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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키우며 놀랄 때가 많다. 자녀를 양육한다는 건 청년 때에는 경험하거나 상상하기 힘든 지혜와 역량을 공급받는다는 것과 동의어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도 성장한다. 아니 성장해야만 한다. 아이의 성장에서 배우지 못하는 부모는 못난 부모다. 아이가 커갈수록 부모의 배움의 깊이도 커진다. 자녀 양육을 통해 얻는 지혜는 감미롭다. 지난 주말 우리 가족에게 흥미롭고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이를 소개하면서 자식 키우는 보람과 감동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나에게는 초등학생 두 딸이 있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둘째 딸은 몇 가지 버릇이 있는데 그중 가장 고약한 게 샤워할 때 멍 때리며 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좀 심하게 말해 샤워기로 자기 몸 적시는 것에 중독이 됐다. 우리나라가 UN이 정한 물 부족 국가이고 물과 가스와 같은 자원은 아껴 써야 한다는 걸 거듭 알려주어도 좀처럼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 고집과 자존감도 제법 센 편이라 혼날 때는 개선하는 듯하다가 다시 제자리다. 아주 골치 아픈 버릇이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의 일이다. 이 녀석이 또 샤워기로 물을 몸에 흘리고 있는 게 아닌가. 아내가 물 잠그고 얼른 나오라고 아우성이다. 몇 차례 경고를 주었는데도 함흥차사다. 아내의 목소리가 커지자 거실에 있던 내가 나섰다.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녀석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다. 나는 매섭게 훈계했다. "왜 계속 물을 틀어놓니. 엄마 말은 왜 안 듣냐"며 나무랐다. 그랬더니 "이제 곧 나가려고 하잖아."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눈을 부릅뜨고 말대답하는 모양새가 거슬려 아이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때려주었다. 녀석은 아팠는지 울면서 화장실 밖으로 휑 나가버린다. 상황은 일단락된 듯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역시 말 안 들을 때는 혼나야 해"라며 나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등학교 6학년인 첫째 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가와 이의를 제기한다. "아빠! 근데 서윤이(둘째 딸) 왜 때린 거야?" 어이가 없어 바로 답변한다. "서윤이가 물 낭비하는 게 어제오늘 일이니. 엄마 말도 안 듣고 말이지. 잘못했으면 혼나야지." 그랬더니 첫째 아이가 대응한다. "서윤이가 물 낭비하는 건 잘못했어. 하지만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라고 해서 손 씻고 수건 준비하는데 아빠가 다짜고짜 와서 꿀밤을 때렸잖아. 서윤이 얘기 들어보지도 않고. 그렇지 않아도 엄마한테 한소리 들어서 속상한데 막 나가려고 하는 서윤이를 때린 건 아빠가 잘못했다고 봐." 순간 멈칫했다. 아이 말이 맞기도 맞았거니와 살짝 떤 채로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분히 방금 전 상황을 복기했다. 그랬다. 둘째 아이는 이미 엄마에게 혼이 난 상황이었고 엄마 지시대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중간에 끼어들어 정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이마에 꿀밤을 갈긴 것이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첫째 아이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용기를 내 아빠를 찾아와 항의한 것이다. 첫째 딸이 눈앞에서 목격한 장면은 정당하지 않았고 납득되지 않았다. 동생이 억울해 보였다. 이런 억울한 일이 집에서 일어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략 상황이 정리됐다. 순간! 나의 첫째 딸 다인이가 너무 멋있고 자랑스러웠다.

논리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답변을 주어야 했다. 아이에게 변명하지 않았다. 내 잘못을 바로 인정했다. 방안에 토라져 있던 둘째 아이를 불러 정중히 사과했다. 아빠가 오해했고 방금 전 자초지종도 물어보지 않은 채 이마에 딱밤을 때린 건 아빠의 과오였음을 인정했다. 둘째 아이는 그제야 억울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며 함지박 같은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첫째도 덩달아 울었다. 나는 두 딸을 안아주면서 아빠가 잘못했음을 다시 한번 사과했다. 그리고 잠시 후 첫째 아이를 따로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방금 전 그 용기 너무 멋졌어. 앞으로 집에서뿐 아니라 학교와 학원에서,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억울한 사람을 만나거나 정의롭지 못한 장면을 본다면 지금처럼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지? 첫째는 답변했다. "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감동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갑자기 첫째 아이가 나에게 귓속말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아빠. 잘못을 바로 인정하고 사과한 아빠가 너무 멋있어." 나는 그 순간 일시 정지되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끌어 오르는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속으로 속삭였다. 녀석은 다 알고 있구나. 첫째 아이를 다시 한번 꼬옥 안아주었다. "고맙다. 내 딸." 내면에서 솟아오른 작은 눈물이 내 눈에 고여있음을 발견했다. 첫째가 대견했고 나도 멋져 보였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다. 주말 오전 우리 가족이 만들어낸 감동의 한 장면이 며칠 동안 내 가슴을 휘어잡았다. 이게 자식을 키우는 보람이자 묘미구나, 생각했다.

올해 열세 살이 된 첫째 딸은 이제 더 이상 심통과 어리광을 부리던 과거의 그 녀석이 아니다.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지만 동시에 가장 무섭다고 말해온 아이였다. 엄청난 독서량으로 중무장한 파워블로거이자 회사에서는 영업팀 최고 선임인 사십 대 중반의 아빠에게 공정과 정의(正義)를 질문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와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아이의 날카로운 논리에 진땀을 빼야 할 것이고 아이를 설득하기 위해 수고해야 할 것이다. 부모의 힘과 권위만으로 자식을 제압하던 시대는 종말했다. 두 아이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고 그 어떤 핸디캡 없이 평등하게 소통하고 토론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다. 그래야 아이는 부모 너머의 세계로 안정감 있게 나아갈 수 있다.

부모와 자식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소통해서는 곤란하다. 얼마나 많은 부모가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는 부모의 절대 권력에 짓눌리는 것 같지만 커서도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될 것 같은가. 부모는 자식이 세상에 나가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맡아서 기르는 존재다. 부모도 완전하지 않아 실수하고 넘어진다. 오류도 있다. 모순적이기도 하다. 자식에게 잘못한 게 있다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 자식이 나중에 부모가 되었을 때에 동일한 모습을 자식에게 발현할 수 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필히 부모도 자라야 하는 이유다.

전술한 대로 두 딸은 점점 더 커갈 것이다. 몸이 자라는 만큼 마음의 크기도 자랄 것이다. 논리와 실력으로 부모에게 대항할 때도 많아질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부모 권력을 동원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동일한 운동장에서 서로 간 동등하게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두 딸이 나를 넘어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세상 못난 부모들이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결국 자식은 부모라는 존재를 관통하면서 세상과 조우한다. 나와 내 아내가 두 딸의 상처가 되지 않기를, 진심 두 아이의 용기와 자신감의 영감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지난 주말의 한 토막 일화가 생일날의 내 가슴을 웅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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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커가면서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요구사항이 구체적이고 규모도 커진다. 어렸을 때는 작은 인형 하나에도 울고 웃던 아이들이 머리가 커지면서 요구하는 스케일도 커졌다. 돈의 개념을 알아가면서 싼 것보다 비싼 것을, 헌 것보다 새것을 지향하고 욕망한다. 물론 인간에게 물욕(物慾)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돈과 물질에 관한 올바른 철학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자식이 커가면서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요구사항이 구체적이고 규모도 커진다. 어렸을 때는 작은 인형 하나에도 울고 웃던 아이들이 머리가 커지면서 요구하는 스케일도 커졌다. 돈의 개념을 알아가면서 싼 것보다 비싼 것을, 헌것보다 새것을 지향하고 욕망한다. 물론 인간에게 물욕(物慾)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기에 돈과 물질에 관한 올바른 철학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의 입장에서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 이곳에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딸은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된다. 어느덧 고학년이 되어 돈과 물질에 대해 더욱 구체적이고 예민하게 배워가는 중이다. 할아버지·할머니로부터 금일봉을 받을 때마다 '세종대왕'보다 '신사임당'을 열망하는 나이가 되었다. 과거에는 누군가에게 용돈이나 금일봉을 받으면 바로 엄마·아빠에게 주었는데 이제는 자기 지갑으로 먼저 들어간다. 아직까지 돈은 부모가 관리하는 것이기에 1만 원 이상의 수입이 있을 경우 본인 계좌에 넣어주다고 압수하곤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현금 회수가 가능할지 미지수다. 요컨대 돈을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새해(구정)를 맞이해 스마트폰을 바꿔주기로 약속했다. 두 딸 모두 바꿔준다고 약속했기에 최근 어떤 기종이 좋을까 검색 삼매경에 빠졌다. 지금 첫째 딸이 사용하는 기종은 내가 과거에 사용한 '갤럭시S7'이라는 오래된 모델이다. 출시 시점으로 보면 만 6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게다가 액정이 깨졌고 디스플레이에 잔상과 번인까지 있어 그간 불편하게 사용해왔던 게 사실이다. 둘째는 말할 것도 없겠다. 이에 전격 바꿔주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라면 고민하지 않았겠다. 그냥 내가 쓰던 것을 주거나 조금 더 쓰라고 얘기하면 큰 탈 없이 수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돈 개념과 물질 가치를 아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에게 무조건 "이거 그냥 써라", "저것으로 그냥 바꿔 써라" 라는 접근은 쉽지 않을 것이었다. 책정한 예산이 있었다. 그 안에서 해결하고 싶었다. 보급형 새 모델을 사줄까 생각했다. 가장 유력한 선택 후보였다. 그런데 아무리 보급형이라 해도 새것은 제법 비쌌다. 가족결합으로 요금제가 묶여있어 자급제로 구매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었다. 기기 자체를 생돈으로 구입해야 했다. 돈이 없진 않았지만 과연 그렇게 하는 게 맞나 생각했다.

고심 끝에 성능이 우수한 상위 기종을 중고로 구매하는 것을 생각했다. 남이 사용한 제품이지만 깨끗하게 잘 관리한 모델은 새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성비와 실용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관심 모델들을 검색한 결과 보급형 신품보다 하이엔드 중고가 가성비 차원에서 높은 효율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이미 무선 충전, 방수, 지문 인식 등의 고급 기능을 사용해온 아이가 이를 지원하지 않는 보급형 기기를 사용하는 건 왠지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다. 돈의 가치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당* 마켓'에서 괜찮은 S급 중고품을 찾았다. 거래 의사를 타진했다.

단 아이를 설득하는 게 문제였다. 아이가 "돈 아끼려고 새것이 아닌 남이 쓰던 것을 사주는 게 아니냐" 반문(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이라면 알아듣기 쉽게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겠지만 첫째 아이는 한참 예민하고 효율성을 잘 모르는 초등학생 5학년 여자아이였다. 이 대목에서 내 고민이 깊어졌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기능적으로 더 좋은 제품을 아이 손에 안겨주고 싶었고 다만 내가 예상한 금액 선을 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이엔드 중고제품이 가장 적합했다. 한편 아이가 무작정 새것을 추구하기보다 남이 쓰던 것이라 해도 내용이 괜찮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외연보다는 내면을, 비본질보다는 본질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들여다볼 줄 아는 아이로 커가기를 갈망했다.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 떤다고 나무랄 사람들이 있겠다. 그냥 고민하지 말고 새 거 사주면 되지 유난 떤다 말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두 딸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고 시각적 인지 이면에 있는 고결한 가치를 탐색할 줄 아는 아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새것의 화려함보다 옛것의 묵직함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욕을 인정하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돈의 가치를 아는 아이로 자라가길 원한다. 그래서 우리 세계 곳곳에 존재해 있는 여러 헌것들의 의미와 가치를 목도하면서 본질적으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참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한다. 단 이 시대 부모들이 가진 잘못된 전제 중 하나는 '좋은 것'을 '새것' 혹은 '비싼 것'으로 아무 고민 없이 환치한다는 데 있다. 새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비싼 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 그 시기와 상황에 맞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누군 능력이 없는가. 나도 아이에게 사과 회사에서 만든 최신 하이엔드 스마트폰을 사줄 경제적 역량이 있다. 사주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아 안 사주는 것이다. 그래서 예산을 미리 정해놓았던 것이다. 아이가 주변 친구 중 몇 명이 위아래로 접히는 최신 스마트폰을 갖고 다닌다며 자랑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초등학생 아이에게 비싸고 히트작인 신상을 사주려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이 과연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다.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기쁨은 잠시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다음을 생각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새것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비싼 것도 근원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못한다. 별이 아름다운 건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별에 도달하는 순간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와 같은 유행가는 더 이상 듣지 못할 것이다. 아이에게 가질 수 없는 것, 굳이 가질 필요가 없는 것, 나중에 가져도 되는 것, 을 가르치는 건 전적으로 부모의 역할이다. 이런 내 신념에서 이번 선택은 아이와 나와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하나의 시험이자 도전이었다. 결국 나는 계획대로 중고 스마트폰을 아이에게 선물했다. 비록 새것은 아니지만 성능 면에서 아이에게 꼭 필요한 기기를 사준 나 자신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기분 좋았던 건 아이의 반응이다. 새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쓰던 것보다 나아진 성능에 고무되어 마냥 즐거워하는 첫째 딸의 모습에서 궁극의 기쁨을 엿본다. 아빠에게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연신 춤을 춘다. 성능 떨어지는 새것보다 성능 좋고 상태 좋은 헌것이 더 좋다, 라 말한다. 괜히 우려했던 나 자신만 멋쩍다. 아이를 키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생각하며 농밀한 감동에 가슴을 적신다. 부모에게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다. 힘들고 속상할 때도 많지만 아이가 가끔 이렇게 순수한 영혼의 빛을 뿜어낼 때마다 부모는 행복하고 경이로운 순간을 맛본다. 첫째 딸이 아빠의 '헌것 철학'을 잘 받아주고 이해해 줘서 너무 기쁘고 대견하다. 정말 기분 좋다.

사랑하는 나의 첫째 딸 다인아. 아빠의 작은 선물에도 밝고 명랑하게 반응해 줘서 고맙구나. 아빠는 오늘 너의 모습이 너무 고맙고 사랑스럽단다. 아빠는 기도한다. 다인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새것의 획득됨에 잠시 기뻐하기보다 헌것의 실용성을 오래 누릴 수 있기를. 그래서 새 친구를 사귀는 일 못지않게 옛 친구를 챙길 줄 알고, 알 수 없는 새로운 미래에 두려워하기보다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새로운 사상과 조류에 흥분하기보다 옛것의 본질인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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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이야기'는 인류의 문화 역량을 몇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매개체다. 인간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감정을 추슬러왔다. 또한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자기와 타자를 연결시켰다. 개인과 세계를 확대시켰다. 여기에 인간이 직접 흉내 내는 액션이 더해질 때면 더욱 다채로운 조화요 무대요 세계가 되었다. 인류 문화사는 말에서 글로, 글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연극으로, 연극에서 음악이 입혀짐으로, 영화 외 다양한 영상문화로 진보해왔다. 이 진보 선상에 뮤지컬(musical)이란 매혹적인 장르가 있다.

개인적으로 뮤지컬에 조예가 부족하다. 대개 책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대중음악의 일부분과 가스펠(gospel) 정도다. 노래를 잘 부르지도 못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도 없다. 그 유명한 『레미제라블』도 소설로 충분하다는 입장이다. 이런 내 기호는 그대로 우리 가족에게 영향을 미쳤다. 다른 집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뮤지컬과 공연을 즐겨 관람한 것에 무감했다. 뮤지컬에 무지한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수준 높은 문화예술을 향유할 기회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 것이다. 이런 부채감을 안고 금번 설 연휴를 맞이하여 처음으로 아이들과 뮤지컬 무대를 찾았다.

뮤지컬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순전히 아이들과 함께 보기 위해 선택한 공연이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아야 했고 어렵거나 자극적이지 않았야 했다. 그렇다고 유치해서는 안 됐다. 지루한 것은 절대 불가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이러한 내 입맛에 완벽히 부합한 뮤지컬이다. 쉽고 재미있고 가족적이며 감동까지 갖추었다. 뮤지컬이란 장르가 갖추어야 할 기술적·구조적·음악적 수준 또한 나무랄 데 없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 이야기는 유명하다. 동화로 잘 알려진 내용을 뮤지컬은 더욱 단순하게 축약시켰다. 러시아 대표 가족 뮤지컬을 국내 제작진이 재창작했다고 한다. 고양이가 어떻게 장화를 신게 됐는지, 왜 주인을 돕게 됐는지, 동화 이면의 이야기를 담았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가난한 제분소의 아들로 태어난 장 피에르는 착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인물이다. 아버지를 여의고 빚독촉에 시달리는 그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유산)은 고양이 샤샤밖에 없다. 샤샤는 주인 장 피에르에게 장화를 선물로 주면 자신이 호강시켜주겠다고 말한다. 믿기지 않는 말이지만 장 피에르는 결국 고양이에게 장화를 내어준다. 그런데 믿기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된다. 장 피에르는 고양이 샤샤 덕분에 부귀영화와 사랑을 얻는다.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다. 뻔하고 단순하다. 그럼에도 이 뮤지컬이 감동적인 건 쉴 새 없는 빠른 전개와 탄탄한 구성력에 있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대부분 고양이들이다. 주인공 샤샤를 위시하여 출연하는 고양이는 전부 의인화되어 있는데 고양이의 세계와 인간 세상이 자유롭게 연결되어 있다. 왕과 영주를 비롯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어리석고 탐심이 많은 것으로 묘사된 데 비해 고양이들은 지혜롭고 리더십 있는 군상으로 표현된다. 장 피에르와 에텐셀 공주를 이어주는 것도 고양이들이다. 인간보다 더 나은 내면의 모습을 가진 고양이의 세계는 '동물-인간' 대비를 통해 더욱 극적으로 인간성의 본질을 사유하게 한다. 선함, 희생, 용기, 정직, 인내. 이런 것들 말이다.

음악적·기술적 역량 또한 이 뮤지컬이 가진 강점이다. 초대형 무대에서 펼쳐진 웅장한 스케일은 아니지만 무대와 객석을 꽉 채우고도 남는 파워가 있다. 객석으로 수월하게 전달되는 대사와 음악은 집중력을 높인다. 출연진 19명의 합창도 많은 연습을 증명하듯 퀄리티 있는 하모니를 들려준다. 특히 고양이 샤샤 역을 맡은 배우 신선우의 가창은 인상적이다. 대사 전달력이 월등히 뛰어나고 쉴 새 없이 춤추며 연기하면서도 목이 잠기거나 음정이 불안하지 않다. 특히 초고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은 뮤지컬의 음악적 요소를 보다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뮤지컬 말미 15분간 진행되는 스페셜 커튼콜은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가 가족 뮤지컬을 지향한다는 점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사진 찍는 호사를 누리게 되는데 출연진 대부분 객석으로 내려와 친절하게 응대한다. 관객의 다양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프로다움을 느낀다. 코로나19로 인해 수년간 공연업계 종사자들의 활력 있는 활동이 요원했다. 하루속히 실력 있고 프로다운 배우들이 무대에서 가감 없이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생애 처음으로 아빠, 엄마와 뮤지컬을 관람한 초등학생 두 딸도 즐겁게 관람한 듯 보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또 보고 싶다며 아우성이다. 극장이라면 치를 떠는 둘째 녀석도 정말 재미있었다며 호들갑이다. 두 아이의 눈빛에서 만족스러운 문화생활을 만끽한 여유와 기쁨을 발견한다. 벌써부터 다음 뮤지컬을 고민해야 할 상황이 됐다. 문제는 오직 지갑뿐이다. 즐거운 고민이다.

뮤지컬 '장화 신은 고양이 비긴즈'는 서울 이촌동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절찬 공연 중이다. 공연시간은 총 70분이며 인터미션은 없다. 주차는 무료(설 연휴 당시, 평일은 2,000원)다. 예매할 때 되도록 좌석을 2층보다 1층으로, 안쪽보다 통로 쪽으로 아이들을 배치하기를 추천한다. 15분 스페셜 커튼콜을 더욱 풍성히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가족 뮤지컬로서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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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부부의 세계>, <우리 이혼했어요> 등 이혼을 다룬 TV 프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 방송국에서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제작했을 것이기에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이혼을 금기시하지 않는다는 걸 자연스럽게 방증하는 현상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대한민국 조이혼율(천 명당 이혼건수)은 2.2로 세계 27위다. 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경제 발전의 속도만큼 이혼율도 급격히 올라갔다. 그에 따라 대중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이혼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크게 여유 있어졌다. 물론 이런 변화는 장단점이 있다.


나는 '가정주의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가정이며 인생이란 결국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고 보는 사람이다. 행복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견해는 틀렸다. 그는 인간의 제도와 이성으로 사회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는 그의 오만한 생각을 비웃었다. 진실은 달랐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경도된 다양한 직업정치인들이 20세기에 등장했다. 그들은 낭만적이었고 여러 가지 제도와 실험을 실행했다. 20세기에 벌어진 다양한 사회공학적 시도들은 인류를 기아, 살육,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회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 천국의 원형은 가정에 있다. 사회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가정이 천국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은 살기 좋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은 어떻게 천국이 되는가. 많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범죄학자, 교육학자들이 여기에 천착했다. 답은 간단했다. 부부관계였다. 그렇다. 행복한 가정의 필요충분조건은 단연 건강한 부부관계다. 가정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남편(아빠)과 아내(엄마)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해야 한다. 이 당위가 무너질 경우 천국이 되어야 할 가정은 지옥이 되고 사회는 고통스럽다.


이혼을 다룬 TV 프로를 보며 가장 마뜩지 않았던 건 바로 방송국의 기획 태도이다.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를 보자. 이혼 당사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이런저런 속 얘기를 나눈다. 이혼 후의 소소한 일상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진지한 모습도 비친다. 하지만 대부분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다. 자식들의 모습도 보인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이혼을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혼 당사자 만큼 가슴 아픈 사람이 누가 있겠냐 마는 미디어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기 때문에 "굳이 저런 모습까지 방송에 나와야 하나" 하는 불편함이 있다. 보는 내내 씁쓸하다.


이혼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자랑할 것도 아니다. 나는 이혼의 부정적 영향을 냉정히 우려하면서도 이혼 자체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매기는 건 지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외도(바람) 외에는 이혼은 삼가야 한다고 보는 보수적 입장이지만 이혼 당사자들의 고뇌와 결단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꼴불견은 아니다. 이혼은 어마어마한 상처다. 어느 누가 애초부터 이혼을 바랐겠는가. 살다 보니 연애할 때는 알지(보이지) 못했던(않았던) 상대의 여러 디테일이 확인될 것이다. 둘 사이 원치 않은 크고 작은 분쟁과 더불어 두 사람 바깥에서도 예기치 않은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지옥 같은 삶을 오직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 만으로 참고 산다는 건 부당하다. 그렇기에 용기 있게 이혼을 결정하고 홀로서기한 사람들을 나는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문제는 세상 일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혼의 아픔은 개인의 상처로만 끝나지 않는다. 가족과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부모에게도 불효다. 더욱이 자식이 있는 경우라면 그 영향은 고스란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물론 부양자의 피나는 노력과 성공한 재혼의 삶을 통해 자식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경우도 있다. 재혼 없이 혼자서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편부모도 있다. 그들의 노력과 성공은 찬란하다. 나는 그들의 용기와 기백을 지지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부모의 재혼은 자식의 상처를 안고 가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 콤플렉스'를 극복해 '아버지의 위치'를 찾아 나서는 존재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증상을 책과 실례를 통해 수없이 목도했다.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정태기 총장은 말한다. 유태인 자녀교육의 핵심은 부부 사이에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것임을. 자식이 부모가 대판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충격은 생사의 전쟁터에서 가장 친한 전우가 총에 맞아 내장이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본 충격과 동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하루에 600회 이상 반복되어 아이의 정서와 심리를 파괴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는 절대로 아이가 보는 앞에서 싸우지 않는다. 부모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음속에 커다란 항아리를 품는다. 그 항아리에 자아는 물론 타인과 세계, 물질과 정신, 꿈과 미래를 넣는다. 항아리가 클수록 큰 사람이 된다. 바로 그것이 소수민족 유태인이 초강대국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의 전 영역을 휩쓴 비결이라고 정 총장은 일갈한다.


내가 이혼을 다룬 TV 프로의 기획 태도를 문제 삼고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대목이다. 이혼을 둘만의 문제로 다루는 미디어의 단견이 꼴사납다. 마치 이혼을 자랑하고 미화하는 듯한 뉘앙스는 아무리 쿨하게 보려 해도 지나치다. 더욱이 그 어느 때보다 영상 및 방송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진 작금의 세태를 감안했을 때 해당 TV 프로의 조악성과 위험성은 충분히 지적할 만하다. 이혼은 죄도 아니고 감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드러내고 자랑할 것도 아니다. 가정의 파괴를 한낱 이혼 당사자의 후일담 정도로 각색하는 세간의 트렌드가 정말이지 짜증 나서 못 견디겠다. 차라리 밝고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 위한 방법론이나 이혼 이후의 상처를 치유하는 실례 등을 다루라.


주변에 이혼한 사람이 여럿 있다. 이혼 전후 상담을 해준 사례도 적지 않다. 절반은 후회한다고 말하고 절반은 시원하다고 말한다. 흔히 부부관계는 내밀한 영역이기에 어느 누구도 모르고 오직 두 사람만 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진솔하게 속 깊은 곳까지 오픈해서 상담하다 보면 이혼의 원인은 결국 '두 가지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된다. 정작 당사자들만 모를 뿐. 아니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 애써 부정하려고 할 뿐. 여기서 그 '두 가지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예민할 뿐만 아니라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다루겠다.


바야흐로 가정이 파괴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정(가족)은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소단위로서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숭고한 아이콘이다. 본질적으로 천국은 죽어서야 갈 수 있다. 그러나 가정만은 인간이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작은 천국'이다. 이혼은 가정이 파괴된 외형이다. 이혼에 따른 당사자의 고통이 적지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파괴이고 상처이고 아픔이다. 그렇기에 이혼 후(後)가 아닌 이혼 전(前)이 중요하다. 결혼은 신중해야 한다. 배우자를 고르는 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다. 결혼생활을 잘 해내는 지혜는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젊은 나이에 막 살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훈육하라. 그리고 결혼했으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라. 천국은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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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의 절대성을 주창한 뉴턴의 우주론은 2백 년 이상 세계를 지배했다. 뉴턴의 우주는 갈릴레오의 절대 시간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직선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계가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각이 짜인 직선과 직각의 세계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 강력한 망원경이 개발되면서 이런저런 오차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후 과학이 발전하고 여러 법칙이 증명되면서 뉴턴의 이론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1905년 유대계의 젊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거리가 줄어들고 시계가 느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시공간이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라 상대적인 척도에 불과하다는 걸 의미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진 올곧은 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진실은 복잡했다. 곡선과 굴곡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은 보다 머리 아프고 복잡한 세계였다. 직선의 세계에서 곡선의 우주로 인식과 세계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역사가들은 '현대(contemporary)'가 탄생했다고 떠들었다.


오랜만에 두 딸과 함께 외장 하드에 담긴 과거의 추억을 살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면이 외장 하드 3개에 걸쳐 빼곡하게 차 있었다.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흥미롭게 둘러봤다. 두 아이는 "저 아이가 정말 나야?"라며 신기한 표정으로 즐겁게 반응했다. 아이들이 자라온 모습이 오롯이 박힌 사진과 영상을 둘러보면서 시간 흐름의 입체적 신비성에 새삼 놀랐다. 지난 10년의 시간은 사진으로 볼 때는 늘어져서 보였다. 그러나 현재 내 체감은 하나의 점처럼 느껴졌다. 신기했다.


가장 놀라운 건 기시감의 인식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본 지난 추억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안다고 할 수 없는 이미지였다. 사실적·역사적으로는 명확히 일어난 사실이지만 정서적·체감적으로는 생소한 일로 여겨지는 골 때린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세월의 고단함 가운데 흐려진다고 하지만 과연 이 정도일까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느낀 시간의 역설이요 비밀이었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더 빠른 속도로 흐른다는 걸 느낀다. 여기에 아이를 키우면 그 가속력은 더 빨라진다. 정신없이 하루가 흐른다. 학창 시절에는 거북이처럼 느려서 죽을 것만 같았던 시간의 속도가 불혹의 나이가 넘으니 과히 총알같이 흐르고 있다. 인생의 선배들은 더 빠르다고 아우성이다. 가령 아버지는 "나이 칠순이 넘으니 눈 깜빡하면 일주일이 지나간다"라고 말씀하신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이 더없이 빨라진다는 걸 알기에 나이가 들수록 인생을 탐구하는 통찰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나를 겸허하게 한다.


후회도 든다.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를 것을 알았다면 그때 더 현재에 충실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을. 아이의 말을 더 집중해서 듣고 아이의 행동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할 것을. 아이와 함께 한 여러 크고 작은 일을 기억과 가슴에 아로새기며 살아갈 것을.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의 의미가 있다.


육아를 준비하고 이제 갓 육아에 입문한 초보 부모들에게 권유하겠다.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을 머리와 가슴에 꾹꾹 누르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아이의 몸에 로션을 발라주고 자장가를 불려주면서 아이를 재우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인지 잊지 않기를 바란다. 훗날 육아의 각론은 망각의 세계로 빠지고 '많이 힘들었다'는 추상적인 기억만 남는다. 사진과 영상 많이 찍고 아이와 좋은 추억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꼰대처럼 들리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이며 지혜이다. 그것에 부족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새삼 시간의 비밀에 대해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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