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김누리 교수의 한국 사회 탐험기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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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독일의 음유시인 볼프 비어만의 시구가 자꾸 귓가에 맴돈다. “이 시대에 희망을 말하는 자는 사기꾼이다. 그러나 절망을 설교하는 자는 개자식이다.” 그래, 환멸 속에서도 한 걸음 나가야 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 253쪽

여기저기 옮겨지는 촌철살인의 단문들. 그리고 가슴을 녹이고 공감을 일으키는 미문들.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호소문들. 우리 삶은 어쩌면 수많은 텍스트로 둘러싸인 거대한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닐까. 유튜브와 인스타, 틱톡으로 무장한 감각적 영상들이 뇌를 자극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짤막한 시구절에 열광한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라는 문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라는 말로 2차대전의 비극과 참상을 표현했던 브레히트처럼 김누리는 볼프 비어만의 입을 빌려 이 시대의 희망과 절망을 비튼다. 그럼 충분히 절망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었을까. 근대 이전 계급 사회에서도, 구한말의 혼란과 일제 강점기에도, 해방의 혼란과 한국 전쟁의 틈바구니에도, 반민특위가 해체와 자유당 부정선거에도, 군사 쿠데타와 유신정권에도, 5․18과 박종철 고문치사에도 절망할 권리가 없었을까.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랜 전통과 문화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한다. 유구한 역사와 고유한 정신문화가 내재한 민족이라는 환상처럼 어이없는 일이다. 때때로 자기만의 정신 승리법과 대리만족은 재벌과 연예인 걱정만큼 정치인에 대한 환호와 경멸로 나타난다. 누군가 이 절망을 바꿔 줄 거라는 기대만큼의 크기로 실망은 분노로 치환된다. 역사는 언제나 그 희망이 헛되고 헛되었음을 증명한다. 68혁명의 혜택(?)을 한 줌도 받지 못한 한국은 겨우 87년 체제가 자리를 잡는 듯했지만 신자유주의와 함께 IMF라는 후유증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여기는 어디이며 우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냉정한 현실 인식 없는 긍정과 희망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또 있을까. 비판적 거리 두기를 비관적 냉소주의로 받아들이면 ‘절망할 권리’는 모든 사람이 당당하게 누릴 수밖에 없다. 2013년부터 2020년까지 쓴 칼럼을 주제별로 엮은 이 책은 관념적 현실 비판이 아니다. 뻔한 시론時論의 지겨움은 논리 없는 자가당착, 진영논리를 앞세운 반대, 계급 이익을 앞세운 이기주의, 반성과 대안 없는 비난 때문이다. 김누리는 독일의 현실을 자주 언급하며 유럽과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을 비교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현상을 통해 본질적인 문제를 들여다보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대체로 눈앞에 선거, 단기적 이익 앞에서 대증요법에 급급하다.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지난 일을 잊는 데는 수준급이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일도 감당하지 못하는 다이나믹 코리아의 현실 때문이 아니라 멀리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태도와 본질적인 문제 해결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불안사회, 무례 사회, 방관 사회, 노예 민주주의를 언급하는 책의 서문은 ‘환멸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제와 다른가. 10년 20년 전과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사회 현상을 관찰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보려는 노력은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태도다. 정치 혐오는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민주주의의 최대 적은 약한 자아’라고 했다. 약한 자아를 가진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민주주의를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은 ‘광장 민주주의’는 이루었지만 ‘일상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한 한국 사회의 ‘이상한 현실’을 설명해 준다.” 일상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의식과 태도를 규정한다. 자신의 한계는 스스로 정한다. 말과 행동은 생각의 자기 검열을 통해 드러난다. 관습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희망은 없다.

사회, 정치, 교육, 대학, 외교 등 주제별로 엮인 글이 지난 8년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굵지한 사건을 환기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다. 대체로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이라는 환상이 깨어진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려는 상황에서 우리는 또다시 우리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알렉시스 토크빌의 비아냥을 떠올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김누리는 “이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집단의 인식은 지극히 천박하다. 이들은 대개 이 사회의 교육과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이수한 ‘우등생들’인 까닭에, 이들의 천민성은 그대로 사회의 성격을 대유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를 ‘모범생’으로 길러내는 무례사회에 미래는 없다.”라는 말로 기득권 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됐다는 환상을 버리고 일상 ‘속’의 민주주의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한 호소다. 시스템과 제도를 바꾸는 대신 현실에 ‘적응’하며 독자 생존에 몰입하는 순간 현실이 지옥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부모도 스펙이라는 말 앞에 할 말을 잃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훈계하며, 돈 되는 일이 아니면 관심 갖지 말라는 충고를 하게 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경제다.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신봉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환상은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이니 가난과 실패는 모두 네 탓이라는 암묵적 합의와 인정이 자존감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모범생과 우등생을 일치시킨다. 국영수 성적이 좋은 소수 카르텔 자본과 권력을 독점하는 시스템을 고치는 대신 그 자리에 끼지 못해 안달을 하고 내 자식만은 그들의 리그에 참여시키고 싶은 욕망이 앞서는 한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있다.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제,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가 가진 폐해를 생각해보지 않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에서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에 따라 찬반을 결정하는 한 절망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교육 시스템 자체를 바꾸려는 노력보다 ‘내 자식’에게 유리한 방식을 고민하는 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답은 나와 있다. 유럽의 대다수 나라들이 하는 대로 ‘정의로운 교육’을 실천하면 된다. 구체적으로 네가지를 폐지해야 한다. 첫째는 대학입시 폐지, 둘째는 대학 서열 폐지, 셋째는 대학 등록금 폐지, 넷째는 특권 학교 폐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상식이자 일상이다.”라는 말은 헛된 망상으로 들린다. 답을 모르거나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고민과 선택의 문제다.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행복한 미래? 지옥같은(빨리 읽지 말 것) 현실? 오늘과 내일 앞에 붙는 수식어는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써야 한다는 자각이 ‘절망할 권리’를 잃게 한다.

라이피즘lifism이라 명명한 주의, 주장이 모두에게 통용되는 프로파간다로 작동하긴 어렵다. 역사적으로 어떤 이데올로기도 다수에게 통용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파시시스트 히틀러도 합법적 권한을 위임받아 아우슈비츠를 만들었고 다수 대중은 이를 지지했고, 그 불가피성에 동의했다. 수구세력의 저항과 기득권 전쟁이 언제 한 번이라도 만만했던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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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한다는 착각 - 뇌과학과 인지심리학으로 풀어낸 마음의 재해석
닉 채터 지음, 김문주 옮김 / 웨일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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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우리 신체에서 1.4 킬로그램에 불과하다. 현대 의학은 물질적 존재로서 몸의 각 부분을 해부해서 그 역할과 기능을 밝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의 작동방식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 복잡한 생각들은 시냅스를 비롯한 뉴런의 작용으로 선택과 판단을 이끌어 행동에 옮기게 한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 본능적인 움직임은 물론 철학적 사고에 이르기까지 알 수 없는 경로를 거친다. 자유의지에 의해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조절한다는 자부심은 인간을 오만하게 한다. 다른 어떤 동물과 구별되어 자연을 지배한다는 착각.

닉 채터의 도발적인 주장이 담긴 ‘생각한다는 착각’은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급진적이다. 지금까지 밝혀낸 뇌의 비밀에 대한 과학적 판단과 무관하게 인간 뇌의 작동 방식은 평면적이고 표피적이란다. 심오한 정신적 깊이 따위는 없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내적 심연은 과연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에 불과한 걸까. 과거 경험을 바탕으로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행동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든다. 다양한 인지 실험과 착시, 환상 같은 예시를 통해 우리의 통념을 박살 내는 저자의 말에 혼란스럽다. 무의식에 기반을 둔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은 허구에 불구한 것일까. 표피적 과정에 집중할 때 겨우 마음의 본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믿는 인간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영리하며 논리적인 생명체다. 심연으로부터 길어올린 생각과 이성적 판단이 인류의 삶을 진보시켰고 문명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기존의 믿음은 모두 잘못된 것일까.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아무리 설명하고 합리화해도 파편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에 불과하다니! 절체절명의 순간, 깊은 고뇌와 사유를 거친 행동이 그 결과에 대한 구구절절한 이유 찾기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철학자이자 정치 운동가인 버트런드 러셀은 1901년 가을에 감정적 통찰력의 순간에 관한 인상적인 글을 썼다. “나는 어느 날 오후 자전거를 타고 나갔고, 시골길을 따라 달리는 도중에 불현 듯 내가 알리스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 순간까지도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이 사그라질 수조차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러한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바로 파멸이다.” - 151쪽

러셀의 자서전에 소개된 일화는 다양한 장면에서 인용된다. 저자는 이 장면이야말로 “탐구의 깊이와 풍부함과 무한한 범위는 모두 완전히 속임수다. 내면세계 같은 것은 없다. 찰나적인 의식적 경험의 흐름은 광활한 생각의 바다 위로 반짝거리는 수면이 아니라, 그냥 그게 전부다.”라고 주장한다. 꿈의 분석과 뇌 촬영에서 진짜 동기를 찾을 수 없고 과정과 결과를 밝혀내는 어설픈 설명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또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마음의 깊이라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 책의 절반을 할애한다. 감정, 상상력, 선택 등 우리의 생각은 모두 단편적이고 즉흥적이라면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 의식과 무의식은 경계가 없다. 의식적인 판독과 그 판독을 만들어내는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 우리 생각을 해부하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뇌가 저지르는 속임수의 희생자들이다. 우리 뇌는 순간적으로 색깔과 사물, 기억, 신념, 선호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지어내며, 합당한 이유를 술술 뱉어내는 멋진 즉흥 기관이다. …… 마음은 평면이다. 그 표면이 그곳에 존재하는 전부다.”라는 문장을 한참 들여다보지만 반박할 증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 몸부림쳤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어떻게 이런 감정과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건 순전히 착각에 불과한가. 겨우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타인과 세상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겨우’가 아니라 그 착각을 인정하는 일이야말로 인간 존재에 대한 궁극적 비밀일까. 겸손과 두려움은 앎의 세계를 들여다본 자들이 받는 형벌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때로 모든 게 혼란스럽고 부질없게 느껴진다. 오직 모를 뿐이라고 일갈한 스님의 깨달음을 받아들이더라도 다음이 궁금하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는 모두 자기 합리화 과정에 불과한 게 아닌지 모르겠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이 너무 힘겹다. 저자의 말대로 마음이 평면이니 미래를 꿈꾸고 만들어 갈 수 있는 마지막 문장도 합리화에 불과한 게 아닌가.

생각의 ‘감옥’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고, 만들어진 것처럼 해체될 수도 있다. 마음이 평면이라면, 우리가 마음과 삶과 문화를 상상해 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감동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또 현실로 이뤄낼 힘을 지닌 셈이다. -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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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 변증법 - 철학적 단상 우리 시대의 고전 12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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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 21쪽

과학기술과 이성의 발달은 인류의 문명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고 다양한 문화 예술이 장밋빛 미래를 예견했다. 이성의 발달과 르네상스를 지난 계몽주의는 벨 에포크 시대로 접어드는 통로였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총성과 함께 20세기는 야만의 시절로 회귀한다. 폭력과 갈등은 민족주의와 파시즘으로 꽃을 피운다. 그 절정에 아우슈비츠가 놓여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예술가들은 다다를 거쳐 기존의 모든 질서와 체계를 부정하는 초현실주의로 나아갔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교수 활동이 금지되자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1933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들에게 미국은 천국이 아니라 문화적 충격이었다. 상류계급 시민이 누린 지적, 문화적 소양이 오히려 유럽 사회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됐을까. 이 책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암울한 반성문이다. 문명발달의 과정은 진보의 역사다. 역사는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며 야만의 세월에서 벗어났다는 믿음은 원자폭탄과 함께 터져버렸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인간의 역사는 야만의 세월을 넘어설 수 있는가. 과학기술의 발달이나 생활 수준의 향상과 무관하게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폭력성, 야만성을 증명해왔다. 숱한 제노사이드, 다양한 방식의 차별, 전쟁과 살육의 과정은 희망 따위를 언급할 수 없다. 아도르노의 말대로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 낭만적 사랑과 희망찬 미래는 개에게나 던져줘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졌는가”를 밝히기 위한 총체적, 역사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리스의 고전 오디세우스를 소환하고 사드의 소설에서 줄리엣을 증인으로 내세운다. 18세기 이후 서양을 지배한 이성과 합리주의는 스스로 무너졌다. 문명은 실패했다. 문명의 진보는 신화와 계몽주의의 변증법적 관계에 불과하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자연을 제압하고 인간을 계몽한다. 재난의 공포, 운명의 선택 앞에 인간은 언제나 신에게서 답을 얻었다. 신화에서 벗어났다고 믿는 오만한 인간의 모습이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드러난 게 아닐까. 인간이 스스로 신화를 창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비이성적 세계로 인류를 퇴행시켰다. 게르만족이 앞세운 민족적 우월성이 바로 그것이다. 창조된 신화로 계몽된 사람들의 집단적 광기는 히틀러에게 합법적 권력을 부여했다. 스탈린의 강제 수용소도 다르지 않다. 20세기와 함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계몽주의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했고 그 신화는 또다시 인류를 계몽하며 신화를 만들어 갔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진리를 역사적 운동에 대치되는 어떤 불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역사성을 부여하는 이론”이 되고자 하는 방법론적 원칙을 내세운다. 계몽의 한계를 드러낸 반유대주의적 요소들을 통해 계몽의 변증법이 인류 문명사를 관통하는 흐름임을 강조한다.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행이다.”라는 문장 앞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건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문장과 논리를 무너뜨릴 만한 증거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7년 미국에서 쓴 이 책의 개정판 서문은 1969년 4월 프랑크푸르트에서 쓰였다. 20여 년이 자났지만 수정에 인색한 이유를 밝히며 여전히 ‘관리되는 세계’로의 발전을 촉진시키기보다는, 자유는 지키고, 전개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스케치와 구상들’은 특정 주제에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단상이다. 거대한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불변하는 진리를 주장하거나 이론을 내세우는 이야기보다 반성적 회의주의자들의 이야기에 꽂히는 이유는 지극히 주관적인 취향일 터.

여전히 유효한 통찰 중 하나는 ‘문화 산업’을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이라고 주장한 부분이다. “대중 매체가 단순히 ‘장사business’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아예 한술 더 떠 그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허섭스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라는 주장은 다양한 문화 현상들이 ‘장사’로 통합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다. 정신 문화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국 현지의 사정도 저작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미국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문화 산업에 대한 황량함이 전통적인 유럽 지식인에 비친 모습은 한심함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으리라. 다만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던 시대에 꼰대같은 소리로 비칠 수 있으나 우리 현실에도 유효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오래전 읽기를 포기했던 책들이 새롭게 읽히고 감동을 주는 문장으로 뒤바뀌곤 한다. 나이와 세월의 장점은 이것만이 아니다. 키케로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끔 하늘이 맑고 푸르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다. 독서의 목적과 가치를 오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본다. 새로운 도전과 다양한 방법이 나쁘지 않으나 본질에서 멀어질수록 목적이 수단으로 전락한다. 지식과 정보는 도구로 활용돼야 하지만 우선 내 안에서 잘 수용된 후에 겨우 변화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닌가. 독서의 변증법 또한 신화와 계몽 사이에서 길을 잃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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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궁리하는 과학 6
자크 모노 지음, 조현수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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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_데모크리토스

17세기 과학 혁명은 인간의 사고체계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 구조를 변동시켰다. 신 중심의 세계관이 무너지고 합리와 이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밝혀지면 필연적인 이유가 설명됐다. 종교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인간의 사유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전체가 아닌 부분에 천착했다. 집단이 아닌 개인, 외부가 아닌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시적 세계관은 거시적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피력했다. 20세기에 눈부신 성과를 거둔 분자생물학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르빈 슈뢰딩거)를 밝혀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겨우 20종의 아미노산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라는 사실은 양자역학이 증명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놀라운 비밀을 신의 영역까지 침범한 것으로 오인하게 한다.

자크 모노의 논리는 명확하다. 미시세계의 우연이 거시세계의 필연을 만든다는 주장이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복잡한 구조의 생명체를 만들어냈으나 생명체의 본질은 불변적인 자기복제의 실현에 있다. DNA에 의한 정교한 자기복제의 과정에서 ‘요란’스런 일이 벌어진다. 즉, 변이라 불리는 우연에 의해 진화가 이루어지지만 종족 보존과 증식이라는 필연적 의도에 대한 저항 능력이 바로 변화, 즉 진화를 이끈다. 세대를 거쳐 자기 구조를 복제하는 불변적 태도야말로 생명체의 본질이며 필연적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하고 일단 한번 일어난 변이는 또다시 돌처럼 DN에 새겨져 자기복제로 이어지는 철저한 순환구조는 확실성에 기반한 필연의 세계다. 그렇다면 ‘불확정성 원리’에 따른 우연한 변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도대체 어떤 의도로, 누가 일정한 방향의 변이를 용인하는가. 진화의 비밀은 자연선택에 있고 수많은 변이 중에 선택받은 변이가 다음 세대의 DNA에 기록되는 방식으로 생명체의 진화가 계속됐다는 이야기는 어떤 신화보다도 아름답고 신비롭다.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자연을 지배하며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해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는 예측 가능한 삶을 꿈꾸게 한다. 안전하고 편안한 미래는 확실성의 세계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 모두 인간은 고귀한 존재이며 이 땅에 태어난 필연적 이유와 의미를 설파한다. 철학 또한 다르지 않다. 존재론부터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논리를 따라가며 인간의 존재 이유와 사유 방식을 점검한다. 필연적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과학의 세계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생명체의 출현, 인류의 탄생이 우연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자크 모노의 충격적 선언은 그 여파가 아직도 진행 중이 아닐까.

1970년에 나온 이 책은 노벨의학상을 수상한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의 ‘반과학’ 선언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 과정이 모두 필연이 아닌 우연의 결과라니! 그럼 인간의 삶은 어쩌란 말인가! ‘너에게는 우연이나 나에게는 숙명이다’라는 정호승의 시구절 따위는 개에게나 줘야 할까. 그 혹은 그녀의 만남이 운명이 아니라니 말인가. 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숭고한 과정이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른 우연일 뿐이라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가. 혼돈과 대환장 파티로 인류를 초대한 자크 모노의 용기가 부러운 게 아니라 철학, 종교, 정치, 윤리, 문화 등 모든 학문과 사유의 영역에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 관점의 새로움이 놀라웠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 세계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사유의 틀로 짜인 고유한 우주라고 생각한다.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개념이 인류 보편적 가치로 통용되는 이유는 여기에 바탕을 둔다고 하면 과언일까. 어쨌든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은 물론 공동체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점검과 성찰에도 ‘우연’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부모가 스펙인가, 장애는 선택인가, 여성은 운명인가, 나이는 벼슬인가……. 심리적 귀인 이론은 단순히 비합리적 태도가 아니라 우연과 필연에 대한 외면, 불안과 무지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우리가 사는 세계의 일부로서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한편의 거대한 우연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지나치게 냉소적인 태도일까. 자크 모노의 이야기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성찰을 넘어 인류 사상사를 개척한 고전으로 읽히는 이유를 번역자 조현수는 이렇게 말한다.

“저자는 그 어느 시인보다도 인간의 불행과 정신적 방황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으며, 그 어느 구도자보다도 경건하고 열정적인 자세로 진리를 추구하고 그 어느 철인보다도 밝은 혜안으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제시한다. 예술과 종교와 철학, 이 모든 것을 죽인 곳에서, 이 모든 것의 감수성과 경건함과 지혜를 합쳐 보다 더 커다란 진실 속에서 함께 완성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저자가 누누이 강조하고 스스로가 실천한, 진정한 과학의 힘일 것이다. 진정한 과학이란 무엇보다도 인간의 진정한 의무를 수행하는 길이다.”(옮긴이의 말)

마그리트가 삽화를 그린 로트레아몽 백작의 <말도로르의 노래>(1948)에는 “재봉틀과 해부용 탁자 위의 우산이 우연히 마주치는 것처럼 아름다워”라는 구절이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좋아했다는 이 구절은 곰표 맥주처럼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대상의 콜라보레이션이 창조적 미학을 드러낸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관습적 사고를 버릴 때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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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왜 끝나나 - 사랑의 부재와 종말의 사회학
에바 일루즈 지음, 김희상 옮김, 김현미 해제 / 돌베개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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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라는 말은 진실에 얼마나 근접할 수 있을까.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이 분석한 근대적 사랑에 대한 고찰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떠올려보자. 세속적 사랑과 순수한 사랑이라는 따로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에게 에바 일루즈가 묻는다. 사랑은 왜 끝나느냐고. 근대 이후 자유연애가 가능해진 인류에게 성과 사랑은 자본주의와 현대 문화를 통해 변형되고 왜곡된 지 오래다.

사랑은 왜 아픈가(2011), 사랑은 왜 불안한가(2013, 원제: 하드코어 로맨스)에 이어 사랑은 왜 끝나나(2018)로 이어지는 에바 일루즈의 고민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인류 사회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끝없이 계속해서 다른 형태의 사랑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사회학, 커뮤니케이션, 문화이론을 고루 연구했지만 저자의 논거는 대체로 사회학 이론에 집중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울리히 벡, 악셀 호네트, 앤서니 기든스 등 현대사회를 분석하는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저작을 적용하며 ‘사랑’의 본질을 탐구한다.

전근대 사회에서 구애는 확정적 선언이었다. 썸을 타고 탐색하고 망설이는 과정을 거쳐 사랑을 고백하는 현대식 사랑과 정반대였다. 사랑을 흔히 ‘선택’의 문제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모와 능력으로 대표되는 우월적 지위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오히려 거래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마음이 움직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련의 과정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만남과 구애와 고백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과 망설임에 도사리고 있는 선택의 기준에 대한 현상들. 에바 일루즈는 ‘부정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통해 배제의 논리로 ‘선택하지 않음’의 사랑을 시작한다.

캐주얼 섹스의 일상화, 부정적 사회성이 초래한 혼란스러운 섹스는 자본주의와 결합한 몸의 가치를 돌아보게 한다. 존재론적 당혹감은 평가 기준의 변화로 이어지고 주체의 혼란스런 지위를 경험하게 한다. “전근대의 구애는 감정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났다. 그리고 전근대의 섹스는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불러일으킬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는 (쾌락적) 섹스로 시작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정을 가꿔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관계를 두렵게만 여기는 불확실성과 씨름한다. 몸은 감정을 표현하는 무대로 기능해왔다(“좋은 관계는 좋은 섹스로 표현된다”는 상투적 표현을 보라). 그러나 감정은 성적 상호작용과는 관계없는 것이 되었다.”라는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무한한 자유와 혁명적 남녀관계의 변화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랑과 섹스의 문제가 어떻게 감정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저자는 구체적 사례를 인용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대화와 인터뷰를 직접 인용하며 그들이 겪는 ‘혼란’, 즉 사랑이 왜 끝나는지에 대해 살피는 방식이다.

실제 우리에겐 무한한 자유가 주어질 수 없다. 누구나 평등할 수 없듯 사랑 또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다. 일반화할 수 없는 현대인의 사랑이 왜 끝나는지 궁금하다면 진지하게 시간을 들여 이 책을 탐독할 만하다. 변덕스러운 감정, 신뢰와 불확실성에 처한 연인들은 부정적 관계로서 헤어짐을 택한다. 사랑의 끝은 어떻게 찾아오며 이별의 서사구조는 어떠한가. 현대사회에서 섹슈얼리티는 사랑과 이별에 어떻게 작동하는가. 전 세계 곳곳에서 매일 쏟아지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감정을 이입하고 자기 경험을 돌아봐도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사랑이 끝나는 이유를 책으로 배울 수는 없다. 다만, “‘사랑의 끝남’ 과정 대부분에서 주체가 자신의 가치를 확보하려 홀로 투쟁하도록 버려진 것은 자본주의 사회 때문이라는 논제로 귀결된다. 가치는 서로 다른 네 가지 무대에서 성립된다. 바로 섹슈얼리티화, 소비 대상과 소비 실천, 관계로부터 탈출함으로써 자율성을 긍정하는 능력, 감정 존재론이다. 그리고 가치는 가정 내에서 사랑이 식어가는 그 방식에 의해 끊임없이 의문에 부쳐진다. 그러나 또한 관계를 시작하고 떠나는 행위는 강제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로써 자존감은 갈수록 제로섬 구조에 포획된다. 결국 자아는 섹슈얼리티와 욕망과 소비 정체성과 감정적 확실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 다른 상대에게 깊이 의존할 수밖에 없다. 친밀성과 결혼은 서로 상대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체험된다. 그래서 얻어지는 놀라운 결과는 이별이나 이혼이나 다시금 자유를 회복하는 통로가 된다는 점이다. 대다수 인생에서 가장 아픈 경험 가운데 하나인 이별 또는 이혼은 결국 자유를 되찾을 탈출구가 된다.” 주체적 사랑, 섹슈얼리티, 욕망, 소비 정체성, 감정적 확실성은 사랑이 끝나는 이유이며 자유를 확보하려는 몸부림이다. 동양의 가부장적 문화와 전통적 가족 관계에 익숙한 우리에겐 먼 이야기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사랑은 사랑일 뿐 언젠가 끝나지 않겠는가.

사랑의 본질과 의미에 대한 무관심은 낭만적 사랑과 환상에 시달리게 한다. 그 또한 주체적 사랑의 시작이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이별이 아닌 사랑의 끝에 도달하게 된다.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이 책의 독자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와 현대사회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수십 년간 연구해 온 에바 일루즈의 노력에 값하는 깊이와 통찰로 가득한 책이다. 세심하게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문장들은 단순히 현상을 나열하고 분석을 보태는 정도의 수고만 들인 책과 비교된다. 사랑은 왜 끝나나, 라는 질문에 한 마디로 답할 수는 없어도 자신의 감정과 욕망이 왜 변하는지 한 번쯤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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