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들의 과거사’ 전시회 여는 여규용 씨  [04/11/25]
 
[책과 사람] ‘고서들의 과거사’ 전시회 여는 여규용 씨

장서가의 길은 여간 어렵지 않다. 일단 책을 사는 데 돈이 들고 귀한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발품도 많이 팔아야 한다. 책을 보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공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정보통신의 첨단을 달리는 요즘 시대에 장서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다음달 1일부터 7일까지 서울 정동 경향갤러리에서 ‘애장서책전-고서들의 과거사’를 여는 이규용(58)씨는 얼머남지 않은 장서가 그룹의 막내에 속한다. 그는 ‘책의 해’였던 1993년에 한국출판문화협회가 선정한 ‘모범장서가’로 선정됐지만 이후 대가 끊겼다. “출협측에서 대상자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모범방서가 제도를 폐지하는 바람에 제가 마지막 수상자가 됐지요. 모범장서가들이 모여서 만든 장서가클럽에서도 회원들이 대부분 70∼80대여서 저는 제일 젊은 축에 듭니다”

지금과 달리 이씨가 책을 모으기 시작한 60년 무렵은 책은 문화와 교양의 상징이었다.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는 고등학교 때 3년 내리 담임을 맡았던 서지학자 고 하동호 선생의 책심부름을 하면서 책의 가치에 눈을 뜬 뒤 헌책방과 고물상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책만 4000여권에 달하지만 좋은 책을 사서 모으는 일은 쉬지 않고 있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씨도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서 고서들을 구하게 됐다는 점이다.

“헌책방에 가봐도 참고서뿐이에요. 책이 오래오래 유통되려면 헌책방이 활성화돼야 합니다. 중간 유통단계가 없으니까 요즘 책들은 신간코너에서 나온 뒤 폐지공장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안타깝지요.”

이씨가 이번 전시회에서 공개하는 책은 시의성이나 희귀성 등을 다져서 추려낸 400여권. 이 중에는 이씨가 애지중지하는 ‘수제본 삼국지’도 포함돼 있다. 이 책은 정식 출판된 게 아니라 61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되던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오려모아서 만든 책이다. “고등학생때 무작정 월탄을 찾아가 넙죽 절하고 글을 써달라고 했더니 삼국지의 서사를 한지에 써주시더군요. 삽화를 그렸던 운보 김기창 화백한테서도 삼국지 제호와 표지그림을 받아서 책으로 묶었지요”

이밖에 월탄의 1939년판 ‘금삼의 피’,이광수가 친일행각의 곡절을 털어놓은 1948년판 ‘나의고백’ 등 1920∼80년대의 희귀서적들도 함께 공개된다. 서적 외에 별도로 수집한 자료를 소개하는 특별전시물 코너에도 재미있는 작품이 많다. 미 8군에서 발행한 월간지 ‘자유의 벗’ 55∼71년분,누드 크로키를 위해 69년부터 모아온 미국 성인잡지 플레이보이의 달력 등도 이 코너에 전시된다. 이씨는 광고 카피라이터 출신으로 ‘들은 풍월’ ‘이거 책 맞아?’ 등의 광고칼럽집을 냈으며 MBC 보도심의국 부국장을 거쳐 MBC프로덕션의 임원으로 일하다 지난 3월 퇴직했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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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시간에는 산 문학을 가르쳐야죠" [04/11/25]
 
일산 백신高 이낭희 교사
교과서 탈피 창작 지도 감수성 교육 14년 한길
청소년 추천 사이트 운영 제자들 문예특기자 진학도

24일 오후 2시 경기 일산 백신고 2학년 4반 교실. 졸음과 사투를 해야 하는 6교시 종이 울렸다. 국어 시간. 칠판 옆 대형 모니터에서 플래쉬 애니메이션이 나오고 은은한 음악이 깔린다.

"가난한 열 아홉 형제 중 열 여덟번째로 태어난 캐나다 총리 장 크레티앙은 선천적으로 한 쪽 귀가 먹고 안면근육마비로 말이 어눌했습니다. 선거 유세 때 누군가 소리쳤어요. 한 나라를 대표하는 총리의 신체적 장애는 치명적 결점이라고…. 그는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나는 말은 잘 못하지만 거짓말은 안 합니다."

교사 이낭희(38)씨의 나레이션이 끝나자 교실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처럼 학생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눈빛 하나하나는 초롱초롱했다. 이 교사가 '지금 이 순간 나의 생각은?'이라는 항목으로 짧은 에세이를 쓰라고 한다. 책에 나온 글을 선생님이 읽고 설명하는 것을 받아쓰는 여느 국어 수업과 전혀 다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을 꿈꿔 온 이 교사는 15년째 이런 수업을 계속해 이제는 교육계에서 '문학선생님'으로 통한다.

그는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하는 말은 "교과서를 버려라!"이다. "입시용으로 배우는 문학이란 얼마나 괴롭고 병든 것입니까? 문학은 지식이 아닙니다. 김소월의 시를 시집이 아니라 수능 점수 잘 받기 위한 문제풀이에서 접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받아쓰기 수업에 길들여진 학생은 문제 해결이나 비판 능력도 제로가 됩니다."

이 교사는 고려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문산여고에서부터 손수 쓴 수업자료로 가르쳤다. 수업 시간에 작가에 대해 먼저 언급하지도 않는다. 상상력과 스스로 탐구하는 자세를 키워주기 위해서다. 학생들은 한 학기가 끝날 쯤이면 시나 소설을 스스로 분석한 작품해설집을 하나씩 갖게 된다.

그의 문학 수업은 사이버 공간에서도 계속된다. 2000년 교사로는 처음으로 문학사이트 '이낭희의 산책 문학여행(www.nanghee.com)'을 열어 창작 지도에 나섰다. 1999년 출간한 '0교시 문학시간'은 이미 교육 현장에서 문학 입문 필독서가 됐다. "전국의 학생들로부터 많을 때는 하루에 20여 통씩 시, 수필 등이 옵니다. 평가를 보내느라 새벽 2, 3시에 잘 때가 많지만 아이들의 문학열정이 느껴져 너무 즐겁습니다." 초등 3, 6학년인 두 딸은 "엄마가 놀아주지 않아 섭섭하다"고 할 정도다.

처음에는 일부에서 '실전 문제 풀 시간도 모자란데 웬 문학이냐'는 불평도 있었다. 하지만 함께 한 문학 체험에 감화돼 갔다.

이 교사는 고3 남학생이 보내 온 시 '아버지가 흔들립니다'를 보았을 때 정말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답글을 보냈다. "… 흔들리는 아버지가 외롭지 않으신 것은 아버지를 위해 어깨 내어드릴 수 있는 님의 따뜻한 가슴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이 교사는 오늘도 제자들에게 생선을 주기보다는 고기 낚는 법을 깨우쳐 주고 있다.

아버지는 열 시가 되면 학교에 오십니다./ 회사 1톤 트럭/ 처음에는 부끄럽고 창피했는데/ 오늘은 열 시가 되어도/ 트럭이 없습니다./ 휴대폰으로 연락했더니/ 아버지는 교문 옆에서/ 떨리는 손을 흔들어 보입니다./ 아버지가 술을 한잔했습니다./ 오직 자식 둘만 바라보는 아버지가/ 독한 술을 한 잔 했습니다./ "마음이 괴로워 혼자 뭇다."/ 아버지 눈은/ 구슬피 달빛을 흘립니다. /술에 취했는지 괴로움에 취했는지/ 팔짱 끼고 있는 아버지가/ 나를 잡고 흔들립니다.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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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인간의 일기통한 자아찾기  [04/11/24]
 
[책벌레의 책돋보기-말테의 수기]고독한 인간의 일기통한 자아찾기

1904년 로마에서 쓰기 시작하여 1909년 파리에서 완성시키고 그 이듬해 라이프찌히에서 출간한 ‘말테의 수기’(1910)는 시인 릴케가 남긴 단한권의 소설이다. 그러나 릴케의 ‘말테’는 전통적인 소설의 주인공에 비해 너무나 낯선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이 ‘소설’의 첫부분은 여늬 일기와 같이 시작한다. ‘9월11일, 투리에 거리,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에 온다는데, 내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죽어 가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의 다음과 같은 결말은 처음 시작과는 논리적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가 누구인지 어느 누구도 몰랐다. 그를 사랑하기는 무척 어려웠고, 단지 한 존재만이 사랑할수 있다고 그는 느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아직 그렇게 하려들지 않았다.’ 소설의 결말에서는 주인공 말테의 일기속의 ‘나’는 ‘그’로 모두 대체되었다. 자아와 초자아, 의식과 무의식, 개체와 사회사이의 변증법이라는 주제의식은 릴케만의 전유물은 아니나, 전작품을 관통하는 전체 줄거리 없이 71개의 단락으로 이뤄진 ‘말테의 수기’는 호프만스탈에 의해 주도되고 하임, 무질, 카프카를 거쳐 되블린으로 이어지는 소위 산문혁명기의 정점을 이루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주인공 말테에 대해서 독자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파리에 온 젊은 덴마크 태생의 시인이며, 나이는 28세다. 말테는 영락한 귀족가문 태생이지만, 이제는 안주할곳 없이 이곳 저곳으로 방랑하는 사람이다. 그는 낯선 대도시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물질적 기반도 없이 그저 홀로 내던져져 있다. 작품의 전반부에는 릴케의 파리체험으로 이뤄졌는데, 그가 체험하는 파리는 병원과 무료 숙박소, 질병과 죽음, 가난과 비참으로 가득찬 도시다.

삶과 죽음의 익명성, 자아의 상실과 소외 등의 표현을 통해서 말테의 실존적 불안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다음 단계에서는 유년기 및 청년기에 대한 회상이 이뤄지는데, 현실체험을 결정짓는 것과 동일한 불안과 정체성의 위험들이 이미 말테의 유년기 체험에 내재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개인적 체험 공간을 넘어서, 독서체험에 근거한 서구의 역사와 문학속의 인물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현재적 삶의 문제의식과 연관시킨다.

‘말테의 수기’는 통일성을 지닌 서술형식에서 벗어나 있으며, 인과적인 줄거리의 연관성이나 완결성도 없고, 이야기의 시작과 끝도 없는 셈이다. 단지 한 고독한 인간이 오로지 자기자신과 일기쓰기를 통해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실존 및 세계속의 현존의 의미를 찾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따라서 작품속의 모든 사건은 말테의 내면의 사건이며, 모든 내용은 말테 자신의 내면의 기록이다. 외부 사건은 인과적이 아니며, 외부현실은 말테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온다. 그리고 이 모든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은 말테의 자아탐구와 인간의 존재방식에 대한 성찰이다.


(김영룡 문학평론가)=파이낸셜뉴스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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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출판가는 ‘삼국지 전쟁’  [04/11/24]
 
거침없는 작가 장정일(42)이 10권짜리 ‘삼국지’(김영사·각권 8900원)를 냈다. 이에따라 출판가에 ‘삼국지 열풍’이 거세질 조짐이다.

●숨겨진 인물복원 ‘우리식 판본’

5년여의 산통 끝에 나온 장정일 버전의 ‘삼국지’는 나름의 차별점을 찍고 있다. 기존의 ‘삼국지’들이 ‘나관중본’ ‘모종강본’ 등을 재해석한 번역판본이었다면 이번엔 영웅 중심에서 벗어나 숨겨진 인물들을 복원시켜 소설에 가깝게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대목에서다.“춘추사관, 춘추필법,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우리 판본’”이라고 출판사측은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출판가 안팎의 시각이 환영일색만은 아니다.“돈벌이 기획출판”이라고 대놓고 비판의 화살을 꽂는 목소리도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유명 작가 몇몇의 삼국지가 국내 양대 메이저 출판사를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현실 아니냐?”며 꼬집었다.“기획출판에 순발력 있기로 소문난 김영사로서도 그런 계산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실제로 국내 서점가를 평정한 대표 삼국지는 이문열의 ‘삼국지’(민음사·전10권)와 황석영의 ‘삼국지’(창비·전10권).1988년 출간된 이문열의 것은 지금까지 무려 1500만부를 팔아치웠다. 지난해 6월 나온 황석영의 것도 현재 100만부 판매실적을 올린 상태. 민음사 정대용 영업부장은 “IMF사태 여파로 95년 이후 판매량이 떨어지던 것이 지난해는 100만부까지 올라갔고, 올해는 60만부 판매가 가능할 것 같다.”면서 “지난해 황석영 삼국지의 가세로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

●“돈벌이用 기획출판” 비난 목소리도

삼국지 출판시장 규모는 지난해의 경우 약 200만부. 유행에 민감한 여타 출판물들과는 달리 삼국지 시장은 끊임없이 신규독자들을 포섭해내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박종화 김구용 김홍신 이지함 조성기 등 ‘버전이 다른’ 삼국지들이 그야말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시장이 혼전양상을 띠다 보니 이래저래 괴담성 뒷말도 무성하다.“어떤 책은 서문을 쓴 이가 진짜 평역자이고, 그 작가는 이름만 빌려줬다더라.”는 식의 허탈한(?) 소문까지 나돌 정도다.

국내 서점가의 ‘삼국지’ 유형은 크게 둘로 나뉘어진다.‘나관중본’‘모종강본’을 원전삼아 번역에 충실한 ‘정역’, 필요한 부분을 변형·재구성한 ‘평역’이 그것. 김구용·조성기 버전은 전자에, 이문열·황석영 버전은 후자에 들어갈 만하다. 이들 책을 요리조리 뜯어 오류를 지적하거나 설명을 붙인 해설서도 한 흐름을 이룬다.

●우리시대 대표판본 어디에

그러나 독자들의 삼국지 감상 취향은 몇몇 인기작가들의 작품 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돼 있는 게 현실이다. 삼국지를 수십년 연구했기로 유명한 김구용의 정역 삼국지를 펴낸 솔출판사 관계자는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과 색깔을 담아낼 수 있다면 삼국지는 얼마든지 다시 쓰여져도 좋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례로 보면 삼국지가 오락적 책읽기의 한 텍스트로 활용된 경향이 짙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0년 솔출판사에서 3차 개정판으로 나온 김구용의 삼국지는 한문의 고졸한 언어감각을 충실히 살린 책으로 꼽힌다. 현재는 인터넷 무료 다운으로 e북으로 볼 수 있게 해 사실상 시장판매는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불황으로 맥빠진 출판가에 어떤 계기로든 운동이 일어난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개성있는 세계관을 담아 작가의 이름값을 해주는, 명실공히 ‘우리시대 판본’으로 남을 삼국지를 또 기다려볼 일이다.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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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를 다시 읽는 밤 [04/11/23]
 
[시론] 체 게바라를 다시 읽는 밤

지난 12일 오후 3시. 카이로에서 30여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야세르’를 연호하며 투쟁의 구호를 외치는 시간, 나는 신촌의 한 영화관에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있었다. 아니 체 게바라와 아라파트와 빈 라덴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다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체 게바라, 아라파트, 그리고 빈 라덴의 공통점은?’ 응답 메시지가 즉시 달려왔다.‘잘 모르는 자들임! 약한 자들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임!’ 내게도 그렇지만 특히 그 친구에게 체 게바라는 모택동, 호치민, 파농 등의 이름 한가운데서도 가슴 설레는 가장 빛나는 오라(aura)를 내뿜었던 인물이다.

꿈과 이상의 무한지점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갔던 이름, 체 게바라. 그는 이제 우리에게 향수 어린 혁명가이자 몽상가이자 모험가이자 이상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결국은 미완으로 끝날 그 무엇을 향해 한 시대의 억압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그리하여 시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가 아니었을까?

21세기에 들어서도 지구촌 도처에서 전쟁과 테러와 납치와 암살과 음모와 억압과 착취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더욱 강력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명분 없는 이라크 전에서는 무수한 병사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끊임없는 보복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폭력에 총과 혁명으로 대항했던 게바라와 달리 비폭력으로 대항했던 간디는 ‘일곱 가지 사회적 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바 있다.

원칙이 없는 정치, 노동이 없는 부, 의식이 없는 쾌락, 인간이 없는 지식, 도덕관념이 없는 거래, 인류가 없는 과학, 희생이 없는 신앙. 주변을 둘러 보라.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우리는 바오바브나무와 같은 이 폭력과 악의 뿌리는커녕, 잎 혹은 가지들이라도 제대로 눈치채고 있는가. 긴 안목으로 우리 사회의 흐름을 앞서 볼 줄 아는 진정한 혁명가, 아니 지식인들조차 설 땅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은 아닌지….

진정한 혁명 혹은 지식은 지금 체제순응주의로 개종중이다. 실용과 정보와 취미에 묻혀 상품으로 소비되고 향수로 추억될 뿐이다. 영화 밖에서 게바라는 내게 묻고 있었다. 우리가, 내가, 정말 한때 혁명적 삶을 꿈꾸기는 했던 것일까. 우리는, 나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敵)을 닮아버렸다.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었다. 세계 어디서든 불의가 저질러지면 그것에 깊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고, 완전한 혁명에 도달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길은 끊임없이 내부의 혁명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아는 한 우리는 여전히 혁명을 꿈꿀 수 있다.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알아야 나는 비로소 시인일 것이다. 혁명을 원치 않는 사회일수록, 시가 위기인 사회일수록 우리가 혁명과 시를 논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적은 늘 우리의 내부에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고, 나는 나에게서부터 분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게바라를 다시 읽는 가을밤이 아련하고 소슬하다. 영화 속 젊은 게바라는 천식으로 쉴 새 없이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김수영의 시 ‘눈’의 한 구절을 떠올리곤 했다.“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정끝별 명지대 국문과 교수· 시인)=서울신문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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