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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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 서포터즈 3기로서 도서협찬을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이들 원주민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 ...... 그러나 우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들보다 훨씬 더 야만적이다.” - 몽테뉴

 

E. T. 시튼의 [인디언의 복음]을 통해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문명과 유럽 문명의 조우 그리고 원주민의 문명을 야만이라 부르던 이들이 결국 그들의 문명이 자신들, 유럽의 문명보다 보다 원숙하고 거룩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엿보기도 했었다. [인디언의 복음]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신에 경탄하는 과정이 영성서처럼 담겨있다면 본서 [야만의 해변에서]는 아메리카 대륙 전반에 걸친 원주민들을 인디저너스라고 칭하며 그들 전체 문명과 유럽 문명의 교류를 담고 있다.

 

본서에서는 해양 개척시대에 신대륙을 발견하고 최초의 만남에서 인디저너스 문명과 부에 감탄하며 그들을 착취하고 수탈하는 대목부터 시작된다. 당연히 인디저너스들이 노예가 되며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과 같은 향방에 처해진 대목을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인디저너스는 난생 처음 마주한 유럽인들의 질병들에 취약했고 너무도 쉽게 죽어갔다. 노예화한 인디저너스보다 주목되던 것은 초기 유럽에 외교사절로 건너가게 된 인디저너스인데 이들은 사절단 형식으로 가수, 서커스단원 등도 정치인들과 함께 건너가 유럽에 자신들의 문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사절단 형식만이 아니라 특정 부족의 어린 왕자 같은 이도 유럽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 유럽으로 향하기도 했고 유럽에 도착해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살다 죽은 사례도 있다. 본서에서는 이런 사례들이 많이 등장한다. [인디언의 복음]에서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과 유럽인 사이의 외교를 논하며 거짓과 위선과 가식으로 뭉친 자신들 스스로를 자기비판하는 경우에서 엿보이듯 유럽인들은 약속이나 맹세 따위는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앞서 말한 어린 왕자의 경우도 부모가 유럽인들에게 20개월 내로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수행원들과 함께 보냈지만 유럽인들과의 약속은 도무지 믿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유럽으로 간 인디저너스, 대개 외교적 목적으로 간 이들은 한결같이 부와 가난, 거대함과 초라함, 조직력과 폭력이 공존하는 유럽을 보고 기이하다 여겼는데 그들이 남긴 몇 안되는 기록 중 남아있는 것을 보자면 이렇다.

 

친우들이여, 이 나라의 수많은 백인들처럼 우리가 부유했다면, 이 추운 날씨에 신발도 신지 못한 아이를 데리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몸을 데워주었을 것입니다.

 

친우들이여, 우리는 이 나라에 온 이후 줄곧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을 구걸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마음 아픕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모두 가난합니다. 그러나 빈곤한 이들에게도 충분히 먹을 것이 있고, 따뜻하게 입을 옷이 있습니다. ......

 

친우들이여, 이렇게 부유한 나라에서 이렇듯 많은 이들이 빈곤하고 굶주리며,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과거 유명했던 [빠빠라기]라는 책의 시각과도 같은데 야만과 문명이라는 이분법이 얼마나 어리석은 분류인지 알 것도 같았다. 유럽인들이 야만이라고 바라보던 신대륙의 인디저너스에게는 이렇게나 문명을 자처하는 유럽의 계층 간의 격차와 불평등이 열등해 보이지 않았을까 싶다. 기술의 격차에서는 유럽이 앞섰지만 기술만이 문명화를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신대륙의 인디저너스 문명들에 한참이나 열등한 것이 유럽 문명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열등한 문명이 대세가 되어 전 세계를 물들인 지금 우리는 더불어 열등한 존재가 되어 평준화되어 버렸다. 암과 바이러스처럼 유럽 방식의 문명은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시의 유럽과 같은 격차와 불평등을 조우하게 되었다.

 

본서에서는 유럽의 개척자들이 신대륙으로 들어와 자기들의 통역사로 쓰기 위해 강제로 인디저너스를 납치하고 인디저너스 국가들에 전염병을 전파하며 그들을 복속시키고 절멸시킨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 책은 조우에 주목하고 한 문명이 파괴되고 각각의 국가가 사라져간 역사는 간략히 넘어가고 있다.

 

본서에서 참고한 것은 역사 외에도 그 시대 유럽 각국 왕의 칙령서와 교회 기록 그리고 당시 유럽으로 온 인디저너스에게 지출된 회계기록 등인데 그만큼 당시 유럽에 방문내지는 납치된 인디저너스의 기록이 전무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유럽에 남긴 그들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개척자를 자처하는 침입자들이 자신들의 통역사로 쓸 목적으로 납치한 사람들부터 시작되어 노예화된 이들과 피랍된 고위층들로 인디저너스의 기록이 이어졌다. 유럽의 왕들은 국가의 다름을 떠나 인디저너스라도 왕족과 귀족은 우대했는데 그들이 유럽에 오게 된 경위를 떠나서 그들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지출되는 금액을 부담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인디저너스는 유럽의 질병에 취약했는데 유럽까지 오는 항해에서 살아남은 이들도 결국 유럽에서 질병으로 사망한 경우들이 잦았고 그 장례비용도 유럽의 왕들이 각기 자기 국가에서 사망하는 경우 부담했다. 하지만 대다수 노예가 된 인디저너스들의 삶은 달랐다. 자유인이 되었다가 다시 강제로 노예가 되는 경우 소송전을 통해 자유를 얻고 위로금 형식의 피해보상금을 받는 사례들도 있었다.

 

노예가 되지 않더라도 개종을 핑계로 문명화라며 유럽의 개척자들을 위한 사람들도 세뇌된 인디저너스는 자기들의 국가와 주변 국가와 민족들을 유럽인들이 복속시키고 멸망시키는 데 협조자이자 동조자로 앞장서게 되었다. 그들은 유럽에 저항하는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경우에 따라서 수감된 상태에서도 유럽의 왕에게 소송전과 서한을 보내 다시 자기들의 기여에 따른 보상을 받기도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미대륙의 현재 국가들의 원류가 유럽에 그들이 헌납하거나 빼앗긴 보물과 유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한 건 그들의 자신의 문화와 정신을 그리고 언어를 빼앗기고 단절하게 된 경우가 미대륙의 원주민 전체가 겪은 최악의 결말이 아닌가 싶다. 시대는 흘러가지만 미대륙의 과거 번영하던 문명들은 이제 그 전승을 잃게 되었다. 인체의 암세포가 확산될 때 암은 자신에게만 영양과 혈액이 밀집하도록 만들면서 커나간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게 암의 특성이다. 그 특성이 유럽의 문화가 전 세계에 전파된 과정에서 여실히 동일하게 보인다. 인류는 지구에서 이젠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몇 세기 안에 행성 간 탐사도 가능해질 것이다. 유럽 문명의 전파와 같은 양상이 우주 개척시대에는 바뀌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인간의 본성을 돌아보면 그런 기대를 접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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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빌 요한계시록 주석
그레고리 K. 빌.데이비드 캠벨 지음, 김귀탁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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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기독교인이었던 사람으로 요한계시록에 매혹적인 면을 느낄 수밖에 없어 이 책과 함께 하게 되었다. 다만 더 이상 기독교인이 아니게 된 이유를 조금 밝혀야 할 것 같다. 내가 기독교인이었던 순간은 성경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언급하는 대목만 읽던 때이다. 나 스스로 성경을 읽고부터는 더 이상 기독교인일 수 없었다. 성경 자체에 모순이 깊고 이걸 그대로 믿는다면 더 이상 기독교인일 수 없는 게 성경이라 생각된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하나님의 정의와 피조물의 정의가 우선 모순되며 자신이 창조한 한 인간 족속에게 다른 족속의 인간은 성노예로 삼을 어린 여자 몇만 남기고 남녀노소 모조리 죽이라는 거룩한 진멸이라는 것도 만물의 창조자인 하나님의 태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말은 진작부터 모순이라고 느꼈다. 자신이 유일신인데 유일한 존재가 도대체 누구를 질투한다는 말인가? 인간이 몽상하는 가상의 다른 신들은 창조자의 입장에서 그저 인간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지 않은가? 그런데 인간의 상상을 질투한다니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존재가 하나님이란 말인가? 창세기 초반의 인간과 피조물 그리고 실낙에 관한 소소한 부조리를 떠나 다른 대목들을 보아도 유대인들의 경전에 나타난 하나님은 부조리하고 어불성설의 존재일 뿐이다. 신약에 이르러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나님을 개종시키다시피 그 상을 변모시키는데 이 역시 이전의 하나님과 신약 이후의 하나님 사이에 괴리만 더 크게 느껴진다.

 

예수님의 상도 그렇다. 예수님은 분명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상을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거나 그만이 유일한 존재인 독생자라고 수평관계에서 상하 관계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오히려 친구를 자처했는데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서도 그의 제자들은 조금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는데 예수님께서 너희는 내가 누군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대목도 그가 독생자인 것을 다른 이들은 모르고 그 자신만 알고 있었다는 말도 안되는 해석을 하고 있다. 오히려 너희는 자기 자신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의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안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게 너 순조로이 해석된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너희 자신의 가치와 의미와 본성을 알게 해 주겠다는 웅장한 말씀이었다고 보이니까 말이다. 이 모두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한 초기 기독교도 중 삼위일체, 예수님을 신으로 보는 관점을 가진 종파의 해석이 로마의 정치에 편승해 대세가 되며 이루어진 상황이다. 초기 기독교 중에서도 그노시스라던가 그와 비슷한 해석을 하는 종파들은 당시 거의 대부분 숙청되어 사라졌다. 복음서들을 보아도 예수님의 출생지역과 기록들이 상이하다. 그렇다면 당시 요한복음을 기록한 예수님의 이종사촌의 기록이 정확할 것인데도 그의 기록과는 다른 기록들이 존재하는 까닭은 구약에서 기록된 메시아의 출생지역과 일치시키기 위해서이다. 구약에서는 메시아가 죄인들 사이에 머문다는 기록도 존재하는데, 그래서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이 행한 것이 대중을 죄인으로 정의하는 도그마를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사람들은 모두 매순간마다 죄를 짓고 살며 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예수님 믿어서 사라지는 원죄만이 죄가 아니라 매순간 매초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다. 예수님은 마음으로 짓는 죄도 죄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도 거듭 매순간 마음으로 죄를 짓게 될 것이 인간이다. 신앙만으로 어떻게 죄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인가?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불신앙은 지옥행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매순간 죄를 짓도록 제작한 인간은 한순간의 신앙만으로 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너희 안(사이)에 천국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너희 재산을 땅에 쌓지 말고 천국에 쌓으라는 예수님의 다른 말씀에 미쳐서 순교될 상황을 미친 듯이 추구했다. 애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는 인간들의 욕심과 욕망이 심각히 이기주의를 추구하니 서로 사랑하며 배려하고 함께 거룩하게 살아가라는 취지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욕망과 욕심어린 눈과 마음으로 이 말씀에 대해 오히려 각지의 지배자들이 초기 기독교인들을 죽이지 않으려 거듭 살려 보내며 제발 이렇게 사형당할 짓들을 하지 말라고 말리는 와중에도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처해 끝내 사형당해 죽을 상황을 만들었다. 이런 천국이라는 보상에 탐욕스런 자들의 욕심과 욕망으로 갈 곳이 정말 천국일까 싶기만 하다. 기독교인이라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추구하는 것이 진정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이 아니라는 건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1차와 2차 세계대전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모든 게 유대인들이 인간과 신의 사이에 벽을 쌓고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신격화하며 인간과 신과 예수님의 상 사이에 괴리를 거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의 이기주의와 욕심이 더 크게 그 괴리를 키웠고 말이다.

 

이 시대에 예수님의 상은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창세기에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인간을 만들자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구조를 본따 창조되었다는 말이 되며 하나님의 구조대로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이 보이신 능력의 일부를 구현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래서 카발라 철학에서는 태초의 피조물인 실낙하기 이전의 아담을 아담카드몬이라 부르며 그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현해내었다고 보고 있다. 이 카발라 철학을 예수님께 대입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제작하신 진정한 인간(眞人)으로 회복(복본 復本)된 사람(아담카드몬)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님을 신격화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고의 존재로서의 정의가 가능하지 않나? 예수님께서도 이미 미래에 종말의 날에 진짜 메시아가 도래할 것을 알고 있었고 그를 질투하였기에 자신이 돌아오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보인다. 그래서 그 존재를 한자나 한국어로 번역하면 보혜사를 자신이 보낼 것이라 말씀하셨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과 같이 실낙하기 전의 진정한 인간으로 회복되면 능력이 발현될 것을 알았기에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저 산을 바다에 던질 수도 있을 거라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다.

 

어쨌건 그분도 미래의 대재앙을 미리 보셨고 예언하셨으며 그의 이전 선지자들과 이후 선지자들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날을 보고 예언했다. 그레고리 빌의 요한계시록은 구약과의 영속성을 주목하지만, 다른 주석가들은 계시록에서의 구약 인용이 실제 구약과의 상이한 점을 주목하기도 했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신격화하기 위해 구약을 날조 또는 왜곡해서 인용한 경우들이 있는데 이런 습성을 계시록을 쓰면서도 보인 것 같다. 그럼에도 계시록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전파된 지금, 세계를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세력이 있다면, 계시록 예언들을 완수하면서 대중이 예언이 이뤄지고 있다고 믿으며 안일하게 대비할 마음을 잃게 할 의도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까닭에 세계적 규모의 종교들의 예언은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다.

 

본서를 소장한지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읽고 있다. 그레고리 빌은 계시록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요한의 말을 믿으며 계시록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이 가져야 할 태도와 살아가는 자세는 무언지를 논한다고 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태도에 대해 알아두어야 할 듯하고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분명 이 시대 상황에서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서가 아닌가 싶다. 나로서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자 바르게 살아온 선한 사람도 죽는 경우가 있고 타락한 이들 가운데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죽고 사는 문제는 자신이 신앙하느냐 마느냐 하는 자신의 태도나 노력에 달린 일이 아니고, 불신앙자에게는 운명, 신앙인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니 말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읽으며 고려해야 할 건 7년 환난이 결코 7년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너희 세대가 다 가기 전에 돌아오리라는 말씀을 하시고 2000년이 지났다. 한 세대가 30년인 것을 고려하고 7년이 30년의 4분의 1이나 5분의 1인 걸 고려하면 2000년의 4분의 1이나 5분의 1400년에서 500년은 7년 환난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적그리스도나 사탄의 하수인으로 가정되는 카발 또는 NWO 또는 일루미나티가 미국의 정재계와 국가 기관들과 미디어를 모두 장악하고 있다는 걸 믿는다면, 미국 국방성 소속 과학개발처인 다르파 DARPA에서 인간의 종교성,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전자를 소멸시키거나 기능을 제거하는 화합물을 만든 걸 고려할 때, 과거 선지자들이 적그리스도가 단두대로 신앙인들을 죽인다고 한 예언보다 더한 시절이 올 수 있다는 결론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BCI기술을 역으로 이용해 AI로 인간의 본능과 욕망과 행동을 제어할 수 있을 텐데 거기다 신앙심과 종교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건 더 이상 인간의 정신과 육체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이런 시대가 7년 안에 끝나리라고 기대하고 싶겠지만 이제 시작되어 400~500년은 갈 거라고 보는 게 이성적인 판단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대중이 할 수 있는 건 예측하고 대응안을 마련하려 함께 생각하는 것뿐이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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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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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아무런 잡음 없이 권력을 이양하는 오늘날 독일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규범을 유지할 수 있을까?”

 

본서의 1장은 이런 화두를 건넨다.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야를 가를 새 없이 부정선거라는 암흑을 두르고 있다. 황교안 의원이 민주당의 부정선거를 논하다가 벽에 부딪히자 국민의 힘이 행한 부정선거를 논한 것과 같이 이미 박근혜 정권 때부터 부정선거 논란은 유투브 영상으로 알려져 왔다. 어느 당 어느 인물 하나의 폐단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진작부터 한국 정치는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야당이 다수당이 되며 국회를 압도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압박하고 대통령이 임명함과 동시에 탄핵이 이어져 29번에 이르는 길들이기식 제재가 줄이었다. 대통령 특활비를 비롯한 여러 부서의 특활비를 삭감해 수사, 기소, 행정 전반을 저지했고 정부 예산을 대대적으로 삭감했다. 이 모든 건 민주당에서 대선 결과를 부정하고 대통령의 직무를 수행하는데 제재를 가하기 위해서였음을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다. 물론 대통령이란 인물도 대다수 국민의 마음에 처음부터 흡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의 범죄를 감추려 수사 개입 등 권력을 남용한 것이 명백했고 그로 인해 민주당에서 탄핵할 명분이 생기자 윤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 계엄을 선포해 처음엔 국민 모두가 이에 저항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다수 국민이 윤 어게인을 외치게 된 데에는 그의 부정선거를 처단하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명분이 국민들에게 최적으로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충직한 민주주의자가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을 일관적이고 확고하게 거부하는 데 반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애매모호란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폭력이나 반민주적 극단주의에 눈을 감는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태도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위험한 이유다.”

 

이 말은 계엄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을 비판하는 문장으로 쓰일 수도 있으나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표현은 법률에 있어, 대통령의 권한으로 계엄을 선포할 수 있으며, 국회가 의결해 해제를 제안할 때 거부하면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는 조항으로 보아, 계엄을 선포한 건 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권한이며 국회의 의결을 순순히 따라 계엄을 해제한 대통령에게 권력 남용은커녕 탄핵 사유조차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초에 대통령이 부정선거를 계엄 사유로 공표했을 때 명분은 대통령에게 돌아갔고 그걸 국민 대다수가 수긍한 것이라는 말이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동은 계엄이 아니라 다수 정당이 되었다고 자기 집단 이익을 위해 국회에서의 처신에 제한이 없는 민주당 인사들에게서 찾아야 할 일이다. 심지어 이들은 국회의원을 욕하거나 비판하면 가중 처벌하는 법안까지 만들었다. 부정선거를 논하면 처벌하겠다며 법안도 발의했었다. 이들은 법 위에 있는 존재도 아니라 법을 창조하는 빌런들이다. 선관위에서는 총선 때 참관인 둘이 부정선거 사례를 보고하자 무시했고 선관위에서 무시하자 이 둘의 참관인이 대중에게 부정선거 사례를 알렸다. 그로 인해 선관위가 이 둘을 고소하기까지 했다. 미친 것인가? 참관인은 선거를 감시할 목적으로 있는 것이다. 참관인이 부정선거를 보고하지 않고 알리지 않는다면 참관인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은 민주주의 사망이자 대한민국이 침몰 중인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는 이미 문재인 정부 때 조사가 끝났고 미심쩍어 할 대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진실을 요구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 때도 유족들의 목소리가 컸다. 그런데 무안 공항 참사에서는 이미 무안 공항과 둔덕 설치에 민주당이 더 깊이 관여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들까지 잠자코 있다. 사고 당시 착륙을 거듭 사고 지점으로 하라고 지시한 관제탑 문제까지 진실을 요구할 사안이 다른 참사들보다 큰 대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민주당이 난처해질 상황에는 국민이 피해자가 되어도 다수 국민은 조신한 규수가 된다. 하지만 조선 시대 규수도 분명 참다 참다가는 무슨 직언이든 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은 반민주 세력을 정당화하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급진적으로 만들기도 한다.”


직언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들이 다수인 시대라면 과거 세대가 목숨과 피를 바쳐 일군 민주주의를 우리는 잃고 말 것이다. 침묵은 불의를 향한 동조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자신이 피해자가 될 때까지 혹은 되고 나서도 가해자를 격려한다면 이는 느긋할 것도 없는 명백한 자살 시도이다. 이미 시절은 망국으로 들어섰으며 다시 일어서자면 시민혁명이나 쿠테타와 같은 부활의 길밖에는 없는 시절이다. 국가가 국민보다 중국 인민의 이익을 위하고 있는 정책들을 시행하고, 나라 곳곳에서 변사체와 마약이 즐비해지고, 나라 곳곳을 타국인들이 도촬하고 도청하는 지경에도, 특정 정당의 가두연설마저 타국인이던 인물들이 들어서서 다른 나라 말로 연설을 하고, 그 연설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말로 환호하는 상황에도 눈을 뜨지 못하는 국민만이 가득한 시대라면 한 번 망하는 길을 거치지 않고는 길이 없을 듯하다. 정치적 입장이 분명하지 않던 국민도 정치 성향이란 걸 띠기 시작한 시대다. 본서와 같은 책이 길을 제시하지는 않으나 이 책을 읽으며 어떤 길이 빛이고 어둠인지 가늠해 보려는 시도, 더 나은 길을 헤아려 보는 시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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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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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야기라는 주제로 고인이 되신 이어령 선생께서 연작을 쓰신 것이 [너 어디에서 왔니], [너 누구니], [너 어떻게 살래], [너 어디로 가니] 다. 이 책 [너 어디에서 왔니]는 한국인의 탄생을 다룬 책이기도 한데 한국인의 탄생과 양육과 성장기를 다룬 보다 더 원형적인 웅장히도 거대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물론 이건 완독하고 난 감상이지 읽으면서는 소소한 삶과 삶의 이면 이야기들이다.

한국인이 임신하고 출산하고(난 출산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 쓰이던 생산이란 표현이 일제 시대 일제가 제품이 만들어지는 걸 생산이라고 하며 인간은 出 나오고 産 낳는데 기계는 되려 生 태어나고 産 낳는, 어의가 이상하게 뒤바뀐 기괴한 언어 세계가 되어버린 게 어이없다) 태어나고 아기를 돌보고 돌봄을 받고 자라는 과정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본서이다.

본서에서는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로 이야기를 여는데 이를테면 신기하고 재미난 이야기, 가벼우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로서 본서의 내용을 보아주길 바라시는 마음이 담기지 않았나 싶다. 하나의 민족의 개개인이 탄생하고 성장하는 이야기, 아기를 갖고 낳고 돌보는 이야기는 무겁다고 보면 한없이 무겁지만 일상이라고 보자면 한없이 가까운 이야기가 아닌가? 이어령 선생께서는 이런 이야기가 무겁기보다는 가깝게 느껴지기를 의도하시고 집필하셨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의 실제는 꼬부랑 할머니가 자신이 눈 똥을 꼬부랑 강아지가 먹으려 하자 꼬부랑 강아지를 꼬부랑 지팡이로 내리치는 똥 같은 이야기라는 현실도 알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이어령 선생의 말씀이다. 희화된 이야기의 이면에 진짜 현실을 담아낸 ‘인생은 아름다워’란 영화처럼 희화할 수 있다 해도 처참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본서의 서술은 시종 경쾌함을 유지한다.

태명을 짓는 관습은 한국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 세계 어디를 보아도 태명짓기의 시작은 한국이라고 언급된다고 하는데 우리도 이런 문화가 대중화된 건 2001년인가 2007년부터라고 한다. 아기에게 말을 거는 독특한 문화는 태교라는 아시아 전체의 문화유산이라고 보기에는 한국의 독특함이 담겨있다. 아기에게 말을 거는 문화에 과학적인 이유가 담긴 것은 아기들이 옹알이, 영어 발음으로는 배블링을 시작할 때 프랑스 아기들은 ‘바바’라고 하는데 나이지리아 아기들은 ‘아바 아바’로 자음+모음의 결합이냐 자음+모음+자음의 결합이냐는 차이를 불러오기도 하며 아기들의 울음 소리를 들어봐도 프랑스 아기들은 상승조로 울고 독일 아기들의 울음은 하강조라고 한다. 태내에서부터 부모의 억양과 발음 특성을 배워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울음소리가 다르며 옹알이도 자기 나라 말에 맞게 한다는 것이다. 민족 정체성이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근원적이구나 싶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이야기는 서양 아기들은 스와들링이라고 낳고부터 거의 1년을 보자기에 꽁꽁 쟁여 묶어서 돌보는데 우리 아기들은 그렇게 억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나로서 생각되는 것이 그렇게 생애의 최초 시기에 억압받는 서양 아기들은 자라며 이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며 사는 삶을 달게도 부여되는데 비해 동양 아기들은 자라서 성인이 되는 동안 생애 대부분의 선택 특히나 학업과 대학 및 진로 선택 그리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생의 선택안 중 대부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정마다 가풍이 다르긴 하지만 한국 드라마의 가장 큰 주제나 소재 하나가 부모의 자식 결혼 반대이지 않은가? 그리고 청소년 드라마들에서 학업 스트레스, 대학 선택 문제, 진로 문제에서 부모가 개입하지 않는 경우는 본 적도 없다. 반면 서양 드라마와 영화들에서 이런 문제는 소재로도 사용되지 않는 주제들이다. 스와들링 잠시 당하고 자신의 삶을 일생 자신이 선택하는 서양인의 삶과 이 시대에 한국 사람들의 삶을 비교하면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제한되어온 선택의 폭을 자각하게 한다. 이런 문제를 자기 비판적 차원에서 언급하는 학자들은 없으며 이어령 선생 또한 본서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를 업어 키우는 문화는 일본과 아메리카 인디언 외에는 없다는 일본 보건학자의 말을 언급하시면서 스와들링 하는 유럽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와 민족들이 업어 키운다는 말씀도 하신다. 업어 키우며 접촉이 지속되는 경우를 연구한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과거 유럽 고아원 환경을 배경으로 한 연구이다) 아기를 업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는 접촉이 잦으면 아기의 성장 발육과 면역력 형성에 유익했으며 이런 접촉이 완전히 단절되는 경우 심지어는 다시 접촉의 기회가 생긴 아주 오랜 기간까지도 아기의 성장이 중단된 경우도 보고되었다고 한다. 접촉이 완전히 차단되면 심지어는 아기가 사망하기도 한다.

그리고 돌잡이라는 게 우리 문화의 되게 독특한 면이기도 한데 1500년대의 기록에 의해도 아기가 태어난지 1년째 돌잡이를 했으며 그건 오래된 예로부터의 전통이라고 언급되고 있기도 하단다. 무언가 잡는 것을 생의 선택과 연결 짓는 것은 참 독특한 전통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본서는 분량이 꽤 되고 여러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한국인만의 무의식이라고 생각되는 면은 그리 많지 않았고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꽤 있었다. 한국인만의 정체성을 찾는다는 것도 그리 쉬운 여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한국인을 이해하고 싶다거나 한국인만의 무의식을 알고 싶다는 취지라면 민담이 주제인 책들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본서에서 보듯 민간의 일상으로 민족 정체성을 이해한다는 건 민담만으로는 부족할 듯도 하다. 우리의 일상을 눈여겨본 학자들의 강의로 다가서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인이야기 #너어디에서왔니 #이어령 #파람북 #한민족 #민족정체성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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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0 시대 - 글로벌 대격변이 시작된다
박종훈 지음 / 글로퍼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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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야 전문 기자 분의 전문적 시선과 상식이 어우러진 책이다. 대부분에 내용은 상식적이기도 하지만 그 정보들을 통해 드러내는 통찰은 들어봄직하지 않을까 싶다.

 

본서를 읽으며 전쟁과 방위비 분담 등과 국제질서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상당히 상식적으로 느껴졌으나 경제 문제에 대한 부분은 내가 취약한 부분이라 상당히 배우는 자세로 읽게 되었다.

 

현재의 트럼프 2기는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기댈 바가 없던 1기 때와는 달리 정당에서의 지지 기반이 탄탄하다는 대목에서 트럼프 2기 때야 비로소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대로 정치를 펼치겠구나 싶었다. 원래 미국에서는 재선전에는 다음 선거 때문에 언론과 대중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정치하지만, 재선하고 나면 그때부터 자기 소신을 맘껏 펼친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도 어느 정도 자제하던 바를 이번 임기부터는 모두 거나하게 실행할 우려가 있는데 관세 문제부터 시작해 앞으로의 난국들이 걱정이긴 하다. 물론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지나갈 문제기도 하겠지만.

 

본서는 정치, 국제, 경제, 사회의 4장으로 구성되어있지만 구분이 명확하다기 보다는 한 부분의 문제에도 여러 영향력이 어우러져 있기에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되기도 한다. 본서에서는 다루는 면면은 국제질서 재편과 경제적 악화의 심화와 내부의 분열과 각국의 혼란과 갈등이 어우러진 트럼프 2기가 되리라는 것이다. 나로서는 해리스가 되었어도 문제야 있었겠지만 대중이 트럼프 2기를 우려하고 심각히 보는 건 임기 시작부터 그가 보이는 지나치게 일관된 그리고 고집스런 태도때문이 아닌가 싶다. 자기 확신이 지나치고 숙고하지 않는 우려되는 승부사 기질은 그가 세계 경찰국가를 자처해 왔던 그리고 국제적 영향력의 중심에 있는 국가의 대통령으로서는 다소 무리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어쨌건 그의 시대는 왔고 미국의 민주당이 그를 탄핵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는 있지만 미국에서 그를 탄핵시키는 것이 한국 더민주가 한국의 박근혜, 윤석열 두 대통령을 탄핵한 경우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불러오는 영향력을 회피하려 한다 해도 그럴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의 정세가 이런 시기라 트럼프의 시대를 감당할 가능성이 있기나 하겠나 싶기만 하다. 어쨌든 세월은 흘러갈 것이고 이 시기가 어떠한 시절로 기억될지 가늠되기에 참 답답하고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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