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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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신문을 보며 세상에 눈뜨던 사춘기 시절, ‘아침마다 피 묻은 칼이 튀어나오는 신문을 들고’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개가 사람을 문 게 아니라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 대개 사건, 사고에 눈이 가고 관음증의 강도는 배가 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확인할 수 있는 인터넷 뉴스를 접할 때마다 레거시 미디어와 황색 저널리즘을 구별하던 시대는 차라리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다. 정치는 혐오 장사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언론은 클릭수로 돈을 챙길 때 우매한 군중은 자신의 뇌를 절여 맹목적 증오와 진영 논리에 눈이 먼다. 반복 재생되는 유튜브와 쇼츠, 릴스, 틱톡은 필터 버블을 만들고 생각하지 않는 개인은 에코 체임버에 갇힌다.

어쩌면, 정치가 생활을 바꾸고 투표가 미래를 결정한다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감시와 처벌을 게을리하는 투표 이후의 비판적 눈길과 적극적인 참여가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민주정체의 원리를 우리는 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개인이 가진 지식과 정보, 판단 능력, 논리적 사고가 부족할 때 침묵의 카르텔은 무서운 속도로 서로의 이익을 챙기며 견고한 구조를 만든다. 선의에 기댄 정치 체제는 망상에 불과하며 견제 장치 없는 권력과 비판 기능을 상실한 언론은 현실을, 아니 바로 매일매일의 삶을 참담하게 만든다.

절망과 고통이 삶의 디폴트 값이라면 꿈과 희망은 현실을 견디는 마약일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만큼 순진한 생각이 ‘설마’를 낳고 정치적 퇴행을 양산한다.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 관습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켰다면, 이길보라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착각』은 경험의 한계를 절감케 했고, 김인정의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언론과 현실의 역학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했다.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라는 이상의 말이 새삼스러운 건 자신이 뱉은 말과 행동과 그 태도가 본질이라는 걸 우리는 각자 최선을 다해 외면하는 듯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이익에 반하는 짓을 꺼린다. 그래서 이해관계를 떠나서는 숨조차 쉬지 못한다. 그것이 부모 자식, 형제자매, 친구와 연인이어도 다르지 많을 때가 많다. 하물며 사회적 관계라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과 언론, 기업과 정부는 불가근 불가원이다. 여기에 몸담은 사람들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거나 제 기능을 상실하면 가장 고통받는 건 바로 나, 너 그리고 우리들이다.

고통의 저널리즘을 넘어선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이영희 선생 이후 대한민국의 언론과 이익 카르텔을 묵인한 건 뉴스 소비자들이다. 빈곤 포르노를 넘어 개인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부여하는 언론은 많지 않다. 김인정 기자는 뉴스 너머의 세상을 본다. 그리고 앵글 밖의 1인치를 고민한다. 언론의 사회적 기능, 공적 역할에 관한 지루한 논쟁과 거리가 멀다. 개인적 소회, 경험으로 체득한 고민이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듯하다.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경찰, 검찰을 포함한 사법부에 대한 신뢰, 언론과 기자에 대한 존중은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정치혐오만큼 뿌리 깊은 불신과 증오는 권력기관과 언론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자정 능력은 없으나 사회의 공기처럼 중요한 분야를 방치하면 악취가 진동한다. 진영의 문제도 아니고 정치적 신념의 문제도 아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다. 구조가 단단하지 못하면 집이 무너진다. 한 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은 개인기와 리더십이 아니라 개개인의 비판적 사고에 기반한다. 논리적 사고와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한 개인은 나이, 직업, 성별, 종교와 무관하게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단단한 자기 확신의 감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다. 불공정과 몰상식은 세습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목숨 건 사투가 벌어지는 동안 관중들은 자기편만 응원한다. 견제와 균형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내로남불 끝판왕들의 설전을 눈여겨보자. 자기 삶의 근본적 문제를 살피려면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대신, 내 안의 편견을 점검하고 이성의 칼날을 벼려야 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지만 마비된 이성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다.

저자는 “목격은 눈으로 직접 보는 일이고, 구경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일이다. 둘 다 보는 일이지만 목격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구경할 때 눈은 흥밋거리와 관심거리를 찾는다.”라고 일갈한다. 구경하는 대중의 음험한 눈길, 팔짱 낀 채 외면하거나 관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순간 그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온다. ‘영원히 움직이는 텍스트’를 꿈꾸는 저자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내는 대신 이렇게 고통스런 텍스트를 소비하는 각자의 태도를 점검할 시간이다.

늘 정확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둥글게 휜 포물선처럼 선명한 흔적을 남기며 날아가, 깔끔하게 과녁을 맞히는 질문. -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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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미술관 -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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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지는 ‘인간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이 물음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라는 말로 이 책의 프롤로그를 시작한다. 그림책이다. 예술은 인간과 사회를 빗겨 나간 자리에 놓인 특별한 대상이라는 착각. 작품마다 내뿜는 아우라에 눈이 부셔 관객의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가 대신 설명해 줄 거라는 혼란. 아마 이런 몇몇 편견 때문에 그림 읽어주는 사람들이 등장한 게 아닌가 싶다. 아니, 그런 분들의 혜안을 빌려 빛과 그림자, 형태와 색채를 조금 더 오래 지켜보는 지도 모르지만.

개인의 취향이겠으나 사랑 운운하며 감정을 쏟아내는 그림 에세이에 부정적 반응이 심하다. 예술은 대개 한 인간과 사회의 현실과 이상 혹은 꿈과 무의식의 경계에 놓인다고 믿는다.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은, 혹은 어느 한 편에 완벽히 호응하는 작품이야말로 관객들의 갑론을박을 이끌어내는 문제작인 경우가 많다. 이진숙의 『인간다움의 순간들』과『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이 인문학적 사유로 잘 차려진 성찬이라면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관』은 맛과 영양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쁠 때 챙겨먹는 간편식 같은 느낌이었다. 한 권 분량의 책을 염두에 두고 쓴 글과 신문 칼럼 등 한 편의 글로 소비될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같을 수 없다. 독자는 취향과 자기 필요에 따라 어느 쪽을 선택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림에 대한 단편적 지식과 에피소드가 아니라 필자 나름의 ‘관점’과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면에서 김선지의 글을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책은 크게 ‘명화 거꾸로 보기’ 파트와 ‘화가 다시 보기’ 파트로 나눴다. 예술 분야의 책을 처음 보는 독자가 아니라면 모두 익숙한 그림들이고 기본적인 배경 지식도 갖춰져 있을 터. 중요한 건 그래서 필자는 무엇을 보았다는 건지, 아니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에 관심이 간다. 김선지는 얼굴이 하얀 예수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고다이바는 정말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았을지, 황금비는 정말 아름답게 보이는지, 비너스의 모델은 매춘부가 아니었을지 살핀다. 고증을 거쳐 나름의 근거를 제시한 이야기가 신선하다. 물론 익숙한 이야기도 있다. 모두 처음이라서가 아니라 그림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재미를 가지라는 권유다. 당연히 예술도 아는 만큼 보인다. 작품은 묻는 만큼 답한다.

“예술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저자의 생각은 역사 전공자로서 세계에 대한 인식 틀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인간과 세상을 떠난 예술은 불가능하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인공지능이 그려낸 그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축적된 지식과 정보, 꿈과 욕망, 무의식과 환상을 드러낸 작품일지라도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며 예술가의 의지와 작품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다. 미적 기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시대마다 빠르게 변한다.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빚어낸 신선함이나 놀라운 상상력으로 창조한 산업 디자인은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과 신제품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우리가 즐기는 세상이 그대로 놀라운 창조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간혹 미술관을 찾는 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추억 여행이다. 인류가 걸어온 길, 먼 옛날의 추억이 내 기억 속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다. 혐오와 증오가 시대 정신이 된 건 아닌지 혼란스런 시간을 지나고 있다. 정답을 가진 자들의 목소리가 드높다. 네가 틀렸다는 아우성에 귀가 아프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무언가가 조금 보일 수도 있을까. 날마다 새로울 순 없어도 가끔 고개를 들고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어제와 다른 노을이 아니라 처음 만나는 절멸의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완벽한 어둠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 아직 때가 아니라면 조금 더 기다리더라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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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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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아우라에서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인류 문학의 거장 마르셀 프루스트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기 전에 사전 정보를 최대한 차단하고 오로지 텍스트 자체에 몰입하는 즐거움을 맛보려고 노력한다. 현대 문학과 달리 고전은 두 가지 시점으로 바라본다. 첫 번째는 ‘당대성’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얽힌 사회, 역사적 배경과 문화, 사상적 토대가 고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둘째는 ‘현대성’이다.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살아가는 나의 관점이다. 이해와 공감, 재미와 감동은 문학의 가장 큰 효용이지만 내가 즐길 수 없다면 굳이 책장을 넘길 필요가 없지 않을까.

지극히 사적인 허구적 자서전 또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는 걸 확인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유대인 배척주의, 드레퓌스 사건 등은 당대에 가장 첨예한 사회적 이슈였다. 한 사회의 가치판단, 집단적 무의식은 오랜 전통과 문화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지향점, 타인을 바라보는 태도로 판가름 난다. 프루스트가 어떤 이념적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소설은 아니다. 다만 무엇을 쓸 것인지, 또 어떻게 쓸 것인지에 관한 거대한 자전적 작품론 혹은 작가론으로 읽히는 건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이 갖는 형식과 내용 때문이다.

1부 ‘스완 부인의 주변’은 파리 샹젤리제의 겨울이 배경이다. 화자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스완 부인을 바라보는 관점, 질베르트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2편 ‘고장의 이름-고장’은 발베크의 여름이 배경이다. 1부에서 작가 베르고트가 화자의 글쓰기 혹은 작가로서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면 2부에서 화가 엘스티르는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관점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는 게 아니라 인상파 화가는 ‘빛’에 의해 보이는 대상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이 질베르트와 어떻게 달라지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이행하는 과정,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스완과 귀족을 상징하는 게르망트와의 관계 혹은 대립은 1800대 후반 프랑스로 대표되는 유럽을 벨 에포크가 아닌 조용한 변화와 갈등의 시대라고 역설하는 듯하다. 물론 철저하게 그리고 지극히 사적인 기억 혹은 추억 속에서 반추하는 방식을 선택한 프루스트의 독특한 서술과 묘사, 어마어마한 만연체 문장, 사건과 감정에 대한 표현은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없는 독창성과 개성을 드러낸다. 문체가 곧 작가다. 그런 면에서 프루스트의 아우라는 곧 문체에서 나온다고 느꼈다.

신흥 부르주아 vs 전통 귀족 계급의 갈등과 대립의 서사의 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거대하고 지루한 문체에 함몰된 독자가 읽어내는 것은 베르뒤랭 부인과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차이가 아니라 전기와 전화가 보급될 19세기말 유럽 사회를 바라보는 프루스트의 고현학이다. 콩브레에서 샹젤리제를 거쳐 발베크에 도착한 프루스는 유아에서 소년으로 그리도 이제 청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자기 삶의 주체로 홀로 선다. 인상파 화가로 등장하는 엘스티르는 “원인부터 설명하지 않고 우리 지각이 받아들이는 순서에 따라 사물을 제시”한다는 말로 자신의 세계관을 설명한다. 그것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관점이 될 수는 없으나 적어도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 혹은 선택과 판단이 혼란스럽게 뒤엉킨 세상에서는 ‘인식’보다 ‘지각’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교집합은 아닐까 싶었다. 인상파의 명암대비가 세계를 당시 세계를 보는 유럽인의 눈이었다면 또 다른 관점으로 대상의 본질을 포착하는 화가도 있었으나 결국 프루스는 인상파의 위대함이 ‘시간’ 속에 숨어있다고 판단한 건 아닐까. 시시각각 변하는 시간의 흐름이 곧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2편은 그렇게 ‘시간’이라는 주제와 꽃과 소녀들의 대비를 통해 프루스트의 화양연화 혹은 자기 삶의 벨 에포크 시대를 그려낸 건 아닌지 모르겠다.

10년 동안 번역에 매달린 프루스트 전공자 김희영은 해설에서 “작가의 창조적 자아는 그 도덕적 인격이나 겉모습, 즉 사회적 자아와는 다르다는 명제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소설이라고 평가한다. 스완과 오데트, 베르고트와 엘스티르, 질베르트와 알베르틴 혹은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기억과 추억은 철저한 주관적 변용을 통해 재해석된다. 그러나 당대를 함께 했던 실존 인물과 현실은 관계 형성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수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켜 사건과 사고를 설명하거나 이것이 그대로 문학적 알레고리로, 때로는 웅숭깊은 은유로 발현되는 것은 프루스트 읽기의 또 다른 재미이자 진입장벽으로 독자들에게 깊이 읽기를 강요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크레이프 케이크를 떠오르게 한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와 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4권을 읽은 후의 감상이겠으나 정성스레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의 질감을 느끼게 한다. 똑같은 층위의 반복일지라도 또 다른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든다. 아직 멀고 긴 시간 여행이 기다리고 있겠으나 7편의 소설이 따로 또 같이 읽혀도 무방하다. 어차피 한 인간의 일생도 찰나에 불과하며 어떤 시간의 단면도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않는가. 사랑과 이별과 망각의 고통이 이 작품의 주된 리듬이라면 이제 겨우 사랑과 이별의 크페이프 한 조각을 시식했을 뿐이다. 읽기는 어려우나 여운은 길고 입맛은 몸에 남을 듯하다.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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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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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객관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다 똑같은 수준으로, 필수불가결하게 중요한가요? -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22쪽

예쁜 사람보다 귀여운 사람을 좋다. 예쁜 건 꾸밀 수 있으나 귀여움은 사람이나 사람의 본질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남자든 여자든 후천적 노력으로 멋진 몸을 만들고 메이크업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도 있으나 귀여움은 나이브한 상태 혹은 타고난 특성에 가깝다. 귀여움을 연기할 수는 없다. 타고난 아름다움을 폄훼하는 게 아니라 귀여움에 관한 생각일 뿐이다. 잘생긴 남자, 예쁜 여자는 대체로 시간을 견딜 수 없지만 귀여운 사람은 세월을 뛰어넘는다. 어떤 형용사가 빚는 이미지는 개인마다 다르게 갈무리되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어려워 사회적 언어로 공감하기도 쉽지 않다. 시니피앙에 의해 형성되는 시니피에 또한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으니, ‘예쁘다’와 ‘귀엽다’를 구별하거나 차이를 드러내는 일은 부질 없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를 쉽게 예측하기 어렵다. 물이 끓는 비등점, 곡률이 바뀌는 변곡점을 지나면 부분적으로 각개 약진하던 기술들이 통합되어 혁명적 변화를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너지 효과를 예상하는 건 첨단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쉽지 않다. 오히려 무엇을 상상하든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역할에 충실한 과학자보다 가당치 않은 상상력으로 미래를 보여주는 예술가들에 의해 인류는 진보를 거듭해온 것처럼 보인다.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가라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며 모욕일 수 있으나 스스로 ‘당대 인간의 삶과 사회’에 방점을 찍고 있는 장강명의 소설은 그래서 상상적 현실을 가능케 한다. ‘월급사실주의 소설가, 단행본 저술업자’라는 소개가 반가운 이유다.

프로필 사진의 보정이나 인공지능 어플 사용으로 외모를 마사지하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여기서 한발 나아가면 각자의 눈에 어플을 활용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세상 그 자체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장치, 모든 사람을 멋지게 바꿔주는 도구가 있다면 모두가 윈윈 게임이 아닐까. 외모 콤플렉스 따위가 없는 세상도 불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표제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사소하지만 실현 가능한, 매우 현실적인 접근이라서 오히려 신선했다. 미래는 알 수 없고 예측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도 불안을 숙명으로 안고 사는 현대인에게 그들–예술가 혹은 과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가늠할 수 있는 내일을 예고 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람들은 ‘객관적 사실’에 무관심한 건 아닐까. 어차피 각자 보고 싶은 걸 보고 믿고 싶은 걸 믿으니까. 팩트 체크에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 사실을 압도하는 일상이 오히려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사회 현상에 기인한 소설가의 상상력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의 삶과 사회를 고민한다. 단편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오마주이자 패러디이며 재해석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드는 문제의식은 종횡무진 시공을 초월하지만 결국 ‘인간과 사회’에 천착한다. 우리는, 아니 ‘나’는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 시대정신을 말하는 사람은 정치적이며 밥그릇을 쳐다보는 사람은 근시안이다. 허나, 우리가 사는 세상과 오늘의 현실은 정치적 근시안과 ‘을’들의 전쟁으로 피가 튄다. 자신의 계급 이익과 무관한 맹목적 지지와 비난이 초래하는 결과가 참혹하다.

「사이보그의 글쓰기」와 「데이터 시대의 사랑」은 「아스타틴」의 상상력과 결이 다르다. 지극히 현실에 바탕을 둔 상상과 기대와 욕망에 바탕을 둔 현실은 차이가 크다. 일곱 편의 단편이 한 권으로 묶이면서 이 소설집은 현실적 SF, 아니 작가의 주장대로 ‘STSscience, Technology, Society SF’라고 불러도 좋겠다. 명칭이야 어쨌든 과학 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을 고민하는 문학적 상상력은 충분히 의미가 있고, 다분히 매력적이다. “과학기술은 이제 여러 영역에서 실존적 위기를 일으키고 있고, 나는 문학이 여기에 대응해야 하며,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다.”라며 장강명은 소설이 나갈 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장강명의 등단작 장편소설『표백』, 르포『당선, 합격, 계급』등 지속적으로 그의 시선이 놓인 자리와 관심사가 사회학적 상상력과 닿아 있다. 문학의 역할과 기능이 모호해진 시대다. 소설보다 재밌는 게 넘치는 세상이다. 문학의 종언을 외치는 대신 문학의 변신과 지평의 확대를 모색하는 작품을 기대하는 건 독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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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가슴에 닿는 문장에 밑줄을 치고 필사하거나 사진을 찍습니다. 가끔 저는 연필이 없거나 메모지가 없을 때 급한 마음에 책 모서리를 접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접어놓은 책 귀퉁이는 귀여운 강아지의 귀처럼 보입니다. ‘도그 이어dog-ear’라는 영어 단어는 책장의 ‘모서리를 접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준비하며 가제를 <생각의 모서리를 접다>라고 지었습니다. 여전히 우리 삶엔 쉼표가 필요하고, 모서리를 접어 놓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현실과 일상 때문에 책읽을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책을 멀리하니 지금-여기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이 책은 도서관에 갇힌 인문학, 현실과 유리된 테스트를 거부합니다. 대체로 우리가 겪는 삶의 문제들은 때와 장소와 달라졌을 뿐 누군가 이미 겪었던 일들입니다. 기시감이 들 정도로 비슷한 고민을 책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밑줄을 그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혹은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은 문제를 안고 삽니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아니라는 건, 그 고민의 깊이와 넓이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문제 해결 방법의 실마리를 찾고,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살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히, 누군가에게 조언을 하거나 함부로 충고하는 주제넘는 짓을 할만한 깜량은 없습니다. 원하지도 바라지도 않는 잔소리는 꼰대가 되는 지름길이라는 정도는 눈치껏 알만한 나이가 됐으니까요. 다만, 타인과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 인류가 쌓아온 인문학의 개념들은 지식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 삶에 적용되고 나의 현실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나만의 고통과 슬픔, 내가 겪는 절망과 분노의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그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살피는 동안 우리는 한발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습니다. 인간은 나이가 먹어 늙는 게 아니라 성장을 멈추는 순간 노인이 됩니다.

젊꼰이 되지 않을 권리, 여전히 성장하는 노인이 될 자유를 포기하지 않는 것도 각자의 몫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전히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대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며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 성장하는 기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소설의 주인공 바틀비, 메데이아, 소스케, 영화 <위플래쉬>와 <세렌디피티>, 미드 <오자크> 그리고 발터 벤야민과 마르크스와 칼 융까지 잡다한 이야기들을 통해 선택, 속도, 시선, 사회적 상상력, 시간, 성장을 주제로 익숙하거나 낯선 개념들을 설명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들의 문제를 점검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책을 만나셔도 좋고 개인적 고민의 실마리를 찾으셔도 좋습니다. 어차피 모든 텍스트를 오독할 자유와 권리를 가진 독자의 몫일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힘겨운 모든 틈과 틈 사이로 스미는 빛을 따라가는 시간으로 채우시길 바랍니다. 늘 그러하듯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삶, '나'의 시간들만 오롯이 내 앞에 남겨져 있으니까요.

책이 나올때마다 말포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애정과 수고로움을 보태주시는 편집자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출판사 관계자 모든 분들의 고민과 노력으로 탄생한 책입니다. 부족한 점은 오롯이 제몫이지만 읽을만하면 모두 도움을 주신 분들의 덕분입니다.

계속해서 읽고 쓰는 삶을 이어갈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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