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인생을 아직 덜 살아서일까. 난 왜 쿤데라 선생의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걸까. 그의 말대로 과연 하찮은 것이 진지하고 무겁고 특별한 것들을 본질적인 선상에서 전복해낼 수 있을까. 텍스트의 분량과 화법의 속도는 전작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인 『농담』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일관되게 포착하고 있는 '가벼움'의 철학은 신간에서도 여지없이 연장된다.

   그는 왜 항시 가벼움과 무의미함을 삶의 정형성 전면에 배치하는 걸까. 사실 '의미 없음', '보잘 것 없음', '하찮음', '초라함', '가벼움' 등은 쿤데라 문학을 관통하는 핵심코드다. 기승전결 없이 막 써내려간 듯 보이는 짧은 소설을 통해 쿤데라는 무의미한 것의 의미, 가치 없는 것의 가치를 설파한다. 쿤테라는 결국 인간의 고독과 삶이 아무런 의미 없음의, 보잘 것 없음의 축제이며, 이 '무의미의 축제'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시대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고백컨대 쿤데라의 소설은 매번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영원성의 무거움과 일회성의 가벼움을 역설적으로 대비시켜 치환해버리는 쿤데라 문학의 골격은 니체식 시간관념의 문학적 재현이자 관통이다. 더 나아가 헤겔의 분해이자 쇼펜하우어의 소환이다. 무의미하고 가치 없는 일상의 나날이 그 자체로 축제라고 규정하는 그의 일관된 논변에 나는 여전히 고개를 젓는다. 혹시 그는 '지루함'과 '가벼움'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노벨상을 목전에 둔 노작가의 거대한 진동이 좀처럼 나에겐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내가 좋아하는 하루키의 텍스트에서 쿤데라의 잔영(殘影)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무언가의 모호성이 추동하는 강한 전율을 느끼곤 한다. 내가 여전히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유일한 이유다.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쿤데라는 피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기독교인의 삶에 가장 기본이 되는 건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이다. 최근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신약성서의 네 성경을 필사하는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필자의 와이프도 밤마다 두 아이를 재운 후 열심히 성경을 쓰고 있다.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가.

   그러나 필자가 이번달에 특별히 탐독하고 있는 성경은 옥중서신이 배치된 신약이 아니라 구약의 한복판에 있는 열왕기서다. 금월에는 열왕기상·하를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열왕기서는 솔로몬 때부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최후 주전 586년까지, 약 400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42명의 왕들, 북방 이스라엘의 19명, 남방 유다의 23명과 12명의 선지자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아합, 시드기야 같은 쓰레기 같은 군주들이 많았지만, 요시야나 히스기야 같은 거룩하고 탁월한 지도자들도 있었다.

   열왕기상·하는 시작과 끝을 극단적으로 대조한다. 시작은 다윗이 세운 광대한 나라에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여 찬란한 성전을 건축하고,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광활한 영토를 장악하여, 이스라엘 왕국 역사상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장면이다. 반면 열왕기의 끝은 성전이 훼파되고, 나라가 멸망하고, 왕이 두 눈이 뽑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장면이다. 400년이 채 안 되는 이스라엘-유다 왕국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 중심의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극단적이고도 진지하게 해부한다.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서로 지그재그로 비교하면서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다. 즉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기사를 동시대 유다 왕들의 통치 기사의 배경 아래서 볼 수 있게 했다. 전반적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은 대부분 악했다. 특히 북이스라엘의 왕들은 누가 하나님을 더 열받게 할까 내기하는 수준으로 우상숭배와 악행만을 일삼은 역사였다. 한결같이 전부 쓰레기들이다.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에는 의외로 선한 왕들이 많이 나왔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사를 두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로 기술한 것이다.

   필자가 이 시점에서 열왕기서를 탐구하려고 한 목적은 두 가지다. 첫째 작금의 한국정치가 가진 심각한 병적증세를 목도하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된 리더십의 본질을 강구하기 위함이다. 둘째 가정에서는 가장으로, 교회에서는 집사와 회장으로, 회사에서는 과장이라는 직급으로 위치한 내 책임의식을 점검하면서 올바른 리더자가 되기 위한 하나님중심주의적 방법론을 천착하기 위함이다. 요컨대 현재의 나와 우리를 진단하고 부재와 굴곡에 직면한 내·외재적 리더십의 위기를 극복하기를 소원하는 탐구상의 여정인 것이다.

   열왕기서는 솔로몬의 치세로 시작된다. 고백컨대 필자는 솔로몬을 정말 싫어한다. 솔로몬에 대한 필자의 비호감은 다소 각별한 데가 있다. 성경을 읽으면서 솔로몬만큼 필자를 짜증나게 한 인물도 없다. 솔로몬의 죄가 집대성된 열왕기상 11장에 이르러서는 화를 참지 못해 펜으로 성경책의 일부분을 후벼 판 적도 있다. 일부 사람들이 솔로몬의 위대성을 말한다. 그러나 필자는 인정하지 못하겠다. 위대한 지혜도, 거대한 성전 건축도, 전무후무한 부귀영화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솔로몬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지 솔로몬이 잘나서 누린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솔로몬이 뭐가 그리 위대하단 말인가.

   솔로몬은 열왕기상·하에서 가장 핵심적 모형이 되는 인물이다. 집권 초반기에 그토록 지혜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다가 후반기로 가면서 심하게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이 타락하게 된 가장 실제적인 배경은 결국 여자 문제였다. 인류 역사는 권력, 돈, 섹스 ― 이 세가지가 항시 한 셋트로 작동한다는 것을 명징히 보여준다. 하나에 걸리면 다른 두 개가 붙어 오는데, 처음엔 그것이 특권 같지만 나중엔 무서운 독이 되어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솔로몬은 이방 왕비들을 많이 들였고, 그들을 위해 이방 신당을 짓고, 노예제도와 무거운 세금 부과로 백성을 힘들게 했다. 솔로몬의 집권 후반기는 하나님의 분노를 얼마나 끌어올릴까 궁리하는 악의 퍼포먼스와 같다. 솔로몬의 리더십은 후세 왕들이 답습하는 악행 패턴으로 굳어 버려서 두고두고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

   필자가 솔로몬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권력, 부, 여자 ― 로 연결되는, 소위 문명사적 유구성을 띤 남자의 약점을 과히 입체적으로 포괄하여 죄악의 불길을 타올린 데 있다. 솔로몬의 모습에서 나는 현대사회가 직면한 가장 실제적이고 악질적인 죄의 형태를 직시한다. 솔로몬의 죄는 죄악이 관영한 이 시대에 모든 남자들에게 열려있는 어두운 고민과 유혹의 본성적 패착이다. 하나님중심주의의 삶에 대한 현란한 일탈이요 치졸한 반역이며 기괴한 공격이다. 남자의 가장 약한 아킬레스건 가운데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그러나 치명적으로 내면화된 추악한 죄의 형상이 솔로몬의 우상숭배의 인과관계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필자가 솔로몬을 싫어하는 이유다.

   아! 솔로몬! 최소한 솔로몬과 같은 리더는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사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다. 우리 정치의 모습에서, 가끔은 필자 자신의 모습에서 솔로몬의 모습을 본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고 전율을 느낀다. 땅을 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와 필자 자신의 리더십 속에서 솔로몬의 방식이 사라지고 다윗의 방법이 세워져야 한다. 솔로몬은 아버지를 잘 만났다.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의 발꿈치 때만도 따라오지 못했다. 다윗과 솔로몬 ― 두 사람의 리더십의 궁극적인 대조는 차후 별도의 지면을 통해 논설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사실 솔로몬을 까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텍스트가 필요하다.

   작금의 국가적 혼란과 필자 자신의 위치를 바라보며 진정한 리더십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사유한다. 솔로몬의 리더십은 곤란하다. 다윗의 왕권이 세워져야 한다. 국가, 사회, 가족 등 모든 인간 공동체의 리더십은 하나님 왕권의 파생품이다. 바로 이 지점에 열왕기서가 주는 교훈이 있다. 필자가 열왕기서를 읽는 이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날씨가 무덥다. 이제 본격적인 휴가철에 접어들었다. 이에 휴가지에서 읽을 만한 책을 아래와 같이 추렸다. 고전과 신간 중에서 시기적으로 적확성을 띤 열 권(여덟 편)의 책을 선정했다. 소설이 한 편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 고전과 인문학을 택했다. 무겁긴 하지만 현실 한국을 조망하는데 이 책들만큼 긴요한 것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디 휴가철에 책을 벗삼아 무더위를 식히기를 기원한다.



 


『이방인』 - 알베르 카뮈, 민음사

말이 필요없다.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다. 서양 소설사는 <이방인> 전과 후로 나뉜다.
<이방인>을 읽지 않고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문학을 제대로 관통할 수 없다. 또한 '의식'이나 '주체'를 탐구하는 시대가 끝나고 '규칙'이나 '구조'를 천착하는 시대가 도래한 사상사의 과도기적 현상을 이해할 재간이 없다. 카뮈는 이 얇은 소설에서 인간 부조리의 본성을 진지하게 질문한다. 지난 4월 '세월호 사건'은 우리사회에 내재한 부조리를 극명하게 보여준 비극이다. 개인과 사회는 어떤 긴장과 갈등으로 얽혀있는가. 과연 부조리란 무엇인가. 최근 번역논쟁에 휘말릴 만큼 작품의 질적 밀도도 최고도에 오른 작품이기에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한다.



『노예의 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나남

케인즈의 대척점에 있었던 경제학자인 하이에크의 명저다. 좌파든 우파든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힌다. 사회주의적 기제는 반드시 집단주의(collectivism)로 귀결되며 이것이 개인을 어떻게 노예의 삶으로 귀속시키는지 경제·도덕·법·철학 등의 다양한 부문에서 논증했다. 하이에크는 이 책을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집필했다. 대중이 읽기에 어렵지 않게 썼다. 최근 우리사회의 모습에서 방향성 잃은 집단주의의 단면을 발견하는 건 비단 나만일까.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이 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념과 당파를 불문하고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한나 아렌트, 한길사

교회 청년부 특강 시 인용한 책이다. 구조적 무지가 만들어내는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고발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유태인 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이 전범재판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을 인용하여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충격적인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철학자 아렌트의 보고서다. 구조적 무지는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에 의해 무지를 내재적으로 생산하고 고착시키는 악의 귀속적 형태다. 저자 아렌트는 구조적 무지의 기제들이 어떤 형태로 악을 평범화하고 귀속시키는지 이 책을 통해 날카롭게 고발한다. 절대적 진리와 정의는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작금의 시대에 강력한 울림을 선사하는 책이다. 젊은이들에게 특히 권한다.


  
『사랑의 역사』 - 남미영, 김영사

신간이다.
문학사를 아름답게 수놓은 여러 고전소설 속에서 다양한 사랑의 속성을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 남미영 교수는 1597년 출간된 《로미오와 줄리엣》부터 2012년 출간된 《사랑의 기초》까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34편의 작품을 선별하여 사랑의 가치와 의미, 성장과 인생에 대해 심층적으로 해부한다. 사랑이 가진 인생의 선과 악, 그리고 건설과 파괴라는 양면적 속성을 소설 속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폭포수처럼 뽑아낸다. 어렵지 않고 지루하지 않는, 상당한 재미를 선사하는 사랑학 에세이다. 머리 식히기에는 딱이다.


  
『지적 사기』 - 앨런 소칼 & 장 브리크몽, 한국경제신문사

절판됐다가 금년초에 한국경제신문사를 통해 재출간됐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이를 대변하는 학자들의 이론과 사상을 강도높게 비판한 책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논리는 마치 다양하고 입체적인 듯이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객관적 사실에 대한 도전으로 귀결된다. 과학적 지식을 사회적 구성물(구축물, 작문)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합리주의 전통(인류의 진보, 보편적 가치, 과학적 발견, 이성에 대한 믿음 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러나 경험적 검증과 동떨어진 이론적 담론에 불과하며 과학(적 지식)을 수많은 이야기, 신화, 사회적 구성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론적·문화적 상대주의에 다름 아니다. 공저자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진영의 목소리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이다. 약간의 지적知的 백그라운드가 있어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⑥ 『나의 한국 현대사』 - 유시민, 돌베개

출간된 지 얼마 안 됐지만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책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내용을 공감한다기보다 한 번쯤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책이다. 달필가 유시민의 신간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55년을 통해 한국의 현대사를 조망했다. 저자는 1959년에 출생했다. 그의 출생년도부터 2014년까지의 시기를 다뤘다. 유시민의 정파적 색채는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가 여태까지 분출해왔던 국내 보편의 좌파적 역사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저자의 쿨한 서술은 눈에 띈다. 박정희 시기의 명암을 차분하게 구분하려는 자세는 진일보했다. 책 곳곳에 주석을 단 인용서적의 리스트를 확인하는 것으로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은 아쉽다. 자전적 현대사 에세이 정도로 읽는다면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다. 역시 글빨 하나만큼은 죽인다.


  
⑦ 『혁명 I, II』 - 김탁환, 민음사

최근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혁명가 정도전의 이야기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 그리고 끝까지 고려왕조를 지키려 했던 정몽주의 내면세계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엄밀히 말해 이 소설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비망록이다. 소설의 구성은 일관적이다. 매 장마다 이성계, 왕(공양왕), 정몽주, 정도전의 순서로 화자가 교차되며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더욱이 문체의 변화무쌍함과 편재성은 소설의 재미를 입체적으로 폭발시키는 원동력이다. 작가는 편지, 가전체 등 당시 신진사대부들이 애용한 다양한 문체를 통해 각 인물의 내면을 관통한다. 특히 유배지 영주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화자 정도전의 유쾌한 내면을 엿보는 맛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민심이 들끓고 정부에 대한 회의가 높아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혁명의 본질을 흥미롭게 탐구해볼 수 있는 소설이다.



 

⑧ 『병자호란 I, II』 - 한명기, 푸른역사

병자호란은 치욕의 역사다. 왕이 무릎을 꿇었고 백성은 죽거나 다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조선시대를 객관적이고 생산적으로 연구해왔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시대 최고의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의 역작이다. <광해군>과 더불어 당대를 다룬 책 중 최고의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한 교수의 저작은 객관적인 시각과 담담한 문체로 정평이 나 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가해자인 청나라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잘못한 게 없는가. 국제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당쟁에만 휘말려 국력을 낭비한, 그리하여 연약하고 허접한 나라가 된 당시 조선 지도부의 무능과 허약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민족적 수치이자 쪽팔린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병자호란의 역사는 작금의 한국사회에 녹록지 않은 화두를 던진다.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의 초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전쟁을 펼쳐야만 하는 대한민국의 현재상과 자연스럽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의 교훈은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G2 시대에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나름 어렵게 선정한 열 권의 책이다. 책이 곧 답이 되진 않지만 책 속에서 답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 좋은 책은 항시 답으로 가는 여정 위에 존재한다. 힘들고 난해한 세대일수록 책을 벗삼아야 한다. 이번 여름에 위의 책들이 좋은 벗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소박하게나마 기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얼마전 교회에서 청년부를 대상으로 특강을 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평소 청년들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었기에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의 제의를 흔쾌히 수용했다. 강의 주제는 '청년의 본질'이었다. 그리스 철학과 20세기 현대사를 넘나드는 지난한 여정이었다. 강의는 계획된 시간보다 꽤 많이 초과됐다. 그러나 청년들은 마지막까지 잘 따라와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나는 청년들에게 역설했다. 청년시기에 올바른 지식과 건강한 사랑, 올곧은 비전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지식'과 '사랑'과 '비전'은 청춘을 빛내는 보석과 같은 것이며 그 시기 젊은이의 화두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훗날 성인의 아우라를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시간 관계상 사랑과 비전에 대한 내용은 다루지 못했다. 그날은 청춘이 가져야 할 지식의 성질에 대해서만 주로 얘기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보여준 구조적 무지와 같은 악의 평범성에 귀속되지 말 것을, 또한 중용을 파괴하는 편향된 지성에 함몰되지 말 것을 역설했다. 한나 아렌트가 설파했듯이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은 악의 평범성을 생산시키는 귀속적 기제다. 젊은 시절에 편견과 선입견에 빠진 무지는 훗날 건강한 어른이 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청년들에게 강력하게 전달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인생은 남이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기대는 것은 일시적이고 징징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개소리다. 청춘의 본질은 아픔에 있지 않다. 청춘은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다. 청춘과 어른 사이의 시간차는 청춘시절이 아름다울 수 있는 증거다. 어른이라는 실존은 청춘의 본질을 규정한다.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하고 넘어진다. 청춘이기 때문에 용인되는 것이다. 이는 청춘의 특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며 진정한 어른의 생으로 존재론적 전환을 이루게 될 때, 그때는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젊었을 때 당연하게 용서됐던 상처와 실수가 무조건 옳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강의 내내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사르트르, 솔로몬 등 수없이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두들겨 깠다. 쓰레기 같은 삶과 사상을 남긴 과거의 인물을 천착하며 청년들이 고민해야 할 점은 분명하다. 인간의 삶은 짧고 고단하고 가난하다는 것이다. 세상은 편하지 않다. 삶은 피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라는 달콤한 말로 선동한 이데아idea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가 천국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망상이다. 천국은 다른 곳에 있다. 그 '다른 곳'의 숭고한 비밀을 아는 자만이 천국의 삶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젊은이들이 그곳의 비밀을 경탄하며 그것을 자신의 심장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기도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교회에서 교사 세미나를 개최했다. 필자는 중등부 교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주제는 「이성교제와 성性」이었다.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딱히 관심이 가거나 실제적인 주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교사라는 직분을 감당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주제임은 분명했다. 교회에서 쉽게 다루기 힘든, 꽤 높은 수위를 넘나드는 파격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세미나는 정해진 시각을 넘어서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행됐다. 이 칼럼은 어제 세미나를 통해 느낀 필자의 단상을 글로 추린 것이다.

   불신자(non-Christian)들이 갖는 한 가지 오해가 있다. 기독교는 성을 배척한다는 생각이다. 이 불편한 오해는 성과 거리를 두는 행위를 '거룩성'과 동일한 의미로 여기는 오류를 발생시켰다. 성적 추구를 마치 불신앙의 양태인 것처럼 여겨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이자 편견이다. 그들의 생각과 달리 기독교는 성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취한다. 하나님은 성에 대한 인간의 후퇴와 외면을 지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성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부부夫婦'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 사랑의 연합은 부부관계라는 절대불변의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기독교 성 사상의 핵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여기서 문제를 발생시킨다. 비극이다.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 그중 성에 대한 인식은 급변하고 있다. 당일 만난 남녀가 아무 조건없이 하룻밤 잠자리를 하는 게 가벼운 놀이처럼 되어 있다. 혼전순결은 구시대 유물이 되어 박물관에나 가야 할 처지가 됐다. 첫 성관계 연령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성병 감염률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사랑'과 '섹스'는 더이상 동의어가 아니다. 포르노를 위시한 다양한 성적 미디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법률 제정에도 불구하고 수그러들지 않는 섹스 산업의 규모는 작금의 시대가 성적으로 얼마나 타락해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사실 필자는 젊은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에 대해 뭐라 할 입장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자 선택이기 때문이다. 펄펄 끓어오르는 청춘의 용광로 속에서 자기들만의 문화와 방식으로 성적 에너지를 불태우는 행동을 두고 일개 개신교 집사가 이러쿵저러쿵 지적한다는 건 먹히지도 않을 뿐더러 욕 먹기 십상이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겠다. 사랑이라는 인간 생명력의 원초적 갈망이자 고결한 기본능력이 싸구려처럼 취급받는 세태가 짜증나서 못 견디겠다. 사실 현대사회의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와 성병, 미혼모와 입양은 대부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성행위의 발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은 모른다. 관심조차 없다. 사랑의 가장 찬란한 유전자가 절제와 책임이라는 것을.

   전 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성도덕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는 철저히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에 의해 다져진 현대적 사고의 틀은 경험적인 지각을 통한 인간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우주에서는 모든 가치 척도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고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졌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굴곡되고 변형되어 서구사회를 들끓게 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흡수한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덕의 붕괴를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겨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성 해방을 이유로 난잡한 성 철학을 가르쳤고 실제 자신의 삶 속에서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 5월 칼럼(『사랑과 가정에 관한 신앙적·인문학적 고찰』)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두들겨 까며 이 책이 끼친 해악을 지적한 바 있다.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제2의 성>을 기존의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전혀 다른 차원의 해석을 내놓은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한다. 헛소리가 따로 없다. 과연 그들이 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문이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천박함의 한계에 이른 구역질나는 책"이 바로 <제2의 성>이다.

   <제2의 성>에서 저자는 사랑을 '필리아(Philia)'와 '에로스(Eros)'로 분리한다. 저자는 지적인(인격적인) 사랑과 육체적인(감각적인) 사랑 사이의 종속성과 삼투압성을 전제적으로 차단시키며 자신의 주관을 논증한다. 저자의 사랑관을 요약하자면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으로 구분되는데 둘은 완벽히 분리되는 것으로서, 이 독립성을 지향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전제한 최고 수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남편(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사랑만 지켜주면 되고 몸은 아무렇게나 굴려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인과 부부 간에 섹스는 1차원적 놀이에 불과하다. 오히려 이러한 탈구속성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온전한 '자유'를 부여할 수 있고 구속성을 타파하는 열정에 복무함으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각한 수준의 개소리가 따로 없다.

   제자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사르트르와 멀티관계로 계약 결혼했으며, 전 세계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언론과 대중에게 자랑하듯이 흔적을 남겨왔던 보부아르에게 사랑이란 그렇고 그런 것이었을 게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이란 것도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추하기 그지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전기와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보건대 둘의 계약결혼은 그들이 말했던 것과 달리 쿨하지 않았고 깔끔하지 않았으며 진실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영혼의 깨끗함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은 1929년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들을 사귀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우리는 한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교감 섞인 표현은 그들의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言語) 수식'의 하나였다. 사르트르는 어디를 가나 시끄럽게 떠들었던 철학계의 수다쟁이였다.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철학이 철저히 말에 포장된 겉치레의 것임을 일깨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성적 관심에는 '필수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의 관계에서 오직 전자의 개념만을 추출했다. 후자는 전자를 강조하기 위해 개념적으로 제시한 상대어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요했다. 즉 보부아르를 필수적 사랑의 중심인물로 계약해놓고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는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사르트르에 대한 보부아르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투명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의 섹스 파트너를 공개하고 피드백하는 그들의 쿨한 성관계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보면 기가 찰 정도로 거짓되고 추잡스럽다.

   여기서 그들의 난잡한 에피소드와 진실되지 않은 계약관계의 디테일을 구구절절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가 젊은이들의 무너진 성도덕을 한탄하며 두 철학자를 까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서구사회에 끼친 거대한 영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젊은이들은 심각한 고독과 방향성의 부재에 직면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며 철학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세대는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사르트르의 포로가 됐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철학과 쓰레기같은 성관념은 전염병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당시의 유럽 젊은이들을 파괴시켜나갔던 것이다.

   최근 대학생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심각한 무언가를 느끼곤 한다. 마치 대한민국이 포스트모더니즘 국가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극심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빠져 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지력이 결핍됐다. 선과 악, 지식과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사라졌다. 프랑스 68혁명 이후 유럽사회를 휩쓸었던 쓰레기 담론들이 21세기 한국 대학강단의 주제가 되어 있다. 우리나라 대학의 인문·사회과학계열 교수 중 80% 이상은 '구조주의 좌파'라고 규정한 모변호사의 외침이 결코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역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neo-Marxism)'와 살벌하게 씨름 중에 있다. 이미 8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는 폐기처분된 이론들이 아직까지 이 나라 지식사회와 담론구조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 교수들이 의외로 논문 표절에 많이 노출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이 나라 청춘들에게 일갈한다.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한다. 우리의 몸은 고결한 것이다. 성과 사랑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분리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둘은 공히 지독한 희생과 올곧은 책임의 영역 안에서 작동·발현되는 것이다. 사랑한다면 절제하고 지켜주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가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인간의 그것은 영혼의 행위이다. 종족 번성의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고밀한 영혼의 궤적을 담아낸 절대 고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게 바로 인간의 성과 사랑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엄연한 신적神的 근거이자 영혼과 육체가 동일선상에서 서로를 대등하게 피드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서로의 최저점이 만나서 쓰다듬는 최상급의 호흡이자 인간의 실재적 한계를 어루만지고 겸손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기발견이다. 그것은 근본 사랑의 본체를 인간 차원에서 가장 적확하게 체감화하는 오묘한 약동躍動의 결정체이자 가시화되지 않은 우주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굴곡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다. 그것은 나를 내어주고 상대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의 한 색깔이자 원료이다. 결국,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큰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신의 숨결을 체화할 수 있는 용서되어진 신성모독인 것이다.

   성과 사랑의 일체성은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대화집 <향연>에서 에로스의 본질적 성격을 구명究明하고 다른 대화집 <파이드로스>에서 에로스로부터 필리아에로의 이전 경위를 명료하게 거론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에로스에 대한 언급 대신에 필리아에 관한 놀랄만큼 깊이있고 상세한 서술을 남겼다. 기독교는 에로스와 필리아를 그리스도적 아가페의 개념으로 끌어들였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무시하고 몰이해할 정도로 사랑 탐구의 연원은 결코 녹록지 않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잘못된 성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성행위로 고결한 청춘을 짓밟는가. 섹스를 목적으로 사랑을 수단화하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섹스와 사랑의 시·공간상 전복은 필경 악으로 귀결된다. 사랑 없는 섹스는 거짓이고 책임 없는 사랑은 교만이다. 이 '거짓'과 '교만'은 창조적 질서의 일탈이며 파괴다. 현실에서 지옥이 무엇인지 아는가. 모든 자유가 용납되는 곳이 바로 지옥이다. 아무런 질서와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유의 시공간, 그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그렇기에 선악과는 필경 낙원에 존재했던 것이다.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 실상 이 말은 개소리다. 인생은 징징댄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남이 대신 살아주지도 않는다. 물론 청춘이기 때문에 아플 수 있다. 젊었을 때 누구나 한 번쯤 실수를 한다. 청춘시절의 도전과 패기, 혈기와 열정은 비단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라 할지라도 면죄받을 수 있는 특권에 속해 있다. 젊음이 가진 특권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것을 으레 즐기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되늦게 후회하지 말라. 청춘은 실수가 포용되는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숭고한 통로임을 잊지 말라. 단언컨대, 훗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진정한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젊은 시절의 그러한 특권과 특질이 그리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고귀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기를 바란다. 동시에 순결한 사랑관을 갖기를 기도한다. 잊지 말라. 인간 세상의 가장 단단한 질서와 권위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