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차 영풍문고에 왔는데 세 분의 노인이 인문 코너에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인데 대화 모습이 자못 진지하다. 인문학을 주제로 양질의 지식을 주고받는다. 핵심 키워드는 최근 한국에서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유태계의 젊은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다. 그들의 대화는 하라리의 전작, 즉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를 위시하여 최근에 출간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얼추 일흔이 넘어 보이고 외모는 포근한 동네 어르신 인상인데 쏟아내는 말들에는 여러 인문학적 지력이 디테일하게 묻어 있다. 호기심으로 계속해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다.

   책과 지식과 배움에 어찌 나이가 있겠냐 마는 세 분 노인의 열띤 대화를 보면서 나는 강한 도전을 받았다. OECD 국가 중에서 나이가 들수록 독서율이 떨어지는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의 전체 독서율은 OECD 국가 중 평균에 속한다. 하지만 5-60세 이상의 중장년층 독서율은 최하위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국가에서는 연령이 높아질수록 독서율도 따라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나라만 나이와 독서율이 반비례한다. 45세부터 꺾이기 시작해서 5-60대 이상은 만년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나는 이러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과거 「무식한 어른과 오만한 꼰대 문화」라는 제목의 싸늘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그 칼럼에서 나는 생물학적 나이는 인간의 천부적 권력이 아님을 지적하고 경험주의의 맹신을 주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감각의 맹신이 축적된 교조화된 경험론은 모든 '꼰대주의'의 근간이다. 공부하지 않고 어른 흉내 내는 시대는 지났다. 오직 나이라는 권력만으로 훈계하고 잔소리하는 세상은 종말했다. 어른일수록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어른의 책임이자 의무라고 단언한다.

   대형서점의 인문학 코너 한복판에서 연세가 지긋하신 수수한 옷차림의 노인 몇 분이 최신 역사학계의 뜨거운 감자를 논하는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이 진지하게 책 읽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무언가의 숭고함을 느낀다.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경험(나이) 만으로 머리를 채우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통찰대로, 직관 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경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사유는 내용이 없어 공허하고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따른 개념이 없는 경험은 틀과 형식이 없어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이 편견과 오만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경험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지혜로운 노인'과 '꼰대'를 가르는 기준이다.

   별것 아닌 일에 호들갑을 떤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겠다. 하지만 어른들의 책 읽기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육십 대 이상의 노년의 책 읽기는 선술한 바 있는 한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매우 필요한 일이다. 여기에 유교-주자학적 잔재가 일소되지 않은 한국적 현상을 하나 더 보탠다면 한국의 어른들은 더 많이 읽고 공부해야 한다. 외람된 말일 테지만 어른이 무식하면 젊은이가 피곤하다. 무지(無知)도 유산이다.

   바야흐로 전 세계적으로 젊은 리더십을 요구하고 있다. 나도 그 흐름을 지지한다. 나이 듦의 궁극을 외면하자는 건 아니다. 노년의 지혜는 꼭 필요하다. 젊은 리더십이 요구될수록 역설적으로 어른의 지혜는 더 긴요하다. 그 위대한 키케로 말대로 "위대한 나라에서는 젊은이가 망친 나라를 노인들이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이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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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뭇한 소식을 전한다.

   톨스토이의 대작 <전쟁과 평화> 4부작이 드디어 완간된다는 소식이다. 출판사 문학동네의 최근 공지에 의하면 금월 24일에 마지막 4권을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로써 작년 10월에 1권이 출간된 이래 만 1년 만에 새로운 번역본이 완간되었다. 국내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 권위자인 고려대학교 박형규 명예교수의 노고와 열정으로 무려 만이천 매의 원고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의 대작이 원전에서 단 한 줄의 누락없이 완전하게 번역된 것이다. 박 교수와 편집자, 출판사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는 오래전 범우사(박형규 역)판으로 이 소설을 읽었다. 아주 오래전이라 소설의 내용과 맥락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작년 허리수술로 한 달간 요양할 기회가 있었을 때 이 소설을 다시 읽고 싶었다. 인간에 대한 환멸과 인생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고 삶과 인간에 대한 기존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린 때이기도 했다. 나에게 남은 건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책밖에 없었다. 인간과 역사 사이의 함수관계를 힘있고 거대하며 입체적으로 묘사한 <전쟁과 평화>의 장대한 한복판에 나 자신을 침잠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박형규 교수가 새롭게 번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할 수 없이 완간 때까지를 기다려오게 된 것이다.

   <전쟁과 평화>를 포기하고 읽은 소설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었다. 이 또한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소설이어서 손에 땀을 쥐고 읽어내려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문학평론가 이현우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세계문학사의 양대산맥으로서 두 작가에 의해 세계문학(소설)은 전부 덮인다"고 말한다. 즉 세르반테스 이후 우리가 '소설(小說, novel)'이라고 부르는 형태의 모든 개별성들은 두 작가의 작품으로 오롯이 커버된다는 얘기다.

   도스토옙스키과 톨스토이는 소설을 쓰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세계관 자체에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항상 삶을 얘기했고 후자는 끊임없이 죽음을 얘기했다. 전자는 정통 기독교적이며 후자는 변형 기독교적이다. 전자는 시선이 외부에서 내부로 향하며 후자는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다. 전자는 인간 내면의 디테일 속으로 끊임없이 밀고 들어가는 반면 후자는 인간을 넘어 세계와 우주의 거대함 속으로 치고 올라간다. 톨스토이의 기본 세계관은 자아에 대한 무한대의 확장이다. 그 확장 과정에서 보편 인간을 만나고 러시아를 목도하며, 종국적으로 세계(우주) 전체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다보니 나도 모르게 '거대한 것'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이는 마음의 넓이와 정신의 크기에 관한 것인데 나 자신과 세계, 그리고 신(神) 사이의 삼각관계를 보다 높은 차원의 방정식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인가. 역사란 무엇인가. 타자와 세계는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신은 얼마나 광대한 존재인가. 그리고 역사에서 그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등. 곧 마흔을 앞둔 나에게 이 장대한 소설이 어떤 울림을 선사할 것인지 자못 흥분된다.

   데카브리스트에 관한 탐구로 계획된,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을 무대로 한, 나타샤의 성장소설이자 장엄한 역사소설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완벽한 번역으로 곧 다시 읽는다. 올겨울은 '전쟁과 평화'의 한복판에 서 있을 것 같다. 지갑을 크게 열어 양장판 셋트로 지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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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자신이 시무하던 비텐베르크 성당 게시판에 "교회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주제로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이후 종교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을 뒤덮었다. 신(神)은 더이상 교황과 사제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만인의 하나님이었다. 사람들은 활자로 인쇄된 성경을 읽으며 신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자기자신의 진본을 발견해갔다. 유럽 곳곳에서 개인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졌다. 이후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 터졌고 서구사회는 근대로 진입했다.

   사실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사람은 루터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있다. 그는 루터보다 100년 앞서 부패한 성당을 맹렬히 비판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난해 로마 교황에게 파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종교개혁은 비록 실패했지만 훗날 루터를 위시한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오늘날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 외에도 유럽 여기저기서 비슷한 외침으로 종교개혁을 외친 선구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후스와 루터를 갈랐던 것일까. 다시 말해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주지하다시피 그건 바로 인쇄혁명이었다.

   후스 시대는 활자가 발명되기 전이었다. 필사의 시대였다. 모든 것을 손으로 써야 했다. 후스의 외침이 전 유럽에 퍼지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대중적으로 전달(전파)할 소통의 수단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터의 시대는 달랐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고안한 것은 15세기 중반이다. 반세기 사이 인쇄술은 독일 여러 도시에 꽤 확산된 상태였다. 다만 인쇄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인쇄업자들은 굶주렸다. 하지만 무명의 사제가 절대권위인 교황에게 맞붙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뉴스였다. 멈춰서 있던 활자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유럽에까지 확산됐다. 그외 종교개혁과 관련한 여러 논쟁들이 인쇄되었고 팔려나갔다. 유럽사회의 지력이 폭발했다. 거대한 지식의 향연이었다. 이제 유럽인들은 더이상 과거의 그들이 아니었다. 세상은 바뀌었다.

   시공간을 동양의 19세기로 돌리자. 일본 메이지 시대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라는 유명한 계몽사상가가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죽일 놈'이지만 일본에서는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본 화폐 만엔 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계몽을 촉구하며 "정신의 서구화 없이 물질의 서구화는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쓴 <학문의 권장>이라는 책은 당시 무려 300만 부나 팔려나갔다. 19세기 후반의 일본 전체인구를 3,500만 명 정도로 추산했을 때 열에 하나가 이 책을 읽은 것이다. 일본사회는 변화했다. 메이지유신은 조선의 갑신정변과 청의 양무운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비록 방향은 옳지 못했지만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했다. 요컨대 메이지유신의 힘은 바로 책의 힘이었다.

   내가 장황하게 루터의 종교개혁과 메이지유신을 거론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바로 책과 활자의 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비단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사례 외에도 인류 역사상 책의 힘을 증명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거꾸로 책을 경멸함에서 왔던 지난한 역사도 수없이 많다. 여기서 굳이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등을 거론하지는 않겠다.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분노와 짜증이 밀려오는 비극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사회에 모택동을 높게 평가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잔존해 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어떻게 모택동을 찬양할 수 있는가. 그야말로 미친놈들이다. 각설하자. 내가 강조하고 싶은 건 문자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책의 힘을 안 민족과 국가는 번영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쇠락했다. 

   뱌아흐로 영상문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모든 것이 영상으로 대체되는 '도상적 전회(iconic turn)'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VR, 사물인터넷 등 시각적인 것을 강화(강조)하는 쪽으로 인간의 소통과 문화가 변화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고 영상매체가 가진 장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문자가 가진 본래적 힘은 영상의 폭풍 속에서도 반드시 괴멸하지 않는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의사소통코드는 오직 문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궁극과 본질에서 문자를 대체할 코드는 없다. 문자만이 가진 고유한 '구체성'은 영상의 메커니즘으로는 발현해낼 재간이 없다. 즉 영상은 문자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보완하고 수식하는 수단으로서만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사이의의 일차적 커뮤니케이션 코드는 문자다. 

   다시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자.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해 여기저기서 요란하다. 반대로 혹자들은 너무 무관심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더 예민하게 느끼는 것 같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이 비단 기독교(도)만의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종교개혁이 유럽과 전 세계에 끼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이는 누구나 공부하고 공유해야 할 인류 보편의 자산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인식하게 됐고 그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볼 수 있게 했다. 바로 거기에 '문자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의 역사는 항상 문자가 전해준 역사였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책 한 권 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정신은 제자 플라톤에 의해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금의 우리가 3D게임과 아이폰X가 주는 희열에 열광하는 스마트족이라 할지라도 죽도록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책 좀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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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고 소설은 길다. 소설에도 급이 있다. 유독 거대한 소설이 있다. 여기서 '거대함'이란 단순한 분량보다는 '정신의 크기'를 말한다. 예컨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같은 작품은 인류 문학사의 가장 위대한 금자탑으로서 읽어도 읽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지만 그 독서과정이 전혀 지루하지 않은 기적의 소설이다. 등장인물의 수와 생명력, 서사적 흡입력, 시대를 관통하는 구심력, 심원한 주제의식과 독특한 작풍(作風) 등 그야말로 괴물과 같은 소설이다. 거의 모든 출판사의 세계명작전집에 반드시 들어가 있으며 다수의 사람들이 읽어본 것처럼 얘기하지만 사실 읽어본 사람이 드문. 좀 더 솔직히 말해 책 좀 읽었다는 자들이 최고의 책이라고 떠들 뿐 정작 읽는 이는 거의 없는 신비의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작년에 처음 완독했다. 허리수술을 한 뒤 집에서 요양하면서 읽은 것인데 아직도 그때 받은 감동의 여운이 가시지 않sms다. 소설을 제법 빠르게 읽는 나에게 이 소설은 꽤 긴 호흡을 요구했다. 다 읽고 나서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고 내 안에서 왜 살아야 할지를 새삼 의문하게 했다. 책의 막장을 덮은 후 멍하니 하늘을 응시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아직까지 서평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오직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이 소설이 공유하는 거대담론에 대한 명확한 주관과 도스토옙스키의 의미심장한 세계관에 대한 차분한 견해가 아직 내 머리속에서 명징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소설은 거대한 여운을 남긴다. 여운이 클수록 갈무리는 어렵다. 이는 세밀함이나 복잡함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세계의 크기'와 '의식의 확장'에 관한 문제이다. 작품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거대할 경우 스케일 자체에 압도되어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애매해지게 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은 소설이다. 소설 앞부분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 논쟁에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가문 이름이 어려워서 메모해가면서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분량이 상당하다. 민음사를 위시하여 거의 대부분의 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출간했다. 읽기도 전에 책 두께에서 먼저 주눅이 든다. 수천 페이지를 넘기는 것 자체도 곤욕이거니와 소설 기저에 흐르는 신학적, 철학적, 사상적 맥락을 붙잡고 따라가는 건 여간 험난한 작업이 아니다. 평소 꾸준한 책읽기로 기본적인 독서체력을 확보하지 않고 장편에 대한 이해(理解)와 애착을 전제하지 못한 독자라면 이 소설은 읽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옙스키 인생의 마지막 소설이다. 그는 이 소설을 쓰다가 죽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유일한 미완의 소설이자 최후의 걸작이다. 완결되지 않은 작품임에도 이 소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오직 문학성에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물간의 묘사와 갈등을 굉장히 섬세한 방식으로 그려냈는데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인간의 복합적 인격을 각각의 카테고리로 분류, 형상화한 것이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군상의 부딪힘 속에서 인간의 절대가치가 무엇이고 무너진 인간성의 회복을 신앙적, 실존적, 도덕적 선상에서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지 심오하고 묵직하게 담아낸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인간을 진정한 해방으로 이끄는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그는 인간 자유와 양면적인 본성을 억압하는 대가로 경제적 유토피아를 약속하는 당대의 어떤 이념에도 반대했다. 그는 인간 영혼의 자유와 사랑, 그리고 부활에 대한 희망을 토대로 하는 신앙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힘이라고 믿었다. 소설은 미완으로 남아 주인공 알료사가 완전한 구원에 이르는 장면까지 보여주지는 않는다. 혹자들은 이 소설의 주제를 '신에 대한 탐색'으로 해석해왔고 또 다른 혹자들은 '악의 문제'로 규정해왔다. 고전 중 가장 토론적인 소설이다. 잔인하되 웅장하고, 추악하되 숭고하며, 기이하되 선명한 소설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철학적 정수를 맛볼수 있는 실로 괴물과 같은 작품이 바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소설에 대한 소개가 길었다. 정작 하고 싶은 얘기를 하자. 얼마전 '효리네민박'이라는 종편예능에서 가수 아이유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장면이 방영되어 화제가 됐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취미로 삼아온 아이유의 입장에서 "책읽는 게 뭐가 그리 화제일까"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선술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문학적 무게와 심원성을 부인하지 못한다면 이십대 중반의 아이돌 여가수가 한가롭게 여유로운 자세로 이 소설의 책장을 넘기고 있는 모습은 단연 인상적인 것이라 하겠다. 나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책과 관련한 그녀의 여러 에피소드를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왔고 진지하게 책읽기를 탐식해왔는지 더 많이 알게 됐다. 그리고 그녀의 음악성에 관한 관찰로 내 관심은 전도(확장)됐다.

   아이유는 상당히 노래를 잘 부른다. 가창의 기술뿐 아니라 표정과 감성에 있어 도저히 이십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특색있는 운치와 기풍이 그녀에게는 존재한다. 아이유의 음악은 시대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모든 노래는 시대를 안고 태어난다. 즉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그 노래가 탄생한 시대의 감정과 겹쳐지는 것이다. 아이유의 목소리에는 그 시대를 '지금 여기의 시간'으로 끌고 오는 힘이 있다. '그 시대'와 '이 시대'가 아이유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포개지는 것이다. 이런 시대적 감수성을 가진 이십대 가수는 많지 않다. 나에게는 아이유와 로이킴 정도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감성을 가진 가수가 됐을까. 그녀보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지만 그녀와 같이 노래하는 가수는 드물다. 어린 나이에 시간과 목소리를 공명시키며 노래하는 가수는 극히 드물다. 그 나이에 얼마나 사람을 만났고 얼마나 세상을 경험했기에 그녀의 목소리에서 김광석이나 유재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무(無)'와 '여백'에 관한 공허한 감동이 느껴지는 걸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음악적 현상이 어떤 내적 본질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 나는 깊이 사유했다.

   혹 독서 때문은 아닐까. 그녀가 읽어온 수많은 소설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과 부질없는 세계에 관한 탐구가 그녀를 높은 차원의 시간세계로 인도한 동력은 아니었을까. 책을 통해 여러 인간의 모습을 진지하게 탐색함으로써,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특질의 긴장을 자신의 가슴속에 녹여놓은 게 아닐까. 어려서부터 아이유가 쌓아올린 책더미들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부여잡은 음악적 감수성의 연원을 찾아보는 건 지나친 오버일까. 내가 너무 나간 것인가. 아이유와 도스토옙스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조금 더 생각하면 제법 어울릴 수 있겠다 생각했다. 독서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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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일상에 관한 이런저런 상념을 두서없이 남긴다.

1.  19대 대통령 취임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시의성 때문인지 국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나라의 진보주의 담론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신임 대통령에게 국민들은 녹록지 않은 기대를 보내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진보'라는 말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꽉 막힌 보수꼴통인 내가 그의 정책과 이념을 지지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러나 취임 초기의 여러 신선한 모습에 박수를 아끼고 싶지는 않다. 철학과 진영이 다르다고 해서 잘한 것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려는 태도는 부당하다. 지지 여부를 떠나 지금은 힘을 실어주고 격려해줄 때다. 부디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2. 이기주 <언어의 온도>
   이기주 작가의 에세이 <언어의 온도>를 읽고 있다. 베스트셀러 1위에서 쉽사리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간 눈에 띄는 신작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작가 특유의 따뜻한 위로의 문장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외연을 계속해서 확대해가고 있는 듯하다. 가벼운 맥락의 힐링서적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이기주의 에세이는 신선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최근 말과 글로 인해 상처와 권태를 가진 내 자신의 현재성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나의 한계를 유독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나 자신을 비워야 할 때다. 이기주의 말대로, 비우는 행위는 뭔가를 덜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며 자기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 주는 것이다.

3. 책 추천
   아끼는 교회 후배가 연애와 결혼을 준비하며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간만에 서재를 훑었다. 책장 빼곡하게 들어선 책들을 살피며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사랑을 책임진다는 것.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것. 이것들은 그야말로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추할 때도 있고 고독할 때도 있다. 그러나 기적의 길이기도 하다. 이 고차함수의 길을 묵묵하게 관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삶과 사랑과 사람은 동의어'라는 진리에 자신의 현존을 맡길 수 있게 된다. 부디 후배녀석이 뜨겁게 사랑하며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4. 육아
   최근 둘째를 많이 혼냈다. 둘째 특유의 심통기질이 최극단의 지점에 도달한 듯하다. 엄마와도 매일 전쟁을 치른다. 훈육은 엄마의 영역이지만 가끔 아이가 도를 넘어설 때에는 참지 못하고 개입하곤 한다. 인내가 부족했다. 부끄럽다. 물론 두 딸이 너무 예쁘다. 하지만 어떨 때는 한없이 밉기도 하다. 아이는 정말 내 맘대로 크지 않는다. 육아와 훈육은 부모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이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으나 현실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난 아직 멀었다. 부족한 아빠다.

5. 구분선
   최근 객관과 주관의 철학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사실과 주관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설정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만의 주관과 견해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사실관계 자체를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명확한 사실을 자신의 주관적 구성물로 대체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몹시 불편하다. 그들은 사실에 관한 명확한 텍스트를 제시해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한나 아렌트 식의 '악의 평범성'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다. 우리 주변 곳곳에 내밀한 방식으로 숨어 있다.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을 기각한 논거는 바로 대전제의 오류였다. 대전제가 잘못되면 과정과 결론은 공히 거짓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건 좋은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은 우리사회가 밝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분선'을 인정하지 않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에릭 홉스봄의 말대로 사실과 허구를 가르는 명백한 구분선은 존재한다. 개인이 분출하는 모든 형태의 다양성도 바로 이 구분선 위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의견은 자유롭되 사실은 신성한 것이다. 고민은, 그 구분선을 지적하는 순간 관계의 균열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부분이다.

6. 진정한 남자
   "진정한 남자는 열등감을 갖지 않습니다" 라디오에서 전여옥 작가의 말이 흘러나온다. 정치인은 정치를 그만둘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 같다. 전여옥도 그렇고 유시민도 그렇고 현실정치를 그만두고 작가라는 지식인의 본업으로 복귀하면서 내공과 매력을 더욱 찬연하게 뿜어내는 듯하다. 한때 거침없는 독설로 주변에 생채기를 많이 남긴 전여옥의 말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인 명언이다. 그렇다. 열등감은 남자의 본성과 양립하지 않는다. 결코 함께 설 수 없다. 형편없는 남자만이 열등감을 가진다. 남자는, 아니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열등하지 않다.

7. 고전 원서
   외국고전을 읽다 보면 작품과 문장이 너무 좋아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원서로 읽고 싶은 욕망이 샘솟음치는 것이다. 대표적 언어가 독일어와 러시아어다. 나에게 독일은 괴테의 나라고 러시아는 톨스토이의 나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독일어 원서로 <안나 카레리나>를 러시아 원서로 읽을 수 있다면, 딱 한 번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아, 인간의 타락이여. 바벨탑의 비극이여. 나의 무지함이여. 천성의 게으름이여.

8. 인간의 품격
   "품질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문화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말이다. 이 말을 인간에게 적용해서 다음과 같이 패러디해볼 수 있겠다. "인격은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그렇다. 사람의 품격이란, 과거와 오늘이 없고 보수와 진보가 없다. 인격의 시제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훌륭한 인격은 신(神)을 닮아가는 거룩한 여정 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거추장스러운 형용수사로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생이란, 선하고 겸손하게,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다.

9. 독서 권태
   요새 들어서 책읽기에 흥미를 잃고 있다. 책읽기에 권태가 생기니 자연스럽게 글쓰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간 많은 책을 읽어왔다고 자부하지만 독서를 통해 얻는 앎과 지혜는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식이 있다. 반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다. 나이가 들수록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깨달음에 봉착하곤 한다. 그럴수록 책더미에서 해방되는 것이 참 지혜를 알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과 나 자신 사이의 적절한 긴장관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책과 지식을 떠나 사람과 신앙을 돌아보자.

  
   삶은 고되지만 참으로 역동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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