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은 논증이다 - 탁석산의 글쓰기 2 탁석산의 글쓰기 2
탁석산 지음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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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말하기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생각을 글에 담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즉흥적이고 감정이 앞서는 말하기는 글쓰기보다 훨씬 효과적인 수단일 때가 있다. 하지만 언어외적 요소들이 말의 내용을 좌우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글은 그렇지 않다. 특히 실용적 글쓰기에서 논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소홀하게 여겨진 것이 사실이다. ‘논리적 검증’과 ‘논리적 증거’가 뒷받침 된 설득력 있는 글을 보면 빈틈을 찾기 어렵고 내 생각과 어긋나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신문 칼럼이나 사설을 보다가 ‘울컥’하는 경우가 많다. TV논평도 마찬가지다. 번지르한 말주변이나 화려한 수사로 자신의 주장을 담아내지만 논리는 모호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논거로 변죽만 울리다 끝이 나는 글들이 많다. 감정에 호소하거나 특정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설과 칼럼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신문이 더 이상 훌륭한 글쓰기의 모범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2권은 <핵심은 논증이다>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렇다 핵심은 논증이다. 얄팍한 이 시리즈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싶다. 당연한 이야기들과 명확한 논리를 무시한 글쓰기가 범람하는 시대에 필독서로 권할 만하다. 다만 국문과나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국어교사들이 글쓰기를 가르치기 때문에 이런 면들이 학생들에게 소홀하게 지도된다는 탁선생의 편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논증은 전제와 결론으로 구성된다. 전제는 결론의 근거가 된다. 흔히 말하는 논거가 되는 것이다. 결론을, 즉 주장을 하기 위해 명확한 근거를 내세우는 것이 논증이다. 그렇다면 논증은 어떠해야 할까? 논증의 네 가지 조건이 이 책의 핵심이다. 이 책의 3장을 살펴보자.

좋은 논증의 네 가지 조건

전제와 결론이 관련이 있어야 한다.
전제는 참이어야 한다.
전제는 결론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해야 한다.
반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당연해 보이는 사소한 것들이 실제 글쓰기 상황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들이다. 논술을 포함한 많은 글들이 개요작성 없이, 즉 설계도 없이 지어지는 집과 같다. 물론 일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글들이 그렇게까지 전략적일 필요는 없지만 전문적인 글쓰기에 발을 들여 놓거나 적어도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나 민감한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칼럼의 필자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고 거쳐야 하는 글쓰기 과정이다.

  분량과 상관없이 이 책은 한 명의 멘토를 내세워 글쓰기 전반에 관한 쉽고 재미있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작은 판형과 시원한 편집, 그리고 캐릭터를 이용한 흥미유발, 무엇보다도 분권으로 시리즈물을 만들어내는 ‘김영사’의 얄팍한 상술 혹은 대단한 마케팅 전략이 돋보이는 책이다. 상당히 딱딱하고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내용을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고 이런 방식으로 책을 구성하는 것도 특별한 비법이라고 인정한다.

  논증이란 결론과 전제로 구성되고, 전제와 결론은 반드시 문장이어야 하며, 전제와 결론은 지지하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논증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논증은 논리적인 글쓰기의 기본기를 닦기 위한 가장 기초적이며 핵심적인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잊지 않고 실전에 활용하는 일이다. 실제 상황에서 총을 쏘지 못하면 아무리 해박한 군사학 지식도 무용지물이 된다. 매일매일 벌어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글쓰기 상황을 위해 한번쯤 읽어둘 만한 좋은 책으로 추천할 만하다.

  지독한 몸살감기도 시간이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약발이 떨어진 아침, 환하게 밝아오는 하늘이 부담스럽다. 온몸으로 자신의 인생을 써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건강하고 밝은 하루하루가 지속되기 바랄 뿐이다. 또다시 우리들 몫의 시간들이 미래를 점령하고 있다.


200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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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은 논술이 아니다 - 탁석산의 글쓰기 3 탁석산의 글쓰기 3
탁석산 지음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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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법 개정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게 아니라 배부른 돼지들 몇 마리가 꽥꽥거리고 있다. 그 소리에도 귀기울여야 하나? 민주국가에서는 소수의 의견도 중요하니까? 사학재단을 사유재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아이들을 맡겨왔다. 재단 전입금이 중등의 경우 2%, 대학의 경우 8%에 불과한 학교들이 신입생 선발을 거부하고 학교를 폐쇄하겠다는 말에 지나가던 미친개가 웃었다는 뉴스 속보는 없었을까? 개방형 이사제의 3분의 1에서 4분의 1로 개악되어 통과된 것도 그 효과가 의심스러워 탐탁치 않은데 사학 재단들이 보이는 반응은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더구나 모 정당의 대응방식과 국회에 들고 나온 구호의 내용은 역사에 길이 남으라!
 
  교육에 대해 얘기하라면 4천만가지의 해법이 나올 것이다. 국민 모두가 교육부 장관으로 손색이 없을만큼 전문가 집단으로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태어나서 평생 학교만 다니는 사람뿐만 아니라 한글을 겨우 깨치기 시작하면 학교문제가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모든 것은 대학입시로 통한다. 교육 문제의 본질은 대학입시로 귀결된다. 대학의 서열화, 즉 대학입시 제도의 획기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모든 교육 현안들이 지나간 유행가요 씹다버린 껌만큼 지루하게 여겨진다. 대입제도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삶의 형태를 결정한다.

  2008학년도 입시부터 내신의 중요성이 강화되고 수능에서 표준점수와 백분위 점수가 사라지며 문제은행 제도가 도입된다. 학기별, 과목별 상대평가로 내신 등급제가 도입되어 시행되고 있으며 수능은 과목별 등급만 통보된다. 대학은 수능에서 같은 등급을 얻은 학생들을 내신과 논술로 선발할 수밖에 없다. 점차 독서이력철이 생활기록부에 포함되기 때문에 온 나라가 논술 열풍과 독서 광풍에 시달린다. 한글을 배우면서 부모들의 독서 전쟁이 시작되어 어린 시절의 독서습관을 만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마치 영어와의 전쟁처럼. 매체의 발달과 유초등 학습지, 출판 시장은 활황이다. 상장된 웅진은 떼돈을 벌었고 전통적인 교육열과 자식사랑으로 도서시장은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 지나치게 부정적 시각으로만 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안다.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어떤 방법이 있는가를. 제도 개선이 우선이겠으나 독서와 논술의 문제는 냉정하게 점검하고 판단해야 바보가 되지 않는다.

  탁석산의 글짓는 도서관 3 권은 논술에 관한 이야기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도 미국의 에세이도 아닌 우리 나라 대학에서 만들어낸 돌연변이 변종 논술에 관한 이야기다. 이 논술은 다른 논술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학생과 학부모가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면 가르치는 사람은 자연히 알게된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고 목전에 다가온 입시를 두려워말고 그 실체부터 분명하고 선명하게 파악한다면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산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논술은 논술이 아니다>는 제목의 이 책을 읽으면서 정말 오랜만에 고개가 아플 정도로 끄덕였다. 어떤 책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과 혹은 평소 자신이 하던 짓과 일치하는 부분이나 공감하는 부분에 흐믓해지는 경우가 있다. 구체화 시키지 못했거나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몇가지 부분을 제외하고는 논술에 대한 개인적 견해와 이야기들이 완전히 일치한다. 시원스럽고 통쾌한 마음으로 읽었다.

  주변에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나 예비 수험생이 있다면 무조건 선물하라고 권할 만한 책이다. 200여페이지 밖에 안되지만 우리나라 대입 논술이 어떤 것인가는 모두 담겨있고, 가장 정확하고 쉽게 분석되어 있다. 논술이 논술이 아닌데도 논술이라 떠드는 많은 사람들이 착잡할 것이고 그 거대한 산에 가로막혀 막막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작은 길잡이와 등불 역할을 충분히 할만하다. 논술은 논리적인 서술의 준말이다. 논리적이라는 말은 논증을 포함해야 한다는 말이다. 각 대학의 논술은 논제와 제시문에 모든 논리가 숨어 있고 그것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확인해서 논증을 만들어내면 된다. 사실 공교육에서 짐지고 있는 쓰기 교육이 체계적으로 평소에 이루어지기만 해도 충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늘 이상과 현실의 불협화음 탓이라고 돌릴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책을 읽고 글쓰기 공부를 하는 이유가 대학 입시를 위해, 특히 논술이라는 거대한(?) 목표 때문이라면 학생들은 지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독서와 논술에 대한 어른들의 반성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필독 도서 목록들을 펼쳐들고 책을 팔거나 새물결인지 헌물결인지 하는 단체에서 시행하는 엽기적 ‘독서인증제’에 휩쓸리지 않고 제대로된 삶을 위한 책읽기와 아이들의 생각 키워나가는 바른 글쓰기에 대해 어른들이 먼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나 소설을 쓸 작가가 될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는 늘 쓰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기록이든 아니든 의사 소통과 표현 수단으로서 글쓰기의 중요성을 더 강조할 필요는 없다. 좋은 책과 만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낫다. 한 눈으로는 책을 보고 한 눈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을 우리 모두는 실천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나부터 반성할 일이다.


200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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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들에게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59
최영미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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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를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충분히 빵이 굳어버릴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 굳은 빵에 버터를 바르는 일은 순전히 시인의 몫이다. 그 빵에 버터를 바르지 않고 곰팡이 피도록 방치하다가 음식물 쓰레기로 버리는 일도 시인의 선택이다. ‘너희들’의 주체가 모호하긴 하지만 최영미는 7년만에 시로 돌아왔다. 그녀가 추억하기 위해 돌아왔는지 그녀를 추억하는 독자들을 위해 돌아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외치는 그녀는 <꿈의 페달을 밟고> 이후 다른 일들을 해왔다. 산문집을 내고 소설도 썼으며 번역도 했다.

  <돼지들에게>를 들고 그녀를 들여다본다. 그녀의 돼지들은 누구일까?

  출발 지점으로 돌아온 시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헤아려본다. 시간이 흐르고 때가 쌓인 작품들을 시집으로 묶어내는 의례적인 작업이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꾸준히 시를 쓴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긴장과 날카로움은 무뎌지고 도전과 무모함도 사라졌다. 당연한 일인가. 그래도 시간이 모든걸 말해주지는 않는다. 침묵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없다. 다만 굳은 빵에 버터나 바르며 ‘너희들을 추억’할 뿐이다.

최소한의 자존심

지금은 아니야.
나는 내가 완전히 잊혀진 뒤에 죽겠어.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자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나 일일이 대꾸하고 싶지 않으니까.

  사십대 중반이 되어버린 시인은 인생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사실(fact)뒤에 숨어 있는 진실(truth)이 무엇인가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대꾸하지 않겠다는 말은 생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무덤에서 일어나 대꾸하고 싶지 않아서 죽지 않겠다는, 지금은 아니라는 말은 오히려 그녀의 침묵을 변명하고 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자존심’ 을 생각할 때가 있다. 다만 그 대처 방법은 모두 다르다. 시인은 타인들의 ‘망각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건 자기 스스로 잊겠다는 다짐이다.

인생보다 진실한 게임

돈과 권력과 약물로 오염된, 아무리 더러운 그라운드에도 한 조각의 진실이 살아 움직인다. 그래서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 축구이다.

  2002년 월드컵 광풍이 몰아칠 때 썼을 법한 축구 관련 시들이 3부에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한 편이다. 스포츠를 인생에 비유하는 너절한 시 중의 하나이다. 그라운드에 살아 움직이는 그 한 조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어지지도 않는다. 축구는 축구일 뿐, 인생보다 아름다운 게임이라는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육체와 영혼에 대한 어떤 문답

A : 너, 왜 그 남자랑 못 헤어지니?
B : 난 그 남자의 영혼을 봤거든. 그래서 미워할 수가 없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말하자면 연민의 정이지.
A : 그런데, 도대체 영혼이 무엇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B : 육체를 뺀 나머지지.

  여전히 사랑 타령을 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연민의 정과 영혼에 대해 쉽고 일상적인 통찰이 생길 나이가 됐다고 믿는다. 육체를 뺀 나머지가 영혼이라면 개인의 존재나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들이 독자와 쉽게 소통된다는 면에서 최영미의 시들은 인정받을만하다. 어렵고 난해한 시들이 어지럽게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시들을 독자들은 읽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읽히기 위해 시인들이 시를 쓰지는 않지만 문학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최영미가 거든 성과는 분명하다.

  하지만 <돼지들에게>에서 보여준 시간의 파편들은 퍼즐처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깨진 항아리의 빠진 부품들이 보이는 듯하다. 5부로 구성된 시집은 각각의 다른 이야기들로 겉돌고 있으며 예의 주목할 만한 1부의 긴장감들을 뒤로 갈수록 떨어뜨리는 단점이 있다. 사물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감각적 표현은 시인의 미덕이다. 그마저 없었더라면 하드커버 시집 한 권이 주는 부담이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그녀의 시집을 다시 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2005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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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 6색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인터뷰 특강 시리즈 2
한겨레출판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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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흔히 예술가들의 전유물로 오해하기 쉽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없는 기능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능이 상상력이다. 나는 늘 꿈꾼다. 몇 천억쯤 되는 돈이 있다면 그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하는 상상에서부터 시작해서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굶주린 아이로 살아있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나 마당을 쓸고 있는 상상에 이르기까지 공상에 가까운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상상은 대부분 공상으로 마무리 되지만 ‘꿈’의 의미와 범위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있을 것이다. 앞서 열거한 개인적 공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생산적 상상력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겨레의 인터뷰 특강은 작년의 <21세를 바꾸는 교양>에 이어 올해는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계속됐다. 직접 참석하지 못하고 한 권의 책으로 현장을 떠올리며 읽는 재미도 나쁘지 않았다. ‘교양’에 이어 ‘상상력’이라는 다소 모호할 수 있는 주제와 특강에 참여한 강사들의 강의 내용이 직접 관련을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모든 문제는 개인에게 돌릴 수 밖에 없다. 타인에 의해 상상력이 자극될 수는 있겠지만 대신 생각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통을 나누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한비야, ‘신화의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이윤기, ‘자아실현의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홍세화, ‘새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박노자, ‘과거를 푸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한홍구, ‘문명에서 배우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오귀환의 인터뷰 특강이 이어졌다. 6명의 제각각 다른 색깔들로 채워진 이번 특강은 6인 6색이었다. 김갑수의 사회로 진행되어 앞부분의 짤막한 강의 내용에 대한 청중들의 질의 응답 형식으로 이어져 일방적인 강의와는 달리 현장의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각기 다른 주제가 무지개처럼 뒤섞이진 않았으나 거부감이 들거나 불편하진 않았다. 주제가 다르고 강사들의 공통점을 찾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상상력’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너무나 익숙한 6명의 이야기가 식상할 수도 있으나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할 내용들이다.

  21세기는 불연속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간 구분에 속한다. 시간을 1년 단위로 끊어서 연말연시다 세기말이다 하는 것은 나름대로 정리와 반성의 의미를 지니겠지만 쉼없이 흘러온 시간과 역사 속에서는 별 의미가 없다. 전체 강의 주제에서도 나타나듯이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으며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개인주의와 가족주의를 넘어서 거시적인 안목에서 사회를 조망해보는 고민이 모든 사람들에게 상시적일 수는 없어도 한번쯤 짚어봐야 할 당연한 문제이기도 하다. 큰 틀과 전망 속에 개인이나 가족의 모습도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강의의 주제나 내용이 비현실적이거나 미래지향적이지는 않다. 우리들 생활속에서 미쳐 깨닫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할 수 있는 부분들을 함께 고민해보고 개개인의 삶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지 그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고민해보기도 한다. 그것이 21세기든 22세기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개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평생 고민하며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개인을 위해서든, 사회를 위해서든, 삶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 한 점으로도 찍힐 수 없는 역사속의 개인의 의미를 묻기 전에 사는 이유에 대한 소박한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불편부당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관점이 잘못되었거나 사회가 변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시선과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리 분석될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현상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패러다임 자체의 변화를 원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세상에 대한 다양한 호기심과 개인적 관심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겠지만 그 무한한 상상력과 에너지가 하나로 모아지고 개인과 사회가 어깨 겯고 나갈 수 있는 힘은 우리 모두에게 충분하다. 힘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는 선택과 집중의 문제이다. 공간과 시간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찍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미래의 모습을 조금은 상상할 수 있지 을까? 참 별 쓸데없는 걱정도 다 했던 과거가 있어다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상상해본다.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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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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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형식과 내용 논쟁은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논쟁 자체의 의미를 넘어서 분리 될 수 없는 상보적 관계에 놓여있다. 형식이 중요할 수도 없고 내용만 앞세울 수도 없다. 시든 소설이든 그 형식적 특성과 내용이 어우러질 때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 낸다. 그러나 이런 형식과 내용이 항상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절제와 균형이 가장 높은 예술성을 담보로 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마누엘 푸익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는 형식의 승리다. 소설이 독자에게 전해줄 메시지와 주제를 명확히 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지 않은 것이 타당한가 하는 것은 앞서 말한대로 논쟁의 의미가 없다고 본다. 논쟁 이전에 작가의 특성과 개성에 따라 소설에 대한 태도와 소설 속에 담아내고 싶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 소설은 1973년에 출판된 마누엘 푸익의 세 번째 소설이다. 이번에 번역 출간된 것이 늦은감이 있다. 내용의 파격과 형식의 독특함이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 소설을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성에 대한 묘사와 다양한 욕망의 형태들을 통해 뒤틀리고 일그러진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추악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는 평가가 가능하겠다.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과 이성에 대한 성적 충동을 다룬 소설이 아니었기 때문이거나 우리 문학 풍토에서 한창 떠들썩했던 예술과 외설의 경계에 대한 논쟁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번역이 미루어졌거나 단순하게 돈이 되지 않을 것같아 번역하지 않았을 것이다.

  변태적 성욕에 대한 남자 주인공 레오의 욕망과 여주인공 글라디스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이 소설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결론을 독자에게 제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성장 과정과 이후의 의식의 흐름이 어떤 양상을 띠고 변화하는지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과 내재된 욕망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가 이 소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리둥절한 독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오래전에 봤던 영화지만 왕가위가 그토록 극찬했던 소설 <부에노르아이레스 어페어>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왕가위의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서사 구조의 다양성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곧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같은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감독이라면 - 모든 감독이 고민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 소설과 다른 예술 장르에서 영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백년간 혹은 앞으로 몇 천년간 수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와 유사한 사건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하는 것은 모든 감독과 소설가의 고민일 것이다. 무조건 독특한 방식과 새로운 기법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질 수 있는 용기는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왕가위의 극찬이 아니어도 영화 <해피투게더>를 보지 않은 사람이어도 이 소설은 남미 문학의 또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다만 심장이 약하거나 윤리 교과서를 베고 자거나 천사와 친하신 분들은 읽지 마시기를……

  좁은지 넓은지 비교 대상이 없어 알 수 없는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의 생각과 삶의 모습들은 따로 또같이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속에서도 분명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닌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60억의 생각이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생각조차 얼려버릴 만큼 계속되는 이 추위가 ‘봄’에 대해서 상상이나 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처럼.


200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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