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n의 세계 - 30대 한국 여성이 몸으로 겪는 언스펙터클 분투기
박문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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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영 작가가 참 좋은데, 정말 좋은데 말이다. 

<지상의 여자들> 굉장히 재미나게 읽었어서 <3n의 세계>는 에세이툰이라니 별로일 거라고 확신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좋았다. 


코리안 숏헤어 작가님의 프로필 사진이 예상과 전혀 달라서 좀 놀랐구요. 

올해 안에는 나도 꼭 코리안 숏헤어 될 거라서 용기를 얻기 위해 코리안 숏헤어 에피 읽고, 주섬주섬 이유 주머니 안에 고이 넣어두었는데, 다시 뺄까. 


작가님은 365일 중에 350일 정도 노브라이프라고 했는데, 나는 365일 중에 365일 노브라이프이니, 프로필 사진은 15일의 유예라고 생각하기로. 사실 나는 이제 없어서 못합니다. 


"투블럭은 머리털 뚜껑이 파르스름한 두피를 가려줬지만 이번 반삭엔 안전장치가 없다. 돌이켜보니 귀와 목을 평소보다 더 깨끗하게 유지해야 할 것 같다. 기미, 점, 각질, 뽀루지, 볼살 모두가 3.75배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 


직원이 스펀지를 들어 얼굴을 털어낸다. 아, 이게 실제구나. 물러설 곳 없이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구나. 깨끗이 망했지만 괜찮다. 그래, 어울리지 않든 어울리든 잘라봐야 아는 것이다. 이건 내 결정이지 벌칙이 아냐(입틀막) 암, 내 편의가 타인의 평가보다 중요하지." 


코리안 숏헤어 에피소드가 첫 에피소드인데, 처음부터 기승전결 너무 웃기고, 와 닿고, 그래그래, 그렇지 하며 읽었다. 


"그래도 미미한 성취는 있다고. 앞으로 다른 여성이 삭발을 해달라고 할 때 미용사분이 너무 놀라지는 않겠지. 고객과의 설전이 짧겠지. " 


두발 현황을 듣게 된 가족 이야기도 웃기다. 부모님이 일언반구도 안 하길래 웬일이냐. 했는데, 나중에 전해들으니, 하도 어이가 없어서 투명머리 취급한거라고.


결말은 기승전고양이다. 따뜻. 


"길고양이들과 집고양이들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내 곁에 몸을 붙이고 꼬리를 떤다. 머리털의 변화 따위 괘념치 않는, 선악과 미추를 분별하지 않는 본성이 뭉클하다. 늘 정확한 숏컷을 유지하는 그들의 유전자가 어느 때보다 훌륭해 보인다. "


매일의 일상에 진짜 짜증나, 이놈의 세상! 하는 에피들로 가득 차 있다. 타협하고, 타협하지 않고,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그지같은 현실에서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나에게 너무 엄격하지 말 것. 반성하고, 변화하고, 칭찬하고, 함께 갈 것. 


매일 하는 이야기들이지만, 이렇게 책으로 읽으니 또 다른 느낌이다. 

이 책이 정말 좋다. 일상 에세이를 이렇게나 여러번 뒤적거린 적이 없다. 


읽을 때마다 다른 부분들이 또 눈에 들어온다. 


알라딘, 얼른 나 박문영 작가 매니아 1 넣어라. 

나도 인간이야"라는 말을 누가 어떻게 쓰는지 보면 흥미롭다. 한 문장인데 활용법이 다르다. 많은 경우 여성은 우그러진걸 펴려 할 때, 남성은 팽창된 걸 우그러뜨리고 싶어 할 때 사용하니까. 한쪽은 더 이상 하대받지 않길 원할 때, 한쪽은 비어져 나오는 유약함을 알리고 싶을 때 쓴다. 놀랍게도 세상은 성인 남성을 제외한 이들을 실체하는 존재로, 생애가 있는 생명으로 보기 힘겨워했다. 리고 지금도 자주 난처해한다. 피를 흘리든, 피를 흘리지 않든 우리를 그 자체로 직시해달라는 건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할 문제가 아닌데도. - P126

- 폭염에는 자전거도 지쳐. 차는 어려우니까, 전동 휠을 사자.
여름에 소극적으로 순응하며 도피할 생각만 하는 나와 달리 B는 여기에 징검다리를 놓을 방법을 궁리한 것이다. 차를 산다는 머나먼 방안과 내리쬐는 직사광선을 참는다는 무계획 사이에 한 번도 고고려하지 못한 작은 대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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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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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문고의 책은 네 권째이다. 책표지의 문장이 활을 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다. 

카프카가 독서는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기 위한 도끼와 같아야 한다고 했고, 쏜살문고는 화살처럼 독자의 마음에 꽂히려고 하나보다.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불법 임신 중절 경험을 회고한 책이다. 저자는 그것을 'event' , 사건이라고 말한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시대를 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나의 사건이었을 수 있겠다. 


아니 에르노가 임신을 진단 받고 필요했던 것은 '주소'와 '돈'이었다. 


"P.-R. 부인은 400프랑을 받았다. L.B.는 알아서 그 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주소와 돈, 이것이 그 당시 내가 필요로 했던 유일한 것이었다." 


임신 중절로 책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지금, 여기는 좀 다를까, 검색해보니, 백인 남자 작가의 <임신 중절, 어떤 역사 로맨스> 가 검색되어 좀 웃었다. 비웃음. 코웃음, 헛웃음. 


하지만, 나는 봄알람의 <유럽 낙태 여행>, 시몬 베유 <국가가 아닌 여성이 결정해야 합니다>, 후마니타스에서 낸 <배틀 그라운드>, 주디스 자비스 톰슨의 <낙태에 대한 옹호>, 민우회의 <있잖아, 나, 낙태했어> 같은 책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지. 


배우지 못했고, 터부시 했고, 설마 내 일이 될까 생각했던 '일어날 수 있는 일', 그 사건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다. 노래방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살해당할 수 도 있었는데, 살아 있다니 나는 운이 좋았다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나는 운이 좋았다' 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것이 일어났건, 일어나지 않았건, 나와 함께 사건의 당사자인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운'과 상관 없는 일일 것이다.  


새라 워터스의 <나이트 워치>는 픽션이지만, 나는 전쟁중에 불륜으로 임신한 여자와 남자를 진심으로, 심하게 욕했었다. 

사회적, 신체적 목숨을 걸고 감당하는 쪽은 언제나 여자다. 여자를 좀 더 욕해도 되는 걸까? 이 사건에 인간 남자는 없고, 정자만 있다.    


유부남 지인에게 상담했을 때, 집으로 초대하여 부인이 장 보러 간 사이, 섹스할 시간은 될 것 같은데, 라고 말하는 남자, 무엇을? 무엇을 자세히 알고 싶은지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남자, 하지만 윤리적인 이유로 돈은 못 줘줘. 나는 아기 생각이 없어, 니가 알아 해라.는 남자. 


"나 같은 여자들은 의사의 하루를 망쳤다. 돈도 연줄도 없는 - 그렇다고 무턱대고 의사들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여자들은 자기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고, 영영 의사 면허증을 앗아 갈 수도 있는 법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의사들은 감히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을 죽게 방치하는 법을 위반하느니 차라리 당신들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솔직하게 나서지 않는 한, 임신할 정도로 멍청한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눈 때문에 자기가 이룬 모든 걸 잃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같이 여자들의 임신 중절을 막더라도 그녀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낼 거라 생각했으리라. 부서질지도 모르는 자기들 이력에 비하면, 여자들이 질 속에 뜨개질바늘을 넣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의사 신고하는 케이스들 생각난다. 전 남편, 전 남친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 요즘, 아니 에르노의 책을 열렬히 읽은 적 없었던 나는 이 책을 읽고, 아니 에르노를 좀 더 읽고 싶고, 더 읽고 싶지 않았다. 두 마음이 동시에 드니, 아마 읽겠지. 


쏜살문고의 이 책은 굉장히 얇고 작아서 (샘플북인줄 알고 버릴뻔 했다) 여느때와 좀 다른 독서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작고 얇지만 꽉꽉 채워 놓아서 이 책을 늘리면, 양장의 좀 두꺼운 책이 나올 것임을 안다. 얇고, 작고, 꽉꽉 찬 책을 만들어주는 쏜살문고 응원해. 처음에는 좀 당황했지만, 생각할수록 좋은 컨셉트와 좋은 컨텐츠다. 


아니 에르노의 '사건'은 이번에 나온 쏜살문고 여성문학 컬렉션에 속해 있다. 이 외에 토베 얀손, 강신재, 박완서가 있음.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 누워서 뜨개질바늘을 조심스럽게 성기 속으로 밀어 넣었다. 자궁 경부를 찾지 못한 채 더듬었고, 고통을 느끼자마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력감에 절망했다. 아직 그 정도 수준은 안되었다. ‘아무것도 못 함.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울음. 정말 너무 지겹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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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 캘린더 도착

올해도 여전히 예쁘고 귀엽다.
예년에 비해 클로즈업과 원샷이 많다.

매일 아침 고양이 날짜 넘기며 다음 고양이 만나는 행복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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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 2019-10-30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넘넘 이뻐요 어디서 구매하나요?

하이드 2019-10-31 06:40   좋아요 0 | URL
맨 위에 상품 누르면 상품페이지로 넘어가요. 몇년째 써오는데, 한 장도 빠짐없이 다 엄청 예쁩니다!

지나 2019-10-31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네 감사합니다.저도 구매할께요
 
그냥 좋게 받아들이세요
마리아 스토이안 글.그림 / 북레시피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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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20가지 짧은 이야기와 삽화로 만들어진 책. ˝성폭력에 관용 없는 사회 분위기˝를 원한다. 이 책에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나의 이야기였고, 내 친구의 이야기들이었다. 읽는 내내 울렁거렸다. 쉽게 권하기 힘들다. 독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이겠지. 스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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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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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주인공들을 역순으로 돌아보는 이야기. 

새라 워터스 좋아하지. 좋아하니깐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었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사고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 사고를 동시에 당하는게 쉬운게 아니고, 

동시에 끝나는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사랑해서, 머리보다 마음이 시키는 일들을 하지만, 마음이 식으면, 서로에게 괴롭다. 

떠나는 사람도, 남는 사람도. 상대방의 마음이 먼저 떠나 괴로움에 몸부림치지만, 괴로워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그런 괴로움을 다른 상대방에게 주었다는 것. 


전쟁통에 피임하기 싫다는 유부남개놈의 말을 따라 피임하지 않고 섹스하고, 임신하고 말도 못하고, 그이 탓이 아니라고 하는 여자. 둘 다 바보 멍청이다. 


마음에 드는 인물들이 하나도 안 나오고, 답답하기만 해서, 이 소설을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거,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 맺어지는 인연들, 사람의 허무한 죽음들을 겪고, 그 옆에서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이 전후의 평화에 살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새라 워터스의 레즈비언 사랑 이야기는 경지에 올라서, 남자하고도 사랑하고, 여자하고도 사랑하고, 그런게 그냥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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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트50 2019-10-14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핑거 스미스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게스트를 읽는데 분통? 터지고 조마조마
해서 생각나는대로 조금씩 보고있는데
...어언 1년이 된 거 같아요 ^^;;;

하이드 2019-10-15 20:49   좋아요 1 | URL
저도 핑거 스미스 제일 재미있게 읽었구요, 게스트랑 티핑더 벨벳은 읽다 말았던듯 합니다. ㅎ 맘잡고 읽으면 술술 읽히는데, 게스트도 얼른 읽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