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제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가끔 등장하는 ‘ESG 경영(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하는 말)’이나 ‘RE 100(기업이 사용하는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캠페인)’은 이제 일상적인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기업 경영이나 환경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과 탄소 중립 등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개념 사이에서 심각한 디커플링 현상을 경험한다. 녹색성장이라는 허구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사이토 고헤이는 ‘탈성장’을 주장한다. 너무 나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급진적이다. ‘성장’을 멈추자거나 ‘발전’은 곧 공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친환경, 사회적 책임을 기업 경영에 도입하려는 노력은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전지구적 환경문제는 생각보다 시급하고 중요해졌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피부에 닿을만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일상 생활을 하면서 종이컵을 쓰지 않고 텀블러를 들고 다니거나 분리수거를 철저히 하는 정도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이토 고헤이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냉소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하게 설득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건 태풍이 아니라 따뜻한 태양이라는 우화가 때때로 시기를 놓치고 후회를 만든다. 행동과 실천은 사랑처럼 타이밍이 중요하다. 언제부터 시작해야 할까.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새로 시행되는 유엔과 국제사회의 최대 공동목표인 ‘SDGs(지속가능한 개발 목표 또는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sms 현대판 아편이라는 말로 현 상태의 자본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기후변화와 제국적 생활양식에 대한 객관적 자료는 충격적이다. 긍정적, 낙관적 전망의 토대는 대체로 과학기술의 발달이 환경문제에 실마리를 제공할 거라는 환상이다. 계속해서 그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탈성장을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한 마르크스의 말년 저작들은 생소하다. 갈등과 대립은 이념과 세대, 빈부와 성별을 넘어 경쟁과 각자도생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조건이 된 지 오래다. 세계 경제 10대 강국의 위상을 생각할 때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후 변화와 환경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은 논쟁거리가 아니다.

속도와 방법의 문제가 남는다.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당황스럽게도 정치적 이념도 개입된다. 성장과 분배의 문제가 아니다.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치를 대가는 참혹할지도 모른다. 지나친 위협이나 공포심리를 자극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피고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물론 이상주의에 가깝다. 방법이 틀렸거나 적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가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더디게 할 것이고, 나름의 이론가들의 굳건한 신념은 정확한 미래 예측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며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지만 이 책은 논의의 출발로 적당해 보인다. 기후 정의라는 ‘지렛대’를 이제 현실에 적용해보려는 단계다. 2000년에 인류의 문명을 인신세(*인신세 : ‘Anthropocene’에서 ‘anthropo-’는 ‘인류’를, 지질학적 시대를 지칭하는 ‘-cene’는 ‘새로운’을 뜻한다. ‘인류세’라고 옮기는 경우가 많지만, 아직 역어가 명확히 합의되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의도를 존중해 역자가 ‘인신세(人新世)’라고 옮겼다.)로 분류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파울 크뤼천의 제안이었다. 새로운 지질시대 개념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를 명명한 것이다. 인류세든 인신세는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라 먼 훗날, 아니 우리가 사는 지질시대의 종말을 앞당기는 자본주의는 지속 불가능하지 않다는 저자의 지적에 귀 기울일만하다.

기업 경영자, 정치인, 행정가 등 정책을 입안하고 경제를 운용하는 주체들의 적극적인 노력과 합의가 없으면 성장 위주의 자본주의 패러다임은 전환하기 어렵지 않을까. 문제는 인식하고 있으나 해법은 요원하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얽혀 쉽게 합의하기 어려운 문제가 어디 한둘일까마는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고민은 모두의 현실이고 그 결과는 생존과 직결된다. 탈성장 자본주의를 외치는 저자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우리가 경험한 대로 ‘그렇게’ 돼 버린다.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① - 사용가치경제로 전환

- ‘사용가치’를 중시하는 경제로 전환하여 대량 생산 ․ 대량 소시에서 벗어나자.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② - 노동 시간 단축

- 노동 시간을 줄이고, 생활의 질은 높이자.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③ - 획일적인 분업 폐지

- 노동을 획일하게 하는 분업을 폐지하여 노동의 창조성을 회복시키자.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④ - 생산 과정 민주화

- 생산 과정에서 민주화를 진행하여 경제를 감속시키자.

탈성장 코뮤니즘의 추춧돌 ⑤ - 필수 노동 중시

- 사용가치경제로 전환하여 노동집약적인 필수 노동을 중시하자.

경제의 규모 축소scale down와 속도 둔화slow down, ‘가속주의accelerationism’가 아닌 ‘감속주의deaccelerationism’로 요약되는 사이토 코헤이 주장이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기 어렵더라도 우리는 모두 호흡을 가다듬고 심각하게 현실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언제, 누가, 어떻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 - 유쾌하고 신랄한 여자 장의사의 시체 문화유산 탐방기 시체 시리즈
케이틀린 도티 지음, 임희근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인 놀이를 회복하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그때임을 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스스로 가난과 간소함을 선택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또한 단순해지는 것.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가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삶의 시작이 탄생이라면 마지막은 죽음이다.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만큼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마지막이 준비된 사람은 삶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언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뿐이다. 유산 분배가 아름다운 마무리일 수도 없다. 육체적 존재로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단순히 화장이나 수목장 정도를 생각해봤을 뿐이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마무리에 대해서도 유언을 한 지 오래지만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비우고 내려놓고 단순해지고 자유롭고 간소하게 언제든 떠날 채비를 하라는 법정 스님의 말은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충고다. 건강한 사람의 삶의 태도와 방법에 대한 조언에 가깝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한 장례지도사는 젊은 여성이었다. 장례 절차와 방법에 빈틈이 없는 일처리 방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고인에 대한 예와 진정성 있는 태도가 내게 감동을 주었다. 케이틀린 도티의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를 읽으면서 그분을 떠올렸다. 장의사로 일하면서 첫 책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만큼 당연한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 도대체 좋은 시체란 무엇인가.

미국 콜로라도주 크레스톤에서는 야외에서 장작더미로 시체를 태운다. 열린 하늘 아래 주변을 환하게 혹은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며 타오르는 상상을 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마무리인가. 좋은 시체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전망 좋은 묘지 터,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명당자리, 화려하고 커다란 조형물로 치장된 산소에 묻히는 일이 아니다. 저자는 인도네시아 남술라웨시 토라자, 멕시코 미초아칸, 노스캘로라이나주 컬로위, 스페인 바로셀로나, 일본 도쿄, 볼리비아 라파스, 캘리포이나주 조슈아트리의 장례식을 찾아간다. “죽음이여, 그대는 우리를 이긴 줄 알지만 우리는 장작을 불태우며 노래 부른다.”라는 인도 영가가 울려 퍼지는 장례식장에서 지면, 영혼은 자유로움을 느끼는 저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한 인간의 삶을 마무리하는 산 자들의 의식은 엄숙하고 숭고하지만 그것을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는 공동체의 전통과 문화 의식을 대변한다. 매장, 화장, 자연장 등 어떤 방식이든 시체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분해되고 다시 우주의 순환고리 안에 편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짧은 시간 안에, 미국의 장의업은 지구상 다른 어떤 나라의 장의업보다 더 값비싸고 더 산업적이며 더 관료적으로 변했다. 우리가 가장 잘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슬픔에 잠긴 유가족을 고인으로부터 떨어뜨려놓는 일일 것이다.” 한국의 장의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애도와 작별의식보다는 장례 물품의 등급과 가격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고인의 마지막에 최선을 다하려는 유가족의 슬픔이 클수록 장의업은 번창한다. 미국 장의사가 비판하는 장례 문화를 인정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전통과 문화를 일시에 뒤바꿀 수 없다. 다만 좋은 시체가 되려는 준비와 노력은 황망한 죽음 앞에서 허둥대는 유가족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지 않을까.

“서양의 장의사는 ‘존엄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미국에서 제일 큰 장례업체는 심지어 그 단어로 특허까지 받았다. 존엄성이란 대개 입 다무는 것, 강요된 침착함, 엄격한 형식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하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대접하는 우리 장례 문화는 존엄한가. 망자에 대한 예의와 유가족의 슬픔이 조화를 이루는가. 자연장을 치르는 조슈아트리에서 저자는 “나는 인생의 30년을 짐승의 살을 먹으며 보냈다. 그런데 내가 죽고 나서 그 짐승들이 반대로 나를 먹는 것은 왜 안 된다는 말인가? 나도 하나의 짐승 아닌가?”라고 묻는다. 살아 있을 때 고민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은 좋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죽음 그 자체와 별개의 문제가 아닌가. “죽음을 둘러싼 우리의 두려움, 수치심, 슬픔을 소독할 수 있도록 햇빛 속으로 끌고 나오는 어려운 작업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제 우리 모두 어려운 작업을 시작할 때가 아닐까. 멀지 않은 일이다. 미리 준비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폭력의 힘 - 윤리학-정치학 잇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나 아렌트는 『공화국의 위기』에서 권력power과 폭력violence이 확실히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 둘은 일심동체다. 가정 내 부모, 자식 간의 위계질서, 군대와 직장 내 직급과 직책, 국가 기관에 의한 공권력 등 권력은 폭력을 내포한다. 이때 폭력은 물리적 힘뿐만 아니라 언어 폭력, 시선 폭력, 냉소와 무관심, 심리적 억압, 가스라이팅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형태를 포함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상적 권력은 ‘노오력’에 의한 당연한 권리로 둔갑하기 십상이다. 견제받지 않으려는 검찰, 감시받지 않는 언론, 국민을 의식하지 않는 국회에 이르기까지 민주국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갑질과 권력 남용은 일상이 되었으며 그것이 폭력인 줄도 모르고 매일 폭행당하며 사는 시민들의 무감각은 놀랄 만하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에게 폭력은 불평등, 능력주의, 혐오와 닿아 있다. 오랫동안 동성애와 여성주의 운동 최전선에서 혁신적이고 전복적인 사유와 실천으로 신뢰를 쌓아온 저자의 ‘비폭력’은 일관성 유지하며 새로운 정치철학과 윤리학에 화두를 던진다. 주디스 버틀러는 “비폭력은 바로 폭력장 안에서 윤리적 사안이 된다.”라고 주장한다. 비폭력은 평화주의자의 개념적 선언도 아니고 일상에서 말하는 범법행위를 넘어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는 문제다. 비폭력의 범위와 한계는 개인과 사회마다 기준이 달라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하지만 저자는 “폭력을 가하는 것이 극히 정당해 보이고 당연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의무적 선택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가능한 선택지로 주어지는 저항적 실천이 비폭력”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비폭력은 수동적, 소극적 대응 방식이 아니라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라는 의미다.

두 가지 측면에서 비폭력을 정의하면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전투적 평화주의”라고 불렀던 그것을 공격적 비폭력으로 재검토해볼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갈등과 논쟁을 외면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니 덮고 넘어가자는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전투적 평화주의를 ‘공격적 비폭력’이라는 표현하는 지점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들리는 두 단어의 조합이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그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간 인류가 걸어온 야만의 세월은 특정 시대의 정치 형태와 전통과 문화 때문이 아니다. 지금, 오늘을 사는 나와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은 인간의 내면에 숨은 이기적 욕망과 자본주의에 물든 탐욕적 태도가 그 자체로 폭력이다. 노력한 만큼 벌고, 능력이 닿는 한 많이 가질 수 있는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동조하는 못 가진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다. 평등의 가치는 침묵을 지키고 오로지 정의롭지 못한 자유, 그들만의 자유, 교묘하게 포장된 자유가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뒤덮고 있다.

주디스 버틀러는 평등에 참여하지 않는 비폭력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의 생명을 지킨다는 고귀함, 전쟁을 반대한다는 평화주의에 머무는 추상적 비폭력은 현실 개선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내놓지 못한다. 비폭력의 힘은 저항과 실천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페미니즘 투쟁과 트랜스젠더 투쟁은 서로 이어져야 한다. 여성 살해를 성테러sexual terror의 일환으로 이해한다면, 이 두 투쟁은 서로 이어져 있을 뿐 아니라, 이 두 투쟁과 퀴어 투쟁, 동성애 혐오와 싸우는 모든 사람들의 투쟁, 지나치게 높은 비율로 폭력과 방치에 노출되어 있는 비非백인들의 투쟁도 모두 이어져 있다.” 폭력이 사회적 불평등의 악화 요인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불평등한 위치에 놓인 노동자, 소수자의 권리 강화, 폭력에 대한 강력한 처벌 등 제도적 장치를 주저하는 이유가 뭘까. 주권자는 누구의 편에서 어떤 정책에 동의하며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실 개선 노력에 의지를 보이는가. 안타까운 일이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위로하며 적응하며 사는 게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비폭력을 힘과 연결한다는 것, 비폭력 실천을 폭력이 아닌 힘(저항과 생존의 연대 협력에서 표면화되는 힘)과 연결한다는 것은, 비폭력이 약하고 무익한 수동성이라는 관점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폭력이 정당화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줘야 할까. 일상의 폭력들,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폭력적 현실 앞에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말로 눙치면 그만일까. 누군가는 점진적인 변화와 노력을, 누군가는 근본적인 혁명과 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를 되돌리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기주장에 힘을 실어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도 있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하든 판단과 선택은 각자의 몫이지만 선거철에 철새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숨 쉬듯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 언제나 위험과 폭력은 내가 선이요, 진리라는 착각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성찰하지 않고 겸손함을 모르는 위선은 그 자체로 타인을 향한 폭력이다.

비폭력의 힘을 주장하는 주디스 버틀러의 깊고 넓은 사유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니 어쩌면 매번 내 삶의 태도와 우리가 사는 현실을 찬찬히 돌아보게 된다. 조금 더 멀리 내다보며 다양한 형태의 폭력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의식하지 못하는 무지의 폭력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비폭력은 공격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윤리적 삶의 태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What's Up 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모 사케르 Ⅰ: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1995)

『아우슈비츠의 유산: 기록과 증언. 호모 사케르 Ⅲ』(1998)

『예외 상태. 호모 사케르 Ⅱ-1』(2003)

『왕국과 영광: 경제와 통치의 신학적 계보학을 위하여. 호모 사케르 Ⅱ-2』(2007)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3부작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은 거대한 서평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다. 배경 지식 없이 책 읽기가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아래 적어 놓은 책들의 계보는 ‘생명 정치학’이라 명명할 만한 사상의 축대를 쌓기 충분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미셸 푸코와 한나 아렌트와 칼 슈미트가 주축을 이룬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찰은 그대로 호모 사케르 탄생에 바탕을 이룬다. 조르조 아감벤은 이 책에서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156쪽)라고 정의한다. 태어나는 순간 차별 없이 모두 시민이 되는 세상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다. 피부색, 성별, 재산 유무, 출신 성분, 사회적 계급이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인간일 수 있는가. 평등이라는 개념은 인류 역사에서 희한하고 기발한 최근의 발명품이다. 말하자면 왕은 거지에게 갑질할 수 없으며 둘의 목숨값이 같다는 주장이 상식이 된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 과정과 결과에 경의를 표하지도 않고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배려와 혜택이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것처럼 자유와 평화도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착각하기 쉽다. 고대 그리스의 호모 사케르도 정치 체제와 사회 제도에서 유래했다. 노예와 여성은 물론 외국인은 시민이 될 수 없던 시대에 시민은 특권층이었다. 신에게 바쳐질 희생 제의에 사용할 수는 있으나 죽여도 죄를 묻지 않는 자는 누구일까.

“사케르Sacer란 건드렸을 경우 자신이나 남을 오염시키는 그런 사람 혹은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신성한’ 또는 (대략 유사하게는) ‘저주받은’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유래한다. 사람들이 지하 세계의 신들에게 바친 죄인은 성스럽”지만 저주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이 논의의 시작과 끝은 다시 수용소로 모인다. 깔때기처럼 아우슈비츠로 모여드는 현대 사상의 계보는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선과 악,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 이성과 감정, 관념과 유물 등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끝없는 혼돈과 파괴로 치닫는다. “나치 치하의 유대인은 새로운 생명정치적 주권의 특권적인 부정적 준거였으며, 따라서 죽여도 처벌받지 않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 호모 사케르의 명백한 사례였다.”는 단 하나의 문장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판 호모 사케르는 유대인으로 마감됐을까. 인간은 그리 지혜로운 동물이 아니다. 망각과 합리화의 능력을 갖춘 존재다. 주권이 가진 퓌시스와 노모스의 이중적 속성은 호모 사케르를 바라보는 양가성을 증명한다. 예외는 일종의 배제다. 생명 혹은 인간으로서 ‘예외’에 해당하는 존재가 가능한가. 인류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예외인가. 유색인종은 백인의 예외인가. 장애인은 정상의 예외인가. 성소수자는 이성애자의 예외인가. 비기독교인 기독교인의 예외인가. 시민은 권력자의 예외인가. 노동자는 자본가의 예외인가. 청소년은 어른의 예외인가. 노인은 젊음의 예외인가……

하나의 프레임에 갇힌 사람의 아집과 독선이 주체적이고 신념에 찬 태도로 칭송받기도 한다. 아감벤이 주장하는 호모 사케르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아무 곳에도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없는 게 아닌가. 아감벤은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 인권과 새로운 노모스를 정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이 존재할까. 얼마 전에 석방된 ‘조두순’은 어떤가.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존재가 아닐까. 어느 시대에도 호모 사케르는 존재하는 게 아닐까. 죄는 미워해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사형제 존폐 논란은 언제 끝날까. 범죄자를 옹호하는 말로 아감벤을 오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일 오늘날에는 명백하게 규정된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형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라는 말은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언젠가, 누구든 우리는 모두 잠재적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다는 경고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경계를 허무는 일, 아니 경계를 지우고 구별 짓기를 끝내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의 욕망과 비인간적 속성조차 인간의 본성으로 치환하고 그 적응 노력을 자기계발로 선망하는 시대다. 좋은 삶, 내 삶의 가치는 숨은그림찾기처럼 점점 더 어렵고 난해해진다. 비슷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윌리를 찾는 일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 돼 버렸다.

*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이 인용, 소개한 책들

아리스토 텔레스 『형이상학』 『정치학』『니코마코스 윤리학』『영혼론』

미셸 푸코 『앎에의 의지』『성의 역사』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혁명론』『전체주의의 기원』

플라톤 『필레보스』『프로타고라스』『법률』『국가』

칼 슈미트 『정치 신학』『노모스』

알랭 바디우 『존재와 사건』

가타리, 들뢰즈 『천개의 고원』

발터 벤야민 『운명과 성격』『폭력 비판론』『서한집』

홉스 『리바이어던』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카프카 『법 앞에서』『소송』『노트』

칸트 『도덕 형이상학』『실천 이성 비판』『공동 판결에 관해』

하이데거 『철학에의 기여』

장 뤽 낭시 『무위의 공동체』

바타이유 『에로스의 눈물』

페르슈어 『인종 위생학』

칼 빈딩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에 대한 승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리커버 개정판) - 국내 최초 수메르어·악카드어 원전 통합 번역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록 없는 역사는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에 살았던 모든 순간이 기록된 건 아니다. 땅속에 묻혀 흔적이 남아 있거나 기록이 발견되지 않으면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문명을 이루며 문자를 발명한 후에도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러고 보면 과대 포장과 확대 해석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도 만들어진 신화에 불과하다. 어쩌면 객관적 사실을 기록하는 일은 불가능한 지도 모른다. 기록자는 전쟁에서 승리한 자이며 권력과 부를 거머쥔 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가장 오래된 역사는 무엇일까.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수메르의 역사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가 역사와 신화의 혼재인 것처럼 길가메쉬라는 실존 왕에게 입힌 화려한 신화의 옷은 당대의 현실을 가늠하려는 시도를 불가능하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 왜곡된 사실도 역사가 되고 신화가 되는 것일까.

실증주의 역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과장된 기록으로 인류의 과거를 가늠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신화일까. 보헤미아 프라하 출신의 독일 시인 릴케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죽음의 공포에 대한 서사시’라고 했다. 초야권까지 소유한 실존 인물 길가메쉬가 현실에서 채우고 싶은 욕망은 없어 보인다. 단 한 가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일련의 과정이 길가메쉬 서사시의 뼈대를 이룬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이 달나라에 가는 시대에도 단 한 번뿐인 삶에 정답을 찾지 못한 건 아닐까. 모두 죽는다는 전제가 삶의 목적과 방법을 오히려 왜곡하기도 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며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도록 독촉하는 건 아닐까.

수메르어는 그림문자(5100년) 이전에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악카드어(4600년), 에블라어(4300년), 히브리어(3000년)으로 이어지는 기록의 역사는 현존재를 먼지만큼 아득하게 만들어버린다. 천문학과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겸손’이다. 타인과 세상을 보는 눈이 어떠하든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든 존재의미를 찾기 어렵다. 수천 년 전 수메르에는 엔메르카르-루갈반다-두무지-길가메쉬로 이어지는 막강한 권력자가 있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인 수메르가 “그리스에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특히 길가메쉬 서사시는 호메로스의 ‘교과서’ 중 하나였을 것이다. 오디세이아뿐만 아니라 고대 영국의 영웅 서사시이며, 게르만족 최고의 서사시인 〈베어울프(Beowulf)〉에서부터 북유럽의 신화 연대기 〈잃어버린 이야기들(The Book of Lost Tales)〉의 집필자인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의 장편소설 〈반지의 제왕(The Lora of The Rings)〉에 이르기까지 영웅 문학의 출발점이요, 최고(最古) 정점에 길가메쉬 서사시가 우뚝 서 있다! ”

수메르의 권위자가 쓴 영역본을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책을 고민했으나 라틴어를 공부한 천병희의 판본을 믿듯 수메르어와 악카드어 기록을 직접 해석한 김산해의 책을 선택했다. 그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악카드어의 기록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여러 판본으로 치자면 최후대에, 달리 말하면 마지막 개작(改作)DP 해당되는 것이었지만 성서의 기록보다 적어도 수백 년이나 앞서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학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인간이 2000여 년간이나 믿어온 ‘진실의 혼돈’이었다.”라고 말한다. “히브리 신호와 그리스 신화에 앞서 악카드어로 기록된 원본들이 있었다! 악카드어로 기록되기 전에 수메르어로 기록된 진짜 원본들이 있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제 최초의 신화, 최초의 서사시를 접할 수 있는 시기에 태어난 행운을 잡은 것이다. 이것은 4000여 년 전 수메르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뒤부터 부활하기까지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누리지 못한 특혜인 셈이다! ”라는 감탄은 길가메쉬 서사시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한 권의 책으로 남은 기록이 아니니 순서를 정하고 수메르어 기록과 악카드어 기록의 조각들을 맞춰 배열하는 작업은 오롯이 번역자의 몫이다. 450쪽에 달하는 부담스러운 분량이지만 지루함을 덜기 위해 사진과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기 때문에 전혀 지루하지 않다. 번역투의 문장도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어나 고대어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배경 지식에 해당하는 긴 각주는 본문을 읽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건너뛰지 말고 꼼꼼하게 살피는 편이 낫다.

신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엔키가 창조한 ‘인간’은 오늘도 고단하다. 매일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눈을 뜨는 건 어쩌면 하루살이로 매일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닐까. 또 하루 저물어 가고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로 오늘을 살았을 테지만 어둠이 내리면 잠자리에 들고 다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내일을 산다. 그 종착역이 어디든 4800여 년 전 길가메쉬가 느낀 두려움 대신 자기 삶의 끝을 가늠해 보면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얼마나 계속될지 모를 미래를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잠자는 자와 죽은 자는 얼마나 똑같은가! 죽음의 형상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도다! 바로 그것이다. 너는 인간이다! 범인이든 귀인이든, 꼭 한 번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하고, 하나처럼 모두 모여든다. -369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3-08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립니다 *^^*

cognizer 2022-03-08 18:21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