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입시
미나토 가나에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학생이었을 때 고교입시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평준화되어 추첨에 의해 일정점수만 받으면 고등학교 진학이 이뤄지는 것이었기에 왜 그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새삼 이해가되지 않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특성화고로 구분이 되어 성적이 경계선에 있으면 애초에 고등학교 진학에서부터 학업을 계속 할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지 갈림길로 들어서기도 하지만 솔직히 특성화고등학교 학생들도 대부분 대학진학을 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그들을 바라보는 내 입장에서는 그리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학교공부에 그리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 같았던 조카는 자기 스스로의 성취욕에 의해 잠을 줄여가며 공부를 하고 있다. 고등학교 진학을 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하느라 대학입시가 힘들기만 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수능시험을 앞두고 학원생활을 하면서 서울의 왠만한 학교는 갈 수 있는 성적이지만 서울대입학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며 예민한 상태로 공부만 하고 있는 조카의 현실앞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이제 스무살이 되어가는 혈기왕성한 소년이 자신의 미래를 좌우할 평생의 진로가 지금 1년안에 결정된다는 것에 완전히 몰두하여 공부만 하고 있다는 현실이 내게는 너무 낯설고 안쓰럽고 그렇기만 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미나토 가나에의 '고교입시'는 조금은 일본 특유의 과정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그 내용에 담겨있는 의미를 새겨보면서 결코 단순한 입시소동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 내에서 최우수 고등학교라 인정받는 공립고등학교인 이치고. 고교입시는 이치고의 입학시헙을 치른 당일에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과 자정을 넘기며 계속된 문제의 해결을 그려낸 이야기이다. 그 지역에서 이치고의 입학은 인생의 성공의 척도가 되어버린지 오랬고, 이치고를 졸업하고 이류대학을 졸업하여 백수로 지내더라도 이치고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은 그를 성공한 인생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만큼 이치고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러한 이치고의 입학시험 전 날,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생님들은 '입시를 짓밟아 버리자'라는 벽보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상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데......

 

미나토 가나에의 고교입시는 원래 드라마대본으로 씌여졌고 일본내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속도감있게 진행되어 끝나는 일본드라마의 성향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이 이야기는 책보다는 드라마로 보는 것이 재미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여러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무시하고 무작정 읽어가다 보니 초반에는 내용 자체가 쉽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역시 미나토 가나에의 글은 읽어나가면서 어떠한 내용을 품고 있는지 깨닫게 되기 시작하면서 그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전체적인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이야기의 진행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 책읽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하기도 했지만, 또 고교입시의 에피소드를 통해 입시제도 전반에 대한 문제점, 교사와 학생의 관계, 교사의 역할뿐 아니라 잠깐의 실수와 행동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게 하고 있어서 점점 더 몰입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 고교입시보다는 대학입시의 상황과 좀 더 비슷하다는 것에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고, 우리의 현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어서 더 몰입이 잘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단지 고교입시의 에피소드가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기 보다는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끊임없이 드러나는 의문들이 하나씩 풀려나가는 글을 읽는 재미가 더 크기 때문일수도 있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솔길 끝 바다
닐 게이먼 지음, 송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오솔길의 끝에는 바다가 보이던가?

내가 어렸을 때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던 몇 권 안되는 책들 중에는 빨강머리 앤도 있었는데 어릴때 본 그 책은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나는 앤이 오랫동안 앙숙처럼 지내던 길버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끝부분에서 앤이 '길 모퉁이'를 돌면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강렬한 느낌으로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비밀의 화원에서는 환청처럼 들리던 '화원으로'라는 외침이 있는 부분에서, 그러니까 모든 일의 해피엔딩으로 치닫고 있는 그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화원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나중에 그런 화원을 갖는 것이 소원이 되었었다. 그 어린 시절의 추억때문이었을까? [오솔길 끝 바다]는 닐 게이먼이라는 이름을 보기 전부터 왠지 바다가 들린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오솔길을 지나 햇살에 반짝거리는 파도를 볼 수 있는 길의 끝에 있는 바다는 어딘가에 실존해 있는 공간이면서 또 우리가 상상속에서 그려보는 낭만과 멋의 세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속' 환상의 세계는 아니다. 청소년 문학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환상문학,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의 세계를 그려낸 이야기가 맞는 것이다.

오솔길 끝 바다라는 것은 그 깊이도, 크기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왠지 내게 익숙한 그 오솔길의 끝에 있기 때문에 내가 그 바다속으로 빠져들어가도 안심하게 될 것 같은, 그런 매력적인 바다의 느낌이었다.

 

"아무도 자기 내부의 진짜 모습을 보이진 않아. 너도 그러지 않잖아. 나도 안 그러고. 사람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해. 누구나 그래.  ......그리고 어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어른들도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어른의 모습이 아니야. 바깥에서 보면 그들은 크고 배려심도 없고 언제나 자기가 뭘 하는지 알고 있지. 하지만 안에서는,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야. 네 나이와 다르지 않아. 진실은, 어른이란 없다는 거야. 이 넓은 세계 전체에 하나도 없어

나는 어른에 대해 생각했다. 그 말이 진짜인지 궁금했다. 그들은 모두, 사실은 어른의 몸에 싸인 어린아이들일까? 그림도 대화도 없는 지루하고 긴 어른 책들 사이에 숨겨진 어린이 책 같은?" (184-185)

 

판타지가 아이들의 세계같은것은 어른들도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어른의 몸에 싸인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일까? '오솔길 끝 바다'에는 그러한 어른들의 슬픈 자화상 같은 모습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솔길 끝 바다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장례식에 참석한 후 갑자기 어린 시절에 지내던 집과 근처를 헤매다니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돌아다니다 불현듯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가 일곱살때 집에 세들어 살던 오팔의 광부가 어느 날 아버지의 차를 몰고 가 자살해 숨져있는 것을 봤던 기억, 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경찰들이 왔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레티가 그를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음식을 주고, 어머니 지니 헴스톡 부인과 오팔 광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를텐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현실과 마법의 세계를 오가고 있는 듯 한데....

 

사실 실제 이야기는 그 이후에 벌어지는 대양으로의 여행(?)이 주된 줄거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판타지처럼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을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들의 의미와 무의식중에 받았던 상처들을 하나씩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어렸을 때는 내가 본 장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 불현듯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 의미가 다시 되새겨질 때, 과거의 기억들은 재편성되어가는.. 그런 과정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다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들이 사실인가요?"

"네가 기억한 거? 아마도 대부분은. 각각의 사람들은 사건을 모두 다르게 기억해.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았어도 그것을 똑같이 기억하지는 않을거다. 그 사람들이 같은 곳에 있었든 아니든 말이야. 서로 바로 옆에 서 있는 두 사람도, 모든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륙만큼 떨어져 있을 수 있지"(278)

 

지니 헴스톡 부인의 말에 의하면 주인공은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곳을 찾아갔었고, 그에 대한 기억은 또다시 헴스톡 노부인에 의해 잘려나가 꿰매어졌을 것이다.

처음 읽으면서 그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의미를 찾기보다는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워 어느새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대로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어가버리며 책을 다 읽었다. 새삼스럽게 책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려하고 보니 바로 엊그제, 금세 다 읽은 책이지만 자꾸만 책장을 다시 뒤적이고 싶어지고 다시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처음엔 오솔길 끝 바다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빠져들어갔지만 이제는 오솔길 끝 바다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 안에는 무엇이 잠겨있을지 궁금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티는 너를 위해 아주 큰 일을 했어. 그 애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기가 한 일이 가치가 있었는지 알고 싶었을거야. ...... 나는 그때 내 심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 안에 아직도 문의 차가운 일부분이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것이 선물인지 저주인지 궁금했다."

 

내게 있어 레티와 같은 존재가 있었을까? 나의 기억들은 나를 조금씩 더 좋은 곳으로 이끌어가고 있을까? 나의 심장이 차가워지지 않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정말 가치가 있는 일일까?

책을 읽다 문득문득 떠오르게 되는 물음들에 헴스톡 부인의 말을 빌어 자신에 대한 긍정과 삶의 가치를 다시 새겨보게 된다.

"사람으로 사는 일에는 합격이나 불합격은 없단다"

그러니 나의 심장이 선물인지 저주인지 궁금해하기보다 그녀의 말을 믿자. "넌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더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네 안에 새 심장이 자라고 있어"(2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 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207)

 

이 책을 읽기 전에 그에 대한 소문을 먼저 들어버렸다. 그리고 '한강을 능가한 한강의 소설'이라는 평까지 읽어버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선뜻 이 책을 집어들기 어려웠던 것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기록을, 새로울 것이 없다고 하지만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아릴수밖에 없는 마음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것이지만 그래서 어쩌면 좀 더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었겠지만 그러함에도 역시 그 역사와 마주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회피한다는 것이 해결이 될 수 없으며 올곧게 마주하여 진실을 깨달을 수 있어야 역사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아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심호흡을 하고 책을 펼쳐든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나 역시 안전한 사람이 아니란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부마항쟁에 공수부대로 투입됐던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내 이력을 듣고 자신의 이력을 고백하더군요.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습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동료 중 하나가 그에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뭐가 문제냐? 맷값을 주면서 사람을 패라는데, 안 팰 이유가 없지 않아?

베트남전에 파견됐던 어느 한국군 소대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들은 시골 마을회관에 여자들과 아이들, 노인들을 모아 놓고 모두 불태워 죽였다지요. 그런 일들을 전시에 행한 뒤 포상을 받은 사람들이 잇었고, 그들 중 일부가 그 기억을 지니고 우리들을 죽이러 온 겁니다. 제주도에서, 관동과 난징에서, 보스니아에서, 모든 신대륙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듯 동일한 잔인성으로.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뱉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기를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134-135)

80년 당시 광주에서의 삶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려고 하지만 도무지 떠올릴수가 없다. 무작정 피하고만 싶었던 과거의 역사라고만 생각했는데 '지슬'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또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제주의 4.3 이나 광주의 5.18이나 내게는 전설처럼 전해져오는 피의 역사,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이 가득한 아픔의 역사일뿐이며 그에 대한 역사적 의의만 찾으려고 했던 이야기일뿐이었는데, 이제 그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기 시작하고 있다.

지금 여전히 나는 '소년이 온다'라는 책을 읽은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다. 마음속과 머리속이 뒤섞이면서 나의 이 감정과 생각들을 풀어놓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다만 소설을 소설로 읽으면서 그 너머에 담겨있는 진심과 진실을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할뿐이다. 

 

엊그제 시사인의 기사중에 세월호에 관한 글을 봤다. 유가족의 슬픔을 알고 있고 그 엄청난 사건을 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이제는 그 이야기를 그만 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고 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핑계일뿐이다.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하는 것은 이제 그만 보상 이야기를 하고 과거를 되돌릴 수 없으니 그만 끝내자,라는 것은 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고 왜 수많은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졌어야 하는가에 대한 규명없이 모든 것을 덮고 잊자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제주의 4.3도 그렇고 광주의 5.18도 그렇고, 이제 국가적인 배상이 이뤄진다고 하니 해결되어가는 것 아닌가 라는 말은 그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역사를 잊고 살자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엄청난 사건들을 그렇게 덮어두면 안되는 것 아니겠는가.

 

'소년이 온다'는 5.18광주항쟁 당시 게엄군에 맞서 싸우던 현장의 모습을 중학생 소년 동호의 눈에 비춰진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을뿐이지만, 과거의 일이 현재에까지 수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남겼으며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깨달음을 너무 가슴아프게 헤집어내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대로 이미 각오를 하고 글을 읽기 시작했지만 괴롭고 슬프고 아픈 마음을 어쩔수가없다.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 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뼈와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를 암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2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하고 사랑하고 고양이하라 - 6개국 30여 곳 80일간의 고양이 여행
이용한 지음 / 북폴리오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개국 30여곳, 80일간의 고양이 여행.

말 그대로 이 책은 고양이를 찾아 떠난 세계여행이다. 고양이와 함께,도 아닌 고양이를 찾아서 세계여행을 떠난다니 얼마나 한가로운 것일까 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의 이름을 보면 괜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실 나는 고양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린 시절의 기억때문에 고양이가 무서웠다. 가만히 쳐다보는 눈동자도 그렇지만 소리없이 쓰윽 지나치며 높은 담장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것도 무서워 기겁을 했었다. 그런데 저자의 고양이 책을 우연히 읽게 되면서 고양이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바꿔나가게 되었고 이제는 길을 걷다가 길냥이를 발견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꼭 한번씩 불러보고 가곤한다. 그러다보니 예전이었으면 보지 못했을 고양이들의 인사도 볼 수 있었다. 앞서가던 고양이를 쳐다보다가 좁은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고양이를 발견하게 됐는데 길을 걷던 고양이가 그 앞에서 고개를 돌려 코를 맞대고 지나치는 것을 봤는데 처음엔 내가 뭔가 잘못본 것인 줄 안 것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고양이들의 인사법이었다니.

고양이에 대해 알게 되면서 길에서 마주치는 고양이가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미워해야할 녀석들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생존이 가능한 상태로 살아가면 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덧 이제는 고양이에 대한 책을 찾아 읽으면서 그들의 습성과 모습에 조금씩 빠져들게 되기 시작해버렸다.

그래서 냉큼 집어든 이용한 작가의 '여행하고 사랑하고 고양이하라'는 똑같은 고양이 이야기 같은데 또 새로움이 있어서 단숨에 쑥 읽어버렸다.

 

고양이 사진은 다 똑같지 뭐,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 책을 보니 뭔가 익숙한 듯 하면서도 새롭다. 그걸 가만히 생각해보니 모로코, 터키, 일본, 인도, 대만, 라오스... 이곳에서는 도심의 골목 깊숙한 곳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그곳에서도 자연스럽게 고양이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괜히 새롭게 느껴진 것이었다. 특히 모로코의 온갖 푸르름을 배경으로 찍힌 고양이 사진들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물론 다른 책들과 달리 귀엽고 앙증맞은 녀석들의 근거리 사진이 그리 많지 않아서 아쉬운 것도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전혀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고양이들이 너무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와버려서 사진 촬영이 쉽지 않아 그런것같았다. 그래도 열댓마리씩 한꺼번에 여유롭게 늘어져 있는 고양이들의 모습, 사람들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발라당거리고 음식을 구하는 모습들 역시 좋았다.

내가 모로코로 여행을 간다면 다양한 빛깔의 블루를 사진에 담았을텐데 저자는 다양한 빛깔의 블루를 배경으로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을 담아왔다. 이건 정말 고양이 세계일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준다고 타박하거나 고양이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 고양이들의 천국과같은 그곳에서의 모습을 보니 우리가 얼마나 고양이를 터부시하고 있는지 새삼 느껴지게 되었다. 이 세상은 인간들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자연세계의 모든 것과 공존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며 고양이와 사람이 어울려사는 당연한 풍경들이 가득한 책을 한번 더 펼쳐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리 하우스 - 나무 위의 집
코바야시 타카시 지음, 구승민 옮김 / 살림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적에 만화를 보다가 엄청 부러워하곤 했었던가? 정말 무엇때문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나는 커다란 나무만 보면 그 나무 위에 올라가고 자연스럽게 나무위에서 일상을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마당 한켠에도 꽤 오래된 나무가 굳건하게 잘 자라고 있는데 적당한 높이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길고 굵게 뻗어있어서 - 여기서 '굵게'가 중요한데, 그 정도의 나무위에 한번쯤 올라간다고 해서 나무가 부러질 염려는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 아무도 없을 때 한번 슬쩍 올라가보고 싶어지곤했었다. 물론 담장이 있다가 사라져버려 사방이 탁 트여버렸기 때문에 이제 그곳에 올라가보리라는 소망은 슬그머니 사라져가고 있는데 지금 난데없이 '트리하우스'라니.

사실 이 책을 읽기전까지는 실제로 트리하우스를 건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여름에 수박밭의 땡볕을 막아주는 원두막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트리하우스는 어린시절 내가 동경하던 바로 그 숲속의 집이 아닌가.

 

첫장에 실려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트리 하우스라고 할 수 있는 주머니나방을 모티브로 한 트리하우스를 봤을때까지만 해도 현대의 트리하우스라는 것은 그저 장식이 되었나, 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없다니 무용지물이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멋지고 탐나는 트리하우스가 계속 나오는 것이다. 공공시설의 트리하우스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아이와의 추억을 새기고 싶어서라든가 하는 개인용 주택의 트리하우스도 건축이 되고 있다.

사실 번화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도심 한복판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선뜻 상상이 되지 않는 집이기는 하지만 왠지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집 마당에도 커다란 나무가 한그루 있었지만 자그마한 마당에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 큰 나무라 지난 겨울에 잘라버렸다. 실제로 그렇게 큰 나무가 두어그루 있다면 자그마한 다락방 같은 트리 하우스 - 물론 트리하우스라기보다는 나무 판자를 얹어 나무위의 평상 정도는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끝에는 부록처럼 각종 연장에 대한 설명과 자신만의 트리하우스를 만들기 위한 제작 과정이 실려있어서 여건이 되고 도전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시도해보고 싶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나무와 한 본체처럼 어우러진 트리 하우스를 보니 한번쯤은 트리하우스에서 살아보고 싶은 소망이 생겨난다. 숲속의 나무에 못을 박아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얼핏 생태를 파괴하는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나무의 성장을 억제하지 않고 그대로 나무가 자라면서 트리하우스 자체도 함께 올라가는 구조라면 그것이아먈로 숲과 공존하는 자연의 집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을 하니 정말 숲속의 트리하우스는 실제로 어떤 느낌일지, 사진이 아니라 그 실물을 보고 싶어진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자연과 어우러져있는 트리하우스를 꼭 방문해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