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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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라 불리는 지하 3층짜리 건축물에 지진으로 10명이 갇힌다. 밖으로 나가려면 1층 통로를 막고 있는 바위를 밑으로 떨어뜨려야 한다. 바위를 떨어뜨리는 장치는 지하 2층에 있다. 하지만 누군가 장치를 사용하면 바위는 2층 통로를 가로막아 그를 고립시킨다. 게다가 지하 3층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다. 모두 익사하든가, 한 명의 '희생자'를 뽑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연속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한 명 또 한 명- 이 극한의 상황에서 피를 뿌리는 무시무시한 살인마는 도대체 누구인가?


클로즈드 서클은 닫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내부의 살인사건을 뜻하는 미스터리 장르 중 하나다. 유키 하루오의 '방주'는 그 클로즈드 서클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단언컨대 21세기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 중 이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은 아직 없다고 본다!


이 소설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지하 방주에 사람들이 갇히고, 밑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거기에 연쇄 살인까지 일어난다. 클로즈드 서클만이 가진 매력적인 설정들로 숨이 차오를 만큼 꽉 차 있다. 이런 설정만으로 이미 독자들의 피는 끓어오른다.


거기에 더해 이처럼 극적인 설정을 너무나도 탄탄하게 끌고 간다. 이를테면 '극한 상황의 극한 살인'이라는 설정은 사실 이시모치 아사미가 즐겨 쓰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재미있지만 언제나 동기 혹은 결말부를 납득하기 힘들게 처리하곤 한다.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연속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설정은 그만큼 극적인 재미를 뽑아낼 순 있으나 '반드시 그래야만 했나'라는 필연성까지 확보하며 균형있는 서사를 완성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방주'는 놀랍도록 완벽한 완성도를 보인다. 그냥 있어도 다 죽을 마당에 꼭 살인을 해야했나? 그런 상황에서 범인 찾기에 그렇게 열을 올려야만 했나? 이런 이해하기 힘든 설정을 탄탄한 전개와 논리적인 추리로 완벽하게 납득시킨다.


끝으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보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소름 끼치는 반전! 아이자와 사코의 '영매 탐정 조즈카', 치넨 미키토의 '유리탑의 살인'이 근래 접한 최고의 반전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이 두 작품의 반전을 능가하는 작품은 당분간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한 마디로 '방주'는 두 작품의 반전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처럼 강렬하고, 무시무시하고, 소설 전체의 완성도에 정점을 찍는, 화룡점정 같은 반전과 마주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완벽하게 기만당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말처럼 이 충격은 평생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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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 이야기 6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서현아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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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권은 대체 언제 나오나요? 떡밥만 잔뜩 뿌려 놓고 벌써 연중에 들어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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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살인사건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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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전 봄, 다섯 살 난 여자아이가 놀이터에서 놀겠다고 집을 나간 뒤 행방불명된다. 밤이 돼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고, 경찰과 동네 주민이 수색에 나선다. 하천 부지에서 아이의 시신이 나온다. 부검 결과 끈으로 목 졸린 흔적이 있었고, 아이가 입고 있던 치마 주머니에서 정성껏 종이접기 한 색종이를 발견한다. 


3주 후 두 번째 피해자가 나온다. 여섯 살짜리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하교하던 도중 행방불명됐고, 이튿날 집 근처 신사 정원에서 교살된 시신으로 발견된다. 2주 후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온다. 네 살짜리 여자아이였고, 낮에 집에서 놀다가 유괴되어 교살된다. 연달아 일어난 아동 유괴 살인사건. 피해자 근처엔 늘 정성스럽게 접은 색종이가 놓여 있고 언론은 이를 두고 '종이학' 살인사건이라 불렀다.


치넨 미키토의 '종이학 살인사건'은 병리학 전문의와 그녀의 동기이자 제자인 또 한 명의 의사- 두 여의사가 콤비가 되어 펼치는 장편 추리소설이다. 이전에 읽은 '유리탑의 살인'이 정교한 퍼즐식 본격 미스터리였다면 이번 작품은 로스 맥도날드, 할런 코벤의 느낌이 물씬 나는 사회파 스릴러였다. 


치넨 미키토의 장기 중 하나인 휘몰아치는 듯한 필력이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며 시작부터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했다. 거기에 병리학 전문의로 나오는 여의사 캐릭터가 독특한 매력을 뿜어내는데 이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시리즈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마치 미드 '본즈'의 여주인공처럼)


소설은 28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연쇄살인의 추적을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아버지의 시간을 거꾸로 되짚는다. 이 장르의 공식처럼 언제나 모든 비밀은 과거에 숨어있고, 그 과거의 탐색을 통해 아버지의 인생을 새롭게 알아간다. 이 장르의 공식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이것은 우리네 인생의 공식과도 닮았다. 


현재의 시간 위를 달릴 때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앞만 보고 내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지나고 나서 되돌아 보면 그때 몰랐던 많은 것을 새로이 깨닫는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머나먼 시간 저편에 아련히 숨어 있는 진실을 엿본다. 인간은 늘 과거와 때늦은 화해를 한다. 그렇게 현재를 위로받는다.


치넨 미키토의 작품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 작품도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한 서사와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다만 한 가지, 작가가 처음부터 반쯤은 의도적으로 패를 내보인 것처럼 여겨지는 '반전' 하나는 소설 중반부터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하지만 '종이학'에 얽힌 사건의 비밀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혼돈 속으로 몰아넣는 범인의 정체만큼은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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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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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부모를 둔 딸의 애환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군상극이다. 소설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버지와 어떤 식으로든 사연이 엮인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그때마다 딸은 아버지와의 애증 어린 추억 조각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에서 영화 '학생 부군 신위'가 떠올랐다. 이데올로기를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소설은 전체적으로 우스꽝스럽다. 사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상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요즘 세대도 가볍게 접할 수 있도록 작가가 의도적으로 판을 그렇게 짠 듯하다.


채플린이 이런 말을 했다. 코미디의 본질은 비극 더하기 시간이라고. 시간이 먼지처럼 두껍게 쌓이면 비극도 희화화되어 공기처럼 일상 속으로 스민다. 오래전 꼬마 때, 운동회 중간에 선보이는 멸공 퍼포먼스가 굉장히 무서웠다. 커다란 김일성 인형을 불태우고, 뿔난 괴물 가면을 쓴 괴뢰군 대역을 포박해서 끌고 다니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해서 섬뜩했다. 그런데 시간이 이만큼 지나 그때 장면을 회상해보니 뭔가 우스꽝스러운 촌극으로 여겨진다. 지금 똑같이 그런 퍼포먼스를 한다면 정말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머나먼 시간의 뒤안길에서 바라본 비극의 희극성을 다루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묵직한 비극이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 휘발되고 남은 자리에 한 줌 재로 흩뿌려진 아버지의 맨얼굴을 그린다. 그 맨얼굴은 우리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빨치산을 적이나 사상이 아닌 인간으로 그린 영화 '남부군'의 주제와도 닿아 있다. 꼭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문득문득 잊고 지낸다.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했던 가면 뒤에 감춰진 진실의 맨얼굴을! 이념과 편견에 덮여서 알지 못했던 인간의 진심을!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러한 가치를 순간순간 돌아보게 한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그렇게 새로운 소설은 아니다. 기시감이 많이 들고 캐릭터들도 스테레오 적이다. 때문에 엄청 재미있는 소설도 아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트렌디한 척하는 가볍고 실속없는 책들보단 훨씬 묵직하고 품격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깔끔한 문장과 유머러스한 전개, 그리고 마음 한쪽을 따뜻하게 감싸는 아름다운 표현들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교과서에 실리면 딱 어울릴 소설이다.


해방이란 뭘까? 그것은 그리움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리움'은 프리즘처럼 많은 감정의 파장을 품고 있다.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힌 듯,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그리움이 품고 있는 무수한 빛의 난반사다. 그 빛은 머나먼 추억 속에도 바로 지금 가까운 곳에도 있다. 다만 우리의 미성숙함이 눈을 가려 보지 못할 뿐이다. 지나고 난 후에 우리는 많은 것을 새로이 알게 된다. 그때 그 시간이 품고 있던 찬란했던 가치를.


p.s. 여담이지만- 최근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손석구, 김지원 주연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빌려온 듯한 제목 덕을 톡톡히 본 듯하다.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이렇듯, 제목짓는 센스도 타이밍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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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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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이 강렬한 첫 문장으로 아니 에르노의 소설 '부끄러움'은 이야기의 문을 연다. 12살 소녀가 겪은 그날의 체험이 그녀의 삶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버린다. 그리고 소녀는 자신을 둘러싼 가족이라는 세계와 자신을 둘러싼 사회라는 세계 사이에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한 번도 우리 가족,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부끄러운 존재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주관적인 이야기이면서도 철저히 객관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그녀는 그녀를 둘러싼 가정과 사회, 나아가 세계정세까지- 모든 것을 바깥으로부터 들여다본다. 이러한 글쓰기로 쓴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그러했다. 있는 그대로의 것들, 보고 들은 것들, 사실인 것들만 글로 쓰는 작법이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은 피해야 한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은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해서 다른 이들에게 전달될 때는 모호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에르노는 그렇게 열두 살 소녀가 보고 들은 것들, 그리고 조사한 자료에 관해서만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그때 당시 집안의 구조, 가족의 모습과 하루 일과, 그리고 거리의 풍경- 그즈음 세계 각지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들까지! 그렇게 그녀는 하나하나 그때의 사실들을 자신과 가까웠던 것부터 아주 먼 것들까지 끌어모아 나열한다. 그 비교를 통해 그녀는 '다름'을 읽는다. 열두 살 이전까지 소녀는 자기 가족과 다른 가족, 이 마을과 옆 마을, 나아가 전 세계가 막연히 같거나 비슷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비로소 비교를 통해 다름을 깨닫는다. 다름을 깨닫는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사물의 사회적 분배는 그 존재 자체보다 훨씬 의미 있는 것이다. 1952년에 남들은 욕실을 가졌지만 우리는 싱크대도 없었다는 것은 오늘날 누군가는 아녜스 베가 디자인한 옷을 입고 우리는 프로기에서 옷을 사 입는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차이다.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작가는 소설 내내 '가난'이라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난이 아니라 '사회적 분배'에 있다. 그것은 삶에 임하는 제각각 다른 입장을 의미한다. 일정 이상의 기준을 갖추지 못한 채 그 집단에 속해있을 때 그어지는 선. 그 선을 다른 이들이 알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만은 틀림없이 알고 있고, 부끄러움은 바로 거기에서 생겨난다. 한 개인의 삶이, 그리고 사회의 문명이 구축되어 이만큼 흘러오면서 생겨난 거미줄 같은 선들! 개인의 부끄러움은 곧 사회의 불평등과 닿아 있고, 세계 곳곳에 있는 갈등과 모순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문제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하지만 소설은 내내 철저히 한 개인의 이야기에만 머물러 있다. 작가는 구태여 거대 담론을 주제 삼지 않는다. 그저 한 소녀의 삶을 파고든 부끄러움을 객관적인 비교로만 나열한다. 그래서 글을 읽을수록 더욱 움츠러든다. 나에게도 책 속 소녀가 겪은 '그날'은 존재한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나는 더이상 바느질로 덕지덕지 기운 옷을 입고 나가기 꺼려졌다. 한 인간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부끄러움은 곧 그를 이루고 있는 진실이며 아이덴티티다. 작가는 마치 내 안에 꼭꼭 숨겨둔 진실과 아이덴티티를 가감없이 들여다보며 '너도 결국은 다르지 않잖아!'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글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자 그 부끄러움에 공감하는 모든 독자의 이야기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쓰기가 없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라고 말한 짤막한 작가 서문이 결국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소멸시켜 글 재료로 삼는다.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바로 그녀라는 '존재'를 지탱시켜주는 에너지다.


오래전 문창과 수업 때 교수님이 한 얘기가 문득 떠오른다. 자신의 숨기고 싶은 부분, 추하고 악한 부분까지 모두 글로 드러낼 각오가 없다면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아니 에르노가 부끄러움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쓴 소설 '부끄러움'이야 말로 그때 교수가 했던 말의 진의와 닿아 있다. 글쓰기는 그렇게 자신의 부끄러움까지 숨김없이 바라보는 것이고, 그 치열함이 글쓰기를 개척한다. 아니 에르노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바로 이 치열한 글쓰기에 대한 존경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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