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다.
“(60) 충분한 자원과 시간은, 나와의 관계가 가깝든 멀든 다른 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환경을 만든다.”
충분한 자원과 시간이 필요한 까닭은. 돌봄이 부정적 정서를 불러일으켜서라기보다는 돌보는 일, 보살피는 일이 감정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어떤 사람들은 안그런 거 같기도 함) 조금 더 들여다보면 모든 관계가 다 그렇지. 신경을 쓰고 주의를 집중하고 듣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또 적절한 말을 나누고… 등등. 모두는 돌보며 살아가고 있고 세상은 그것으로 가득 차 있다.
돌봄에 가장 의존하는 사람들(돈, 권력, 매력, 가진 게 너무 많아서 그걸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제공할 수 있으며, 돌봄에도 값을 지불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게 끊임없이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의존성을 돌봄 종사자들에게 투사한다. 이 역시 친밀한 관계에도 대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얼마나 있어야 충분할까. 나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데 필요한 자원은, 시간은. 나는 그걸 셈해본다. 셈할 수 없지만. 가늠해 본다. 하루 종일 쓴 것 들을 복구하려면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 나를 유지할 수 있다. 집 자체가 노동의 공간이라면, 거기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그걸 몰랐다. 나를 닳아가면서까지 타인에게 사용하고 있다는 걸. 제공자도 모르는 데 받는 사람은 알까.
돌봄을 무상이라 여기는 듯한 이들에게는 무상이 아니라는 것을 명시하거나, 제공하지 않는 게 좋다. 물론 돌보는 사람 나름의 기쁨과 보람이 있다. 그게 돌봄의 특성이다. 요리를 하면 옥시토신이 나온다. 닦으면 닦아지는 설거지는 통제감을 주고, 덕분에 만들어지는 청결한 공간은 기분을 좋게 한다. 너도 좋지 않았냐고? 좋았지. 그런데, 언제까지, 한 쪽만? 전혀 못 알아듣는 뇌구조에 특혜가 이미 고정 값인 사람에게는 뒤통수를 후려서라도 특권의식을 빼줘야 한다. 어떻게?
글쎄. 피식.
줬다 뺐는 게 어찌 보면 제일 나쁘지.
그걸 당하면 인간은 분개한다.
도처에 분개한 인간들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당연한 건’ 없다니까. 당연해지기 위한 겹겹의 권력이 공기처럼 흐르고 있을 뿐이며, 권력은 억압만 하는 게 아니라 생산하는 거거덩. 뭐를? 반전을. 그리고 반복을.ㅋㅋㅋ
당연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셈할 것. 그 셈을 감당하고라도 배팅했다면, 책임지면 되는 거고.
책임질 수 없으면 당연한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 그걸 받아들이면 된다.
오, 어떤 사람에게는 스스로의 무능력과 의존을 받아들이는 일이 일상이지만.
도취적 망상에 의지하여 자기 의존성을 의식조차 못해온 사람에게 그건 때로 감옥을 가야 할 만큼 엄중한 일.
권력자는 취약하다. 가장 많이 의존하고 있는 자다. 그는 자신이 자율적이라고 착각한다. 망상에는 뒤통수를 후려쳐 주는 게 답이다. 깨달을 때까지 바닥과의 찐한 키스를. (그런데 정작 찬 바닥에 왜 내가 앉아야하는지는?)
#돌봄선언 #상호의존의정치학 #ThecareManifesto #윤석열을탄핵하라
충분한 자원과 시간은, 나와의 관계가 가깝든 멀든 다른 사람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환경을 만든다. - P60
부유층은 그들의 의존성을 그들이 고용한 돌봄 종사자들에게 투영한다. 의존의 의미를 저임금 돌봄 노동에 내몰린 사람들의 경제적 종속으로 한정하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돌봄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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