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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5대 제국 - 통通박사 조병호의
조병호 지음 / 통독원(땅에쓰신글씨)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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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저녁이다. 두 딸에게 성경을 가르치는데 녀석들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큰딸이 질문한다. "아빠! 성경은 진짜 있었던 이야기야?" 아니 이게 웬일인가. 3대에 걸친 기독교 가정에서 성경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가 있다니. 하긴 호기심 많은 초등학생이라 그런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신화 같은 에덴동산 이야기, 이집트의 10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는 모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병거 타고 하늘에 올라간 엘리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등 기독교는 온갖 신비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아이는 성경에 나온 이야기들이 진짜 있었던 실제 역사임이 궁금했던 것이다. 아빠(나)의 답변은 뭐였겠는가. 당연히 "그렇지"였다.

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주변 지인에게 기독교 신앙과는 별개로 성경은 꼭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전도에 어느 정도 목적이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지만 성경만큼 완성도 높고 배울 게 많은 책도 많지 않다. 특히 구약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데 당시 중동 지역의 역사와 포개지면서 흥미롭고 박진감 넘친다. 성경에 나온 인명과 지명이 모두 세계사의 실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을 넘어 역사적 맥락에서 탐구하면 과히 놀라움과 스펙터클함의 정수를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일독을 권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총 다섯 제국이 나온다. 실제 역사 순서대로 아수르(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알렉산더), 로마 제국 순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각 제국은 당시 근동에서 가장 잘나가는 나라였고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섯 제국의 역사는 비단 성경이 아니더라도 세계사라는 대양 위에서 다양한 기록과 문헌을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되어 왔다. 조병호 교수의 『성경과 5대 제국』은 기독교의 역사가 다섯 제국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성경적·역사적 관점에서 기술했다. 명저다.

이 책의 강점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력에 있다. 신자든 불신자든 불편하지 않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성경적이지만 세계사적이고 역사적이지만 신앙적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거대 제국을 당신의 구속사를 위해 어떻게 들어 쓰셨는지를 은혜롭게 읽어낸다. 비기독교인은 마냥 신화와 같았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실제 있었던 세계 제국의 역사에 포개며 학습한다. 신자에게는 은혜롭고 비신자에게는 교훈적이다. 내용이 어렵지 않고 쉽게 읽히는 점도 훌륭하다.

무엇보다 한 권의 책이라는 분량에서 핵심만을 짚어낸 점이 탁월하다. 저자는 목사이자 교수로서 평소 성경 통독의 중요성을 우리 사회에 꾸준히 강조해왔다. 저자가 그간 집필한 책들의 대부분이 성경 읽기와 관련이 있고 공개석상의 강연과 유튜브 영상도 온라인상에 적잖이 올라와 있다. 성경은 세밀하게도 읽어야 하지만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맥을 잡고 큰 틀에서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정독과 깊이 있는 묵상이 가능하다. 맥을 잡지 못한 채 성경의 어느 한 부분에만 함몰되면 오독하거나 이단에 빠질 염려가 있다. 이런 면에서 성경 읽기의 통독적·조망적 관점을 명료하게 제시한 저자의 수고는 아름답다. 

사실 그렇다. 성경은 개신교를 비롯한 범 아브라함 태생 종교(유대교/이슬람교/가톨릭/성공회 등)가 공유하는 신(神)의 선물이다. 기독교 중심적으로 말하자면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말씀이다. 간혹 구약을 그저 옛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성경의 완결성에 대한 무지한 도전이다. 창세기 12장부터 펼쳐지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한 민족의 역사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당대 세계를 제패한 여러 제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이집트, 앗수르, 바빌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에 이르는 고대 근동의 패권은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 어디에 있는가를 새삼 일깨운다. 모든 제국은 한결같이 다 망했다. 영원한 제국은 없었다.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세계의 왕이 누구인지를 성경은 일관된 흐름으로 설파한다.

최근 교회의 젊은 후배 집사와 차를 한잔할 일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서 함께 자란 사이인데 나를 좋아하고 잘 따르는 친구다. 최근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어 아내와 함께 새벽 기도를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제법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힘 있고 건강한 신앙생활의 선결조건은 '성경을 아는 것'임을 도전 주었다. 그저 문장을 읽는 게 아니라 골격을 갖춰 조망해야 함을 강조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시간과 공간 위에 올려놓고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훈수했다. 그리고 몇 권의 책을 추천해 주었다. 이 책은 그날 추천의 최전선에 있다. 그 후배뿐 아니라 성경을 세계사적 실제 사건으로 읽기 원하는 수많은 독자들에게 조병호 교수의 『성경과 5대 제국』은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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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읽는 사무엘서
김진수 지음 / 합신대학원출판부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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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후임목사 청빙위원으로 임명된 후 리더십과 관련한 독서가 갈급했다. 여러 책들을 두루 훑었다.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는 이 여정의 끝자락에 읽은 책이다. 세상의 리더십과는 다른 성경적 리더십의 본질을 찾는 과정에서 '다윗'이라는 인물이 호출됐다. 이 위대한 인물의 행적을 복기하면서 교회 젊은 교육목사님의 책 추천이 있었다. 추천과 함께 선물로 받았다. 이 책은 이스라엘 왕조사의 시작을 다룬 성경 <사무엘서>를 강해한다. 김진수 합동신학대학원 교수(목사)가 썼다.

주지하다시피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왕직의 의미를 밝히는 성경이다. 선지자 사무엘은 영적으로 암울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사사 시대를 마무리하고 왕이 통치하는 왕조시대를 연 인물이다. 한 여인(한나)의 뜨거운 기도를 통해 얻은 아들 사무엘 이야기는 교회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회자될 만큼 유명하다. 과거 이스라엘 역사에 없던 왕이란 직분에 관해 사무엘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일깨운다. 그 첫 번째 사례 사울 왕의 실패와 두 번째 사례 다윗 왕의 성공을 <사무엘서>는 진지하게 탐색한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세종대왕 정도로 비교하면 되겠다. 이스라엘의 왕직이 세상ㅡ혹은 다른 민족(국가)ㅡ의 왕권과 다른 점은 선지자에 의해 세워지고 선지자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데 있다. 왕이라고 해서 자기 뜻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은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왕직의 본분을 잊지 않고 잘 행사한 왕이 이스라엘 왕조사에 다윗을 포함하여 불과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비극이다.

본래 이스라엘에는 왕의 제도가 없었다. 죄악의 관영함과 혼란의 퍼포먼스였던 사사 시대를 겪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에게도 다른 민족(국가)처럼 왕을 주소서"라고 외친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한 분뿐인데 얼토당토않게 인간 왕을 달라는 그들의 목소리에 하나님은 몹시 섭섭해하셨다. 하지만 용인하셨다. 즉 이스라엘에서의 왕의 제도는 비록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출발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것이기도 하다. 그 출발이 이스라엘 마지막 사사 사무엘이며 초대 왕은 사울이었다. 하지만 사울은 앞서 언급한 이스라엘 왕직의 본분을 제대로 행하지 못했다. 결국 그와 그의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이새의 막내아들 다윗이 다음 왕에 오른다. 그러나 다윗이야말로 진정한 초대 왕이다. 다윗의 왕권이야말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 가장 탁월하고 모범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에게 물어봤다. 독자적으로 하지 않았다.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하나님에게 고백했다. 선지자의 감독을 충실하게 받았다. 큰 죄를 지었을 때에도 곧바로 무릎 꿇고 회개했다. 비록 죄를 졌으나 회개했기에 하나님은 용서하셨고 그의 왕권을 지켜주셨다. 다윗 시대 40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국력과 평화가 가장 클라이맥스에 이른 시점이다. 이런 다윗 왕의 모범은 훗날 왕이 바뀔 때마다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이 책의 강점은 <사무엘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의 의미를 탁월한 신앙적·신학적·성경적 해설로 기술한 데 있다. 저자 김진수 교수는 자신의 박사학위 주제가 '사무엘서'라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단단하고 은혜롭게 논지한다. 해외 여러 신학자들의 입장을 비교·대조하며 성경의 원문적 해석을 소개한다. 신학적으로 여러 논의가 있었다는 점을 소개하되 종국 정경적 입장으로 돌아가 <사무엘서>를 강해한다. 어렵지 않되 깊이가 있고 신학적이며 은혜롭다. 책의 구성과 글의 문체는 신학자가 쓴 글답게 논문적·분석적이지만 일반 평신도가 읽어내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평이하다.

성경의 부분과 전체라는 큰 틀에서 균형을 갖추고 있는 점은 이 책이 가진 가장 탁월한 부분이다. <사무엘서>의 각 장면들을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분석하는가 하면 성경 전체 맥락에서 <사무엘서>가 위치한 의미, 그리고 각 세부 사건이 가진 의미를 합주한다. 이런 균형감은 저자의 탁월한 신학적 지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사무엘서>가 가진 고유의 내러티브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라는 통사에서 고대 이스라엘 왕조가 차지하는 맥락을 동시적이고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특히 책의 마지막 8장에서는 '사무엘서와 구속사'라는 테마를 따로 꺼내어 정리한다. 사무엘서에 제시된 제왕 신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살핀다. 성경 전 역사를 포괄적으로 살피며 연결시킨다. 에덴동산에서의 범죄, 아브라함 언약, 가나안 정복 시기, 사사 시대, 다윗 이후 열왕 시대와 포로기, 예수님이 오신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총체적 관점에서 살핀다. 즉 <사무엘서>에 나타난 왕의 제도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시가 창조, 타락, 구속, 완성으로 이어지는 구원 역사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는 살피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정리는 <사무엘서>를 그저 다윗의 이야기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책의 막장을 덮은 뒤 내 '높은' 위치를 실감했다. 왕이요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새삼 인식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의 지위를 부여받은 건 모든 신약 성도들이 가진 특권이다. <사무엘서>에 나타난 왕들의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는 오늘도 왕의 신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하게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위대한 왕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 행복과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의 왕이 될 것인가. 이 책은 이 질문에 관한 가장 성실한 신앙적·신학적 참고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을 끝으로 지난 2개월간 계속된 '리더십 관련 책 탐독하기'는 일단락되었다. 총 6권의 책을 통해 권위와 리더십을 깊이 탐구했고 성찰했다. 앞서 언급한 리더십 교체기에 직면한 내 현존을 응시하며 어떤 지혜와 명철이 필요한지를 폭넓게 사유할 수 있었음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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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의 이야기 1 - 분열왕국의 시작
한홍 지음 / 두란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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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리더십의 교체를 보며 무언가의 열망이 들끓었다. 리더십에 관한 지혜가 목말랐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책을 찾기 위해 서재를 뒤졌다. 한홍 목사의 『왕들의 이야기』는 가장 먼저 내 눈에 들어온 책이다. 오래전 탐독했었다. 2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고대 이스라엘 왕조사를 훑는다. 통일 이스라엘의 3대 왕 솔로몬을 시작으로 분열 왕국 이후의 수많은 열왕들을 다룬다. 구약성경 <열왕기서>를 쉽게 정리했다고 볼 수 있다. 책 전면 표지에는 '이스라엘 왕조사로 훑는 하나님의 리더십 코드'라는 부제를 달았다. 정말 흥미진진하고 스펙터클하다.

주지하다시피 <열왕기서>는 솔로몬 때부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최후 주전 586년까지, 약 400년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42명의 왕들, 북방 이스라엘의 19명, 남방 유다의 23명과 12명의 선지자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스라엘 열왕의 역사에는 야합과 시드기야 같은 악한 군주가 많았다. 반면 요시야나 히스기야 같은 거룩하고 탁월한 지도자도 있었다. 각 왕들마다 공과는 무엇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땠으며 결국 나라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갔는지 생생하게 들려준다. 『왕들의 이야기』는 저자가 <열왕기서>를 현대적 언어로 정리하고 풀어낸 해설서다.

성경을 읽다 보면―오롯이 인간적 기준에서―너무 재미있어 술술 읽히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지독하게 지루해서 한 장도 넘기기 힘든 부분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가령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얼마나 재미있는가. 하지만 재미도 잠시 바로 이어지는 레위기의 지루함은 얼마나 곤욕스러운가. 물론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인간의 지적·언어적 한계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열왕기서>가 훑는 이스라엘 왕국의 드라마는 정말 재미있고 박진감 넘친다.

『왕들의 이야기』에서 저자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질문은 '왕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은 세상 왕과는 달라야 하며 그 최고의 전범과 다수의 좋지 않은 사례들을 기술한다. 왕권을 가장 모범적으로 행사한 자는 다윗이다. 다윗이야말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왕권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 사례다. 그렇기에 제법 괜찮은 이스라엘 왕이 죽을 때마다 성경은 최고의 극찬으로 "다윗과 같이 정직했다"라는 문장으로 평가한다. 남유다의 세 왕, 즉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만이 그 영광스러운 닉네임을 선사받았다. 대부분 악하고 교만하고 어리석었다. 하나님은 분노하셨고 왕국은 비참했다.

북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악했고 어리석었다. 특히 아합과 므낫세의 집권기는 악함의 극치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그 구조와 형태가 하나의 패턴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두고두고 노엽게 한다. 마치 누가 더 악한지 악의 올림픽 대회를 펼치는 것 같다. 결국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130년이나 먼저 멸망해 앗수르 제국의 노예가 되어 고통을 당한다. 당시 앗수르의 잔인한 동화정책으로 인해 사마리아인들은 인종이 섞이게 되었고 훗날 70년 바벨론 포로기 후 복귀한 유다인들에게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할 정도로 치욕적인 신세가 된다.

남·북 이스라엘 왕정사에 왜 그렇게 악한 왕이 많았을까 생각했다. 선에도 전범이 있듯 악에도 시조가 있다. 난 후자의 타깃을 솔로몬으로 잡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왕들이 저지른 가장 악랄한 범죄가 바로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이기 때문에 모세에게 율법을 전달할 때 첫 번째로 기록했는데도 말이다. 지혜를 구함으로 찬란하게 시작된 솔로몬의 왕권은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이방 여인을 취하고 그들의 우상을 허용함으로써 몰락의 길을 걷는다. 두 번이나 주어진 회계의 기회도 무시할 만큼 솔로몬의 지혜와 영성은 사라졌다. 아버지 잘 둔 덕에 목숨은 부지하였고 자기 집권기에 왕국 분열은 막을 수 있었다. 솔로몬의 죄로 인해 그의 사후 왕국이 남북으로 갈라지고 우상숭배라는 이스라엘의 씻을 수 없는 죄의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걸 <열왕기서>는 잘 보여준다.

우상숭배를 비롯하여 온갖 죄에 찌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말로는 비참함 그 자체였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다. 남유다는 다윗과의 언약을 충실히 지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인해 다윗의 혈통이 계속해서 왕이 된 데 비해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반역을 포함 총 9번이나 왕조가 바뀐다. 모두 선왕을 배반하고 독살한 쿠데타에 의해서다. 300년도 채 되지 않을 동안 왕조가 9번 바뀌었다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사무엘서>의 희망적 메시지와는 달리 <열왕기서>의 참혹한 왕조사는 결국 왕직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왕직은 진짜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저자 한홍 목사의 필치는 힘 있고 세련됐다. <열왕기서>를 일반 성도들도 알기 쉽도록 체계적으로 잘 정리했다. 강조해야 할 부분을 잘 강조했고 각 파트마다 목사로서의 자신의 강해를 덧붙였다. 왕의 이야기에만 함몰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입장을 대변한 선지자의 목소리를 비중 있게 기술했다. 이스라엘 왕직이 선지자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고유한 특징을 잘 부언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도, 도표, 지도를 적절히 배치했고 남·북 이스라엘 왕조를 동시대에서 구분·비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 책을 참고한다면 <열왕기서>를 폭넓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누구나 왕이 되려 한다. 대접하는 것보다 대접받으려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큰 사회이든 작은 조직이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자화상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인식할 때 즈음은 이미 늦었다. 사람들 앞에 왕처럼 군림하는 맛은 마치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 번 빠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회복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예수를 믿든 믿지 않든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왕 맛'에 함몰되어 자신의 영혼을 파괴시키고 있다. 성경 <열왕기서>는 단호히 일갈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진정한 왕은 따로 있다는 것을. 이 거대한 메시지를 쉽고 박력 있고 세련되게 풀어냈다는 점 만으로도 이 책 『왕들의 이야기』는 값지다. 리더십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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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서 영성으로 - 2017 신판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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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읽은 책을 다시 집어 든 건 순전히 저자 이어령 때문이다. 최근 모 신문에 게재된 그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암 투병 중인 건 알았지만 그사이 너무 초췌해진 그의 외연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저 사람이 과연 내가 아는 이어령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맞나 하는 생각이 강렬했다. 힘 있고 열정적인 지성 활동으로 동분서주했던 그의 과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인터뷰 내용을 훑으며 외연은 많이 초췌해졌지만 영혼만큼은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느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여전히 귀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그 직감의 연장선상에서 그가 종교적 회심 후 쓴 참회론적 메시지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다시 잡았다.

서평을 쓰기 전 이 책을 에세이로 구분할지 기독교 서적으로 구분할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개인 이어령의 회심기이기도 하지만 딸과 자신 사이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이 큰 뼈대를 이루고 있다. 결국 개인 이어령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책 전반에 흐르는, 여기까지 이끄신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 서적으로 구분하여 서평을 남기기로 했다.

그렇다.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기독교 서적이다. 우리 시대가 가장 존경하는 지식인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가 거대한 지성에서 거룩한 영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고백하는 책이다. 띠지에 적힌 문구처럼 "시대의 지성이 전하는 영성에 대한 참회론적 메시지"이다. 과거에 굳게 닫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떤 계기로 열리고 그로 인해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결국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저자 자신의 현존을 좇는 이야기다. 책 속에는 하나님의 섭리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내면을 여는 한 지식인의 진솔한 자기 부정과 신앙고백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저자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장면으로 일본에서 세례 받은 사건을 꼽는다. 관련 일화의 전후 맥락과 그 뒷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당시 지식인 이어령 전 장관이 세례 받는다는 소식은 국내 대부분의 언론에서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이 인본주의적 성과를 뛰어넘어 영성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주변의 엄청난 궁금증에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책 제목대로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전하는 전도자적 삶을 사는데 앞장서 왔다.

워낙 글재주가 뛰어나기에 책 곳곳에 감미롭고 촉촉하며 탁월한 문장들이 독자의 가슴을 사로잡는다. 문학평론으로 시작해 에세이, 소설, 드라마, 시나리오, 심지어 올림픽 개폐회식 대본까지 쓴 그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시로, 어떤 내용에서는 철학적 탐구로, 어떤 대목에서는 드라마틱한 표현으로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내러티브를 펼친다. <시편>을 쓴 다윗 같기도 하고 『고백록』의 저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와도 엇비슷하다. 저자가 세상의 지식과 학문이 아닌 기독교 신앙을 다룬 첫 번째 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신앙서적보다 진솔하고 감동적이다.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저자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끌기 위해 평생을 기도해온 딸의 이야기다. 딸 이민아 목사에게 자신이 존경하는 아버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현실은 상당히 괴로운 숙제였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믿지 않는 가족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더욱이 아버지(저자)는 한국에서 가장 지성 있는 인물로 존경받는 소위 세상 지식의 거대한 기둥이다. 거꾸로 저자의 입장에서는 미국에서 검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지성을 사랑하던 딸이 어찌하여 하나님을 믿게 됐고,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됐는지가 궁금했을 것이다. 환언하자면 이 책은 부녀간의 엇갈린 스탠스에서 기독교 영성이라는 존재론적 합치를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과정에 관한 고백록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기독교 서적이다. 그러나 꼭 기독교인만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비기독교인도 조금 넉넉하게 시야를 넓히면 거북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분명한 기독교 신앙 이야기지만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담담한 문체 속에 녹아들어 가 비신앙인이나 이웃 종교인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또한 아버지를 향한 딸의 오롯한 존경과 사랑, 동시에 딸을 향한 아버지의 웅숭깊은 애정을 이 나라 최고 지성의 글발로 만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기독교 서적을 뛰어넘어 이 책을 한 권의 보편 에세이로 읽을 수 있는 동력이다. 그렇기에 출간된 지 오래되었지만 신자든 비신자든 무난하게 추천할 수 있겠다.

서평을 정리하자. 저자는 작년 연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재앙을 겪고 있는 전 인류를 향해 "역사적으로 항상 대 역병이 지나가고 나면 이전보다 나은 번영이 이뤄졌다"면서 "이 팬데믹 패러독스의 마지막 희망은 기독교"라고 밝힌 바 있다. 세상과 대중을 향해 서슴없이 하나님을 외치는 저자의 기백이 멋지다. 저자는 수년째 암 투병 중이다. 저자가 지성을 넘어서 만난 하나님이 그의 말년을 축복하며 존귀하게 사용하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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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합본) 신 :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
김용규 지음 / IVP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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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정확히 두 번 읽었다. 900페이지가 넘는 이 두꺼운 책을 2독 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기독교인에게 신(하나님)은 언제나 갈망의 대상이요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다. 책 내용도 방대한 신학적, 역사적, 인문학적 디테일을 공유하고 있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특히 저자가 '디아트리베(diatribe)'라는 고대의 수사법, 즉 친근하고 생동하는 일상용어로 바꾸어 독자나 청중을 대화의 상대로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담화를 나누는 방식의 문체를 사용하여 심오한 신학적, 철학적 담론을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었다.

 

철학자 김용규의 『신』은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제가 알려주듯이 제목에서 말하는 '신(神)'은 바로 기독교의 신,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하나는 신앙을 통해서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통해서다. "전자는 은혜롭지만 자폐적이기 쉽고, 후자는 설득적이지만 자주 은혜롭지 못하다"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오만이며,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라는 안셀무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 이 책이 표방하는 관점이라고 얘기한다. 즉 『신』은 인문학적, 신학적, 역사적 맥락을 통해 살피는 기독교 하나님에 관한 서술(설명)이다. 

 

책은 총 5부로 나뉜다. 「1부 - 하나님은 누구인가」는 서구의 문학과 예술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외형을 소개한다. 「2부 - 하나님은 존재다」는 존재물이 아닌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신성을 탐구한다. 「3부 - 하나님은 창조주다」는 하나님이 세계 만물을 창조하고 초월적 존재로서 어떻게 세계에 내재하는지를 천착한다. 「4부 -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는 하나님이 인간과 어떤 식으로 인격적 관계를 맺는지 은혜롭게 성찰한다. 마지막 「5부 - 하나님을 유일자다」는 기독교의 가장 난해한 교리면서 핵심적인 내용인 '삼위일체( 三位一體, trinitas)'에 대해 설명한다. 저자는 총 5개의 파트로 하나님의 존재성(신성)이 역사적·신학적으로 어떻게 인간에게 정립되어 왔는지를 세밀히 추적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 책은 이해의 신앙을 강조한 안셀무스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인문학으로 읽는 하나님과 서양문명 이야기'라는 강렬한 문구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책 곳곳에 수많은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이 소개된다. 그중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주 언급되는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평가받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각기 신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압도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잦은 등장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외 암모니우스, 오리게네스, 플로티노스 등의 고대 철학자뿐만 아니라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 등의 중세 신학자, 그리고 마르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개혁가,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등의 근대 철학자, 또한 칼 바르트, 에밀 브루너, 파울 틸리히 등의 현대 신학자들까지 전 시대를 아우르는 철학자, 사상가, 신학자들이 소개되며 저자의 서술을 이끌어간다.

 

저자는 하나님을 설명하는 소재로 철학과 신학만 사용하지 않는다. 문학, 역사, 과학, 예술 등의 여러 영역에서 탐구되고 천착된 하나님에 대한 다양한 맥락을 소개한다. 칸트의 철학, 미켈란젤로의 그림, 단테의 시, 다윈의 논문, 카잔차키스의 우화, 파스칼의 경구,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등 각기 다른 여러 매체들을 인용하며 하나님의 입체성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 그런 탓인지 책 속에는 여러 삽화들이 수록됐는데 저자의 설명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입체적 설명을 돕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미켈란젤로가 그린 성 시스티나 성당의 폭 13.2미터 길이 41.2미터의 희대의 역작 '천지창조'에 숨겨진 역사적, 인문학적, 신학적 의미를 자세히 감상하는 방식이다. 서양문명을 아름답게 수놓은 예술작품을 삽화로써 눈으로 감상하고 찬란한 문학작품의 인문학적 리뷰를 읽어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4부 - 하나님은 인격적이다」라는 장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고난의 아이콘 욥의 삶을 비교 추적하며 하나님의 인격성을 설명한다. 사르트르를 위시한 현대 실존주의자들이 고민했던 '부조리(不條理, absurdity)'의 문제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상세히 소개한다. 요는 이렇다.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한 침묵이 필요한데 아브라함은 믿을 수 없는 것(부조리)을 믿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키르케고르가 역설한 인간 성숙의 3단계 중 가장 높은 '종교적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아브라함이 잘 실행했기 때문임을 부언한다. 이러한 저자의 서술은 인격적 하나님을 만난 성경인물의 예를 추적(분석)함으로써 수 천 년이 지난 작금의 현대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  

 

마지막 장 「5부 - 하나님을 유일자다」는 '삼위일체론'이라는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다루는 장이다. 기독교 신학은 처음부터 성부·성자·성령이 하나라는 것을 주장했고, 325년 열린 니케아 공의회 이후 그것을 교리로 정립한 바 있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성의 실체이자 정수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을 만나 그의 형상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의 음성을 귀로 직접 듣지 않아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처지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할 수 있는 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란 가장 난해한 신성이면서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이며, 은혜롭고 감동적인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기독교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였다. 318년 아리우스 논쟁에서 시작되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마감될 때까지 63년간 삼위일체론은 교회 회의를 통해 신조 형태로 고정되었다. 이쯤에서 내 고백을 보태겠다. 삼위일체의 교리사 중 나는 반아리우스주의자이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인 아타나시우스의 용기와 기백을 가장 인상적이고 은혜롭게 수렴하고 있다. 과거 청년 시절에 아리우스-아타나시우스 논쟁을 성극으로 꾸밀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의 감동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들은 구세주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는 아타나시우스의 강변은 아직까지도 내 가슴에 아로새겨져 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신성의 고차원적 독특성인데 이를 인간의 글로 표현하거나 그림으로 그려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인간의 이성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소개된 시인 단테와 화가 루블료프의 고민도 여기에 닿아 있다. 

 

젊은 시절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성적 이해가 불가능해 수많은 질문이 내 신앙을 짓눌렀던 때가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거웠다고 자부할 수 있는 시기였지만 젊은 치기에 뭐가 그리 궁금하고 의심이 많았던지 하나님의 존재성과 섭리 방식, 교회 교리에 관한 이성적 납득을 예민하게 요구할 때였다. 그러던 터에 아우구스티누스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기독교사에 한 획을 그은 성인조차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걸 알고 나는 '불가해된 은혜'로 삼위일체를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우리가 확실히 밝힐 수 없는 이유를 다름 아닌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서 발견했고, 우리가 육체의 한계와 이에 따른 이성의 한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때에야 이 진리를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부·성자·성령의 공동체적이고 동등한 사귐이 곧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삼위일체를 피상적이고 기계적으로만 탐구했던 나의 무지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전회와 같은 놀라운 지혜와 통찰로 경각한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유독 5부에 많은 관심을 갖고 탐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인문학으로 톺아본다는 건 종교적(신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발칙한 행위일 수 있다. 하나님은 예배 생활을 통해, 성경 묵상을 통해, 기도와 그 응답 과정을 통해 '은혜롭게' 만나야지 학문적으로 탐구한다는 건 현존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격성을 고매한 논리의 틀 안에 가둬버리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소중하고 성도의 신앙 지침서가 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여러 신조들도 역사적으로 토론과 협의를 통한 학문적 통과의례를 거친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한다는 면에서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의도치 않은 장에서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국 '사랑'임을 강조한다. 현재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데 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님의 인격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은혜롭게 논증한다. 저자의 이런 맥락은 책의 「맺음말」까지 이어지는데 기독교는 결코 독단적이거나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며 오히려 고차원적·공동체적 사랑, 즉 상호내주적·상호침투적 자유와 평등과 사랑으로 이룩되는 인간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근대 이후 서양문명의 주요한 특징인 하나님과 그의 이름으로 언급되던 최고의 가치들이 점차 사라져 가는 역사를 맞이함을 경고하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숭고한 틀 안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응당 타당한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대 가장 잘 나가는 인문학자 유발 하라리가 『호모 데우스』에서 통렬히 경고한 대로 인간은 "신이 죽었다"라고 선언하는 것을 넘어 제 스스로 신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우리의 모든 인식과 가치는 상대적으로 재구성된다. 객관적 진리와 과학적 지식은 이론적 담론과 사회적 구성물로 전복되며 시대와 기호에 따라 절대적 진리는 반귀납적으로 역조합된다. 신은 이제 죽음을 넘어 인간으로부터 조롱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했다. 나는 그것을 피부로 느낀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주변 지인들로부터 심심치 않게 공격과 비아냥을 받곤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내 주일성수는 시간 낭비이며 십일조는 자선사업으로 조롱당한다. 신을 부정하면 가치가 사라져 버리고 신을 긍정하면 더 이상 세련되지 않다고 핍박받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명징하게 신의 존재를 믿는 나에게 이 한 권의 책은 엄청난 도전과 감동을 선사했다. 

 

서평을 정리하자. 9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인문학(혹은 신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탐독할 수 있었다. 평소 인문학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공부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은혜롭기까지 해서 나름 유익한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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