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세계를 뒤흔든 선언 1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스물아홉 살의 청년 맑스와 스물일곱 살의 청년 엥겔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을 발표한다. 혁명의 해를 기억하기 위해 나는 ‘이판사판’으로 그 해를 기억했었다. 150여전에 발표된 선언의 혁명 정신과 계급 의식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유효하며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의미를 간직할 것이라고 믿는다.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공장체제로 인한 인간 소외는 <선언>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며,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는 맑스의 말은 <선언>의 기초가 된다. 역사 발전 과정 속에서 문제는 늘 행동과 실천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침묵하는 대중에게는 언제나 행동하는 혁명가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불안정을 경제적 불평등과 자본의 소수 집중의 문제로 보았던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선언>을 시작했으며,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선언>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맑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맑스는 인간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그의 삶을 요약한 것처럼 인류의 삶에 결정적 <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1917년 혁명가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현실로 나타났고 뒤이어 마오에 의해 중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구 유럽에서 도미노 현상처럼 실현되었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우리는 마지막 공산주의 혁명가로 기억한다. 선언의 현실은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와 1인 독재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이전의 상황보도 훨씬 더 지독한 고통을 인류에게 안겨 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두 번째 세계 혁명의 해였던 1968년의 실패 뒤로 맑스주의는 대학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제는 학문의 영역으로 남겨져 버린 느낌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둘 다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확신 속에서 <선언>은 작성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로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을 증대시킬 것이다.”라는 핵심 실천 강령을 통해 노동자 계급에게 <선언> 되었다. 원문에 나타나는 당시의 노동 계급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분명했고, <선언>의 대중성과 선동성은 지금까지의 어떤 다른 선언과도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이십대의 청년 맑스의 상징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평생을 이 선언에 대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한 것이 <자본Das Kapita>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혁명과 선언이라고 하기엔 그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유지 되는한 그의 선언은 언제나 유효하다고 믿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감추는 일을 경멸한다”고 원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맑스는 혁명을 역사 발전의 필연 법칙으로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견해를 밝히고 “현존하는 사회 ․ 정치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혁명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선언 당시 혁명은 좌절되었으나 맑스와 그의 영원한 동반자 엥겔스는 한번도 역사 발전의 필연적 법칙을 의심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시켜주고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혁명의 현장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선언>은 혁명으로 가는 길만을 보여줄 뿐, 혁명 이후의 정치나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래서 위험하고 선동적인 인식되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뒤흔든 <선언>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가장 급진적으로 드러낸 문서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언>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도 나는 개인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맑스가 제시한 꿈을 더 좋아한다. 그가 말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진정한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회제도나 경제 체제의 변화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맑스가 다시 살아나 오늘의 세계를 돌아본다면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불평등한 노동자 계급과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노동 현장에 투입되는 제 3세계의 현실을 맑스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계급 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할까 <선언>의 원문 마지막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극한 대립을 조장하는 선전선동의 구호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울분에 호소한 말이다. 인류가 역사 발전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면, 맑스의 <선언>이 더 이상 과거의 추억(?)이 될 수 있다면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하는 헛된 상상을 하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불평등한 현실을 들여다본다.

  해제를 쓴 고병권의 마지막 평가로 이 책의 의미를 대신한다.

  나는 선언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은 위험한 책이자, 생산하는 책이며, 미래의 책이다. 그것은 위험한 복음이자, 혁명-기계이며, 영원회귀하는 유령이다. 하지만 누군가 하나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책’이다.



200507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논쟁의 대가들 - 역설과 위트, 논리와 상상력의 39가지 철학우화
로베르토 카사티.아킬레 바르치 지음, 이현경 옮김, 김영건 추천 / 열대림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또 복권 당첨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사람들은 당첨될 확률을 수학적으로 계산하거나 거기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과 노력이 헛됨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면, ‘거꾸로시’의 시민들은 필요할 때 즐겨 복권을 산다. 거의 모든 복권이 1유로에 당첨된다. 물론 돈을 잃을 경우도 있으며 최대 백만 유로를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될 확률은 ‘똑바로시’의 시민들이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만큼 적기 때문에 누구도 걱정하지 않고 복권을 산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세상을 조금만 뒤집어 생각하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 가득한가.

  로베르토 카사티와 아킬레 바르치는 사회과학과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로 이 책의 내용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의 ‘라 스팜타’지에 실렸던 우화들이다. 전체 8라운드의 논쟁 주제들로 묶어 각 주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생활속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등장 인물은 ‘그’와 ‘그녀’ 그리고 ‘참견쟁이’ 셋이 대부분이다. 셋은 끊임없이 의견 충돌을 일으키며 서로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논쟁을 주도한다. 사고하는 주체에 대한 논쟁, 의식과 정체성에 대한 논쟁, 삶에 있어 우연성이 주는 논리적 가능성에 대한 논쟁, 시간과 공간에 관한 논쟁, 언어와 실재, 언어철학과 형이상학에 관한 논쟁, ‘대다수’라는 용어가 가진 모호함에 관한 논쟁, 논리적 역설에 관한 논쟁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논쟁의 대가들>이 서 있다. 그 대가들은 우리 모두의 참여를 기다린다.

  여기에는 어려운 철학적 용어도 관념의 세계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지금까지 가져왔던 모든 편견과 습관적으로 부딪혔던 문제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충고한다. 날짜 변경선과 적도가 만나는 지점으로 여행을 하거나 단 한명의 완벽한 표본이 가지는 여론 조사가 얼마나 위험한 지 보여주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숨어 논리적 오류들을 교묘하게 철학적 주제와 연관 짓는다.

  하루하루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문제 상황들 속에서 얼마나 이성적이고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사건과 사물을 명확하게 인식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끊임없는 지적 훈련과 사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 훈련 과정이 우리의 교육과정 속에는 없다. 그래서 감성적이고 무의식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판단과 오류가 우리들 생활 곳곳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습관적인 사고 방식의 틀을 벗겨주는 재미있는 ‘철학 교과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만하다.

  어렵고 딱딱한 주제와 낯선 용어가 주는 거부감을 없애주면서 자연스럽게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를 들어 ‘위약효과(placebo effect)’를 눈치챈 환자와 약사와의 대화를 통해, 예측 불가능한 방문의 가능성에 대한 대화를 통해 생활속의 논리적 오류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논쟁과 논쟁 사이에 불필요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생각 상자를 통해 다시 한번 관점을 설명하고 핵심을 유도한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무감각한 오류를 일깨워 논리와 상상력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그 방법으로 끊임없는 역설과 위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게 상황속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지닌다.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혹은 머리 아픈 수험생들도 39가지의 철학우화중 한편을 가볍게 읽어내는 것으로 시원한 이성의 휴식을 가져 볼 수 있겠다.

  세상에 쏟아지는 수많은 철학 서적과 인생에 관한 허다한 책들 속에서 보물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내 입맛에 맞는 스타일과 방법을 제시하는 책을 고르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논쟁의 대가들>이 최상의 책은 아니지만 분명 색다른 신선함을 준다는 사실에는 동의해야 할듯 싶다.



200507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맬컴 X vs. 마틴 루터 킹 - 다르지만 같은 길 1
제임스 H. 콘 지음, 정철수 옮김 / 갑인공방(갑인미디어)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겨우 몇 십년전에 일어난 야만적인 미국의 일상사에 대한 고찰이다. 이 책은 두 인물을 통해 과연 미국의 전통과 가치가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게 하며 한 인간의 삶이 어떻게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종과 종교, 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교묘한 형태로 여전히 존재하는 이 시대는 과연 그들이 살았던 시대보다 나아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맬컴 X와 마틴 루터 킹의 삶은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남부 중류층에서 태어나 박사 학위를 받고 흑인 교회 목사로 흑인 민권 운동에 투신한 마틴은 비폭력 통합 주의를 표방한다. 반면 빈민가의 상징으로 백인에게 강간당한 외조모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붉은 피부색을 지닌 맬컴은 철저한 폭력적 분리주의를 내세운다. 미국의 자유와 민주적 가치를 믿었던 마틴과 백인들의 차별에 폭력으로 저항할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던 맬컴의 가치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 ‘아메리칸 드림’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마틴의 통합주의적 입장과는 반대로,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흑인 대중”들의 관점에서 미국을 바라본 맬컴 엑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절대 다수를 위해서 악몽이라는 이미지에 호소하며 미국의 사회정치적 현실을 묘사했다. (본문 75페이지)

  같은 시기에 미국의 아프리카계 흑인들을 위해 민권 운동을 펼쳤으나 전혀 다른 방법과 이념을 가졌던 두 사람은 미국이라는 가치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만을 위한 자유와 민주주의는 백인 우월주의로 나타났으며 이에 대한 극복은 두 사람에게 운명처럼 다가왔고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바탕으로 상호 보완적 관계를 이룬다. 단 한번 만났던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두 사람 다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틴의 ‘통합주의’ 철학의 핵심은 “사람들은 종종 서로 미워한다. 서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두려워한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 잘 모른다. 소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소통할 수 없다. 서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본문 72페이지)”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된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백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마틴은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에 비해 맬컴은 북부 빈민가 흑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

  남북전쟁 후 1870년, 링컨의 수정 헌법 15조에 의해 흑인에게 투표법이 주어졌으나 ‘짐 크로(Jim crow)’법에 의해 ‘분리는 하되 평등은 하다’는 흑인 분리(차별) 주의가 흑인의 90%가 살고 있던 남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정착된다. 20세기 초부터 벌어진 흑인 민권 운동은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한 법적 투쟁부터 시작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등으로 촉발된 실생활의 차별적 행위들에 대한 폭넓은 범위의 투쟁이었다. 두 사람은 이 시기의 미국의 참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마틴의 신학이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흑인과 백인이 사랑 넘치는 공동체를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얘기했다면, 맬컴의 신학은 엄격한 정의와 단호한 처벌 그리고 신이 백인종 전체를 절멸시킬 것이며 그리하여 평화와 선의의 세상을 모든 백인 가운데에 세워주리라는 희망을 강조했다. (본문 266페이지)”

  일라이저 무하마드의 이슬람 종교에 의지해 대중앞에 나선 맬컴은 결국 그와의 결별 이후 마틴의 주장과 흑인들간의 통합과 연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 암살 당한다. 맬컴 암살 이후 마틴은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미국의 절대 가치로 믿었던 자유와 인권을 바탕으로 한 인류애의 가치에 회의를 갖는다. 미국은 “평화를 얘기하면서 전쟁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색인종과 여성, 어린이들에게 무차별 폭격을 하는 모습은 베트남에서 여실히 목격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됐던 인종주의 정책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 사회를 초토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문 388페이지)” 베트남전을 통해 마틴은 “베트남에서 적군 병사 한 명을 죽이는 데 50만 달러를 쓰면서 자국 내의 가난한 시민에게는 단돈 50달러만 쓰는 나라”를 인식하고 미국은 자신의 도덕적 모순에 의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미국의 이러한 이율 배반적인 모습은 걸프전과 최근의 이라크 침공등을 통해 아직도 변하지 않는 일관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교언영색하는 미국의 참모습이다.

  “어떤 입장에서 흑인 문제를 바라보든, 그러한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죽음의 위협과 마주합니다. 이는 ‘비폭력적인’ 킹 박사나 소위 ‘폭력적인’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맬컴의 죽음 이후 비로소 마틴은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에서 급진적으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맬컴이 꾼 악몽의 공포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본문 351페이지)

  이러한 마틴의 변화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른다. 맬컴과 마틴처럼 혁명적인 예언가들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대개 그들이 끊임없이 변화시키고자 노력했던 그 힘에 의해 살해당한다. 맬컴 액스는 그가 사랑했고 자기혐오에서 해방시키고자 노력했던 흑인 집단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마틴 킹은 그가 사랑했고 인종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만들려고 노력했던 백인 집단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미국은 그때와 많이 다른가? 한반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나라가 되어버린 미국의 가치와 본질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목이다. 두 민권 운동가의 삶은 시대를 넘어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불평등한 가치를 극복하기 위한 거울이 될 수 있겠다. 늘 그러하듯이 이념이 아닌 순수한 동기와 가치에서 비롯된 헌신적 노력과 행동들이 작은 변화를 만들며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꾼다는 믿음은 나만의 것이 아니길 바란다.



200507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팜므 파탈 - 치명적 유혹, 매혹당한 영혼들
이명옥 지음 / 다빈치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예술의 지향점은 늘 현실 밖에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사회적 윤리와 도덕 속에 결합된 미술과 음악 그리고 문학은 지루함을 견딜 수 없게 한다. 정신적 순결함과 고결함을 느끼게 하는 수많은 작품들을 폄하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의 본질은 현실에서의 일탈이 아닐까 싶다. 반영론적 관점에서 보이지 않는, 보려고 하지 않는 현실의 모습들을 들춰내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기능이라면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내면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품들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아왔다.

  프랑스어 ‘숙명의 여인, 운명적인 여성’쯤으로 어원을 해석해볼 수 있는 ‘팜므 파탈(femme fatale)’은 매우 흥미롭다. 지은이 이명옥은 주제 선정의 탁월함을 내용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심리학이나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는 주제를 그림속에 나타난 여성들을 중심으로 편안한 설명과 함께 그림을 읽어주고 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그리고 흥미를 가지고 그림 감상 능력이라는 덤도 얻는다.

  ‘유혹은 사랑보다 숭고하며, 쾌락은 죽음보다 강렬하다.’는 선언으로 책은 시작된다. 인간의 본능에 해당하는 유혹과 쾌락에 대한 정의가 선정적이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해 지옥으로 빠뜨리는 악녀, 남성을 섹스로 유인해 파멸시키는 탕녀가 바로 팜므 파탈이다.”는 작가의 정의는 사람들이 왜 ‘팜므 파탈’에 열광하는가를 “현실 속의 여자에게서 해소할 수 없는 끈끈한 욕망을 매력적인 팜므 파탈에 투영했다. 윤리 도덕을 뛰어넘고 싶은 은밀한 갈망을 팜므 파탈을 통해 충족시켰다.”고 분석한다. 타당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증오심, 공포와 욕망이 뒤범벅이 된 남성은 지옥 같은 고통을 겪는다. 사디즘과 마조히즘, 갈망과 거부, 쾌락과 죽음. 이 모순된 남성의 심리가 여성에게 반영되어 아름답고 사악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이다.

  잔혹, 신비, 음탕, 매혹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가지고 살로메부터 해밀턴 부인에 이르기까지 주인공들의 생애와 특징, 다양한 화가들의 그림들을 소개하며 ‘팜므 파탈’에 대한 19말의 들불처럼 번진 현상들을 설득력있게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19세기 말인가에 대한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19세기 이전의 요부들은 비록 아름답고 요염하지만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지 않았다. 또한 사회 전반에 걸쳐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다. 한 유형이 고착되기 위해서는 판에 박힌 이미지가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야한다. (본문 182페이지)

  이러한 현상들이 지금은 광고와 영화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로 재생산되고 있다. “19세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팜므 파탈의 이미지는 오늘날 광고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을 상품화한 섹시한 여인상을 형성하는데 독특한 기여를 했다. 도발적이고 선정적인 자태로 남성을 유혹하는 팜므 파탈은 환상의 사랑이 실제 사랑보다 훨씬 강렬한 감정이요, 자극적인 것임을 증명한다.”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고 속도감을 더해 가면서 유혹과 쾌락도 가속도를 더해간다. 더욱 강렬한 생의 자극이 필요한건 현대인들만의 속성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치명적인 유혹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랑’과 결합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까?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여인들을 도덕적 잣대와 윤리적 속성으로 판단한다면 전부 손가락질을 대상일 뿐이다. 하지만 신화나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유명세와 상관없이 현실 속에 숨어 있는 다양한 형태의 ‘유사 팜므 파탈’에 대해, ‘팜므’는 아니지만 치명적인 그 모든 ‘유혹’들에 대해 갈등하게 되는 것은 ‘파탈’일지도 모른다.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화려하고 매혹적인 책이 될 수 있음에도 색지를 넣은 듯한 지나친 디자인으로 오히려 혼란스럽고 품격을 떨어뜨린 단점을 지닌 책이기도 하다. 미와 교코의 <성의 미학>에서 다룬 폭넓은 주제와 달리 ‘여성’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집중함으로써 전달 방식은 분명하고 선명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러나 ‘팜므 파탈’이라는 주제가 19세기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문학과 미술에서 비롯된 요부형 여성을 일컫는 말일지라도 ‘동양’의 여성들이 제외된 아쉬움이 크다. 
 
200507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쨍한 사랑 노래 문학과지성 시인선 300
박혜경.이광호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장 맨 왼쪽 위부터 항상 ‘문지시인선’을 꽂아 놓는 버릇이 있다. 이사할 때마다 시집들의 위치는 변함없이 가장 윗자리를 내주는 셈이다. 1권 황동규의 <나는 바뀌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부터 며칠 전에 도착한 301권 오규원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까지 시집들을 훑어보며 시간의 무게와 변화를 가늠해 본다. 얼마쯤 될까 세어보니 111권이 꽂혀 있으니 세권 중 한권은 사서 읽은 셈이다. 그 뒤에 기대 서있는 창비와 민음사, 세계사의 시집들이 내 청춘의 많은 부분들을 채우고 있다. 내 영혼의 팔할은 시집이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녀와 첫 데이트 약속 장소는 교보문고 시집 코너였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이성복, 그 여름의 끝, 86권)” 그렇게 그녀를 만나기 시작하던 90년에 100권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가 출간되었다. 오규원의 <사랑의 감옥(102권)>을 그녀에게 선물했고, 몇 년후 그녀는 내게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119권)>을 선물했다. 그리고 97년 봄, 책장에는 여러권의 같은 시집들이 나란히 꽂히는 것과 동시에 기념이라도 하듯 200권 <詩야 너 아니냐>가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열매’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을 기념하여 300권 <쨍한 사랑 노래>가 나왔다.

  “모든 사건은 밤에, 안개의 살갗처럼 움직인다. 너는 나의 미로다. …… 지금에 와서, 나는 너를 희망이었다고 되새긴다. (첫밤, 채호기, 밤의 공중전화(201) 중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시리즈 300권을 기념하여 출간된 <쨍한 사랑 노래>는 황동규의 시를 표제로 해서 201권 채호기의 시집부터 299권 이성미의 시집까지 한 편씩을 고른 선집의 형태를 띠고 있다. 100권, 200권 기념도 마찬 가지였으나 이번에는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을 중심으로 그 의미가 깊다. 순수 참여 논쟁의 복판에서도 묵묵히 우리 현대시의 무게 중심을 흩뜨리지 않으며 시의 본령을 지켜온 것이 ‘문지 시인선’이다. 황동규, 오규원, 정현종, 황지우, 김광규, 기형도, 최승자, 김혜순, 장석남, 황인숙, 김준태, 김영태, 이성복, 나희덕, 김기택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인들을 만났고 그 시인들의 다음 시집을 기다리며 이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삽십대 중반이 되었다.

  문학에 처음 눈뜨고 정호승, 이승훈, 김지하, 박노해, 정희성, 김용택, 신경림, 곽재구, 조태일, 양성우, 하종오, 임영조, 김남주, 함민복, 최승호, 김정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인들의 좋은 작품들이 내 안의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우던 시절이었다.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과 삶의 진정성에 대한 숱한 불면의 밤들을 함께 한 시인들이었다. 문지와 창비는 그렇게 정신의 두 다리처럼 한발 한발 나와 함께 어깨 겯고 나아가는 동지와 같다. 그렇게 나를 키운 시와 시인들은 ‘사랑’을 만들어 주었고, 우리 둘은 모두 학생들에게 그 때 읽었던 시와 시인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집들 속에서 아이들이 자란다. 손때 묻은 책들이 아이들을 키울 것이고 시간은 또 그렇게 흘러갈 듯 싶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 (뼈아픈 후회,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220) 중에서”가 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슬픔이 다하는 날 나는 길모퉁이에서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을 떠나보내며 아름답게 죽어가리라 그런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고 담벼락 (내 영혼의 마지막 연인, 김태동, 청춘(224) 중에서)”에 낙서하는 심정으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함께할 수 있는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책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은 상상력의 종말을 뜻했다 (청춘, 박용하, 영혼의 북쪽(236) 중에서)”고 선언한 시인의 말이 부정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닻을 내린 정신, 그것은 한국이란 말처럼 욕되었다”는 지나칠 수 없는 현실들에 딴지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으면서
서로를 알았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야
이 말에 소금인형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 그녀에게서 몸을 빼다 (김윤배, 부론에서 길을 잃다(258)

  군더더기 없이 사랑에 대한 담백한 선언들과 감성의 떨림을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영원히 지속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세상에 대한 열정이 시와 문학의 힘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람이 사랑 속에서 사랑하는 것이다. (꽃은 어제의 하늘 속에,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275) 중에서)”라고 말하는 시인의 말에 동의할 수 있도록 훈훈함이 세상에 가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때로 삶이 힘겹고 고통스럽겠지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시의 힘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젖다 다시 홀로 스스로의 길로 걸어 돌아갈 때 언뜻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우면서도 삐걱거리는 외로움을 마음에 새겨두라. (무인도, 박주택, 카프가와 만나는 잠의 노래(287) 중에서”는 말을 깊이 새겨 둔다.

  멀지 않은 곳에 죽음이 당도해 있다. 짧은 생에 대한 소망과 통찰은 모두 다른 형태로 실제 생활에 투영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환희와 고통, 행복과 절망을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가끔 켜켜이 먼지 앉은 옛날 시집을 펼쳐보는 순간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겠다.


200507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