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 코펜하겐 삼부작 제1권 암실문고
토베 디틀레우센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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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침이면 희망이 있었다.' 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토베 디틀레우센의 회고록.


코펜하겐 삼부작 중 1부로 그동안 좋은 이야기만 듣다가 김화진의 소설을 읽다가 이 시리즈가 나오는 것을 보고 구매해 보았다. 전혀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해서 회고록인 것도 뒤늦게 알았고, 읽으면서 엘레나 페란테 생각나네 싶었는데, 책소개에 있을 정도로 다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어린시절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둘러쌓여 있다. 나의 어린시절도 비슷했겠지만, 좋지 않은 기억들은 모두 묻어버리고 살아서 내 어린시절에 관해서라면 부분적인 장면들만 떠오르지만, (굳이 떠올리지 않지만) 요즘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그것이 누구나의 어린시절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집에서는 부모가, 학교에서는 선생이 어린시절을 온통 휘어잡고 있다. 그것은 보호와 교육이기도 하지만, 학대와 소유이기도 하다. 시인이 되고 싶은 토베에게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다는 아빠, 기회만 되면 집을 나가 도망가고 싶게 만드는 존재인 엄마. 어린시절에 유일한 내 것은 내 마음뿐이다. 시인이 되고 싶은 내게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은 책뿐이다. 어릴적부터 어른 책을 읽고, 어린이 책에 모욕을 느꼈던 어린이가 어린이 책부터 읽었으면 어땠을까. 다섯 살때 고리키의 책을 읽다가 '비탄'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는 대신에 말이다. 의미 없는 가정이긴 하다. 어린 시절에 무엇을 쏟아붓든 어린 시절에만 소화할 수 있는 것이 있었을테니깐. 그것이 어린이의 것이건, 소화할 수 없지만 들어와 버린 어른의 것이건 말이다. 


"그건 러시아어에서 온 단어야. 고통과 비참함과 슬픔을 뜻하는 말이란다. 고리키는 위대한 시인이었지." 

나는 기쁨에 차서 말했다. "나도 시인이 되고 싶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곧바로 얼굴을 찡그리더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여자는 시인이 될 수 없어!" 

상처받고 화가 난 나는 다시 내 안에 틀어박혔고 그러는 동안 어머니와 에드빈은 그 터무니없는 생각을 비웃었다. 


'어린 시절'의 뒷 이야기인 '청춘'과 '의존' 이 궁금하다. 

저자는 '어린 시절'에서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나쁜 냄새처럼 몸에 달라붙는다. 당신은 다른 아이들에게서 그것을 감지한다. 각각의 유년기는 특유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냄새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우리는 때때로 자신에게서 남들보다 나쁜 냄새가 날까 봐 두려워한다."  


어린 시절을 내면에 품고 사는 어른들.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과 어린 시절을 품고 사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굳이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재화된 어린 시절이겠지. 과거의 모든 순간의 내가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의 나를 이룬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아닌 과거의 특정 순간들의 내가 시간이 흐름에도 뒤로 가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려 앞으로 나서는 순간들이 바로 어린 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순간들일 것이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 어린 시절, 체념이나 포기가 아직 들어서기 전인 순수하다는 이유로 날 것의 상처로 가득한 어린 시절,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첫 문장인 '아침이면 희망이 있었다.' 와 짝을 이루는 말을 5챕터에서 찾아두었다. 


"지금은 저녁이고, 나는 언제나처럼 침실의 차가운 창턱에 올라앉아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다. 내게는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아침이면 희망이 있고, 저녁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는 절망과 분노와 좌절과 체념이 있고, 저녁과 아침 사이에는 행복과 희망이 있다. 어린 시절은 그 사이를 매일 오가면서 멀어져 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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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shire Crossing: [a Graphic Novel] (Paperback) - 『체셔 크로싱』원서
앤디 위어 / Ten Speed Pr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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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흥미로운 그래픽 노블. 도로시, 앨리스, 웬디가 모험을 끝내고 돌아간 세상은 그들을 미친 여자 취급한다. 세상과 불화하며 성장한 그들은 더 이상 순진한 여자 아이가 아니다. 그들 셋은 체셔 크로싱이라는 정신병원에 모이고, 가장 까칠해진 앨리스가 도로시의 은색 구두로 오즈로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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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노트 (컴포지션 에디션) - 할 말은 많지만 쓸 만한 말이 없는 어른들을 위한 숨은 어휘력 찾기
유선경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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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를 매일 하지는 않지만, 생각날때마다 필사는 꾸준히 찾는 취미이자 공부이자 마음다스림이다. 

영어 필사의 경우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 안된다 말이 많고, 나는 도움이 된다는 쪽이다. 다만, 능동적으로 외워서 하는 경우. 

생각 못했는데, 그 동안 나온 필사책들이 필사를 위한 필사였다면, 요즘은 이렇게 '어휘력' 늘리는 필사책들이 눈에 띈다. 아, 그러네, 우리말 어휘력도 필사로 늘 수 있겠구나.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 는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인데, 컴포지션 노트 버전의 양장이라 책이 아주 예쁘다. 

도착한 후, 아침에 눈 뜨면 아무 곳이나 펴서 책 점 보듯이 필사를 하면서 그 날의 키워드를 찾아봤다. 





저자의 머리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 많은 이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이 변하겠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세상을 대하는 당신이 변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세상은 그 후에야 변하겠지요.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시작은 '앎'에 달려 있습니다." 


글자를 깨우치고 나서는 늘 책을 읽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읽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식물을 팔던 시절에 그거 화분 하나 사간다고 공기 정화가 뭐 얼마나 되겠나요 싶지만,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없는 거보다는 낫겠지요.' 라고 답하곤 했다. 하지만, 식물이 산소를 내뿜어서 공기가 정화되는 것보다 식물을 돌보며 얻게 되는 마음 정화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책 읽기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문해력이 갖춰져야 학업도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사실이고, 중요하지만, 역시, 책을 읽으면서 알아가는 세상 속의 나와 타인에 대한 감각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SNS를 포함한 인터넷에서 더욱 전파력이 크고 강한 밈이 말을 지배하는 때에 어휘력을 늘리는 것은,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변을 변화시키는 것은 맞으니깐. 

그리고,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른 무엇도 아닌 '책'을 들이밀며, 읽으세요, 써보세요. 하는게 좀 좋았다. 


어떤 동기로 시작하든 많이 읽고 쓰면 좋겠다. 


이 책의 또 하나 좋은 점은 다양한 한국 작가들, 해외 작가들의 작품들을 짧게 나마 접해볼 수 있다는 것. 읽고, 쓰다보면,아, 이 책 읽어야지 싶은 책들을 많이 만나고, 내가 고르지 않았을 책들도 만나서 책 편식을 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나서 반가웠던 책들 


프랑수아즈 사강 <패배의 신호> 

산도르 마라이 <결혼의 변화> 

한강 <희랍어 시간> 

전혜린 <긴 방황> 

미야시타 나츠 <양과 강철의 숲> 

사이하테 타히 <I like it> 

다비드 르 브르통 <침묵> 

호프 자런 <뿌리와 이파리> 

카렌 블릭센 <아웃 오브 아프리카> 

빅터 프랭클 <비통과 환멸> 


이 외에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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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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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에서 소설가, 작가, 비평가 등의 전문가들이 꼽는 21세기 최고의 책 100 권을 매 주 업데이트했고, 15위에 '파친코'가 있었다. 이전에 읽다 말았던 책을 다시 끝까지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4대에 걸쳐 역동적인 현대사를 살아남은 가족의 이야기이다. 등장인물들이 다 인상적이다. 이 시대의 이야기들을 읽는 것은 그 배경때문인지, 더 분명하고 뚜렷한 캐릭터들을 만날 수 있다. 요즘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시대 반영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희미한 캐릭터들인 것과 비교된다. 


페이스가 빠르면서도 강렬한 순간들이 인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활력이 강하고, 판단력이 있으며, 살아남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는 평은 이삭의 선자에 대한 평이지만, 같은 이유로 한수에게도 선자는 특별했다. 선자가 이삭과 함께 오사카에 가서 경희와 요셉을 만나게 되는 장면의 여운이 길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에서 각 등장인물들의 첫 만남들이 다 기억에 남는데, 한수와 선자의 첫 만남, 선자와 이삭의 첫 만남, 선자와 이삭과 경희와 요셉과의 첫 만남 등등 정말 힘든 상황에서 화합하고, 연대하는 것이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고, 그렇게 화합하고 연대할 수 있는 유전자가 오래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렸다. 전쟁은 이유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꽁꽁 뭉쳤다. 책에 나온 것과 같은 끈끈한 관계들은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그나마 버틸 수 있게해 주었을 것이다. 그런 부분들이 갑갑했다. 특히 요셉. 강인하고 영민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요셉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경희, 이삭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선자. 선자와 가족들을 살린 한수에게만 자신이 받을 것과 받지 않을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선자가 한수의 도움을 끝까지 받지 않은 것은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이삭과 요셉의 말을 거역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 여자의 한계인 것 같아서 갑갑했다. 가부장제가 없었다면, 선자와 경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도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라 알지 못하지만, 상상해보고 싶다. 


"요셉은 희망에 차 있는 듯했다. 오사카에서 살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다 나아지기 마련이었다. 가진 것이 돌멩이와 쓰디쓴 고난뿐이라도 얼마든지 맛있는 국을 끓여낼 수 있을 것이다." (171)


요셉이 좋아하는 동생 이삭을 만나고 희망차하는 이 장면의 이 말이 좋았는데, 역사를 알고, 소설을 알다보니, 맛있는 국을 끓여내지만, 시대가 밥상을 엎을텐데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든다. 역사소설을 읽는 묘미라고 생각한다. 


"선자는 경희를 언니라고 불렀고, 둘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좋았다.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에 두 사람 사이의 정이 두터워졌다. 행복을 크게 기대하지도 요구하지도 않던 두 여자에게 이런 우정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199) 


선자와 경희의 관계가 읽는 내내 좋았다. 처음 김치를 팔러 나간 선자에게 경희는 "우리는 좋은 한패야" 라고 말한다. 

그 부분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경희의 미모와 단아함은 책을 읽는 내내 언급되는데, 드라마 캐스팅 봤다가, 아니,책 속의 경희가 저기 있네 싶었다. 선자와 한수 캐스팅도 좋아보였고, 나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침 시즌2도 나왔으니 드라마도 보려고. 



'파친코' 같은 책을 읽는 경험을 하고나면, 현실로 돌아와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좀 더 수월하게 느껴진다. 더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여지가 늘어난 기분이기도 하다. 지금 내 고민들이 사소해지고, 매 순간 감사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다음에 파친코를 읽을 때는 원서로 재독해보고 싶다. 또 다른 느낌이겠지. 원서 리뷰 쓰는 날을 기약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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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미롭고 간절한 위픽
은모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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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든 작가의 책은 처음 읽는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은모든 유니버스에서 온 유니버스라니 좀 더 읽어봐야겠다 싶다. 


위픽의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이게 뭔가 싶었다. 도서관에서 처음 만났고, 너무나 잘 빠진 양장본 디자인에 단편 하나 길이가 완성된 책으로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었다. 작고 얇은 시리즈의 책들이 새로운 건 아니다. 위픽 시리즈도 나온지 좀 되었고, 생각나는 시리즈만도 네다섯개 이상이 바로 떠오른다. 그 중에서도 위픽 책이 특히 더 짧은 단편들도 많고, 편집도 헐렁해서 적은 분량이 눈에 띄는 것 같다. 두꺼운 책들도 있지만 대부분 단편에서 중편 분량이고, 겉이 더 반지르해서 책값에 예민한 독자들의 버튼을 누르는 것 같기도 하다. 제일 많이 나오기도 했고. 


나는 몇 권 읽기 시작하면서 이 책의 미덕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팬이 되었는데, 이미 이 책은 시리즈 중 몇몇 인기 있는 책들을 포함하여 기존 한국 소설 독자들의 굳건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책이 예쁘다. 디자인이 파격적이다. 나는 대부분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있어서 제목과 작가가 있는 책띠 없이 가장 인상적인 발췌 문장이 있는 표지를 보고, 책등의 작은 제목을 보고, 겉표지를 열어서 작가 이름을 확인하고 있다. 제목과 작가 이름이 잘 안 보임. 발췌 문장을 책 표지에 메인 디자인으로 과감하게 박았고. 


잘 몰랐던 작가들을 알게 되고, 잘 읽지 않던 한국 소설을 읽는 양이 확 늘어나고,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어서 다양하게 시도해보고 취향을 넓히거나 좁힐 수 있게 된다. 


책을 아주 많이 읽던 시절, 한국 소설만은 좀 거리를 둔 적이 있다. 너무 가까워서 구질구질한 느낌이라 그랬던 것 같다. 요즘 한국 소설들을 읽기 시작하면서 역시나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근데, 어릴 때는 구질구질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지금은 그 또한 어떤 한 부분임을 겪어 왔고, 알게 되고, 그런 솔직하다못해 적나라한 감정들과 상황들을 책에서 만나게 되고, 그와 같이 놓치고 지나가는 작은 소소한 부분들을 조명해서 보게 된다. 


은모든의 이 책이 그랬다. 

읽고 나니 크게 기억에 남거나 인상적인 것은 없지만, 춘천 이야기구나. 맛있는 닭갈비는 뒷 맛으로 생강향이 나고, 외지인들은 그 생강향을 카레맛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이런 것들. 그리고, "별일 없는지 이제 서로 자주 좀 들여다보고 살자." 라는 표지의 말을 남겼다. 지난 시간들처럼 한 번 보자는 말로 이어질 수도 있겠고, 이제 자주 좀 들여다볼 수도 있는, 둘 중 어떤 것이어도 이상하지 않은 익숙한 이별의 말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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