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2 호/2011-10-21

호르몬으로 미래 직업까지 알 수 있다고?

모둠숙제를 한답시고 친구 다섯 명을 집으로 집결시킨 태연, 숙제는 열어보지도 않고 신나게 노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인형놀이와 종이접기에 푹 빠진 친구들과는 달리, 태연은 장난감 총과 칼로 얌전한 친구들을 방해하는데 여념이 없다. 한참 동안이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 급기야 태연과 친구들을 일렬로 앉혀놓고 잣대로 얼굴 사이즈와 손가락 길이를 재기 시작한다. 태연과 친구들, 아빠의 돌발 행동에 어리둥절하다.

“아빠,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흠…,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친구들에 비해 얼굴이 너부데데하고 약지도 길쭉한 것이, 태연이 너한테 미약한 CAH(선천성부신과형성증) 증상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구나. 정확한 건 병원에 가서 직접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말야.”

“네에??!! 그게 뭔데요! 혹시 불치병에라도 걸린 건가요? 몇 개월이나 살 수 있대요? 흑흑~. 그동안 불효했던 저를 용서해주세요, 아빠….”

“불효녀라는 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네가 불치병에 걸린 비련의 연속극 주인공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구나. CAH는 부신과 성선의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부족해지는 유전질환이란다. 엄마 뱃속에 있는 여아가 안드로겐(androgen), 즉 남성호르몬에 지나치게 노출된 경우에는 남자 같은 성향을 보이고 반대로 남아가 여성호르몬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여자 같은 성향을 보이는 증상을 말하지. 또 태아는 남성호르몬에 많이 노출되면 될수록 얼굴이 좌우로 넓고, 검지에 비해 약지가 길다는 특징을 갖게 된단다. 그런데 태연이 넌 놀 때도 남자애들처럼 총이나 칼을 좋아하고, 얼굴은 넓으며, 약지는 긴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CAH가 약간 있는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야.”

“네에? 그럼 곧 남자가 돼 버리는 건가요? 흑흑, 몇 개월이나 남았어요? 얼마나 여자로 살 수 있을까요?”

“아이고, 오버 좀 하지 마! CAH는 심할 경우 스테로이드 호르몬 부족 때문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약한 CAH를 보이는 사람은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어요. 남성적인 점을 잘 살려서 오히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휴우~~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시지, 완전 겁먹었잖아요!!”

“얼마 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의 한 연구진이 9~26세의 남녀 125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CAH가 있는 여성은 엔지니어나 제트기 조종사처럼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사회복지사나 교사와 같은 직업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단다. 실제로 커서 남성적인 직업을 갖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다시 말해 호르몬만 가지고도 그 아이가 커서 어떤 직업을 갖게 될 것인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연구진은 여자 아이들이 CAH가 있는지 없는지를 일찌감치 파악해서, CAH가 있는 아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과학·기술·공학·의학(STEM)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단다. 아이의 특성을 빨리 파악해 맞춤형 교육을 해주는 거니까 그만큼 성취도도 높을 거라는 얘기지.”

“아, 그러니까 아빠는 제 적성을 미리 파악해서 능력을 키워주려는 것이었군요. 홍홍홍! 역시 아빠는 나만 사랑한다니깐~~.”

이때 이야기를 듣던 말자가 끼어든다.

“그런데요, 정말로 궁금했던 게 있어요. 검지에 비해 약지가 긴 사람은 남성호르몬에 많이 노출된 경우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약지가 긴 사람이 돈도 잘 번다는데 진짜예요?

“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야. 남성호르몬이 많은 사람들은 승부욕이 강하고 공격적이며 매우 적극적인 경우가 많단다. 아무래도 그런 사람들이 승부욕이 적고 수동적인 사람들 보다는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이 높지 않겠니?

“그럼 얼굴이 널찍한 사람들도 부자가 많겠네요?”

실제로 미국 밀워키캠퍼스의 한 연구진이 미국 최대기업 55개사의 CEO 얼굴을 분석해 본 결과, 널찍한 얼굴의 CEO가 이끄는 회사는 뾰족한 얼굴의 CEO가 경영하는 회사에 비해 재무적으로 훨씬 뛰어난 실적을 거둔 것으로 확인됐단다. 또 복싱 같은 격렬한 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넓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어. 남성호르몬이 치열한 승부세계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들이지. 또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도 호르몬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이해가 된단다. 용감한 자 즉, 남성호르몬이 많은 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미인에게 구애를 할 수 있으니 미인의 사랑을 얻을 가능성도 훨씬 높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반대로 남성호르몬이 많은 사람들은 지나친 승부욕으로 인해 반칙을 하거나 무모한 위험을 무릅쓴다는 연구결과도 많단다.

“그럼 어차피 저는 남성호르몬 과다 분비자랑 결혼할 수밖에 없겠네요. 남성호르몬이 적은 사람은 저 같은 미인에게 감히 도전하지도 못 할 테니까요. 그런데 태연이 아버지는 어떤 쪽이세요? 남성호르몬이 많은 쪽? 적은 쪽? 태연이 어머니가 미인인 걸로 봐선 많은 쪽이신 거 같아요. 얼굴도 태연이처럼 너부데데하시잖아요.”

“허허, 참. 나의 남성미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모양이구나.”

아빠와 말자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태연이 아빠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소근거린다. 순간 아빠의 얼굴이 허옇게 뜨더니만 급히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태연에게 준다.

“뜻밖의 용돈 완전 감솨! 아빠가 원래는 뾰족 턱인데 넘치는 턱살 때문에 넓적해 보인다는 진실, 그리고 아빠의 찌질한 모습이 불쌍해 보여 모성애를 발휘한 엄마가 그냥 결혼해주기로 결심했다는 진실, 이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을 제 친구들에게 영원히 비밀로 해드립죠. 헤헤헤”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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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63 호/2011-10-21

은행알은 왜 고약한 냄새가 날까?
해마다 가을을 알리는 냄새가 있다. 도심의 가로수 길을 걷다보면 구수(?)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바쁜 출근길 직장인들이 자기도 모르게 지그재그로 걷고 있다. 바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은행알 때문이다. 자칫 바닥에 떨어진 은행나무(Ginkgo biloba)의 종자를 밟으면 과육질이 구두에 묻어 회사 사무실에서 불쾌한 냄새를 풍길 수 있다. 은행알에서는 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일까?

개나리나 목련, 진달래와 같은 나무는 수꽃과 암꽃이 한 그루에서 피기 때문에 모든 나무마다 열매가 열린다. 반면 은행나무는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 자라서 암나무에서만 종자가 난다. 우리가 흔히 은행나무 열매라고 알고 있는 은행알은 실은 열매가 아니라 은행나무 종자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 학문적으로 은행나무는 침엽수(나자식물)에 속하고 자방(종자가 들어있는 방)이 노출돼 있어 열매가 생기지 않고 종자만 생긴다.

은행알 특유의 고약한 냄새는 암나무에 열리는 종자의 겉껍질에서 난다. 겉껍질을 감싸고 있는 과육질에 ‘빌로볼(Bilobol)’과 ‘은행산(ginkgoic acid)’이 함유돼 있기 때문이다. 수컷 은행나무만 골라 가로수로 심으면 도심에서 고약한 냄새를 없애는 것이 가능하다.


[그림 1]은행알은 암나무에서만 열리며 특유의 고약한 냄새는 종자의 겉껍질에서 난다. 사진 출처 : 동아일보그러나 은행나무는 어른으로 자라나 종자를 맺기 전까지 암수를 구별할 방법이 없다. 어린 은행나무는 심은 지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야 종자를 맺을 수 있는데, 다 자란 다음에 암수를 구별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이처럼 은행나무는 손자대에 가서야 종자를 얻을 수 있다고 해 ‘공손수(公孫樹)’란 별칭이 있다. 수명이 긴데다 종자의 결실도 매우 늦다는 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2011년 6월 국립산림과학원이 은행나무 잎을 이용해 암수를 식별하는 ‘DNA 성감별법’을 개발했다. 은행나무 수나무에만 특이적으로 존재하는 DNA 부위를 검색할 수 있는 ‘SCAR-GBM 표지’를 찾아낸 것이다. 이 방법을 이용하면 1년생 이하의 어린 은행나무도 암, 수를 정확히 구별할 수 있다.

은행나무는 지구에서 살아온 온 역사가 길다. 식물학자들은 은행나무가 약 3억 5,000만 년 전인 고생대 석탄기 초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살았던 은행나무 가운데 일부는 땅속에 묻혔다가 오늘날 석탄 혹은 석유 형태로 쓰이고 있다.

은행나무는 중생대 쥐라기 때 가장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룡들과 함께 지구상에 군림했던 ‘역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공룡들도 뜨거운 태양을 피하려면 키가 큰 은행나무의 그늘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은행나무가 아니라 ‘바이에라 은행나무(Ginkgo baiera)’가 번성했다. 바이에라 은행나무는 현재의 은행나무와 비교하면 잎이 더 많이 갈라진 모양을 하고 있고 키도 훨씬 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바이에라 은행나무는 멸종돼 지금은 화석으로만 볼 수 있다. 중생대 말 백악기가 도래하면서 현재의 은행나무가 번성하기 시작해 1억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변함없는 모습으로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은행나무도 인간의 꼬리뼈처럼 진화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진 못했다. 과연 그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태초에 생명체는 물속에 살고 있었는데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식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육상 환경에 맞도록 자신의 신체를 변화시켰다. 은행나무도 여기에 동참했다. 물속식물은 수컷의 정자와 암컷의 난자를 물속에 뿌려 수분을 맺도록 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식물의 꽃가루에 해당하는 것이 정자다. 물속에서는 꽃가루를 운반해줄 바람이 불지 않는다. 물고기가 벌과 나비를 대신해 꽃가루를 옮겨다 주지도 않는다. 때문에 정자는 여러 개의 꼬리를 달고 물속을 헤엄쳐 난자를 찾아다녀야 했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는 육상에서 자손을 남길 수 없었다. 결국 암컷의 난자는 세포 안에서 수컷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난자는 다른 세포로 둘러싸인 깊숙한 곳에 있으면서 정자가 찾아오길 기다린 것이다.

오늘날 육상식물은 바람과 벌, 나비 등을 이용하기 때문에 운동성을 지닌 꼬리가 필요 없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그런데 은행나무만은 여전히 정자에 꼬리를 달고 있다. 꼬리가 없다면 꽃가루라 불러야 마땅하지만 스스로 움직이면서 운동할 수 있어 ‘정충’이라 부른다. 1895년 일본인 히라세 교수가 정충을 처음 발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정충이 스스로 움직여 이동할 수 있다는 표현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혹은 한 가지에서 이웃가지로 나무껍질을 타고 이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오해다. 암꽃의 안쪽에는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우물이 있고, 이 우물의 표면에 떨어진 정충이 짧은 거리를 헤엄쳐 난자 쪽으로 이동하는데 꼬리를 쓰는 것이다. 은행나무 종자는 원시시절 물속식물이 지녔던 흔적인 것이다.

이제껏 식물학자들은 지구 어딘가에 야생 상태로 자라는 은행나무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중국 쓰촨성과 윈난성 같은 오지를 답사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중국 양쯔강 하류 절강성과 안휘성의 경계를 이루는 톈무산맥의 해발 약 2,000m 지점에서 야생지를 발견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도 과거 중국에서 들어온 외국수종이란 얘기다.

신기한 것은 깊은 산속에서는 은행나무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 있는 은행나무도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듯 깊은 산 속에 자라더라도 인간이 옮겨다 심은 것이 대부분이다. 왜 그럴까?

은행나무 종자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바람에 의해 산 위로 이동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하지만 참나무류 열매인 도토리는 크고 무거워도 다람쥐가 겨울철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옮겨다 땅에 묻는다. 이 가운데 일부는 매년 봄 싹이 돋아나 나무로 자라난다. 그렇다면 은행나무를 옮겨다 심어주는 동물은 없을까?

아쉽게도 종자를 덮고 있는 과육질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고 만지면 피부가 가렵기 때문에 다른 동물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은행알을 먹으며, 다른 곳에 종자를 퍼트려 준다. 인간이 사는 곳 부근에서만 은행나무를 볼 수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은행알의 고약한 냄새는 은행나무가 인간에게만 보내는 비밀 신호는 아닐까?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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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57 호/2011-10-17
 

윌리엄은 숨을 들이켰다. 저 앞에 선 소년이 똑같은 동작을 취하는 것이 보였다.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 앞에서 느긋하게 귀나 후비고 있을 인간은 없다. 목숨을 위협하는 상대가 설령 혈육이라 할지라도.

“왜 활을 들지도 않는 거지? 너무 겁먹어서 다리가 풀린 거 아냐?”

낄낄대며 말을 거는 관리 놈의 더운 입김이 몹시 거슬렸다. 내기고 뭐고, 저 놈의 심장부터 꿰뚫어 버리고 싶다.

“네놈이 지껄여대는 바람에 마음의 평정이 풀린 것뿐이다. 입 닥치고 기다리시지.”
“거 참, 말 험하게 하는군. 내 말 한마디면 네놈의 그 잘난 가족도, 마을도 모두 박살나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좀 더 공손하게 구는 게 어때?”

윌리엄은 한 번 더 숨을 들이켰다. 활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말마따나 마을의 존망이 자신에게 걸려 있었다. 세금으로 마을을 괴롭힌 건 관리지만, 홧김에 활쏘기 내기를 걸어 관리의 성질을 돋운 건 자신이다. 성격대로 굴다가는 가족 뿐 아니라 모두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옆에 있는 건 관리고 뭐고 그냥 소음 덩어리다. 신경을 끄자. 자신에게 한 번 더 주입시킨 윌리엄은 온 몸의 감각을 활을 잡은 손끝으로 모았다. 과녁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과 한 알. 그리고 과녁이 올라가 있는 곳은 사랑해 마지않는 외아들의 머리 위. 수 밀리미터의 어긋남 만으로도 아들의 이마를 꿰뚫을지 모른다. 침착해. 자신을 믿고 쏘는 거다. 우린, 괜찮아.

“쏘겠습니다.”

거울처럼 잔잔해진 마음이 활로 향했다. 길게 당긴 활시위가 팽팽한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가늘게 떨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화살은 곧게 날아가 바닥으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중앙이 멋지게 꿰뚫린 사과와 함께.

“오오!”
“역시 윌리엄이 해냈어!!”
“우리의 승리야! 잘했네, 윌리엄!”

뒤에서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환호가 울렸다. 굳었던 어깨가, 그리고 심장이 조용히 풀려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윌리엄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활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활시위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이유는 멋대로 떨리기 시작한 그의 손 근육 때문이리라.

“자, 제 차례는 끝났습니다. 이제 관리님 측 분께서 쏘실 차례입니다만.”
“아, 알고 있어! 재촉 안 해도 알아서 해!”

입만 딱 벌린 채 - 설마 그 거리에서 명중시킬 줄은 몰랐던 게지 - 멍하니 서 있던 관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와중에도 성질 다 드러내며 큰 소리만 치는 건 천성이 그런 건지, 자리가 그렇게 만든 건지. 겨우 돌아온 여유가 불러온 헛생각을 휘휘 날리며 윌리엄은 다시 소년 쪽을 바라봤다. 역시 여유가 생긴 건지 희미하게 웃고 있던 소년의 입꼬리가, 그러나 차츰 굳어져 갔다. 그의 머리 위에 사과 하나를 더 올리는 손길 때문이다. 오자마자 급히 떠나는 여유의 날갯짓 소리, 풀리자마자 다시 굳어가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때렸다.

“어쩌겠느냐. 겁 없이 내기를 건 내 업보인 것을….”
“뭘 그렇게 구시렁대고 있는 게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진행하자고! 우리 쪽 명사수 대령이시다~.”

어느새 자신만만한 본모습을 찾은 관리의 음성과는 걸맞지 않은 중늙은이 하나가 등장했다. 느릿하게 발을 끄는 폼이 아무리 봐도 ‘명사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윌리엄은 다시 돌아오려는 여유를 애써 밀어냈다.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활을 가르친 스승도 남 보기에는 그저 그런 노인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명사수’의 어깨에 당연히 걸쳐져 있어야 할 물건이 없는 것이다. 활과 화살 말이다.

“활…은?”
“나는 활을 쏘는 사람이 아니오.”

대신 이걸 쓸 거요. 사수가 주머니를 뒤져 꺼낸 물건은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시커먼 덩어리였다. 눈이 동그래진 윌리엄의 마음을 읽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그는 손바닥을 넓게 펼쳐 물건의 전체 형상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엔 작은 통 두 개를 붙인 형태다. 앞에는 스위치? 옆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들여다보던 관리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이상한 물건은 뭐지?”
“내게 활이 없으니 쏠 물건이 필요하지 않겠소?”
“아니, 그건 아는데…. 그 허접한 물건을 갖고 무얼 하려는 겐가?”
“보면 아오.”

다른 쪽 주머니를 뒤적이던 사수는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강하게 올라오는 냄새에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관리도 마찬가지였다.

“으, 술 냄새. 네 놈, 이 신성한 자리에 술을 마시고 오다니 정신이 있는 게냐?!”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오늘은 마시지 않았소. 닥치고 보기나 하시오.”

검은 물체의 뚜껑을 열고 병을 신중하게 기울여 액체 한 방울을 조심스레 떨어뜨린 사수는 재빨리 물체의 뚜껑을 닫았다. 뚜껑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금 흔들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휘휘 저어 주변 사람을 물린 사수는 자세를 바로 펴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두 발짝 뒤로 물러선 윌리엄은 그 눈빛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 내기, 자신이 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들의 목숨이 함께 져버릴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부정(父情)이 공명정대한 마을 대표자로서의 마음을 이겼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공중에 뿌려질 정도의 속도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려던 순간, 사수의 손가락은 인정사정없이 스위치를 눌렀다.

‘펑!’

굉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윌리엄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에 사과를 얹고 서 있어야 하는 소년만이 온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고막을 희생했을 뿐이다. 한동안 먹먹한 정적과 싸한 ‘술 냄새’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머리를 징징 울리는 소음의 잔해를 떼어내고 겨우 몸을 일으키던 윌리엄의 귓가에 나지막하고 따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걱정 마시오. 당신의 아들은 멀쩡하오.”
“무슨…?!”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윌리엄의 눈에 아까와 같은 포즈로 서 있는 소년이 들어왔다. 아까의 소리 때문인지 표정이 조금 멍한 걸 빼면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머리 위의 사과도 형태가 조금 변했을 뿐 그대로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던 윌리엄의 귓가에 아까와 비슷한, 그러나 좀 더 크고 좀 더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흘렀다.

“내가 넣은 건 술이 아니라 알코올이외다.”
“알코올? 술 만들 때 쓰는 그것 말인가요?”
알코올은 끓는점이 매우 낮기 때문에 기화가 잘 되오. 게다가 내가 넣은 알코올은 단 한 방울. 이 통을 이렇게 살짝 흔들기만 해도 금세 기체로 변해 통을 꽉 메우게 되지. 액체보다 기체의 부피가 훨씬 크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외다.
“허어, 그럼 그 알코올 기체가 통 뚜껑을 밀어냈다는 이야깁니까? 그만한 힘이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데?”
“물론 이 정도 양으로 통 뚜껑을 그렇게 강력하게 날릴 순 없소이다. 그렇기에 장치 하나를 더 해뒀소. 여기 보이시오?”

자연스레 시작된 설명에 또 자연스레 끌려간 윌리엄은 사수의 손길에 따라 통 안쪽을 들여다봤다. 눈에 익은 물체 두 개가 정답게 마주하고 있었다. 옆에서 귀를 계속 문지르던 관리도 아닌 척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역시 아닌 척 자리를 양보해 준 윌리엄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척척 끼어든 관리는 걸걸한 목소리로 물체의 이름을 뱉었다.

“못?”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못이지만, 또 그렇게 흔하지만은 않은 못이라오. 정확히 말하면 전선을 연결해 둔 철 못이오. 전선의 끝은, 보시오. 스위치가 달린 압전기에 연결돼 있지 않소. 이 스위치를 누르면….

목을 길게 빼고 통 안을 들여다보던 관리가 순간 풀쩍 뛰어 올랐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은 그의 몸 밑에서 낙엽 먼지가 자욱하게 올랐다. 함께 공기 중으로 뻗어간 마을 사람의 박장대소가 체면도 뭐도 버리고 부들부들 떨어대는 몸짓과 정확한 박자로 울렸다.

“어이쿠, 아까 쓴 알코올 기체가 조금 남아있었나 보오. 스위치를 누르면 이렇게 나사 두 개 사이에 불꽃이 일어나거든. 알코올 기체가 남아 있으면 당연히 아까처럼 불이 붙겠지. 그러게 좀 조심하시지 그러셨소. 머리카락 괜찮으시오?”
“네 이놈, 일부러 그랬지?”
“남의 설명을 끝까지 안 듣고 위험한 짓을 한 사람이 나쁜 거요. 아니면, 뭐 지금이라도 내기를 무르고….”
“아니, 아니다! 그 같잖은 설명인지 뭔지나 얼른 끝내!”

귓구멍을 후벼대며 관리를 ‘놀리는’ 사수의 모습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다.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의 설명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다.

불꽃 때문에 알코올이 폭발하게 되고, 그 압력으로 통 뚜껑이 날아가는 거요. 알코올의 인화점, 즉 불이 붙는 온도는 약 섭씨 12도. 즉 통 안의 온도가 12도 이상이면 알코올에 불이 붙어 폭발하게 된다는 이야기요. 사람 체온이 36.5도 인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낮은 온도에서 타오르는 거지. 폭발력의 크기는 뭐, 아까 보셨듯이 꽤 크오. 절대 사람을 향해 날리면 안 되는 물건이지.”

댁에게는 참 미안한 짓을 했소. 뒤에 붙은 말은 윌리엄의 귀에나 들릴 정도로 나지막했다. 아닙니다, 애초에 아들의 목숨을 건 건 저니까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윌리엄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봤는지 못 봤는지, 반응 없이 돌아선 사수는 손을 저었다.

“여기까지 하겠소. 저쪽은 사과를 꿰뚫었고 나는 떨어뜨리지도 못했으니 저쪽이 이겼소.”
“아니! 그것의 위력이라면 충분히 사과를 날릴 수 있지 않은가! 왜!”
“알코올이 한 방울 밖에 없었소. 그 뿐이오.”
“한 방울은 무슨! 아까 병으로 있지 않…, 으악?!”

침을 튀기며 흥분하던 관리의 옷이 순식간에 얼룩졌다. 싸한 알코올 냄새가 아까보다 훨씬 강하게, 하지만 훨씬 친근하게 퍼져갔다. 아까 ‘인화점’ 이야기에 지레 겁먹은 건지 손을 마구 휘저어 옷을 말리며 펄쩍펄쩍 뛰는 관리를 지나쳐 가던 사수가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확실히 한 방울만 있었지. 그렇지 않나?”
“…그렇군요.”

윌리엄도 마주 웃었다. 관리의 다른 능력은 인정 못해도, 사람 뽑는 능력 하나는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저 모양, 어쩐지 보기 좋지 않으오?”

난 가리다, 뜻 모를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사내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입을 딱 벌린 채 그 쪽을 바라보는 관리와, 의미도 모른 채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과, 바닥에 놓인 활로 차례차례 돌아가던 윌리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향했다. 역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의 머리 위에는 사과 하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놓았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단지 아까와 다른 점은 한쪽이 둥글게 베어져 나간 채, 맑고 달콤한 즙을 흘리고 있다는 것. 마치 딱 한 입 베어 낸 형태로,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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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10-17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브 잡스 헌정 과학향기랄까...

후애(厚愛) 2011-10-1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만들어봤으면 좋겠당~ ㅎㅎㅎ
주말은 잘 보내셨어요?
날씨가 많이 살살하지요? 감기조심하세요.^^

마노아 2011-10-17 23:07   좋아요 0 | URL
어휴, 여기 엄청 추워졌어요. 내일은 아침 기온이 4도라는데, 이 정도면 체감온도는 영하거든요. 감기 단단히 조심해야겠어요. 후애님도 찬바람들지 않게 건강 주의하세요.^^

카스피 2011-10-1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만들면 재미있을것 같은데요^^

마노아 2011-10-18 21:42   좋아요 0 | URL
강도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퐁! 하고 발사되게요.^^
 



제 1450 호/2011-10-10


가을이 되면 유난히 식욕이 늘어 살이 찐다는 사람이 많다. 과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는 걸까?

실제로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봄보다 가을에 하루 평균 222kcal를 더 섭취한다. 게다가 더 쉽게 허기를 느낀다고 한다.

이런 연구결과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갑자기 떨어진 기온으로 인해 몸이 외부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우리 몸은 더울 때 땀을 흘려 체온을 떨어뜨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추울 때는 몸 안에서 열을 발생시킨다. 이때 필요한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 식욕이 당기고 음식물 섭취량이 늘어나게 된다.

둘째, 여름에는 열을 발산하기 위해 피부 표면 혈관들이 확장된다. 그러다 기온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확장된 혈관이 천천히 수축되면서 열량 소비는 줄어든다. 셋째, 일조량이 줄어들면서 세로토닌 호르몬 분비량이 다소 줄어든다. 이 호르몬은 행복호르몬이라 불리는데, 부족할 경우 스트레스나 우울증, 과식, 폭식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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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0-1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음.. 배고파.. 참아..'
꾸륵 꾸륵 배가 요동치는 페이퍼예요. ㅋㅋ

점심 시간 다가오네요~ 맛점!

마노아 2011-10-14 13:30   좋아요 0 | URL
히힛, 맛점하고 왔습니다. 이제 슬슬 졸려지는 시간이에요.
아, 30분 버티고 커피 마셔야겠습니다.
식후 1시간 지켜서 커피 마시려고 애쓰고 있거든요.^^

차좋아 2011-10-14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ㅎㅎㅎ 조심해야지...

마노아 2011-10-14 13:31   좋아요 0 | URL
저도 순간 경각심을 가졌어요. 긴장해야지.(>_<)

달사르 2011-10-14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몸무게 재고 절망하던 1인 여기 한 명요~

마노아 2011-10-14 13:31   좋아요 0 | URL
날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으로 체중을 잰답니다..;;;;

자하(紫霞) 2011-10-17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이렇군요 ㅋ 요즘 심하게 챙겨먹고 있어요~

마노아 2011-10-17 08:26   좋아요 0 | URL
뭐든 원인이 있는 법인가봐요. 어제 과식하고 오늘 아침에 후회했어요.ㅎㅎㅎ
 



제 1453 호/2011-10-10

팔만대장경 1천 년 장수의 비밀은?
과학향기 애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유 기자입니다. 저는 지금 경남 합천군 해인사에 나와 있습니다. 이곳은 지난 9월 23일부터 열린 ‘2011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축전’으로 한창입니다.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모여든 현장입니다.

“목판 인쇄술의 극치다”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서 쓴 것 같다”

“세계의 불가사의다”

네~ 대장경을 감상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해인사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팔만대장경이 간행된 지 자그마치 1천년이 됐다고요?

담당자 : 정확히 말하자면 2011년은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고려대장경이 제작된 지 1천년이 되는 해입니다. 1011년 대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해 1087년 초조대장경이 완성됐습니다. 하지만 1232년 몽골군의 침입에 의해 불타 버렸지요. 현재의 팔만대장경은 1236년 새로 제작에 들어가 1251년 완성된 것입니다. 대장경은 역사와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자산이지만 과학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 발전을 가져왔지요.

유 기자 : 그런데 나무로 만들어졌음에도 천년 가까운 시간동안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니, 어떻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걸까요?

종이 전문가 : 그렇죠. 습기에 뒤틀리거나 썩기 쉬운 목재로 만들어졌는데, 천년 가까운 시간동안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조사 결과 재목(材木) 선정에서부터 그 비밀이 숨어있었습니다!

건축가 :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대장경을 보관해 둔 곳인 장경판전을 보십시오, 이런 놀라운 건축법이 사용되다니!!

유 기자 : 아니, 도대체 어떤 비밀들인겁니까? 네?


팔만대장경은 1251년에 완성됐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은 8만 1,258판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양인가 하면 판들을 차곡차곡 쌓았을 때 높이가 약 3.2km로, 백두산(2.744km) 보다 높다. 총 무게는 무려 280톤이다. 실로 엄청난 양이다. 하지만 대장경이 유명한 이유는 단지 양 때문이 아니다. 목판 하나하나, 마치 숙달된 한 사람이 모든 경판을 새긴 것처럼 일정한 판각수준과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이렇게 잘 만들어졌어도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대장경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원형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를 따라가 보면, 곳곳에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우선 목재 선정과정을 살펴보자. 경판으로 쓰일 재목은 짧게는 30년, 길게는 40~50년씩 자란 나무 중 굵기가 40cm 이상으로 곧고 옹이가 없는 나무가 선택됐다. 산벚나무, 돌배나무 등 10여 종의 나무가 사용됐다.

판각지로 옮겨진 나무는 바로 사용되지 않고 바닷물 속에 1~2년간 담가 뒀다. 그 후 경판 크기로 자른 뒤 소금물에 삶고 건조하는 과정을 거쳤다. 소금은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 경판이 갈라지거나 비틀어지는 현상을 줄일 수 있다. 건조할 때는 물이 잘 빠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가건물을 지어 약 1년간 정성을 기울였다.

경판에 글자를 새겼다고 작업이 끝난 게 아니다. 경판끼리 서로 부딪히는 것을 막고 보관 시 바람이 잘 통하도록 마구리 작업을 했다. 마구리 작업은 경판 양 끝에 경판보다 두꺼운 각목을 붙인 후 네 귀퉁이에 구리판으로 장식한 것을 말한다. 그 후 옻칠을 했는데, 이 작업 역시 장기간 보관에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목각판에 옻칠을 한 것은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이 유일하다.

완성된 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장소 역시 중요하다. 목판의 보존에 적합한 환경은 섭씨 20도 내외, 습도 80% 이하다. 그런데 장경판전의 기후는 이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판전 내부 습도는 여름 평균 89.09%, 겨울 평균 75.91%로 일반적인 목재 보존 기준보다 높은 편이다. 온도는 여름 평균 섭씨 19.81도, 겨울 평균 2.74도로, 겨울 옥내 온도 기준치보다 매우 낮게 나타났다. 적절한 목재 보존 환경 기준을 벗어나는 판전 내부의 환경 속에서도 수백 년 동안 경판이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자연환기’ 덕분이다.


[그림 ]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팔만대장경 목판을 들고 있는 팔만대장경연구원 보존국장 성안 스님. 사진 출처 : 동아일보
장경판전은 해인사에서 가장 높은 지역(해발 700m)에 지어졌다. 판전 건물은 네 방향으로 각각 마주 보도록 설계돼 건물 자체의 통풍이 원활하다. 또 가야산 지형의 특성 상 아래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 자연 환기가 가능한 곳이다.

건물 내부는 보관기능을 최대한 살려 단순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건축기술은 살창에 숨어있다. 벽면의 위 아래, 건물의 앞면과 뒷면의 살창 크기를 다르게 해 공기가 실내에 들어가 아래위로 돌아 나가도록 만든 것이다. 이 간단한 차이가 공기의 대류는 물론 적정 온도를 유지시켜 준다.

건물 바닥은 땅을 깊이 파서 숯과 찰흙, 모래, 소금, 횟가루 등을 뿌렸다. 이는 비가 많이 와 습기가 차면 바닥이 습기를 빨아들이고 반대로 가뭄이 들면 바닥에 숨어 있던 습기가 올라와 자동적으로 습도를 조절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선조들의 지혜로 대장경이 1천 년간 잘 보존돼 왔지만, 앞으로 지속적인 보존을 위해서는 현대의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다양한 보존방법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팔만대장경의 전산화 작업이다. 이 작업은 경판 각각의 모습과 내용을 담는 디지털화 작업이다. 그 외에도 현재의 목판 팔만대장경을 보존하면서도 폭넓은 활용을 위해 인청동으로 팔만대장경을 새롭게 조성하기 시작했다.

‘2011 대장경천년 세계문화축전’은 오는 11월 6일까지 계속될 예정이다. 국보 32호이자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세계적인 문화유산, 팔만대장경. 선조들의 지혜가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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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좋아 2011-10-14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팔만대장경 목판으로 직접 찍은 팔만대장경이 있는 방에서(목판 보존을 위해 더이상 안찍는대요.) 차 마시고 놀았는데 막 만져도 보고 ㅎㅎㅎ 스님 이거 비싸요?, 이런 저질 질문이나 하면서요 ㅎㅎㅎ
응 다시 생각해 보니 좀 영광스러운걸요 ㅎㅎㅎ

마노아 2011-10-14 13:29   좋아요 0 | URL
오오오, 영광스런 자리에 계셨군요. 만져보기까지 했다니 부럽습니다아!!
그 방에서 마신 차는 더 깊었을 것 같아요.^^ㅎㅎㅎ

달사르 2011-10-14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인사 안 오시나요? 저 무료티켓 있는뎅.
하하하. 마노아님이 오실 생각이 있으심 티켓 슝~ 보내드립니닷!

마노아 2011-10-14 13:30   좋아요 0 | URL
아아, 근사한 곳이에요. 가보고 싶지만 넘흐 멀어요.
서울 안에서 출퇴근 하는 것도 체력에 부쳐하는 이 저질체력으론 엄두가 안 나요. 흑흑....ㅜ.ㅜ

차좋아 2011-10-14 15:58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해인사는 가야산 중턱에 있지만 버스가 절까지 들어가요. 버스타고 가는 것 자체가 힘들수도 있긴 하지만 산은 안 타도 돼요. 한 번 가보세요. 해인사 좋아요 가야산도 좋고 거기 해인사 마을에 삼일식당(맞나?) 능이버섯 정식도 좋아요.ㅎㅎ (막 아는 척..ㅎㅎㅎㅎ)
'...오실 생각이...' 달사르님 해인사 근처 사세요?ㅎㅎ

마노아 2011-10-14 16:01   좋아요 0 | URL
방학과 같이 평일에도 쉬는 날에 다녀와야겠어요. 근데 이러면 겨울에 춥다고 또 몸을 웅크리겠죠.
암튼 해인사 꼭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달사르 2011-10-14 16:15   좋아요 0 | URL
차좋아님; 해인사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동네에 살아요. ^^
오! 삼일식당. 저도 이번에 가게 되면 저기 들러야겠네요. 능이버섯 정식. 흐릅.
마노아님; 오실 계획 잡으시면 미리 연락 주시어요. 참고로 유료 티켓 값은 일만원입니당. ㅎㅎㅎ 한 서너 장은 여분이 있으니 언제라도!!!

마노아 2011-10-15 10:55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이 든든하게 남쪽을 지키고 계시네요.^^
달력을 뒤져보며 머리를 굴려봤는데 행사 기간 내에는 어림 없을 것 같아요.
이번주는 근무하는 날이고, 다음주는 결혼식을 가야 하고, 그 다음주는 또 근무하는 날인데 주일은 또 지켜야 하니까요. 역시 방학이 아니고는 갈수가 없겠어요. 무척 아쉬운 일이에요. ㅠㅠ

무스탕 2011-10-14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천 해인사는 어려서부터 가보고 싶었던곳중 한곳이에요. 그런데 나이 40이 넘도록 아직도 못가보고 있으니 우리나라가 중국만하거나 미국만하면 말을 안해요. 이걸 어쩌면 좋아요 ㅠㅠ
정말 선조들의 지혜는 말문을 열지 못하게 만드네요. 천년전에 저런 과학적 원리를 어떻게 알아내서 만들고 보존하고 하였을까요? 그저 감탄이옵니다!!

마노아 2011-10-14 15:48   좋아요 0 | URL
다음 번 휴가는 합천으로 정하는 겁니다.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예전에 처음으로 연구수업할 때 주제로 잡은 것 중 하나였는데, 장경판전을 동영상으로 보면서 서로 감탄했던 기억이 나요. 정말 선조들의 지혜에 무릎 꿇었다니까요.

BRINY 2011-10-16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밤 KBS에서 하는 '다르마' 봤어요. 묘하게 종교적 영감이 꿈틀대더라구요. 고등학교때 성 프란치스코에 맛이 갔었던 때처럼요.

마노아 2011-10-17 08:26   좋아요 0 | URL
오, 궁금해져요, '다르마!' 고등학교 때 이미 영감이 번뜩이는 사람이었구요, 브라이니님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