조선인 2006-03-2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줄리아 반즈라면 쥴님이 흠뻑 빠진 작가죠? 이젠 하이드님까지. 정말 매력있나봐요.

하이드 2006-03-22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아직 책 몇권 더 남았으니, 두고 봐야겠어요. 개성이 강한 작가라, 한번에 홀딱빠지기는 저어됩니다.^^
보르헤스님, 존 버거는 제가 보통보다 더 먼저 좋아했던 작가라구요~ ^^ 작년초부터 읽어서, 번역본 한두권 빼고 다 있고요( 읽고가 아니라;; 그래도 꽤 많이 읽었어요) 대중적인 작가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글입니다.
보통이나 줄리언 반스는 대중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mong님, 에, 리뷰 봤어요 ^^ 보관함에 넣어놨습니다.
아프락스님, 넵, 그렇다고 보통과 비슷한 소설을 쓴다는건 아니구요. 적어도 이 책으로는 굉장히 개성강한 글 쓰는 작가에요.

비로그인 2006-03-2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하이드님과 왜 이리 짝짜꿍이 잘맞는지?

전 이거 보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에 나왔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인도계 변호사 조지를 도우려 사건을 풀어나가는 얘긴데 줄거리도 흥미있지만 역시 수다와 번뜩이는 통찰력들이 백미지요. 


하이드 2006-03-22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ㄱ ㄱ ㅑ~ 재밌겠어요. 열린책들에서도 전집으로 쭉 나와주면 좋을텐데 말이에요.
안즉 페이퍼백은 안나왔네요. 일단 카트에 담습니다요. <ㅑ ㅇ ~

안나채 2006-08-18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하이드님. 하이드님이 위에 올리신 쥴앤짐을 2001년도에 보면서 2000년도에 보았던 글루미썬데이가 떠올랐는데, 게다가 저 역시 <내 말 좀 들어봐>를 2004년도에 읽으면서 영화 쥴앤짐이랑 글루미 썬데이가 오버랩되어 되었었는데,
괜히 더 반갑네요^^

알리스 2006-08-31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왜 계속 드라마 아일랜드가 생각났을까요?ㅎ
처음 접한 작가인데 다른 작품도 기대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