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로렌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할 때, 정작 프레드는 자기 자신이 아닌 존재가 되고 그만큼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이다. "


"<로렌스 애니웨이>에는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의 벅참을 찬미하는 낭만적 열기와 그 일이 자기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냉철한 통찰이 다 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로렌스 무엇이건(Laurence Anyway)'이다. 이 이름은, 우리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쉬운일이 아니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어떤 길(any way)'을 택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말해준다. 로렌스는 프레드를 잃은 뒤에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더 분명히 말하자면, 로렌스 그녀는 행복해보인다." 



예전에 로렌스애니웨이를 볼때 나는 프레드에게 감정이입을 했다. 
깊은 밤 거실에 쪼그려 앉아 책을 읽으면서는 스스로를 로렌스의 상황에 깊이 대입하고 있었다.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수록 나를 사랑하는/던 이에게 끊임없이 상처주고 있음을 느낀다. 
나의 변화는 곧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관계의 변화이자 필연적으로 그의 변화를 요구한다.
나의 변화를 감당하기 벅차하는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안쓰러움과 섭섭함. 
가끔은 분노. 때로는 무력감.


자기 자신을 살지 못하게 하는 관계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사랑한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나의 변화를 수용하라는 것 또한 “사랑”다운 모양새는 아닐테다.


시간과 속도에 대한 존중, 만족할 만큼 충분히 많은 대화 정도로 노력해보자,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나도 그도 본인 스스로들을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침해한다면.. 
사랑해도 헤어지는 것이 맞다. (물론 자아 또한 관계안에서 만들어지는 운동태 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평생 나 하나 사랑하는 것도 빠듯하듯 
일생을 바쳐 한 사람을 온전하고 정확하게 사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한번 뿐인 삶인데,
기왕이면 가장 좋은 사랑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

서로로 인해 성장하고, 너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결국 우리의 변화를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말은 쉽지만 현실에서는 너무 어렵다. 영화 속의 그들 처럼 매일매일 싸운다. 부디 서로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직까지는 나를 살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중이다. 
각자의 삶을 살며 연대하기. 
그렇게 사랑을 더 심화시켜 나가기.
어쨌든. 애니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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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그런말을 했었다. 사람이 겪어버린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란 이미 와장창 깨진 유리조각 같은 것이라서 한쪽에 치워둬야 한다고. 그걸 완전히 없던 일로 할수는 없고, 이미 일어나 버린 것이기에 상처 이전의 삶으로 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이라고. 비질하고 걸레질하여 한쪽에 모아두고, 무심코 밟지 않도록 넘어다니거나 비껴 다녀야 한다고.

심리치료는 그 유리 파편들을 잘 쓸어 담아 보이는 곳에 치워두는 작업이며, 이후에 우리는 그걸 인식하고 헤집어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어쨌든 적어도. 상처가 일상을 초과하지 않도록. 그 것이 나의 평범한 하루를 해치지 않도록. 삶은 날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펼쳐져 있는 그 일과 사건들을 분초 단위로 겪으며 그래도 살아야 하는 것이라서.

2월 이후, 미투 이후.. 사실 어쩌면 페미니즘에 감응하기 시작한 이후 부터, 한쪽으로 치워둔 상처들을 자꾸 다시 헤집는 느낌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해 할 수 없었던 사건들, 사건들 속의 그들, 감당할 수 없었던 문제들, 문제들 속의 각 개인들.

그 땐 그것이 상처인 줄 몰랐으나,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상처받아 왔으며, 언제부턴가 시작된 무기력과 우울감, 되풀이 되는 꿈들도 시작을 좇아가니, 그 날들 이후였다.

그때 나는 정확하게 분노 했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분노할 대상과 타이밍을 잃어버리고, 내 잘못과 부족을 탓했다. 페미니즘의 언어를 알고서야 조금은 정확하게 분노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좋은 사람이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너무 극찬했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의 이면. 사람이 가진 다양한 얼굴. 


인간에 대한 희망을, 사회 진보에 대한 확신을,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혀가며 힘주어 말할 수 있었던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사람들이 너무 따뜻해서 였을 것이다. 따뜻했다. 좋아하는 민중가요 가사처럼, 좋은 이들과 함께 한다는 건,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전부. 내 전부 같은 좋은 이들이 좋았다. 우리를 괴롭히는 적들만 없으면 우리가 온전하게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공통의 적을 미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낭만적인, 한껏 사랑할 수 있는, 그럴 수 있었던 날들.

지금은 
그렇지 
않다.


*

가끔은 내 안에 이렇게까지 서늘한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파괴적인 냉소로 사람들을 공격할 때가 있다. 
난 그런 내가 싫다.

그런가 하면 또 그는 나다.
해결되어야 하는 어떤 지점이 있는 것인지, 
한 쪽으로 치워놓은 채로 조심조심 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
사실은 정신적으로 힘들다.

겨우 슬픔으로 바꿔 놓은 감정이 다시 날이 서게 끔 하는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싸움을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누군가들은 계속 싸운다. 나는 포기하려던 것을 다시 움켜잡고 그들과 함께하고 싶지만, 사실은 분노할 마음의 에너지가 없을 뿐더러.. 방향도 방법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만 든다.


*

어떤 방식으로든 정리를 좀 해야겠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대로는 곤란하다.

그나마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는 것은 지금의 상황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며 변화할 것이라는 것. 
그것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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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빗소리가 톡톡톡 좋았는 데, 오랫만에 오빠랑 본 영화도 너무 좋았고, 3월의 첫 월요일인 내일이 개강이라도 하는 듯이 설렜는 데, 차분했는 데, 저녁무렵에 지인의 부음 소식을 두 차례나 들었다. 가깝지 않았으며 이미 많이 멀어진 사람들이라 슬프다기 보다는 믿기지 않아 얼떨떨 하다. 

사실은 너무 이상하다.
언제부터 타인의 죽음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인지.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20대 시절의 나에게 부음은 분명 생각이 많아지는 이슈였던 것 같은 데.

삶에 관한 소식들. 시작에 관련된 축하와 죽음·장례식에 가야하는 빈도수가 거의 비슷해져가고 있는 것 같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당연해 하지 않기 위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경건하게 하는 기도” 정도가 아닐까. 물론, 나에겐 종교가 없다. 그러나 삼가 기도 드리는 것 말고 또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인용된 문장에서 처럼, 감사를 위한 기도는 아니다. 의례적이지 않은 애도를 위해 내가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무언가로서의, 기도.

고인의 명복을.
마음을 다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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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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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5)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가장 강력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여행과 독서를 금지하거나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사람이다."


앞으로 생각하고 뒤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않는 이야기이지만, 고집세고 궁금한 게 많은 나에게 어떤 종류의 생각과 독서를 말리는 나를 (자신의 방식으로)아끼는 지인이 있었다. 더 놀랍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갸웃하고 난색을 표하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더는 복잡해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옮겨적고, 받아적었다. 토론 중에 생각이 달라지면 죄책감이 들었다. 생각이 달라지지 않고 싶어서_ 그가 추천하는 책 말고는 책을 읽지 않았다. 표면 그대로 생각하고, 판단도 그 기준으로 했다.


책을 읽지 않는 시간동안 나의 언어는 메말라갔다.
언어의 부족. 서사의 부족. 삶의 부족. 그리고 성찰의 부족.

어느 날 문득, 버석버석하게 말라가는 ‘나’ 라는 인간이 보였다.
생기없는 스스로의 못남이 견딜 수 없어졌을 때, 사람들에게 ‘나 자신’에 대해서 할 말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몇 년치의 노트와 SNS를 뒤적이기 시작했고 - 지겹도록 똑같은 질문을 다양한 단어로 변주한 내 글들을 읽었다.

나는. 멈춰있었다.

_

멈춰있는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가장 먼저 하던 일을 멈추기로 했다. 쉬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어느 순간 간절했던 쉬고 싶음은 ㅡ 사실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마음의 브레이크였나보다.)

하던 일을 멈추니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더라.
그리고, 알았다.
더 이상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구나.

꿈에서 깬 것처럼 관계가 재구성되었다.
나를 아낀다면서 하는 ‘충고’가 내게 얼마나 큰 ‘독’이었는 지. 멈추고 나니 알았다. 입맛이 썻다. 많이 울었다.

_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그 사람. 그는 왜 그랬을까를 오랫동안 더듬어 물었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 세계를 만나면, 내가 달아날것 같았나? 아니면 그저 다른 시각으로 이야기하는 타인을 버텨낼 재간이 없는 사람이었던걸까.

막연한 생각 끝의 결론은 ˝그에게는 어떤 의도가 없었다˝는 것. 그냥 그는 자신의 삶의 방식 그대로 살았을 뿐이고, 많은 이들이 그렇 듯 ‘성장‘을 중요하 게 여기는 부류의 사람이었고, 자기 스타일의 조언을 아끼지 않은 거고.. 존경의 대상이 필요했던 취약한 내가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이려 한 게 뒤틀린 관계의 시작이었겠거니.

나의 성장을 그가 제멋대로 재단했다는 것에 오랜시간 분노했었다.
‘성장’이라는 전제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인 ‘나 자신‘에 대한 화 였을 테지만.. 그땐, 화낼 대상이 필요했다.

나는, 나란 인간은. 아- 얼마나 의존하고 싶은 나약한 고집쟁이였던 것일까.

_


더 다양하고 풍부하게 사람들을 만났어야했다. 다른 시각의 말들을 듣고, 진한 이야기를 나누고, 미묘한 관계의 긴장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고치고 변주하면서 살아야 했다.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었고, 삶도 스스로가 사는 것이었다.

개인의 평가나 충고에 그토록 깊게 침식당하면 안되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충고와 다가섬을 덕지덕지 온몸에 묻혀가면서, 그렇게 내 세계를 주조해 나갔어야 했다. 그런데, 난. 왜 그토록.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따르려 했던 걸까.
같아지려 애썼던 걸까.
다른 것을 견뎌내지 못했던 걸까.
그렇게 분리되고 싶지않아 발버둥 쳤던 걸까.
그러니까,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걸까.

"(p.257)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생각,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도 있고 대상의 변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의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된 관계, 30년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정희진처럼 읽기>의 마지막은 이별을 권했다. 꼭 그녀의 이별 권유가 계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사랑했던 많은 것들과 헤어지는 중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갈 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여전히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 일을 멈추고 나니까 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을 지경이다. 지금 상황이 스스로에게 납득 되지 않을 때는 울컥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치민다.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고 멈춰있는, 진공의 시간이 참기 힘들다. 그렇지만 노력한다. 언제까지나 불안을 질료로 삶을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혼자 있지 못해서, 너무 많은 마음을 허락하는 거.. 그렇게 계속 힘을 들여가며 내면을 응시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거.. 이제 그만 둬야지.
이 가만히 있는 시간이 주는 불안감은, 일중독으로 좇아 버려야 할 것이 아닌,
더 적극적으로 가만히 들여다 보아야 할 내 안의 _어떤_ 신호.

달라짐을 자책하지 말자. 분리가 두려워, 나를 해치지는 말자.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나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 -
이별하자.

다만, 살아있기 위해서.
스스로를 믿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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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25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너무 좋아서, 정희진처럼 읽기를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공쟝쟝 2017-09-25 16:27   좋아요 0 | URL
정희진 처럼 읽기 정말 좋죠..두고두고 읽어도 또 남을 책인 것 같아요.
 
무력한 조력자 - 남을 돕는 이타적인 활동의 이면을 들여다보다
볼프강 슈미트바우어 지음, 채기화 옮김 / 궁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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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처럼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에 길들여져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면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지금 와서 더듬거려 찾아봐도 잘 잡히지 않는다.


내 세계 속에서 ‘-을 위해 ~을 해.야.한.다’가 아닌 명제는 ‘가치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억지로 잘참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를 잘 속일수록, 이게 정말로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수록 ‘나는 가치 있게 살고’ 있는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거의 완벽하게 합리화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내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모래처럼 느껴지지만 않았다면. 


쉬고 있는 데도 쉬고 싶은 날이 많아졌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몽땅 기를 쓰고 집에 와서는 무기력함에 허덕였다. 읽고 싶은 책은 사라졌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일부러 만나지 않았다.(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겉잡을 수 없이 약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강한 모습이어야 했다)


해야 하는 일들에 열정이 생기지 않았고, 원래 어려운 일이었지 자조하거나 이게 뭐냐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기운이 없었다. 움켜쥐려고 할수록 더 새어나갔다. 필사적으로 손바닥에 남은 모래 몇 알 같은 에너지를 쥐어짜던 일상을 연명하던 날들이었다.



"나는 당신을 도와주지만 나 자신은 도움이 필요없어요!"


여름의 한 가운데서 ‘무력한 조력자’를 읽기 시작했다. 타임라인에 올라온 책소개를 봤고, 제목부터가 내 이야기임을 짐작했다. 


자신의 문제와 대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무의식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일에 전념하는 '조력자 증후군' 

지속되는 희생적 활동에 합당한 보상이 없어도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이상화된 조력자 상'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해칠 지경이 될 때 까지 다른 사람을 돕게된다.


‘-을 위해 ~을 해야한다’는 거대한 합리화의 세계 속에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는 소외되어 있었다는 것.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 채로, 수년을 허덕이고 있었다는 것. 당시 내 상태에 병명을 붙일 수 있다면, 조력자증후군이 확실했다.



[조력자 증후군의 정리]


* 조력자 증후군은 자신의 발달을 희생하여 사회적 조력을 경직된 생활방식으로 삼는 독특한 성격 특성의 결합이다. 조력자 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의 근본문제는 높고 경직된 자아이상을 지향하는 사회적 외형이다. 자신의 약점과 결핍이 부정되며, 관계에서는 상호성과 친밀함이 제외된다. 조력자의 자기애적 욕구는 크지만 그 전체 또는 부분이 무의식적이다. 따라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데는 미숙하다. 쌓인 욕망은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어린 시절 자기애적 만족이 거절당하면, 부모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 즉, 초자아와의 경직된 동일시가 아이에게는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그 아이는 성장하여 자신이 그토록 원하고 그리워 했던 것을 자기 자신에게는 주지 못하고 ‘이타적’으로 다른 사람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 경직된 초자아는 직업적 책임을 강조하는 교육과정을 통해 더욱 강화되어 직업활동을 시작할 때는 이미 조력자증후군이 예비가 된 상태가 된다. 조력자증후군의 예방과 치료의 목표는 초자아 동일시를 통해 이타적 행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아의 활동으로 만드는 것이다.


(p. 24-27)

조력자증후군이 있는 이들의 내면 상태는 화려하고 강한 외형 뒤에 방치된 굶주린 아이의 그림으로 표현 될 수 있다.

“나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X교수님의 집 앞에 있었다. 우리는 이 집에 종을 달아야 했다. 내 앞에 석회암으로 둘러쳐진 높은 담을 올려다보았다. 종을 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장비와 밧줄 등이 더 필요해서 가까운 헛간으로 갔다. 그 때 헛간 안에서 숨죽인 울음소리가 새어나았다. 문을 열자 아주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거의 탈진한 깡마른 아이가 오물과 거미줄을 뒤집어 쓴 채 잡동사니 사이에 끼어 있었다.” (30세 의사의 꿈) 

… 조력자로 하여금 자기 내면의 아이를 어둡고 더러운 지하실에 가두도록 한 초기의 결핍이, 이 아이의 욕구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보존시켰다. …미숙한 상태로 남아있는 자기애적 욕구에 대한 엄청난 허기는 그 홀로 자신의 외형의 도움으로 극복하고 있는 일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_


책을 펼치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이다. 타인의 꿈이지만 직관적으로 내 모습임을 눈치 챘다. 오랫동안 방치된 굶주려 있는 어린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의사의 꿈이 내 꿈처럼 눈에서 오락가락 거릴 때 마다, 나는 울면서 산책로를 뛰었다.


다른 이를 도와주는 것이 보람 있지만 때때로 너무 힘에 부쳤던 까닭은, 내가 허기져 있었기 때문이구나. 어렴풋이. 나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구나. 

방치된 어린 나에게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살찌워야겠다. 보살펴야겠다. 안아줘야겠다. 사랑해줘야겠다. 부모가 해주지 않은 것이라면, 이제 내가 스스로에게 해주면 된다. 어느 덧 나는 다 자란 어른이다. 되뇌이며.


_


(p.103)[나는 당신을 도와주지만 나 자신은 도움이 필요 없어요] – 자비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하는 압력을 받을 때에만 자신을 느꼈다. 손님이 오면 그들을 잘 대접했다. 그러나 자신이 손님이 될 경우 그녀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배려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친구들의 불안과 어려움은 자비네의 문제이기도 하여, 그들의 얘기를 참을 성 있게 들으며 관심을 기울여 조언을 하고 돕는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불안과 우울은 고독한 산책을 통해 해소하려고 한다. … 도와줄 준비, 요구 없음, 어린동생에 대한 배려는 자비네가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즉, 그녀는 자신의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서는 안되며, 맏이로서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던 것처럼 환자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나눠주어야만 했다. …조력자에게는 자기애가 공급되는 주요 원천이 욕구 충족이나 상호적 사회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충족을 가시적으로 단념함으로써 얻어진 감사이기 때문에, 그는 자주 클라이언트에게 심하게 의존한다. …자비네가 공격성을 표출하는 방식은 ‘제3자 변호’의 양상을 띤다. 예를 들어 그녀는 집단의 어느 구성원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이 감정을 다른 구성원을 변호하는 데 이용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린다.


_


맏이로서 사랑받기 위해, 철저히 자기의 욕구를 억압하는 생존방식.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면 동기가 생기지 않는 삶의 방식. 요구가 늘어날수록, 지위가 올라갈수록 나는 더욱더 책임을 다하고자 애썼고,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없는 나날들이 많아지면서 천천히 질식되고 있었던 것 이다.



(p.112) “이웃을 사랑하라.”뒤에오는 “네몸처럼”은 종종 간과된다. 


성경의 사랑하라, 에는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이 따라 왔구나. 몰랐다. 아니, 알았지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의 인생에서는 아니, 앞으로의 사랑에서는 ‘나’를 빠뜨리지 않으리라.



***



두 가지가 어려웠다. 책 자체의 번역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순간순간이 너무 괴로웠다는 것. 빼곡한 예시 속 곳곳에서 발견되는 나와 같은 이야기들. 역할 수록 꼭꼭씹어 삼켰다. 속상하고 속상해서 속상함에 내성이 생길 때 까지. 여름내내, 나는 몇 번 이고 반복해서 이 책을 읽었다.


서른 살, ‘무력한 조력자’를 읽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표현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고민을 앓던 지나간 3년의 일기처럼. 더 바쳐지지 않는 모습을 자책하면서 괴로워하기를 되풀이했을까.


여전히 스스로에게 온기를 주는 것은 서툴지만, 종종 잊혀지곤 하는 ‘나’에 대해 '내'가 독려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삶이 이전처럼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초자아에서 자아가 되라’는 책의 처방을 곱씹으면서- 나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돈을 벌고, 또 충분히 쉬기로 마음먹었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를 돕는 것이 좋다. 

나의 능력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기쁘고 즐겁다. 그러나 ‘나’를 도외시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아야겠다. 그건 정말로 그 누구를 돕는 일도 아니며, 돕지 않았을 때 보다 더 서로에게 상처주고 끝난 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무력감’은 나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일상의 권력 관계에서 거대한 한국사회의 구조에서 특히 세월호의 침몰을 보면서. 우리는 너무 무력했고, 그 무력함이 온몸에 젖어들어 숨이 막힐 정도였다. 모두가 그 구조적 무력감에서 헤어 나올 수는 없겠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범위안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식을 택해야한다.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활동을 통해 조금씩 무력감을 극복한 한명 한명이 늘어 날 때, 사회 총량의 무력함이 – 무력의 구조가 – 타파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타인을 해치지 않는, 타인을 위하기를 꺼리지 않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


그들이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나를 일으켜 남을 세우는 활동들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_

(p.253 조력자 증후군의 결론)

내가 보기에 자신의 조력자증후군에 대한 현실적 접근은, 우선 조력을 초기 아동기에 입은 자기애 적 손상의 비교적 바람직한 해결로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러면 방어로서의 조력과 자아에 조절된 활동으로서의 조력을 구분하게 된다. … 자아가 강조된 대답은 대략 다과 같을 것이다. “지금까지 제 인생의 기회를 너무 돕는 일에만 쏟아 부었어요. 그걸 넘어서서 이제 기회를 확장시켜볼 수 있어요. 제 문제를 발견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절 도와주세요.” 초자아에서 자아가 되어야 한다. - 프로이트의 언설을 이렇게 변형하는 것이 조력자 증후군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변화 속에서 조력은 폄하되거나 조롱당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창조적이고 만족감을 주고 자극과 성장의 기회가 풍부한 활동으로서 놓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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