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웃님으로부터 폴 존슨(Paul Bede Johnson)의 <2천 년 동안의 정신, history of Christianity>이라는 세 권의 두꺼운 기독교 역사책을 추천받았다. 살림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데 현재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4대 온라인서점을 위시하여 오프라인 대형서점을 두루 훑고 다녔지만 단 한 권도 찾지 못했다. 중고로 사는 것은 마뜩치 않았다. 새 책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출판사에 직접 연락했다. 종국적으로 파주시 출판단지까지 가서 몇 권 남지 않았던 새 책을 구할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에 주목한 이유는 간명하다. 기독교 역사 2천 년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물론 이 책만 갖고 교회사를 개괄해보려는 건 아니다. 개혁주의 신학자이신 교회의 협동목사님으로부터 평신도가 읽는데 부담이 없고 동시에 가볍지 않은 책을 추천받았다. 그 책은 별도로 주문했다. 즉 기독교 내부의 시각에서 쓴 책과 외부의 관점에서 쓴 책을 동시에 읽음으로써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객관성과 균형성을 나름 확보해보려 한 것이다.

   저자 폴 존슨은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다. 엄연한 보수주의자로서 보수·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천착하고 있는 석학이다. 그의 저작 중 <모던 타임즈, Modern Times : The World from the Twenties to the Nineties>는 20세기 현대사를 꿰뚫을 수 있는 명저이며, <지식인의 두 얼굴, Intellectuals>은 기존 지식인들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파헤친 흥미로운 저작이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저자 특유의 방대한 자료 모음과 힘 넘치는 서술은 그의 저작들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다. 그간 읽어왔던 존슨의 책들을 통해 그의 집필 스타일을 잘 알고 있고, 무엇보다 이웃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에 <2천 년 동안의 정신>은 적기에 내 손 안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최근 한국 기독교는 이곳저곳에서 어마어마한 욕들을 폭포수처럼 얻어맞고 있다. 물론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 중에는 사실과 다르고 논리가 빈약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한국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이 욕 먹을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교회 관련 좋지 않은 뉴스를 접하게 되면 기독교인으로서 치솟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감출 방도가 없다.

   역사를 진지하게 되돌아보면 이런 문제가 비단 한국 기독교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봉착한다. 기독교가 지난 2천 년 간 인류에게 선사한 밝은 에너지의 이면에는 참혹한 역사적 편린 또한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을 위시하여 참혹한 전쟁과 살육의 피의자로서 교회권력은 직·간접적인 악행을 서슴없이 자행해왔다. 이에 수박 겉 핡기 식으로 배우고 알아왔떤 교회사에 대해 보다 냉정하고 객관적인 정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책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며 세계와 대화하는 일은 적잖이 고통스럽다. 신神의 가르침은 세상과의 단절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과의 분명한 구별을 선포한다. 이 '단절'과 '구별'을 구분하고 해석하며 실천하는 일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의 지식에 대해 제대로 알고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용기가 필요하고 희생이 요구되기도 한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면서 필히 세상과 씨름할 수밖에 없는 이 지독한 '인간적 실존'은 본질적이고 태동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을 추동하는 '신적 본질'에 종속된 채 맞물려 나아가는 함수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내 고민은 결국 지성의 목마름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었다. 2천 년의 교회사를 침착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협동목사님의 추천도서는 분명한 신앙서적에 속한다.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오셨는지 개혁주의 관점에서 건강하고 은혜롭게 다루었다. 반면 존슨의 책은 저자 자신이 기독교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외부자의 시선에서 객관성을 견지하며 교회사를 서술했다. 이러한 내부와 외부의 관점을 동시에 탐구하는 양자적兩者的 책읽기는 교회사를 균형있고 입체적으로 조망하는데 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의 저서와 철학사 관련 책을 끝내면 바로 진행할 계획이다.

   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의심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성경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기독교적 세계관의 전통과 질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오직 믿음'으로 대변되는 칼빈주의(Calvinism , ─主義) 신학을 굳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무신론(atheism , 無神論)과 범신론(pantheism , 汎神論)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종교는 관념'으로 규정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Marxism and Leinism)의 계급사상과 유물론(materialism , 唯物論)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자생적 행동과 행위에 존재적 본질을 두는 프랑스식 실존주의(existentialism , 實存主義) 철학을 배척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코 세상의 목소리에 무조건적인 배타로 일관하는 꽉 막힌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세상과 타협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신앙을 지키면서 세상과 따뜻하게 호흡하기를 소원하는 내 지성과 열정에 대한 존재론적 약동인 것이다. 이번 책읽기가 그 길을 안내하는 작은 촛불이 되기를 기대한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독서는 길다.
오. 주님. 신앙고백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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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톨스토이 전집이 출간된다. 그것도 국내 유일의 톨스토이 전문가인 박형규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전 교수의 번역을 통해서 말이다. 북한 미사일 사태를 위시하여 시끄럽고 우울한 뉴스의 홍수 속에서 톨스토이 전집 출간 소식은 단연 빛나는 보석과 같은 뉴스가 아닐 수 없다.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더욱이 모든 작품을 박 교수가 직접 번역한다니. 날아갈 것 같다.

   사실 '톨스토이 전집'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재 출판사 작가정신에서 모두 9권이 나와 있다. 그러나 톨스토이 불멸의 대작 <전쟁과 평화>가 누락된 상태에서 중단된 상황이다. 박 교수는 이미 출간된 <안나 까레니나>를 시작으로 출판사 뿌쉬낀하우스를 통해 내년 말까지 모두 18권짜리 톨스토이 전집을 번역해 낼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전집에서는 출판사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에 세 권짜리로 들어 있는 <안나 까레니나>를 1,000쪽이 넘는 양장본 한 권으로 편집했으며, 200자 원고지로 1만장에 이르는 <전쟁과 평화>를 두 권으로 분책하는 등 분량부터가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이번 전집 작업에 눈과 귀를 모으고 요란하게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장 사랑하는 소설가 톨스토이의 본격적인 전집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과 더불어 톨스토이 번역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박형규 교수의 작업이라는 데 의미와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번 전집에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 초기 중·단편집 <악마>, <결혼의 행복>, 희곡집 <어둠의 힘>, 후기 중·단편집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예술·문학·교육론집 <예술이란 무엇인가>, 인생·종교·사회평론집 <고백> 등은 그의 번역으로는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작품들을 한데 모으고, 기존 번역 역시 신역에 가깝게 손을 보아 내놓을 것"이라고 말하는 박 교수의 비전은 나같은 톨스토이빠 독자에게는 환희이자 천국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82세라는 연로한 연세에도 자신의 꿈과 비전을 위해 수고하며 헌신하는 박 교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박 교수는 러시아 문학자이자 해방 이후 1세대 번역가로서 톨스토이 문학의 천착과 번역작업에 60년의 시간을 바치며 오직 학자로서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그의 노고는 훗날의 역사가 분명하게 기억해줄 것이다. 부디 무탈하게 귀하고 거대한 작업을 잘 마무리하시기를 기도한다.

 

 

 

 

[사진출처:해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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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스튜어트 밀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건, 한 사람이 지닌 사랑의 순수성은 그의 사상과 철학에도 반드시 묻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테일러에 대한 밀의 사랑은 순수하고 애절하다. 그리고 전존재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한 여인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야말로 밀이 진정한 '자유'를 탐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밀의 역작 <자유론>은 테일러 부인이 죽은 후에 발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슨 역사의 장난질이란 말인가.

   수없이 많은 철학자와 지식인들이 자신의 추잡스러운 여자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쓰레기 같은 '연애론'이나 '사랑론'을 주창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을 깊이 고찰하면 할수록 그들의 사상과 철학은 자신의 꼴사나운 사생활 못지 않게 별볼일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19세기부터의 철학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카테고리를 정면으로 해부하며 천착한다. 그러나, 진정 귀담아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는 철학자는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사랑이 곧 전부'라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인내와 희생이 뒤섞인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의 주장과 논리에는 무언가의 공허와 결락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띤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인의 범주를 떠나서도 마찬가지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 사람 저 사람 사귀며 경험을 쌓아가는 연애의 '기술자'보다 한 사람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의 '예술가'가 삶의 영역에서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을 수없이 봐왔다. 사랑의 본질은 '대상의 다양성'보다 '존재로의 침잠'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의 깊이는 곧 삶의 풍성함과 동의어가 되는 것이다.

   너무 낭만적인가. 혹은 답답한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은 본디 그런 것이다.

   이 대목에서 톨스토이의 명언 하나!

   "네가 사랑하는 한 사람의 아내를 아는 것은 천 명의 여자를 아는 것 이상으로 모든 여자를 잘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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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지방출장을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지 않은 일정이었다. 둘째 날에 숙박으로 고생을 했는데 평소와 달리 방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주차장에 주차된 차도 많지 않았고 야심한 시각도 아니어서 의아한 면이 있었다. 매달 정기적으로 지방출장을 가져왔지만 저녁 8시 이전에 방이 없어 모텔을 잡지 못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모텔 주인은 솔직히 고백했다. 화이트데이 대목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날이 날인 만큼 젊은 연인들의 대실을 꽉 차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숙박은 10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랬다. 화이트데이였다. 모텔촌 인근에 대학교가 있다는 것도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새삼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 시대 젊은이들의 성관념이 얼마나 쿨하고 개방적인지를 말이다.

   젊은이들의 개방된 성의식을 뭐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고결한 단어가 싸구려처럼 남발되는 세태가 짜증나서 못견디겠다. 사실 작금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낙태와 성병, 미혼모와 해외입양은 거의 대부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랑, 다시 말해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무책임한 성행위의 발동에서 비롯됐다. 그들은 모른다. 그리고 관심조차 없다. 사랑의 가장 오묘한 특질이 절제와 책임이라는 것을.

   전세계적으로 범람하고 있는 성도덕의 붕괴와 가정의 파괴는 철저히 현대사회의 산물이다.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프로이트에 의해 발현된 현대적 사고의 틀은 경험적인 지각을 통한 인간의 인식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져 개인적인 책임감과 19세기 문명의 중심이었던 객관적인 도덕규범에 대한 의무감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우주에서는 모든 가치 척도가 상대적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 때문에 사람들은 당혹감과 환희를 동시에 느꼈고 쉽게 도덕적 무정부주의에 빠졌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굴곡되고 변형되어 서구사회를 더욱 들끓게 했다. 이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이러한 포스트모던적 사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본주의를 일군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까지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덕의 붕괴를 일부 지식인들이 부추겨왔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많은 좌파 철학자들이 '성의 해방'을 이유로 난잡한 성 철학을 가르쳤고 실제의 삶으로 몸소 보여줬다.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년 100권의 청소년 추천도서를 선정하여 발표한다. 사회과학 교수들이 엄정하게 선정한 것인데
세계 최고의 명문대학이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책 선정의 자료로 삼는 것같다. 그러나 문화 탓인지, 기호 탓인지, 수준(?) 탓인지, 나는 그들네의 책 추천에 공감하기 힘들 때가 많다. 특히 몇 년 전에 발표된 추천리스트를 보며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하버드 대학 교수들의 자질을 의심할 정도로 실망적이었다.

   장 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100권의 리스트에 포함되었다는 게 어이없었지만 그보다 더욱 놀란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버젓하게 추천리스트에 올라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쓰레기'로 보는 책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경종'을 울린 책이라는 평가는 우습다. 순수 페미니즘의 정신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책이 가진 폭넓은 위험성에 있다. 이 책은 청소년의 성의식을 왜곡된 방향으로 견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뿜어내고 있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의 말처럼 "천박함의 한계에 이른 구역질 나는 책"이 바로 <제2의 성>인 것이다.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저자만의 꼴불견식 해석은 부아가 치밀 정도로 짜증이 난다.

   <제2의 성>에서 저자는 사랑을 '필로스(Philos)'와 '에로스(Eros)'로 분리한다. 지적인(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독립적이고 의도적으로 떼어놓는 저자의 논지는 사랑의 본질적 해석에 한참 벗어나 있는 무지몽매無知蒙昧의 극치이자 찬탄스런 사랑의 원형에 대한 모독이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남편(혹은 아내)에게 정신적인 사랑만 지켜주면 되고 몸은 아무 곳에나 굴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연인과 부부 사이에 섹스는 1차원적 놀이에 불과하다. 서로에게 전적인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사랑의 구속성을 타파할 수 있게 되고 이로써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소리가 따로 없지만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저자 드 보부아르의 삶 자체가 그런 쓰레기 같은 삶을 전도자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제자와 동성애적 관계를 맺고, 사르트르와 멀티관계로 계약 결혼했으며, 전세계 수많은 남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언론과 대중에게 자랑하듯이 흔적을 남겨왔던 드 보부아르에게 사랑은 그렇고 그런 것이었을게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계약결혼이라는 것도 그 실상을 알게 되면 추하기 그지없는 이벤트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많은 전기와 다양한 책들을 종합해보건대 둘의 계약결혼은 그들이 말했던 만큼 쿨하지 않았고 깔끔하지 않았으며 진실되지 않았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은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보장하고 영혼의 깨끗함을 공유한다는 취지로 전세계적인 이슈가 됐다. 이들은 1929년 사르트르의 제안으로 영혼의 정절과 관계의 투명성을 지키며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한다는 조건 하에 계약 결혼을 하게 된다. 이후 자유로운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 많은 다른 애인을 사귀었다. 처음에는 2년 기간을 약정한 계약이었지만 2년 뒤에 30세까지로 연장하고 이후로는 종신계약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우리는 한사람입니다. 너와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두 사람의 교감 섞인 표현은 그들의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言語) 수식'의 하나였다. 사르트르는 어디를 가나 시끄럽게 떠들었던 철학계의 수다쟁이였다.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내세운 주장 중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의 삶과 철학이 철저히 말에 포장된 겉치레의 것임을 일깨운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듯하다.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성적 관심에는 '필수적 사랑'과 '우발적 사랑'의 두 종류가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오직 전자의 개념만을 추출했다. 후자는 전자를 강조하기 위한 개념상의 상대적 제시어에 불과했다. 보부아르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와 자유롭게 섹스를 즐길 수 있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요했다. 즉 보부아르를 필수적 사랑의 중심인물로 계약해놓고 주변의 수많은 여자들을 탐닉하는 근거로 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역으로 사르트르에 대한 보부아르의 입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투명성의 원칙에 따라 서로의 섹스 파트너를 공개하고 피드백하는 그들의 쿨한 성관계도 큰 이슈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보면 기가 찰 정도로 거짓되고 추잡스럽다.

   여기서 그들의 난잡한 에피소드와 진실되지 않은 계약관계를 구구절절하게 기술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젊은이들의 무너진 성도덕을 한탄하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까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서구사회에 끼쳤던 거대한 영향력에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젊은이들은 심각한 고독과 방향성의 결여에 직면했다. 그때 사르트르는 자유를 강조하며 철학적 행동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세대는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많은 청춘이 사르트르의 포로가 됐다. 그의 보잘 것 없는 철학과 쓰레기 같은 성관념은 전염병처럼 빠르고 강력하게 당시의 유럽 젊은이들을 파괴시켜나갔던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일갈한다. 우리의 몸은 고결한 것이다. 성과 사랑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가치는 공히 지독한 희생과 철저한 책임의 카테고리 내에서 작동되고 발현되어야 한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절제하는 것이고 지켜주는 것이며 기다리는 것이다. 인간의 성행위가 동물과 다른 점은 자명하다. 인간의 그것은 영혼의 행위이다. 종족 번성의 차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차원에 놓여 있다. 고밀한 영혼의 궤적을 담아낸 절대 고차원의 세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두 인간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엄연한 신적神的 근거이자 영혼과 육체가 동일선상에서 서로를 대등하게 피드백할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이다. 그것은 서로의 최저점이 만나서 쓰다듬는 최상급의 호흡이자 인간의 실재적 한계를 어루만지고 겸손화시키는 결정적인 자기발견이다. 그것은 근본 사랑의 본체를 인간 차원에서 가장 적확하게 체감화하는 오묘한 약동躍動의 결정체이자 가시화되지 않은 우주의 시공간을 잠시나마 굴곡화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물리력이다. 그것은 나를 내어주고 상대를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신적인 사랑, 즉 아가페(agape)의 한 색깔이자 원료이다. 결국, 그것은,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큰 선물인 동시에 인간이 신의 숨결을 체화할 수 있는 용서되어진 신성모독인 것이다.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잘못된 성의식과 그에 따른 무분별한 성행위로 고결한 청춘을 짓밟는가. 섹스를 목적으로 사랑을 수단화하지 말라. 그것은 비겁한 짓이다. 섹스와 사랑의 시공간상 전복은 무조건적으로 거짓이다. 사랑 없는 섹스는 거짓이고 책임 없는 사랑은 교만이다. 그 '거짓'과 '교만'은 분명한 창조적 질서의 일탈이다.

   물론 젊었을 때는 누구나 실수를 한다. 청춘시절의 도전과 패기, 혈기와 열정은 그것이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죄를 면할 수 있는 특권에 속해 있다. 그것은 젊음만의 특질이며 특권이다. 청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으레 즐기지 말며 자랑하지 말라. 그리고 되늦게 후회하지 말라. 청춘은 실수가 포용되는 시기인 동시에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숭고하고 순전한 통로라는 것을 잊지 말라. 단언컨대, 훗날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진정한 어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젊은 시절의 그러한 특권과 특질이 그리 선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부디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고귀하고 건강한 성의식을 갖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동시에 순결한 사랑관을 갖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잊지 말라. 세계의 모든 질서와 권위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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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은 지 어느새 반 년이 지났다. 반드시 서평을 남겨야 하는 작품임에도 아직까지 정리를 못한 채 둥개고 있다. 소설 자체는 쉽다. 갈무리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여태까지 나는 철학자와 사상가로서 카뮈를 대해왔다. 소설가로서의 탐구가 소소한 이상 <이방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나는 지금까지 카뮈를 사르트르의 반대편에서 주로 해석했다. 카뮈에 대한 내 긍정과 동경은 사르트르와 멀어진 내 변화의 크기가 추동해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음사판의 <이방인> 해설이 사르트르에서 역자 김화영의 것으로 교체된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이방인>을 수용하는 디테일은 사르트르와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 주관적 기호와는 별도로 <이방인>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입체적 연결고리를 이어나가야만 하는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카뮈는 사르트르와 이 작품이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사실 사르트르는 카뮈가 <이방인>을 써 문단의 총아로 등장하는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카뮈의 <이방인>에서부터 <페스트> 그리고 사고로 죽기 3년 전 발표한 <전락> 등을 격찬하면서도, 카뮈가 쓴 <반항적 인간>을 두고 극단적인 논쟁을 벌였다. 더욱이 <이방인>에 대한 카뮈와 사르트르 간의 실존주의 논쟁은 20세기 문학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화두였다.

   주지하다시피 <
이방인>의 키워드는 '부조리'다. 하지만 그 의미와 성격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개념을 상정했다. 카뮈의 실존주의는 기존의 통설적 실존주의와는 구별된다. 엄정한 철학적인 방법론으로 구성된 학문적 이론이라기보단 그냥 인간이 가지는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인상과 대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와 벽을 세웠던 것 아니겠는가. 카뮈 식의 부조리에 대한 개념화가 결락된 채 그저 사르트르의 대책점에서 <이방인>을 읽어내려 했던 내 천착이 오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의 깊은 이해와 카뮈 세계관의 진지한 학습이 전제되지 않고는 <이방인>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실존주의 사상의 단초가 되는 부조리 따위를 철학서 속의 사어가 아닌 실제의 삶과 일상 속에서 기묘한 괴리나 위화감과 함께 직접 느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방인>은 무의미한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이에 <이방인>의 완벽한 갈무리를 위해 세 가지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됐다.

   역자 김화영 교수는 소설의 첫 문장에서 '엄마'와 '어머니'의 번역 차이가 소설 전체의 느낌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지적한다. 김화영의 지적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번역판의 재독을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이에 문학동네판으로 다시 읽기로 했다. 이게 첫 번째 과제다. 그리고 카뮈의 부조리에 깊이 침잠하기 위해서 그 전초가 되는 <시지프 신화>를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요가 생긴다. 이것이 두 번째다. 마지막으로, 실존주의의 태동성과 역사성이 담보된 실존 철학과 문학의 알맹이들에 보다 깊이 감화되기 위해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現象學, phenomenology)부터 살펴보아야 하는 수고로움이 발생하게 된다.

   상기
세 가지 수고로움은 나에게 소설 <이방인>을 보다 입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불가결한 과제다. 이를 통해 이 지독한 작품에 대한 내 입장정리가 보다 명료해지기를 기대한다. <이방인>은 분명 흥미로운 텍스트다. 하지만 동시에, 피곤하고 고약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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