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로서는 굉장히 불쾌한 경험이었기에 이웃들과 나누며 조금이나마 분노를 삭이고자 한다. 영업직이기 때문에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영업은 인간적이고 친밀한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간혹 매출, 수금 등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 냉정한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중 장부가 맞지 않는 문제는 꽤 악질적이다. 결제를 받아야 하는데 공급사와 주문사 사이에 잔액이 맞지 않으니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닌 것이다.

   그날은 평소에 좋은 관계를 가져온 거래처와 논쟁이 발생했다. 그 거래처와는 오래전부터 3,630원의 장부상 잔액 차이가 발생해왔다. 그랬기에 업체 측에서는 딱 그만큼의 차액을 제외하고 결제를 해왔다. 워낙 소소한 금액이라서 오랫동안 처리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업체 측에서 금년부터는 서로 간의 장부상 일치를 깔끔하게 정리하자고 나선 것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동의했고 바로 품의를 득해서 자사 잔액에서 3,630원을 떨구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했다. 결론적으로 업체 측 장부와 동일하게 맞춘 것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업체 측도 3,630원을 함께 떨군 것이다. 팩스로 보내준 반품전표를 업체 측도 그대로 장부에 적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론적으로 예전과 동일한 차액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업체 측 회계담당자는 이 간단한 수학적 상식을 이해할 만한 지력을 갖추지 못했다. 우리 측에서 반품 전표를 처리했으니 그 전표대로 자기네도 함께 처리하는 게 맞다고 오히려 역성을 내는 게 아닌가. 나는 몹시 황당했지만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업체 담당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담당자는 2011년 거래이력부터 보자며 그간 3년 간의 장부를 전부 보내달라고 요구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이에 대해 명확한 확인이 되지 않으면 결제를 할 수 없다고 고압적인 자세로 나를 압박했다. 나는 까무라쳤다. 우리회사 여직원은 뒤로 자빠졌다. 내 직속상관은 경악했다. 업체 회계담당자의 무지와 고집으로 일은 끝내 해결되지 않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무려 한 시간을 소비하며 에너지를 낭비했다. 바쁜 가운데 무더운 날 받은 스트레스는 어떻게 보상 받을 것인가. 거래처 회계담당자의 기초적 무지와 오만한 태도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인간은 자기의 수준과 방식대로 세계를 본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지각으로 보는 세계가 참 세계라고 생각하는 우를 쉽게 범한다. 진리의 문제가 아닌 개별성의 영역을 자신만의 객관화로 색칠하여 재단한다. 정작 진리의 영역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마치 파이어아벤트가 <무엇이든지 좋아>에서 외쳤던 것처럼 진리의 구분선을 조롱하며 허투루 흘려보낸다. 이는 오만과 편견으로 발생된 무지의 결과로서 인류 역사를 불행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20세기 현대사는 인간의 무지가 지구를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시대였다.

   어떤 사람은 무지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중국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이 제창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은 그 자체로서 숭고하다. 지와 행이 모두 마음의 활동으로서 하나라는, 즉 지식과 행위에 대한 근본 명제를 불러일으킨 양명학의 논리는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식과 실천 사이의 긴장관계를 탐구하는 지행합일설은 무지에 대한 기초적 해석 뒤에나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무지란, 구조론적 본질로서의 무지, 즉 구조화되고 내면화된 체계적인 무지를 일컫는다.

   물론 무지 자체는 죄가 아니다. 순수하게 모르는 것 자체가 욕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만과 편견으로 형성된 '구조적 무지'는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역설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제대로 된 진실을 보려하지 않은 채 구조적이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있는 인간의 양심을 비판한 것이다. 유대인 대량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자신은 단지 공무원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외쳤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면서까지 자신의 무죄를 변론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에서 아렌트는 악의 기운을 엿본다. 아렌트는 결국 자신의 명저를 통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어떤 구조로 악을 평범화하고 귀속시키는지를 고발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는 동양철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중용中庸'의 정신과도 직통으로 연결된다. 자사子思가 자신의 명저 《중용》에서 공자孔子의 말을 빌려 가르친 중용의 개념은 산술적인 의미로서의 '가운데'가 결코 아니다. 중용은 시 속에서 중을 실현하는 것인데, 이는 맨 왼쪽에서 맨 오른쪽까지의 전체를 다 안 뒤의 시간적 선택이다. 즉 어떤 사안에 대해 헤아릴 수 있는 모든 지식의 총량을 가늠하고 그중 시대와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것을 뽑아내는 능력이 바로 중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와 중용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앎이란 항시 겸손과 짝이 되어야 한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자신의 앎이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는 인식의 토대에서 배우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존경받는 지식인은 항상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겸손과 성실로 중무장한 사람들이었다. 퇴계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훌륭한 지식인의 참 모습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도 아닐 뿐더러 교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로 상대의 말을 전면적으로 차단하는 거래처 회계 담당자의 작태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무지와 불관용의 수준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의 이러한 고발은 결국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열을 올리며 거래처와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유는 나도 그런 편견의 무지에 함몰될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 만큼은 이러한 구조적 무지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강력한 도전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위대한 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이 역설했듯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세상은 누구나 자신이 옳고 잘났다고 아우성이다. 그 시끄러운 목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달콤한 거짓이 엉성한 사실을 숨기고 편리한 불의가 불편한 진리를 가리고 있다.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침묵의 미덕 속에서 조용히 공부하며 내공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 오만하고 편견적인 무지에 빠져 주변을 피곤하게 하는 거래처 담당자와의 일화를 소개하며 새삼 참과 거짓의 매커니즘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3,630원의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거래처 회계담당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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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벌써 마지막 주에 와 있다. 가정은 사랑으로 형성된다. 사랑을 먹고 살며, 그것이 잘 되었을 때 비로소 '천국'이 되는 게 바로 가정이다. 필자는 그간 '사랑 전도사'를 자칭하며 사랑에 대해 많은 탐구를 진행해왔다. 필자가 책을 읽는 이유 중 5할은 사랑에 대한 탐구이다. 사랑에 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책을 읽는다는 건 책에 대한 모독이자 세상에 대한 교만이다. 그렇기에 시끄러운 철학자 러셀조차도 자신의 전 일생을 지배했던 세 가지 열정 중 하나로 '사랑에 대한 갈망'을 꼽았던 게 아닌가.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모두 사랑으로 일치단결해야 한다. 그중 부부의 사랑은 행복한 가정의 핵심조건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가정의 무게중심이 점차 자녀로 옮겨가고 있다. 자녀가 가정 내 대부분의 가치판단과 결정사항의 우선순위가 된다. 부부관계는 뒤로 밀려나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가정의 설계적 본질에 이탈된 무지몽매한 것이다. 가정은 전적으로 부부 간의 사랑과 믿음으로 지탱되는 공동체다. 부모와 자녀의 영역은 공고한 부부관계 위에서만 펼쳐져야 한다. 부부 사이에는 그 어떤 존재(혹은 의미)도 들어올 수 없고 그 어떤 논리(혹은 가치)도 개입할 수 없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정 행복'과 '부부 사랑'은 동의어가 된다.

   그렇다면 사랑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네이버 사전을 검색했다.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정도의 의미로 정의되어 있다. 온·오프라인을 망라한 다른 사전들도 이와 대동소이한 수준에서 사랑을 풀이한다. 그런데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다. 의미가 공허하다. 해석이 허전하다. '좋아하는 마음' 정도의 해석으로는 사랑이 향유하는 아름다운 복잡성을 관통하기 힘들다. 사랑은 몇 마디 말로 정의된 사전적 풀이를 통해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원천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사랑에 관한 많은 책들을 탐독해왔다. 수없이 많은 책 중에서 사랑을 정의하는 최고의 책은 단연 성경(聖經, Bible)이다. 특히 신약성서의 고린도전서 13장은 소위 '사랑 장章'으로 불리면서 사랑 탐구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에 대한 디테일은 후술하겠다. 반면 사랑에 대해 정신 나간 주장을 하는 책도 더러 있다. 그중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性>은 가장 가관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의 연인 사르트르와 계약 결혼을 하면서 그 시대 젊은이들의 우상적 텍스트로 군림했다. 페미니즘의 경종을 울린 책으로 평가받는 <제 2의 성>은 필자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읽지 말아야 할 1순위 책으로 규정된다.

   내가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을 까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책이 사랑의 원천적 정의를 과히 악랄한 논리로 호도하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사랑을 '에로스(Eros)'와 '필리아(Philia)'로 구분한다. 에로스와 필리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교하게 의미화된 것으로서 서구 사상계 안에서 '아가페(Agape)'와 함께 사랑의 삼원성을 구성하는 용어이다. 문제는 보부아르가 이 둘을 병렬적이고 독립적으로 분리하여 논증한다는 데 있다. 즉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으로 구분되는데, 둘은 완벽히 분리되는 것으로서, 이 독립성을 지향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전제한 최고 수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가 따로 없다. 그렇다면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정신적인 순결만 지켜주면 되고 육체는 아무렇게나 굴려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그러나 놀랄 건 없다. 보부아르의 삶 자체가 그런 쓰레기 같은 행위를 전도자적으로 보여준 예이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삶은 곧 포르노그라피였다.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도 자세히 알고 보면 거짓과 비인간성을 매개로 한 허위의식에 불과했다. 여기서 보부아르의 추잡하고 거짓된 삶에 대해 구구절절 기술하지는 않겠다. 필자가 보부아르의 삶과 저작을 인용한 이유는 그 시대 젊은이들에게 끼친 악마적 영향력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유럽의 젊은이들은 한결같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직면했다. 길고 잔인했던 전쟁은 이전 시대의 지식과 가치관을 붕괴시켰다. 인간 실존에 방점을 둔 다양한 철학들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그 시대 청춘들의 응급실이었다. 주체와 자존을 강조하는 철학은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마약과 같은 것이었다. 이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에 의해 다져진 상대주의 가치관은 양차 세계대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열매를 생산해냈다. 인간의 자유와 책임, 도덕과 양심이라는 19세기적 가치관은 붕괴했다. 보부아르의 사상과 저작도 그 연장선상 위에서 꽃을 피운 것이다.

  보부아르는 틀렸다. 에로스와 필리아는 병렬적이고 독립적인 관계가 아니다. 필리아는 에로스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필리아는 사랑의 본질에 인격성을 부여한다. 본연의 인격적 사랑은 한 인격체에서 다른 인격체에게로 향할 때에만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명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사랑은 대응하는 사랑이 있을 때에만, 즉 상호응수적相互應酬的일 때에만 온전한 형태로 꽃피우게 된다고 설파했다. 이는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기적 사랑을 철저히 거부하고 상대를 오직 사랑의 목표로 삼는 이타적 사랑의 양식을 도출시킨다. 이타적 사랑이야말로 상대방을 독자적인 고유 가치를 지닌 인격자로 인정하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참 사랑이다.

   부부애夫婦愛는 그 뿌리를 에로스의 절정 속에 두고 있는 필리아다. 부부에게는 제3자에 대한 배타성과 부부만의 내밀함이 존재한다. 부부의 합일 속에서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인격적 사랑의 온전한 삼투작용이 실현된다. 이 삼투작용의 원만한 결과로서의 부부 일치가 실현될 때에 에로스와 필리아 사이의 권력 구도가 깨지고 서로를 보호하고 지탱하는 부부관계가 유지된다. 에로스와 필리아의 균형과 원만한 삼투작용은 부부 생활의 건실한 기반을 형성한다. 사랑에 '책임'이라는 속성은 필연적으로 부여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에로스에게 입체적으로 공급하는 건 필리아의 삼투성이다. 이 작동방식이 고장난 부부관계는 궁극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건설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에로스와 필리아의 연합만으로 사랑은 완전태가 될까. 다시 말해 사랑이 가진 전 우주적 포괄성을 보증할 수 있느냐 말이다. 에로스와 필리아만으로는 무결점 절대선으로서의 사랑을 완성할 수 없다. 사랑은 인간이 자신이 지닌 모든 에너지를 선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반대로 악하고 파괴적인 방향으로도 이끌 수 있는 총체적 기본 능력이다. 사랑이 인생의 선과 악, 그리고 건설과 파괴라는 상반되는 방향을 함께 내포하기 때문에 삶에서 결정적 요인이 된다. 에로스는 물론 필리아조차도 무오하고 완전한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다. 교묘한 자기 추구의 위험과 상대에 대한 우상화는 필리아의 한계로 지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사랑의 거대한 본질이 호출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가페는 에로스와 필리아의 구원자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가페는 인간 능력 안에 본성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고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선물로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인간의 감각적 사랑 에로스와 인격적 사랑 필리아는 무한한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단지 그것을 건드릴 수 있을 뿐 영원히 그 안에 머물지 못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을 통해서 에로스와 필리아를 넘어서 신적 생명에 부응하는 사랑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하나님 자체인 사랑이 먼저 인간과 만물에게 선물로 전달되면서 가능해진다. 성경은 아가페에 대한 주석이다. 인간에게 특별은총으로 주어진 성경에는 신적 사랑의 다양한 각론이 녹아 있다.
아가페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성경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성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전시간적全時間的 메시지다. 성경의 모든 구절이 사랑을 논하지만 그중 백미는 선술했듯이 단연 '고린도전서(Korinthos前書)'이다. 특히 13장은 아가페에 대한 세밀한 각론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4절부터
7절까지가 핵심이다. 무엇보다 7절은 앞선 세 절의 내용을 종합하면서 동시에 심플한 집대성으로 마무리하는 명문장이다. 우선 고린도전서 13장 4절에서 7절까지의 말씀을 보자.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⑤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⑥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⑦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장 4~7절 -

 

  우리가 관심있게 볼 문장은 7절이다.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딘다"는 이 문장 속에는 아가페의 본질을 관통하는 웅장한 지혜의 메시지가 숨어 있다. 우선 '참는다'는 말부터 보자.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할 때 '참는다'는 말은 단순히 인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참으며'는 헬라어로 '스테고(stego)'란 말로 "감싸준다. 비밀을 지켜준다. 침묵 중에 너그럽게 봐준다"란 뜻을 가진다. 어떤 번역에는 "사랑은 어떤 것이든 덮을 수 있으며"라고 했다. '참는다'의 바른 해석은 가정에 적용될 때 적확성을 띤다. 가정은 상처를 내는 곳이 아니라 상처를 치료하는 곳, 다시 말해 참 사랑은 가족 간에 서로서로 실수도, 약점도, 부족함도, 허물도 덮어주고 감싸주고 기도해주고 침묵하며 기다려주는 것이다.

   둘째,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다. '믿는다'는 헬라어로 '피스튜오(pisteuvw)'란 말로 여러가지 부족함을 다 알면서도 믿어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어준다는 말은 상대에 대한 인격적 신뢰를 의미한다. 이는 필리아와 연합되는 의미로서 상대에게 허물과 부족함이 있어도 여전히 그를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다. 완벽해서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믿어주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믿음과 연합된다. 사랑과 믿음은 서로 간에 필요충분조건한 관계로 동등 대응함으로써 독특한 관계 방정식을 성립한다. 사랑이 있는 가족은 서로에 대한 인격적 신뢰가 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 인격적인 신뢰를 가지고 모든 일을 믿어주는 것이다.

   셋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라며"에 '바란다'란 말은 헬라어로 '엘피조(evlpi,zw)'로 단순하게 미래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아니다. 현재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또 소원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소망한다. 사랑은 원칙적으로 소망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아가페를 창조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환난을 당할 때 인내를 부여한다. 인내를 통해 인격이 만들어지고 이 인격은 곧 소망을 낳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소망을 현실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사랑함으로써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넷째,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 있는 근원적 힘은 역시 사랑이다. 사랑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견뎌낼 수 있도록 한다. "모든 것을 견딘다"는 헬라어 '휘포메노'란 말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견디는 것도 아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난을 견디며 헤쳐나가는 것이다. 두려움이 우리를 고난 속으로 함몰시키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대척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하나님 사랑, 즉 견디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한 번 희생하고 마는 것이 아닌 계속적인 희생의 반복이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이 지속되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 찬란한 사랑의 심연에는 '견딤'이 존재하는 것이다

   필자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 신약성서의 명구절까지 주석하면서 사랑의 의미를 탐색한 이유는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사랑의 정결한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또한 가정의 파괴에 직면해 있는 현대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을 직시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새삼 가정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행복한 가정의 원형이 어디서부터 세워지는지를 깨닫기 위함이다. 즉 참 사랑의 숭고한 의미를 회복하고 이해하며, 각 가정 안에서 그것이 어떤 기작으로 발현되어야 하는지를 도전하기 위한 것이다. 

   연인과의 순간적 로맨스를 사랑의 숭고한 포괄성에 등가시켜서는 곤란하다. 연인 사이의 감정은 총체적 사랑의 지엽적 각론이다. "사랑이란 그 사람만 보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배경으로 물러가는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의 명대사는 헛소리다. 제인 오스틴은 틀렸다. 진정한 사랑이란 그 사람을 통해 다른 모든 것들이 보다 뚜렷하고 명징한 생명력 속에서 끌어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경으로 밀려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살아숨쉬는 주체가 되어 주인공의 영역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인간 이전의 것, 혹은 인간 너머의 숭고한 무언가가 인간 본연의 심해 속으로 밀고 들어가는 게 신적 사랑 아가페이며, 이를 집대성하는 유일한 유토피아가 바로 가정이다.

   가정이 바로 서야 한다. 가정은 필사적으로 '푸른 초장'이요 '쉴만한 물가'가 되어야 한다. 현재 우리사회가 앓고 있는 다양한 병적 증세와 부조리 현상은 원천적으로 가정의 파괴로부터 연원한 것이다. 가정에서 얻은 상흔은 절대로 사회가 치유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인간의 전인격적 선함과 완전함을 이해하고 훈육하는 과정의 특권을 가정 이외의는 그 어떤 형태의 그룹에도 부여한 적이 없으시다. 인간은 오직 가정 안에서 인간이 된다. 이는 가정에 독점적으로 부여하신 신의 매커니즘이다. 활력있는 사회와 힘있는 국가는 행복한 가정이 폭포수처럼 샘솟는 데서 출발한다.

   가정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역시 사랑이 필요하다. 그것은 외연의 공허한 형태로서의 관념적 사랑이 아니라 에로스와 필리아, 아가페의 삼원성으로 수용되는 원천적인 실재로서의 사랑이다. 부부 간 사랑의 합일은 행복한 가정의 기초 조건이다. 부부애가 결락된 '작은 천국'은 존립하지 않는다. 이 세계가 곧 천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는 가정에서 나온다. 사회와 국가는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오직 가정만이 천국이 될 수 있다. 이 깊고 오묘한 진리를 각기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심장 속에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 때, 세계는 점차 어둠을 벗고 밝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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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 전집 특별판을 질렀다. 오전에 '네24'에서 결제한 것이 보기 좋게 당일 저녁에 집에 도착했다. 2010년 카뮈 작고 50주기를 기념하여 출판사 책세상에서 출간한 것이다. 7권의 두꺼운 양장본으로 구성됐다. 사진에세이집을 제외한 전체 19권을 연대순으로 재배치했다. 연보, 해설, 옮긴이글을 실었다.

   이미 <이방인>을 위시하여 <시지프 신화>, <페스트> 등을 김화영의 번역으로 읽었다. 카뮈의 문학세계를 보다 깊게 천착하기 위해서는 그 외의 작품들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가장 자유로운 정신, 가장 첨예한 지성, 가장 명징한 언어, 카뮈의 세계를 연대순으로 읽을 수 있다는 건 독자로서 큰 축복이다. '부조리 문학(不條理文學, literature of the absurd)'이라는 하나의 새로운 장을 열어 현대소설의 가장 전범적인 사례로 평가받는 천재 작가의 숨결을 간절히 느껴보고자 했다.

   고백하자면 최근 들어 더욱 카뮈가 읽고 싶어졌다. <이방인> 번역 논쟁이 이를 부추긴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본질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최근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소란들이 기본적으로 카뮈식의 부조리(Absurdity, 不條理, L’Absurde)를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개인과 사회 사이에 악질적으로 존재하는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카뮈는 개인의 부조리와 사회의 부조리를 구분하지 않는다. 스웨덴 한림원은 1957년 노벨문학상을 카뮈에게 수여하면서 아래와 같은 멋진 헌사를 남겼다.


   "카뮈는 세계 속 인간의 조건을 특징지음에 있어 거기에 모든 개인적 의미(personal significance)를 부정하고, 오로지 이를 부조리(absurdity)를 통해서만 바라봄으로써, 또한 실존주의라는 철학적 흐름을 대표하게 됩니다. (…) 이러한 점이 <이방인>을 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정부 부처에서 일하는 직원인 주인공은, 부조리(absurd)한 사건의 연속 끝에 아랍인을 죽입니다. 그러고는, 자기 운명에 무관심(indifferent)한 채, 사형 선고를 받게 됩니다. 한편,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합일하여 무기력에 절은 수동성으로부터 탈출합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병들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사회의 오류와 한계는 무엇인가. 개인의 문제인가 국가의 문제인가. 국민으로서 각 개인은 건강한 가치관을 확보해왔는가. 국가는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개인에게 철학은 존재했는가. 정치는 왜 필요한가. 정치인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가. '자유'와 '평등' 중에 무엇이 우선하며 그 사이에서 '박애'는 어떤 형태로 발현하는가.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구조만으로 절반 이상의 부정不正을 지닌 오류 시스템인가. 개인의 책임감과 윤리의식은 어디서부터 태동하는가. 우리사회의 집단주의(集團主義, collectivism)는 위험수위인가. 그렇다면, 종합적으로, 이 나라는 제대로 된 나라인가.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용솟음친다.

   이 지난하고 서글픈 질문들을 냉정하게 관통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카뮈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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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성세대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인해 이 땅의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지금의 상황에 몹시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이 와중에 정말 화가 나는 게 있다. SNS를 위시한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요란하고 자극적인 표현들이다. 순수하고 일차적인 슬픔의 표출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지나치게 과할 정도로 뿜어내는 방향성 잃은 감정의 폭발들이 문제다. 더욱이 몇몇 SNS의 글들은 거짓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비트켄슈타인은 일찍이 강조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곧 '무지無知'를 뜻한다. 무지는 사전적으로 "아는 것이 없음"이라는 뜻이다. 이를 넓은 의미로 확대하면 보다 입체적인 정의를 갖는다. 하나의 지식이나 사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일차적인 무지라면 타인의 마음과 현재의 상황에 몰이해한 것은 보다 궁극적인 무지라 할 수 있다. 국가적인 재앙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사회는 후자의 개념을 포함하는 무지의 집대성적 광기를 양산했다. 뉴스와 신문으로 대변되는 메스컴뿐만 아니라 대중과 위정자들까지도 이에는 자유롭지 못하다. 위기 극복을 위한 구심력보다는 비본질에 함몰된 원심력의 방해로 국민적 에너지가 낭비되고 응집성을 잃어왔던 게 우리사회의 부끄러운 단면이었다.

   방송과 SNS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형태의 언어적 표현들은 아픔을 겪은 당사자의 입장이 아닌 철저히 그것을 만들어낸 제삼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순수한 마음에서 표현된 것일 수 있다. 또한 참다 참다 못 참아서 폭발된 것일 수도 있다. 공감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위로는 위로를 받는 자의 입장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아무리 선의에 의해 시작된 위로라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위로라고 할 수 없다.

   비트켄슈타인의 무지에 대한 격언은 곧바로 공자孔子가 역설한 '중용中庸'의 철학과 연결된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가르침을 빌리자면, 주자朱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해 중용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한다.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가르는 기준이 바로 중용이며,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에서 출발한다는 게 중용 철학의 핵심이다.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하고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無忌憚하다는 것인데, 여기서 시중時中은 때, 곧 타이밍(timing)을 의미한다. 같은 진리라도 적절(timely)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학에서의 지혜智慧라는 것은 시時 속에서 중中을 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군자의 중용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현되지 않은 중이 어떻게 때에 맞게 발현되느냐(時中)를 뜻하는 것이다. 시기의 적절함이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지혜인 것이다.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폭포수처럼 분출되고 있는 세간의 관심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과연 아름다운 것일까. 공자 식으로 말해서 적절한 타이밍을 갖추고 있느냐는 얘기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처한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결락된 공허한 언어의 전달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꼭 표현해야만 하는 걸까. 아픔의 밀도와 궁극을 모르는 입장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인내할 수는 없는 걸까. 차분하고 냉정하게 상황을 지켜보며 절제된 자세로 기다리며 기도하는 게 수준 높은 위로의 모습이 아닐까. 위로가 과하여 잉여가 될 때 상대는 피로를 느끼는 법이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은희경의 소설 <소년을 위로해줘>를 씹으면서 '이해'와 '위로'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상의 종속적 선후 관계를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나는 소설에서 주인공 연우가 겪는 어린 시절의 다양한 파노라마는 반드시 관통해야 할 그 시절의 특질이라고 지적하면서, 청소년 혹은 청춘에 대한 위로는 분출이 아닌 이해를 전제한 기다림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는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위로하려는 대상이 현실에서 결코 내가 될 수 없는 모호한 고유성과 불가해한 밀도를 가진 상황이라면, 진정한 위로는 나중의 영광을 기도하며 무언無言의 이해로 지켜보는 게 아닐까. 꼭 할 말을 해야 하고 상한 감정을 표현해야만 할까. 손석희의 침묵이 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가. 언어화하여 표현시켜야만 위로가 되는 건 아니다.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침묵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할 때 침묵하는 게 차원 높은 위로의 바른 순서다.

   절제하자. 차분해지자. 실제적인 것들을 살펴보고 챙기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사실을 추출하는 것도 벅차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자. 지금으로서는 보다 절제하는 게 아픔을 당한 이들에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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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04-1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그동안 이번 뉴스를 보면서 희생자와 가족들을 향한 애도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그것이 타인에게 공감받더라도 그저 관심으로만 남는다면 진정한 애도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언어 없이도 위로의 마음을 느끼고 전달하는 것도 충분하다고 봐요. 이 글을 제 페이스북에 공유하고 싶은데 괜찮은지요?

다윗 2014-04-18 23:49   좋아요 0 | URL
네. 퍼가셔도 됩니다. 잉여된 위로는 항시 인간 사이의 피로감을 쌓을 뿐입니다. 공감 고맙습니다. ^^
 

   최근 문학계(출판계)에서는 흥미로운 논쟁이 진행 중이다. 번역에 관한 것인데, 그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해왔던 기존 번역의 권위가 과히 '혁명'적인 내용에 의해 공격당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거리다. 무엇보다 해당 작품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라는 점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젊은 시절, 이 소설이 가진 모호한 매력에 한참이나 미쳐 지냈던 나에게도 그 관심의 폭발력은 응당 대단한 것이라 하겠다.

   카뮈의 <이방인>은 김화영의 번역을 최고로 쳐왔다. 고려대 김화영 명예교수는 평생을 카뮈 연구에 몰두해왔고 카뮈 전집을 번역해냈을 정도로 카뮈 전문가다. 프랑스 현지에서 카뮈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분야 최고의 권위자다. 그렇기에 국내에 수십여 권에 달하는 <이방인> 번역판 중에서 절대 다수의 독자들이 민음사판(김화영 역)을 '갑'으로 꼽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번역이 오류투성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새움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한 <이방인>은 이정서(필명) 씨에 의해 번역됐다. 이런저런 논란 속에서도 역자가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해왔던 만큼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책이 출간되기 전부터 역자 이정서 씨는 출판사 홈페이지를 통해 기존 김화영 교수의 번역이 어떤 부분에서 어떻게 엉터리인지 구체적으로 공박해왔다. 주변에서 노이즈 마케팅이 아이냐는 지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가 올린 글과 신문의 인터뷰 내용을 훑어보면서 논리의 세밀함과 논증의 설득력이 녹록지 않은 수준에 있어 쉽사리 판단할 사안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정서 씨는 기존 번역을 비판하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이방인>의 본질을 관통한다. <이방인>에 대한 기존 독자들의 해석적 통념은 주인공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빛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다. 뫼르소의 모호한 항변은 그 어처구니 없는 반논리성으로 인해, 소위 '부조리不條理'로 대변되는 20세기 문학 역사상의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부조리 문학의 창시자로서의 카뮈 문학의 거대한 상징으로 우뚝 솟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정서 씨는 주인공 뫼르소가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빛이 아니라 태양빛을 반사하는 아랍인의 칼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부조리적인 살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정당방위였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건을 오독한 김화영 교수의 잘못된 번역 때문에 한국 독자들이 수십 년 간 <이방인>을 오해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역자의 말을 통해 <이방인>이 "어느 한 문장 이해되지 않는 곳도 없는, 완벽한 소설"이라고 결론내린다. 계속해서 "이제 경험해보면 아시겠지만 원래 카뮈의 '이방인'은 서너 시간이면 다 읽고 감탄할 소설이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여태까지 국내에 형성돼왔던 <이방인> 해석에 대한 복잡성과 보편성을 재단하고 있다. 즉 김화영 교수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닌 자신만의 <이방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방인>의 문학성은 법정에서 뫼르소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 그리고 타인들(독자 포함)의 몰이해 사이의 압도적인 긴장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는 뫼르소의 살인동기로부터 출발하는 지점이며 불합리·불가해·모순으로 인도되는 이 소설의 핵심 사유이기도 하다. 즉 뫼르소의 살인동기가 '강렬한 태양'인지 '아랍인의 칼날'인지는 소설 전체를 포괄하는 양립 불가능성의 단 하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번역 논쟁은 언어와 해석이라는 지엽적인 문제가 아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소설 <이방인>에 대한 궁극의 도전이다.

   문학에서 번역과 해석은 본질적으로 다른 체계를 가진다. 사르트르가 주창한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는 문학사를 해석의 관점에서 통일시켰다. 작가와 철학자의 시대는 끝났다. 작금은 독자와 비평가의 시대다. 그러나 이를 번역에도 적용할 수는 없다. 해석의 주관적 완결성은 독자와 비평가의 권리이다. 역자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번역의 지엽적인 기능으로 해석이 존재할 수 있지만 역자는 본질적으로 작가의 입장에 있어야 한다. 작가적 의도를 관통하는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야말로 최고의 번역이기 때문이다. 번역의 가장 주요한 출발은 '작가적 객관'인 것이다. 역자의 주관과 개성은 그 다음이다. 이번 번역 논쟁을 바라보는 독자와 출판계의 시선이 자못 예사롭지 않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직까지 이정서 씨의 도발적인 문제제기에 대해 김화영 교수는 시원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사실 문학과 관련된 이런 식의 논쟁은 독자에게는 땡큐요 선물이다. 텍스트를 비틀고 뒤집어 봄으로써 하나의 문학작품을 과히 입체적으로 천착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국내 불문학계 최고의 석학이자 대학자로서 김 교수는 성실하게 본인의 학문적 견해를 피력해주기를 바란다. 듣보잡인 익명의 번역가가 도발적인 방식으로 본인이 쌓아올린 학문적 권위에 도전한 것 자체가 달갑지는 않을 것이다.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학자는 한낱 어린아이의 질문에도 성실하게 답하는 법이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보인 태도야말로 공부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아름다운 전범이 아니었던가.

   김 교수의 답변을 기다린다. 그의 번역으로 수없이 읽고 느낀 <이방인>이었다. 고백컨대, 나는 <이방인>을 통해 내 젊은 시절의 불가해한 고민과 아이러니한 모호성을 녹여냈다. 카뮈가 제기했던 부조리한 현상에 대한 용솟음치는 반증적 열정을 통해 세계 속에서 내 실존의 현재상을 살폈던 것이다. 나에게도 김 교수의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의 입장에서 정말 반갑고 기대되며 재미있는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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