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 - 반민주주의자에 대한 민주주의 재판
박홍규 지음 / 필맥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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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학교 다닐 때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말을 배웠다. 성인의 경지에 오른 철학자가 한 말이므로 무조건 옳다고 믿었고, 그것이 독재 정권의 통치 수단에 교묘히 이용됐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1995년에야 교과서에서 그 말이 사라졌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처라는 이야기와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는 화인처럼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철학의 수호자로서 아테네인들에게 누명을 쓰고 죽은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철학의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아니 지금도 그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좀 더 공부하거나 좀 더 깊게 고민해 볼 일이다.

  하늘이 아니라 땅이 움직인다고 처음 주장하기 시작한 코페르니쿠스의 이야기를 듣는 심정은 어땠을까? 박홍규의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이다. 우리가 ‘이성’의 철학자라고 굳게 믿고 있는 철학의 아버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저자는 차근차근 조목조목 따져나가고 있다.

  최근 많은 교양인(?)들을 위해 백과사전 요약식의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바로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이다. 저자는 우선 이 책을 인용하며 슈바니츠가 유일하게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비판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대화법은 진정한 의미의 대화도 아니고 막가파식 대화법으로 상대방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추궁하는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끊임없이 물어 늘어지는 대화법을 통해 결국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사실 하나를 깨우쳐 줄 뿐이라는 것이다. 알든 모르든 이런 놈을 만나면 말을 하지 않거나 주먹질을 하게 될 것 같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소크라테스 철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물론 비판할 만한 철학도 없는 사상가가 소크라테스라고 말한다. 글 한줄, 책 한권 남기지 않은 철학자를 제자 플라톤의 저술에 의해서 되살려내고 그의 사상을 해석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철인 정치를 주장한 반민주주의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한나 아렌트와 칼 포퍼에 의해 명확하게 구별된다. 그 문제는 두 사람의 저서를 통해 확인하면 될 문제고 이 책에서는 크세노폰의 <회상>, <변론>과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등이 주된 참고 문헌이 된다. 이외에도 그리스의 희곡들과 그리스 민주주의에 관한 투키디데스의 <전쟁사>, 헤로도토스의 <역사>등 충실한 자료 분석을 통해 저자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과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반민주의자다. 이것이 저자의 결론이고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이다. 그의 철학과 죽음에 대한 오해가 2천 4백년이 지나도 바로 잡히지 않고 비민주적인 철학과 철학자들에 의해 추앙되어 온 사실을 비판한다. 그래서 저자는 직접 그리스 아테네를 여행하고 소크라테스가 재판받은 장소를 확인하며 그리스의 하늘과 땅과 그 곳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한 인문주의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에 대한 바로 알기는 이렇게 시작되면서 그의 선언대로 소크라테스와의 영원한 결별을 선언하는 의미의 선언문으로 읽을 수 있다.

  모든 인물이나 사상은 그것이 존재했던 시대의 사회사와 연관지어 하나의 고리에서 바라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 역시 그가 살았던 당시의 아테네 민주주의와 무관하게 다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민주주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운데 소크라테스 재판이 마치 정치적인 희생양을 만든 재판인 양 다루어져 왔다. (본문 42페이지)

  이것을 밝히기 위해 저자는 소크라테스 재판의 의미를 면밀히 검토한 후 가장 많은 부분에 그리스 민주주의의 전개 과정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을 검증하고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대한 분석과 부당함을 제시한 후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그리스 민주주의의 파탄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책을 맺는다.

  책 전체의 논리성은 저자 나름의 방식임으로 문제 삼을 것이 없고 다만 독자의 입장에서 지금까지의 통념을 완전히 되엎을 만한 이러한 주장과 알지 못했던 사실들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들을 읽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에 대한 저자 개인의 경험과 반감은 이 책과무관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사법제도에서 드러나는 전문 재판관의 문제를 그리스의 민중재판 과정을 통해 보완할 수 있으며 - 이를테면 배심원 제도나 참심제도 -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방법론까지 폭넓 현실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전체에 밑줄을 긋는다.

  비판이라는 말은 가치 중립어이다. 비난과 구별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건전한 비판의식과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과 사상의 자유가 밑바탕이 된 사회에서 논의될 수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이제 좀 더 폭넓은 시각과 주장들이 나와 줄 것을 믿는다. 어렵지 않게 소크라테스에게 한발 다가섰다가 그의 실체를 확인하고 두 발 물러서게 만든 재미있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박홍규의 교수의 한마디가 이 책을 정리할 수도 있을 것같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게 주눅(?) 들었던 많은 사람들, 쓸데없는 존경심을 품었던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민주주의 사회였던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언행을 한 소크라테스의 반민주적 행위는 응당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언행 때문에 그가 고발당하고 사형에 처해진 것은 분명 부당한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국가에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회의를 느끼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그리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최선이 존재하지 않는 사횡세서 그나마 차선의 방법이고, 그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도 관용을 베푼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기에 여전히 믿음과 희망의 대상이 될 만하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신념에서가 아니라 반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를 적대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그런 민주주의는 옳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본문 80)


200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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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 무덤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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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더 이상 삶의 진실과 깊은 감동을 담아내는 시대가 올 수도 있을까? 권지예를 처음 만난건 물론 ‘이상 문학상’이라는 권위를 통해서다. 2002년 ‘뱀장어 스튜’로 이상 문학상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그것으로 첨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소설집 ‘꽃게 무덤’으로 두 번째 만났다. 이제는 여류 시인이나 여류 소설가라는 말이 사라졌다. 희귀하지도 특별한 테마만을 다루지도 않기 때문에 그 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졌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깊이와 넓이, 혹은 날카로움과 감동이 무딘 소설 한 권을 끝까지 읽어내는 일은 고역이다.

  9편의 장편을 묶어 놓은 이 책은 예스 24 이벤트에 소 뒤걸음으로 당첨되어 받은 25권의 소설중 하나다. 이제 10여권 남았다. 심심할 때마다 한권씩 빼 읽어면서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고 있다. 서른까지는 소설책은 절대로 돈주고 사지 않는다는 쓸데없는 원칙이 있었다. 그러나 이젠 소설이라고 일부러 안사지는 않는다.

  이 책의 첫 소설과 두 번째 소설 ‘꽃게 무덤, 뱀장어 스튜’ 정도만 읽을만하다는게 개인적인 소감이다. 단편들 사이의 공력이 고르지 못하다. 문장과 표현 주제와 깊이가 제각각이다. 작가에게 있어 소설집이란 한 시대를 혹은 한 시절을 묶는 의미일 것이다. 집중적인 주제와 세상에 대한 색다른 시각은 아니어도 무언가 집요한 정신 세계의 아름다움이거나 화려한 말빨이거나 전혀 새로운 소재이거나 독자의 눈물을 찍어내게 하는 감동이거나 무언가 한가지는 던져야 하는거 아닌가. 내가 무딘 사람인지 몰라도 아무것도 없다. 소설을 읽다 하품을 하기는 오랜만이다.

  권지예의 소설을 가르는 일관된 상징은 물과 불로 읽힌다. 그리고 그 두개의 상징이 결합된 요리가 그것이다. ‘물의 연인’에서 보여주는 세월을 뛰어넘는 남녀간의 사랑은 물과 불의 이미지로 상승과 하강을 통해 만날 수 없는 운명을 전한다. ‘산장카페 설국 1km’는 드라마 단막극처럼 인물들 사이의 갈등보다는 사건에 주목하고 있지만 과정도 결말도 식상하다. ‘꽃게 무덤, 뱀장어 스튜’를 통해 인간 관계의 소통과 의미를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하려는 작가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삶에 대한 권태와 일상속에서 느끼는 말할 수 없는 울림들을 작가는 꽃게와 뱀장어 이미지로 그려낸다. 이어지는 ‘우렁각시는 어디로 갔나, 비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봉인’등은 작가의 일상적 경험을 토대가 됐든 아니든 시간 낭비이다. 소설을 읽고 나서 제일 나쁜 질문이 이것이다. 작가에게 던지는 질문, 그래서?

  아무나 소설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성의 자의식과 결혼 후의 불륜, 가정과 성을 주로 다루고 있는 이 소설집은 가슴도 머리도 적셔주지 못한다. 심하게 말하면 시간이 많이 아까웠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을 통해 권지예의 소설을 분석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가 말하는 우리 소설사에서 새로움에 있어서 비교할 수 없을만큼 가치있는 일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새로움도 없고 그 가치가 어디에 초점을 둔 것인지도 납득할 수가 없다.

  가을 하늘이 흐린만큼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춥지 않은 겨울을 기대하는 헛된 욕망이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푸른 하늘보다 어두운 하늘이 편안할 때가 많다.


200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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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즐거움 - 문화적 교양인이 되기 위한 20가지 키워드
박홍규 외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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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이론 중 마지막 단계가 자아실현의 욕구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자아실현의 욕망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인간을 어떤 존재인지 말해주는 특징이 되기도 한다. 호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육체적 공복감을 채우고 나면 정신적 공복을 채우기 위해 목말라 한다.

  인간이 살아온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면면을 이해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통해 통시적 관점에서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다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면서 공시적 관점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 철학과 예술이 걸어온 길들을 더듬고 나와의 관계를 확인 일, 그것이 교양이 아닐까?

  그러나 교양이 문화 일반에 대한 얄팍한 백과사전식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고급 정보를 습득하고 폭넓은 사유를 통해 그것을 소화하여 내것으로 만드는 소화제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는 점점 복잡해지고 각 분야의 발전 속도는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자고 일어나면 묵은 정보와 지식으로 가득한 현대인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로 지식과 정보에 목말라하며 속도에 대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숨가쁘게 달려간다. 이런 시대에 교양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북하우스에서 나온 <교양의 즐거움>은 현학 취미가 아닌 사람들에게 교양을 위한 작은 지침서 혹은 안내서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잡다한 정보의 지식의 나열을 위한 잡문들과는 종류가 조금 다르다. 한길사에서 2003년에 나온 <월경하는 지식의 모험자들>이라는 책은 53명의 필자가 철학과 인문학, 사회학과 현대 사회의 쟁점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며 그 분야의 권위자들과 대표 저작들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무려 9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책으로 기가 질리게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칼날같은 시선으로 중요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짚어낸 듯 하지만 그 많은 쟁점들을 기억하거나 다시 돌아보게 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교양의 즐거움>은 오히려 작은 책이다. 20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문학, 철학, 미술, 사진, 만화, 사진, 건축, 음악, 영화,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만 혼란스럽거나 잡다하다는 느낌이 없다. 우리 나라 최고의 필력을 자랑한다는 필자들의 소개답게 주제별로 흥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월간 <신동아> 2003년 1월호 별책부록으로 나온 것을 새로 손보았다는 이 책은 편집장의 주문대로 ‘아카데믹’과 ‘저널리스틱’의 중간쯤에서 균형을 잡고 있다는 면에서 성공한듯 싶다. 아무데서나 접할 수 있는 흥미위주의 가벼운 내용은 넘어서면서도 지나치게 학문적인 용어와 접근을 배제하여 일반인들의 욕구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항목별로 그 분야의 역사와 기본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일반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한국적 상황이다. 외국의 번역서는 그야말로 교양으로 그칠 수 있겠으나 이 책은 현재 우리 상황에 접목되고 있는, 혹은 활발하게 논의되거나 진행되고 있는 문제들까지 생각을 끌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국내 학자들의 글이 지닌 장점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다.

  어떤 책이든 한 권의 분량에 20개의 주제를 담아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량의 문제는 감수할 필요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내서와 참고서를 통해 각 분야의 길잡이 노릇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넓이와 깊이를 확보하는 것은 이 책을 읽은 후에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잡다한 지식과 쓸데없는 정보로 머리를 가득채워 그 효용 가치를 논하는 일은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다. 하나의 지식과 교양이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현실 생황에 적용된다는 문제는 사뭇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교양은 실용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으나 사회를 보는 눈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 삶에 대한 성찰을 위한 필요 조건이 될 것이라는 정도로 교양을 정의하면 어떨까 싶다.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다소 애매한 표현은 여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그 준비 단계나 가벼운 몸풀기 정도에 값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신선한 야채로 에피타이저를 즐기듯이 읽기에 가장 적합한 책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본격적인 선택과 집중은 물론 각자의 몫이지만 고개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는 일도 때로는 중요한 일이다. 고개를 너무 높이 들어 하늘만 쳐다보는 일도 문제지만.


200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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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인권
토머스 페인 지음, 박홍규 옮김 / 필맥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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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급 생활자의 세금 부담 증가에 대한 예산안에 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고소득자와 저소득자간의 형평성 문제가 거론되는 것 자체가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세금의 본질적인 문제와 국가 차원의 세수 부족안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확실한 대안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비대해진 공무원 조직과 방만하게 운영되는 공기업, 공룡처럼 거대한 힘으로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정부가 국가의 이름으로 버티고 있는한 문제는 절대로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현대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쟁점이 아니라 몇 백년간 이어져 온 지루하고 식상한 논의다. 다만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세금을 징수하고 사용하는 방법과 철학이 결여된 위정자들에게 분노한 백성들은 정권이 바뀔때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이기적 욕망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며 지금까지 겨우겨우 버텨온 것이다.


국가는 도덕의 힘으로는 세계를 통치할 수 없기에 필요하게 된 하나의 형태다. 여기에 또한 국가의 의도와 목적인 자유와 안전이 있다. - 상식, P. 25


  18세기 후반 인류 역사상 기억될 만한 두 가지 사건을 꼽으라면 미국의 독립(1776년)과 프랑스 혁명(1789년)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페인은 이 두 가지 사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상식>을 썼다. 팜플릿 형태의 글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자신의 주장을 명쾌하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이 뚜렷히 드러난다. 프랑스 혁명을 비판했던 버크에 대한 반론으로 쓰여진 <인권>은 1, 2부로 1791년과 1792년에 각각 출판되었다. 출판 당시 수만부가 팔릴만큼 주목을 끌었으며 페인의 조국인 영국에서는 출판이 영구 금지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상식>과 <인권> 두 권의 합본 형태로 박홍규가 다시 번역한 <상식, 인권>은 그의 설명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작 중의 하나로 평가 받을만 하다. 진보니 개혁이니 현실 정치에서는 되먹지 못한 소리들만 개짖는 소리처럼 처량하게 울려 퍼진다. 이념과 갈등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가장 상식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그들에겐 관심이 없는듯 하다. 아니, 관심이 있어도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결국 그것들을 찾아내고 자신의 권리를 지켜나가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 아니라 국민들 개개인의 몫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뼈아프게 되새기게 하는 책이다.


  국가와 사회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지구상의 대부분의 나라가 군주국이었음을 감안할 때 페인의 팜플릿이 가지는 혁명적 발상과 인간에 대한 성찰은 놀랄만한 일이다.


인간의 평등권이라는 찬란하고 거룩한 권리는(그 기원이 인간의 창조주에게 있으므로) 생존한 개개인에게마나 관련된 것이 아니라, 뒤를 잇는 사람들의 세대와도 관련된다. 각 세대는 그 앞서간 세대와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그와 같은 원칙에서 각 개인은 그 동시대인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 - 인권 1부, P. 134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겨우 마칠 정도의 정규 교육을 받은 것으로 확인되는 페인의 저작은 그의 사상과 당시 역사와 사회를 관통하는 지적 능력을 통해 볼 때 엄청난 독서와 사색을 통한 반성적 사고를 통해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사고 방식과 국가와 인권의 문제를 이렇게 통쾌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은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현재적 관점에서 개혁과 혁명을 논하고 그 태도를 살펴보는 책은 이제 차고 넘친다. 그러나 페인이 살던 18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물론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 루소같은 사상가를 통해 사회계약론과 같은 새로운 사상들이나 지적 성과물이 제시되었던 시기이기는 하지만 현실 정치의 문제를, 특히 미국과 영국의 비교를 통해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에 나타난 정신을 이렇게 정확하고 명확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선언하고 있는 저작은 찾기 힘들 것이다. 다소 거칠고 투박한 논쟁적 문체가 걸리기도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의 빛나는 정신을 가릴 수는 없다.


자연권은 인간이 존재하는 데 따르는 권리다. 이런 권리에는 모든 지적 권리와 정신적 권리, 그리고 타인의 자연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권리가 모두 포함된다. - 인권 1부, P. 138


  인권은 자연권이다라는 말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인권이 자연권이었던 시기가 있었을까? 다시 한번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가치나 목적보다도 우선시 되어야할 인간의 기본적 권리들이 지금도 논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페인의 사상과 주장이 유토피아적 환상과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얼마든지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 자연스럽게 형성된 사회의 구성원들이 합의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개혁의 권리는 근본적 성격에서 국민에게 있고, 그 합헌적 방법은 그 목적을 위해 선출된 전국적 집회(공회)에 의해 개혁이 추진돼야 했다. 타락한 기관이 스스로 개혁한다는 생각 자체에 모순이 있었다. - 인권 1부, P. 146


  그러므로 언제든 국민들은 정부와 정치를 개혁할 합법적 권리가 있다. 정치개혁은 주체는 그래서 언제든 국민의 몫이지 정치가의 몫이 아니다. 잘잘못을 바로잡고 보다 살기 좋은,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토대는 대다수 국민들의 몫이다. 일부 부유층과 권력이 자기 것인양 착각하는 기득권층의 논리가 아니라 이 땅의 민중들의 목소리가 국가와 정치라는 형태로 실현되는 것이 올바른 사회라는 이야기다.


정치의 세계에서 개혁이 불가능한 부분은 없다. 모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혁명의 시대의 특징이다. - 인권 1부, P. 217


자유는 지구 어디서나 박해를 받아왔고, 이성은 반역으로 간주되었으며, 공포의 노예가 된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했다. - 인권 2부, P. 230


  개혁과 혁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개념의 차이를 떠나 속도와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신체의 자유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들을 짚어내자면 끝이 없다. 부정적 사고가 아니라 건전하고 비판적 사고는 끊임없는 이성의 계발과 차가운 자기 반성의 토대위에서만 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불가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 인권 2부, P. 247


헌법은 국가의 소산이 아니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소산이다. 따라서 헌법 없는 국가는 권리 없는 권력에 불과하다. - 인권 2부, P. 269


  인간의 위대함은 ‘불가능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는’데 있다고 믿는다. 고전속에 파묻힌 케케묵은 망령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쉬는 이 뼈아픈 진리와 선언들을 되새겨 둘 만하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유를 바라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단순히 달콤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위해 존재하는 금언으로 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불행과의 접촉이 연민의 본질이다. 이 주제를 거론하면서 나는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어떤 결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승패를 초월한 고결한 긍지로써 나는 인권을 옹호한다. - 인권 2부, P. 313


  시대를 앞서간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에 대한 평가는 각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우리가 오늘 다시 만날 수 있는 토마스 페인의 <상식, 인권>은 잡다한 논의를 뒤로 한 채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정부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하는 역작이다. 나와 국가, 나와 정치와의 관계를 고민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 옮긴이 박홍규는 페인을 ‘세계의 자유주의자’라고 평가한다. 그 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사상과 삶은 숭고하다.


“자유가 없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유명한 페인의 말은 “자유가 있는 곳에 내 조국이 있다”는 프랭클린의 말에 대한 대답이었나, 바로 그 말이 단순한 미국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세계의 자유주의자인 페인의 삶과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 옮긴이 해설, P. 387



200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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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창비시선 250
노향림 지음 / 창비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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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가는 해와 오는 해 사이

묵묵히 고개 숙여 수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행복이 자갈돌들로 깔려서

반짝이며 있는 곳

아이들이 무성생식(無性生殖)의 열매 같은 젖망울을 내어놓은 채

제기차기를 하며 한가하게 놀고 있는

근심 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


  생의 한 가운데 서서 받은 편지들을 꺼내보는 일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어느 한 구석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가만히 그대로 놓여있는 편지들을 생각했다. 이메일 편지함 속 열자마자 닫아버린 편지들의 간격을 헤아려 보았다. 사는 일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마다 사람들은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누구에겐가 친밀하지 않아도 마음을 털어 놓거나 한숨을 쉬고 싶어하는 것이다. 때때로 그 빛깔과 상관없이 하늘을 쳐다보는 것처럼 ‘근심없는 카드 한 장의 빈 터’에 앉아 쉬고 싶거나 그 빈 터를 멀리서 바라만 보고 싶은 것이다.

  노향림의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는 깊은 울림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그 울림은 사물에게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세심한 관찰과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흔히 서정시라 명명하는 것들에 대한 찬사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것은 노향림에게 모두 바쳐져도 지나치지 않는다. 언어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시인중의 하나다. 그만큼 탁월한 감수성과 언어의 명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아는 시인이 노향림이다. <눈이 오지 않는 나라>, <그리움이 없는 사람은 압해도를 보지 못하네>,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등 그의 전작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서정시의 모범 답한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지나친 감수성과 말재주는 오히려 시인에게 해가 될 수 있으나 노향림은 그 위험성을 극복하고 있다.

  시에 있어 서정(敍情)이란 서경(敍景)의 다른 이름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는 시인이 노향림이다. 그의 시에선 종소리가 들리고 눈이 부시게 빛나는 햇살을 만나며 폭설의 아름다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 모든 풍경들이 소리와 빛깔로 빛난다. 무색 무취의 기막힌 물맛을 길어올리는 샘과 같다.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맑아지고 눈이 깨끗해지며 아름다운 풍경화를 들여다 본 느낌이다. 이 시집은 그 맑은 서정으로 빛난다. 

  한 권의 시집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와 느낌이 제각각이겠지만 사소한 이름으로 불려진 주변 사물들에 대해, 낯익거나 낯선 장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감각하며 호흡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닐까. 때로 힘겹거나 우울하거나 기쁘거나 환호하고 싶을 때, 생의 한 순간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을 때 그 기억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서정시의 역할은 아닐까. 마음의 바람결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는 낯설지 않은 풍경과 가슴 한구석의 뭉클함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서정시를 읽는 이유다.

  긴 수식과 화려한 포장을 뜯어내고 잠시 눈을 감고 생의 구차함을 잊어버리는 환각 효과를 위해 시를 읽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렇게 똑같은 자세로 앉아 두통을 앓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과 신선한 향기같은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우리가 시에게 바라는 일은 없다. 그러니 무거운 책임과 가벼운 소홀함 사이에서 물방울을 튀기듯 잠시 깔깔거리거나 먼 데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양수리의 저녁

물안개 핀 양수리의 저녁
바람이 수척한 풀들을 강쪽으로 밀어낸다
가두리 양식장의 노인은 돌아오지 않고
갇힌 물 위를 낮게 낮게 나는 새들의
몸에선 프로펠러 소리가 난다
몇 마리는 소리없이 날아가
바위 틈에서 곁눈질을 한다
창백하게 질린 수은등이 납빛 얼굴로
포복하는 저녁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물비늘 냄새를 터는 너는
돌아오지 않는다
물 위에서 반짝이기만 하는 시간들
단 한발짝도 건너오지 못하는
이 먼 그리움



200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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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1 19: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6-11-01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오늘에서야 이사가 끝났습니다. 좋은 이웃들 많이 만나 한 수 배울까 싶습니다. 놀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