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身邊雜記 170612

 

- 정치적 상황

 

이전에 고 노무현 대통령을 정조에 비유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의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상황이 정조보다 정암 조광조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요즘 내각 청문회 소식을 접하면서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상황이 오히려 정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 판단이 맞다면, 정조의 실책이 반복될 가능성도 높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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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讀書記錄 170612

 

낯선 시선

 

친하지 않은 사람과, 친하더라도 대화 주제에 금기시 되는 것에 페미니즘채식주의가 있다.

 

p70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다음 생에 쥐로 태어날 것이다.”/그러나 이 글귀를 본 순간 반감이 확 들었다. 조금 과장하면 섬뜩하기까지 했다. 자기가 고양이를 좋아하면 그만이지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을 적대시, 아니 고양이 먹이로 간주하는 이 저주에 가까운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개와 고양이,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 이야기를 해 보자. 보신탕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내 편견에 의하면 알라디너 대부분은 보신탕에 반대할 것으로 예상한다.) 나는 보신탕에 반대하는 것에 반대하는데 (논쟁적 대화나 TV 토론에 이 주제에 대한 나의 의견은 특히 그렇다.), 이것이 보신탕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모임에서 삼계탕 먹으로 갈래, 보신탕 먹으러 갈래 하면, 나는 삼계탕으로 고른다. 나는 보신탕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보신탕 음식점에 갈 때, 회피하지 않는다. 보신탕 음식점에 가면 보신탕을 먹는다. 나는 보신탕이 사라져야 할 문화라고 생각지 않으나 사라져가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고양이에 대한 관점이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인간을 떼어놓고 보는 자연의 관점에서 -고양이는 돼지, 소와 다를 바 없는 포유강의 개과, 고양이과 동물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보신탕은 그냥 문화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 중심 관점에서 보면 개-고양이는 인간과 특별한 친밀 관계를 갖는다. 사람과 동물 친밀도를 나타내는 그래프가 있다면 개와 고양이는 다른 동물과 달리 불연속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질문은 이렇다. 어떤 것의 친밀도로 말미암아 윤리-도덕적 위치를 정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장관의 가족은 장관과의 친밀도가 높으므로 어떤 특권을 공유하는 것이 타당할까? (일부는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이 법적인 범위를 넘어서,) 특권을 공유한다면 부정의하고 비리라고 생각한다. 군인 장성 배우자는 영관 배우자에게 권력행사를 할 수 있을까? 나치는 동물보호법을 만들었다. 나치들에게는 애완동물이 유대인보다 친밀도가 더 높았다.

 

-고양이 사료를 보면, 닭고기나 연어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의 애완동물을 위해 공장식 축산으로 닭이 사육되거나 공장식 양어장에서 연어가 사육되는 타당한가? 닭이나 연어의 입장에서 인간과의 친밀 관계에 따라 -고양이-연어-돼지-의 불평등한 대우는 부정의하고 비리입니다. 인간의 독재입니다.’라고 생각할 여지가 없을까?

 

공개 토론에 참가한 보신탕 반대자들은 채식주의자가 대부분이다. 채식주의가 건강에 문제 없다는 단발성 보고에 비해 건강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보고는 더 많다. 우리는 건강 문제를 안고서라도 모두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보신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명 존중을 언급할 때, 이렇게 반론할 수 있다. 당신은 치맥(치킨과 맥주)를 좋아하고,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채식주의자입니까. 나 역시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보신탕, 캣맘 논쟁은 (동물의) 생명 존중이 아니라 나(인간)와의 친밀관계다. (마치 나치의 논리처럼.)

 

내가 어느 알라디너에 페미니즘이 종교화되고 있다고 했다. 상대 알라디너는 내 말처럼 페미니즘이 종교화되었다면, 그 당사자에게 페미니즘은 정말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인데,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을 하면 그만큼 더 불편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마치 페미니스트에게 페미니즘처럼, 고양이를 좋아하고 키우는 사람이 고양이를 중요하고 핵심적으로 여겼다면 ;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을 적대시, 아니 고양이 먹이로 간주하는 이 저주에 가까운 사고방식 낯설지 않다. 우리는 친밀관계에 따라 이성과 감성을 동원하여 자기합리화하는 자기중심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궁금증] 자연이 인간보다 위대한가, 인간이 자연보다 위대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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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6-12 15: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보신탕을 먹지는 않습니다만, 보신탕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 생각됩니다. 누군가에겐 ‘친구‘가, 누군가에게는 ‘고기‘로 보여진다면, 이에 대한 논의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 밖에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마립간 2017-06-12 14:04   좋아요 2 | URL
그렇죠.^^ 저는 제 논리-이성, 지식, 감정, 직관에 의해 기준이 서지 않을 때, 사회적 기준을 default로 삼습니다.

(제가 보신탕을 먹은지 10년도 더 넘어가네요.)

cyrus 2017-06-12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하더라도 금기시되는 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정치.

마립간 2017-06-13 08:02   좋아요 1 | URL
그렇죠. 정치. 종교, 페미니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의 통로가 대화 이외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종이달 2021-10-1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 讀書記錄 170609

 

시적 정의서평 별점 ; ★★★ 구매

 

한 달도 더된 어느 날 (4월 중순, 4월 말?)에 어떤 신체 활동을 하다가 꼬꾸라졌다. 나는 양쪽 다리에 꽤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내가 나의 신체 능력을 (나이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것인가?) 과대평가한 것이다. 이때 내 곁에 안해와 아이가 함께 있어 그 광경을 목격했다. 나는 야단을 맞았다. 안해는 나이를 고려했을 때, 하지 말아야 행동을 했다고 했다.

 

딸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나와 안해는 아이의 울음을 달랬고, 안해는 내게 딸 키운 보람이라고 했다.

 

우선, 이때의 나의 감정은 어이없음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기에, 그 동안 아이를 달랬고, 집에 돌아와 침착하게 아이가 운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아이가 왜 울었을까? ; 아이는 자신과 친밀관계에 있는 아빠가 다친 것을 자신이 다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만약 아이가 딸이 아니고 아들이었어도 그리 울었을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안해는 내게 아이 키운 보람이라고 하지 않고 딸 키운 보람이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여성의 공감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하니.

 

그러나 내 판단에는 아이가 운 상황공감이라는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감정은 어이없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내 생각-감정 공감했다면 어이없음을 느껴야 했다. 그러나 아이가 느낀 것은 고통-슬픔이었다. 아이의 행동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이입이다.

 

p33 문학 작품은 일반적으로 독자로 하여금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게 하고, 또 그들의 경험과 마주하게 한다.

p88 우리 스스로를 친구로서의 공감과 감정을 이입하는 동일시를 통해 등장인물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그들의 운명을 나의 운명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독서라 함은 동화책 또는 위인전을 읽는 것이었고, 중학교 시절 이후는 소설을 읽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중학교 때, 친구가 내게 가 좋으냐, ‘소설이 좋으냐고 물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내가 한참 동안 주저주저했기 때문이다. (결국 답은 시로 했다.)

 

내가 소설을 읽고 어떤 감상과 판단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참 독특하네요’, ‘참 특이하네요라는 평가를 들은 적이 많다. 소설이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의 입장에 서게 하고, 또 그들의 경험과 마주하게 하고 공감과 감정을 이입하는 동일시를 통해 등장인물들과 관계 맺음으로써 사고 체계를 바꿔주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 결과는 동일하지 않다소설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소설의 의미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에서 보다 잘 설명되어 있다.

 

내가 회의하는 것은 오직 소설만이’, ‘오직 문학만이라고 표현할 것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비유해서 설명하면 산의 정상()에 오르려 할 때, ‘라는 등산로, ‘소설이라는 등산로, ‘물리학이라는 수학이라는 등산로가 존재하는데, 산의 구조상 소설이라는 등산로를 경유하지 않고는 정상에 오를 수 없는 것이 진실이냐 하는 것이다.

 

p247 휘트먼과 같이 나는 시민들이 갖는 다양한 자유권과 평등권의 중요성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은 이러한 권리들을 다루는 데 소중한 길잡이를 제공한다./p248 그는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그리고 상상력을 통해서 배제된 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고, 그들의 감정은 인정받는다고 단언한다.

 

심지어 지혜롭고 경륜이 높은 어느 할머니는 (소설은커녕) ‘독서조차 하지 않고 그 경지에 있다. 내가 착각한 것일까?

 

뱀발] 1) 내가 독서에서 얻은 것이 많을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권 强勸할 정도로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하기야 내가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이 있기나 했냐마는.)

2) 존중받아야 될 문학, 소설이라는 주제가 전부라면 ; 차라리 소설 한 권을 더 읽을 것 그랬다. 내가 문학이나 소설을 얕잡아 본 적은 없다.

3) 시적 정의, 문학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주제라면 ; 단편적으로 친일 문학이 존재한 것이 반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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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6-09 13: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겠지만 소설의 가치를 말하라면, 내가 타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하면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가 나와 다른 점을 발견하는 것, 일의 전후를 살펴 인과 관계를 분석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간접 경험을 할 수 있어 경험의 폭을 넓일 수 있는 것 등이 아닐까 싶어요.

예를 들면 전쟁 중, 오랫동안 굶주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소설을 통해 알 수 있게 되거든요. 예전에 읽었던 어떤 소설에서 기억나는 게 있는데, 오랫동안 굶주리니까 죽은 시체도 구워 먹고 물이 없으니 소변을 마시기도 하더군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라 이런 게 소설의 가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인간 이해, 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 예를 들면 어느 친척 집이나 친구 집에서 더부살이로 지내던 사람은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나중에 은혜를 갚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그 이유는 더부살이로 지내면서 자기를 위해 주는 사람에게 고마움보다 자존심이 상한다든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으로 또는 동정 받는 것 같아서 오히려 그 대상이 미워진다는 거예요. 이것 역시 소설을 통해서 저는 알았거든요. 그래서 소설 읽기는 인간 이해에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어요. 사견입니다. ㅋ

마립간 2017-06-09 14:06   좋아요 2 | URL
pek0501 님, 안녕하세요. 댓글 감사합니다.

댓글에서 언급하신 소설의 가치 또는 유익성은 이해하겠는데, 그것이 꼭 소설이어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죠.

오랫동안 굶주리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느 친척 집이나 친구 집에서 더부살이로 지내던 사람은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나중에 은혜를 갚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는 경우 ;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 공감, 감정 이입이 영화로, 또는 통계 숫자로, 수필이나 시로써도 가능하지 않나요?

페크pek0501 2017-06-09 14:32   좋아요 2 | URL
예, 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요. 영화는 도대체 주인공의 속마음을 알 수 없거든요.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소설은 주인공의 속마음을 두 페이지 이상 쓰기도 해서 더 잘 알 수 있었어요. 내면 묘사의 효과.

시나 수필로는 설명되기 어려울 듯해요. 분량이 짧아서 전후 사정, 상황을 길게 쓰게 어려잖아요. 또 길면 시나 수필의 문학적인 맛이 떨어지지요. 수필은 예전에 원고지 15매 내외였는데 요즘 짧아지는 추세라고 합니다. 함축성, 압축의 미를 보여 주는 장르가 시와 수필이라고 봐요.

통계 숫자는 무의미할 것 같아요. 사람의 뇌리에 잘 기억되지도 않을 거예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이지
깊게 뇌리에 각인되게 하려면 그 상황 속에 있는 인물을 보여 주는 소설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봅니다.
감정 이입과 공감과 인간 이해를 해야 더 잘 기억되지요.

예) 독거 노인의 생활이 어렵다, 생활비가 없어서 혼자 겨울에 방에서 얼어죽는 경우가 한 해에 만 명이라고 한다, 라고 통계를 보도하면 도울 사람이 적을 거예요. 눈물도 안 나올 거예요. 그런데 소설로 보여 줘서 독거 노인의 내면까지 들여다보게 해서 그의 고독을 알게 하고, 자살을 몇 번이나 시도하는 장면 등을 묘사해 보여 주고, 배고파 쓰러지는 장면을 묘사해 보여 주고... 등등. 그러면 독자로 하여금 눈물 나게 해서 도울 사람이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혼자 사는 부모님을 한 번 더 살펴보게 되지 않을까요? 통계만 보면 우리 부모님은 안 그러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소설을 통해 훤히 그의 내면을 보게 되면 느낌이 확실히 달라질 듯요.

마립간 2017-06-09 14:50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다른 상황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이번 사항은 제 경험을 일반화하기 곤란하군요. pek0501 님의 의견을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적으로 제 경험은 ;
제가 다른 책에 비해 소설을 읽지 않지만,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제 글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제 100대 책에 가장 많이 포함된 장르는 소설입니다.) 제 개인적 경험은 통계 숫자를 포함해서, 시, 수필, 영화, 다큐멘터리, 그리고 직접 경험까지 포함하여 비슷비슷한 (공감, 감정이입의) 감동을 받습니다. 단편적으로 저는 통계 숫자에 감동을 받기도 하고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페크pek0501 2017-06-09 19:34   좋아요 2 | URL
문제는 재밌는(또는 유익한) 소설을 만나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데 있지 않나 싶어요. 이 세상에 있는 소설 작품들 중에는 3분의 1(또는 4분의 1)만 재밌다는 사실입니다. 세 권 읽으면 두 권은 괜히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들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가정이 가능해요. 저는 제가 읽은 소설 중에서 괜찮았던 소설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고 마립간 님은 전체 소설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고...ㅋ

사실 저는 단편소설집을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그 이유는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입니다. 제가 문학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해서겠지만.

장편소설 중에서 좋게 읽었던 것 두 권만 말한다면(지금 생각나는 것으로)
이승우 저, <생의 이면>
이청준 저, <당신들의 천국>입니다.
두 작품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토대로 썼다고 느끼며 읽었고, 소설의 맛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작품 같았습니다.

오늘 마립간 님 덕분에 소설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굿밤 되시길...

커피소년 2017-06-12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립간님의 글을 읽고 뜨끔했습니다. 공감과 감정이입에 대한 구분.. 새로운 발상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감정은 어이없음인데 따님께서 공감을 했다면 같은 어이없음을 느껴야 하는데 그건 공감이 아니라 감정이입이었죠.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사실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의한 감정 이입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 확실히 따님께서는 마립간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감정만 생각한 감정이입이 타인을 상처 입히기도 하니 부정적은 측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이입 또한 긍정적인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컨대 폭력적인 상황에서 저는 그것이 폭력이라 생각하여 도움을 주고 싶지만 상대가 그러한 것을 폭력이라 생각하지 않고 정당하게 받아들였을 때 저는 그를 도와준 것이 일개 감정이입으로 치부 받은 기억이 납니다. 저 또한 그 상황에 공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이지요.


“아이가 왜 울었을까? ; 아이는 자신과 친밀관계에 있는 아빠가 다친 것을 자신이 다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만약 아이가 딸이 아니고 아들이었어도 그리 울었을까? 그렇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래서 안해는 내게 ‘아이 키운 보람’이라고 하지 않고 ‘딸 키운 보람’이라고 했다. 통상적으로 여성의 공감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하니.”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여성의 공감능력이 높다는 것 또한 남성에 비해 공감을 잘한다기보다 마립간님의 말씀대로 감정 이입을 잘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공감능력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쉽게 가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공감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읽는 다는 것인데 그러한 것이 쉬었다면 심리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나올 리가 없었겠지요. 저 또한 감정이입을 공감이라고 착각해서 써왔던 것에 대해 저의 무지를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항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글을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마립간 2017-06-12 15:27   좋아요 2 | URL
이 글의 경우 혼동하기 쉬운 감정이입과 공감을 구별했지만, 제 경험과 지식에 의한 여성이 남성보다 (감정이입뿐만 아니라) 공감도 뛰어납니다. 제 경험은 개인적인 것이고,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조차 확률적 지식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讀書記錄 170609

 

낯선 시선

 

p50 굉음과 광속을 뿜는 자본주의를 어떻게 연착륙시킬 것인가. 인간의 각성과 폭력적 개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올림픽 중계를 보면 올림픽의 꽃으로 마라톤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설자에 따라서는 체조를 언급하기도 한다. (관점이 다른 것이고 양쪽 모두 일리가 있다.) 반면 자본주의 꽃으로 주식(이나 경매)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고, 호텔이나 백화점을 언급하는 사람도 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도서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가부장제(반페미니즘)와 자본주의 유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개 동의한다. 자본주의가 수도 水道나 세탁기 발명으로 여성의 육체노동을 상당부분 덜어냈지만, 권력 구조는 호전시키지 못했다. (악화시킨 면도 있다.) 부탄이라는 국가는 남성 대비 여성이 권익이 가장 높은 나라이지만, 이 나라는 p50 (자본주의가) 글자 그대로 비약 飛躍하고 있지 않는 나라이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양성 평등 사회인 사회를 경험하고 싶다면 부탄으로 이민 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는 자본주의를 따라 이주하는 성향을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강남을 진출했다는 표현과 서울에서 외곽으로 밀려났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자본주의의 (독이 든) 열매를 대부분은 남성이 향유하거나 자동차와 같이 여성이 남성을 통해 (대부분의 수식어를 기억하길 바란다.) 향유하지만, ‘백화점은 성비대칭적으로 여성이 향유하고 있다.

 

여성(들이 또는 페미니스트)들이 백화점을 거부함으로써 p50 굉음과 광속을 뿜는 자본주의를 연착륙시킬 수 있을 것인가?

 

p49 개성은 소비를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는 개성은 존중하지만 인권은 억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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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6-09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낯선 시선>은 저도 요즘 읽고 있는 책입니다.

마립간 2017-06-09 14:07   좋아요 1 | URL
pek0501 님의 리뷰와 그리고 그 리뷰 속에 제 독후감에 반론을 기대하겠습니다.^^
 

 

* 讀書記錄 170608

 

natural running

 

자세를 바꿔 달려보자.

 

* 밑줄긋기

p48 러닝화에 쿠션을 넣은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p49 신발이 점점 무거워지고 부드러워지면서 여전히 자연스러운 달리기 역학을 따라 훈련을 받던 정상급 선수들에게는 도움이 덜 되었고, ...

p56 치러닝 ChiRunning, 진화론적 달리기, 걸음 역학, 맨발 달리기 등의 최근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약간 몸을 앞으로 숙이고 짧은 보폭과 엉덩이 바로 밑에서 디디는 이런 자연스러운 달리기 기법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p59 중간 발로 디디는 것

p60 자연스럽고 중간 발을 뛰는 것 같은 가벼운 신발을 추천하다.

p69 달리기는 간단하지만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나 기술 없이 한 다리를 들은 후에 다음 다리를 디디는 것처럼 마냥 간단하지만은 않다.

p89 뒤꿈치로 내딛기는 운동과 적응을 시작하는 것이고 걷는 걸음에서 주로 사용된다.

p91 달리기는 걷는 것이나 질주하는 걸음걸이가 아니다. 달리기는 지표면과 가볍게 인지하고 나머지 부분은 그 다음에 가볍게 땅에 내딛는다.

p100 자연적인 표면에서 맨발로 달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p133 몸의 중심 아래에서 발의 중간과 앞부분으로 가볍게 디디고, 약간 앞으로 상체를 기울인 체 서서, 팔꿈치를 90도로 구부리고 몸에 가깝게 붙여 팔을 흔드는 자세를 취하며 약간 보폭을 넓게 하는 자연스러운 달리기는 달리기 할 때 최적의 경제성을 가져다 줄 수 잇다.

p150 내가 그에게 괜찮으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나에게 죽어도 괜찮으니까 나는 완주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나는 그의 저런 태도가 곧 비극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p151 이것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곳에 너무 빨리 도달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으로 패스트푸드 사고방식이라고 부른다.

p166 그들은 이미 비효율적으로 달리는 달리기에 효율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p167 몸을 자연스럽게 달리도록 바꾸는 것은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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