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커가면서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요구사항이 구체적이고 규모도 커진다. 어렸을 때는 작은 인형 하나에도 울고 웃던 아이들이 머리가 커지면서 요구하는 스케일도 커졌다. 돈의 개념을 알아가면서 싼 것보다 비싼 것을, 헌 것보다 새것을 지향하고 욕망한다. 물론 인간에게 물욕(物慾)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돈과 물질에 관한 올바른 철학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자식이 커가면서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요구사항이 구체적이고 규모도 커진다. 어렸을 때는 작은 인형 하나에도 울고 웃던 아이들이 머리가 커지면서 요구하는 스케일도 커졌다. 돈의 개념을 알아가면서 싼 것보다 비싼 것을, 헌것보다 새것을 지향하고 욕망한다. 물론 인간에게 물욕(物慾)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돈과 물질에 관한 올바른 철학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딸은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된다. 어느덧 고학년이 되어 돈과 물질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예민하게 배워가는 중이다. 할아버지·할머니로부터 금일봉을 받을 때마다 '세종대왕'보다 '신사임당'을 열망하는 나이가 되었다. 과거에는 누군가에게 용돈이나 금일봉을 받으면 바로 엄마·아빠에게 주었는데 이제는 자기 지갑으로 먼저 들어간다. 아직까지 돈은 부모가 관리하는 것이기에 1만 원 이상의 수입이 있을 경우 본인 계좌에 넣어주다고 압수하곤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현금 회수가 가능할지 미지수다. 요컨대 돈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새해(구정)를 맞이해 스마트폰을 바꿔주기로 약속했다. 두 딸 모두 바꿔준다고 약속했기에 최근 어떤 기종이 좋을까 검색 삼매경에 빠졌다. 지금 첫째 딸이 사용하는 기종은 내가 과거에 사용한 '갤럭시S7'이라는 오래된 모델이다. 출시 시점으로 보면 만 6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게다가 액정이 깨졌고 디스플레이에 잔상과 번인까지 있어 그간 불편하게 사용해왔던 게 사실이다. 둘째는 말할 것도 없겠다. 이에 전격 바꿔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고민하지 않았겠다. 그냥 내가 쓰던 것을 주거나 조금 더 쓰라고 얘기하면 큰 탈 없이 수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돈 개념과 물질 가치를 아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에게 무조건 "이거 그냥 써라", "저것으로 그냥 바꿔 써라" 라는 접근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책정한 예산이 있었다. 그 안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보급형 새 모델을 사줄까 생각했다. 가장 유력한 선택 후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보급형이라 해도 새것은 제법 비쌌다. 가족결합으로 요금제가 묶여있어 자급제로 구매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었다. 기기 자체를 생돈으로 구입해야 했다. 돈이 없진 않았지만 과연 그렇게 하는 게 맞나 생각했다.

고심 끝에 성능이 우수한 상위 기종을 중고로 구매하는 것을 생각했다. 남이 사용한 제품이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한 모델은 새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성비와 실용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관심 모델들을 검색한 결과 보급형 신품보다 하이엔드 중고가 가성비 차원에서 높은 효율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이미 무선 충전, 방수, 지문 인식 등의 고급 기능을 사용해온 아이가 이를 지원하지 않는 보급형 기기를 사용하는 건 왠지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다. 돈의 가치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당* 마켓'에서 괜찮은 S급 중고품을 찾았다. 거래 의사를 타진했다.

단 아이를 설득하는 게 문제였다. 아이가 "돈 아끼려고 새것이 아닌 남이 쓰던 것을 사주는 게 아니냐" 반문(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이라면 알아듣기 쉽게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겠지만 첫째 아이는 한참 예민하고 효율성을 잘 모르는 초등학생 5학년 여자아이였다. 이 대목에서 내 고민이 깊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기능적으로 더 좋은 제품을 아이 손에 안겨주고 싶었고 다만 내가 예상한 금액 선을 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이엔드 중고제품이 가장 적합했다. 한편 아이가 무작정 새것을 추구하기보다 남이 쓰던 것이라 해도 내용이 괜찮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외연보다는 내면을, 비본질보다는 본질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들여다볼 줄 아는 아이로 커가기를 갈망했다.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 떤다고 나무랄 사람들이 있겠다. 그냥 고민하지 말고 새 거 사주면 되지 유난 떤다 말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두 딸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고 시각적 인지 이면에 있는 고결한 가치를 탐색할 줄 아는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새것의 화려함보다 옛것의 묵직함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욕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돈의 가치를 아는 아이로 자라가길 원한다. 그래서 우리 세계 곳곳에 존재해 있는 여러 헌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목도하면서 본질적으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한다. 단 이 시대 부모들이 가진 잘못된 전제 중 하나는 '좋은 것'을 '새것' 혹은 '비싼 것'으로 아무 고민 없이 환치한다는 데 있다. 새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비싼 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그 시기와 상황에 맞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누군 능력이 없는가. 나도 아이에게 사과 회사에서 만든 최신 하이엔드 스마트폰을 사줄 경제적 역량이 있다. 사주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아 안 사주는 것이다. 그래서 예산을 미리 정해놓았던 것이다. 아이가 주변 친구 중 몇 명이 위아래로 접히는 최신 스마트폰을 갖고 다닌다며 자랑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초등학생 아이에게 비싸고 히트작인 신상을 사주려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과연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잠시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다음을 생각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새것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비싼 것도 근원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못한다. 별이 아름다운 건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별에 도달하는 순간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와 같은 유행가는 더 이상 듣지 못할 것이다. 아이에게 가질 수 없는 것,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 나중에 가져도 되는 것, 을 가르치는 건 전적으로 부모의 역할이다. 이런 내 신념에서 이번 선택은 아이와 나와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하나의 시험이자 도전이었다. 결국 나는 계획대로 중고 스마트폰을 아이에게 선물했다. 비록 새것은 아니지만 성능 면에서 아이에게 꼭 필요한 기기를 사준 나 자신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기분 좋았던 건 아이의 반응이다. 새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쓰던 것보다 나아진 성능에 고무되어 마냥 즐거워하는 첫째 딸의 모습에서 궁극의 기쁨을 엿본다. 아빠에게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연신 춤을 춘다. 성능 떨어지는 새것보다 성능 좋고 상태 좋은 헌것이 더 좋다, 라 말한다. 괜히 우려했던 나 자신만 멋쩍다. 아이를 키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하며 농밀한 감동에 가슴을 적신다. 부모에게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힘들고 속상할 때도 많지만 아이가 가끔 이렇게 순수한 영혼의 빛을 뿜어낼 때마다 부모는 행복하고 경이로운 순간을 맛본다. 첫째 딸이 아빠의 '헌것 철학'을 잘 받아주고 이해해 줘서 너무 기쁘고 대견하다. 정말 기분 좋다.

사랑하는 나의 첫째 딸 다인아. 아빠의 작은 선물에도 밝고 명랑하게 반응해 줘서 고맙구나. 아빠는 오늘 너의 모습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단다. 아빠는 기도한다. 다인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새것의 획득됨에 잠시 기뻐하기보다 헌것의 실용성을 오래 누릴 수 있기를. 그래서 새 친구를 사귀는 일 못지않게 옛 친구를 챙길 줄 알고, 알 수 없는 새로운 미래에 두려워하기보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새로운 사상과 조류에 흥분하기보다 옛것의 본질인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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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이야기'는 인류의 문화 역량을 몇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매개체다.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감정을 추슬러왔다. 또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자기와 타자를 연결시켰다. 개인과 세계를 확대시켰다. 여기에 인간이 직접 흉내 내는 액션이 더해질 때면 더욱 다채로운 조화요 무대요 세계가 되었다. 인류 문화사는 말에서 글로, 글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음악이 입혀짐으로, 영화 외 다양한 영상문화로 진보해왔다. 이 진보 선상에 뮤지컬(musical)이란 매혹적인 장르가 있다.

개인적으로 뮤지컬에 조예가 부족하다. 대개 책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대중음악의 일부분과 가스펠(gospel) 정도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도 소설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내 기호는 그대로 우리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른 집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뮤지컬과 공연을 즐겨 관람한 것에 무감했다. 뮤지컬에 무지한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부채감을 안고 금번 설 연휴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아이들과 뮤지컬 무대를 찾았다.

뮤지컬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순전히 아이들과 함께 보기 위해 선택한 공연이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아야 했고 어렵거나 자극적이지 않았야 했다. 그렇다고 유치해서는 안 됐다. 지루한 것은 절대 불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이러한 내 입맛에 완벽히 부합한 뮤지컬이다. 쉽고 재미있고 가족적이며 감동까지 갖추었다. 뮤지컬이란 장르가 갖추어야 할 기술적·구조적·음악적 수준 또한 나무랄 데 없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 이야기는 유명하다. 동화로 잘 알려진 내용을 뮤지컬은 더욱 단순하게 축약시켰다. 러시아 대표 가족 뮤지컬을 국내 제작진이 재창작했다고 한다. 고양이가 어떻게 장화를 신게 됐는지, 왜 주인을 돕게 됐는지, 동화 이면의 이야기를 담았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가난한 제분소의 아들로 태어난 장 피에르는 착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인물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빚독촉에 시달리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유산)은 고양이 샤샤밖에 없다. 샤샤는 주인 장 피에르에게 장화를 선물로 주면 자신이 호강시켜주겠다고 말한다. 믿기지 않는 말이지만 장 피에르는 결국 고양이에게 장화를 내어준다. 그런데 믿기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된다. 장 피에르는 고양이 샤샤 덕분에 부귀영화와 사랑을 얻는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다. 뻔하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이 뮤지컬이 감동적인 건 쉴 새 없는 빠른 전개와 탄탄한 구성력에 있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대부분 고양이들이다. 주인공 샤샤를 위시하여 출연하는 고양이는 전부 의인화되어 있는데 고양이의 세계와 인간 세상이 자유롭게 연결되어 있다. 왕과 영주를 비롯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어리석고 탐심이 많은 것으로 묘사된 데 비해 고양이들은 지혜롭고 리더십 있는 군상으로 표현된다. 장 피에르와 에텐셀 공주를 이어주는 것도 고양이들이다. 인간보다 더 나은 내면의 모습을 가진 고양이의 세계는 '동물-인간' 대비를 통해 더욱 극적으로 인간성의 본질을 사유하게 한다. 선함, 희생, 용기, 정직, 인내. 이런 것들 말이다.

음악적·기술적 역량 또한 이 뮤지컬이 가진 강점이다. 초대형 무대에서 펼쳐진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지만 무대와 객석을 꽉 채우고도 남는 파워가 있다. 객석으로 수월하게 전달되는 대사와 음악은 집중력을 높인다. 출연진 19명의 합창도 많은 연습을 증명하듯 퀄리티 있는 하모니를 들려준다. 특히 고양이 샤샤 역을 맡은 배우 신선우의 가창은 인상적이다. 대사 전달력이 월등히 뛰어나고 쉴 새 없이 춤추며 연기하면서도 목이 잠기거나 음정이 불안하지 않다. 특히 초고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은 뮤지컬의 음악적 요소를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뮤지컬 말미 15분간 진행되는 스페셜 커튼콜은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가 가족 뮤지컬을 지향한다는 점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사진 찍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데 출연진 대부분 객석으로 내려와 친절하게 응대한다. 관객의 다양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프로다움을 느낀다. 코로나19로 인해 수년간 공연업계 종사자들의 활력 있는 활동이 요원했다. 하루속히 실력 있고 프로다운 배우들이 무대에서 가감 없이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생애 처음으로 아빠, 엄마와 뮤지컬을 관람한 초등학생 두 딸도 즐겁게 관람한 듯 보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또 보고 싶다며 아우성이다. 극장이라면 치를 떠는 둘째 녀석도 정말 재미있었다며 호들갑이다. 두 아이의 눈빛에서 만족스러운 문화생활을 만끽한 여유와 기쁨을 발견한다. 벌써부터 다음 뮤지컬을 고민해야 할 상황이 됐다. 문제는 오직 지갑뿐이다. 즐거운 고민이다.

뮤지컬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서울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절찬 공연 중이다. 공연시간은 총 70분이며 인터미션은 없다. 주차는 무료(설 연휴 당시, 평일은 2,000원)다. 예매할 때 되도록 좌석을 2층보다 1층으로, 안쪽보다 통로 쪽으로 아이들을 배치하기를 추천한다. 15분 스페셜 커튼콜을 더욱 풍성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가족 뮤지컬로서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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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주변에서 리더십의 대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두 곳인데 하나는 회사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다. 전자는 오랜 시간 동안 동고동락한 내 바로 위 팀장이 회사를 떠난 것이고 후자는 교회 후임목사 청빙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두 곳이 가정과 더불어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시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런 변화는 전회(轉回)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거대한 전환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이 대전환에 내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게 가장 놀랍다. 회사에서는 조직 최고 선임이 되었고 교회에서는 청빙위원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작년 연말부터 리더십 관련 책을 집중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리더십 전환기에는 큰 혼란이 따른다. 제국이나 왕조가 바뀔 때마다 또는 왕 한 명이 바뀔 때조차도 엄청난 변화와 혼란이 있었다. 간혹 좋은 변화도 있었지만 대부분 좋지 않은 변화가 뒤따랐다. 중요한 건 어떤 변화든지 간에 인간 역사는 끝내 발전했고 그 변화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문명을 도약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것도, 가장 지능이 높은 종이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라는 찰스 다윈의 말에 공감하는 편이다. 변화를 예민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기회로 하여 한두 단계 도약해 내는 지혜와 용기는 신이 인간에게 준 고결한 선물이다.

가장 먼저 손에 집어 든 책은 진 에드워드의 『세 왕 이야기』이다. 젊은 시절에 다윗이라는 고대(성경) 인물에 빠져들게 한 이 얇은 책은 왕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추적한다. 가끔 삶에 지치고 영혼이 목마를 때마다 펴서 읽곤 했는데 이번에는 작정해서 연속 3독을 했다. 문장 하나하나를 꾹꾹 누르며 읽었다. 놀라운 건 이 책을 처음 선물한 사람이 교회 담임목사님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나와 동갑인 그 친구는 현재 국내 모 대학 심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오래전 교회 청년부 리더가 된 나에게 리더십의 정수를 도전 주기 위해 선물했던 것이다. 그런 책을 22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의 아버지의 목사 은퇴를 준비하며 다시 읽고 있다는 점에서 전율을 느낀다.

그다음 읽은 책은 『왕들의 이야기』 1, 2권과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이다. 전자는 한국교회에 리더십 도전을 강조해온 한홍 목사의 <열왕기서> 안내서이며 후자는 김진수 합동신학원 교수가 쓴 <사무엘서> 깊이 읽기이다. 잘 알다시피 <열왕기서>와 <사무엘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이스라엘 왕조사를 다루는데 과히 술술 읽힌다. 조금 오버해서 말하면 『삼국지』보다 재미있고 『초한지』보다 감동적이다.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이사야와 같은 불세출의 인물들이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주·조연으로 등장한다. 두 권의 책을 연이어 읽으며 느낀 건 <열왕기서>는 결국 <사무엘서>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을 구도적으로 조망하면 <사무엘서> 이전의 이야기는 <사무엘서>로 빨려 들어가고 <사무엘서> 이후의 이야기는 <사무엘서>로 회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중심에 다윗이라는 독특한 인물이 서 있다. 이곳 블로그 '다윗의 서재'의 명칭이 되기도 한 인물이다. 다윗에 대해서는 후일 다른 지면을 통해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후임목사 청빙위원으로 임명된 후 며칠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청빙이라는 사명이 가진 거대한 무게 때문이다. 개신교에서 목사는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목사는 장로이면서 강도자(講道者)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 목사의 영적 권위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성경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직(職)이기 때문에 성도는 존경과 순종의 마음으로 목사를 대해야 한다. 지난 40년간 오직 한 분 목사님에게 설교를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 삶이 힘들고 영혼이 고달플 때마다 목사님을 찾았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은 별다른 묘수를 얘기하지 않았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하셨다. 바로 그 정공(正攻)의 힘이 비록 흔들렸으나 멸망하지 않은 비밀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덧 4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 그 목사님의 후임을 청빙하는 일에 쓰임을 받게 된 것이다. 실로 충격이자 도전이다.

작년 11월 28일 발족된 교회 후임목사 청빙위원회는 지금까지 총 여덟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5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는 열띤 논의와 토론을 벌였다. 장로, 권사, 집사 할 것 없이 소위 계급장 떼고 민주적·수평적으로 토의했다. 이제 대략 청빙 심의의 마지막 지점에 와 있다. 청빙위원으로서 비밀유지 서약서에 사인을 했기 때문에 여기서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는 없겠다. 다만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건 청빙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성경적 리더십의 궁극을 새삼 공부하고 일깨워 갔다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나 스스로 교회 왕직에 관한 성경적 원리를 학습하는 중심인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교회 공동의회를 통과해 후임목사 청빙이 완료되면 본건에 대한 내 소회를 후술하겠다.

회사로 시선을 돌려보자. 오랜 기간 동안 리더의 자리에 있던 팀장이 사정에 의해 회사를 떠났다. 그와 나는 18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위다. 과거 소(小) 부서의 팀장-팀원 관계였던 것이 회사가 성장하면서 조직이 커졌고 그에 따라 팀장은 영업과 무역을 총괄하는 마케팅 팀장으로 나는 영업파트 내부를 단속하는 중간관리자(부팀장 격)로 역할을 분담했다. 각기 성격이 다르고 일하는 스타일도 달랐다. 정말 많이 달랐다. 그러나 오랫동안 함께 하며 켜켜이 쌓인 시간의 세례는 우리 사이에 큰 신뢰를 쌓아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 간의 믿음과 의지가 더 커졌다. 그 신뢰의 최고점에서 팀장은 회사를 떠났다. 이후 조직은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팀장의 부재는 곧바로 사장님의 친정(親政) 체제ㅡ직접 팀을 관리ㅡ로 이어졌다. 자수성가한 사장님은 실력과 효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분이다. 미국식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를 지향하는 경영인이다. 결단이 빠르고 의사결정이 시원하며 직원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려 노력하는 편이다. 교회 담임목사님이 나의 영적 스승이었다면 회사 사장님은 나에게 물적 원리를 가르친 교사였다. 지난 18년 동안 사장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삶 측면에서 결단과 냉정을 배웠고 철학적으로 이성과 합리를 배웠다. 사장님이 결정한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역사가 쌓인 시공간 위에 내가 직립해 있다. 언제까지 회사에 남아 있을지 모르겠으나 단언하건대 남는 건 감사뿐이리라.

이 대목에서 내가 집어 든 책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노벨상으로 이끈 『노인과 바다』와 또 다른 노벨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이다. 두 권 모두 예전에 읽은 것을 다시 집어 든 것인데 세밀히 재독했다기 보다 의미를 반추하는 선에서 스킵 하며 빠르게 훑었다. 두 소설의 공통점은 외연 면에서 노벨문학상 작가의 책이라는 점과 주제 면에서 인간 삶의 의미와 세월의 본질을 탐구한 메시지에 있다. 40대 중반의 영업차장으로서 조직 내 중간관리자의 역할을 감당하며 삶과 시간, 타자와 세계에 대한 보다 농밀한 곱씹음이 갈급했다. 두 권의 고전은 이런 내 갈증에 가장 적확히 반응하며 울림을 주었다.

헤밍웨이가 말년에 쓴 『노인과 바다』는 어른 됨의 궁극을 관통한다. 소설의 주인공 산티아고가 가진 근원의 매력은 며칠 동안 청새치와 씨름하고 상어떼와 사투를 벌이는 데 있지 않다. 산티아고의 진정한 위대함은 물고기와의 죽음을 건 혈투가 끝난 후 별일 없다는 듯 집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데 있다. 강렬하고 지독한 삶의 순간순간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힘. 그것이 노인 산티아고가 가진 생명력의 본질이다. 삶이란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나이 듦에 관한 깊은 의미를 관통하지 못했더라면 헤밍웨이는 노벨상 문턱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은 더 구체적이다. 이 작품은 삶의 최선에 대해 질문한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끊임없이 질문한 주제는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가"였다. 이는 결국 '품격'에 관한 것으로 귀결되는데 스티븐스의 철학은 명징하다. 위대한 집사란 주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 복종, 이를 넘어선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자신은 최선을 다했고 완벽했음을 자부한다. 또한 주인 달링턴 경이 순수했던 나머지 나치 정권에 이용당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 영역(책임) 바깥에 있는 것임을 강조하며 개인의 죄의식과는 거리를 둔다. 이는 위대함과 품격에 관한 본질적 의미를 묻는 지점인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독자에게 답변을 강요하거나 선악의 가치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소설의 메시지는 현재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병렬된다.

이 글을 쓴 목적으로 돌아가자. 좋은 리더란 무엇인가. 훌륭한 리더십이란 어떤 것인가. 한 곳은 하나님의 왕권을 회복하라 말하고 한 곳은 생존과 효율을 우선하라 말한다. 서로 다른 것인가. 내가 조금만 어렸더라면 즉시 답을 냈겠다. 선언했겠다. 자신감 넘치는 필치로 리더십의 정수를 기술했겠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내 앞에 펼쳐진 거대한 리더십의 전환을 실감 나게 목도하면서 외롭고 보잘것없는 한낱 쓸쓸하기 그지없는 성도(직원)의 현존을 직시할 뿐이다. 그러면서 앞서 소개한 책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주제에 맞닥뜨린다. 그것은 바로 '겸손'과 '현실 인식'이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장엄한 파도에 올라타 있을 때 정작 할 수 있는 건 그저 겸손한 자세로 정확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것뿐이다. 그 파도에 나를 맡길 뿐이다. 시인 류시화의 말대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나는 바다 그 자체이므로.

항상 독서는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 책 읽기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사유한다. 거대한 리더십 교체기의 중심에 서있음으로 새삼 왕직의 본연을 심도 있게 천착한다. 이 흥미로운 탐구와 학습 과정에 이 졸필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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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는 가족과 함께 수시로 서점을 드나들었다. 동탄-분당-잠실-강남-부천-강서로 이어지는 긴 코스였다. 말 그대로 '북 투어(book tour)'였다. 대부분 중고서점이었다. 첫째 딸의 『설**의 한국사 대모험』 시리즈가 이빨이 많이 빠져 상태 좋은 중고책으로 채워 넣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다. 여기에 기왕 간 김에 내 책도 몇 권 사자는 취지가 이차적이었다. 고르다 보니 애들 책보다 내 책이 더 많아졌다. 뜻밖의 책 호사를 누렸다. 구입한 책의 절반 이상이 이미 읽은 책을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기 위한 것이었다.


1월에는 가족과 함께 수시로 서점을 드나들었다. 동탄-분당-잠실-강남-부천-강서로 이어지는 긴 코스였다. 말 그대로 '북 투어(book tour)'였다. 대부분 중고서점이었다. 첫째 딸의 『설**의 한국사 대모험』 시리즈가 이빨이 많이 빠져 상태 좋은 중고책으로 채워 넣기 위한 목적이 일차적이었다. 여기에 기왕 간 김에 내 책도 몇 권 사자는 취지가 이차적이었다. 고르다 보니 애들 책보다 내 책이 더 많아졌다. 뜻밖의 책 호사를 누렸다. 구입한 책의 절반 이상이 이미 읽은 책을 다른 번역본으로 다시 읽기 위한 것이었다.

집 서재에 동일 제목이 있다는 걸 눈치챈 둘째 딸이 나에게 질문했다. "아빠. 근데 왜 읽은 책을 또 사?" 아이의 질문에 나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해외문학은 번역마다 결이 다르고 읽는 맛이 다르단다"라고 답했다. 아이는 뜨악한 표정을 짓고 자신의 관심 코너로 이동했다. 사실 그렇잖은가. 가령 톨스토이 『부활』의 경우 시중에 여러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 그 유명한 첫 문단만을 비교해도 출판사마다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읽힌다. 그렇기에 같은 작품이라도 2편 이상의 번역본을 소장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병독하면서 조금 다른 맛을 찾아 살피는 건 해외 고전을 입체적으로 탐독하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기존 정기수 번역본(민음사)이 다소 투박하고 직역 투여서 <동서문화사>의 송면 역으로 다시 고른 것이다. 위고 특유의 지난한 묘사와 잦은 장광설을 힘 있게 이겨내기 위해서는 번역의 질 또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철 지난 프랑스어의 된소리 번역만 개의치 않는다면 송면 번역이 나에게는 더 맞으리라 기대했다. 게다가 그 유명한 비야르의 삽화 300점이 수록된 건 덤이다. 『레미제라블』은 올봄이나 여름 정도에 쉼표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전두엽에 꾹꾹 누르며 다시 읽을 계획이다.

톨스토이의 처녀작 『유년 시대』는 동완의 번역(신원문화사)으로 읽고 싶었던 책이다. Y 중고서점에 1권 있는 걸 얼른 집었다. 『유년 시대』는 톨스토이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작품이다. 『소년 시대』, 『청년 시대』와 함께 '톨스토이 자전 3부작'으로 불리는데, 개인적으로 『유년 시대』만 읽어도 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뒤의 2개는 작품성이 조금 떨어질 뿐만 아니라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넓게 조망한다는 차원에서는 굳이 안 읽어도 되는 작품이다. 후일 『안나 카레니나』나 『고백록(참회록)』으로 충분히 포괄할 수 있는 작품이기에 『유년 시대』만으로 충분하다. 박형규 역(인디북)과 함께 골랐다.

장융의 『대륙의 딸』은 누군가의 추천을 통해 구입했다. 세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추적한 역작이다. <뉴욕 타임스>는 '중국 현대사의 비밀과 중국 민족성의 특질을 생생하게 그려낸 20세기 최고의 기록 문학'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영국 논픽션 최고상 수상 등 출간 당시 각종 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모택동으로부터 본격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사는 그리 아름답지 않다. 인간 말살의 측면에서 모택동은 스탈린이나 히틀러 못지않은 인물이다. 프랑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이 중국공산당의 오욕의 역사를 매우 구체적으로 다룬 책인데 이와 함께 읽으면 문화대혁명의 기치 아래 얼마나 악랄하고 엽기적인 일들이 20세기 중국 대륙에서 벌어졌는지 잘 알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중이다.

『설**의 한국사(세계사) 대모험』 시리즈는 유아를 둔 부모에게 인기가 많은데 초등학생에게 한국사(세계사)의 기초적 흥미를 더해주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저자가 역사왜곡 논란으로 방송에서 하차한 상황이지만 책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팔리는 것 같다. 서점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판매하고 있다. 구매 관련 팁을 주자면 해당 시리즈는 굳이 새 책을 사지 않아도 된다. 중고서점에서 구입하기 바란다. 전 시리즈를 중고서점에서 구입했는데 완전히 새 책이었다. 새 책 같은 중고가 아니라 진짜 '새 책'말이다. 무슨 얘기인지는 직접 중고서점에 가서 확인해보면 알 것이다. 도서정가제가 낳은 '웃픈' 풍경이라고나 할까.

아이들과 서점에서 뒹구는 시간이 즐겁다. 가끔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줄 때 나 자신이 참으로 멋지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쳇말로 '자뻑'이지만 솔직한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다. 습관과 태도는 사랑과 분노처럼 정확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나는 두 딸이 공부를 잘 안 하고 학력은 조금 떨어져도 책 읽는 습관만큼은 어려서부터 습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두 딸이 책상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이쁘고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언젠가 두 딸과 단테의 『신곡』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함께 읽은 후 서로 다른 감상평을 나눌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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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리커버리 출간이나 기념 이벤트를 준비할 것으로 예측된다. 나도 이런 분위기에 살짝 편승하려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명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조만간 다시 읽으려 계획 중이다. 전에 읽은 것과 다른 번역본을 찾았다. 현재 소장 중인 민음사판(김연경 교수 역)이 문제 있어서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체가 다분히 찰지고 개성 있기 때문에 권위 있는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는 것도 감상의 확장을 위해 좋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찾은 게 김학수 교수가 번역한 범우사판이다. 절판되진 않았지만 중고를 찾았다. 이유는 앞서 얘기한 리커버리 출간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번지르르한 새 책은 그때 구입하면 된다.

 

도스토옙스키 얘기로 글 문을 열었지만 실제 내 현재 관심사는 톨스토이다. 지금도 톨스토이의 소설을 손에 들고 있다. 톨스토이의 3대 장편을 걸쭉한 감동으로 읽은 나에게 그의 중·단편들은 또 다른 성격의 울림으로 읽히고 있다. 특히 『크로이체르 소나타』는 뻑 간 나머지 서평을 어떻게 쓸지 고민스러울 정도다. 지금 읽고 있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도 압권이다. 이에 그의 모든 작품을 섭렵하기로 결심했다. 톨스토이 전작에 뛰어든 것이다. 아이로니컬하다. 도스토옙스키 200주기를 맞이해 톨스토이에 빠지게 됐으니 말이다. 이런 와중에 주변 지인들로부터 톨스토이에 대한 관심을 문의 받았다. 총 두 사람인데 교회의 협동목사님과 친동생처럼 지내는 회사 후배이다. 이에 그들에게 책 선물을 하기로 했다.

 

톨스토이의 작품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78편의 전작(全作)을 소화하는 게 가장 입체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효율과 압축을 위해 보통 3대 장편(『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을 꼽는 편이다. 3개 대작 중 앞선 두 개는 문학적·예술적인 면에서 단연 걸작으로 꼽히지만 뒤의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다고 평가받는다. 톨스토이의 작가적 세계관은 『안나 카레니나』를 전후로 크게 구분되는데 이 소설을 정점으로 이후 작품들이 지나친 종교적 관점과 금욕(절제)주의에 함몰되어 다소 따분해진 측면이 없지 않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나에게도 후기작 『부활』은 한없이 밋밋했다. 이러한 톨스토이 문학의 변화를 음미하는 것도 나름 굉장한 쾌감이다.

 

톨스토이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누가 뭐래도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다. 『안나 카레니나』는 제법 대중적인 작품으로 주변에 읽어본 사람이 적지 않지만 『전쟁과 평화』는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 과거 서평에서 지적한 대로 대부분 『전쟁과 평화』의 존재와 명성은 알고 있지만 정작 실제 읽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총 4권으로 2200페이지가 넘고 등장인물만 550여 명에 달하는 이 거대한 소설을 읽어낸다는 건 웬만한 독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힘든 일일 것이다. 더 흥미로운 건 읽지 않은 사람 중 일부는 자기 책장에 자신도 모르게 이 소설을 꼽아놓고 있다는 점이다. 과히 신비의 소설이라 할 만하다.


톨스토이 마니아나 러시아 문학 그룹 사이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 중 어떤 작품이 더 훌륭한가"라는 질문이 간혹 화두가 될 때가 있다. 쉽지 않은 질문이다. 사람마다 문학적 취향과 작품의 해석은 다르기 마련이다. 문학평론가 이현우 씨(필명:로쟈)의 말대로 『전쟁과 평화』는 '소설을 초과하는 작품'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소설의 끝장을 보여준 작품'이다. 『전쟁과 평화』는 스케일과 구조 면에서 전무후무한 독자성(獨自性)을 가진 소설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장편소설이란 장르로서 최고의 예술적 경지에 오른 소설이다. 무엇이 더 훌륭하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들이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하나를 꼽아야만 한다면 나는 『전쟁과 평화』를 선택하겠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전쟁과 평화』에 조금 더 애착이 간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보다 『전쟁과 평화』를 읽을 때 내 컨디션이 좋았고 내 마음의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전쟁과 평화』는 과히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소설이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한복판에서 사랑하고 성장하는 젊은 남녀들의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 아래서 포효하고 방황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다채롭게 그려졌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뿜어내는 강렬한 인상과 역동은 숨이 멎을 정도다. 안드레이의 진지함, 니콜라이의 일관성, 피에르의 자유분방함, 나타샤의 생명력 등은 이 소설이 역사소설을 넘어 삶과 사랑에 대한 웅대한 예찬서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완독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소설 말미에 도착했을 때의 농밀한 감동을 잊을 수 없다. 삶이란 무엇일까.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100년도 채 되지 않는 한 사람의 인생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평소 중요하고 민감하게 생각해온 것이 실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진실에 마주하게 된다. 이런저런 걱정과 고난에 번민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미워하며 조금 더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추악하고 고단한 일상은 우리에게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톨스토이는 답한다. 삶이란 그저 그렇게 사는 것임을. 보잘것없는 농노 한 사람의 지혜가 황제 나폴레옹의 패기를 전복하고 귀족 피에르에게 깊은 깨우침을 선사한 것처럼 인생이란 크고 작은 것과 무관하게 그냥 그렇게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평화'의 의미라는 걸 알려준다.

 

책 선물을 한다는 얘기에 너무 장황한 서설이 붙었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를 두 명의 지인에게 선물한다. 번역본은 박형규 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문학동네판을 골랐다. 박 교수는 해방 후 러시아 문학 1세대ㅡ1.5세대로 보는 사람도 있음ㅡ학자로서 학구열이 대단한 번역가이다. 90세의 노년임에도 그의 번역 활동은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이다. 성실하고 세심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그의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고 오류가 없으며 한국어 어휘 구사력이 탁월하여 통상 옛 번역의 한계로 지적되는 '투박함'이란 요소를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 잘 읽히는 번역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 하여 각광을 받는 추세라 한다. 최근 몇 년간 『전쟁과 평화』도 수많은 번역본이 쏟아졌다. 그중 젊은 번역가 연진희 씨의 민음사판도 좋다. 문학동네판이 우아한 문어체의 맛을 살렸다면 민음사판은 젊은 세대의 가독성을 염두에 둔 듯 문장을 잘라서 구어체를 부각시켰다. 두 번역본 모두 훌륭하다. 기호에 맞게 선택하면 될 일이다.

 

책 선물을 받을 두 분에게 큰 감동이 있기를 바란다. 두 분 모두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내 인생 소설을 공유하게 되어 기쁘다. 그들이 『전쟁과 평화』의 완독에 성공하여 서로 다른 리뷰를 나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간만의 책 선물에 가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상의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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