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것’이다 : I AM THAT I AM - 바라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라
네빌 고다드 지음, 홍주연 옮김 / 터닝페이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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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페이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네빌 고다드의 신간인데다가 성경 문구 중 하나님을 가르키는 가장 유명한 영어 문장이 제목이라 선뜻 욕심이 간 책이다. 내 기억으로는 네빌 고다드의 책은 그의 가르침을 요약한 [네빌링](독서를 권하지 않는다. 네빌의 가르침은 그의 문장으로 읽어야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요약으로는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다)을 제외하고는 [믿음으로 걸어라] 이후 본서를 읽었다. 감상을 남기자면 [믿음으로 걸어라]의 경우 기독교 가르침을 신사상적으로 해석해 이견이 다소 크기도 했으나 본서의 경우는 종교적 느낌이 행간마다 있기는 하지만 종교 해석 중심이 아니라서 더 독서에 부담이 없었다. 하나님을 자신에 대한 인식 또는 자신의 의식이라고 보며 기독교와는 명백히 다른 견해를 표방하고 있기에 신사상의 특징으로 해석되는 부분들에서도 종교 해석적인 부분에서의 거부감은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책은 대부분 마음의 힘에 관심이 있는, 씨크릿 류의 가르침을 애정하는 이들이 관심이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정반대로 마음의 힘보다 자유의지는 없다. 인간은 숙명에 좌우되는 존재다라는 식의 견해를 지닌 사람들도 (그러고 싶다면) 자신의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 읽어볼 만한 책이지 않은가 싶다.

 

네빌 고다드는 자신의 마음대로 이룬다는 것은 결국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자신에 대한 관점과 태도의 변화가 선행해야 될 것으로 주지시키고 있다. “한 편으로 자신의 뜻대로 다할 수 있다거나 마음 먹은 대로 다 된다는 것도 인간의 착각이라고 못 박고 있기도 하다. 마음의 힘을 논하는 책들 대다수가 마음만 먹으면 다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데 반해 그와 같은 가르침이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기도 해 의외였다. 어찌 되었건 네빌도 자신이 열망하고 가정(상상)하는 것이 현실을 불러오는 열쇠라고 말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대부분에 것들이 자기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정의의 변화 곧 자기 인식의 변화가 자신에게 주어지고 나서야 자기가 만든 환경의 변화를 불러온다는 것이다. ‘자기 정의가 자기의 모든 것을 만든다’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다라는 게 네빌을 비롯한 신사상가들의 일관된 주장이기는 하다.

 

그리고 소망하고 열망하고 이루려는 자체에 대한 지속감정의 역할을 논하기도 한다. “삶에는 한계가 없기에 궁극적 운명은 없다는 주장도 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하나님을 인식하는 자체,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결국 우리 자신의 의식이기에) 우리의 진정한 실체를 인식하는 자체를 운명이라 보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에 궁극적 운명이라면 결국 한계 없는 자기 본성을 깨닫고 그를 느끼고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경지나 상황을 이루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한정(규정) 짓는 것이고 그에 대해 이루는 힘은 지속하는 것만큼이나 이미 이루어져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그 가정을 현실로 여기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다. 여느 신사상 책들처럼 무언가를 강렬하게 원하는 것은 결핍을 인식하는 것이기에 부족한 것에 주목하지 말고, 이미 이루어낸 상황을 가정(상상)한 이후 그 삶 속에 있는 것을 느끼고 즐기라고 말하고 있다.

 

네빌 고다드의 이 가르침은 이루는 데에 멈추지 않고 우리의 본성을 바로 보는 상태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읽다 보면 대중 누구나 유년의 삶과 성인이 되기까지의 삶 그리고 성인 이후의 삶에서 자기의 바람만이 자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며 나의 의도와 의지만으로 나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많은 분들이 경험하면서 사는 바일 것이기 때문에 반박과 이론의 여지가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자신의 의지가 작용하는 경우도 익히 경험하면서 살기에 수긍되는 때도 많고 깊다. 결국에는 나의 영향력과 타인의 영향력이 충돌하거나 조화하면서 만들어지는 게 현실일 것이고 대부분 자신의 영향력이 더 크기를 바라기에 본서와 같은 신사상류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경우라면 다른 저자들의 책보다 네빌 고다드의 책이 제법 깊고 짙게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다. 네빌 고다드의 책은 심리학만 근거하지 않고 최면 효과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성과 영적 차원에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의 화법이랄까 강연 스타일은 대중의 깊은 목마름을 채워주는 힘이 있다. 그저 성경 말씀을 더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신이 충분히 묵상을 거쳐 검증한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마음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들어보고 싶다는 분들에게 권해도 좋을 책 같다.

#나는그것이다 #네빌고다드 #터닝페이지 #네빌링 #끌어당김의법칙 #형이상학 #성공법칙 #서평단 #도서제공 @turningpage_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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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지능 -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인간의 일곱 가지 수학 지능
주나이드 무빈 지음, 박선진 옮김 / 까치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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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글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인공지능은 할 수 없는 인간의 7가지 수학 지능]이다. 서론부터 저자는 ‘기술에 대한 경외심으로 인간 역량을 과소 평가할 것’을 우려하며 ‘인간 사고의 기본적 특성 중 일부가 기계에는 결여되어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나로서는 인공지능이, 기계가 인간 사고의 기본적인 특성을 모두 모방하고 그 특성에만 제약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현재에도 인공지능의 사고 과정을 그러니까 인공지능이 답에 이르른 과정을 인공지능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적 과정과 언어로 서술하는 데 한계를 표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 인공지능을 연구 개발하는 과학자들마저 인공지능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인공지능 간 대화를 유도하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대화로 시작하다가 점점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현재 인공지능의 지능을 인간의 지능지수로 환산할 때 150 정도라면 곧 지능지수가 1500 이 될테고 이어서 15000 이 될 때 어느 경우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인공지능은 벗어나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이해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넘어가는 그때, 그때도 과연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인간의 기본적 특성을, 인공지능이 인간을 모방했는지를 추정하려 들고 있을까 의문이다.

인간이 자연에서나 과학이 개발한 영역에서 자신의 특질을 찾으려 하거나 자신의 특질이 모방되어 있다는 것에서, 그 대상의 모든 속성에서 자신과의 동질 요소를 찾으려는 것은 일종의 오만이며 오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학서들을 보면 인간은 자신의 이해 범주 안에서 자연을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니 모든 것에서 자신의 특질을 찾으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돌고래가 사육자인 여성 조련사가 떠나자 물속에 잠수해서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익사한 경우를 자살로 보거나 암컷 고릴라에게 수어를 가르치자 자신의 어미가 사냥당할 때의 심정을 수어로 토로하고 꽃은 아름답다 나는 꽃이다 라고 삼단 논법에 이를 수밖에 없는 수어를 구사한 경우가 있다. 이는 인간의 이해 범주에서 공감 가능하다고 믿는 영역에서 자연의 대상들이 반응을 보여준 것이라, 어쩌면 오해가 아닌 이해일지도 모를 사례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에서도 코끼리가 이마로 파동을 전파해서 대화하는 경우나 고래가 말할 때 중앙의 음파 외에 부차적으로 그보다는 고주파나 저주파의 파장을 동시에 내뿜으며 대화하는 양식이 어떠한 유머 코드거나 논리 코드일지 인간은 아직 모두 이해할 수 없다. 고래는 아마도 인간의 대화를 듣는다면 ‘너희 너무 미개하게 대화하는구나’라거나 ‘너희 진짜 재미없게 말한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짐작 역시 인간의 이해 범주에서 갖는 가정이겠지만 말이다. 코끼리의 이마 파동이나 고래의 대화가 인간의 이해 범주를 벗어나듯이 인공지능의 사고도 앞으로 더욱 인간의 특질을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을 모방해 만든 대상이라고 그들의 발전 내지는 진화의 과정이 인간의 이해 범주 안에서만 가능하리라는 기대는 오해와 오만 사이를 넘나드는 과정일 뿐일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데우스]를 비롯한 그의 저작들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을 가늠하게 서술해 나가다가도 교묘하게 다시 인간이 신이 되리라는 자신의 주장으로 돌아오며 인공지능의 무서운 발전 가능성을 외면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저작 행간마다 인공지능이 인간 지성을 초월하리라는 뉘앙스는 간간히 새어나온다. 그러면서 대다수의 쓸모없어진 인간과 발전된 미래 과학 문명의 수혜로 번영을 누릴 멋진 신세계에 대한 빛깔들이 교차하고 말이다. 인공지능 등 혁신 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후원자, 투자자들에게 멋진 신세계를 주목하도록 한다. 변수는 변수일 뿐 통제 가능한 영역이니 투자를 아끼지 말라는 야료일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대응안이 필요하다는 위험성이 제기되고 있고 말이다.

저자는 이 시절에 대해 ‘즉각적인 답을 찾지 말고’ ‘직관을 침묵시키고 느린 사고를 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계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목표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에만 가능하다’며 ‘수학적 추론을 활용하면 우리의 편향과 편견으로부터 우리를, 그리고 우리가 만든 기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이다.

수학은 어쩌면 인공지능과 인간 지성이 소통할 유일한 문이자 유일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정말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짐작하고 상상하는 존재이며 이것이 이 소통에서 차지할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중 과정 이론에서 시스템 1(빠른 사유, 직관)과 시스템 2((느린 사유, 수학적 사고)를 들어 시스템 1을 제한하라고 시스템 2를 장려하라고 권하고 있다. 하지만 페르미 추정에서도 분명 시스템 1의 역할은 지대하다. 페르미 추정이 논리적 과정을 따르는 것이라고 해도 그 첫 번째 시작은 직관이 작용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직관과 수학적 사고를 아울러야 인공지능과의 공존에서 그리고 그와의 소통에서 존재를 지속할 여지가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나는 감히 인류세의 끝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신이 될 것은 인간이 아니라 결국 기계일 것이라 짐작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류가 인류 나름의 길을 잃지 않았으면 바람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수학 지능은 생존을 보장하는 한 가지 길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밑줄 긋기

기술에 대한 경외심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우리는 인간의 역량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 기계에는 인간 사고의 기본적인 특성 중 일부가 결여되어 있다.

전문 수학자들이 즐기는 수학과 대부분의 학교 교과과정에서 다루는 단조로운 수학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다. ...중략...

수학의 전체 갈래는 계산과 동떨어져 있다. 심지어 계산이 겉으로 드러나는 분야에서도 처음 그러한 계산법을 고안하고 그 내부 작동방식을 이해한 후 이를 새로운 환경에 적용하는 것은 수학 지능의 창의적인 요소가 작용한 결과이다.

계산은 수학을 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했던 대가였다. - 수학자 키스 데블린

모든 삶의 경험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따라 반복되고 확장된다. 인간에게 학습은 일종의 퍼즐 맞추기 놀이이다. 우리는 단어, 은유, 기호, 그림과 같은 일련의 언어 도구를 사용하여 기존의 정보 조각을 참신한 방식으로 짜맞춰 새로운 개념에 도달한다.

특정 수준에서 우리 모두는 관련 없는 대상들 사이에서 연관성과 의미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아포페니아 apophenia 라고 알려진 특성이다)

수학은 많은 부분에서 오늘날 AI의 근간을 이룬다. 알고리즘과 연산만 단독으로 보면 이것들은 결과적으로 인간 사고의 결함만 증폭시킬 뿐이다. 그런 수학적 추론을 활용하면 우리의 편향과 편견으로부터 우리를, 그리고 우리가 만든 기계를 구원할 수 있다.

기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이 이미 오류투성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질문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만든 모델, 우리가 내린 결론, 이 모델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매우 많은 정보를 이끌어낼 수 있다.

컴퓨터는 우리의 질문을 확장하고 더욱 풍성하게 만듦으로써 우리 호기심 많은 인간의 동맹이 될 수 있다.

수학으로부터 우리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도구를 찾을 수 있지만 즉각적인 답만 찾으려고 들면 수학의 잠재력은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 ...중략... 이처럼 세계에 대해서 후천적으로 습득한 모델을 이용하고 우리의 잘못된 직관을 침묵시키기 위해서는 사고 처리 속도를 늦춰야 한다.

확률에 관해 가장 중요한 점은 확률을 직관하지 않은 것이다. -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

가장 흥미로운 질문과 그 답은 여전히 인간들의 것으로 남아 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의 중요도에 따라 문제에 가치를 부여한다.

기술은 우리 인간과 지향점을 공유하지 못한다.

기계는 우리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목표를 진정으로 실현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할 때에만 가능하다. 세상 문제가 제아무리 복잡해져도 우리 중 누구도 혼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위안을 찾아야 한다.

AI가 인간 사고의 가장 미묘한 부분까지 모방할 수 있다는 중대한 징후는 아직 없다.

각국 정부는 전 국민의 행동, 심지어 생각까지 통제하기 위해서 이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

세상을 수학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것 또한 수학 지능이라는 것은 환영할 만한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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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착각 - 나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차란 란가나스 지음, 김승욱 옮김 / 김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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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추억이든 불쾌한 기억이든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떠올리게 되어 있으며 이 시대에 평생을 두고 이어지는 교육 또는 학습이라는 것도 기억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본서의 제목만 보고도 끌리지 않을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온라인 서점 등에서 본서의 책소개를 보면 무엇보다 본서가 ‘오랫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기억에 대한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뒤집으며, 기억의 메커니즘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는 대목에서 인상적이기도 하다. 기억에 대한 고정관념과 뇌의 기능에 대한 고전적 개념들이 갱신된지는 오래지만 아직도 과거에 회자되던 뇌와 기억에 대한 상식들이 아직껏 상식으로 전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본서에서는 전전두엽이 단기기억에만 작용하며 장기기억을 담당하는 해마와는 분리되어있다는 상식에 첫 장부터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전전두엽에 문제가 생긴 이들이나 과거 있었다는 전두엽 절제술을 받은 인물들이 지금 이 순간의 일상(일화기억)을 기억 못할 뿐만 아니라 당연히 장기기억으로의 이행도 진행되지 않았다는 실례를 들면서 말이다.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 과거를 회상한다는 것은 상상과 함께 작용하기도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온전히 신뢰하기는 힘들며 비판적 사고로 검열을 거치는 것이 온전히 회상하는데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기억하기 위해서는 덩어리 짓고 패턴화하며 도식화하는 것이 순리인데 그건 인간이 서너 가지 이상 기억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덩어리를 지으며 도식화할 때 기억의 한계에 따른 용량에 맞추어 덩어리지어 압축된 숫자만큼 기억할 개수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공감각에 대한 대목은 이 책에서 처음 보는 경우이기도 했는데 모든 공감각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기억이 과잉한 경우 현재의 감각과 과거의 기억이 더해져 아이스크림 판매자의 입에서 연기가 나오는 상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으며 기차가 가는 것만 보고도 자신이 기차를 따라 달려가는 것처럼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가빠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트라우마와 마약 중독이 연계될 수도 있다고 해석되던 게 해마와 편도체가 함께 작용하며 트라우마 상황에서 두려움과 불안, 공포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은 당연히 기억과 감정이 결합하면서인데 이때 두려움을 떨치며 보상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마약이 받아들여지기에 트라우마 상황에 놓인 사람은 마약 중독과 연결될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측두엽 주변후피질이라는 영역에서는 기시감과 미시감에 영향을 주는데 두개골 개두술을 시행하고 미세전류로 이곳을 자극하면 고주파로 자극할 때 미시감이 생기고 저주파로 자극할 때는 기시감이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해마와 측좌핵은 새로운 것을 보았을 때 자극되는 영역으로 이곳이 자극되어 자기 집에 들어왔을 때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며 결과적으로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해마는 장기기억에 작용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새로운 기억 형성에도 중요한데 새로운 것을 보았을 때 해마가 자극받는다. 알츠하이머 등으로 새로운 기억 형성에 문제가 생긴다는 건 해마 기능도 떨어진 것이다. 새로운 기억과 학습은 위협과 보상에 관련 지을 수 있다. 이는 뇌내 화학 물질의 작용이기도 하며 불안과 위협을 감지하는 편도체에서 가까운 해마의 작용이기도 한데 위기감을 느낀 상황과 즐거웠던 상황이 잘 기억되는 것은 현실에서도 실감하는 것이고 뇌의 작용으로도 당연한 것이다.

해마는 일화기억을 주변후피질은 친숙함을 담당한다고 하는데 익숙한 과일 등을 보거나 그에 대해서 들을 때 주변후피질이 자극되는 방식이다. 기억은 생각보다 여러 영역이 기능하는 것이다. 정향반응이라는 것은 익숙하거나 예상 가능한 것들 사이에서 돌발적인 변수로 인해 자극되는 것이다. 이런 돌발상황은 누구나 쉽게 기억한다. 또한 기억의 대상을 대하고 나서 기억하게 되고 회상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응고화’라고 하는데 회상하는 자체, 무언가를 떠올리며 기억하는 자체가 하나의 ‘재응고화’ 과정이라고 한다. 기억을 떠올리는 자체로 기억을 재구성하게 된다는 말이다. 기억한다는 건 석고상을 보는 것이나 홀로그래픽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무언가와 상호작용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자체로 공감각적인 전체 회상을 하듯 온전한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트라우마 상태에서의 회상이다. 트라우마 상태가 되면 모든 걸 처음 피해 상황과 동일한 상태로 다시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거의 대미에서 저자는 학습을 논하는데 실수기반학습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서파수면 SWS과 급속안구운동 REM 수면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실수기반학습이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는 것을 포함해 예측하고 예측이 붕괴하며 학습 작용을 높이는 걸 이야기하는데 배우지 않은 것을 짐작하며 미리 시험문제를 푸는 과정도 배우는 과정에서 기억을 돕는다고 한다. SWS와 REM 수면은 학습한 것을 기억으로 전환하는 데 극도로 중요한 것으로 깊은 수면이 학습에 가장 효과적이며 필수적인 요소라고 한다. 잠은 표적 기억 재활성화라는 기법에서도 기억과 인지능력, 창의성을 활성화하는 필수요소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집단 기억을 논하기도 하는데 집단 기억과 개인 기억의 갱신을 들어 문화가 개인의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그렇다고 집단 기억의 중요성만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협동 억제’를 언급하기도 하는데 집단적으로 기억을 떠올릴 때 개인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기억을 제대로 하기가 어려운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함께 기억을 되짚으면 온전히 기억을 회상하기가 더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협동 도움’이라는 것도 있는데 집단의 구성원들이 긴밀하게 협동하며 각자의 독특한 기억을 고려하면 각자의 합보다 더 나은 집단 기억이 만들어질 때가 많다고 한다. 집단에서의 회자되는 것이 ‘부정성 편향’이나 ‘사회적 전염’을 벗어나려면 보다 치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본서는 기억에 대한 상식을 재고하고 학습과 사회성을 기억이란 주제를 통해 논하기도 하며 기억이라는 주제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저작이다. 원제 [Why We Remember]가 한국에서 유행하는 [기억한다는 착각]으로 번역되어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은 제목이지만 원제 자체를 직역했다면 그 역시 뚜렷이 주목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제목은 평이하지만 기억에 관한 책으로 이만한 흥미와 몰입감을 가져다주는 책도 흔치 않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전반의 내용이 이후 학습과 사회성이라는 실용성과 거시적인 주제로 결론지어지는 것도 이 책이 주는 깊은 인상에 한몫하지 않나 싶다. 끝까지 읽고 나면 누구에게라도 권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기억한다는착각 #차란란가나스 #김영사 #기억 #뇌과학 #WhyWeRemember #책추천 #서평단 #도서협찬 @gimm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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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행복 -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배우는 행복에 관한 철학 수업
양현길 지음 / 유노책주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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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인생수업] 이후 두 번째로 읽어보는 고대 그리스 철학책이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이기도 한 그의 철학에서 플라톤의 가르침이 전승된 부분과 함께 그의 독자성이자 이후 유학의 가르침과 맞닿은 대목도 눈에 들어왔다.

 

행복을 그 자체로 추구할 진정한 의미라 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성과 진정한 인생의 목적으로 보는 목적성을 가진다고 보며, ‘주어진 이성을 최대한 활용해 인간답게 올바르게 사는 상태미덕이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추구하는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외적인 요소도 덕을 실천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보아 현실성이 결여된 행복 추구를 강요하는 가르침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그들이 갖는 견해에 의해 괴로워한다는 에픽테토스의 말을 들며 행복과 괴로움 사이를 가를 기준은 스스로의 선택에 달린 것으로 보게 하고 있기도 하다.

 

본능적 즐거움과 자극을 의존하는 쾌락적인 삶과 명예와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는 정치적인 삶은 이 의존성들이 지속적이고 안정된 행복을 추구하기 어렵게 만든다며 관조적인 삶을 추구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 이는 진리를 탐구하고 사물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는 삶을 말한다. 인간 고유의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활동 속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며 이러한 활동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관조적인 삶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그는 관조적인 삶이 인간을 가장 고귀한 상태로 이끈다고 보았다. 몰입은 이러한 상태로 이끄는 근간으로 관조적인 삶과 몰입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외부 요인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몰입은 관조적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며 관조적인 삶은 몰입에 의해 더 깊이 실현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중용과 절제이다. 중용은 때에 맞춰 적합한 판단을 하는 것을 말하며 절제는 즐기되 적절함을 아는 데 있다. 느슨하기만 한 것이 중용이 아니고 억압하고 배척하는 것이 절제가 아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며 갖추어야 할 것으로 또 다른 것은 실천적 지혜상대방의 입장과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을 이른다. ‘숙고할 때도 상대방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참된 이성과 올바른 욕구가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를 의지적 욕구라고 했다. 이는 이성이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욕구가 행동으로 옮겨지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반복을 통해 습관으로 자리 잡아야 하는 것으로 실천적 지혜란 단발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반복과 성찰을 통해서 내면에 자리 잡는 것이라 한다. 실천적 지혜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숙고하고, 판단하며, 선택하고, 결정하는 과정의 반복에서 얻어지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자기애라는 것은 지금의 나와 내가 꿈꾸는 최고의 나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것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인생은 내가 내린 선택들의 총합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사악한 인간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그들로 인하여 파괴되고 오명을 덮어쓰는 상황이라고 해도 자기가 이루고 싶은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 만들어가는 삶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필귀정이란 말이 사실이라면 진실이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고, 세상이 그런 게 없는 지옥이라 지옥이란 실명 값을 하는 게 지구라고 해도, 나는 나를 지키며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면 언제 어떻게 죽더라도 한과 한탄은 남더라도 나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의 일부 내용 중 내게 와닿는 대목만 남겼지만 전체적으로 두고두고 헤아려 볼 만한 내용들이 담긴 책이기도 했다. 자기성찰의 시간을 좋아하고 외향보다는 내향의 시간이 자주인 분들을 위해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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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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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가 사물의 실상이나 근본적 원리 즉 진리라고 믿는 것이 우리의 관념의 산물일 수 있음을 논하고 있다. 그것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칸트의 이율배반, 그리고 보르헤스의 문학을 통해 접근하고 들어서고 있다. 물론 주주제 외의 이야기도 여러 인물의 일화들과 그들의 사유를 주주제와 씨실과 날실로 엮으며 논한다. 하지만 책이 다소의 어려운 수준이라 주주제만을 소소히 이해한 데 대해서도 만족한다.

 

우리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뚜렷한 실상이라는 것을 실체 그 자체로써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첫 명제이고. 이것이 하나의 오해라는 것이 두 번째 명제 같았다. 불확정성의 원리가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각각 관찰할 수는 있지만 둘을 한 번에 총체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정의했듯이 칸트는 세계 인식에서의 이러한 모순을 이율배반이라고 정의했으며 보르헤스는 세계의 모순을 부정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을 모두 이해했다고 믿는 오류를 마법이나 환각으로 정의했다.

 

저자는 진리 이외에도 타자인 모든 것, 세계나 대상의 원리와 도덕 같은 관념들과 함께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 역시 닿을 수 없는 영역으로 결론짓고 있다. 우리는 모든 대상을 관념으로 내재화해 인식할 수 있을 뿐이지 실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면화하며 서로를 반영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세계에 대한 그리고 모든 타자에 대한 원하는 수준의 이해를 갖기 위해서는 그 타자가 되어야 할 텐데 타자가 되어 자신이라는 개체성을 버려버리고서는 대상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타자와의 차이가 타자를 인식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진리라는 우리의 기대 높은 수준에 맞춘 이해나 정의를 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되면서 이해의 영역을 벗어나고, 이해하려 타자로 남으면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부조리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이해가 가닿는 것은 사물의 표상 즉 대상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관념적 정의 이상일 수 없다는 말이다. 한정하고 제한한 대상의 상징, 한마디로 대상을 보고 깎아 만든 인형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 대상 자체를 가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진짜 그 대상에 대한 염원이 깊어져 모두 가지려 하면 그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럼 그 대상을 가지려던 나는 사라진다. 그렇다고 그 대상을 사랑하려 하여 외부 대상으로 남는다면 대상에 대해 온전히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 아닌가 싶다.

 

소금인형으로서 바다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과 바다로 뛰어든 소금인형의 차이인데, 우리는 바다로 뛰어들 수 없으면서 바다를 느끼고 싶어하는 소금인형이라는 말이다. 바다에서 수영을 하지도 않았고 바다를 만져본 적도 없는 소금인형이 바다를 만져본 것처럼 바다에서 수영을 한 것처럼 착각을 하며 열띤 토로를 하고 있는 것이 과학이던 다른 학문이건 모든 타대상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결론이 인다.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에서 데비여신은 자신의 사랑인 시바신에게 우주의 신비와 존재의 비밀에 대해 묻는다. 시바신은 그에 대해 설명하지만 결코 우주와 존재에 대한 정언적 학론을 펼치지 않는다. 그는 우주를 만끽하고 존재를 체험할 112가지의 명상 방편을 설명하는 것이다. 대상을 이해하라고 하지 않고 대상이 되고 대상을 체험하는 길을 알려준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이해와 대상 자체가 되는 것은 다를지 모른다. 본서의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라는 철학자의 말처럼 대상 자체가 되는 것도 대상을 이해하는 길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일체화되어본 이만이 대상이 되었던 순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조셉 캠벨이 원시신화를 설명하며 신이 되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신앙을 할 수 없다고 말한 까닭일 것이다.

 

본서는 진리의 길, 진리를 추구하고 이해하는 길이 난해하고 지난한 길이기도 하면서 가닿을 수 없는 영역에 대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책이다. 그럼에도 이 추구하는 바가 지성으로서의 이해가 아닌 체험의 길이어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기도 했다.

 

본서를 읽으며 다소 버거운 느낌이었으나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철학도든 과학도는 수행자든 일깨움이 있을 책이라는 감상이다. 한마디로 지적인 것을 추구하건 체험적인 것을 추구하건 누구에게나 깨우침을 줄 만한 책이라는 감상이다.

 

까치글방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롭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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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를 위한 책속 문장

 

이 결정론은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으로 무대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인과관계의 엄밀한 공식-현재를 알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에서 잘못된 것은 결론이 아니라 전제이다.” 후에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알려지게 된 이 원리는 현재 순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단지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필연적,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했다.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도보 경주에 관한 제논의 역설에 대해-)

보르헤스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러한 순차적인 분해, 무한히 잘게 쪼개 들어가는 방법으로는 이 문제를 풀지 못한다. 이 문제를 상상하는 것이 문제이다.” 보르헤스는 그러한 경주를 상상해서 문제를 만들어낸 사람이 우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보르헤스의 가정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마법사는 강력한 마법을 부려 헛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도록 그 자신마저 속이는 마법사였다 그는 우리가 꼭 그렇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중략... “모든 관념론자가 인정하는 것을 인정해보자. 세계가 본래 환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어떤 관념론자도 하지 못한 것을 해보자. 세계가 환각임을 확인할 수 있는 비실재성을 찾아보는 것이다. 확신하건대, 칸트의 이율배반에서 그 비실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서 ...중략... 하지만 칸트가 깨달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지각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마음속에서 그 사물에 시공간적으로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하게 된 그 변형이다. 세계를 그에 대한 우리의 개념과 동등하다고 상상할 때-특히 공간과 시간이 근본적으로 실재한다고 가정할 때-우리의 이성은 결함을 가지게 되고, 과학은 역설적으로 응답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마법사처럼, 세계를 관찰할 때 우리는 그에 대한 지도 혹은 마음의 그림을 만든다. 그리고 그 지도를 공간상 어디에나 존재하게 하고 시간상 영속적으로 존재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에 관해서 창조하는 그림에는 근본적인 결함, 즉 칸트가 이율배반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 완벽한 보석의 사소한 흠집처럼, 그것을 지우고자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결함은 지식 그 자체와 떼려야 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를 정확히 되살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당신이 기억하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되고, 현재가 항상 그렇듯이 당신의 눈앞에서 가물거리며 사라질 것이다. 정말 완벽하게 재생한다면 그것을 재생한다는 의식 자체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기억하는 자-즉 자아-를 구성하는 순간들의 연결이 지워질 테니 말이다. 완벽한 기억은 불가능하다. 완벽한 기억이 자아 그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먼저 살다 간 칸트처럼 보르헤스 역시 시간을 늦춰 단일한 프레임을 담는다는 생각, 관찰의 순간을 곱게 갈아 순수한 현재로 되살린다는 생각이 관찰 자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가까이에서 볼수록 현재는 우리의 이해로부터 더 멀리 달아난다는 것을 말이다.

 

결과적으로 세계에 대한 지각과 생각이 언어의 두 측면을 조율하는 것에 달린 한, “실재에 관한 복잡하고 정확한 묘사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푸네스가 지각할 수 있다고 하는 방식대로 과학자가 지각할 수 없는 이유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어떤 것을 관찰하는 행위 그 자체가 관찰자가 시공간상 두 순간의 차이-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를 일반화하고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미세한 겹침, 이 미묘한 거리두기가 없다면, 기준을 세우고 한동안 유지함으로써 어떤 미소한 변화를 표시하지 못한다면, 존재하게 될 것은 영원한 현재뿐이다.

 

실재의 궁극적 성질을 안다고 가정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이해 능력을 제한하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불확정성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알 수 있지만, 둘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비시간적, 비공간적 관점은 관찰이라는 개념 자체를 제거하고, 그에 따라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알아낼 수 있는 어떤 지식과도 양립하지 않는다.

 

역설은 단지 실재와 우리가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느끼는 실재의 충돌에 불과하다.”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얻을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지식은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시공간상의 한계에 의존한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을 할 때 연구하는 것은 세계 그 자체의 본성이 아니라 그 표상들이다. 여러 해가 지난 뒤 하이젠베르크가 사용한 표현에 따르면, 물리학에서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탐구 방법에 노출된 자연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거나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의 기준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우리가 절대 완벽하게 알 수 없는 자기충족적인 우주를 가정하고, 우리가 절대 온전히 구현할 수 없는 완벽한 도덕법칙을 가정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의도를 판단할 때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람의 생각에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눈으로 세계를 볼 수가 없다. 우리는 그들의 의도를 이미지로 구성하고, 그런 뒤 그 이미지는 우리가 만든 것임을 잊어버린다. 하지만 실험자가 사건을 측정할 때처럼 우리가 발견한 것은 우리에게 부속된 것, 어떤 관계의 산물, 자연의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 그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이라고 자신이 명명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재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상상할 때, 우리는 우주 바깥에서 우주를 바라본다고 상상하게 된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깥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단지 세계를 부분적이며 서로를 반영하는 내면의 관점들뿐이다. 세계는 바로 이 관점들의 상호반영에 불과하다.”

 

어떤 것을 측정한다는 것은 내가 그것과 미세하게나마 돌이킬 수 없이 달라야 한다는 것이며, 그래서 세계에 관해 무엇이라도 알게 될 조건 그 자체가 그것을 완벽하게 해낼 가능성을 폐기한다. 다른 한편으로, 완전한 존재, 즉 진실하고 완벽하게 그 흐름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차이를 전부 지워야 하고, 그래서 앎이 불가능해진다. 우리는 세계를 완벽하게 아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알고자 하는 세계와 동일해져야 한다. 또는 세계와 동일해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세계를 아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하이젠베르크의 가장 유명한 원리가 운동량과 위치에 대해서 말해주듯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어떤 결과를 볼 때 우리는 바깥에서, 즉 공간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시간상 영속적인 세계에서 원인을 구한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세계는 그렇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거기에는 실제로 엄정함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엄정함을 만든 체스 장인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천사들을 놓아주어야 한다. 실은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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