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손글씨다. 손으로 직접 쓰셔서 어머니에게 전달한 편지라고 한다. 글씨도 명필이지만 내용도 아름답다. 단순히 사변적인 글이 아니라 자신의 일평생에 걸쳐 증명해온 글이기에 더욱 찬연하다. 저 짧은 편지 속에는 아버지의 삶과 철학과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난한 고통의 나날을 지불해야만 되돌려 받을 수 있는 연륜의 축적이 정직하게 손글씨를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아들인 나를 감동시킨다.

 

훌륭한 아버지를 둔 건 한 사람 일생의 가장 큰 축복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차마 존경하지 못하는, 혹은 존경할 수 없는 주변의 친구들이 여럿 있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나에게 부러움을 표했다. "친구야, 너는 정말 좋은 아버지를 두었다. 나는 그런 네가 부럽다." 그때는 확 와닿지 않았던 말이 왜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하게 깨달아지는지 모르겠다. 인생의 진리가 대개 시간차를 통해 각인된다는 사실은 유한한 인간으로서는 서글픈 비극이다.

 

남자에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게 있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처음 발표한 이론으로 "남성이 부친을 증오하고 모친에 대해서 품는 무의식적인 성적 애착" 정도로 정의된다.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무의식적 소망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에 나오는 고전적 신화의 내용과 연결했다. 그의 학설의 과학성과 면밀성은 차치하고, 내가 정말 감사한 것은 나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 할 만한 경험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을 동시에 인정하고 사랑했지만, 나에게 있어 아버지는 아버지였고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과하게 미워하지 않았고 어머니에게 과하게 애착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핵심이 되는 여러 개념들이 멘델의 법칙, 유전자에 관한 염색체 이론, 선천성 대사 장애, 호르몬의 존재, 신격 자극 장치 등의 생물학의 원리 앞에 무기력하게 기각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일면의 원리만은 남아서 아직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구조를 해석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있다. 여자의 뇌구조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골 때린 알고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버지의 존재론적 크기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서 넘어선다는 건 앞서거나 누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관통'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현존을 관통하지 못한 아들의 실존은 대개 슬프고 절망적이다.

 

세상의 많은 아들들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부정하고 아버지와의 틀어진 관계로 인해 인생을 좀먹는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아 내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채 밖으로까지 흘러내려 가족과 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특히 자기 자식에게 수직으로 흘러내리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유산은 과히 지독한 것이어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전술한 바 있지만 나는 내 주변 친구와 지인의 예를 통해 '보통 남자'가 갖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인상의 디테일을 수없이 목도했다. 그들은 대개 어둡고 건조하고 폭력적이었다. 슬픈 일이다.

 

고백하겠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아버지라는 존재를 극복했다. 만약 그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면 나는 나의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술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하며 내 영혼을 좀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아버지가 너무 크고 웅장했기에, 그것을 순수히 인정함으로써,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그를 관통하고 넘어설 수 있었다. 그렇다. 아버지가 '참 아버지'가 될 때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어느 것에 속박되지 않는 '진짜 남자'가 되어 자유롭게 세계와 타자를 주유(舟遊)할 수 있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밀한 방정식이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멋있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럽다. 올해로 아버지의 연세가 일흔셋이다. 그의 일생의 말년이 건강하고 멋지고 품격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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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부활』을 다시 읽는다. '다윗의 서재'를 자주 방문한 이웃이라면 내가 톨스토이의 소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내 인생의 단 한 권이 책이고, 『전쟁과 평화』는 내 내면의 크기를 바다와 같은 스케일로 확장시킨 걸작이다. 톨스토이에 대한 지나친 헌사인지는 모르겠으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통해 근대소설의 개시를 알린 이래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 두 장편만으로 인류 소설사는 모두 덮이고 커버된다.

 

주지하다시피 『부활』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와 함께 '톨스토이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소설이다. 다른 두 소설에 비해 비교적 후일에 쓰여 후기 톨스토이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예술성과 완성도 면에서 과거 두 작품에 비해 저평가 되고 있지만 나는 이 소설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아끼고 사랑한다. "『부활』을 읽는 건 우리 자신을 읽는 일이다."라는 서평가 이현우의 해설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함축적으로 안내한다.

 

사실 『부활』은 종교적·사상적 관점에서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 소설에서 상징하는 '부활'이 본래의 기독교적 의미에서의 부활과 다를 뿐 아니라, 귀족과 지주로 대변되는 19세기 러시아 특권계층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사유재산권 중 가장 기초가 되는 토지소유권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나이가 들면서 평화주의자, 기독교 사상가, 공동체주의자 등으로 바뀌어 갔다. 톨스토이가 말년으로 갈수록 작가에서 신학자로, 소설가에서 사상가로 변질(?)해가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안쓰러운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설을 집어 든 이유는 바로 '힐링'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추구하여 영혼의 부활을 이루는 과정을 극한의 진솔한 묘사로 그려냈다. 유려하기 그지없는 톨스토이의 글발은 한 인간의 고도의 정신적 구원의 과정을 아름답게 이끌어간다. 악에서 선으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육체에서 영혼으로 향하는 네흘류도프의 순전한 여정은 그 방향의 전개 과정을 살피는 것만으로 독자에게 힐링이 되고 위안이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보고자 이 소설을 들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힐링'과 '멘토'라는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관련 책들이 서점가를 지배했고 그 여파는 아직까지 흔적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싸구려 힐링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의 외침이 들린다. 고단하고 추악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힐링은 거부한다. 내 나이 어느덧 마흔을 넘었다. 현실을 도피하는 힐링이 아니라 현재를 객관화하는 힐링을 소원한다.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힐링이 아니라 동일한 실재가 상승하는 힐링을 갈망한다. 전자는 일상을 파괴하지만 후자는 삶을 단단하게 한다. 전자가 과거의 시간대에 구속되는 반면 후자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요컨대 인간세계의 저차원적 힐링이 아니라 훨씬 높은 차원의 신성한 힐링을 소망하는 것이다. 그 동기부여의 선상에 톨스토이의 걸작 『부활』이 놓여 있다.

 

오래간만에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으려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세한 것은 후일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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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셀의 서양철학사. 이 어마무시한 책을 다시 집어 들기로 했다. 철학사에 대한 개인적인 지적 열정이 이 수고로움의 본질이겠지만 과히 오랜만에 새로운 번역으로 개정판이 출간되었다는 점이 내 선택을 부추겼다. 금번 개정판은 작아졌으나 두꺼워졌다. 직관적으로 참 이쁘게 생겼다. 철학 책 같지 않게 디자인한 을유문화사의 미적 감각에 박수를 보낸다. 또한 손때가 타지 않게 깔끔한 비닐로 포장해 서점에 진열해놓은 교보문고의 센스도 흐뭇하다.

 

   러셀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사실 러셀만큼 많은 저작을 남긴 지식인은 드물다. 일평생 78권의 책을 남겼을 정도로 그의 지적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나는 과거 2008년 네이버후드 어워드 시상식에서 그의 말을 인용해 수상소감을 밝힌 바 있다. 당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는 고백과 러셀의 명언을 인용한 것 사이에 큰 정신적 오류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몹시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후일 반추해보건대 멋진 수상소감이었다. 요컨대 그 유명한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러셀의 말이자 나 다윗의 것이었다.

 

   평생 기독교를 조롱하고 무정부주의자로 살아온 그의 삶이 내게 올곧게 보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인정하는 건, 그의 케임브리지 대학 동년배들의 지적 허영, 즉 리턴 스트레이치, 존 메이너드 케인스, 레너드 울프 등이 뒤섞여 온갖 불필요한 담론을 쌓았던 '블룸즈버리 그룹'의 핵심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또한 기독교를 비판하는 논증의 수준이 과거의 철학자들, 즉 포이어바흐나 니체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정갈했다는 점이다. 관념과 이성의 세계에 함몰되지 않고 실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주목한 그의 지성을 나는 일견 높이 평가한다.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호불호가 완전히 갈리는 책이다. 하지만 재미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책이다. 사람마다 평가는 다르겠지만 그 유명한 힐쉬베르거나 램프레히트의 것도 재미와 박력 면에서는 러셀의 것에 못 미친다. 물론 바로 이 지점에 세간의 호불호가 존재한다. "철학사가 주관과 흥미의 영역이냐"라는 무거운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이에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빠져 보겠다. 자세한 것은 후일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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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평화』 4권을 읽고 있습니다. 이제 끝이 보입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퇴각이 긴박하게 진행되고 주인공 피에르와 나타샤가 정신적 성숙을 이뤄가는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참으로 긴 이야기입니다. 서사적 규모 면에서 이 작품을 능가할 소설은 없어 보입니다. 정말이지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톨스토이는 37세에 『전쟁과 평화』를 집필했다고 합니다. 그 나이에 이런 소설을 썼다는 건 하나의 난센스입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충분히 경험했다고 보기 힘든 나이에 어떻게 인류 소설사를 오롯이 덮을 만한 어마어마한 소설을 써낼 수 있는지 저로서는 잘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자세한 건 별도의 서평으로 남길 테지만 관련하여 최근 드는 깨달음은 나이의 많고 적음이 인간의 정신적 크기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력이란 완전히 개별적입니다.

   이제 끝자락이 보입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무언가의 풍성한 긍정으로 즐겁게 서평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동안 거작이 남긴 감동과 여운에 흥건히 젖어있을 생각을 하니 흐뭇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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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한 우주보다 거대한 우주선보다 고도의 과학기술보다 더 위대한 건 바로 인간의 내면이다. 영화 《퍼스트맨》에서의 닐 암스트롱의 달 탐사는 딸 카렌과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관통하는(극복하는) 여정이다. 달 표면에 도착해 우주선 문을 여는 바로 그 짧은 순간(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고요하고 적막한 달의 대지 앞에서 주인공 닐은 한동안 묵직한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 찰나의 순간은 가장 조용한 외연이었지만 가장 많은 것을 담아낸 내면이었다.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퍼스트맨》은 달과 우주에 관한 영화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닐 암스트롱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닐은 영화에서 명징한 한 인간으로서 직립해 있다. 미국의 영웅이자 애국심의 표상이 아니다. 60년대의 시대정신도 아니다. 달에 성조기를 꼽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꿈, 상실, 고독, 집념, 용기, 회복 등의 숭고한 디테일이 데이미언 셔젤의 뛰어난 연출과 라이언 고슬링(닐 암스트롱 역)의 절제 있는 연기로 발산되어 러닝타임 2시간 21분을 가득 채웠다. 인간 닐의 내면은 우주선보다 높았고 달보다 신비했다. 우주보다 인간이었다.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바로 이곳ㅡ현실 지구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많은 인간들이 별과 달의 삶을 갈망하며 엄연한 일상의 편린에 주목하지 않는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사유체계는 멀고 크고 추상적인 것에 보다 집중하는 경향을 띤다. '모호함'과 '거대 담론', '판타지'와 '애매성'이라는 현대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진짜 나'와 '명확한 내 것'을 주목하지 않게 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인간 이상을 지향했고 결국 인간 이하가 됐다. 현대사의 비극은 대부분 여기에 연원해 있다.

   영화에서 닐은 말한다.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보는 시각은 달라집니다." 명대사다. 지구에서 하늘을 보는 것과 우주선에서 우주를 보는 것, 그리고 달에서 지구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감상이다.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관찰자의 시각과 철학은 완벽히 달라진다. 관찰자의 입력이 달라지는 것 이상으로 세계를 향한 출력도 변화한다. '입장 차이'는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신과 우주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그 성질의 일부만을 알뿐이다. 결국 차원의 문제다. 그렇기에 닐의 명대사는 우리에게 간절히 긴요하다.

   우주를 배경으로 했던 근래의 몇몇 영화들과 비교되는 것 같다. 내 견해를 말하겠다. 《인터스텔라》가 광활한 우주와 대자연, 복잡한 물리학의 공식을 전면에 배치했다면,  《그래비티》가 적막한 우주를 떠도는 한 인간의 사투를 거대한 영상미로 발산했다면, 《마션》이 모험에 기반을 둔 영화적 재미와 지적인 즐거움을 포인트로 삼았다면, 《퍼스트맨》은 인간의 실존이 곧 또 하나의 우주라는 깨달음을 고요하고 차분한 방식으로 추적하는 작품이다. 영화적 소재와 색깔은 다르지만 인간 천착의 실재성과 공감성 면에서 나는 앞선 세 영화보다 더 잘 만들어졌다고 평가한다. 걸작이다.

   아폴로 11호에 올라타는 삶. 그것은 달에 가는 과정이기에 앞서 내 가족을 사랑하고 내 건강을 챙기며 주변 이웃을 돌아보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본질적으로 그 둘은 '같은 삶'일지도 모른다. 오래간만에 수준 있는 영화를 만났다.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 덕에 기분 좋은 일상을 보낸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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