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사
알베르 소불 지음, 최갑수 옮김 / 교양인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 자유여! 그대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범죄가 저질러지는가?”(롤랑 부인) - 87쪽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얼마나 많은 말이 허망해지는가.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약속이 부질없어지는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앞에 ‘자유’를 붙여 전가의 보도로 휘두르는 얼치기가 날뛰고 준엄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위정자들이 또 얼마나 개인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불철주야 헛된 말들과 약속을 남발하고 있는가.

독학자의 서재를 채우는 귀한 가르침을 만날 때마다 옷깃을 여민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는 대중의 인기와 시류에 영합했던 작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대조되는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시작하며 필연적으로 만난 책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처럼 어떤 책과의 인연도 시절과 맥락이 존재한다. 선택이 오롯이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니듯 숱한 책을 만나고 읽고 잊는 일도 경험과 나이와 시기에 따라 자연스레 물 흐르듯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알베르 소불은 프랑스 혁명을 계급 충돌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사건으로 상징되는 혁명을 제3신분 부르주아가 헤게모니를 거머쥔 사건으로 규정한다. 대다수 농미노가 장인은 신흥자본가와 이해관계가 다르다. 성직자, 귀족을 위한 앙시앙 레짐의 혁파에는 공감하지만 국가의 질서와 체제에 대해서는 관점이 같을 수 없다. 1792년 8월 10일 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에 가깝다면 그 이후에 벌어진 공포정치와 밀물처럼 밀려왔던 반동과 또 다른 혁명과 좌절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과 프랑스의 역사를 다시 보게 한다.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 2권 ‘워털루 전쟁’에서 장엄하게 묘사했듯 “만약에 1815년 6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유럽의 헤게모니를 넘겨준 프랑스는 1830년, 1848년 그리고 1968년에도 계속해서 ‘혁명’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치 혁명의 활화산처럼 폭발하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며 유럽의 역사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92년 이후, 유럽의 모든 혁명들은 프랑스혁명에 불과하다. 자유는 프랑스로부터 사방으로 비쳐 간다. 그것이야말로 태양의 행위 같은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는 소경이다! 그렇게 말한 것은 보나파르트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말이 프랑스 혁명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우리에게 각인된 1789년 이전과 이후의 전후 맥락을 상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역학관계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동한다. 합스부르크가의 이야기가 여전히 숱한 영화, 드라마로 재생산되며 흥미를 유발하는 건 단순히 지나간 시간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니라 숱한 우연과 필연이 빚어내는 결정적 순간에 대한 아쉬움 혹은 환희가 아닐까.

알베르 소불의 이야기에 파묻혀 3박 4일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혐오, 분노, 좌절, 환희, 안타까움, 희망, 비참, 안도, 허망......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숱한 감정의 회오리를 경험했다. 여전히 논쟁 중인 혁명에 대한 분석과 해석은 ‘관점’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최갑수가 역자 후기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듯 소불에 대한 다양한 평가는 역사들의 몫이다. 지구 반대편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프랑스 혁명사를 들여다보며 느낀 감회는 남다르다. 문학, 역사, 철학, 사회,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그 빛과 그림자가 여전한 프랑스 혁명의 세세한 기록을 살피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1789년 조선은 영조 13년으로 수원 팔달산 화산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현륭원을 조성한다. 11살에 뒤주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목격한 아들의 슬픔이 수원화성으로 빚어질 무렵이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보나파르트의 워털루 패배가 밤새 내린 비와 숱한 우연의 겹침인 것처럼 역사는 때때로 아이러니하게도 ‘가정법’을 허락하지 않는다. 성직자와 귀족의 비율, 그들이 점유한 토지...왕의 절대 권력과 신의 이름을 팔아 교회와 수도원, 성직자들이 누린 특권, 세습 귀족이 가진 부와 명예를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라는 생각은 결과론적 판단이 아니다. 오로지 생존의 극단에서 벌어진 반란과 혁명의 불씨가 횃불로 번진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것이 당대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현재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를 반영한 정치인들의 발언이 단순한 ‘말실수’ 용인되고 친 재벌 정책과 사학재단의 비리에 관대한 시민들의 시선과 태도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경제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간극이 메워지지 않는 건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 부족한 현실 인식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그냥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른가. 프랑스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끝날 수 없다.

구체제에 위기가 부르주아 혁명과 민중 운동을 초래하고 혁명정부가 들어섰으나 결국 유산자가 지배하는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귀결됐다. 알베르 소불은 결론을 덧붙여 혁명과 현대 프랑스를 조망한다. 국민적 통합과 권리의 평등 그리고 혁명의 유산을 살피는 과정은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현대사회는 거대한 인류 공동체로 기능하기 때문에 당연할 수도 있으나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미래를 돌아보는 데도 『프랑스 혁명사』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다.

혁명, 그것은 ‘위로부터’ 강제될 수 없다. ‘개혁’이 ‘위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혁명은 필연적으로 ‘아래로부터’ 강제되는 것이다. 개혁은 사회의 기본 구조를 흔들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적인 사회 범주들의 지속적인 이익을 위해 기존의 구조를 보듬는다. - 혁명이란 무엇인가(‹사상› 제217~218호, 1981년 1월~2월, ‘국가’와 ‘사회’ 특집호), 77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미제라블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1
빅토르 위고 지음, 정기수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02년생인 빅토르 위고는 1862년에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을 발표한다.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상충한다. 기준과 범주에 따라 ‘가난’도 다르다. 프랑스어 ‘misérable’은 형용사와 명사로 불쌍하고 비참한 상태와 사람, 매우 가난한 상태와 사람을 가리킨다. 고전은 대개 역사가 담아내지 못한 현실의 모순을 담아낸다. 무명씨들의 집합이 실제 역사라는 생각은 미시사微時史 연구의 출발이지만 부분이 전체를 담아낼 수 없듯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조각난 개별적 사실들이 모여 흐름을 이루고 커다란 흐름에는 반드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지류와 흔적들이 남는다. 그것이 비록 주류가 아니더라도 엄연히 존재했던 사람들이며 사실들이다.

1부 팡틴, 2부 코제트, 3부 마리우스, 4부 플뤼메 거리의 서정시와 생 드니 거리의 서사시, 5부 장 발장 중 1부 팡틴을 읽었다. 소설의 시작은 ‘올바른 사람’이다. 빅토르 위고는 미리엘 주교를 올바른 사람의 전형으로 내세운다. 신의 뜻을 실천하는 자, 이상적 종교인을 묘사하는 데 공을 들이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톨릭 사제로서 갖춰야 할 삶의 자세와 마음가짐이 새삼스럽지 않다. 태도가 한 인간의 본질을 결정한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미리엘 주교는 언행일치를 보여주는 존재로 레 미제라블 중 하나인 장 발장을 자연스레 신에게 인도한다. 설교와 바이블이 아니라 일상적 태도와 진정성으로.

뒤이어 등장하는 1부의 주인공 팡틴은 당대 사회의 비정함을 보여주기 위한 희생양이다. 코제트의 양육자 테나르디에 부부와 자베르는 악인의 전형이 아니다. 그저 모두 레 미제라블이다. 곤궁하면 가난한 이웃을 먼저 물어뜯는다. 갑이 아닌 을, 병, 정들의 난투극은 오랜 역사다.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는 그 자체로 모순된 표현이나 도달하기 어려운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누가 장 발장을 손가락질 할 것인지 묻기 전에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레 미제라블이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란 사람들이 범죄자로 판정한 자를 말한다.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는 않는’ 존재라고 말한다. 팡틴과 같은 희생양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추방(터부)되어야 존재로 인식한다. 사케르Sacer란 건드렸을 경우 자신이나 남을 오염시키는 그런 사람 혹은 사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신성한’ 또는 (대략 유사하게는) ‘저주받은’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유래한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에서 루시 마네트가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 여성의 전형으로 등장했다면 팡틴은 레 미제라블 조차 배제하고 싶었던 호모 사케르의 전형이 아닐까.

아라스는 유서 깊은 곳이다. 국왕 처형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던 급진파 로베스피에르가 제3신분 대표로 선출된 곳이다. 장 발장이 아라스로 가지 않기 위한 필연적 이유를 찾는 본능과 인간적 양심 사이에서 고뇌하는 장면이 1권의 압권이다. 마차를 들어올리고 자베르와 대면하고 법정에서 내가 장 발장이라고 외치는 장면은 표면적 서사에 불과하다. 미리엘 주교로 출발한 이야기는 장 발장의 고민으로 절정을 이룬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 공간적 배경은 작가의 의도와 주제를 읽는데 유의미하다. 예를 들어 가짜 장 발장으로 오해받는 샹 마티외 재판이 열리는 법정은 아라스에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 곳에서 《아라스 국민nation에게 드리는 호소》를 발표했다. 또한 미리엘 주교의 은그릇을 훔친 장 발장의 이야기는 프랑스혁명 당시 제헌의회 의원들은 교회가 소유한 재물을 공격했으며 관련 법령은 ‘예배의 규범 유지’에 꼭 필요하지 않은 모든 은그릇을 처분하라고 규정과 관련해서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역사는 현실을 넘어설 수 없고 현실은 역사보다 비극적이다. 빅토르 위고는 역사와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며 “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서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에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더욱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 않으리라.(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라는 말로 소설을 시작한다.

2부의 주인공 코제트를 내세워 또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지 모르겠으나 숱한 뮤지컬과 영화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 너머에 숨어 있는 텍스트 사이사이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지루한 장광설과 만연체 문장, 개성적 인물에 대한 아쉬움이 있으나 “도시에는 말 많은 사람은 흔해도 생각 있는 사람은 드물다.”와 같은 경구, 소설 내용과 별 상관없이 빅토르 위고의 속내를 내비치는 문장을 읽는 재미가 긴 호흡의 소설을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선집
찰스 디킨스 지음, 권민정 옮김 / 시공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교하라, 지옥문이 열릴 것이다.

인스타그램에는 불행이 없다. 헬스와 필라테스로 관리한 몸, 최신 유행 패션과 소품, 세련된 인터레리와 수입 가구, 화려한 조명과 미슐랭 가이드 음식점, 오마카세 데이트와 다양한 취미, 풀빌라 휴양지와 풍경 사진.... 자기 삶의 가장 아름답고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 기록하고 싶은 욕망은 권장할만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광고와 밴드왜건 효과는 불행을 양산하고 욕망을 창출하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천국의 열쇠 대신 지옥문의 손잡이를 돌린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차리리 모든 걸 전복하는 혁명이 장기적 관점에서 쉽고 빠른 방법이다. 점진적 변화와 발전에 대한 희망은 신기루처럼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미래를 위해 남겨둔 비밀 처방전이 아닐까. 범주가 다르지만 남자와 여자, 청년과 노인, 동양과 서양, 서울과 지방, 한국과 일본, 대구와 광주, 유럽과 미국, 과거와 현재, 오늘과 내일을 비교하는 건 어떤가. 빅토리아 여왕 시절, 찰스 디킨스의 장편 소설은 대중의 폭발적 지지와 관심의 대상이었다. 헐벗고 굶주린 대다수 평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낭만적 사랑과 연애가 아니라 현실적 고통과 일상적 삶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유산』과 달리 『두 도시 이야기』는 읽는 내내 불편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로 등장하는 대표적 개인 ‘드파르주’와 주변사람들에 대한 묘사, 마네트 박사의 투옥 원인부터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을 보여주는 루시 마네트, 객관적 사무원으로 등장하는 자비스 로리 등 등장인물들에 대한 찰스 디킨스의 심리적 거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현실을 담아내 고고학에 버금가는 고현학考現學이라 평가받았던 박태원의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등은 서술자가 풍경에 개입하지 않는 관찰자의 역할에 머문다. 이 소설도 전지적 작가 시점을 유지하고 있으나 18세기 중반 영국의 노동 현실, 말하자면 페르낭 브로델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Ⅱ-2 교환의 세계』에서 “도시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곳은 주지하다시피 근대성의 원형이며, 근대 국가와 국민경제가 탄생할 때 모델이 되었다. 도시는 늘 다른 사회를 희생해가면서 축적과 부의 장소가 되었다.”라는 주장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도시도 다르지 않다. 자본의 축적과 경쟁 이외의 장소로 평가받을 만한 요소가 남아 있을까. 그래서 사람 사는 곳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마을을 이루고 삶이 이어지지만 기본적으로 도시적 삶의 원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비교하는 두 도시, 즉 런던과 파리는 유럽의 근대적 삶을 적확하게 드러낸다. “젠트리(gentry)라는 말은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상층을 가리킨다. 이 층은 상업을 통해서 부를 쌓았지만 한두 세대 전부터 상점과 계산대를 떠나서, 즉 상품을 직접 다루고 장부를 작성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서 이제는 대토지를 경영하거나 돈놀이를 하거나 안전한 가산(家山)이 된 국왕 정부의 관직을 구입함으로써 부와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알뜰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또한 “부르주아지(bourgeoisie)라는 용어는 부르주아(bourgeois)라는 용어와 운영을 같이했다. 두 용어 모두 12세기부터 사용한 말이다. 부르주아란 한 도시의 특권 시민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이 말은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 가서 널리 퍼졌으며, 18세기에 가서 일반화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이 말을 대단히 널리 쓰이도록 만들었다.” 젠트리와 부르주아는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분석을 실천하며 축적에 축적을 더해 자본이 굴러가며 증식하는 신비한 꿈과 환상의 미래를 맞이한다. 그런데 노동자와 농민들은?

1775년 11월 현재를 작가는 “최고의 시절이었고, 최악의 시절이었고, 지혜의 시대였고, 어리석음의 시대였고, 믿음의 세기였고, 불신의 세기였고, 빛의 계절이었고, 어둠의 계절이었고, 희망의 봄이었고, 절망의 겨울이었고,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고,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천국을 등진 채 반대로 나아가고 있었다.”라고 회고한다. 1859년, 그러니까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공화정이 수립된 파리의 모습을 런던에서 바라보는 찰스 디킨스는 오래된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휴머니즘도 인류애도 아닌 시드니 카턴의 마지막 바꿔치기 기술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시대의 모순 혹은 혁명에 따른 부작용, 또는 헤게모니를 가진 인간의 속성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고민할 순 없었을까. 런던에서 도버 바다 건너 칼레에서 생탕투안을 왕복하며 벌어지는 마네트 박사 일가와 얽힌 혁명의 뒷담화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지 궁금해졌다.

문학은 현실원칙을 넘어선 자리에 놓인 인간의 쾌락원칙을 위한 면죄부가 아닌가. 소설적 상상력과 구성의 탄탄함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775년은 조선의 영조 51년,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인 시절이다. 프랑스 민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혁명의 횃불을 지켜든 1789년이 인류사에 남긴 족적은 형언하기 어렵다. 유럽의 민주주의는 왜 미국가 다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왜 비판적 성찰 없는 진영논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가. 스스로 왕의 목을 쳐 본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과 우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이 당대 사회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뒤바꿔 놓았는가. 역사소설로서 가져야 하는 무게와 역할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거시적 관점에서 다루기엔 너무 버거운 주제였을 지도 모르겠으나 두 도시 이야기는 시대의 산물로서 당대를 살아냈던 혁명 과정의 희생양 혹은 윤리적 딜레마에 관한 보고서로 읽혔다. 당대의 기나긴 만연체 문장과 고대 영어를 번역하며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는 번역자의 고백까지 찬찬히 살폈으나 아쉬움이 지워지진 않는다. ‘근대’가 주는 위로, 당대성을 배제한 고전읽기의 어려움은 모든 독자들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독법 차이일 수도 있다. 그래도, 고전이 주는 의미는 현재적 유용성에서 관한 고민에서 출발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상상력이 기록되기 시작한 이래 상상된 것들 가운데 온갖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괴물들을 하나로 융합하여 만들어낸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기요틴이었다. - 64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관심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셈이지. - 91쪽

노르망디 해변가 작은 도시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구글어스의 최초 아이디어는 젊은 예술가와 해커에서 출발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온 세상을 날아다니는 상상력은 독일의 아트+ 컴에서 실현됐다. 상상이 현실이 되지만, 천문학적 액수가 걸린 구글과의 소송에서 진다. 사실과 진실 사이, 법과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는 건 인간의 숙명인지 모른다. 노르망디 해변의 작은 도시로 날아가 거리를 살펴보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현실에서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로 안내한다.

어느 날 남자들이 더 이상 그녀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샹탈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아이를 잃은 엄마가 아닌 여자로서의 삶도 끝나간다는 슬픔의 그림자. 장마르크의 가상한 노력은 역효과를 불러오고 이별의 빌미를 제공한다. 사랑을 시작할 땐 이유가 없지만 사랑이 끝날 때는 헤아릴 수 없는 이유가 생긴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면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멈춘다. 꿈과 현실 사이를 헤매고 두세 시간 이상을 자기도 어렵다. C. D. B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이니셜이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멍한 눈길로 바라보는 푸른 하늘 너머에 존재하지도 않는 꿈을 좇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 경계를 만드는 위대한 면도 있지만 인간은 그 벽을 넘다 지치기 마련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이카루스의 꿈처럼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반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소설을 읽는 게 아닐까.

밀란 쿤데라는 샹탈의 입을 통해 “당신이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이라고 선언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인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묻는다. 일관성과 동일성을 유지한 어떤 본질적 특성이라는 정의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인간은 일관성과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유기체다.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이라니.

인간에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정체성의 혼란은 불가피하다. 확고한 믿음과 뚜렷한 신념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사람은 안다. 고집스런 자기 확신만큼 타인에 대한 신뢰는 불안하게 흔들린다. 발 딛고 선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림짐작하기 어렵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 우리가 잠든 사이 깨어 있는 불빛, 내가 굳게 믿었던 연인과 친구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을 존재의 가벼움’을 느낄 때마다 ‘농담’을 던지는 대신 자기 ‘정체성’이 아닌 타자에 대한 오해를 점검하라고 조언하는 듯하다. 나는 누구인가, 만큼 중요한 ‘누구냐 넌?’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호실로 가다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이었다. 소설을 읽고 표지 그림을 찾아봤다. 화가 우지현은 그림에 관한 에세이를 쓴 작가이기기도 하다. <그리운 것들은 당신 뒤에 있다>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렸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확인했다. 영화 「셜레 관한 모든 것」 포스터처럼 현대인의 고독에 침잠했던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Morning, 1952」이 언뜻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지현의 「어느 밤」은 로리스 레싱이 표현하고 싶은 단편의 이미지를 시각화하는데 성공했는지 알 수 없다. 주인공 수전의 내면을 드러내고 싶었을까. 소설에 묘사된 호텔을 시각화하는데 몰입했다는 이 그림은 의미가 퇴색했을 터. 창밖에 지는 석양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매슈의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다. 혼자만의 공간에 머물러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하는 뒷모습이 쓸쓸하지만 무기력해 보이지는 않는다.

유명 화가의 그림을 표지로 활용하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들과 달리 소설에 맞는 그림을 의뢰해서 책을 만든 출판사의 노고에도 박수를 보낸다. 그리운 것들을 모두 뒤에 남겨진 시간 안에서만 머문다는 우지현의 그림 주제도 좋다. 물론 수전은 지난 세월을 추억하거나 그리움 때문에 눈물짓는 여성은 아니다. 어쩌면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해결할 수 없는 평범한 여성의 경력단절, 육아와 자아의 충돌, 평온한 삶이 주는 권태, 무료한 인생의 지루함을 프레드 호텔 19호실에서 달랜 건 아니었을까.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에겐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건 근대적 여성의 조건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물질적 토대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주체적 삶의 태도는 현대인에게도 삶의 필수 조건이다. 매슈와 결혼, 출산과 육아로 행복의 외적 조건은 갖추었으나 교외의 저택과 경제적 풍요가 수전에게 삶의 전부일 수는 없었다. 사랑이 식어버린 관계를 탓할 수만도 없다. 도리스 레싱이 단편 「19호실에 가다」를 통해 보여주려던 여성의 모습은 인간 일반으로 확대할 수 있다. 물론 수전이 처한 삶의 조건이 아니라면 19호실이 필요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남편 매슈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19호실을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누구든 19호실은 필요하다.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 시간, 삶의 이유를 묻고 자기를 들여다보는 공간, 자기만의 방, 자기만의 동굴.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걸 공유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은 욕망이 불러올 부작용과 비극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게 된다는 아이러니. 누구에게나 비밀이 있다는 건, 양심과 죄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오해와 불신이 쌓인다. 매슈와 수전이 공유하는 삶, 사랑하는 방식은 어쩌면 19호실과 무관하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19호실이 필요한 이유는 너무 많다. 빈둥지 증후군을 겪는 여성의 일탈이 아니라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라는 첫 문장처럼 감상적 태도로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중간에 같은 문장이 세 번 반복된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304쪽)가 그것이다. 남편과 세 아이의 엄마도 혼자다. 그녀는 혼자였고 여전히 혼자다. 그래서 “사실 그 방이 없으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328쪽)라는 고백이 가능하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와 외면이 한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개인적인 성향과 용기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없다. 세상에 수많은 책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괜찮으냐고, 그렇게 살아도 행복하냐고 그리고 당신만의 19호실은 어디 있느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