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 -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후안 룰포 외 지음, 김현균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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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나 유럽이나 아니라 내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동경이 있다. 콜럼버스의 침략부터 신산스런 역사의 아픔을 겪은 대륙. 어느 지역보다 수준 높은 문명과 자연 조건을 갖췄으나 인류 역사의 흐름은 라틴 아메리카에게 폭력을 선물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각축장이 되어 오랜 시간 식민지로 살았을 원주민의 삶은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영하의 검은꽃에서 다뤘던 애니깽들의 이야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근현대 세계역사는 침략과 폭력으로 점철된 야만의 역사다. 그 이전보다 더욱 정교하고 가공할 대량 살상 무기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이렇게 생존 자체가 시급한 상황에서 예술이 들어설 자리는 많지 않다. 라틴 아메리카의 소설의 역사는 19세기 초반에야 시작되었다고 본다. 1960년대 boom’ 소설 이후 라탄아메리카 문학은 눈부신 성취를 보인다. 국가의 개념과 구별보다 라틴 아메리카 전체의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그들의 소설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지역주의와 세계주의를 함께 욕망했던 라틴 문학은 보르헤스의 책이 1년에 37권 팔리던 시절을 극복했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대표되는 백 년 동안의 고독만이 우리에게 친숙하다. 후안 룰포의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를 표제작으로 내세운 창비세계문학 스페인, 라틴아메리카편은 19편의 독특한 단편을 담고 있다. 익숙하지 않지만 색다른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배우고 익힌 소설의 문법과 다르지만 그들의 소설은 신선하다. 관점의 새로움과 표현의 자유로움이 그러하다.

 

하지만 소설이 담고 있는 서민들의 삶은 여기나 저기나 거기나 마찬가지다. 기차와 철도로 상징되는 근대화는 라틴 아메리카도 다르지 않다. 삐닌과 로사가 키우던 늙은 소 꼬르데라가 팔려가고 오빠 삐닌 마저 전쟁터로 떠나는 내용의 단편 안녕, 꼬르데라!우리 농촌 근대 소설과 유사하다. 이밖에도 이그나시오 알데꼬아의 영 산체스, 아우구스또 몬떼로소의 일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거대한 날개가 달린 상늙은이, 이사벨 아옌데의 두 마디 말이 인상적이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오가는 이야기의 힘은 거대한 대륙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특징이 될 수 없지만 익숙한 영미문학에서 느낄 수 없는 그들의 욕망과 상상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는 가난한 여자에게 예쁘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했다. 좋은 직업은 물론 심지어 성공적인 결혼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삶을 향상시킬 모든 가능성은 미모에 달려 있었다. 못생기고 가난한 여자는 가난하고 힘없는 남자에 비견되었다. - 이그나시오 알데꼬아, 영 산체스중에서, 47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생의 부조리를 짚어내는 말과 글은 아프다. 시류에 영합해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티 나지 않게 군중 속에 묻어가는 일은 삶의 지혜일까. 문학은 현실을 분석하는 대신 그 뒤에 숨은 욕망을 들춰낸다. 집단 무의식이 아니라 개별적 인간을 들여다본다. 그 인물이 한 시대 특정 사회의 욕망을 구현하든 보편적 인간의 일반적 속성을 드러내든!

 

책읽기는 대부분의 경우, 돌아가며 한 문장씩 낭독하는 집단적 행위가 아니라면 지독하게 이기적인 행위다. 자신과의 대면을 언제나 두려운 일이 아닐까.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에 반영된, 등장인물을 통해, 현실적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곳이 21세기 대한민국이든 19세기 라틴 아메리카든!

 

단편소설로 세계 여행 중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여행은 물리적 이동과 다르다. 이제 유럽으로 건너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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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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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야기에 매료되는 존재다. 스토리텔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마케팅에서 수학교육에 이르기까지 활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서사의 힘은 강하다. 기억을 강화하고 마음을 움직인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모든 이야기는 끊임없이 반복과 변조를 이어간다. 인간의 공포와 상상력이 빚어낸 신화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이다. 이야기는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태초에 빛이 있었을까. 그 빛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됐을까. 밤과 낮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태양과 달과 별은 누가 만들었을까. 종교가 발명되기 전에도 질문하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었을 터.

 

닐 게이먼이 쓴 북유럽 신화는 원초적인 궁금증에 대해 무한상상력을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땅도, 하늘도, 별도, 달도 없고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형체도 모양도 없는 안개 세상과 언제나 활활 불타오르는 불의 세상뿐이었다.’는 문장을 읽고 잠시 생각했다. 이 신화는 현대과학의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가! 상상이 과학을 앞서가는 일이 빈번하다. 이성의 눈을 감고 현실을 떠나기 위해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을 듯하다.

 

북유럽 신화는 다른 지역의 신화처럼 권위와 신성성을 부여한다. 신들의 이야기니 당연하겠지만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다. 이그드라실과 아홉 개의 세상은 규모부터 남다르다. 그 중에서 아스가르드에 사는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이 주인공이다. 신들의 아버지 오딘, 천둥의 신 토르, 불의 화신 로키가 이야기의 중심 축이다. 절대 망치 묠니르를 든 토르는 여전히 영화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지역적 특색이 신화의 배경을 이룬다. 거인들의 땅 요툰헤임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신화는 상징이며 알레고리다. 이야기 자체의 재미로도 충분하지만 신화는 현실을 재해석하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이 가능하다. ‘시인의 꿀술이야기에 대한 해석이다.

 

그날 이후 우리는 언어로 마법을 부리는 사람들, 즉 시와 전설을 만들고 이야기를 자아낼 수 있는 사람은 시의 꿀술을 맛본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훌륭한 시를 들으면 그들이 오딘의 선물을 맛봤다고들 말한다.

보라, 이것이 시의 꿀술과 그것이 세상에 전해지게 된 방법에 관한 이이갸기다. 불명예스러운 행동과 속임수, 살인과 사기가 가득한 이야기.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말해줄 이야기가 하나 더 있는데, 비위가 약한 사람은 다음 이야기로 건너뛰기 바란다.

독수리의 모습을 한 최고신이 통에 거의 다다랐을 때, 주퉁은 그의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었다. 오딘은 꿀술 일부를 엉덩이로 내보내 고약한 냄새가 나는 꿀술 물방귀를 주퉁의 얼굴에 뿜어냈다. 그리고 인해 거인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되어 더 이상 오딘의 뒤를 쫓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딘의 엉덩이에서 나온 꿀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엉터리 시인이 바보 같은 직유와 이상한 각운으로 가득한 형편없는 시를 읊는 걸 들을 때면, 그가 어떤 꿀술을 마셨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155

 

예술의 속성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모험담을 닐 게이먼이 이렇게 해석한 것일까. 시인 뿐 아니라 글을 쓰는 모든 사람에게 가하는 일침이다. 시의 꿀술을 맛본 사람들의 그늘진 욕망을 들춰내는 이야기다. 이밖에도 신들의 보물’, ‘토르의 거인 나라 여행’, ‘게르드와 프레이 이야기등 라그나로크에 이르는 천지창조에서 신들의 몰락에 이르는 과정에서 재미는 물론 교양이라는 덤까지 얻는다.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신들에게 최후의 운명이 닥칠 때까지 인간이 설 자리는 없었다. 오딘과 빌리와 베가 의지와 지성과 추진력을 주고 인간의 형상을 짓고 물푸레나무라는 뜻의 아스크Ask’와 느릅나무라는 뜻의 엠블라Embla’를 만들었다. 아스크와 엠블라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고 어머니다. 우리 모두의 조상이다. 그리고 미드가르드라는 안전 지역에 살게 되었다. 거인과 괴물과 황무지에 도사린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곳에 인간이 산다. 지금도 여전히.

 

하지만 신들의 바람과 달리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은 미드가르드조차 지옥으로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오딘과 벨과 베가 태초에 만든 형상으로 살고 있지 않다. 그것이 저 지구 반대편 북쪽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라서 단지 재미로만 읽힌다면 곤란하다. 온라인 게임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도, 영화를 재밌게 볼 수 있는 도구는 더더욱 아니다. 북유럽 신화는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상상력의 원천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오만한 인간에게는 겸손을, 미드가르드를 지옥으로 만드는 인간에게는 경고를, 라그나로크를 잊은 자에게는 성찰을 촉구하는 듯하다.

 

생명생명에 대한 갈망으로 출발한 인간은 이제 더 이상 게임 속의 이야기로만 북유럽 신화를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때다. 재미로 시작한 북유럽 신화는 언제나 그렇듯 우울한 자기 반성으로 끝났다. 신들의 최후가 결말이 아니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게임은 계속된다. ‘그리고, 게임은 다시 시작된다.’(298)

 

수르트의 불은 세계수를 건드리지 못하는데, 이그드라실의 몸통에 인간 두 명이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있어. 여자의 이름은 생명이고 남자의 이름은 생명에 대한 갈망이지. 그들의 후손이 지상에서 살게 될 거야. 이건 끝이 아냐. 끝은 없어. 그저 옛 시대의 종말일 뿐이지.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기도 하고. 죽음 뒤에는 항상 부활이 따라와. 넌 패한 거야.”(헤임달이 로키에게 한 말) - 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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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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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진실을 원하지 않아. 진실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지.”

 

오래된 영화 속의 대사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 도서 선정도, 책을 읽는 방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언제. 그래서 영화 다시 보기, 책 다시 읽기는 충분한 사이가 필요하다. 진실이 고통스런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 진실일까. 인문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정답을 내놓지 못한다. 진실은 없다고 말한다. 다만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러나 근본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현상이 아니라 본질에 천착하면 정답보다 분명한 길이 보이기 때문이다.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과학자의 사회학이다. 인문학과 달리 과학의 눈은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내놓는다. 질병의 원인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의학 분야가 역학epidemiology이다. 그러나 원인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부터는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하다.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스스로 사회 역학social epidemiology을 연구하는 학자라고 밝힌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의 원인을 흔히 스트레스라고 한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무엇인가. 다양한 원인들로 인해 질병이 발생하는 과정을 묘사하기 위해 역학 연구들은 원인의 그물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왔다. 당신은 그물을 만드는 거미를 본 적이 있는가? 질병의 사회학과 정치적 원인은 무엇일까?

 

인간의 몸은 마음의 영향을 받는다. 그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순간도 머물지 않고 흔들린다. 생물학적 나이를 제외하면 모든 삶은 그대로 몸에 반영된다. 체질과 음식은 물론 관계, , 날씨, 지역, 정치, 경제, 문화까지 우리 질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증거다. 김승섭은 과학적 합리성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데이터에 기초한 사고다. 둘째는 지식의 생산과정에 대한 의심이다. 셋째는 근거의 불충분함이 변명이 되는 것에 대한 경계다. 1부 말미에 제시한 지극히 개인적인김승섭의 기준에 무한 공감했다. 과학적 진실은 인문학보다 객관적이라는 비교 우위가 아니라 논란의 여지가 적고 설득력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질병 치료와 무관하다. 질병의 원인을 찾는다. 김승섭은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176)라는 말로 이 책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낙태 금지, 삼성반도체 직업병,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생존자,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나열하기도 힘들만큼 많은 사건, 사고가 매일 인간 삶의 일부를 이룬다. 이런 사회 현상은 인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 상처는 고스란히 질병으로 이어진다. 인상적인 사례는 이런 사회적 현상 뿐 아니라 절약형질 가설이다. 성인이 되어도 몸에 남겨진 태아의 경험은 시간의 간격때문에 그 원인을 찾아내기조차 힘들다. 모르면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종교를 발명하고 신을 만들어낸 것일까.

 

의학 지식을 나열하고 건강을 관리하는 책이라면 읽다가 덮었을 것 같다. 제목 때문에 의사가 쓴 에세이라고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책모임 대상도서가 아니었다면 읽지 않았을 좋은 책을 만났다. 저자의 첫 책이다. 과학자는 인문학자와 달리 과학적 합리성을 토대로 한다. 세상에는 많은 책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양념과 포장을 뜯어내면 반복되는 이야기가 절반. 그 중에 절반은 노하우와 실용적 방법론을 전한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책, 조금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돕는 책, 고통스럽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책을 더 만나고 싶다. ‘쉽고 재밌게는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없다. 사회역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작가로서 눈여겨 볼만한 김승섭을 환영한다. 다음 책도 기대된다.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인간을 시대에 뒤떨어진 천연기념물처럼 만들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저는 싫어요. - 303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만 해부되고 기록되면서 해부학의 역사에는 여러 오점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 53쪽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 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 오토 노이라트 재인용, 83쪽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 176쪽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인간을 시대에 뒤떨어진 천연기념물처럼 만들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저는 싫어요. -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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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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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장정일을 시인으로 처음 만났다. 민음사에서 펴낸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었다. 이후에 독서일기시리즈를 한동안 탐독했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더불어 스무살 언저리에서 실존적인 고민에 빠지게 했던 책들이다. 아마도 내 책읽기의 모태가 된 책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다양한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많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책읽기는 좀 다른 분야다. 가장 쉽고 만만하게 혹은 가장 속물적이고 과시적으로 여길 수 있는 대상이 책이다. 책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의 비법으로 여전히 과분한 헌사를 받는다. 여기에 편승한 11책 쓰기, 자서전 쓰기, 저자가 되는 법 등을 더하면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방법과 사람은 이제 차고 넘친다. 타이틀이 필요하다면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작가님이 될 수 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책을 읽겠다던 소년이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것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현재의 내가 소년 시절의 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가 소년 시절의 희망대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더라면, 도리어 작가가 되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까운 일이다. - 5

 

위대한 서문첫 문단이다. 장정일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대목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의 동사무소 직원 운운. 독서일기서문에서 그는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싶은 어릴 적 꿈을 이야기했다. 발칙한 상상력과 시니컬한 글쓰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 않는 작가다. 글을 쓰는 것보다 책을 읽는 일이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부터 주장해 왔다. “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글쓰기란 먹고살기 위해 이 재주밖에 부릴 게 업는 사람이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것일 뿐, 그 일을 하면서 기쁨마저 누린다면 도착倒錯이다.”는 그의 말에 백 번 공감한다.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없이 읽는다는 꿈은 이루었을까. 인간 장정일은 나는 잘 모른다. 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잡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보다가 이제는 그가 엮은 서문까지 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장정일의 말대로 그가 한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겸손한 태도다. 서문을 모았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기르고 통찰력 있게 엮는 데 그는 한 평생이 걸렸다.

 

위대한 서문의 서문도 위대하다.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 13

 

그가 서문에서 읽어낸 작가의 욕망은 긴 세월 탐독의 결과일 뿐 아니라 스스로 글을 쓰며 느낀 작가의 굴레를 드러낸다. 허명을 드러내고 작가의 타이들을 얻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이나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한 생명을 바쳐 만들어낼 만큼 가치 있는 책읽기와 글쓰기는 가능한가.

 

우선 이 책에 실린 서른 권의 책 목록이다.

 

1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 군사학 논고

2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3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 격언집

4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5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6 샤를 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7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8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9 체사레 보네사나 마르케세 디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10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11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2 노발리스, 파란꽃

13 앙리 벵자맹 콩스탕 드 르베크, 아돌프

14 카를 필리프 고틀리프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15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16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로젠크란츠, 추의 미학

17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악의 꽃들

18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19 찰스 로버트 다윈, 종의 기원

20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21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22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3 앙브루아즈 폴 튀생 쥘 발레리, 테스트 씨

24 앙드레 기욤 폴 지드, 지상의 양식

25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 나는 고발한다

26 앙리 루이 베르그송, 웃음

27 지그문트 슐로머 프로이트, 꿈의 해석

28 게오르그 짐멜, 렘브란트

29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인상과 풍경

30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이 목록에서 겨우 3분의 1쯤 읽어 자괴감이 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장정일이 썼을 각 서문 앞에 놓인 작가와 책에 관한 간략하지만 명쾌한 해설 때문에 잠시 숙연해졌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과 조금 다른 결이 느껴진다. 곳곳에 품이 든 흔적은 서른 개의 서문과 어울려 이 책을, 이 책의 목록을 두고두고 참고하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날은 금세 저문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86

 

책 띠지에 붙은 당대 최고 독서가라는 장정일에 대한 수식어가 가장 적절하다. 당대 최고의 작가보다 독서가라는 명명이 빛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름의 노하우를 전하고 겁을 주고 비법을 뽐내며 명예를 드높인다. 지극히 이기적인 책읽기는 그리 권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샤를 단치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새겨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책읽기의 본질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일이다 겨우 나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은 얼마나 낯선 존재인가.

 

서른 권의 고전에서 뽑아 낸 주옥같은 서문을 읽는 동안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러나 즐겁고 행복하다, 책을 읽는 동안은. 사드의 말대로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는 충고를 조금 더 깊이 고민해 봐야겠다. 누군가를 지겹게 하고 있다면.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널려 있으니,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우리를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그대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91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책을 읽겠다던 소년이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것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현재의 내가 소년 시절의 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가 소년 시절의 희망대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더라면, 도리어 작가가 되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까운 일이다. - 5쪽

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글쓰기란 먹고살기 위해 이 재주밖에 부릴 게 업는 사람이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것일 뿐, 그 일을 하면서 기쁨마저 누린다면 도착倒錯이다. – 6쪽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 13쪽

나는 경건을 가장하여 채용된 편견들이 정신 안에서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대중이 두려움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이 완고함에 있어서 불변이며, 이성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의 칭찬과 비난이 충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도록 권하지 않으며, 그와 동일한 감정적 자세의 희생양인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진실로, 나는 그들이 습관에 따라서 이 책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성가신 존재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이 책을 무시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데, 그들이 이성은 신학의 하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믿음에 의하여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좀더 자유롭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신학 정치론』(1670년), 103쪽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널려 있으니,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거이다. 그대가 우리를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그대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91쪽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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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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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건 없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오래 견뎌내는 건 말이 아니라 글이다. 글쓰기는 침묵과 수행이다. 부족한 인간이 안간힘을 쓰며 토해내는 사자후. 고전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오래 버티는 인류의 자산이다. 1830~1930년대의 미국 대표 단편소설을 엮은 필경사 바틀비는 근대와 민주주의, 청교도와 자본주의, 인디언과 흑인노예가 충돌하며 태동한 미국의 역사를 반증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해서 최초의 민주적 근대국가를 이뤘으나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흑인을 노예로 삼은 모순이 내재한 나라가 미국이다. 인종과 계층, 지역과 종교가 충돌하며 미국은 오늘에 이른다. 지구상에 어떤 나라보다도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며 생동하는 삶이 얽혀있다. 겨우 열 한편으로 미국의 국민문학 형성기부터 모더니즘이 한창이던 시기를 읽어낼 수는 없으나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은 시대를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너내시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도 인상적이지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편의점 인간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작품으로 명불허전이다. 이런 인물 유형을 창조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월가로 상징되는 미국 자본주의 태동기에 바틀비는 다양한 존재로 해석 가능하다. 문학적 모호성 ambiguity를 함유한 독특한 인물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관찰자시점은 이 소설이 갖는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다.

 

구인광고를 보고 어느날 아침 젊은이 하나가 여름이라 문을 열어놓은 사무실 문간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할 정도의 단정함, 애처로운 기품,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고독. 그가 바틀비였다.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58

 

바틀비의 행동은 일반적이지 않다. 정상적인 패턴을 벗어난다. 역자가 몇 년을 고심했다는 “I would prefer not to”는 바틀비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한기욱은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번역했다. 현실에 대한 거부, 관습적 사고에 대한 저항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바틀비의 말과 행동은 독자 나름의 방식대로 받아들질 뿐이다. 당대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비판적 관점이 아니라 현대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부조리에 대한 거부일까. 단호한 외침이 아니라 침착하고 온화한 언어는 텍스트의 의미와 다른 울림을 준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고 다짐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이밖에도 마크 트웨인의 캘레바래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겨울 꿈이 인상적이다. 백 년이 훌쩍 넘은 번역된 단편임에도 장편에서 느낄 수 없는 단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19세기말~20세기초 세계사의 풍랑을 겪는 동안 미국인의 삶은 동시대 한국인의 삶과 다른 문제의식을 지녔으리라. 문화와 전통이 다르고 역사적 배경이 다르면 생각도 행동도 차이가 있다.

 

오래전에,” 그가 말했다. “오래전에 내 속에 무엇인가가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사라졌어. 이제 그것은 사라졌어, 사라졌단 말이야. 난 울 수 없어. 마음을 쓸 수도 없어. 이제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 F. 스콧 피츠제럴드, 겨울 꿈, 306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평범한 사람들의 속내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다. 이수일와 심순애 같은 신파도 있고 위대한 개츠비같은 미국판 러브스토리다 있다. 피츠제럴드는 단편 겨울 꿈에서 유사한 모티브로 현대인의 속내를 이렇게 짚어낸다. 내 속에 무언가 사라졌고 이제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자각을 하는 순간, 달의 뒷모습이 궁금해진다. 우주로 간 전기차 테슬라도 궁금하고 유리가가린의 소식도 듣고 싶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지켜야 할 것은 또 무언지. 먼지처럼 떠돌다 이내 사라질 나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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