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Not My Hat (Hardcover)
Klassen, Jon / Walker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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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This is s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o c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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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2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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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4-03-31 10:21   좋아요 0 | URL
우리 전화번호 교환을 해야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ㅎㅎ

2014-03-28 2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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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1 10: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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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31 0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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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0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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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08: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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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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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0: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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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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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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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2: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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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3: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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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3: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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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4: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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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4: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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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1 14: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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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기분이 꿀꿀했는데, 출근길에 '엠블랙'의 [Y]를 반복해 듣노라니 조금 괜찮아지더라. 그러나 근무하면서는 들을 수가 없어서일까, 기분이 다시 꿀꿀해졌다.





아...얘네들하고 놀러가고 싶다. 낮에 꽃놀이하고 밤에는 늦도록 술을 마시며 얘네들하고 웃고 떠들고 즐기고싶다.. 낮에 꽃놀이는 생략해도 되니 밤새 얘네들하고 앉아서 술이나 마시고 싶다. 하아- 

근데 얘네 술 마셔도 되는 나인가? 미성년자는 아니겠지? 초반에 조끼만 입고 팔뚝 드러낸 애, 멋져..♡.♡


족발도 먹고

삼겹살도 먹고

소세지도 먹고

치킨도 먹고

파프리카도 먹자,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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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벌 2014-03-28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같이 가요. 이 친구들이랑 술 마시러 가게 되면 저를 불러요. 광주에서 비행기 타고 날아갑니다. (전 이준이 좋더라구요)

다락방 2014-03-28 17:35   좋아요 0 | URL
팔뚝 드러낸 애가 아마도 이준인 듯 합니다. 아아- 우리는 한 남자를 두고 싸우겠군요. 고로 저는 버벌님을 부르지 않고 저 혼자 이들과 놀도록 하겠습니닷! =3=3=3=3=3

버벌 2014-03-28 19:28   좋아요 0 | URL
!!!!!!!!!!!!!!!!!!!!!!!!!!!!!!!!!!!!!!!!!!!!!!!!!!!!!!!!!!!!!!!!!!!!!!!!!!!
 
어떤 날 2 - 아픈 여행 어떤 날 2
김민채 외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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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써야했기 때문에 쓴 글이라는 느낌때문에, 누구의 글을 펼쳐도 후두두두둑 감성이 지나치게 쏟아지기 때문에 읽기에 버겁다. 다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박연준의 글 때문에 읽고 싶었는데 이 시리즈는 앞으로 안읽게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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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기독교 -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짧은 리뷰를 쓰기에 앞서, 별점 없는 리뷰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별점을 선택하지 않은 채 쓸 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가끔은 별을 주는게 내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는 듯하고, 몇 개를 줘야하는지 스스로 알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에. 이 책 역시 마찬가지, 셋이나 넷을 주는게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도통 모르겠다.)


하나의 사건 혹은 하나의 장소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양하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어릴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나는, 교회에 대해 좋은 추억도 물론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뼈아프고 후회되는 기억들을 준 곳이기도 하다. 가능하다면 그 시절들을 지우개로 쓱싹쓱싹 지워내고 싶을만큼. 개중 어떤 기억은 기어코 눈물을 불러내기도 한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교회에 다녔지만, 그 오랜 시간을 다닌 그곳에 이제는 그야말로 악감정만 품고 있으니, 투자한 시간과 세월은-그것을 투자라 부르지 않을지언정- 얼마나 허망한가. 그렇게 나는 철저히 내 입장에서 교회에 대해 '안좋은' 생각과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의 뿌리는 꽤 단단했다. 게다가 이런 내 생각에 부채질하듯 곳곳에 꼴보기 싫은 기독교인들이 넘쳤다. 지하철을 돌아다니며 큰소리로 (그들만의)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도, 길 한복판에서 큰 소리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도, 한없이 불쾌하고 한심했다. 다 싫었다, 다. 모조리 다.


그러다 몇해전, 시사인에서 '임영신'의 인터뷰를 읽으며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교회에서 자신의 인생이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었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줬다고 말했다. 내게는 짜증나는 장소이기만 한 곳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좋은 장소일 수 있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나랑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의 친구 역시, 자신은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세상 누구도 도와주지 않던 자신의 어머니를 도와준 곳이 교회였기 때문에 그런 교회를 어머니 앞에서 부정할 수 없다고 했을 때도 역시, 충격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당연한 사실이다. 내게 나쁜 곳이 다른 사람에게도 나쁜 곳일 리가 없다. 당연한 사실인데 이렇듯 마주할 때마다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마주하고나니 인정하는 게 처음 보다는 쉬워진다. 



김영민의 《당신들의 기독교》는 기독교인 이거나 기독교인 이었던 10人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기엔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인물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수의 뜻에 반하는, 기독교 자체를 지긋지긋하게 만들어버리는 인물들이다. 교회에서 생활한 시간이 길었던 저자인만큼, 그의 이야기들은 아주 생생하게 읽힌다. 먼 곳에서 본 게 아니라 가까이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적은 것이니, 이 얼마나 신뢰할만한가. 나는 A 부터 J 까지에 이르는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를 신나게 읽어간다, 


라고 쓰고싶지만 그리 신나게 읽지 못했다는 것이 이 책의 단점이다. 김영민의 글은 언젠가 신문에서 칼럼으로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바, 오호라 나도 이 사람의 글을 읽어볼까, 하고 작정하고 읽었던 터였다. 그러나 그의 문장들이 내게로 와 바로바로 꽂히지를 못했다. 그의 문장에 숨은 뜻이 문제가 아니라, 그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들 자체가 내게로 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것. 이 책, 《당신들의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아는 단어가 많고, 이렇게 말하는 게 건방지게 들릴테지만 지식 역시 풍부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쓴다. 그러나 쉽.지.않.다. 


실재 살아 숨쉬는 우리 주변의 기독교인에 대한 이야기이니만큼, 더 쉬운 글들로 써줬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아주 많이 든다. 그가 선택한 단어들 각각이 어렵거나 젠 체하는 단어는 결코 아니다. 다만, 내가 그 단어들에 무지하기 때문이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문장을 읽는 것이 내게는 쉽지 않았다는 말이다. 차곡차곡,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들을 표시해두었다. 언제고 찾아보아야지 하면서.



언거번거함, 톺아보다, 부박하다, 밑절미, 듣그럽다, 희떱게, 뼛성, 포실하다, 엉너릿손, 맨망한



이보다 더 많았지만, 이 단어들에 표시를 해두면서, 내가 이 단어들을 평소에 쓰는 단어였고 또한 정확한 뜻을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의 문장을, 본문을 '대략적으로' 읽어내는 게 아니라 명징하게 읽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저 단어들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저 단어들과 아름다운 문장들이 나로하여금 이 책을 '분명하게' 읽어내게 하는데는 방해가 되었다는거다. 욕심이겠지만, 교회에 뿌리깊이 박힌 자본주의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조금 더 날카로웠다면 조금 더 신랄했다면 좋았겠다는 거다. 양미간에 주름을 빡-잡고 집중해서 읽었지만, 이 얇은 책의 분량이 쉬이 읽히질 않아 아쉽기만하다. 한 번 더 읽는다면 더 잘 와닿을지 알 수 없으나, 한 번 더 읽지는 않을 것 같다.



밑줄긋기 한 문장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니 처음보다 더 잘 읽히기는 한다. 가만 들여다보니 그건 알지 못하는 단어와 아름다운 문장 때문에 이해하지 못했던건 아닌것 같다. 그렇다면 어디로부터 온것일까. 무엇이 나를 이 책과 딱 맞아떨어지게 하지 못한걸까. 분명하고 명징하게 이 책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책을 읽었던 것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밖에서 짚어내는 그들의 문제점을, 안에서도 돌아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건, 비단 기독교에만 해당하는 건 아니다.




책을 쓰지도 않았고, 그래서 글쓰기 행위에 옮아붙곤 하는 사후적 보충과 과장의 삶 대신 일회적 상호작용의 완결성에 힘을 다했으며, 무슨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지니지도 않았던 우리의 스승 예수는 때론 당대의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고 스스로 스캔들의 대상이 되기도하면서 민중의 현장을 오갔다. 그러나 그렇게, 민중과 대화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룬 그 놀라운 각성과 변화의 현장은 까맣게 잊힌 채로, 기억과 전승은 체계가 되고 말았다. 그 추종자와 해석가들이 건설하고 건사해온 종교적 체계는 '정신이 없는 (관료적) 전문가' 로 들끓어 기능적으로 각박한 채 종종 턱없이 무능하다.– 120-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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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6 18: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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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7 14: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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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 2014-03-27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문만 봐도 읽어내기 쉬운 문장들은 아닐꺼 같네요.
사회고발(?) 같은 종류의 책들은 풍부한 문학적 표현보다는
명확하고 간략한 문장들이 저는 더 좋던데....

아...그래서 <밤이 선생이다>가 별로 였었었엇나봐요... =..=

다락방 2014-03-27 14:11   좋아요 0 | URL
한 문장이 너무 길어서 읽기 힘든걸까요? 가만 들여다보면 딱히 어려운 말이 아닌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읽기 어렵네요. 이 리뷰 써놓고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노라니 읽기 어려웠다는 감상이 제법 많네요. 흐음.

모모 2014-03-27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다니는 회사는 사모가 경리를 봅니다. 매일 출근해서는 목사설교방송가 찬송가를 크게 틀어놓고 있습니다.
목사가 울부짖고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상황에서 저는 도저히 사모와 같이 은혜를 받을수가 없습니다.
아니 저렇게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희생하라고 하는 설교를 들으면서 왜 같은 사무실을 쓰는 여직원에 대한 배려는 못하는 것인가? 아니지 직원은 배려의 대상이 아닌거지? 하고 분노와 절망이 교차하여 힘듭니다. 자기 스스로도 소리가 크다는걸 알면서도 줄이지 않는것도 저의 입장에서는 서운을 넘어 자괴감까지 빠집니다.
회사를 그만둘수 없는 저의 상황이 원망스럽고 하루 하루 회사오는게 지옥에 가는것 같습니다.
목사설교소리, 찬송가소리, 그찬송가를 따라 부르는 소리 듣기싫다고 말할수 없는 이 치사스러움도 절망스럽구요.
무교인 저는 배려없는 사모때문에 기독교가 싫어지고 있습니다.

미안해요.. 처음 다는 댓글이 이런거네요..

다락방 2014-03-27 14:15   좋아요 0 | URL
아니, 찬송가라뇨...설교방송이라뇨.....아, 너무합니다. 대체 사장님은 왜 경리를 사모님에게 맡겼답니까?

저는 중학교때 윤리선생님이 수업 시작전에 찬송가 부르게 시켰어요. 자기가 악보도 크게 써와서 칠판에 붙이고는 다같이 부르게 했죠. 그런 뒤에 수업을 시작했어요. 저희 학교는 기독교 학교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주말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주보를 받아와 자기한테 보여주면 오천원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진짜 토할 것 같은 윤리교사였어요. 그러면서 다른 선생님들은 룸싸롱 다닌다고 막 욕했거든요. 룸싸롱 다니는 건 욕할만한 행동이고, 자신의 종교를 강제하는 건 욕 먹을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는가봐요. 그것도 자기보다 한참 어리고 자기한테 배울 수밖에 없는 아이들한테 말이죠. 대체 왜 그토록 자신의 종교를 강제할까요? 이 책의 111쪽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요.


그렇지만 진리보다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니체)하고 복음보다 복음에 대한 아이러니를 말하는 자가 인문학도일진대, 자신이 지닌 믿음의 내용이 그 자체로-그러니까 현실적 전유(realistic appropriation)의 복합적 배려나 고민조차 없이-'복된 소리[福音]'라고 확신하고, 이를 그 누구에게든 애써 선전하려는 이는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자신의 것에 그처럼 당당하고, 심지어 타인들의 가책을 유발시키려는 태도 속에서 한껏 오연하려면 대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것일까? 자신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릇, 자신의 경력이든 실력이든 혹은 자신의 자식이든 재식(才識)이든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소개하고 발보이게 드러내지 않는 게 한발 앞선 자의 인지상도(人之常道)일 것인데, 제 종교가 제일이라고 천지가 시끄럽도록 외치는 이 사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나저나 반갑습니다. 처음 다는 댓글이야 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

버벌 2014-03-27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분 댓글 보고 중학교때 일이 생각나서요. 전 미션스쿨을 나왔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절대 자의가 아닙니다. 뺑뼁이에요.
미션스쿨이니 당연히 예배도 보고, 종교 수업도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때로 기억을 합니다. 종교 수업을 들어오신 학교 목사님이 그날 날짜에 맞춰 번호를 쭈르륵 세워서 회개합니다 말을 하지 않으면 수업을 끝내지 않는다고 했어요. ... 제일 마지막은 저였어요. 이걸 대답해야하는건가? 난 기독교도 아닌데. 그냥 아무것도 없이 회개 한다고 하면 그게 더 나쁜거 아닌가? 아니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나의 이 모든 생각을 회개하라고 하시는건가? 대답을 바로 못했어요 전. 목사님은 자꾸 물어보고, 전 쳐다보기만 하고, 종은 울리고, 친구들은 웅성거리고, 짝꿍은 내 팔을 잡고 흔들고...... 결국엔 대답을 하고야 말았어요. 친구들이 화장실에 가야한다고 아우성을 쳤거든요. .... 저는 처음 다는 댓글이 아니에요. 응?? ㅡㅡ??

다락방 2014-03-28 10:18   좋아요 0 | URL
하아- 싫다. 싫으네요 버벌님 ㅠㅠ
설사 버벌님과 학생들 모두가 기독교이기 때문에 자의로 그 학교를 선택했다 해도, '회개' 라는걸 그렇게 공개적으로, 의무적으로 해야하는 걸까요? 그렇게 시켜야하는 걸까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지나치게 믿고 지나치게 빠져버리면 어느순간 이성은 달아나버리는 것 같아요. 자기 생각안에 갇혀버리고 마는거죠. 끔찍하네요. ㅠㅠ

2014-03-28 14: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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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8 14: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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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기독교 -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절판


순진한 예수(Jesus)라면 그리스도(Christus)가 세속의 권력(Caesar)과 그 열매를 축복하리라고 믿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들의 기독교'는 그런 식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조금 에둘러 논의를 이어가자면, 자본이 권력과 사통하면서 애초부터 국가와 통혼(通婚)한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굽어보면서 낱낱이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초기 사회주의 운동이 국가의 문제를 조금 더 진지하게 사유하지 못한 채 '국제화'에 서두른 실책을 안다. 그래서 바쿠니(Mikhail Aleksandrovich Bakunin, 1814~1876)의 축출에서 두드러지듯이 아나키스트 운동의 급진성과 그 공동체적 생산성은 애초부터 권력의 자장에서 제외되면서 소수화되고 말았다는 사실도 안다. 마찬가지로 젊은 예수가 독특하게 일군 '동무공동체'의 아나키즘적 급진성('네 가족을 버리고 내게로 오라')도 중세의 가톨릭 제국-체제 속에서 아득이 볼각해버렸다. 그런가 하면 21세기의 한국 개신교회는 예수의 첫닭울이와 같은 메시지를 까마득히 잊은 채 강박적으로 붙들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기껏 '가족주의'다. -17쪽

'계급'이 다른 데다 이미 전쟁미망인이었던 터라 둘 사이의 결합은 쉽지 않았겠지만, 젊은 날의 B는 워낙 뛰어난 미인이었고, 알다시피 미인이라면 자본도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계급도 적수가 되지 못한다.-25쪽

가령 내가 교회를 멀리하게 된 사연이 룸살롱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C목사와 같은 이들의 탓으로 돌릴 순 없지만, 소름이 돋거나 하품이 솟는 주류 교회들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예수'라는 어느 유묘(幽渺)한 존재를 빌미삼아 그 애달픈 장소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 없는 데에는 E 전도사와 같은 이들의 가없는 정성과 노고가 숨어 있는 것이다. 나는 즐겨 '사람만이 절망'이라고 되뇌지만, 드물게 '사람만이 희망'인 경우도 있는 것이다.-72쪽

우리 시대 세속의 성분과 구조를 감안한다면 한 달에 1300만 원씩 혹은 그 이상-이재용씨처럼 한 달의 전기세만 2400만 원씩을 낼 수 있도록-을 번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그러니까 보다구체적으로는 그 수입의 앞뒤가 어떤 정당성으로 꾸려지거나 일관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개인과 체계가 그 뿌리에서부터 사통할 수밖에 없는 세속에서, 개인의 상처와 패착이 개인의 것만이 아니듯이 개인의 사회적 성취와 물질적 풍요가 과연 그 개인만의 것으로 가뿐히 할당될 수 없다면, 이 호기심은 적절히 재구성되어 정당한 사회적 의제로 수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비록 그 개인이 점유할 지분이나 역할, 그 능력이나 노력을 넉넉히 인정하더라도, 3인 가족의 생활을 위해서 1300만 원 이상의 벌이를 반성 없이 계속하고, 그 벌이의 코드가 함입(陷入)되는 체계에 맹목으로 복무하는 것은 비평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91쪽

G 가 내내 부자였을 뿐 아니라 내 기억을 훨씬 상회하는 그들만의 내력 속에서도 부자-엘리트층으로 사회적 위세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그와 그드의 부(富)가 교회 내에서도 인정과 존경의 잣대이자 신의 축복에 대한 증거로 숭상되었고, G와 그들 집안의 성취에 대한 세속적 평가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기복신앙과 풍요의 신학 덕에 한 점의 의혹도 없이 교회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무엇보다도 G는 세속 속에서 열심히-합리적으로 돈을 축적하고, 교회속에서 열심히-은혜롭게 돈을 배치하는 사람인 셈인데, 이를테면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종교인 한국 개신교는 그의 자본-노동을 통해 한국 졸부자본주의의 복사판으로 재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98쪽

'모국어만 아는 자는 이미 그 모국어도 제대로 모르는 것'(괴테)이라고 하듯 한 권의 책만을 맹신하는 것은 이미 책을 읽는 게 아니다. 그는 종이로 된 맹신의 늪을 얻은 셈이다. 따라서 책을 읽는 자는 반드시 여러 책을 읽는 자이며, 읽으면 읽을수록 책과 자신 사이에 개재하는 낯선 부조화에 시달리는 자이며, 책이라는 '세계개창성'과 그 타자성에 조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110-111쪽

그렇지만 진리보다 '진리를 말하지 않도록 조심'(니체)하고 복음보다 복음에 대한 아이러니를 말하는 자가 인문학도일진대, 자신이 지닌 믿음의 내용이 그 자체로-그러니까 현실적 전유(realistic appropriation)의 복합적 배려나 고민조차 없이-'복된 소리[福音]'라고 확신하고, 이를 그 누구에게든 애써 선전하려는 이는 대체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 자신의 것에 그처럼 당당하고, 심지어 타인들의 가책을 유발시키려는 태도 속에서 한껏 오연하려면 대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것일까? 자신과 관계되는 것이라면 무릇, 자신의 경력이든 실력이든 혹은 자신의 자식이든 재식(才識)이든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소개하고 발보이게 드러내지 않는 게 한발 앞선 자의 인지상도(人之常道)일 것인데, 제 종교가 제일이라고 천지가 시끄럽도록 외치는 이 사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111쪽

'혼인은 사랑의 무덤'이라는 세간의 혹펼처럼 외려 (마치 무의식의 어두운 야성이 주체의 찢어진 틈 속에서야 얼핏 보인다고 하듯이) 혼인과 날카롭게 갈라지는 지점 속에서야 사랑의 진실은 부사처럼(adverbially) 번득이는 법이다. 그런 뜻에서, 앞서 언급했듯이, 사랑이라는 진지함 역시 '비보편적 일반성의 체험'으로서 탈(脫)가족주의적 동력을 지닌다.-118-119쪽

사랑이라는 진지함은 혼인관계라는 사회적 동화에 적절하도록 거세된 정념의 형식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페르소나의 찢어진 틈, 혹은 기성의 제도와 날카롭게 갈라지는 구석 속에서 발현되는, 근본적으로 탈(脫)가족주의적 지향인 것이다.-120쪽

책을 쓰지도 않았고, 그래서 글쓰기 행위에 옮아붙곤 하는 사후적 보충과 과장의 삶 대신 일회적 상호작용의 완결성에 힘을 다했으며, 무슨 번듯한 사회적 지위를 지니지도 않았던 우리의 스승 예수는 때론 당대의 관습과 상식을 무시하고 스스로 스캔들의 대상이 되기도하면서 민중의 현장을 오갔다. 그러나 그렇게, 민중과 대화적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룬 그 놀라운 각성과 변화의 현장은 까맣게 잊힌 채로, 기억과 전승은 체계가 되고 말았다. 그 추종자와 해석가들이 건설하고 건사해온 종교적 체계는 '정신이 없는 (관료적) 전문가' 로 들끓어 기능적으로 각박한 채 종종 턱없이 무능하다.-120-121쪽

종교는 스스로 빈 것으로 남아, 늘 종교가 아닌 것을 도우는 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종교가 생활을 규제해왔던 현실을 뒤집어, 어떤 현실과 어떤 희망이 종교를 완성시키는 식으로-그러니까 종교가 생활을 도와, 바로 그 생활이 다시 종교를 완성시키는 방식으로-재배치되어야 한다. 마치 못난 인간들이 못난 신(神)을 제 꼴처럼 품은 채로 역시 못난 생활과 못난 욕망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거꾸로 좋은 사람들의 좋은 생활과 좋은 희망은 종교를 완성하고, 그 속의 신을 아름답게 재현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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