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지 오웰의 문체를 좋아한다. 그는 저널리스트답게 객관적 사실을 서술하는데 특히 엄격하다. 그런데 그 엄격함이 있기 전에 그의 고뇌라고 할까, 판단을 내리고 엄정한 태도를 취하기 까지의 망설임 같은 게 느껴진다. 그렇게 느끼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쉽게 말하긴 어렵겠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순정한 사회주의자였기에, 사회주의를 내세운 세력의 위선에 더욱 엄정하게 맞서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에 '스페인 내전(엔터니 비버, 교양인)'을 읽을 때는 내전 상황을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내전 상황의 얼개를 훨씬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6월에는 좋은 문장의 책들을 꽤 읽은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느낌의 공동체'는 발군이다. 여기저기에서 이 젊은 평론가에 대한 좋은 풍문 한두 마디는 이미 들었지만, 이제 문학평론책과는 서서히 멀어진 생활인이 된 탓에 첫 평론집이었던 '몰락의 에티카'는 놓쳤다.(최근에 이 책을 샀다.) 많은 독자들이 지적했지만, 이 짧은 산문집은 자기 문장을 가진 훌륭한 문학작품이다. 이 평론가는 여느 소설가보다도 더 분명한 자기 색깔의 문체로 자기 의견을 써나간다. 이 평론가는 문학이 다른 문학과의 본질적인 차이는 바로 '언어' 예술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평론가의 후한 평가는 문학의 언어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평론가의 발자취를 따라 다니며 그의 평가 대로 책을 읽어보고 싶다. 

   바다의 기별은 소설가 김 훈의 에세이집. 언제나 그렇듯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한 문장을 읽을 땐 내 몸도 긴장하게 된다. 글을 읽으면서 그가 늘 말하는 몸으로 글을 밀로 나간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를 계속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그가 쓰는 글은 온몸에 힘을 주고 휘두르는 칼과 같다. 글을 쓰는 그와 글을 읽는 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의 글은 전혀 위협을 주지 못하고 단지 아름다운 칼춤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그와 글을 읽는 내가 가까이 붙어 있으면  크게 다칠 것을 걱정해야 한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어떤가?

 

 

 

 

 

 

 

  

   우리는 '삼성공화국'에 살고 있다.조정래의 허수아비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핍진한 소설이니만큼, 정말 소설 밖 현실도 아마 그럴 것이다. 책을 덥고는 분노를 넘어 서글픈 마음이 가득한데, 문제는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나같은 백면서생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삼성을 생각한다'(김용철)를 읽었을 때만큼 생생한 현실 묘사. 역시, 소설은 힘이 세다.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라는 소설은 대학생 K로부터 선물로 받은 책이다.(나는 그 대신 밑에 있는 곰스크...를 선물로 줬다.) 소설은 3년 동안 모텔을 여행하면서 매일 밤마다 편지를 보내는 '지훈'의 이야기이다. 지훈이 이렇게 매일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기 위해서다. 그런데 지훈이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지만, 아무도 지훈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는다. 지훈은 매일 옆집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에게 도착한 편지가 있는지를 확인한다. 친구의 대답은 지난 3년 동안 한결 같다 - 아니! 나는 소설을 덮고 편지를 쓸까,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대체 누구에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서 슬펐다.

   강남몽은 6월 초순에 읽었다. 생각해 보니 황석영 소설은 사서 읽은 게 없다. 이 책도 지인으로부터 오래 전에 선물 받은 책인데, 꽤 묵혔다가 이번에 읽게 됐다. 그 사이에 표절 논란이 지나가기도 했다. 정작 소설을 다 읽은 느낌은, 별로 재미가 없네,라는 것이다. 사건이 너무 단선적으로 전개된다는 점, 굳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야 했을까, 싶은 부분이 무척 많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결론이 뻔한 소설은, 승패를 알고 보는 야구중계 만큼이나 긴장감이 없으니까... 

 

 

 

 

 

 

 

 

 

   동물동장은 이번에 조지 오웰의 마지막 책으로 읽었다. 사실, 오웰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책이지만  어쩐지 손길이 안 닿다가 이번에 조지 오웰에 푹 빠져 있는 동안 내처 읽었다.  

   이 책을 쓸 당시의 오웰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스페인 전쟁에 참전했을 때 스탈린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세력의 추악한(?) 이면을 확인했던 오웰이었기에 현실 사회주의의 허상에 대해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지적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결국 오웰이 꿈꾸던 사회주의는 인민을 위한  이상으로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대신 현실의 사회주의는 인민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유사 파시즘적인 지배체제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상적인 사회주의자였던 오웰에게는 이런 현실이 당혹스럽게 받아들어거나 참담한 심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상이 현실에서 추악한 모습을 드러낼 때 절망하거나 투항하거나 침잠하기 마련인데, 오웰은 꿋꿋하게 이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 그게 바로 동물농장의 가치이다. 현실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풍자적 비판을 통해 사회주의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을 다시 한번 확인시키고 있다.

   오래 전에 산티아고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앞으로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점찍어 둔 곳! 누구나 그렇듯 현실-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 놓은-이 녹녹하지는 않아서 늘 마음을 품고 있는 곳이었는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몸살처럼 산티아고 가는 길에 대한 열망이 가득 차서 무턱 대고 이 책을 사서 읽었다.(그러나 이미 이 책은 우리집 책장에 얌전히 꽂혀 있던 책이었다.) 간절히 바라면 언젠가는 이루어 진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믿어 볼 밖에... 진복이랑 저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올거야, 오겠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는 무척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책들은 많지만 '열정'이라는 특정한 프리즘을 통해 이 땅의 청년들의 삶을 통시적, 공시적 관점으로 정리해 놓고 있다는 점이 우선 새롭다. 제목처럼, 우리 사회-특히 자본-가 청년들에게 왜 열정을 강요하는지, 열정을 강요받고 있는 청년들의 현실은 어떤지, 어떤 방식으로 열정을 강요하는지, 언제부터 이 열정을 강요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이 열정의 끝에는 과연 어뗜 미래가 펼쳐지는지를 각 장별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20대가 읽으면 생각할 게 많은 책이다. 그리고, "니가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는 말은 쉽게 하지 말아야겠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따로두 권을 샀다. 내가 읽으려던 곰스크는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를 선물로 받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갔다. 마침 이 책이 그 때 그 순간 내 가방에 들어 있었으므로. 또 마침 미래를 고민하는 대학교 3학년 학생에게 어울릴만한 책이기도 했으므로. 한동안 곰스크에 대해 잊고 있다가 책을 읽은 녀석이 문자로 연락을 해 왔으므로. 그날 바로 주문을 넣고 책을 받았다.  

   단편인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단순한 이야기다. 또 뭔가 암시적이다. 단순하면서도 분명하지 않은 이야기. 그러니까 곰스크는 이 책을 읽은 여러 사람이 자기 상황에 맞는 여러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책이다. 우리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곰스크가 있고, 모두 곰스크로 달려가고 있거나, 그 기차에서 잠시 내린 사람들이기도 하니까.  

   교실 밖으로 걸어나온 시는 독서평설이라는 고등학생용 잡지에 연재했던 시 안내서를 단행본으로 묶은 책이다. 글쓴이는 시인 김선우, 손택수. 고등학생들이 친절하고 정답게 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자분자분 설명을 잘 해 놓은 책이다. 눈높이가 고등학생에 맞춰져 있어서 읽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다. 좋은 시들이 주제나 소재별로 분류하여 해설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친절함이 돋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다 못 읽고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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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가지고 있는 토지는 전 16권으로 된 솔출판사 판본이다. 아마 1994년 토지 완간 기념으로 나온 판본일텐데, 나는 1995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10개월에 걸쳐서 느릿느릿 한 권씩 구해서 읽었다. 나에게 토지는 남들보다는 한두 살 늦은 나이에 시작한 군대생활을 견디게 해 주는 힘이었다. 지금도 '토지'를 꺼내 읽던, 내무반의 여러 밤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토지를 읽으며 군대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1,2,3권은 지금 어딘가로 사라져 버려서 집에 있는 것은 4권부터이다. 예전에 알라딘 중고장터가 없었을 때, 여러 중고서점에서 1,2,3권을 구하려고 애는 썼으나 전질을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렇게 세 권을 파는 경우가 없어서 지금껏 못 사고 있다가, 이번에 우연히 알라딘 중고장터를 돌아다니다가-생전 중고장터는 기웃거리지도 않던 내가 어쩌다가 들어가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세 권을 샀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마 내일쯤 도착할 듯.]

 

 

 

 

 

 

 

 

   다른 의미로 이제야 비로소 삶의 어떤 매듭이 풀린 듯하다. 비록 다른 잡다한 일들로 번민해야 할 밤이지만, 오늘은 만사를 제쳐두고 자축해야 할 밤이다. 아름다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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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5월에는 여덟 권의 책을 기웃거렸다. 기웃거렸다,는 건성건성, 대충대충, 얼렁뚱땅, 책장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뜻이다. 내 태도가 문제였지, 다시 생각해 보니 다들 훌륭한 책이고, 내 생각을 다듬는데,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아쉽다. 다시, 읽어 보게 될까?

  

 

 

 

 

 

 

   나는 왜 쓰는가,는 지난 4월에 몽땅 샀던 조지 오웰의 책 중에 한 권이다. 지난 4월에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을 읽었는데, 비교하면 이 책이 훨씬 더 좋다. 사회주의자였던 오웰이 파시즘과 스탈린식의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도 흥미있고, 스페인 전쟁의 뒷이야기도 어디서 읽었던 내용이었지만 재미있었다. 치열한 문제의식에다가 간결하고 엄정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글쓰기라 읽기에도 불편하지 않다. 5월에 읽은 최고의 책이다.

   생각의 좌표,는 지난 동아리 모임 선정책이었다. 애들에게 책을 건네주고 나 역시도 읽은지 너무 오래된 책이라, 이번에 다시 읽었다.(나로서는 무척 드문 일이다.) 몇몇 대목에서는 다시 내 신경을 자극했으나 두 번째라 그런지 아무래도 흥미가 덜했다. 어쩌면 홍세화 선생님의 글은 여기저기에서 무척 편하게 많이 읽었던 탓일까? 이제는 좀 새로운 생각이나 관점이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아직도 홍세화 선생님의 글이 필요한 사람이 아주 많겠지만.

   나는 여기가 좋다,는 한창훈의 소설집이다. 사실, 지난 금요일(5월 27일)에 한창훈 소설가가 우리 학교에 왔었다. 우리 학교에서 꾸준히 주최하고 있는 '작가초청 강연'에 강사로 왔다. 이번에 강연회에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을 이 소설가의 책을 읽고 독후활동(독후감상문, 독서신문, 감상화, 독서UCC 등)을 한 학생들로 제한했다. 나도 작가의 성장소설, 열여섯의 섬, 하나만 달랑 읽었던 터라 이번에 이 소설집을 골라 읽었다.

   최근의 우리나라 소설의 흐름과는 멀찍이 떨어진 듯한 분위기(?)-무엇보다도 서사 중심-의 소설이라 우선 읽는 내내 마음이 편하고, 무엇보다도 악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갈등 구조도 느긋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당연히, <여기>는 이 고집스런 소설가의 영감의 원천이자, 지금도 여전한 삶의 근거지인 바다,이다. 바다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가늠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바다가 지긋지긋해서 떠나는 늙은 아내를 보내고도 지켜야 하는 전직 선장의 삶 자체가 아닐까 하는 어림짐작을 해 본다.  

 

 

 

 

 

 

 

   아무도 남을 볼보지 마라, 는 지금 읽고 있는 책이라, 엄밀히 말하면 5월에 읽은 책은 아니다. 그래도 5월부터 읽기 시작했으니 기록은 해 두어야겠다. 엄기호 씨의 책은 이것이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알고 보니 10년 전에 읽었던 포르노, All boys do it! 이라는 책도 엄기호 씨의 책이더라.) 이런 책을 읽으면 항상 드는 의문점은, 이렇게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명확한데, 왜 세상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엄기호 씨 특유의 현장 리포트 같은 글이라 잘 읽힌다. 이 정도면 고등학생들이 읽어도 괜찮은 책이지 않을까 싶다.

   홍합,은 한창훈의 출제작이다. 이번에 작가한테 직접 들은 얘기인데, 실제로 홍합 공장에서 7년 동안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 홍합 공장의 사정이야 뻔한 일일테고, 사실, 이건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홍합, 을 읽는 내내, 그 힘든 농삿일, 신발공장일, 우유배달, 블럭공장, 합판공장 등 한 평생 일구덩이 속에서만 살았던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홍합 공장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의 삶을 읽으면서 '우리 엄마도 공장에서 저렇게 일하고 지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아픈 소설이었다.

 

 

 

 

 

 

 

   플라톤의 국가, 정의를 꿈꾸다,는 김해 인문학 대회에서 선정한 주제 도서라는 점에서 골라 읽었다. 그런데 주니어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 책인데도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닌듯. 항상 느끼는 거지만 무슨 대회나 단체의 주제도서는 중고등학생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 다시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얘기가 이어지는데 반쯤 읽다가 더 읽히지 않아서 일단 접었다. 읽을 기회가 다시 오겠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6, 은 예약 주문까지 해서 산 책이다. 무엇보다도 표지 사진이 무척 맘에 들었다. 황매산(모산재)의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여러 번 저곳에 다녀왔다. 이미 20년도 전에 한창 답사기 붐이 일었을 때 유홍준 교수가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특강을 했었는데, 저 석등과 돌계단을 두고 경상도 문화의 자존심이자 정수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후에 꾸준히 영암사지를 다녀왔다. 정말 20년 전에는 차를 타고 가도 쉽지 않은 곳이었고 폐사지가 주는 쓸쓸함도 있었는데, 지금은 책에서 소개한 그대로이다. 아무튼 앞에 나오는 서울 편을 제외하고 뒷부분-합천, 거창, 도동서원, 선암사, 부여....-은 다 읽었다. 마음이 심드렁해서 그런가, 지금은 절실한 그 무엇이 나에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은 내가 읽은 세 번째 '공산당 선언'이다. 읽으면 읽을 수록 머리로는 이해가 된다. 더구나 이번 책은 이 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나 이 선언 이후의 전개 과정도 소개하고 있어서 공산당 선언에만 집중했던 다른 책들 보다는 읽기가 더 편했다.  그 당시의 사회 상황이라면 '공산당 선언'은 너무도 당연했다. 과연 지금도 이런 선언이 유효한 것인지, 사회주의자가 아닌 나로서는 회의적이지만, 마르크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공감이 컸던 주장이었으리라. 이는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이 실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에게는 재미있는(?)-좀 가벼운 표현인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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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엔 네 권을 책을 읽었다.  

   홍세화 선생님이 알라딘에 소개해 주신 자발적 복종. 예전에 샀는데 읽기를 미뤘다가 이번에 읽었다. 독재 권력이나 권위주의 정권과 그 지배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는 인민의 권리의 균형은 인민의 자발적(?)인 복종의 결과라는 게 내용의 핵심. 또한 지배체제는 인민의 자발적 복종을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상징조작을 시도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도박이나 오락 같은 것에 물들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렵다, 안 된다는 생각의 범위가 곧 우리가 살고 있는 메트릭스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의 지배체제는 우리의 생각의 범위를 끊임 없이 좁히려고 시도하는데, 우리는 '연대'하지 못하고, '자발적 복종'에 이르고 말 것이다. 더 엉망이었던 세상은 많았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한 시대는 전무하지 않았나 싶다. 곱씹을수록 우울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있는 와중에 서태지와 이지아 사건(?)이 온 인터넷에 도배를 했다. 그 며칠 전에는 신정아 씨의 책이 화제가 되어 새삼 여러 말들이 떠돌았다. 며칠을 굶은 사냥개가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달려드는 하이에나들. 국민의 알 권리(?)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글쓰는 자신의 관음증을 충족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 이들만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에 홀려 절벽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는 집단 최면에 걸린 것처럼 쥐떼 같은 사람들에게도 문제는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달려간다면 소설처럼 살인사건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조지 오웰의 책을 전체로 읽어 보려고 맘 먹고 산 책 그 중에서 가장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먼저 골라 읽었다. 1930년대 영국 탄광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1부와 파시즘이 창궐하고 있는 유럽을 개탄하며 '사회주의'의 분발을 촉구하는 2부로 구성되어 있는 에세이이다. 1930년대의 영국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오웰의 의도-비참한 생활상을 보여주려는-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옳은 방향임에도 불구하고-적어도 오웰은 그렇게 믿었다- 왜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가, 라는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지식인과 노동자를 사회주의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사회주의자'의 행태를 비판하고, 파시즘의 확장을 경계하는 글도 오늘의 우리 사회의 현실을 되짚어 보게 한다. 우리는, 오웰이 걱정하고 있는 사회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나?

   너의 의무를 묻는다는 김해시에서 주관하는 인문학 대회에 주제도서로 선정되어 있었기에 고른 책이다. 처음에는 동아리 애들이랑 참가해 볼까, 생각했다가 우물쭈물하다 보니 기회를 놓쳤다. 그렇지만 올해 주제도서로 선정된 책들은 다 읽어 볼 생각이다. 가능하면 동아리 아이들과 읽고 토론하면 좋겠다. 책은 무엇이 사회구성원의 의무이며, 인간을 목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의무의 의미이고, 법과 의무, 공동체의 의미 등을 거쳐서 우리가 왜 의무를 지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다움의 도리'로서의 의무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청소년들이 읽기엔 약간 어려울 수도 있지만, 제대로 읽으면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5월엔 더 많은 책을 읽기보다는 나에게 의미 있는 책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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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23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마 전 자연휴양림으로 여행을 갔었다. 지난 겨울에 예약했다가 때마침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이 못 갔던 휴양림. 어렵게 거의 두 달 전에 예약을 해서 이번에 다녀왔다. 중간에 성삼재에 들러 노고단으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몇 걸음 걷다가 그만 돌아섰다. 노고단까지 2.5km - 왕복하면 5km 정도? 복이 데리고 갔다 오기는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싶어서 나섰으나, 복병은 거리가 아니라 바람. 거긴 아직 겨울 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아쉬웠지만 깨끗하게 돌아서서 휴양림으로 갔다.  

   널찍한 방에 짐을 풀고 뒹굴다가 이 좋은 숲에 왔는데, 그냥 있으랴 싶어서 다시 산책하러 나섰다. 그런데 산책로가 여느 휴양림과는 달리 등산로 같이 험했다. 제법 가파른 길에 한바퀴 둘러 내려오고 나니 거리도 꽤 멀었다. 1시간 20분 정도 걸었으니 그냥 가벼운 산책은 아니었다. 거의 노고단에 올라간 거리쯤은 되었다.

   다음날 아침, 이곳 휴양림의 특별 프로그램인 한지체험에 참가하기 위해 일찍 준비해서 나갔다. '체험 프로그램'이라는 게 왠지 어설프고 조잡하다는 선입관이 있어 어떤 곳에서도 참여해 본 적이 없었지만 이곳 휴양림의 한지체험은 이상하게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어제부터 들었다.(체험하려면 미리 예약해야 된다고 해서 어제 미리 전화도 했다.) 제 시간인 9시 30분에 나온 팀은 나의 불길한(?) 예상대로 달랑 두 팀! 프로그램 진행팀은 한 10분 정도 다른 손님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더 나올 기미가 없자 체험 장소로 두 가족을 데리고 이동했다.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숲의 생태며, 새 소리까지... 일행들에게 설명을 하면서 내려갔다. 그러다가 진행팀 중 한 분이 애기 이름이 물어보고 교회에서는 '진복 팔단'이라는 말을 쓰던데 혹시 진복이라는 이름을 그래서 지은 거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속으로, '어? 진복 팔단을 아시는군. 흠... 교회(성당)에 열심히 다니시는 분이군' 이런 생각을 했다.  

   체험장에 도착하니 예상대로 무척 썰렁했다. 사람이라도 좀 많았으면 덜했겠지만, 직원 다섯 명이나 붙어서 진행을 도와주고 있는데, 참가자가 초등학생 1명, 유치원생 2명뿐이니 옆에서 보고 있는 내가 다 민망했다. 한지체험이라는 과정도 닥나무 껍질이 다 벗기고 삶아서 걸쭉한 상태로 이미 담겨 있는 것을 뜰채 같은 것으로 서너번 뜨기만 하면 되는 게 다였다. 그래도 설명하시는 분들은 애들이 못 알아들으면 어른인 나한테 눈을 맞추고 얘기를 하시는데, 

   가만, 저 목소리는 무척 귀에 익은데.... 

   아까부터 그 분의 목소리가 정말 귀에 익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래서 유심히 얼굴을 봐도 잘 모르는 분인데 목소리만은 아주 익숙했다.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 어딘가에서 만났던 사람인데 전혀 생각이 안 났다. 내가 이상하다, 는 표정으로 계속 앉아 있었나 보다. 잠시 후에 그 분이 미리 준비한 쑥인동차를 온 사람들에게 한 잔씩 건네주셨다. 나한테도 차를 한 잔 권하시기에 받으러 가니 작은 목소리로 '저 선생님, 알 거 같아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가 냉큼, "저... 선생님, 우리 아는 사이죠? 우리가 어디서 봤지요?" 이렇게 물어도 그냥 웃으시고 자리를 피하셨다.

   그 때 순간적으로 슬쩍 이름표를 확인해 봤다. OOO. 낯선 이름.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는 사이는 분명한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익숙한 목소리.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억양이 무척 자연스럽다. 연배는 나랑 비슷한 거 같으니 제자일 리는 없고, 동료교사 중에 학교를 그만둔 사람도 없고... 한참을 그러다가, 선생님? 

   그 순간, 아! 생각났다. OOO 공부방. 

   나는 십 년이 좀 넘게 부산의 빈민지역에서 공부방 교사를 했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에 시작해서 군대 가기 전까지 1년 6개월을 하다가, 교사로 발령받고 다시 시작해서 10년을 더 했다. 시작은 좋아하던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였지만(딱 한 번, 이런 일이 있는데, 해 볼래? 였다.) 교사로 발령 받고 다시 올라가게 된 것은 이상하게도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그 10년 동안 늘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의무'에 충실하려고 애는 썼다고 말할 수 있다. 흔한 수사가 아니라, 정말 거기서 가르치면서 배운 게 많다. 

   그런데 그 공부방은 모 수녀원에서 운영을 맡아 하고 있어서 수녀님들 두세 분이 그 지역에서 지역 활동(빈민 사목)을 하며 공부방 옆에 수녀원 분원을 세우고 살고 있다. 그곳도 정기적으로 인사 이동이 있는 곳이라 거의 15년 동안(군대 공백기에도 연락은 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공부방과 인연을 맺으면서 알게 된 수녀님들도 꽤 많다. 

   그럼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그 수녀님 중의 한 분?  

   아까 얼굴을 보고도 못 알아본 건 그분의 머리카락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이름도 늘 세례명으로 불렀으니 낯설 수 밖에. 그런데 그 세례명이 계속 머리속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음, 분명히 다섯 글자로 된 이름(세례명-본명)인데, 뭐였더라? 아무리 생각을 해도 끝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여기에서 일하실까? 수녀원을 나오셨구나, 언제 나오셨을까, 왜 나오셨나, 꼬리를 무는 생각들. 

   그러고보니 그 수녀님과 관련해서 아주 인상적인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 수녀님을 만난 건 2001년이나 2002년이었을 것 같다. 공부방 담당 수녀님으로 있었고, 그 때 내가 교사대표였으니 이러저래 의논할 일도 많았다. 공부방은 여름캠프가 끝나면 방학에 들어가는데 그 때는 교사도 수녀님도 모두 휴가기간이다.  

   나는 그 여름에 도보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땅끝까지 걸어가는 여행! 그런데 창원에서 출발하는 이른 아침. (아마 일요일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휴가 중인 그 수녀님과 어찌어찌해서 연락이 닿아서 창원의 중앙동 근처에서 그 수녀님을 만났다. 그런데 수녀복을 입은 채로 무지하게 큰 등산배낭을 지고 우리(친구랑 나)를 만나러 왔다. 목소리도 걸음걸이도 아주 씩씩한 아가씨 같았다. 수녀님의 그 당시 집은 진해. 지리산에 올랐다가 휴가기간이라 집으로 가는 길에 우리를 만나고 가고 싶었다고 했다. 그냥 그대로 헤어졌는지, 어디서 아침을 같이 먹었는지 뚜렷한 기억이 없다. 아무튼, 큰 배낭을 지고 걸어 온 수녀님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바로 그 수녀님을 십 년만에 만났는데 오늘은 한지체험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직원이 되어 이것저것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중간에 지나가는 말로, '저 선생님 알 거 같아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등을 돌려서 묵묵히 체험활동의 뒷설거지를 하고 있다.

   나는 주신 차도 다 마셨고 거기 계속 있기가 무람해서 슬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서면서 따로 인사를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간의 소식을 여쭈어야 하나, 모른 척 해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수녀님은 여전히 등을 돌리고 무엇인가에 분주하다. 할 수 없이 그냥 나왔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무척 무겁다. 계속 신경이 쓰여서 다른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서둘러 짐을 챙겨 나오면서 혹시 사무실에 계신가 싶어서 열쇠를 반납하면서 빼꼼히 봐도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 열쇠를 두고 나오면서 내내 찜찜한 기분. 마지막까지 돌아가서 인사를 드려야 하나, 정리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 어느 곳에서나 향기로운 사람으로 잘 지내시기를 빌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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