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부부의 세계>, <우리 이혼했어요> 등 이혼을 다룬 TV 프로가 인기를 끌고 있다. 방송국에서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제작했을 것이기에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이혼을 금기시하지 않는다는 걸 자연스럽게 방증하는 현상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2019년 통계청이 발표한 대한민국 조이혼율(천 명당 이혼건수)은 2.2로 세계 27위다. 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한다. 경제 발전의 속도만큼 이혼율도 급격히 올라갔다. 그에 따라 대중의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이혼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크게 여유 있어졌다. 물론 이런 변화는 장단점이 있다.


나는 '가정주의자'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가정이며 인생이란 결국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고 보는 사람이다. 행복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고 믿는 보수주의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의 견해는 틀렸다. 그는 인간의 제도와 이성으로 사회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역사는 그의 오만한 생각을 비웃었다. 진실은 달랐다. 마르크스의 이론에 경도된 다양한 직업정치인들이 20세기에 등장했다. 그들은 낭만적이었고 여러 가지 제도와 실험을 실행했다. 20세기에 벌어진 다양한 사회공학적 시도들은 인류를 기아, 살육,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사회는 인류를 구원하지 못한다. 천국의 원형은 가정에 있다. 사회가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가정이 천국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은 살기 좋아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은 어떻게 천국이 되는가. 많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범죄학자, 교육학자들이 여기에 천착했다. 답은 간단했다. 부부관계였다. 그렇다. 행복한 가정의 필요충분조건은 단연 건강한 부부관계다. 가정이 화목하기 위해서는 남편(아빠)과 아내(엄마)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존중해야 한다. 이 당위가 무너질 경우 천국이 되어야 할 가정은 지옥이 되고 사회는 고통스럽다.


이혼을 다룬 TV 프로를 보며 가장 마뜩지 않았던 건 바로 방송국의 기획 태도이다. TV조선 <우리 이혼했어요>를 보자. 이혼 당사자들이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이런저런 속 얘기를 나눈다. 이혼 후의 소소한 일상이 주를 이루지만 가끔 진지한 모습도 비친다. 하지만 대부분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다. 자식들의 모습도 보인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이혼을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혼 당사자 만큼 가슴 아픈 사람이 누가 있겠냐 마는 미디어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기 때문에 "굳이 저런 모습까지 방송에 나와야 하나" 하는 불편함이 있다. 보는 내내 씁쓸하다.


이혼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자랑할 것도 아니다. 나는 이혼의 부정적 영향을 냉정히 우려하면서도 이혼 자체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매기는 건 지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외도(바람) 외에는 이혼은 삼가야 한다고 보는 보수적 입장이지만 이혼 당사자들의 고뇌와 결단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꼴불견은 아니다. 이혼은 어마어마한 상처다. 어느 누가 애초부터 이혼을 바랐겠는가. 살다 보니 연애할 때는 알지(보이지) 못했던(않았던) 상대의 여러 디테일이 확인될 것이다. 둘 사이 원치 않은 크고 작은 분쟁과 더불어 두 사람 바깥에서도 예기치 않은 갈등이 발생할 것이다. 지옥 같은 삶을 오직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명제 만으로 참고 산다는 건 부당하다. 그렇기에 용기 있게 이혼을 결정하고 홀로서기한 사람들을 나는 진심으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문제는 세상 일이 내 맘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혼의 아픔은 개인의 상처로만 끝나지 않는다. 가족과 주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부모에게도 불효다. 더욱이 자식이 있는 경우라면 그 영향은 고스란히 아래로 흘러내린다. 물론 부양자의 피나는 노력과 성공한 재혼의 삶을 통해 자식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는 경우도 있다. 재혼 없이 혼자서 자식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편부모도 있다. 그들의 노력과 성공은 찬란하다. 나는 그들의 용기와 기백을 지지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부모의 재혼은 자식의 상처를 안고 가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 콤플렉스'를 극복해 '아버지의 위치'를 찾아 나서는 존재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증상을 책과 실례를 통해 수없이 목도했다.


치유상담대학원대학교 정태기 총장은 말한다. 유태인 자녀교육의 핵심은 부부 사이에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것임을. 자식이 부모가 대판 싸우는 모습을 지켜본 충격은 생사의 전쟁터에서 가장 친한 전우가 총에 맞아 내장이 터져 나오는 모습을 본 충격과 동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하루에 600회 이상 반복되어 아이의 정서와 심리를 파괴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태인 부모는 절대로 아이가 보는 앞에서 싸우지 않는다. 부모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마음속에 커다란 항아리를 품는다. 그 항아리에 자아는 물론 타인과 세계, 물질과 정신, 꿈과 미래를 넣는다. 항아리가 클수록 큰 사람이 된다. 바로 그것이 소수민족 유태인이 초강대국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등의 전 영역을 휩쓴 비결이라고 정 총장은 일갈한다.


내가 이혼을 다룬 TV 프로의 기획 태도를 문제 삼고 강하게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대목이다. 이혼을 둘만의 문제로 다루는 미디어의 단견이 꼴사납다. 마치 이혼을 자랑하고 미화하는 듯한 뉘앙스는 아무리 쿨하게 보려 해도 지나치다. 더욱이 그 어느 때보다 영상 및 방송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진 작금의 세태를 감안했을 때 해당 TV 프로의 조악성과 위험성은 충분히 지적할 만하다. 이혼은 죄도 아니고 감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당히 드러내고 자랑할 것도 아니다. 가정의 파괴를 한낱 이혼 당사자의 후일담 정도로 각색하는 세간의 트렌드가 정말이지 짜증 나서 못 견디겠다. 차라리 밝고 건강한 가정을 세우기 위한 방법론이나 이혼 이후의 상처를 치유하는 실례 등을 다루라.


주변에 이혼한 사람이 여럿 있다. 이혼 전후 상담을 해준 사례도 적지 않다. 절반은 후회한다고 말하고 절반은 시원하다고 말한다. 흔히 부부관계는 내밀한 영역이기에 어느 누구도 모르고 오직 두 사람만 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말 진솔하게 속 깊은 곳까지 오픈해서 상담하다 보면 이혼의 원인은 결국 '두 가지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비밀을 알게 된다. 정작 당사자들만 모를 뿐. 아니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 애써 부정하려고 할 뿐. 여기서 그 '두 가지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예민할 뿐만 아니라 많은 지면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별도로 다루겠다.


바야흐로 가정이 파괴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가정(가족)은 인간 공동체를 지탱하는 최소단위로서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온 숭고한 아이콘이다. 본질적으로 천국은 죽어서야 갈 수 있다. 그러나 가정만은 인간이 살아서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작은 천국'이다. 이혼은 가정이 파괴된 외형이다. 이혼에 따른 당사자의 고통이 적지 않겠지만 어찌 되었든 파괴이고 상처이고 아픔이다. 그렇기에 이혼 후(後)가 아닌 이혼 전(前)이 중요하다. 결혼은 신중해야 한다. 배우자를 고르는 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다. 결혼생활을 잘 해내는 지혜는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 그렇기에 젊은 나이에 막 살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훈육하라. 그리고 결혼했으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라. 천국은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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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의 절대성을 주창한 뉴턴의 우주론은 2백 년 이상 세계를 지배했다. 뉴턴의 우주는 갈릴레오의 절대 시간과 유클리드 기하학의 직선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계가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각이 짜인 직선과 직각의 세계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 강력한 망원경이 개발되면서 이런저런 오차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후 과학이 발전하고 여러 법칙이 증명되면서 뉴턴의 이론은 수정이 불가피했다.


1905년 유대계의 젊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거리가 줄어들고 시계가 느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시공간이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라 상대적인 척도에 불과하다는 걸 의미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진 올곧은 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진실은 복잡했다. 곡선과 굴곡으로 이루어진 시공간은 보다 머리 아프고 복잡한 세계였다. 직선의 세계에서 곡선의 우주로 인식과 세계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역사가들은 '현대(contemporary)'가 탄생했다고 떠들었다.


오랜만에 두 딸과 함께 외장 하드에 담긴 과거의 추억을 살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여러 장면이 외장 하드 3개에 걸쳐 빼곡하게 차 있었다.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흥미롭게 둘러봤다. 두 아이는 "저 아이가 정말 나야?"라며 신기한 표정으로 즐겁게 반응했다. 아이들이 자라온 모습이 오롯이 박힌 사진과 영상을 둘러보면서 시간 흐름의 입체적 신비성에 새삼 놀랐다. 지난 10년의 시간은 사진으로 볼 때는 늘어져서 보였다. 그러나 현재 내 체감은 하나의 점처럼 느껴졌다. 신기했다.


가장 놀라운 건 기시감의 인식에 관한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본 지난 추억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안다고 할 수 없는 이미지였다. 사실적·역사적으로는 명확히 일어난 사실이지만 정서적·체감적으로는 생소한 일로 여겨지는 골 때린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세월의 고단함 가운데 흐려진다고 하지만 과연 이 정도일까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느낀 시간의 역설이요 비밀이었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이 더 빠른 속도로 흐른다는 걸 느낀다. 여기에 아이를 키우면 그 가속력은 더 빨라진다. 정신없이 하루가 흐른다. 학창 시절에는 거북이처럼 느려서 죽을 것만 같았던 시간의 속도가 불혹의 나이가 넘으니 과히 총알같이 흐르고 있다. 인생의 선배들은 더 빠르다고 아우성이다. 가령 아버지는 "나이 칠순이 넘으니 눈 깜빡하면 일주일이 지나간다"라고 말씀하신다. 100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인생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이 더없이 빨라진다는 걸 알기에 나이가 들수록 인생을 탐구하는 통찰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나를 겸허하게 한다.


후회도 든다.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흐를 것을 알았다면 그때 더 현재에 충실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을. 아이의 말을 더 집중해서 듣고 아이의 행동에 더 적극적으로 반응할 것을. 아이와 함께 한 여러 크고 작은 일을 기억과 가슴에 아로새기며 살아갈 것을.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한 것에 대한 후회보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의 의미가 있다.


육아를 준비하고 이제 갓 육아에 입문한 초보 부모들에게 권유하겠다. 아이와 함께 한 시간을 머리와 가슴에 꾹꾹 누르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아이를 목욕시키고 아이의 몸에 로션을 발라주고 자장가를 불려주면서 아이를 재우는 일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인지 잊지 않기를 바란다. 훗날 육아의 각론은 망각의 세계로 빠지고 '많이 힘들었다'는 추상적인 기억만 남는다. 사진과 영상 많이 찍고 아이와 좋은 추억 많이 만들기를 바란다. 꼰대처럼 들리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진실이며 지혜이다. 그것에 부족했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새삼 시간의 비밀에 대해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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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네이버에서 가장 큰 북 카페의 서울모임을 진행했을 때의 일이다. 순수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부터 작가 지망생까지 책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정적이고 까칠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였다. 정식 모임 후 회식자리에서 가장 자주 안줏거리가 된 건 소설가 공지영이었다. 그녀에 대한 호오(好惡)는 유독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나는 호(好)의 입장이었고 항시 소수였다. 다수의 공격은 매서웠고 광활했다. 과히 지독한 논쟁이었다. 밤을 새우며 공지영 문학을 토론했던 그때가 가끔은 그립다.

 

공지영의 신작이 출간됐다. 응당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신간 『먼 바다』는 첫사랑을 소재로 한 공지영의 장편소설이다. 아직도 작가 개인을 철저히 배제한 완벽한 3인칭 소설을 쓰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최근에 읽은 한국소설 중 탑이다. 최근 작가를 둘러싼 시끄러운 뉴스를 단박에 잠재울 만큼 소설 자체는 끝내준다. 공지영은 소설가일 때 가장 빛나는 것 같다.

 

오래간만에 그녀와 카톡을 주고받았다. 10년 전이다. 모 포털사이트에서 주관한 큰 규모의 시상식이 끝난 뒤 그녀와 나는 서초동에서 술자리를 함께 했다. 여러 안건에 대한 솔직하고 가식 없는 그녀의 아우라를 긍정적으로 기억한다. 어마어마한 주량에 놀랐던 것도 기억한다. 이후 둘은 작가와 독자라는 전형적인 관계로 돌아와 지금까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왔다. 최근 그녀가 많이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고통과 외로움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적 동기가 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신작은 정말 재미있고 훌륭하다. 자세한 건 내일 오전에 올릴 서평으로 갈음하겠다.

 

소설가 공지영의 삶과 문학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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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두 딸과 TV로 월트디즈니의 명작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 2>를 시청했다. 극장에서 이미 본 영화였지만 케이블 TV 더빙판으로 다시 볼 기회여서 즐겁게 시청했다. 2편은 1편과 결이 달라 아이들과 함께 보면서 전작과의 차이점을 설명해 주었다. 여자아이들이 워낙 좋아한 영화이기에 두 딸은 아빠의 분석을 흥미롭게 경청했다. 내가 평가한 <겨울왕국> 시리즈는 이렇다. 1편이 동생 안나의 영화였다면 2편은 언니 엘사의 영화였다. 내가 느낀 건 그랬다.

 

2편을 보면서 '엘사가 이제 진정한 주인공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사실 <겨울왕국 2>는 엘사의 독무대라 할 정도로 엘사 중심의 영화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머리를 풀어헤치며 '렛 잇 고(Let it go)'를 부른 1편의 엘사보다 종횡무진 자신의 진본을 찾아 나선 2편의 엘사가 나에게는 더욱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그래서인지 2편을 시청하면서 내가 유독 엘사에 대한 매력을 자주 표현했던 것 같다. 그랬더니 둘째 딸이 "내 영어 이름이 엘사(Elsa)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했다. 아빠가 영화를 보면서 특정 인물을 한없이 칭찬하니 둘째 딸은 자신의 영어 이름에 아쉬움을 가지며 본인의 솔직한 감정을 말한 것이리라.

 

사실 그랬다. 몇 년 전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영어 이름을 작명해달라고 했을 때 아내와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첫째 딸의 영어 이름은 '벨(Belle)'이다. 당시 실사로 재개봉한 영화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에서 엠마 왓슨이 맡은 여주인공 벨의 매력이 우리 가족 모두를 적잖이 경도시켰기 때문이다. 문제는 둘째 딸의 영어 작명이었다. 둘째는 엘사로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워낙 흔한 이름이기도 했고 1편에서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우리 부부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전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여주인공 '안나(Anna)'를 선택했다. 그래서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은 안나가 됐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안나는 인류 문학사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치명적인 인물로 꼽힌다. 나는 톨스토이의 불멸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가 보여준 진심에 대한 자유와 극한의 생명력을 긍정하며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문제는 둘째 딸의 이해(理解)에 있었다. 둘째는 자신의 영어 이름 안나를 톨스토이의 안나가 아닌 월트디즈니의 안나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겨울왕국 2>를 보며 엘사를 거듭 상찬한 아빠의 모습에서 무언가 마뜩잖음과 결핍을 느낀 것이다. 솔직히 둘째 딸이 "내 영어 이름이 엘사(Elsa)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곧바로 아무 답변도 주지 못했다. 피상적으로 <겨울왕국> 시리즈의 주인공은 분명히 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반전이 일어났다. 잠자코 있던 첫째 딸이 엘사보다 안나가 더 대단한 존재라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더 놀랍다. "안나는 초능력(마법) 없이도 왕이 되었기 때문에 엘사보다 더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결코 생각지 못한 한방이었다. 첫째 딸의 해석과 웅변에 나는 잠시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 항시 비범함은 범상함을 전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비로움을 쫓는다. 기적은 현실과 괴리되지만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영원불변한 욕망이다. 많은 사람들이 엘사에 환호한 것은 그녀의 인간 됨보다 인간 되지 않은 초월성을 선망한 것이리라. 엘사의 강력한 마법과 초능력, 그리고 범상하지 않은 판타지적 카리스마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몽롱하고 화려한 미모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궁극일 것이다. 하지만 엘사에 가려진 안나의 매력을 우리는 너무 소홀히 감상해왔다. 첫째 딸의 말대로 특별한 능력 없이 오직 인간적인 근거만으로 왕이 된 안나의 매력에 대해 우리는 너무 간과해왔다. 반추해보면 인간적 관점에서 고도의 정신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항상 일관되게 현실을 긍정한 캐릭터는 안나였다. 나는 입장을 바꾸었다. <겨울왕국> 시리즈의 진정한(내재적) 주인공은 언니 엘사가 아닌 동생 안나였다는 것으로.

 

안나는 궁극적으로 <겨울왕국>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다. 1편에서 본격적으로 이야기의 전환을 이루는 부분은 안나가 엘사의 장갑을 벗기면서 엘사의 정체가 탄로 나고 그 충격으로 엘사가 산으로 도망치는 장면부터다. 그 유명한 엘사의 '머리 풀어 헤친 <렛 잇 고>'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그때 엘사를 찾기 위한 안나의 여정이 시작되고 두 캐릭터의 내면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 안에서만 지내며 외부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엘사와는 달리 안나는 적극적으로 부딪히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밝고 건강한 정신으로 언제나 당당함을 유지한 안나의 내면은 자아에 구속된 듯 보이는 엘사의 소극성과 대비되며 영화의 중후반을 이끌어가는 동력이 된다. 종국적으로 안나는 진정한 사랑만이 안나와 아렌델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낸다.

 

2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숨을 걸고 정령들을 깨워 마법 하나 없이 댐을 부수어 얼어버린 엘사를 녹여낸 것도 안나였다. 열정적인 사랑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모두를 구원하고 상황을 정리하는 건 언제나 안나였다. 그 어떤 마법과 초능력도 없이 말이다. 드레스 변신 장면과 메인 테마곡이 모두 엘사에게 돌아가서 비주얼적으로 대중적 매력에 엘사보다 못하다는 평을 받지만 인간 정신의 고결한 승리와 가치라는 면에서 안나는 항시 엘사를 압도했다. 그렇기에 결국 2편 말미에서 진정한 아렌델의 왕으로 등극하는 게 아니겠는가. 안나의 왕 등극 장면은 월트디즈니의 연출력이 만들어낸 위대한 극작술의 극치였다. 결국 중요한 건 현실성이다. 산타클로스는 신비롭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크린(영화)에서 벗어나 냉정하게 우리네 삶의 현실로 돌아왔을 때 엘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안나는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안나의 진정한 매력인 것이다.

 

둘째 딸의 오해, 즉 톨스토이의 안나와 월트디즈니의 안나가 괴리한 지점에서 이렇게 깊은 사유를 뽑아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이는 전적으로 두 딸의 공이다. 가끔 아이들의 언어 가운데 신(神)의 터치를 엿볼 때가 있다. 특히 첫째 딸의 워딩에 가끔 전율을 느끼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 됨의 숭고함에 압도된다. 어른스럽다는 건 성숙하다는 의미지만 동시에 그만큼 때가 묻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관찰과 해석을 통해 현상에 가려진 본질을 천착할 수 있다. 태도는 어른처럼 성숙한 외연을 갖되 생각은 아이들처럼 단순하고 순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어름 됨은 완성된다고 믿는다. <겨울왕국>의 진정한 주인공 안나에 대한 아이들의 관찰을 통해 그것을 깨닫는다. 둘째 딸의 영어 이름 '안나(Anna)'가 더없이 빛나는 순간이다. 가슴 벅찬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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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가 예전 같지 않다. 양과 질 모두 총각 때와는 전혀 다른 독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아이들이 좀 크면 방해받지 않고 독서를 즐길 수 있겠지, 생각한 건 큰 오산이었다. 아이들의 성장과는 무관하게 내 스스로 점점 나이를 먹어가며 체감하는 시간의 지독한 부족 현상이 내 독서를 방해하는 궁극의 요인이었다. 한 달에 스무 권씩 읽어냈던 좋은 시절은 끝났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내 나이 마흔둘이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요컨대 꼭 필요한 책만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2020년에 무조건 읽어야 할 책을 두 편 골랐다. 첫 번째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과거 한차례 읽기를 시도했다가 중도에 포기한 이력이 있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기보다 집중하기 힘든 프루스트 특유의 미로찾기 식 만연체에 초반부터 녹다운 됐던 기억이 선연하다. 가령 잠들기 전 뒤척이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30페이지를 할애한다. 오죽하면 프루스트의 동생이 "이 소설을 읽으려면 중병이 들거나 한쪽 다리가 부러져야만 한다"라고 말했겠는가. 여하튼 새로운 번역으로 곧 재도전하려 한다. 내가 이 난해한 소설을 다시 읽으려 하는 이유는 시간과 인생 사이의 고밀한 함수성을 프루스트 식 조망으로 통찰해보기 위함이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의 의미를 보다 폭넓게 천착해보려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장 매끄러운 번역으로 평가받는 김희영 교수 번역(민음사 판)은 아직 완간이 되지 않아 古 김창석 시인의 완역본 세트(10권)를 물망에 올려놓는다.

 

   또 다른 책은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이다. 소설가 박경리가 그토록 추천해 마지않았다고 알려진 유명한 소설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읽기를 갈망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땅한 번역본을 찾지 못해 차일피일 해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가볍게 완독한 작년 말의 기억을 긍정하며 또다시 러시아 대작에 침잠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소설에 잘 감응하는 편이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 파스테르나크, 솔제니친 등 지금까지 만난 러시아 작가들은 모두 내 기호와 부합했다. '방대한 서사를 유려한 문체로 힘 있게 이끌어가는 힘'이야말로 러시아 문학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서문화사 판으로 만날 예정이다.

 

   고전은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다. 시대가 흐르고 문화가 바뀌어도 변질되지 않는 거대한 산맥 말이다. 작품 자체의 스케일이 크고 웅장할수록 독자로서 받는 정신적 확장의 사이즈가 커진다. 큰 작품이 큰 독자를 만든다. 2020년에는 시공간은 물론 정신과 의식의 확대 영역에서 굉장히 큰 사람이 되고 싶다. 크게 생각하고 크게 사랑하고 크게 꿈꾸고 크게 일하고 싶다. 내가 두 편의 고전을 예약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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