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얼빠진 철학자 니체도 간혹 멋진 말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서 혐오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게다. 기독교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니체를 조망하는 내 기준에는 여러가지 복잡성이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의 지면을 통해 이에 대한 내 견해를 피력하겠다. 니체의 사상 전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위의 명언 만큼은 착착 감기는 맛이 있다. 니체의 저 문장을 내 방식대로 풀이하기 위해서는 그가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우선 알아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니체는 그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단계에 대해 말한다. '낙타-사자-어린아이'로 대변되는 '세 가지 변신'의 비유는 생성의 존재론, 위버멘쉬(초인), 영겁회귀론, 관점주의, 힘에의 의지 등과 함께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원동력, 곧 힘에의 의지를 통해 허무적 문명을 긍정적 문명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삶의 온갖 모순적인 면, 즉 미와 추, 고통과 기쁨, 사랑과 증오 등을 모두 조건 없이 긍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에게는 오로지 삶이 유일한 가치이자 가치의 궁극적 원천이다. 그는 힘에의 의지를 설파함으로써 쇼펜하우어가 온갖 악과 불행의 원천으로 보았던 의지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했다. 그러면서 '초인(Übermensch, 超人)'으로 집대성되는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시킨다.

    니체는 근대유럽의 정신적 위기를, 일체의 의미와 가치의 근원인 그리스도교적 신의 죽음, 즉 "신은 죽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단정하고, 여기에서 발생한 사상적 공백상태를 새로운 가치창조에 의해 전환시켜 사상적 충실을 기했다. 이리하여 신 대신 초인을, 불멸의 영혼 대신 영겁회귀를, 선과 참 대신 힘에의 의지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 대신에 심연을 거쳐서 웃는 인간의 내재적 삶으로 가치를 전환시켰다. 신의 죽음과 그에 따른 모든 전통가치의 상실을 선포했다. 그는 유일하게 지지받을 수 있는 인간의 반응은 허무주의적 반응, 즉 신이 없음이며 삶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문제에는 답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자신을 완성하며 그 본질을 발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니체는 기독교의 모든 세계관을 해체시킨 것과 다름없다.

    니체 식의 기독교 사멸론은 포이어바흐가 <기독교의 본질>에서 주장한 '신=인간' 도식에 비하면 그나마 세련(?)된 면이 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의 자의식이 절대화된 산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은 인간의 인식이 대상화 너머의 대상화로 역동적인 성장을 꾀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포이어바흐에게 지금까지의 종교가 전제해온 인간의 필연적인 '유한성'은 신의 '무한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닌 제한된 개인의 사유에 갇히지 않고 외연의 가치로 확장할 수 있게 이끌어주는 기제다. 을 주조해나가며 느끼는 인간 스스로의 제한성은 단순히 신의 본질과 인간의 본질이 분리되어있음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의 외연에 또 다른 무수한 주체들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또 다른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실로 개소리가 따로 없다.

    여기서 니체와 포이어바흐가 주장한 反기독사상의 디테일을 서술한 것은 그들의 의도가 아닌 나의 입장에서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준비과정이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앞서 인용한 니체의 명언을 일반적인 시적 구조가 가진 외연적 의미로 걸러내 해석하고, 바로 거기에서 멈출 수 있다면, 의외로 걸죽한 사유의 추출물을 생산해낼 수 있다. 요컨대 니체의 언어를 反니체적 입장에서 공격해보자는 것이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 정신의 가장 높은 단계는 인내력의 지고함이나 희생의 숭고성이 아니다. 또한 자유를 쟁취하고 자아실현을 도구적으로 전환시키는 내적 힘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근본적 웃음에서 생성되는데, 니체는 그것을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으로 규정하며 그 해석성을 부각시킨다. 어린아이는 잘 웃는 자로서 삶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갖고 놈으로써 인간의 자기변형의 최종적 단계를 완성시킨다는 것이다. 즉 니체는 어린아이가 가진 초고차원적 힘의 원천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기쁨이 아닌 심연을 관통한 인간의 내재적 삶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니체는 틀렸다. 모든 철학적 사유의 총론은 현실의 다양한 각론들로부터 배반당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태도와 습성을 끊임없이 천착한다. 가끔은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아이의 유치찬란한 행동 가운데 은연중 드러나는 찬란한 무언가를 발견할 때다. 그때는 잠시 소름 돋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면 그 '찬란한 것'은 무엇인가. 치열한 현실을 견디는 과정과 깊은 고뇌의 끝에서 깨달았다. 그것은 '자유'였다. 그리고 '생명력'이었다. 창조적 자아를 위한 자유와 정신적 의식의 확장을 위한 자유는 모든 어린아이들에게 내재된 힘이다. 여기에 생명력이 보태지면 그것을 더욱 오롯화하고 현실세계를 천국의 자장 속으로 편입시킬 수 있게 된다.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는 초월적 자유가 추동하는 신적인 생명력이 존재한 것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니체가 이를 어찌 알겠는가.

    어린아이의 초자유적 순수성은 태생적으로 부여된 것이다. 그것은 창조의 산물이다. 민족, 문화, 국경, 언어를 초월하여 세상의 모든 어린아이는 초월적 생명력을 소유한다. 이는 본래적이다. 니체의 '낙타-사자-어린아이'의 비유가 함의한 변신적 개념으로서가 아니라는 얘기다. 본래적 실존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된 거룩한 창조성에서 발산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신'밖에 없다.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현현되는 초월적 자기긍정의 힘은 근원적으로 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이를 명확히 깨닫는다. 그리고 경외한다. 이 놀라운 경험의 연속성은 과히 폭포수가 샘솟는 것과 같다. 니체가 '어린아이'에게 부여한 저 많은 형용사들은 곧바로 신의 찬탄스러운 속성을 압도적으로 헌사하는 반증의 도구가 될 뿐이다. 결국 니체는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신을 긍정하고 경외한 것이다.

    내가 니체의 말 한 토막을 끄집어내 이렇게 장황한 글로 버무리는 이유는 인간의 인간됨을 바로 천착하자는 취지에 있다. 인생의 짧고 추악하고 고단하고 가난한 특질에 아파하는 주변 이웃을 격려하기 위한 목소리이기도 하다. 웃어야 한다.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무게가 아무리 우리를 짓누른다 할지라도, 바로 그 지점에서 웃어야 한다. '희喜'와 '비悲'는 등가적으로 대립되는 게 아니다. 웃음은 울음을 포괄한다. 그러나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위대한 것은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그저 웃을 수 있는 신성적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에게는 웃음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웃음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의 본질이다. 웃음은 완벽히 사람의 사람됨에서 나오는 산물이다. 웃음은 불안과 무기력을 넘어서라는 신의 명령에서 나오는 생명의 충동이다. 무엇보다도 웃음은 생명의 약동이고 기쁨의 실현이다. 인간이라면 비단 웃어야 한다. 인생의 짧고 추악함, 고단과 가난함을 망각할 수 있는 힘은 웃음에 있다. 웃음은 인간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저 위대한 푸쉬킨의 말처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웃어라. 신성한 긍정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함 속에서 발현된다. 웃음은 신적 행위이자 신의 축복이다.

    웃자!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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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빛을 내리는 사랑은 누군가에게 빛을 가리는 그림자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뜨거운 생명은 누군가에게 차가운 사물일 뿐이다. 세상만사란 그런 절박함과 무심함 사이를 모르는 척 오가는 시간과 사건의 병렬인지도 모른다. <p59~60>

흔히 '별처럼 아름다운' 혹은 '별처럼 빛나는'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별은 아름답지만 닿을 수 없는 것의 상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소유욕을 더 불태울 때가 있다. 그것을 억지로라도 꺾고 잡아 감춰두려 한다. 그런데 어쩌나. 별을 따서 집에 가져다놓으면 얼음처럼 차가워지듯. 탐스럽던 대상은 억지스런 소유와 동시에 본래의 의미를 잃는 것을. 혹은 다른 형질로 변해버리는 것을. <p93>

우리를 한계 지우는 조건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를 조금쯤 암담하게 한다. 나아가 성급한 절망을 끌어내기도 한다. 때문에 모든 선택은, 언제나 홍수처럼 밀려드는 절망을 막아내고 그 자리에 희망의 댐을 세워야만 가능해진다. 세상의 모든 선택이 축복받고 격려받아야 마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p107>

신념은 계산이 없을 때 묵묵히 지켜진다. 그리고 기적을 만들어낸다. <p142>

'노동'과 '지성'은 평등한 친구이다. 높고 낮음 없이 서로 마주보며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아주는 친구. 두 친구가 생활 속에 고르게 존재할 때 우리는 보다 풍성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주말이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벽돌공이나, 주말농장에서 채소를 돌보는 연구원처럼. <p191>

여행은 그 자체로 훌륭한 마음공부이지만, 이 배움은 궁극적으로 식탁으로 되돌아와 앉았을 때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p217>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겁니다." <p217~218>

이제 나는 행복이 진흙탕 속에 있다는 것을 안다. 함께 부대끼는 생의 애환 속에. <P252>

진짜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 진정한 행복은 누구라도, 꼭꼭 감춰놓아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애써 힘주어 행복을 증명하고 싶은 상태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상태일지도 모른다. <p263>

"····· 정말 놀라운 건, 아름다운 것으로만 채워놓으니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는 거야." <p264>

동화란, 다만 우리가 '보고 싶은 세상'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한 조각의 희망들이 손잡고 풀처럼 대지를 뒤덮는 세상,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은 그런 세상이다.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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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에 먼지가 많이 쌓였다. 예전보다 책을 읽지 못하는 환경적인 배경도 있지만 아무래도 결혼 이후에 시간상의 한계로 후기를 남기지 못한 측면이 크다 하겠다. 물론 내 게으름이 일차적인 사유가 될 것이다. 즉 블로그에 쌓인 먼지는 주인장이 성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된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이를 부인할 생각은 없다.

   반추하건대, 지난 몇 년간 내 독서는 '문사철文史哲' 중 역사와 철학에 집중적으로 머물렀다. 전통적으로 호감을 보여왔던 장르인 문학엔 한없이 소원했다. 최근 발표된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그간의 내 독서편식을 일깨웠다. 주지하다시피 금년 노벨문학상은 캐나다 단편 여류작가 앨리스 먼로(Alice Munro)에게 돌아갔다. "단편소설을 특별한 예술 형태로서의 완벽한 경지로 올려놨다"고 요란을 떠는 스웨덴 한림원의 시상 배경은 관심 밖이었다. 인문학의 명징한 한 기둥인 문학과 소원해진 내 독서의 일그러진 현존을 응시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이러한 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특히 우리사회가 어딘가의 호도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어두운 현실인식이 '사철史哲'에 대한 내 관심을 부채질했다. 고백컨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싶었다. 무지가 두려웠다. 알고자 했다. '왼쪽'과 '오른쪽'을 공히 제대로 안 후에 작금의 현실에 가장 적합하고 생산적인 내용을 끄집어낼 수 있는 중용적 지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의도는 그러했다. 만만치 않았다. 결국 허무했다. 세상의 문제와 번민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요체는 그저 '아는 것'으로만은 불가능하다는 분명한 진리에 압도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삶은 고단하고 세상은 복잡한 것이었다.

   최근 재독한 하이에크의 명저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다룬 신간서적의 후기를 마지막으로 다시 문학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앞으로 블로그 내에서 정치적 입장과 이념주의적 색채를 발산하는 일은 최대한 배제하고자 한다. '순수 북리뷰어'라는 이곳의 순전성이 훼손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표현했다. 선을 넘어선 적도 있었다. 경박했다. 부족했다. 스스로 마음을 추스린다.

   온라인서점을 둘러봤다. 반가운 문학 신간소식이 줄지어 메인을 장식했다. 한국 역사사회소설의 대가 김주영은 <객주>의 마지막 10권을 내놓음으로써 마침내 완간을 마무리했다. SF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필생의 역작 <파운데이션>은 그 거대한 시리즈를 모두 모아 완세트로 출간됐다. 신비로운 언어의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는 신간 <아크라 문서>를 이미 출간시켜 호평을 받고 있다. 희대의 이야기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와 우리시대의 공감작가 공지영의 <높고 푸른 사다리>는 출간을 대기 중이다. 반갑고 흐뭇한 리스트다. 고민없이 전부 카트에 집어넣었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다. 시끄러운 현실을 냉정하고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시끄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번민하는 현존 인간을 쓰다듬는 가슴의 크기를 확보하는 일은 더더욱 중요하다. 그걸 잊고 있었다. 깨달았다. 뒤를 돌아봤다. 문학의 필요를 새삼 갈망했다. 문학이 공허했던 내 가슴 속의 여백을 무언가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기운으로 채워주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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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 전공자는 아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있어 왔다. 현실을 인식하고자 할 때 철학만큼 객관적인 시각을 확보해주는 기준도 없다. 중용적 지성을 지향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역사는 필수다. 더욱이 작금과 같은 극단적인 문화상대주의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더욱 그렇다. 올바른 지성으로 세계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쳐다보기 위해서라도 철학은 반드시 필요하다.

   서양철학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중요한 기준점을 통과해야만 한다. 화이트헤드는 말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다. 플라톤은 그 첫 번째 기준이다.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한 사람의 철학자가 또 있다. 그는 바로 칸트다. 서양철학은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즉 플라톤과 칸트를 관통하지 않고서는 서양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플라톤이야 워낙 대단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서양철학의 계보에서 그의 위상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유명한 '이데아론'과 '철인정치론'에 대해 나는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다. 사실 플라톤 철학은 나에게 녹록지 않은 이질감과 반발심을 발산케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만은 달콤한 철학자는 아니라 하겠다. 그러나 칸트는 다르다. 고백하건대 내 자신의 도덕심과 책임감은 기독교 신앙와 더불어 칸트에게서 연원한 부분이 많다. 철학사를 유심히 탐구해보면 칸트 이전의 철학은 칸트로 빨려들어가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칸트로 다시 회귀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칸트의 명저 <순수이성비판>을 완독하려다가 수차례 실패했다. 그 실패의 상흔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했다. 끝까지 완독하지 못한 책이 별로 없었던 나에게 칸트라는 존재는 큰 성벽과 같은 것이었다. 대체 칸트가 무엇이관대 난 이렇게 씨름하고 좌절해야 하는가. 내 자신의 자존감적 질문이 내면 곳곳을 후벼팠다. 이후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어느것 하나 완독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뒤늦게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두가지였다. 철학은 본래 어렵다는 당연한 전제를 망각한 게 첫 번째였고, 아무런 준비과정도 없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을 집어든 내 자신의 오기와 허영이 얼마나 우스운 행동이었는가 하는 게 두 번째였다.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로 칸트를 내세우면서 여태까지 <순수이성비판>조차 완독하지 못한 내 자신의 모습은 콤플렉스 이전에 거짓이며 허영이었다. 그리고 철학 전공자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어마어마한 대작을 읽기로 작정했음에도 그것을 위한 지적 준비과정에 아무런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도 교만이자 만용이었
다. 그랬다. 난 교만했다.

   칸트를 다시 공부하기로 했다. 칸트를 제대로 천착하기 위해 내가 배정한 시간은 3개월이다. 칸트를 오롯이 체화하기 위해서는 칸트 이전 철학의 개괄적인 흐름을 다시 정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램프레이트 <서양철학사>를 다시 한 번 정독하기로 했다. 이어 루드비히와 진은영의 칸트 입문서 세네 권을 탐독하기로 했다. 그 다음 국내 최고의 칸트 전문가이자 번역자인 백종현 교수의 <칸트와 헤겔의 철학 : 시대와의 대화>, <존재와 진리 : 칸트 『순수이성비판』의 근본문제>를 일독함으로써 <순수이성비판> 완독을 위한 워밍업 작업을 계획키로 했다. 그러고 나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의 순서로 칸트 비판서 시리즈를 모두 완독할 작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칸트가 세계 평화를 기원하며 쓴 명저 <영구 평화를 위하여>를 백종현 교수 번역본으로 다시 한 번 탐독할 것이다.

   장장 3개월의 시간을 들여서까지 대철학자 칸트의 숨결을 탐구하고자 하는 동기는 간명하다. 자유주의, 엄밀히 말해 개인주의의 올곧은 정신과 가치가 사라져가는 작금의 사회적 모습에 위험과 염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고민의 연장선상에서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을 외쳤던 천재 철학자의 숨결을 오롯하게 천착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천착과정을 통해 결국 내 자신의 내면을 깊이있고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내공을 키워보기 위함인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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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는다. 나 또한 일천한 책읽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누구누구에서 책을 추천하는 것이 적절한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양서를 함께 나누고 그것을 통해 책읽기의 순기능을 확장시키자는 취지에서는 용기를 가져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오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책을 추천하며 서평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독서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책을 읽느냐가 아니라 책을 선택하는 자신만의 기준과 방법이다. 그 책이 좋은 책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이다. 가령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실존주의 철학의 교과서로 보고 성경처럼 머리맡에 두는 독자가 있는 반면 독일 현상학의 아류작으로서 쓰레기로 규정하는 나같은 독자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책을 고르는 기준은 본질적으로 타자의 견해를 인식하기 이전에 자기자신의 내면의 기호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여태까지 읽지 말아야 할 책들이 우리세계에 많이 존재한다고 주장해왔다. 그것은 두가지로 정리되는데 바로 '고전'과 '자기계발서'다. 아니 고전을 읽지 말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항상 고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내가 읽지 말아야 할 책으로 고전을 꼽고 있지 않는가. 내가 말하려는 건 '이해되지 않는 어렵고 난해한 텍스트로서의 고전'이다. 본인이 감당하기 힘든 텍스트를 앞에 두고 낑낑대며 오기로 읽는 책은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한 번 보자. 케인즈의 <일반이론>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아무런 어려움없이 이해하며 읽을 수 있는 독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들 서적은 전공자도 혀를 내두르는 난해한 전문서적이다. 이를 고전이라는 명분으로 일반독자에게 읽히게 하거나 읽으려 하는 자들을 보면 씁쓸하다. 왜 이해도 못하면서 어쭙잖은 해설서를 끼고 독서를 둥개는가. 어떤 책에 대해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지는 어느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소화하기 힘든 난해한 고전을 앞에 두고 시간을 낭비하며 독서를 둥개는 독자들에게 나는 일갈한다. 읽지마!

   독서는 오기와 허영으로 하는 게 아니다. 오기로 읽은 책은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 물론 본인의 필요에 따라 어려운 책에 도전하는 것 자체를 나무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순수한 관심과 진지한 공부의 차원을 넘어 허세와 위선의 영역으로 넘어든다면, 그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책은 읽지 말라. 정 읽고 싶으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지력을 쌓은 후에 다시 도전하거나, 다이제스트 수준의 것으로 핵심만 짚어내라.

   또 하나는 자기계발서이다. 나는 지인들에게 계발서를 읽지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내가 계발서를 거부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책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계발서가 가진 본질적인 구조 면에서 카뮈식의 부조리不條理가 예외없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전형적인 자기계발서가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나라는 OECD국가에서 대한민국밖에 없다. 이런류의 책들은 교묘한 선동, 저자만의 기준, 무의미한 합리주의, 뜬구름잡는 달콤한 소리 등으로 인간의 행복을 이상세계에 대한 잠시성(暫時性, transiency)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넣는다. 독자는 읽는 순간만 환상의 열정에 사로잡힐 뿐이다.

   외람된 얘기일 수 있으나, 계발서에 고무되고 요동하는 이들은 대부분 명확한 자신만의 가치관과 철학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내면 속에 실존하고 있는 '참 나'로서의 견해가 존재하지 않으며 기초적인 인문학적 지식과 식견이 부재하거나 결락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만의 '지적 견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들에게는 건강한 정신과 영혼을 견인하는 지성의 통찰력 차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중용이 부재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십 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계발서는 불티나게 풀려나간다.

   웃긴 예를 들어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인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가 파산한 것을 아는가. 인세로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렸음에도 파산한 이유가 무엇인가, 라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그가 한 답변이 가관이다. 책에 기록된 '7가지 습관'을 자기 스스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 이라고 그는 말했다. 자기계발서가 가진 부조리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읽지 말라는 것이다.

   소화하기 힘든 난해한 고전서적과 자기계발서적은 최대한 멀리하는 것이 좋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양서를 선택하는 지혜는 정말 소중하다. 읽어야 할 책을 읽고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지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인간의 삶이란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읽을 만큼 길지 않고 한가롭지 않으며 값싸지 않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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