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거짓말 감각은 당신을 어떻게 속이는가 - 저명 신경과 의사가 감각 이상에서 발견한 삶의 진실
기 레슈차이너 지음, 양진성 옮김 / 프리렉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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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를 인식하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사유하기 위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것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신 [다섯 감각과 그 대상과 사유와 그 대상]인 십이처는 불교만이 아니라 어느 세계에서든 인간에게는 세상을 인식하는 전부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감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그토록 절대적이지만, 비교 대상이 될 가상의 경우(인간과는 다를지도 모를 외계인의 감각 영역)를 가정한다거나 동물들이나 곤충들의 감각과 비교한다면, 과연 우리의 감각은 세상을 인식하는 절대적인 도구이기만 한 것인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

 

동물들의 가청영역과 인간의 가청영역의 차이는 우리의 감각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이야기해 주고 박쥐가 세상을 보는 방식, 돌고래나 코끼리의 소통방식은 우리의 감각은 세상의 부분만을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도 만든다. 하물며 예전 [스펀지]라는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은 백열전등의 필라멘트에 전기가 교차하는 소리를 듣지만, 성인은 들을 수 없다는 것에서도 동일한 사람에게서도 감각의 한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감각에 관한 최신 연구로는, 내가 파란색을 눈으로 보고 뇌에서 접수되는 주파수 대역과 다른 사람들이 파란색을 보는 주파수 영역이 모두 다른 양상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내가 파란색을 보고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있고 보라색을 보고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있다면 다른 사람은 나와 똑같이 파란색을 보면서도 뇌에 접수되는 주파수가 나의 경우에서는 보라색을 볼 때의 주파수로 뇌에서 접수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의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가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서로 수긍하고 있다지만 서로가 인식하는 세계는 전혀 다른 양상일 수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담론은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철학적 화두였지만 이제는 과학까지도 대중을 그런 화두에 들어서게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경험하는 공감의 세계도 분명 있기는 하다, 그것이 현실 세계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동시에 똑같은 루시드 드림을 꾸고 그 꿈속에서의 사소한 하나하나의 체험들까지 공유하는 경우는 자아초월 심리학자들이 흔히 보고 하고 있다. 그리고 영국 킹스 컬리지에서는 DMT라는 마약을 이용해 다수에 피험자들을 통한 이세계 경험을 유도해서 기록하고 있으며, 그들의 기록이 모이면서 이들이 경험하는 세계의 지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미 거대한 한 세계의 지도가 거의 다 완성되고 있다고 한다. 과연 우리가 공유하는 감각이나 인식은 뭐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일기도 하는 실제상황의 이야기다.

 

이런 의문과 호기심이 본서에 관한 관심이 일어나게 했고 도서관 도서 목록에 있는 이 책을 놓치지 않게 했다. 본서에서는 다양한 감각 이상과 해당 감각의 체계와 원리를 설명하며 어떤 질병이나 상태가 이상 현상을 불러오는지 뇌과학적이며 생물학적으로 분석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몰입하게 하는 것은 과학적인 원리 이전에 인간의 감각이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사람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표준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후각수용체 유전자 이상부터 일차 후각피질 이상까지 어느 영역에서의 다른 이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지 명백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일반적이라 정의하는 경우와 다른 냄새를 맡는 경우 또 다른 맛을 느끼는 경우가 오히려 보편인 세계가 있다면 어떨까? 시체꽃에서 우리가 바닐라 향이라고 느끼는 향기를 맡고 홍어회에서 딸기향이 느껴지는 세계라면. 또 땀 냄새가 코코아 향이 난다면. 반면에 아기에서 비린내가 나고 샤넬 NO. 5에서 방귀 냄새가 나는 세계라면. 우리가 과연 그 세계의 사람과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있을까? 초미녀에게 청소할 시기가 다된 정화조 냄새가 나는 걸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참아주려 해도 그 세계에서 방문한 방문자가 있다면 방문자인 그녀 자신이 우리 세계의 악취에 이미 우울증에 걸려 버릴 것이다.

 

세상이 도는 현기증으로 걷지도 못하고, 디디는 걸음마다 발이 늘 불타고 있다면, 맛 나는 무엇도 구토가 일게 하는 맛이 나고, 보고 있는 무엇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루라도 견딜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와 공유하는 세계가 동일한 세계라는 걸 확신할 수 없다 해도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감각이 우리 스스로에게 괴롭지 않을 때 살아갈 수 있을 여력이 있을 것이다. 공유할 수 없는 세계라 해도 괴롭지 않는 것이 그보다 우선하는 바탕이 아닌가 싶다. 본서에서 오감 각각과 균형 감각 등에 대한 이상 감각을 하나하나 예를 들다가, 이 모든 감각 이상이, 우리가 보통이라고 하는 상태가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최소한 고통과 괴로움을 불러오는 상태는 아니어야 한다는 감상을 불러올 때쯤, 공감각의 예를 든다. 본서의 영문 제목과도 같은 들리거나 말하거나 생각하는 단어들의 맛을 느끼는 단어의 맛을 보는 남자의 사례나 모든 발음 자체가 시각화되고 음가의 선율 하나하나가 색채로 감각되는 여성의 사례는 우리에게 감각이란 것이 확고하다고만 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

 

세상을 인식하는 도구라거나 시스템이기도 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우주 인식의 기준인 감각이 이토록 유동적이고 비고정적인 것인가 하는 감상과 그럼에도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어찌 분별하며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동시에 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책에는 다채로운 감각 이상의 경우가 해당 증상자 낱낱의 이름과 함께 등장한다. 각 감각이 이루어지는 체계와 이상 증상의 원리를 밝혀주기도 하는데 한 명 한 명의 사례와 함께 다가와 제법 밀접한 이야기로 느껴진다. 원제가 감각의 거짓말보다는 더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대중적인 관심을 끄는 제목으로 독자에게 선보이기보다 문제의식을 지닌 책처럼 제목을 정하다 보니 대중성이 다소 떨어진 경향은 있지만 진지한 문제의식만큼이나 재미도 있는 책이다. 감각과 감정이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을 자각하는 일진일 테니 스스로가 궁금한 대다수에 사람들이 감각이나 감정에서부터 알음알이를 시작하고 싶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행이 실천이라면 이론은 감각과 감정을 알아가는 데서 시작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런 분들께서 읽어 보실 만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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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걸어라 -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미래를 창조한다
네빌 고다드 지음 / 서른세개의계단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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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네빌 고다드와 같은 신사상(새생각)으로 분류되는 가르침에 대하여 반만 공감하는 사람이다. 씨크릿도 그렇지만 신사상이 세상과 마음의 이치에 일부를 전체인 양 해석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명상, 의식이나 철학 분야에서도 크리슈나무르티와 오쇼 라즈니쉬 같은 경우도 세상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담아 풀어나가야 할 논제들에 대해서마저 깨달음이라는 스펙트럼 하나로만 풀이해, 오히려 하나에 매몰된 바보를 양산하는 가르침을 펼치고 있기도 하기에, 신사상류는 딱 그와 같은 편향이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사실 신사상의 가르침은 마음의 창조성에 대해서 대부분 맞는 이야기를 한다고 보인다. 하지만 어느 경계에서는 꽉 막힌 통수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네빌 고다드가 말하는 만드는 자와 수용하는 자가 합일해야 하며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된다는 대목에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모두 자신의 책임이라는 대목과 세상을 탓하는 건 거울을 깨려는 것이니 거울이 아닌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에만 주의하면 된다는 가르침은 맞지 않는 말이기도 하며 저항해야 할 가르침이라는 생각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자신의 책임이지 남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 네빌의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에 사람들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는 것은 부모와 가족, 자라면서 겪어온 기성세대들이 만든 사회에서 주입된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깨닫는 데서부터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속에서 자라오며 만들게 된 선입관, 편견, 세상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모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서만 기인해 만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적 경제적 배경 또한 어느 시점까지는 자신의 권한이나 능력으로 만든 게 아니라는 말이다. 로스차일드 가문, 모건 가문, 로케펠러 가문에서 태어난 자와 차상위 계층에서 태어난 자가 겪는 것은 비단 재정적인 차이만이 아니다. 그들이 그 속에서 받는 사회적인 계층적인 대우도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내적 자원들도 전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외적 내적 자원의 차이를 자기 자신에게서만 원인이나 책임을 찾는다는 생각 자체가 넌센스다.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미국과 태국 그리고 러시아와 이슬람 지역에서의 관점과 처우는 현격히 다르다. 사람은 시대적이거나 지역적인 문화와 풍속에 따라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며 자라난다. 집안 환경, 부모의 교육 수준이나 도덕성의 차이에 따라 다 다른 자극을 받고 다른 반응성을 드러내며 자라날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에 있어서든 세상에 대한 관점이나 반응, 행위의 동인 등에 있어서든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만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에 있고 자기에게 기인한 것이든 외부에 드러나는 것이든 근원적인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혹하고 통제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대에서 안정감을 찾고 안심을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최면에서까지 서양에서는 최면 제안이라고 하지 최면 암시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최면가가 제안을 할 뿐 선택은 최면에 빠진 당사자가 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비판적 사고를 돌아가는 단계만 거치면, 상온에 동전을 손바닥에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화상을 입게 할 수도 있고, 암시만으로 눈을 안 보이게 하거나 벙어리가 되도록 만들 수도 있으며, 같은 공간에 있는 한 명을 못 보게 만들거나 머리 속에서 특정 날짜나 숫자, 단어 등을 기억도 인식도 못 하게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비판적 사고만 제대로 우회하게 하면 살인도 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도 과연 제안인가? 당신의 의지로 선택했다고 속고 싶은가? 세상의 모든 게 자신의 통제권 아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환경이나 관점이나 행위의 동인에 마저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없는 일이다.

 

인과라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단지 나에게서 모든 게 시작된다는 우격다짐만으로 원인이 단정 지어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거울의 문제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거울인 건 맞다. 하지만 거울이 문제인 것을 자신만 바꾸면 된다고 정의해 버리고 말면 더불어 변화하는 데는 무수한 시행착오와 오래고 오랜 세월과 역사가 흘러야 하는 것이다. 거울이 흐리면 닦아야 하고 뒤틀린 거울이라 엉클어진 모양으로 이상한 모양으로 대상을 비춘다면 마땅히 깨어버리고 바른 거울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일이다. 지금의 시대가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어떠했을지 돌아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답이 될 것이다. 시대를 걱정하고 시대를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독재와 권력에 휘둘리는 시대를 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시대적 지역적 한계를 다시 예로 든다면 1950년대의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에 대한 한국에서의 대응과 현재의 한국에서의 그에 대한 대응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성 소수자에 대한 관점이 어느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주류가 되는 의식이 다른 것처럼 또 성의식에 대해서도 과거 남자가 여자들을 많이 경험하면 능력자라 하고 여자가 남자가 많으면 문란한 년이라고 하던 시절을 돌아봐도 그렇다. 물론 모든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뀐 결과이겠으나, 시대의 주류 또 우리의 상식 속에 세계의 주류가 되는 의식들이 바뀐 결과, 대부분에 사람들은 그 시대 그 지역의 주류에 따라 살아간다. 작은 변화든 큰 변화든 상식이 바뀐 사람들의 숫자가 임계치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세상의 상식이 바뀌고 바뀐 상식을 대세라며 따른다. 임계치의 사람들 곧 세계가 바뀌어야 낱낱의 사람도 쉽게 바뀐다.

 

네빌 고다드뿐만이 아니라 크리슈나무르티 등의 깨달았다는 사람들까지 정치나 세계가 변하길 기대하지 말며 자기 자신의 변화에만 주목하라고 이야기한 걸 그 저작에서 읽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임계치의 사람들이 변화할 때까지 모두가 자기 자신의 변화에만 주목한다면,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변화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함께 가려고 하지 않는다면, 변화는 오래고 오랜 세월이나 역사 뒤에야 올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창조자이기도 수용자이기도 하지만 항거하는 투사가 되기도 싸우는 전사가 되기도 해야 한다. 창조하고 만끽하려면 그리고 그 과정을 자신만이 아닌 모두와 함께하려면 우리는 때론 세상과 관념에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저항하고 싸워야 할 순간이 있다. 그렇기에 창조만을 이야기하는 네빌 고다드는 넓은 대양을 이야기하며 바다에 나서려는 이들의 입장을 간과하고 있기도 하다고 보인다. 대양으로 항해하려면 일단 바다에서 시작해 나아가야 한다. 능숙한 항해자는 바다부터 대양까지 다 자유로워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마음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본서의 대부분에 내용들이 마음에 와닿는다. 진실과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오래전 집필되었을 텐데도 시대를 건너 전해지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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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블로그에서 어느 님께서 남기신 댓글 덕분에 이 리뷰에 대해 약간의 더하는 이야기가 필요할 거라 생각되어 글을 남긴다.

 

제가 남긴 리뷰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한 통제권이 자신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에 대해, 남 탓보다 자기 책임이라고 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남 탓을 하지 않는 것과 세상 모든 것이 자기만의 역량에 따른 거라고 믿는 과대망상은 다른 것이다.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자기의 영향력만이 절대적이라 믿는다는 것은 과도한 자만이며 오만이 아닐 수 없다.

 

이미 말했던 대목들을 제외하고 다른 예들을 들겠다. 가장 일상적인 예로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나 연인을 보자. 그 또는 그녀가 바람을 피우는데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잘하면 바람을 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런 경우의 사례도 없지는 않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바람을 피우는 사람은 상대가 어떤 관심을 보이던 무엇을 선물하고 어떤 신경 쓰던 일상에서 얼마나 자신에게 주의하고 어떤 배려를 하고 잠자리에서 얼마나 혼신을 다하건 간에 상관없이 반드시 바람을 피운다. 애초에 바람을 피우는 사람이 자기 의사와 자기 통제권을 행사하며 바람을 피우는 것을, 내가 이렇게 하면 바람 피지 않으리라 믿고 기대하는 자체가 잘못된 접근이라는 말이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게 자기 탓이라면, 부모가 바람을 피운다면 그럼 그건 자식인 자기 탓이라 할 텐가? 나의 삶에 통제권이 자기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통론적인 이야기이지, 사람의 삶에서 관계성이나 환경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배제하고서 자기에게만 모든 통제권이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말이다. 명확히 보면 바람을 피우는 상대 역시 자기 삶에 대한 자신의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이지 않은가?

 

만약 자기가 유동 인구가 적절한 도심에서 식당이든 장사든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자. 자기가 하는 장사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으며 길목도 좋아 적정 수준의 매출이 보장되는 사업이어서 마음 놓고 사업을 시작했다 하자. 갑작스런 팬데믹으로 인한 적자나 파산은 어쩔 거란 말인가? 이것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던 팬데믹이라는 악재를 고려하지 못한 자기 탓일까? 이건 자기 통제권을 벗어난 천재지변하고 다름이 없는 경우이고, 일부에서 확신하듯 천재가 아니라 인재였다고 한다 해도, 일반인 개개인이 이 시기에 반드시 일어나리라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런 경우를 예상했어야 한다며 자기의 영향력과 자기의 통제력이 절대적이지 못했음을 한탄한다면, 이건 거의 아니 거의도 아니고 완전히 미친 거라는 말이다.

 

또 아이즈원 때였나? 오디션에서 출전한 멤버들의 소속사측에서 방송사 관계자들에게 로비를 하여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 뽑혀야 할 멤버가 떨어지고 떨어져야 할 멤버가 뽑힌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도 떨어질(그러나 결국 뽑힌) 멤버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잘 이용한 거라고 보아야 하나? 그럼 붙을(그런데 떨어진) 멤버가 끌어당김의 법칙대로 시각화를 하고 파종을 하고도 떨어졌다고 한다면 어쩔 텐가? 세상에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자기의 통제권대로만 자기의 소망대로만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나를 통해 자기들의 이윤을 추구하는 타인들의 영향이 때로는 절대적일 수도 있는 게 현실 세계이다. 때론 내 의지나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나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의 과정과 원인을 명백히 알아야 지금의 현실이든 내일의 현실이든 바꿀 수 있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외부의 영향력과 나와 관계된 일들 가운데 내가 바꿀 수 있는 대상과 바꿀 수 없는 대상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며, 이차적으로 세계가 잘못된 부분은 그걸 직시해야 나와 타인의 현실을 바꿀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는 연인에게 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직시해야 하고, 팬데믹은 내 탓도 남의 탓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사회의 비리와 부정을 발견하고도 모든 것은 내 책임이요 내 탓이다라고 과대망상에 빠질 일이 아니라, 거울(세상, 기성세대가 만든 원칙이나 사회적 관행)이 문제라면 거울을 깨야 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세상은 나만이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모두의 의지와 모두의 욕망이 실현되는 곳이며, 그 실현의 과정에서 나의 의지와 욕망이 좌절되는 경우도 있고 그래야 마땅한 경우도 분명히 있다는 걸 인정할 때, 성숙한 영혼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당신만이 만족하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 아니라는 명징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타니즘의 근본원리를 아는가? 그건 너는 행복하라이다. 다만 단서가 붙는다. ‘네가 행복하는 데 다른 무엇도 고려하지 마라. 다른 이의 상황도 세상에 대해서도 말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에서는 말한다. 부는 무한한 것이며 성공 역시도 무한한 것이기에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고 제한 없는 것이니 주어지는 모든 것을 그대로 꿈꾸고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무한한 것은 없다. 재화는 한정되고 필요한 요직의 정원과 경쟁인구는 한정되어 있다. 누군가가 얻는 부동산이나 돈은 다른 이의 상실이 되고 누군가가 얻는 승진은 누군가의 탈락이나 실직을 불러올 수 있다. 자기가 성취하기에 합당하다면 성취해야 당연하겠으나, 비리와 부정으로라도 성취하겠다면 또 나의 성공으로 타인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면, 그건 사타니즘의 행복 원리와 다름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행복이나 성취가 악마주의의 부흥에 다름 아닌 것이다.

 

성취와 성공이 아니라 무엇이 나은 것인지를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때론 정의의 실현을 위해 나의 좌절이나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 성공과 성취가 다가 아닐 것이다. 내 마음이 의심하지 않고 진정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길이다. 남의 주장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의심하고 궁구하는 과정을 거쳐 검증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그게 아무리 성현의 말씀이던 성자로 칭송받는 이의 말씀이던 간에 말이다. 네빌 고다드의 말이건 조셉 머피의 말이건 밥 프록터의 말이건 론다 번의 말이건 의심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건 그저 스스로가 타인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세뇌하도록 허락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것도 사타니즘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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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YY 2024-04-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크릿을 처음 읽은 2008년부터 작년까지는 선생님처럼 믿었습니다. 저는 영혼도 없다고 믿었던 사람이고 현실에는 한계가 존재하니 모든 이가 희생 없이 고통 없이 모든 행복을 누릴 순 없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어떤 경험을 한 뒤 저는 수십 년 간 미워했던 성경을 집어 들었고 이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저는 어떤 일도 할 수 없고, 하나님, 오직 의식만이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분은 보이는 것도 모두 만들었고 보이지 않는 것도 만들었고 시간과 종말과 무한한 다중우주도 동시에 만드셨습니다.
그 힘에 한계를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이성(세상의 왕,사탄,헛된목자,파라오)이 보여주는 환상이며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저도 작년까지는 종교란 것은 전혀 믿지 않고 논리와 이성이 제일이라 믿고 살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글을 써도 이성적인 분들을 설득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구와 수단으로는 그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글은 오해를 낳고 생각은 혼돈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오직 경험만이 모든 것을 증명해줄 것입니다.

혹시 생각 있으시다면 제가 최근 시작한 블로그에 놀러오시면 좋을 것 같아 주소를 남깁니다.
감사합니다.
https://blog.naver.com/truth_glory/223381119202
 
조셉 머피 잠재의식의 힘 -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내면의 보물창고
조셉 머피 지음, 조율리 옮김 / 다산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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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의식의 기능과 잠재의식에 새긴 관념이 자신에게 역효과를 내지 않기 위한 방법들이 1부에서 소개되고 2부에서는 그 활용으로 부와 성공, 문제해결, 결혼생활, 인간관계, 자기조절, 용서, 노화방지 등에서 활용하는 법들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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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 - 양자역학이 묻고 불교가 답하다
김성구 지음 / 불광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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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과학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짝을 이루며 과학이 종교를 검증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우주 종교적 감정이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종교에 이르른 게 불교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본서의 제목이 [아인슈타인의 우주적 종교와 불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우주 종교적 감정을 주는 것은 비단 불교만이 아니라 서양의 영지주의와 유라시아 대륙의 정신적 종교적 총체인 비교 철학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흐름이 끊어지지 않고 이 시대에까지 세계를 나누고 있는 종교 중 이러한 우주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종교는 불교 하나뿐이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저자는 불교의 연기법과 무아, , 화엄사상 등 불교의 가르침 전반을 양자론에 입각해 설명하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이해를 팔정도와 명상으로 체화하며 체계적으로 다가설 수 있음도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상호의존하지 않고는 성립될 수 없는 우주를 양자론으로 접근하며 이해시키고 있으며 나로서는 비선형적 인과로 접근했던 대목에 대해 저자는 상호의존 인과로 설명하고 있기도 했다. 양자론 전반으로 불교 교리를 이해시키고 납득시키고 있기도 한데 나로서는 불교라는 빛깔을 빌리지 않거나 저자가 불교도라는 것을 서술 가운데 드러내지 않았다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 저작이라고 생각됐다. 제목이 우주적 종교와 불교가 아니라 우주적 종교와 진정한 종교였다면 독자가 더 늘지 않았을까 싶다.

 

본서는 두고두고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빠르게 읽느라 다소 눈으로는 읽었지만 기억에 남지 않은 대목도 있는 터라 도서관 대출로 읽은 책이지만 조만간 구매 목록에 오를 예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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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휴먼 - 당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끌어내는 방법
디팩 초프라 지음, 김윤종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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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팩 초프라 씨의 책은 [사람은 늙지 않는다]로 내 기억으로는 중고딩 시절 접해 보고 그 후 그다지 가까이해 보지 못한 듯하다. 중고딩 때는 그가 투머치토커라는 생각은 그닥 안 했었는데 이번 독서로 그가 왜 그리도 유명한 투머치토커로 불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본서는 명상서로서는 양자물리학, 유전자학, 뇌 과학, 인류학, 고고학, 심리학 등을 넘나들며 의식과 그 초월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서이다. 한마디로 우주와 만물과 인류는 하나의 의식이며 우리는 뇌와 자의식, 현실 지각을 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상 의식 너머에서 우리는 온 마음 그러니까 하나의 의식으로 일상을 초월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메타를 초월로(그 너머로) 정의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가상의 현실이며 메타 현실이 진정으로 우리가 각성하고 살아가야 할 세계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가상의 현실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양자역학적으로도 원자론으로도 우리가 지각하는 견고한 세계는 실재일 수 없으며 우리가 자각하는 것은 우리의 뇌가 지각하고 창조해내는 바이기에 하나의 가상현실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감각하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 같기에 우리는 현실을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허용(수용)의 영역을 바꿈으로서 현실을 달리 창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달리 창조하는 방향에서 인식의 전환과 명상을 권하고 있기도 하다. 나로서도 최근 과학계의 발견으로는 사람 개개인의 뇌가 오감을 지각할 때 같은 영역대의 수용체계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는데, 그를 통해 보아도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살고 있지 모두가 공유하는 견고한 하나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보는 색깔로 다른 사람이 보는지 내가 감각하는 촉각과 온감, 냉감을 타인도 똑 같이 느끼는지 내가 느끼는 맛과 향기를 나와 같이 느끼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는 철학적 논의였으나, 과학이 우리는 유사하지만 다른 영역대로 감각을 지각한다는 걸 증명해낸 것이다. 이 견고하지 않은 세계는 결국 각자의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것은 이 견고하다고 믿었던 가상의 세계를 넘어 이상과 바람이 공존하고 이루어지는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메타휴먼이 되어 그런 메타 세계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장황하게 전개되는 내용들에 넋을 잃었다가 어떻게라는 사안에서 다소 상식적으로 변하기에 약간 김이 새기도 했다. 저자가 논하는 주제는 명확하지만 주제를 풀어내기 위한 소재가 광대하기에 넋을 잃을 만도 하고 취향이신 분들은 재미와 의미도 깊을 책이다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지가 전해지는 불가의 게송과 같은 핵심을 찌르는 짧은 글이 더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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