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achability
어제 재미있는 단어를 봤다.
coachability ; The state or condition of being coachable. [네이버 영어사전]
‘coachable’를 다시 해석해야겠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 대부분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한다.
뉴턴은 “내가 만약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올 6월 <사단칠정 자세히 읽기>를 읽고 몇 편의 독후감을 알라딘에 올렸다. 그런데 아직 독후감 메모에 남아 있는 내용이 있다. 이 메모는 교육에 관한 것이다. 주기론 입장에 선 이이는 독경 讀經에, 주리론 입장에 선 이황은 사색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 독후감은 <길들여지는 아이들>을 읽고 함께 정리하려 하였으나, <길들여지는 아이들>을 완독하지 하지 못해 이제까지 미뤄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벨상 또는 필즈상에 대한 관심에 높은데, 이 상에 대한 수상조건은 (사회적 조건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학문적 업적인데, 객관성과 창의성이다.
나는 아이가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아이의 단점을 메워줄 것인지 아니면 아이의 장점을 키워 줄 것에 대한 고민의 글을 알라딘에 올린 바 있다.
최근에는 ‘창의성’이 흔히 언급되지만, 이 단어는 근세 이후 특히 최근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그리고 지식 노동자 시대의 종말을 고하면서 강조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성실성이 압도적으로 많이 언급되었다.
의사가 아는 것도 많은데, 수술도 잘 하면 이상적이다. 조선시대의 신하는 평화시대에 재상으로 행정능력을 발휘하고, 전쟁에서는 장수로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남자 친구가 직장에서 워커홀릭보다 더 일을 잘하길 원하면서, 동시에 가정에 충실하길 원하다. 자신의 아이가 신나게 뛰어 놀면서 신체적으로 건강하길 원하면서 동시에 공부를 잘해 전교 수석을 하길 원한다.
‘성실성’에서 ‘창의성’으로 그리고 다시 ‘coachablility’로.
뱀발 ; 냉장고 광고카피, ‘여자라서 행복해요’라는 말은 우리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을 봤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coachablility’를 논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