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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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 문학 이론의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쉽게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 혹은 ‘우리’의 이야기여야 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소설은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세풀베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고통과 절망의 극단을 경험한 사람들이며 소외된 사람들이다. 우리와 다른 돈과 권력을 가진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TV 드라마처럼 비현실적 낭만으로 사람들을 미혹케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두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미처 알지 못하고 동시대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눈물나게 아름답고 만약 삶에 진정성이 있다면 그들을 통해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한다.

  무려 서른 다섯 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작품집 <소외>는 단편보다 훨씬 짧은 장편(掌篇)소설의 전형이다. 칠레와 아르헨티나부터 스웨덴,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넘나들며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진한 감동으로 풀어 놓는다. 이 사람들은 베르겐 벨젠 유대인 수용소의 돌멩이에 새겨진 글귀처럼 ‘나는 여기에 있었고, 아무도 내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세풀베다는 이 모든 사람들을 살려내고 깨워낸다. <소외>의 모티브가 된 이 한마디가 이 책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작가 의식이기도 하다.

  역사의 중요한 현장에서 악명이든 허명이든 주인 행세를 했던 사람들의 이면에 이름없이 묵묵히 자신의 신념과 삶에 충실했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풀베다는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그 사람들의 고결한 삶과 숭고한 도덕성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살다갔는지 증언한다. 세상의 불의와 억압에 맞서 어떻게 사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소외된 모습에 대한 감동적인 세리모니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는 칠레에서 태어나 공산당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자란다.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붕괴된 후 반독재, 반체제 운동을 벌이다 구속된 후 국제사면위원회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그 후 여러 나라를 거쳐 지금은 스페인에 정착하고 있다. 자신의 삶과 작품을 일치시킬 수 있는 행복한 작가라고 하면 그의 작품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경의가 될까? 신념에 따라 살 수 있는 사람이, 삶이 곧 자신의 신념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루이스 세풀베다는 가장 행복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비달이란 사나이. 비달 산체스. <평생을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다>라는 브레히트의 말이 옳았다. - P. 50 ‘비달이란 사나이’중에서

  탐욕은 항상 눈동자를 찔러 대는 쇠 바늘과도 같다. - P. 113 ‘피츠카랄도의 흔적을 찾아서’중에서

  삶이 짧고 허망한 건 확실하지만, 자존심과 용기가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생명력은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함정과 불행을 견딜 만하게 해준다. - P. 126 ‘엘베 강의 해적’중에서

  자기가 먹을 빵을 스스로 정당하게 벌어서 먹는 사람들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거리나 시간은 아무 상관 없었다. - P. ‘콤파’중에서

  <확실하게.> 나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확실함을 증오한다. - P. 131 ‘침묵의 목소리’중에서

  삶의 아포리즘에 해당하는 세풀베다의 이야기는 극성스럽지도 과장되지도 않는다. 그의 삶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오랜 취재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진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들이 계급간 모순에 대한 대립과 갈등을 야기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그치는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과거의 역사 속에 매몰되어 버릴 수 있는 그야말로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헌사이다.

  아울러 세풀베다의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환경’의 문제다. 그린피스 특파원으로 활약한 적이 있다는 그의 이력을 살펴보지 않아도 그의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진하게 배어있다. 인간이 숨쉬고 살아가는 기본적 토대를 제공하는 자연에 대한 경외는 인간 자체에 대한 소외 문제만큼 우리에게 심각하게 대두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작가의 소임이 단순한 재미와 인㎱?감동에 있지 않다면 세풀베다의 작품에 보내지는 찬사는 분명한 이유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주제와 내용면에서 영미 문학 중심이나 프랑스, 독일 문학이 세계 문학의 전부였던 우리에게 관심과 대상을 넓혀 볼 수 있는 이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만난 그의 작품들을 좀 더 읽어 볼 일이다.


2005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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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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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연애 소설은 영원한 꿈이다.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보다 지독한 사랑을 했어도 연애소설은 여전히 한 인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 그래서 모든 작가들은 연애소설을 꿈꾼다. 그 꿈은 가장 소중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성간의 사랑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방법이 타인에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으며 누구에겐가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문득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연애 소설은 그래서 모든 사람이 꿈꾸는 영원한 유토피아가 된다. 그 곳에는 나이도 없고 현실도 존재해선 안된다. 꿈꿀 권리와 비현실적 투사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어도 상관없다. 비극도 해피앤딩도 다 좋다.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만 있으면 족하다.

  혼자 여생을 보내는 노인에게 연애 소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는 연애의 사소함이 벅찬 삶을 지탱하는 힘으로 나타난다. 고난과 시련의 시작이 연애의 시작으로부터 비롯됐으며, 현실을 닮은 연애소설을 한줄 한줄 음미하는 노인의 삶이 현실 공간의 꿈을 상징하는 소재로 등장한다. 노인과 연애소설의 관계는 그렇게 불협화음처럼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의미하는 장치로 읽어낼 수도 있다. 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짤막한 중편 정도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길이와 무관하게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세풀베다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작품이 될만한 충분한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현란한 수사와 감동적인 표현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문체와 수사적 기교는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수도 있다. 그의 소설이 담아내는 다양한 상황과 아마존 유역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교감 내지 합일이 보여주는 행간의 의미가 훨씬 더 큰 매력으로 느껴진다.

  복잡하고 어려운 구성도 없다. 단순한 구성과 뻔한 갈등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가난한 두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못한 불행을 이겨보려고 아마존 밀림의 개발지역에 정착하지만 아내는 이내 숨을 거둔다. 홀로 남은 남자는 인디오 부족과 어울려 대자연의 가르침을받는다. 그 가르침은 부족이 알려주는 자연의 습성과 생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들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정착촌으로 돌아오지만 읍장으로 부임한 뚱보와의 갈등과 관광온 양키의 죽음으로 노인은 살쾡이를 잡으러 떠난다. 홀로 남겨진 노인은 그 살쾡이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을 도와준다는 구조다. 인간을 죽인 살쾡이를 사냥하는게 아니라 인간이 파괴한 자연이 선택한 길을 따라가는 순응적 역할이 노인에게 주어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 소설의 노인은 자연과 인간의 대결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노인이 아니라 대자연의 일부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교만함을 확인하는 역할을 대신한다. 양키와 정부 당국으로 대표되는 개발과 인간의 폭력은 조화로운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렸고 원주민인 인디오들의 삶의 터전을 파괴했다. 비단 남미의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지국적 환경과 생태의 문제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한다.

  살쾡이와 대결하는 장면에서 보여주었던 환각과 상상은 다소 지루할 수 있는 구조에 색다른 변화를 주며 소설의 완성도를 높인다. 치밀한 갈등과 완벽한 플롯이 아니어도 좋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만을 위한 소설로만 읽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진지한 고민의 시간도 만들어 준다. 생각날 때마다 그의 소설 몇 권을 더 읽고 싶어진다.


200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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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 시인선 309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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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즐거움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작품을 읽는 것이다. 시가 전하는 메시지도 형식도 분명히 말할 수 없이 중요하지만 언어예술로서 본질적인 즐거움은 시어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화려한 묘사와 촌철살인의 재치로 무장한 재기발랄함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긴장감, 그 말들이 연상시키는 이미지, 이미지가 증폭시키는 상상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독자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미식가가 미묘한 혀끝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듯 온 몸 전체로 퍼지는 시의 맛을 음미하는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허수경은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 이후 5년 만에 독일에 건너간지 14년. 고고학자 결혼했고 여전히 고고학 발굴현장에 있는 그녀의 시는 모국어에 대한 찬사를 넘어 모국어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여준다. 그녀에게 모국어는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을 텐데도 전혀 녹슬거나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를 창비에서 펴낸 후 이번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펴냈다. 두 출판사의 색깔이 희석된 후 벌어지는 재미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낯익은 당신

빛인가, 당신, 저 손등 아래 지는 당신, 봄빛인가 당신, 그래, 한 상징이었을지도 모를 당신, 뭉큰, 손에 잡히는 600그램 돼지고기 같은, 시간, 저 육빛인 당신, 혹, 당신 빛 아닌, 물인가, 저 발 아래 일렁이는 당신, 물 냄샌가 당신, 그래, 한 기호였는지도 모를 당신, 덜컹, 덜컹, 발에 잡히는 영상 25도 물 온도 같은, 시간, 저 온탕인 당신, 혹 당신은 물 아닌 흙인가, 저 땅 아래 실은 끓고 있는 바위 같은 당신, 아직 형태를 결정하지 못한, 망설이는, 바위인가, 사방 100킬로 용암의 얼굴 같은, 저 낯익은 당신

  오랫동안 눈길이 머무는 시는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비평가를 위한 시 읽기가 아니라면 편안하게 맘에 드는 작품에 오래 시선을 멈춘다. 고고학적 상상력으로 시간을 넘어선 초월적 대상으로서 ‘당신’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인간의 삶은 그렇게 여전히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무화된 시간 속에 확인하고 싶은 당신의 얼굴이 남아있기만 하다면 생은 계속된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녀에게 중요한 당신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 당신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 보일듯 보이지 않는 ‘저 낯익은 당신’은 누구인가.

기쁨이여

슬픔이여,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물은 적 없었던
슬픔이여
찬물에 밥 말아먹고 온 아직 밥풀을 입가에 단 기쁨이여
이렇게 앉아서
내 앉은 곳은 달 건너 있는 여울가

내가 너를 기다린다면
너는 믿겠는가, 그러나
그런 것 따위도 물은 적이 없던

찬 여울물 같은 슬픔이여,
나 속지 않으리,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을 맞이하는데
나 주저하지 않으리

불러본다, 기쁨이여,
너 그곳에서 그렇게 오래
날 기다리고 있었던가,

슬픔의 껍데기를 쓴 기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
나는 바라본다, 마치,
잘 차린 식사가 끝나고 웃으면서 제사를 지내는 가족 같은
기쁨이여

  이 시를 읽다가 문득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가 생각났다. 슬픔과 기쁨을 분리해서 돌아보지 못한 시야의 확장을 질책하는 슬픔은 기쁨에게 반성을 촉구한다. 그러나 허수경은 기쁨과 슬픔을 자웅동체처럼 한 몸으로 대상화한다. 화자가 직접 슬픔과 기쁨을 상대한다. 물론 이 시에서도 ‘기쁨’이 주된 공격목표(?)가 되지만 슬픔이 없으면 기쁨의 정체성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한다. 기쁨이여 슬픔에게 감사하라. 그런 후 화자에게 손을 내밀라.

  무화(無化)된 시간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면 허수경은 그것에 대한 기억의 집을 짓고 있다. 청동의 시간이든 감자의 시간이든 ‘시간’이 주는 거대함 앞에 고개 숙여 ‘순간’을 살고 있는 인간의 비루함을 질책하는 듯하다. 질책이나 깨우침은 독자의 주관적 판단이나 느낌일 테지만 허수경의 비극적인 목소리가 메마른 울림으로 들리는 것은 아직도 ‘희망’에 대한 그녀의 말 때문이다. 문학과지성사 시집의 맨 뒤쪽 표지는 시인의 육성을 가장 생생하게 들려주는 창이다. 그 창 너머에서 허수경은 말한다.

  “그러나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200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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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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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단단한 것은 때로 크고 거대한 것이 감당하지 못한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물건 앞에 무력하게 쓰려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몸이다. 대하소설이나 장편 소설이 보여줄 수 없는 작고 단단한 결정을 보여주는 것이 단편의 미덕이라면 천운영의 첫 번째 소설집 <바늘>은 높은 성과를 이루고 있다. 신인들의 첫 단편은 의욕과잉이거나 인위적 서사구조가 거스를 때가 많다. 그래서 첫 작품집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우연이지만 2001년에 나온 그녀의 첫 소설집 <바늘>은 천운영을 가늠해 볼만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최근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 최근작을 읽어보지 못해 쉽게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잠깐 쓰다 말 작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늘>은 비일상성으로부터 출발한다. 단편 곳곳에 숨어있는 환각과 혼돈은 의도된 장치겠지만 어렵지도 혼란스럽지도 않다. 표제작 <바늘>에서 보여준 사물에 대한 관찰과 결말에서 보여주는 극적 반전은 읽는 재미를 극대화 시켜준다. 보여주기 소설로서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소설집 전체를 일관하는 주제는 여성성과 욕망이다. 90년대식 여성성이 아니라 2000년식 여성성이다. 무엇이 다른가? 90년식은 여성의 해방을 넘어서 일탈로 나아가고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남성과 여성을 넘어서 한 개인으로서 사회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면 2000년식은 어떤가? 아직 알 수 없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천운영은 분명 다른 형태로 그것들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은 전통적인 지위가 뒤바뀌어 있다. 폭력과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여성의 몫이다. 매맞는 남편과 살인을 저지르는 여성이 등장하고 그 욕망의 극한은 식욕과 성욕으로 대체된다.

  역겨울 만큼 육식에 대한 탐욕을 보여주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일관되게 욕망과 억압사이에서 갈등한다. 지워지지 않는 내면의 갈등은 본능으로 바뀌어 가장 본질적인 식욕과 성욕으로 치환된다. ‘바늘, 숨, 월경, 등뼈, 행복한 고물상’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모습들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눈보라콘, 유령의 집, 포옹’ 등에서 작가는 유년의 기억들과 인간 내면의 미세한 감정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로테스크하다. 이제 우리 소설에서 여류소설가라는 말은 사라졌으나 그들이 보여주는 색깔은 남성과 구별되어야 한다. 관심의 분야와 폭에서 서로 변별점을 가지고 있으며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이를테면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법이 없고 언어의 표현과 기교가 극대화된다. 감각적 문체와 자유로운 말의 향연으로 특징지울 수는 없지만 감성에 대한 접근 방식과 표현하려는 내면의 결들이 훨씬 더 섬세하다.

  <바늘>은 우울한 욕망과 탐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여성 화자들의 담담한 어법을 통해 일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부분들을 표현한다. 차라리 눈감고 싶거나 확인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기분을 언짢게 한다. 작가에게 새로움은 미덕이다. 그 새로움은 내용이든 형식이든 표현방식이든 자기만의 색깔을 가져가기가 쉽지 않다. 그 색깔 속에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천운영의 소설을 몇 권 더 읽어봐야 확인되겠지만 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다만, 묘사와 표현에 지나치게 집중하거나 취재 경험과 자료 수집의 과잉이 드러나는 부분들이 눈에 띄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단편 속에 녹여낼 수 있는 역량의 한계는 감춤과 절제의 미학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숨>에서 보여주는 마장동의 모습은 생생하고 낯설다. 하지만 부분적인 묘사가 지나쳐 흐름을 놓치거나 필요없는 부분으로 긴장을 풀어내는 방식들이 그것이다. 탄탄한 소설 수업의 저력을 보여주는 대목같아 씁쓸하기도 했지만 엉성하고 어설픈 문장보다는 단단해 보인다.

  표제작 ‘바늘’이 보여주는 상징과 여성성에 대한 탐구가 그녀의 소설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지가 흥미롭고 궁금하다. 단편의 힘을 넘어 장편을 통해 보여줄 방법들이 지루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200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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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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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과 상상력은 끝을 알 수 없어 행복하다. 독자는 늘 2% 부족하고 낯선 이야기를 기다린다. ‘傳冊論’을 내세워 세상에 있지도 않은 허황된 이야기로 선비들을 미혹케하는 ‘傳’은 읽지 말아야 하며, ‘冊’은 바른 이치를 깨닫게 해준다고 말했던 홍대용 등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소설 무용론’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가장 건재한 장르는 소설이다.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의 종류도 소설일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재밌으니까.

  김현 선생의 말처럼 현실 원칙과 쾌락 원칙의 ‘금기’ 사이에서 갈등과 억압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적절한 장르는 소설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미디어 매체가 발달한다고 해도, 소설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엄살을 떨어도 활자화된 소설은 여전히 잘 팔리고 재밌게 읽힌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흐르면 또 다른 양상을 보일 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여전히’라는 말을 사용해도 무방할 듯하다. 이렇게 소설이 건재한 이유는 천명관의 <고래>같은 소설이 끊임없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문학동네 심사위원들의 다소 과장된 주례비평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천명관이라는 걸출한 입담꾼이 탄생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기존의 소설작법이나 현대문학의 주된 흐름속에 몸을 담그지 않은 소설가의 탄생은 신선하다. 남진우와 신경숙의 결혼과 무관하게 지나친(?) 상업화와 문단 권력의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문학동네’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천명관은 <프랭크와 나>라는 단편 하나를 써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았고, 뒤이어 <고래>로 10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았다. 별로 권위있는 상은 아니지만 그 이유로 세상에 나온 책이다.

  <고래>는 내용이 형식을 압도한다. 소설은 글이 위주가 된다는 가장 기본적 상식을 뒤엎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철저하게 입말 위주이다. 이문구 선생이나 박상륭 선생의 소설보다 철저하게 입말 위주의 소설이다. 판소리의 창자나 무성영화의 변사만큼 요설적 화자의 이야기에 독자들은 넋을 빼앗길 수 밖에 없다. 그 기괴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밥 때를 놓칠만큼 흥미롭다. 세상에 쏟아져 나온 그 수많은 엽기적인 이야기와 환타지와 무협지로 모자란 것이냐고 묻는다면, 또 다른 종류의 흥미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무려 450페이지 달하는 두꺼운 장편은 단숨에 읽힌다. 화자의 화려한 스토리텔링만으로 지루함을 견뎌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탄탄한 서사구조를 이루어낸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실 가능태의 문제나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질문에 짤막한 대답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멈칫거릴 수밖에 없다. 어쩔 것인가 완벽한 소설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을. 그런면에서 <고래>는 분명한 성과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잠 안오는 겨울밤 머리맡을 책임질만 소설로 손색이 없다.

  <총잡이>, <북경반점>의 시나리오를 쓰다가 소설을 써보라는 동생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아직도 영화를 더 미쳐있는 소설가 천명관. 빚진 것도 책임질 일도 없기 때문에 보다 자유롭고 새롭고 낯선 이야기들을 들려 줄 것으로 기대한다. 적지 않은 나이에 세상에 소설을 내놓은 작가는 살아온 시간이나 쌓여온 세월만큼의 저력을 기대해 본다. 나이에 기대 작품의 수준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미처 발산하지 못한 내공을 기대한다는 뜻이다. 두려움이 없다면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노파와 금복, 춘희가 보여주는 여인들의 삶의 과정을 전근대와 근대, 탈근대로 대표되는 시대 정신으로 읽어내는 것은 도식적인 책읽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와 시대 정신을 무시하는 것도 하나의 축복이다. 진지하고 성찰적인 태도만이 소설의 태도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특별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지나간 시간들을 우리에게 말해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어차피 그것이 우리들의 이야기고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에 대해 질서를 부여하고 정돈하고 엮어내는 방식만을 달리했다는 겸손의 말을 하더라도.

  목적과 실용성을 묻지 않는 책읽기의 즐거움에 빠져 보고 싶다면 소설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번쯤 푹 재미있게 읽어볼 만한 소설이다. 이제 시작인 소설가에게 작은 박수를 보낸다. 박민규와 구별되는 또 다른 소설의 재미를 기대해 본다.


200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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