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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거꾸로 읽는 지구의 역사


왜 주제가 멸종인 걸까?


저자는 멸종이라는 주제로 한국적인 그리고 저자만의 스타일로 빅히스토리를 그리고 있다. 왜 멸종이란 주제여야 했을까 싶기도 했는데 [잔혹한 진화론]에서 저자 사라시나 이사오 님이 죽음이라는 주제로 진화론의 이야기를 펼치며 누구에게나 명백한 현실일 주제로 진화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듯 본서의 저자 이정모 님도 멸종이라는 강렬한 주제로 빅히스토리를 풀어나가는 것이 대중에게 빅히스토리의 의의의 하나를 선명히 전할 수 있다고 믿어서인 듯했다. 저자가 전하는 멸종의 의의는 한 종의 멸종이 다른 종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의 순환으로서 바라보며 지구 내 생명체의 역사 전체로 크고 넓게 시야를 확장하게 한다.


기발하고 재치 있는 해설


저자는 가상의 미래 2150년 인류 멸망 이후에서 시작해 2050년 화성에 테라포밍을 시도하는 있을 법한 가정으로 환경에 적응을 너머 변화시키며 개척하려는 과정에서부터 서술해 나간다. 이 과정에서부터 환경의 변화가 생물종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2024년 현재 부빙이 사라져가는 이야기로 생물종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해나가는 어려움을 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작은 인공지능 그리고 화성 탐사로봇 그리고 범고래와 펭귄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다. 점차 시대를 거슬러 오르며 네안데르탈인, 공룡을 거쳐 끝내는 바다와 달의 대화에 이른다. 이들이 각자가 그 시대의 주역으로 환경의 변화와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 도태되어 결국 멸종에 이르렀음을 서술하고 새로운 종들의 탄생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 탄생의 비밀까지 재치 있고 기발한 서술로 전하고 있다.

저자는 시대를 역순으로 거슬러 오르며 각 진화의 정점에서 하나의 생물종이 멸종해 가는 이야기로 빅히스토리를 쌓아나간 것이다.


다만 과하다고 여겨진 것은...


저자는 여러 박물관장을 거치고 과학기술 훈장 진보장을 받은 인물로서 대중에게 과학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전해온 인물이다. 빅히스토리를 그리며 환경변화가 생물종의 멸종을 불러온 과정과 환경에 적응하는 것의 어려움을 직시하신 분이다 보니 현재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부차적인 효과도 저술에서 노리신 것 같다. 다만 과하다고 여겨진 것은 전 세계 몇천 명에 이르는 과학자들은 지금도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고 그들의 저작을 읽어보면 현재의 기후위기가 근거가 조작되고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갖게 된다. 그런데도 그러한 과정에서 현재의 환경문제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관점만으로 저술의 배경을 삼은 것은 과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히스토리 속에서 환경이란 생물종에게 지대한 영향을 행사해왔기에 환경을 우려하는 시선이 그릇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빅히스토리를 국내 저술로 만나본다는 의의


본서의 소개에서 이정모 관장님을 한국의 빌 브라이슨이라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런 소개가 전혀 과찬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필력이라는 것을 읽는 내내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소설보다 재미있고 다큐보다 감동적이다!”라는 책 소개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 정도 필력은 타고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까지 하다. 물론 유익하지만 지루할 수도 있을 자연사를 어떻게 독자들에게 깊은 감상으로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저자의 고심도 깊게 느껴지는 책이다. 빅히스토리를 한국인 저자의 책으로 만나볼 기회 그리고 자연사를 지루하지 않게 기발하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들어볼 기회를 많은 분들께서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찬란한멸종 #이정모 #다산북스 #도서협찬 #빅히스토리 #자연사 #진화 #멸종



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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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는 마지막 대목에 금권경제라는 말이 결국 등장한다.

초부자들이 정계에 후원금과 로비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 제정에 힘을 행사하는 과정, 그리고 다보스포럼 같이 경제 계층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며 자신들 입맛대로의 원칙을 세계기준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앞선 장에서 이미 금융가들은 경제적 재난을 야기하거나 은행을 이용해 손쉽게 타인의 재산을 빼앗으면서도 어떠한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언급했었는데 이번 장에서는 마약상의 재산을 세탁해준 사례도 등장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최상위 계층은 정치인들을 후원하고 경제기구 등 권력기관에 일선의 인물들을 배치하면서 자신들 입맛대로의 법을 만드는 것은 누구나 상식선에서 알고 있는 사안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조세피난처와 자회사 등을 이용한 탈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부자들의 자선사업도 말 그대로 사업의 일환으로 재단을 만들어 기부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이윤을 추구하며 투자를 지속한다고 지적한다. 이미 빌 게이츠로 인해 다들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들 초극부층이 말하는 자선은 자선을 빙자한 투자가 명백하다. 자선과 기부를 담당하는 재단으로 빌 게이츠는 식량과 농업에 투자하고 백신 개발과 생산에 투자해 막대한 부를 창출해 냈다. 일반인이 가늠하는 자선사업과 초극부층이 생각하는 자선사업은 그 맥락이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전이라고 저자가 이름한 결론 직전의 장을 보면 저자는 기후위기를 야기한 것이 무분별의 생산시설 확충 등으로 부를 추출한 극부층들에서 문제를 찾으며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한 대안 모색을 사회적으로 해나가야 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환경문제로 인한 성장의 위기를 1960~1970년대 초 다보스포럼의 전신인 유럽의 회의에서 발표된 내용이 1972[성장의 한계]라는 책으로 출간되고 이후 지속 가능한 성장에 대한 문제가 화두가 된 것이 오래이다. 그 이후 지구온도의 약간의 하강이나 약간의 상승에도 지구냉각화다’, ‘지구온난화다그러면서 거듭 세계 위기라는 차원으로 몰아갔었다. 그러던 과정의 하나가 현재의 종말론적 환경주의에 이른 것이다. 초극부층은 이미 거대 자본을 투입해 탄소저감을 위한 연구개발을 거의 끝내놓은 상태고 탄소저감과 친환경 시스템과 기계들이 벌써 수백과 수천 가지로 개발을 이루었고 또 개발 완료를 앞두고 있다. 극부층은 창조적 파괴라는 원칙을 대대적으로 적용해 거대한 파괴는 거대한 규모의 부를 창출한다는 원칙 실현을 목전에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환경주의를 따라 간다는 건 결국 그들의 새로운 부의 창출을 위한 혁신에 앞장선다는 것과 다름 없는 것이다.

 

이 시대에 부자들의 정체를 알고 불공정과 불평등을 불균형을 인식한다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자들의 정체를 안다고 그들의 실체를 밝힌다고 사태가 전환될 시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싶다. 그들이 주도하는 세계의 변화는 겪지 않고는 별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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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부자들을 제자리에 두기]를 읽고

9장부터 11장까지는 저자의 부에 대한 정의를 알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저자는 공유부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자원과 자원을 이용한 부의 창출 그리고 제도를 포함한 부를 공유부라고 정의하고 있다. 불로소득이 가능한 세계에서는 부 자체가 소유권이자 권력이 되어 기여도 자체가 불공정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부라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고용을 불공정하게 만들어 인턴제도라던가 비정규직 같은 제도가 생겨나며 이를 악용하여 피고용인을 쓰고 버리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원 활용과 저자가 말하는 넓은 의미의 지대에 대한 공유로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타파가 가능하다.

 

[3부 부자는 어떻게 더 부유해지는가]를 읽고

저자는 브레턴우즈 체제 때는 이자율이라던가 환율이라던가가 안정적이며 고용과 노동환경에서도 안정성이 있었지만 이후 상당히 불공정하고 불균형적인 부라는 권력의 편향이 심해졌다고 한다.

 

이는 불로소득자들이 경제의 균형을 좌우할 수 있어서이고 잉여자본을 가진 그들이 경제적 재난들을 야기하고 그를 통해 부의 균형을 깨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구제금융의 수혜는 결코 수혜가 아닌데 민영화와 규제철폐 그리고 노동환경의 유연성 등을 요구하는 자체가 부의 균형을 상당히 심각하게 파괴하기 때문이다.

 

CEO들의 인센티브 등이 지급되는 양식을 보면 회사 망하고 다른 회사에 인수 합병되는 상황에서도 막대한 인센티브를 받는데 이는 애초에 회사의 발전이 주주들의 목적이 아니라 회사 발전과는 다른 양식의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망하게 하면서도 타 회사에 인수되며 타 회사의 주가 상승에 유익하면 이들은 그를 노리는 것이다. 회사의 사원들에게는 불안정하고 위협적인 상황이 되는데 부의 불균형은 이렇게 불공정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반강제하고 있다.

 

저자는 기업에서의 기여도에 따른 부의 분배를 제시하는 것 같기도 한 장들이 엿보이는데, 내가 생각해도 잉여자본을 가진 이들이 자본을 투자한다면, 능력을 갖춘 이들이 발상하고 기획하고 생산하고 마케팅을 하는데 기여도에 따라 부가 분배된다면 현재의 경제 제도하에서의 분배와는 다른 양상을 띠어야 하지 않나 싶기만 하다.

 

저자의 지적들로 그간 문제라고 생각해 오던 것들에 대해 구조적으로 알아갈 수 있는 것 같아 참 유익한 독서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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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부층에 대한 비판이 담긴 본서의 기본적인 개념들을 소개하는 1부에서는 벌이, 투자 등을 정의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벌이를 즉 돈을 번다는 개념을 가치나 능력을 제공함으로써 보상을 받는 것으로 본다. 극부층은 상속이나 증여를 통해 기반을 얻고 타인에게 노동을 청구할 수 있는 청구권인 돈을 획득하니 극부층에게 번다는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투자라는 개념도 사회 인프라나, 교육, 기술 개선 등과 같은 미래에 투자하는 것과 투기적 투자를 같은 맥락에서 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저자는 불로소득도 정당한 불로소득과 추출하는 불로소득으로 나누어 보는데 기초생활비와 같은 복지비용과 태생적(부자의 자녀로 태어남)으로 얻은 자산을 통해 이후 쉽게 버는 것을 나누어 보는 것이다.

 

저자는 추출하는 불로소득을 얻는 방법으로 지대, 이자, 생산에서 나오는 이윤으로 세분화한다. 지대를 소프트웨어 제작이나 지적재산권 같은 개념까지 확대하고 있기도 하다. 디즈니사는 지적재산권이 없는 [피노키오], [신데렐라], [백설공주], [미녀와 야수] 등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해당 애니메이션의 판권을 더욱더 연장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고, ‘우리의 모든 성취는 이전 것들을 훔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선언하기도 한 스티브 잡스는 애플사 소프트웨어들의 특허권을 보호하기 위해 소송을 거듭했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이자에 대해서는 갚을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이자를 많이 받는데 내가 보기에도 이건 니 담보 내놔라로 보였다. 대출 이자를 갚기가 부담스러울 사람에게 담보를 빼앗을 요량이 아니면 더 갚기 어려워지라고 이자를 높일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더 부유층일수록 이자를 많이 받아야 할 텐데 이자율은 임금이 낮은 사람일수록 높다는 게 불합리해 보인다. 그리고 나이지리아가 1985년까지 국제 금융기구들에 받은 대출이 50억 원 일 뿐이었는데도 160억 원을 갚고 나서도 280억 원의 빚이 남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복리 제도는 빈곤국가뿐만이 아니라 빈곤계층 전체의 골수를 빨아 먹는 정책이 아닌가 싶다. 이자를 받는 사람들을 옹호하는 사회상도 비판하는데 기회비용을 볼 때 당연히 이자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도 다른 데 투자했으면 벌었을 가능성만 있는 게 아니라 벌었을지 잃었을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싶기도 했다.

 

생산에서 나오는 이윤도 그저 비용 투자만 해서 아이디어와 제작, 마케팅, 노동력 모두를 동원 받으며 이익의 절대다수를 자본가가 자기자본(사실 법인에서의 자본금은 공금이 아닌가 싶다. 자본가의 주식도 증여와 상속이 되는 자체가 문제이지 않은가 싶다. )으로 삼을 수 있는 경우가 이전부터 납득이 가지 않았는데 본서에서는 자본가의 생산에 대한 투자도 불로소득과 다르지 않게 보았다.

 

여타의 투자 같은 경우도 극부층은 내부자 거래와 시장 조작할 능력이 된다는 데 문제가 크게 인식되었다. 이를 테면 팬데믹 채권같은 경우 팬데믹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가에 기존에 없던 것이 창조된 것이고, 초극부층들은 용케도 코로나19 백신 제작 제약회사에 투자를 했으며, 미국 CDC는 용케도 중국 우한 연구소에 코로나19 연구에 비용을 지원했으며 인간이 더 걸리기 쉽게 변이하는 기능획득 연구비까지 지원했다.(미국 청문회에서 이미 확인된 사항을 언급하는 것이다) 대중의 죽음까지도 어쩌면 기획되었을지 모르는 시대라는 말이다. 대량 살상으로 초극부층이 떼돈을 벌 수 있는 시대에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부층은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냐는 옹호론에도 저자는 맞불을 놓는데 대부분의 일자리는 (근로자인) 대중이 비용을 지불함으로써 창출된다는 게 저자의 말이다. 스타벅스, 맥도날드, 롯데시네마, 리바이스, 나이키 등등등 어느 매장이든 어느 서비스든 대중이 지불을 하니까 고용을 하고 생산과 판매를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부자가 일자리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개개인의 필요와 소비가 모여 일자리는 창출되어 온 것이다.

 

부자들이 대대적으로 대중의 골수를 뽑아 자기 이익만을 극대화하면서 이윤대비 약소한 기부만으로 명망을 얻는 것이 본서를 읽다 보면 기가 막힌 현실이라고 와닿게 된다. 부자에 대해 적대적인 관점을 주장하는 책인데 대부분이 깊이 와닿는다. 이런 시각도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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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미국에서 상위 1퍼센트에 들려면, 적어도 세전 소득 기준으로 최소한 393,941달러를 벌어야 했다. 그런데 상위 1퍼센트의 평균소득은 126만 달러에 달했다. 상위 1퍼센트 내에서도 소득 분배는 매우 불평등하다. 상위 0.1퍼센트에 들려면 적어도 155만 달러의 소득이 필요하고, 상위 0.01퍼센트에 들려면, 적어도 720만 달러가 필요하니 말이다. 게다가 지난 40년간 상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몫은 더 빠르게 증가했다. - 34~

 

부의 불균형을 이야기하며 자료를 제시하는 책들은 더러 있겠지만 본서의 자료도 눈에 들어오는 자료들이다. 위의 자료는 과거 미국의 통계를 인용한 자료겠고 영국의 자료를 인용한 경우를 보면 ‘1997980억 파운드였던 영국 최고 부자 1,000명이 소유한 자산이 20084,130억 파운드로, 20134,500억 파운드로, 20145,190억 파운드로 증가에 증가를 거듭했다.

 

사실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미국의 최상위층 부자들의 부가 급격히 상승했다는 것도 많은 분이 아실 텐데 이들은 팬데믹이 오기 전 팬데믹 채권을 만들어내 투자했고 용케도 mRNA 백신의 개발을 예측하고는 생산 제약사들에 미리 투자하고 막대한 비용을 벌어들였다.

 

저자는 본서에서 위기에 책임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소득대비 희생이 더 크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이 절대적으로 수긍이 가는 현실이 아닌가 싶다. 팬데믹의 예만이 아니라 경제난이라도 닥칠 때면 생계를 잃고 자살을 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는 사람들 가운데 경제적으로 상위계층의 사람들은 있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세계는 극부층을 위해 셋팅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의 말처럼 세계화와 자유주의라는 것도 일부의 독점적 사익 추구를 위해 규제를 철폐하고 민영화를 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성립해야 가능하다. 이 모두 근로자를 보호하고 갑의 이익과 을의 권리 사이의 균형을 지켜나가려는 모든 노력을 갑에게 유리하도록 뒤바꾸는 과정이지 않은가 말이다. 게다가 자유주의의 이념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기보다 실업의 책임은 개인의 능력에 묻고 복지의 규모를 축소하기를 강요하며 개인의 설 자리와 자구력을 잃게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초극부층에게 권력과 부가 이동하는 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경제학을 물자의 제공을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물자가 교환되고 교류되는 과정을 다룬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살기 위한 필수 자원들이 제공되는 과정에 도덕이 결여된다면 결국에는 대대적인 기아와 결핍이 일차적으로 일어나고 최후에는 대량살상이 기획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실업자들이 양산되고 사회가 그 부담을 안게 된다고 할 때 자본을 가진 극부층이 그 부담을 경감시키려 하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까닭에 저자가 말하는 도덕경제학이라는 개념이 절실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입부라는 1장만 읽고도 참 필요한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저작이다. 차분히 이어 읽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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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remy 2024-07-18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동네는 주식으로 부자 된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상위 1% 가 우리 동네에 밀집된 듯한 기분, 아니 사실일지도...)
Bull Market, 특히 Nasdaq 이 거의 역사상 최고점 기록갱신을 계속한
최근엔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돈이 복사기에서 찍힌 것처럼 불어나있다는
사람들의 Boasting 과 자랑이 심심치않게 들려오기때문에

2000년에 이 동네에 처음 이사와서 여지껏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어쩔 수 없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됩니다.
편안하고 안락하게 사는데 저만큼은 필요없지,
아무리 정신승리하며 마음을 다잡아도 부동산과 주식으로
진짜 돈벼락이 나만 비껴가며 일어나는 곳인 것 같아서

저는 경제학이나 주식 부동산 관련된 건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멀리하면서 그저 도 닦는 마음으로 문학소설만 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도덕적 경제학 같은 분야는 없습니다.



이하라 2024-07-18 16:40   좋아요 1 | URL
사회에 변화의 여지가 없다시피 할 때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재정적인 여유가 큰 이들과 접촉이 잦을 수 있을 수록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게 커지는 모양입니다.
저는 시골에 살다 보니 그런 심정을 크게 느낄 일이 적지만
도시에서 그것도 부유층 거주지라면 그럴 것 같습니다.

저도 경제적 여유를 찾기 위해 경제 관련 도서를 읽기보다는
사회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이유로 이런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도덕 경제학이 없다고 하셨는데 오히려 이런 시기이기 때문에
경제학에 도덕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네요.

이콘만 넘쳐나는 사회 같지만 비합리적인 대중이
경제에서 도덕을 찾을 순간이 빨리 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이 달린 일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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